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랑(갈5;13-15) 1808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19. 20:31
2018-08-19 12:55:19조회 : 32         
   사랑 180819이름 : 우리교회 (IP:119.18.83.168)   

사랑(갈라디아서 5:13-15)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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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8-08-19 13:33 

사랑  

2018년 8월 19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13-15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도의 말을 잔소리로 들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심령의 변화가 유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란, 외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어떻게든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공장에 주문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든 밤새 작업을 해서라도 그 물건을 대어주려고 애써는 것과 같습니다. 

공장이 스스로 망하게 하려고 공장을 가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 관계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율법이라는 것이 투입된 것은 더 원대한 계획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들어가야 될 지옥이라는 것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능가하는 처벌이 주어지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예상을 넘어서는 그런 영적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느 인간이든 결국은 ‘내가 최고다’라는 일념을 갖추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 충분히 영적인 영역에 인간이 속해 있습니다. 영적인 영역이란 인간의 행함으로 변경되거나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영역이다 는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자유롭다가 하지만 실제로는 줄곧 누군가 일을 시켜주고 그 시킨 대로 사는 것이 항상 큰 행복을 느낍니다.  인간은 자유를 주어도 감당이 안 됩니다. 어디에 써먹을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벌써 인간은 사회에 종속되어 그 사회로부터 정신을 조절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만고만한 인간들 끼리 ‘잘 살았다’ ‘못살았다’를 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들어가는 지옥은 인간이 살아온 연한만큼만 책임을 지고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만기출소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인간을 길들여온 죄가 인간 본인이 지은 죄가 아니라 질적으로 근원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에게 영원히 대드는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조치는 최후심판을 통해서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치에 합당합니다. 성도란 나중에 올 최후심판을 미리 받아버린 자를 두고 말합니다. 최후 심판을 돌아서, 경유해서 주님의 뜻에 따라 남은 인생을 이 지상에서 보내는 사람에게 있어 싸우거나 욕할 거리는 없는 겁니다. 

마치 벌써 정상을 밟고 다시 땅으로 내려가는 등산객이과 여전히 정상을 향하여 헉헉거리면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같은 마을일 수는 없는 겁니다.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쪽이 다음과 같이 협박을 한다고 칩시다. “당신 그렇게 살면 나중에 지옥가는 거야. 알겠어!”라고 나온다면 최후심판을 경험한 사람은 그냥 씩 웃지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미 최후심판을 경험한 여부를 묻고 있는 바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마지막 심판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마태26:39과 42에 보면,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뜻이 어떤 내용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즉 ‘내 뜻’은 ‘아버지 뜻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뜻에 의해서 철회되어야 될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나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 뜻이 그냥 주어지거나 그냥 실시만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의 부정성을 노출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늘 분명하게 느껴지고 알려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가 아버지에 의해서 아버지의 성공으로 전환되는 발판이 됩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패배하거나 실패할 리가 없는 ‘매끈한 메시아’가 되어서 메시아 답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도리어 메시아는 우리 자신의 이러한 오류된 문제점을 노출시키는 근거를 자체적으로 지니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찾는가? 네 잘되기 위해서 찾지. 그지?”라고 물을 수 있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 것도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이나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수행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모두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율법과 사랑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의 완성’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임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사랑과 자유를 만들어 내시는가요? 

사랑이란 1이 아니라 2가 있어야 성립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서로의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상대로부터 마음이 빼앗긴 겁니다. 주님을 우리 인간들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이 볼품없는 죄인에게 마음 빼앗겼기에 발생하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2:14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인간들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인에게 마음 빼앗긴겁니다. 마치 구약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흑인 여자에게 마음 빼앗겨 미친듯이 구애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요 색시입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 악마가 아무리 정죄해도 소용없습니다.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자기 색시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친히 실패자로서 뛰어들어 같이 구원에 성공자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책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스스로 자신에게 실패자임을 자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8-19 19:31 
302강-갈 5장 13-15(사랑)1808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3-15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도가 하라, 고 명령했지요. 우리가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싸우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 안 싸울게요. 됐지요? 끝.” 그래서 싸우는 거예요. 이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씀인데 자기철저를 기하라고 주신 말씀으로 오해하는 겁니다. 

완벽에 완벽, 철저에 더 철저함, 누가 시비를 걸어도 시비를 걸게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싸움거리가 되고 시비 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돼요. “싸워라. 안 싸우는 체 하지 말고 싸워라. 사랑하는 척 하지 말고 나 빼놓고 다 미워한다는 본색을 그대로 노출해라.” 

그리고 여기 ‘자유’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자유롭다고 우기지 말고, 나는 눈치 보면서 살아간다고 그것을 그대로 자인해야 돼요. 눈치 보면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거든요. 체면 차리는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전통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예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되지만 본인입장에서 그것은 스스로 자기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유롭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리고 이 자유를 주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요. ‘이거 어디에 써먹지? 어떡하라고 나에게 자유를 주지?’ 촌에 있는 장인하고 서울 사는 사위가 몇 십 년 만에 만났다 칩시다. 둘이 만나서 함께 있으면 둘 다 뻘쭘합니다. 무슨 말을 끄집어내야 될지. 

그 때 장모가 사위를 보고 “자네가 이것 좀 해주게.” 하면 그렇게 반가워요. 그 뻘쭘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니까 그렇게 반가운 겁니다.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있으면 뭘 할 줄을 모릅니다. 누가 시켜줘야 반가워요. 종노릇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런 식으로 줄곧 살아왔습니다. 

시킬 때 자기 존재감이 드러나는 겁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자유라는 이 말도 우리한테는 참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냥 교회와도 목사가 무슨 일을 시키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냥 막사세요, 라는 말보다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막 사는 것인지, 막 살아 본적이 있어야 막 살지요. 한 번도 막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난감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이 복음은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것, 또 이런 것을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언제 줬습니까? 우린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한테 이것을 허락했는데 우리는 받은 기억이 없다.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나 사도바울이 하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것은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말이에요. 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죽음에서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살려줬던 그 분의 말이에요. 

그러면 그 분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예수님과 같이 이 땅에 70, 80살다가 이미 죽어버렸어요. 이미 최후심판을 터치한 겁니다. 최후심판의 반환점을 돌고 다시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주께서 허락을 안 해서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이 땅에 남은 인생을 사는 사람만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먹는 거예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과 더불어 세례 받았다는 뜻이고, 성령과 더불어 세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그런 현재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 여러분?” 하고 사도바울이 말을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설프게 도 닦으러 교회 온 사람은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살려고 교회 왔는데,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시면 사십니다. 이렇게 하시면 영생 얻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생 물 건너 가셨지요? 이미 끝장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주께서 살려줘서 영생 얻었지요, 그렇지요?”라고 확인 차 이 본문가지고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믿음으로 구원받고자 한다든지, 영생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영생 얻고자, 구원받고자 한 그 모든 시도가 주님 앞에서 처음부터 실패작이었다는 것이 다 들통 난 거예요. 어떤 인간의 노력,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가로막혔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알고 난 뒤에, ‘그러면 나는 왜 살아 있지?’ 그것은 이미 최후의 심판을 경험했던 사람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이 땅에 살면서 쓸데없는 것과 싸울 일이라는 것이 없지요. 누가 누구한테 욕을 한다는 것은 최후심판을 안 겪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지금 아멘이 끊어져버렸는데요. 

누굴 보고 욕을 하는 것. 나이 한 60 넘어 70쯤 되면 케이블방송 틀어놓고 욕하기 시작하지요. jtbc부터 틀어놓고 욕하기 시작하는데 대신 욕해주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시사평론가를 비롯해서 대신 욕해주는 사람들. 70부터 90까지 욕으로 사십니다. 그것 아니면 살 맛 없어요. 60까지는 자기 일 한다고 바빠서 세상 돌아가는 것 잘 안 보는데 모든 것을 이제 그만 뒀으니까, 직장도 그만 뒀으니까 남은 일은 욕만 하는 것만 남아요. 

그 외 아무 일도 남아있지 않아요. 여자고 남자고 간에. 왜 젊은 사람들은 욕을 안 하는가? 바쁘게 사느라 관심이 없어요. 지금 자기 앞가림하기 바빠요. 남 험담할 일이 없어요. 싸움이란 욕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저쪽에서 시비 걸고 나오는 거예요. 

요즘 십자가마을 시끄러웠잖아요. 그게 복잡한 문제 아니에요. 그거 봐도 왜 그런지 잘 몰라요. 김비서가 왜 이럴까? 김비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냐 하면, 시비 거는 쪽은 십자가 마을 때려 부수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너희들이 신봉하는 이근호 목사의 주장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십자가마을을 때려 부숴야 십자가마을이 새롭게 되고, 교회를 부숴야 교회가 새롭게 된다는 그겁니다. 

이 세상에 깡패 많지만 마귀는 깡패인데 윤리깡패이고 도덕깡패에요. 우리 영혼을 가지고, 네가 양심대로 바르게 살았느냐고 매일같이 윤리도덕가지고 우리를 패는 것이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윤리도덕깡패거든요. 그런데 그것 말고 복음깡패가 있어요. 시비 거는 것이, 십자가마을은 정신 차려야 된다는 거예요. 너무 안일에 빠졌다는 거예요. 이거 박살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반대하는 사람은 뭐냐? 박살날 거리를 가지고 와서 박살을 내야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박살을 내니까 박살이 나는 것이 아니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박살 낼 거리를 가지고 박살을 내면 박살나지 말라고 해도 기꺼이 박살나겠다는 거예요. 

싸움이라 하는 것은 안다는 쪽에서 모르는 쪽을 향하여 깨우친다는 아주 고상하기 짝이 없는 대단한 명분을 갖고 있어요. “이 무식한 것들아! 너희는 아는 나에게 한 수 배워라.” 그러면 갑자기 졸지에 무식한 쪽이 되어버린 사람은 “그래, 너의 유식한 것 한 번 꺼내봐라.” 그래서 보니 “별거 없네? 이게 다야? 이거 말고 뭐 없어? 지금 그것 가지고 날 훈계하겠다는 거야?” 이렇게 되지요.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둘 다 뭐가 문제냐 하면,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이것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14절에서 말하기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물고 뜯으면, 이라고 해야지요,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했어요. 

여기 14절에 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그런데 사람은 ‘율법’은 떼 내버리고 성급하게 어디로 먼저 가느냐 하면, ‘이웃사랑’에 먼저 가버려요. 이웃사랑에 가 버리면 그것도 율법의 연장이 되고 맙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면 사랑인데요, 율법의 완성이 되어버리면, 율법은 어느 차원이냐 하면, 인간차원이에요. 

그런데 사랑은 인간에게는 없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형제라는 것도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고, 자유도 없는 것이고, 그 다음에 사랑도 없는 것이고, 율법도 초월적인 거지요. 그래서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랑이 율법에 포함이 안 되려면 율법은 따로 있어야 되고, 율법에서 사랑으로 그냥 넘어 오면 안 되고, 율법에서 사랑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율법의 차원에서 사랑차원으로 넘어왔는가, 그 과정을 눈여겨봐야 됩니다. 

그 과정에 들어오는 것을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패배에요. 예수님의 자기실패입니다. 이것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특이하게도 자기가 자기에게 패배해버려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성공해버립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26장 39절과 42절에 나옵니다. 3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겟세마네 기도하는 대목인데요.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을 마시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인 것을 내가 분명히 압니다. 하지만 그걸 안 마실 수 없겠습니까, 라고 예수님 쪽에서 언급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예수님은 이런 말을 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완전하니까.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에게는 패배라는 것이 없고, 실수라는 것이 없고, 실패라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이 하나님답다는 것이 우리의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개념에 합당해요. 오류도 없고, 실수도 없고, 하자도 없고, 실패도 없고, 완벽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완벽으로 줄곧 이어지는 분. 우리는 어설픈데 주님은 굴곡도 없이 깔끔하게 모든 일을 성공에서 성공으로 처리하시는 분. 그게 과연 믿을만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움찔, 하지요. “이 잔을 안마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해요.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스쳐지나가게 하옵소서. 안마시고 일 되게 하옵소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실패한 미완료성 메시아로 자처하는 느낌이 듭니다. 미완료성, 완전하지 못한 메시아. 

메시아가 일을 해야 되는데 메시아가 자격 없음이 들통 나는 순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여기서 자신과 아버지를 갑자기 대비를 시키고 대조를 시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뜻에 의해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진 것을 양도하는 의미가 있어요. 내 뜻에 의해서, 내 추진력과 내 능력과 나의 솜씨와 나의 자질에 의해서 아버지 뜻을 완벽하게 이루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싶은 겁니다. 

4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 자기 내부에 어떤 절차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절차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승리, 메시아로서의 임무완수에는 필히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춤’이 거기 깔려 있지요. 

이것은 내 뜻에 의해서 메시아의 사명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그러한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데 여기서 아버지에게 일임하면서 무엇도 같이 일임되느냐 하면, 내 뜻은 이 잔이 그냥 지나가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는 그 뜻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일임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이것을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아버지의 뜻을 다 행하게 하옵소서, 라는 식으로 아버지 앞에 이걸 맡길 수는 없는 거예요. 내 뜻은 이겁니다, 하는 것을 반드시 아버지 앞에, 우리 주님 앞에 내놓아야 돼요. 내 뜻은 이것입니다, 하는 것을 내놓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반복돼야 돼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기도할 때 제자들과 같은 층에 있어요. 죄인 편에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 편에서 나중에 주님에 의해서 의인 될 때에 무슨 요소가 의안에 포함되어야 되느냐 하면, 내 고집과 내 뜻은 결코 주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고 “내 뜻이 그대로 안 깨지기를, 안 부서지기를, 내 뜻이 죽지 않기를 원했던 그것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나라에서는, 천국에서는 어떤 내 면류관도 깔끔하게 반납해야 마땅합니다.”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면류관을 계속 쓰고 있다는 이것은, 평소에 이 땅에 살면서 숙달된, 누적된 나의 고집이었고, 나의 오기였고, 나의 최후의 자존심이었어요. 그게 그대로 천국까지 가게 되는 겁니다. 박살나지요. 그렇다면 성령이 오셨다. 주의 영이 오셨다.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은, 아버지와 아들과 있었던 그 관계를 성령께서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우리에게 덮쳐버려요. 덮쳐버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할 일은, 도대체 내가 무슨 뜻을 평소에 갖고 있는가를 다 끄집어내는 일을 주께서는 개시하는 겁니다. 다 끄집어내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를. 

그런데 끄집어낼 때 주의 할 것이 있어요. 만약 어떤 사람이 90세에 돌아가신다면 인간이 지은 죄는 1세에서 90세까지 지은 죄가 그 사람의 죄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갔을 때 처벌받는 그 기간이요, 90년이 아니라 90년을 넘어서요. 

1세에서 90세까지 지은 죄 때문에 그 사람이 지옥 간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지옥 불에서 고생을 해도 90년 만기 출소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옥 가서 받은 벌은 90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히 못 빠져 나옵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요. 끔찍합니다. 날씨 40도 올라가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물 한 방울도 없이 40도를 능가합니다. 1세에서 90세까지 지은 죄 말고 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인간이 자기가 경험했던 그 죄는 죄의 극히 일부에요. 그게 죄의 다가 아닙니다. 인간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못 빠져 나오는 그 지옥의 형벌을 지옥 간 사람은 다 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지옥은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악마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지옥은 악마가 갈 곳이에요. 이미 악마는 그게 확정되었습니다. 화가 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꾀었지만 이미 결정 난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의 죄라는 것은 뭐냐? 악마가 이렇게 하라고 집어넣어 준 것이 있어요. 그 죄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돼요. 이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고 배후에 나를 조종하는 악마가 나를 뒤에서 사주해서 지은 죄가 있어요. 그 죄에 대해서 성도만이 접촉이 됩니다. 

만약에 성도가 아닌 사람이 아는 죄라 하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자기의 기억에 준해서 ‘이것은 나쁜 거야.’라고 했던 그것이 죄라고 규정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좀 길어지니까 슬슬 졸지요? 

사회가 우리 정신을 조절하거든요. 어떤 아저씨가 촌에 사는데 제주도 여행도 한 번 안가보고 촌에서만 한 50년 살았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죄라는 것, 그 사람에게 선이니 악이라는 것……, 그 사람은 tv도 안 본다고 칩시다. 

한평생 자기 고향에서 태어나서, 고향에서 만났던 고향사람들과 사귀면서 형성된 것, 이장도 있을 것이고, 농협 대리도 있을 것이고, 쌀 수매하면 그 사람들 만나야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만나면서 그 사회라는 것이 그 촌사람의 정신을 조절하는 겁니다. 

‘아, 이런 것을 나쁘다고 하는구나. 아, 이런 것을 좋다고 하는구나.’라고 조절당하면 그 조절당한 상태에서 그 촌사람은 무엇이 죄고 무엇이 의롭다는 것을 나름 판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죄라 하는 것은 선과 악으로 있기 때문에 ‘뭔가 이 일은 나쁘다’ 하는 순간……. 

예를 들어 그 촌사람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니까 동네 파출소의 순경이 오지요. 그 촌사람은 평생에 판사도 못 만나 봤어요. 파출소 순경밖에 못 만나봤거든요. 그 순경이 “아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면 그게 해서는 안 되는 죄라는 것을 알아요. 그 촌사람이 그게 죄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가 의인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알기에 의인 되는 겁니다.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죄 아닌 것도 안다는 뜻에서 합쳐보면, 나는 죄와 의를 판정할 권리가 있기에 그 권리자체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성령이 오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한 것보다 너무 오버해서 지옥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기독교신자의 말이 납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쁜 짓을 안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착하게 완벽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닌데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그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오면서 나쁜 짓 한 것을 다 긁어모아도 지옥에서 한 10년 살다 나오는 것은 이해 돼요. 10년도 많다. 한 2년, 한 이틀. 예비군훈련도 3일 받는데, 예비군훈련 받듯이 그것은 되는데 영원히 못 빠져 나올 정도로 그렇게 지독하고, 가혹하고, 정말 악한 죄를 지었는지, 내가 악마의 표상이 될 정도로 악한 인간인지는 설득을 할 수가 없어요.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어처구니없는 거예요. 화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악마야? 네가 보기에 내가 악마로 보여? 그래, 술 먹고 좀 개짓 했다. 그게 악마야? 술 깨면 건전하잖아. 심신미약에 의해서 좀 쳤다. 그러나 술 안 먹을 때는 괜찮은 남편이잖아. 이게 왜 지옥가야 돼?”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믿는다고 자부하고, 복음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하고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해결은 간단합니다. 싸우지 말라. 왜? 그게 바로 율법차원이라는 거예요. 싸우는 차원은 뭐냐?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너에게 그렇게 밀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네가 나를 욕하는데 나는 욕 얻어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피차 물고 뜯는 거예요. 처음에 싸울 때는 명분이 있는데 좀 싸우다 보면요, 싸운 것 가지고 계속 싸우고 나중에는 원래 싸웠던 이유를 다 잊어버려요. 

부부싸움도 그런 거잖아요. 처음에는 가정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싸우다가 나중에는 자기본심이 나와요. 뭐냐 하면, 너하고 붙어사는 것이 거추장스럽다는 거예요. 그동안 이걸 숨겨놨거든요. 그동안 숨겨놨는데 한 3, 40년 살면요, 거추장스럽고 귀찮아요. 옆에 누가 붙어 있는 그 자체가 귀찮아요. 

사람이 제일 짜증나는 순간이 뭐냐 하면, 미운 사람,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 때 그거는 미칩니다. 그냥 가줬으면 좋겠는데, 못 본체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하이!”하고 인사하면서 다가올 때 내 뺄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자기 딴에는 사랑을 베푸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엮이기 싫은데 자꾸 엮이는 거예요. 졸혼이 왜 있습니까? 인간의 본심은, 자기가 나쁜 짓 아니고 선이라고 여겼던 그 선이라는 것 속에 지옥 갈 죄가 다 모여 있어요. ‘난 나 혼자 살고 싶다. 더운데 떨어져라.’ 그냥 본성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그 모든 발언들이 주께서 주신 율법에 의하면 그게 다 죄가 됩니다. 

백화점에서 물건 신상 나온 것 보지요. 그것은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돼요. 저는 이것을 미꾸라지에 소금치기라고 하는데요. 미꾸라지가 그냥 있을 때는 굉장히 사이좋지요. 소금만 쳐보세요. 따갑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주께서는 율법이라는 소금을 계속 쳐버려요. 계속 쳐버리면 나 착한데 왜 잔소리 하느냐,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따갑다고, 율법이 따갑다고 계속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성경도 안보고 교회도 안 나오고 하는데, 나한테는 소금치지 말라는 말이지요. 나름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요. 사회가 너의 정신을 그렇게 조져놓았다고. 네가 그렇게 혼자 있을 때는 괜찮아 보이지만 네가 만난 사회가 너를 괜찮게 위장한 거예요. 인간사회는 마귀도 안보이지요, 천사도 안 보이지요, 주님도 안 보이지요, 기껏 만나는 것이 그렇고 그런 인간들만 만난다고요. 그렇고 그런 인간들. 

초월적인 것을 인간이 못 만나잖아요. 못 만나니까 자기정당화 하는데서 남보다 조금만 나으면 자기는 의인이고 조금 못하면 죄인 되는데 그것은 다음에 가서 착한 일 하게 되면 얼마든지 그것이 상쇄가 되니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건드리면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율법차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차원은 뭐냐? 악마가 우리와 한패, 마음이 하나가 되고 한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우리 마음이 악마의 마음이 되었어요. 그래서 악마가 우리한테, 네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숫자로 하면 2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성경 나오는 대로 할게요. “네가 이걸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되리라.” 신이 된다고 했거든요. 신은 2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용납해요. 나한테 나만 용납한다고요.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살아봤자 결국 최후에 남는 나는 나만 남아요. 

눈치 보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데 다시 쉽게 합시다. 이미 최후심판을 터치하고 반대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최후심판이라는 것은 나중에 오기 때문에 지금 뭐가 남아 있느냐?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것만 내 머리에 꽉 기억으로 차 있어요. 경험했던 바에 의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에요. 착실한 사람이고, 산뜻한 인간이고, 개운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보는 겁니다. 

이정도 해도 어지간한 사람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산을 생각해 봅시다. 등산을 하는데 이미 정상 끊고 내려오는 사람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서로 좁은 길에서 만났다고 칩시다. 뭐가 다르냐 하면,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은데 사는 의도와 방향이 달라요.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게 지옥 갈 죄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지요. “목사님, 시켜만 주이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상급 받겠습니다.” 그게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게. 그게 지옥 가는 거예요. 

나중에 올라가다가 능선에서 삐걱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삐걱하면 다시 또 기어오르는 거예요. 기도 더 하고, 헌금 더 하고, 십일조 해서 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기어 올라가는 거예요. 주님은 위에서 내려왔는데 인간의 모든 방향은 주님의 방향과 반대입니다. 더 완벽하게, 철저하게, 누구한테 욕 안 얻어먹도록. 

십자가 마을 박살내자. 그러면 박살내면 되는데 박살 안내야 된다는 그런 거요. 우리교회 완전히 해체되어야 된다. “안 돼. 해체되면 안 돼.” “이유는?” “몰라.” 내 공로가 들어 있으니까. 내가 정을 준 곳이니까. 

이게 뭐냐 하면, 아직까지 최후의 심판을 모르는 거예요. 최후의 심판을 안 사람은 본인을 알아요. 주님 앞에 이미 죽은 사람은 주께서 내 행함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게 자유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에요.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뚝. 

나에 대해서, 내 행동이나 자기잘못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구박주거나, 벌주거나, 꿇어앉히고, 손들게 하고, 나에게 질책할 어떤 권한도 자격도 나에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나에게 실패해야 돼요. 이걸 주님이 십자가지기 전에 십자가 앞에서 기도로 보여준 거예요. 

제발 너는 너 자신의 인간 만드는 작업에 대해서 이제는 실패하라는 겁니다. 네 손으로 성공할 어떤 방법도 없다는 거예요. 실패한 자가 자유입니다. 실패하면 주님이 알아서 책임집니까, 라고 물으면 그 자체가 실패한다는 수단을 통해서, 실패했습니다, 를 가지고 은근히 성공해보겠다는 노림수가 또 여기서 피어오르는 거지요. 

인간이 마귀에게 당해서, 나는 착하다, 나는 선하다, 나는 훌륭하다, 한 평생 남에게 그야말로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죄 지은 일 없다, 자책한 적도 없다고 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계속 율법으로 소금을 치거든요. 탐내지 말라는 이런 소금을 막 친다고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것. 너 자신을 미워하라는 것. 

계속 율법으로 소금을 치면 우리는 소금 피해서 막 도망친다고요. 그건 안했지만 다른 것은 잘 지켰잖아요, 이런 식으로 막 내뺀다고요. 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미꾸라지가 굉장히 많아요. 주님 말씀 피해서 나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어떤 식으로 자유를 줬는가? 율법의 완성은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완성은 내가 너에게 줬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이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누굴 사랑할 때 내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줬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마음을 줬다, 1번. 마음을 빼앗겼다, 2번. 어떤 겁니까? 하, 이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에요, 이 질문이. 정말 마음이 빼앗긴 사람 같으면요, 1이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이동했어요. 주님 하나로만 족해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거예요. 

그분이 내 마음을 다 빼앗아 갈 경우에는. 그런데 우리가 남에게 마음을 줄 때는 노림수가 있어요. 내가 준만큼 저쪽에서 보답이 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껄떡대는 겁니다. 이것은 수작부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이 있잖아요. 여러분 자식이 처음 태어났을 때, 1개월부터 30개월까지, 여러분이 그 애한테 마음을 줬습니까,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애한테 마음을 빼앗긴 거예요. 30개월 넘어가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30개월 정도까지는 마음을 그 애한테 빼앗긴 거예요. 눈을 빼줘도 아깝지 않아요. 부모가 살쪄도 관심 없어요. 부모가 자기 몸매관리 안 해도 괜찮아요. 애가 있으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치는 소금 있잖아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러면 짜증나요. 그 소금, 율법 안 쳤으면 좋겠어요.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 가는가? 자식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어도 누룽지처럼 바닥에 다 눅눅하게 깔려 있습니다. 

내가 마음 준 것, 그게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한테 마음 빼앗긴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이 최후심판을 맞이하고 그 끝지점에서 사랑이 등장합니다. 그걸 가지고 말세라 하고, 종말이라고 하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 못 박혀 달린 그 때에요. 

이제 시간의 연장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내가 사랑을 다 이루었다 할 때에, 더 이상 네가 나에게 할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선언해버릴 때에,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한테 주님이 마음 빼앗긴 거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한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한테 마음 빼앗겼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의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님한테 우리가 마음 빼앗긴 겁니다. 마음 빼앗겨도 또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 내 기뻐하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예뻐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예뻐서. 내가 보기에 전혀 우리는 예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예쁘다고 한 거예요. 그게 주님의 자기신부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정하신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에게 뭐 해드리세, 가 아니라 별 볼일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뭘 보고 혹했느냐, 그 사실을, 그 주님의 마음을 담아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저 막 사는 그대로, 그대로 주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 세상에서 율법으로 소금치는 것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아예 율법으로 인하여 같이 인당수 못에 빠져 죽었어요. 이제는 너와 같이 모든 율법에 대해서 물에 빠졌다. 더 이상 악마가 법, 법, 법 가지고, 교회 법, 양심 법, 법가지고 너를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도록 내가 다 조치해 놨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내가 너를 위해서 같이 인당수 못에 빠졌는데 누가 너를 정죄해? 내 새끼 누가 욕하는데? 내 새끼 누가 욕하는데? 네가 뭔데 내 새끼 건드리노?” 이게 부모들이 하는 이야기잖아요. 환란? 핍박? 45도 폭염?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네가 싸운다는 것은 따로 지킬 것이 있다는 것밖에 안되니까 사도바울은 답답하다는 거예요. 성도 맞느냐고 묻는 겁니다. 산에서 이미 내려온 사람이 맞느냐 그 말이에요. 최후심판에 가보니까 주님께서 이미 구원해 주시고 계속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이 이 못난 우리를 구원할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와 그리고 십자가와 그 외 많은 일들을 이 못난 인간에게 어떻게 소스로 덮어놓았는가를, 그걸 자랑하고 증거 하라고 우리를 내세운 겁니다. 

단테라는 작가가 베아트리체라는 여자를 굉장히 사랑했어요. 그런데 둘 다 정혼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베아트리체가 스무 살도 안 되어서 죽어버렸어요. 사귀어 보고 죽으면 그 사람의 약점 같은 것이 드러나겠는데, 전혀 사귀어보지도 않고 인사만 했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짝사랑만 했는데 죽어버렸을 때에 그 순간의 기억이 계속 가는 거예요. 

그게 베아트리체의 존재의 전부가 된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신곡>이라는 글을 쓰는데 잘은 모르겠는데 베아트리체를 천국에 두고 나머지 교황 같은 부류들을 지옥에 보내는 식으로 썼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가장 사랑하는 자를 제일 지옥 바닥에다 두십니다. 그게 사랑의 방법이에요. 이 몸을 괜찮은 몸 만들어서, “주님, 나오세요. 나 괜찮지요?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할 만한 자격이 되지요? 우리 주님 사랑합시다.” 이게 사랑이 아니고, 그것은 악마가 심어준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은 뭐냐?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 딱 두고 주께서 스쿠버다이빙을 해서 풍덩, 하고 뛰어듭니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주께서 갑니다. 가보면 그 사랑하는 인간이 왜 그 지옥의 바닥에서 못 떠오르는가? 모든 것을 내 뜻대로, 그것은 자기 뜻이 아니에요. 악마의 뜻이에요. 내가 신이라는. “나는 신이다. 손대지 마라. 나는 둘이 필요 없다. 나는 하나만 있으면 전부야. 그게 최고야.” 

이렇게 자기 뜻, 자기 뜻, 이렇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자기 뜻밖에 없으니 자기가 지옥에서, 그 심해에서 떠오르지를 못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 죄를 친히 체험하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데리고 지상으로 떠올라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그 여정, 그 여정이 바로 사랑이고, 그게 자유고, 그게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싸운다는 것, 내 것을 지킬 필요가 없을 때는 싸울 필요도 없는 거지요. 이미 최후심판을 받은 사람이 최후심판을 몰라가지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하고 싸운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태어난 자체가 악마가 만든 실패작이기 때문에. 악마가 실패작 만들었고 그것을 성공작으로 하신 것은 찾아오신 주님이고. 

찾아올 때 빈손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나는 너에게 마음 빼앗겼다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 마음으로 오는 거예요. 이번 겨울수련회는 구약의 <아가>를 할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제목도 정해놓았습니다. <실패한 사랑>, 몰래한 사랑이 아닙니다. 실패한 사랑. 구약이기 때문에 실패한 사랑이에요. 

솔로몬 왕이 흑인 여자한테 반한 이야기입니다. 반해가지고 반한 이유를 찾아내는데 한두 가지 찾아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그 흑인여자는 내빼기 바빠요. 아가서 마지막까지라도 성사 못했습니다. 끝까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어요. 현재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사랑했는가만 있으면 돼요. 내가 어떻게 거기에 보답했는가? 얼마나 보답해서 선교하는데 헌신했는가? 그런 것은, ‘쓰잘때기 없는 것’은 다 버리세요. 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에서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킨다면 오늘 본문 내용은 놀랍게도 일상의 이야기지 교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이 교회에요, 일상이. 평소 살아가는 것이 그걸 주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뭘 했느냐는 그걸 주목하지 않습니다. 주께는 교회 다니는 것이나 안다니는 것이나 다 일상입니다. 일상에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과도하게 챙기지 않기. 그걸 지금 사도바울은 이것으로 묻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싸우세요. 그리고 싸우고 난 뒤에 만나세요. 싸움 없이 점잖은 체 하지 말고 대판 싸우시고, 우리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가지고 늘 만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것은 잠간이요, 내가 한 것은 오래 기억하는 이 못된 버릇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세상 살면서 주님 덕분에 내 잘난 맛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이것이 바로 나의 일이고 악마의 일인 것을, 이게 죄인 것을 이제부터 오히려 감사하면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