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레16;8)
대속죄일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에 의해 두 마리의 염소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염소는 속제죄물로 죽어야 하고 다른 한 마리는 그냥 외로이 광야로 보냅니다. 정처없이 떠돌다 죽기 위해 말입니다.
즉 한 염소는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으로 끌고 오고 다른 한 염소는 그 성막이 있는 곳으로부터 점차 저멀리 멀어지게 합니다. 이 염소가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 염소나 속죄 염소나 둘 다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외로이 벌판으로 떠나야하는 염소는 속죄되어야 할 백성의 죄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즉 염소가 떠나야 되는 광야는 위험하고 불결한 땅입니다. 속죄되지 못한 상태의 땅입니다. 저주가 작렬하는 대지입니다. 그러하기에 나머지 한 마리의 염소는 여지없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죄 때문에 염소가 희생되어야 된다는 말은 곧 만약에 속죄되지 않는 상태의 인간들은 아사셀 염소처럼 비참하게 대지(땅)가 주는 처벌을 다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는 두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염소와 같이 두 가지 내용을 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되기까지 기도하신 것은 “내 원대로 되게 하옵소서+내 원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소원이 선행되었지만 그 소망에 다른 소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이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그 뜻을 받들 새로운 자아가 발생된 겁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16;4)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예수님께서는 인간 자아성을 문제 삼기 이전에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을 보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이 세상 자체가 쓰레기 같은 동네라는 겁니다. 요나는 그것을 몸소 경험했어야 했습니다. 요나가 빠진 세계는 지옥 같은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지옥 같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이것은 곧 개인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해서 고통이 오지 않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사람은 어떤 혜택을 입게 되면 마치 자신이 그만한 혜택을 받아도 마땅한 존재인양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를 위하여 환경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이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시스템으로 가동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그 어떤 살아있는 증거를 더 근원적인 요소에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분해하면 분해할수록 그 자리에는 살아있는 증거보다 죽어있는 증거가 더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계속 속고 있습니다.이 속임 당함에 의해서 자신의 등급을 계속 끌어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즉 나 자신답지 않을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이미지까지 자신이라고 우기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요청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만사에 감사보다 짜증을 부리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200607 "분열된 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