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불
2013년 6월 9일 본문 말씀: 스바냐 3:8
(습 3:8,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전부입니다. 사는 것말고 달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살려고 살지 결코 죽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오로지 살기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열중하고 매진하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밥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그거라도 없으면 반려동물이라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건강한 신체로서 버티는 것, 이런 것들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같은 질투’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것 없이도 잘들 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지도 않는 ‘하나님의 불같은 질투’를 들고 나오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으로 다루시면서 일하십니다. 개인적인 삶의 소망에 대해서는 거부하시고 거국적인 원칙으로 적용시키십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기 삶에 정신 팔려 있는 자들에 있어 ‘질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 못합니다. 사람들은 질투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 대신‘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랑과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은 여러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질투는 ‘오직 너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질투를 일반적인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질투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이 보통 어떤 세상관을 갖고 있는지를 충분히 드러내는 사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에 심도있게 신경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로또 당첨기를 보세요. 네 가지 통로를 통해 숫자 적힌 공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로 한데 엉키고 튕기고 하다가 결국은 매번 우발적 숫자를 토해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이 애쓰고 힘들게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에도 같이 편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은 로또 당첨기 통 속과 같습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현실관을 고구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노력과 노력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면서 예상 못한 엉뚱한 곳으로 튕겨져 나가면서 그 자리를 결국은 긍정하게 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로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분에 넘치는 자리라고 감사해보지만 실은 모두 의미없는 부대낌의 결과입니다. 자신의 강한 의지가 선택에 의해서 마련된 자리가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기에 차지하게 된 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도 자연적으로 끌어모으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투는 ‘분류작업’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기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묻는 것은 배타적 사랑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에게 답변하기를 ”다 좋아“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란 어떻게 어느 쪽에서 받든지 내 쪽에서는 축적과 보관이 가능한 성질이라는 겁니다.
아빠 입장에서는 “엄마보다 아빠가 좋아”라고 해주기를 바라고 엄마 입장에서 “아빠보다 엄마가 좋아”라고 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자식에게는 통하지 않지요. 따라서 사랑을 질투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변화란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가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심을 자신의 고정성으로 곡해하게 마련입니다. 이 점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질투를 알려주는 기회를 마련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25:13에 보면,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알을 섬기는 민족과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동안 광야에서 자신들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충성하고 있노라고 자부했습니다. 결코 그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자신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질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랑’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막상 바알브울이라는 신과 그리고 거기에 종사하는 여자들을 대하는 순간, 그들은 감성적으로 잠복되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인간은 이성보다 먼저 감성적 존재입니다. 일단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아무리 그 즐거움을 애써 잊으려고 해도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결코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마저 스스로 절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려 24000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작업에 나선이가 바로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무장한 비느하스입니다. 단순한 사적인 신앙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속죄원리에 입각한 질투입니다. 즉 질투심이란 하나님의 귀한 속죄의 은혜가 아무나에게 제공될 수 없다는 원칙과 관련된 사태에서는 마구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구분짓고 분류하는 작업이 질투심에 입각한데서 발휘됩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은 일종의 막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광산의 드릴같은 것입니다.
옥석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많은 경우를 제공하고 그 와중에서 자기 딴에 이해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에는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대상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질투심이 발휘될 때 진정 속죄의 의미가 나타나게 됩니다.
두리뭉실 대충 인위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마중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 충돌에서 인간은 사정없이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도 사랑해서 가지고 거짓도 사랑해서 가지는 것을 하나님은 용인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분에게 주신 그 사랑, 예수님에게 퍼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고집하시는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되려면 우리 자신의 선택에 있어 무수한 부정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 사랑은 실패하고 하나님의 질투심과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