title : The Work(Interests) of Jesus 예수의 일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2:19-24
date : June,14, 2020
19.I hope in the Lord Jesus to send Timothy to you soon, that I also may be cheered when I receive news about you. 20.I have no one else like him, who takes a genuine interest in your welfare. 21.For everyone looks out for his own interests, not those of Jesus Christ. 22.But you know that Timothy has proved himself, because as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the work of the gospel.
23.I hope, therefore, to send him as soon as I see how things go with me. 24.And I am confident in the Lord that I myself will come soon.
SUMMARY
Jesus is a curse to those who try to use Jesus to fulfill His desires without accepting His words. The “the Day of Jesus ” or “the Day of Christ” referred to in Philippians refers to the day when the judgment of the curse is poured out (Philippians 1:10). 2 Thessalonians 1:8-9 says of this day, “He will punish those who do not know God and do not obey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They will be punished with everlasting destruction and shut out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e majesty of his power.” Also, this day is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Hebrews 4:13).”, which is the day that all mankind is astonished.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드는 자들에게 저주유발자가 되신다. 빌립보서에서 언급하는 ‘예수의 날’ 혹은 ‘그리스도 날’이란 저주의 심판이 쏟아지는 날을 말한다(빌 1:10). 데살로니가후서 1:8-9은 이 날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라고 말한다. 또한 이 날은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는 날(히4:13)“이며 그로인해 모든 인류가 경악하는 날이다.
In today's text, the apostle Paul uses Timothy as an example to contrast "the interests(work) of Jesus " with “that of humans." For those who are engrossed in their own interests, Jesus's interests is indeed beyond their expectations. This and that self-care, which humans do in anticipation of contributing to Jesus' interests(work), actually does nothing to the Lord's interests(work), and rather, they are driven outside of Jesus' work.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예로 들어 ‘예수님의 일‘과 인간의 ’자기 일’을 대조시키고 있다. 자기 일에 몰두해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일’이란 참으로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다. 인간들이 예수님의 일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여 행하는 이런 저런 일들이나 자기 관리는 사실 주님의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으며 오히려 그 같은 일들은 ‘예수님의 일’의 외곽으로 내몰리게 된다.
Therefore, it can rather give meaning to "the interests(work) of Christ Jesus" if human beings, who are sinners, reveal the nature of their sinners without regret. Just as Jesus was always surrounded by sinners during his time in the world, Jesus' work through the Holy Spirit on the ground today is also carried out surrounded by "his own interests(work)" that humans are immersed in. Like this, light presupposes darkness.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이 자신들의 죄인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늘 죄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지내셨듯이 오늘날 지상에서 진행되는 예수님의 일도 인간들이 몰두하는 ‘자기 일’에 둘러싸여서 진행된다. 이처럼 빛은 어두움을 전제한다.
In today's text, the apostle Paul draws the attention of the Saints in Philippi Church to the relationship between Paul himself and Timothy through recommending Timothy to the Saints in Philippi Church. The basis of their relationship is Heavenly Father's relationship with Jesus. This relationship becomes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the apostle Paul, and this relationship lead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postle Paul and Timothy, which also extend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aints. Timothy was sent to the Philippi Church to expand this relationship, and through ident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the true nature of the human world was revealed.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지역 성도들에게 천거함으로써 빌립보교회 성도의 주의를 바울 자신과 디모데 사이의 관계로 이끈다. 그 둘의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되고, 또 이 관계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로 이어지며 그것은 또 성도들 간의 관계로 확장된다. 이 같은 관계의 확장을 위해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에 보내지고 두 사람의 관계 규명을 통해 인간 세계의 본색도 밝혀진다.
For people, "their own interests" is a final concern. Seeking Jesus is only another shape of "seeking their own interests" after all. In today's text, Paul the apostle presents Timothy as a model for those who, unlike all others, seek the interests of Jesus without seeking his own. unlike everyone else. Paul was able to say this about Timothy without any hesitation because there was something that Paul and Timothy shared. This is because of the humiliation and hardship they went through together for the gospel. In Timothy's journey of life, the reasons for Paul's humiliation and hardship were permeated. Timothy was equipped with the same worldview and gospel as the apostle Paul.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각자 ‘자기 자신의 이익’이 곧 최종적인 관심사이다.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자기 이익’ 추구의 다른 모양일 뿐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달리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델로 제시한다. 바울이 디모데에 대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디모데가 공유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함께 겪었던 수모와 고생 때문이다. 디모데의 인생여정에는 바울이 겪었던 수욕과 고난의 이유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디모데에게는 사도 바울과 동일한 세계관과 복음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After all, the difficulties that the apostle Paul and Timothy faced were by people armed with the slogan“My Salvation, It's by My Strength”. This means that people see the problem of salvation as their job to solve. People are filled with the will to acquire their share of blessings by their own strength and to achieve salvation by their own strengths by faithfully obeying and obeying the laws of God. 결국 사도바울과 디모데가 당한 어려움은 ‘내 구원은 내 힘으로’라고 하는 슬로건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구원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할 자기 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율법을 근실히 지키고 순종함으로써 자기 몫의 복을 자력으로 획득하고 구원도 자기 힘으로 성취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있다.
However, salvation, or “the work of the Lord,” beyond human reach, proceeds in a way that excludes human enthusiasm. This is the way the new covenant is fulfilled. “"This is the covenant I will make with them after that time, says the Lord. I will put my laws in their hearts, and I will write them on their minds(Hebrews 10:16)." In other words, the new covenant allows the law to be fulfilled regardless of their works in a way that enters the interior of the people of covenant and is engraved in their hearts and minds. The Lord's law, accomplished through Jesus' death on the cross, is at the deepest level in the hearts of his people. This is the state in which the saint is in the pure relationship of 'Father and Son'.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구원, 혹은 ‘주의 일’은 인간들의 그 열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새 언약의 성취방식이다.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10:16)”즉 새 언약은 율법이 언약백성의 내부로 들어가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져버리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성취되게 하신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된 주의 법은 자기 백성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이 상태가 바로 성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순전한 관계에 놓여있는 상태이다.
This process of the new covenant process is shown in advance in the movement of the Ark of the Covenant recorded in 1 Samuel 4 to 2 Samuel 6. The movement of the Ark of the Covenant coincides with the movement of the Covenant. There the Ark of God's covenant leaves Israel and enters Philistia, which returns from Philistia back to Israel. 이와 같은 새 언약의 진행과정 사무엘상 4장에서부터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된 언약궤의 이동 사건 속에서 미리 보여 진다. 언약궤의 이동은 언약의 이동과 맥을 같이 한다.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들어가고 그것은 블레셋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The specific movement process is as follows : The Ark of the Covenant in Shiloh was transferred to the battlefield that was at war with the Philistines, and in the meantime, the Ark of the Covenant was taken by the Philistines. In that war, Israel was defeated, but the Ark of the Covenant, which was reaved, punishes the Philistines alone in the Philistia. Because of this, the Ark of the Covenant was sent to Beth Shemesh by the Philistines, who were so afraid of the existence of the Ark , and then it was moved to Abinadab's house in Kiriath Jearim, where it stayed for 20 years. Then, when the Ark of the Covenant departed from the house of Abinadab and reached the threshing floor of Nacon, Uzzah reached out and took hold of the ark of God, because the oxen stumbled. 7.The LORD's anger burned against Uzzah because of his irreverent act; therefore God struck him down and he died there beside the ark of God(2 Samuel 6:6-7). 그 구체적 이동과정은 이렇다 : 실로에 있었던 언약궤는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전쟁터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기게 된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했지만 탈취되었던 언약궤는 블레셋 안에서 블레셋을 홀로 징벌해낸다. 그 일로 인해 언약궤의 존재를 너무나 두려워했던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언약궤는 벧세메스로 보내지고 그 후에 그것은 기럇여아람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져서 거기서 20년을 체류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출발하여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뜀으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이것 때문에 웃사는 하나님에 의해 침을 당해 죽게 된다(삼하6:6-7).
Everywhere the Ark of the Covenant moved and stayed, there was a commotion, which shows that the human world is not capable of accommodating it in any way, and that God does not allow the hand of the human being, who is already dead because of sin, to reach the Ark. This means that God Himself completes his covenant alone. 언약궤가 이동하여 머무는 곳마다 거기서는 소동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인간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언약궤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인 인간의 손이 언약궤에 닿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하나님 홀로 친히 성취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People somehow try to embody their ego. So, what humans do over their lifetimes is “decorating their own egos”. But that is what hinders the work of God's covenant. The fact that Timothy was trained through the gospel means that he repeatedly learned in the process of evangelizing with Paul that human effort and sacrifice are excluded and removed from the purity of the gospel.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에고를 형상화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장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데 있어 방해가 된다. 디모데가 복음을 통해서 단련을 받았다는 말은 복음의 순전함에서 인간적인 노력과 희생은 배제당하고 제거 당한다고 하는 것을 바울과 함께하는 복음전파 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배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The truth given in the first place, the covenant, is not something that will depend on human efforts. But where the ark of the covenant passes, there are attempts by humans to save themselves in their own way, which is too different from the intention of God's "the Atonement" in the first place. God's salvation is determined b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ne who dies on behalf of his people and the people delivered through his death. Because of this relationship and because of the Lord's way of salvation, called “through the ransom,” the saints receive the same humiliation and hatred that Jesus received in this world. This is because the world is unable to withstand the "helplessness" and the "worthlessness" in which it is excluded from its own salvation process. 애초에 주어진 진리, 곧 언약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내용들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궤(언약)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인간들의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을 구원시키려는 시도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애초부에 의도하신 ‘대속’의 취지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는 분과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건짐 받는 백성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 관계 때문에 그리고 ‘대속’이라고 하는 주님의 구원방식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동일한 수모와 미움을 받는다. 세상은 자신의 구원과정에 자기가 배제되는 ‘무력함’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이다.
But the apostle Paul clearly says, “You will be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you will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Act 28:26)" and puts a wedge in human force, impossibility and valuelessness. Therefore, when the Holy Spirit reminds them that they are not only those who seek their own work and do not seek the work of Christ Jesus, but also those who practice the error and expediency of using Jesus for themselves, the saints are rather pleased with this and boast only of the Jesus' cross. They only make it clear that everyone, including themselves, is dead, and that the world moves for sin, while the saints are used for righteousness.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인간의 무력과 불가능함 그리고 무가치함에 대해 쐐기를 박아버린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는 오류와 편법을 자행하는 자들임을 성령에 의해 일깨움을 받을 때 이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죽은 자라는 사실과 세상 사람은 죄를 위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자신들은 의를 위하여 사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뿐이다.
이근호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늘 죄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지내셨듯이 오늘날 지상에서 진행되는 예수님의 일도 인간들이 몰두하는 ‘자기 일’에 둘러싸여서 진행된다.”
“인간이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장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데 있어 방해가 된다.”
인간들에 있어 가장 민감한 일은 ‘자기 일’이다. 이 일이 ‘중심부’가 되어 버리면 ‘예수님의 일’도 주변부로 밀린다. 성도에 있어 예수님의 일은 ‘주변부’에 있는 예수님의 일을 중심부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아프고 혼란스럽다. ‘자기 일’이 깨어진다. 그것은 언약궤가 ‘자기 일’ 한복판을 관통 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