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육의 열매(갈5;18-21) 1809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2. 19:23

 육의 열매 2018년 9월 2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18-21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더러운 것호색과 

(5:20) 우상 숭배술수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분냄당 짓는 것 분리함이단과 

(5:21) 투기술 취함방탕함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18.  But if ye be led of the Spirit, ye are not under the law.
19.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manifest, which are these; Adultery, fornication, uncleanness, lasciviousness,
20.  Idolatry, witchcraft, hatred, variance, emulations, wrath, strife, seditions, heresies,
21.  Envyings, murders, drunkenness, revellings, and such like: of the which I tell you before, as I have also told you in time past, that they which do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KJV)

19.  The acts of the sinful nature are obvious: sexual immorality, impurity and debauchery;
20.  idolatry and witchcraft; hatred, discord, jealousy, fits of rage, selfish ambition, dissensions, factions
21.  and envy; drunkenness, orgies,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did before, that those who live like thi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NIV)

19.  Now the deeds of the flesh are evident, which are: immorality, impurity, sensuality,
20.  idolatry, sorcery, enmities, strife, jealousy, outbursts of anger, disputes, dissensions, factions,
21.  envying, drunkenness, carousing, and things like these, of which I forewarn you just as I have forewarned you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NASB)

사도는 이 세상의 내막을 압니다. 인간이 무슨 용도로 살아가는 지도 압니다. 그래서 사도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열매를 보고서 나무를 파악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한 가지뿐 아니라 두 가지로만 분류된다는 겁니다. 세 가지나 네 가지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체를 두 종류로 나누고 싶으신 겁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의 구조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대한 통치를 악마에 양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살아가면서 ‘악마의 본심’을 드러내는 가를 주시하시겠답니다. 

인간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래의 운명으로 벌써 적용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움과 사랑’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마음에 주목합니다. 세상에도 많은 죽음이 오늘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아직 자기에게 죽음의 순서가 오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우수해서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육입니다. 육은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듣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샘플이 되고, 나도 또한 그들에게 샘플이 되고 시료가 됩니다. 샘플이란,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지는 못합니다. 악마가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말만 듣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돈과 명예와 건강을 자신이 사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내부의 지시를 받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선과 악의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의 카테고리(범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력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바로 그 점이 악마로 사로잡혀 살아가는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즉 인간은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선하게 여길만한 근거가 된다고 여깁니다. 

 

사실은 인간은 죽은 시신 위에 사람 옷으로 입혀놓고 치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을 ‘살아 있다’고 우깁니다. 어디서 배운 것일까요? 자신을 선하게 살아있다고 우기는 이론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선한 것들이 지니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불쌍한 것을 보면 동정할 줄 알고, 불의를 보면 정의감에 불타고, 자신이 잘되어도 겸손할 줄 알고, 오점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선하다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육입니다. 왜냐하면 기준은 본인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인간은 세상 끝까지 살아보지도 않았고 다 알지도 못합니다. 

 

세상을 친히 만드신 분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천대와 박대와 살해로 처리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상호 주고받는 내용들이란 현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을 눈으로 목격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 그러하고 직장이나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그 영원한 것 안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정리코자 하는 겁니다. 즉 “나는 비록 짧게 살다가지만 이 사회와 가정과 국가에 기여한 바가 크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심성을 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집단 우선주의에서는 ‘죽음의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즉 잘난 자나 못난 자나, 사회에 기여했든지 아니했든지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다 죽는다는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전혀 다른 죽음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사야 53:3-5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을 위해 죽는 죽음’이요 ‘대신 죽음’입니다. 이 ‘대신 죽음’을 극대화하시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필히 죽어야 하고 필히 죄인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고 죄는 살아나기에, 그 살아난 좌와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다 세밀화시키시고 확대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5가지 뿐만 아니라 무한대로 넓히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처지를 위장하고 가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을 건져낼 수 있다고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의 삶이란 본인에게 성실한다고 해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품이 어느 정도로 지옥적인지를 모릅니다. 자기의 장래는 자기가 알아서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게 되면 선한 존재가 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망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하다고 자부하는 쪽이 지배층을 이루는 사회에서 정보와 지식이 쉴새없이 밀어닥치기 때문입니다. 

 

그 사회 안에서 형성된 인간은 마음가짐은 이러합니다. “나 착하다”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력으로 육체의 열매를 해소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죄에 이미 죽은 자가 내놓을 수 있는 죽음의 이유요 죽음의 진행성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이 강제로 끊어지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그것이 바로 ‘잠자고 있는 순간’입니다. 인간들의 그 잘나고 잘난 행함이 끊어지고 소용없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다고 것도 실은 죽음의 연속적인 무늬일 뿐입니다. 진정한 삶은 예수님의 삶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완제품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생명이란 죽음 속에만 있듯이 성령의 열매도 육체의 열매 속에 들어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옥 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4강-갈 5장 18-21(육체의 열매)1809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8-21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18-21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도바울이 뭔가를 압니다. 뭔가를, 모든 것을 통합해서 안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천국 갔다 온 사람에게나 해당이 될 일이에요. 세상의 끝까지 다 가보고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아, 세상은 이것밖에는 안 돼, 라고 종합진단을 내려놓고 그 다음에 다시 이 땅에 왔다면 자신만만하게 사도바울 같은 고백을 내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었다가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가신 분의 마음, 성령이라고 하는데 그 성령, 하나님의 영이 다시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본문 보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것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하늘나라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가 국가나 민족 또는 아시안게임 같은 것에는 하나님은 관심이 없고 성령께서 우리 개인적인 내부를 주목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우리 내부를 주목하느냐 하면, 우리는 죽어도 사회는 그대로 있거든요. 고려시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고려라는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망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개개인은 죽어 없어져도 사회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에 현존하고 있는 이 사회가 인간보다 길다가 여겨지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요.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뭘 알려주지 아니하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회는 안 죽으니까. 죽는 것은 개인이 죽지 사회가 죽는 것은 아니거든요. 

짐승이 죽는다든지, 벌레가 죽는다든지, 식물이 죽는다는 그것도 역시 피조물의 썩어짐이니까 죽음의 일부가 될 수는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관심 두는 것은 인간의 죽음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네 안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것이 인간 안에 들어 있어요. 코끼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사슴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안에 들어 있어요.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뭔가 작업을 걸 수 있는 요건을 거기에 집어넣은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사회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을 때 그 죽음과 하나님이 하는 작업과 관련성이 유일하게 있는 데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것은 고래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박테리아도 아니고 인간 속에만 인간의 죽음과 하나님의 죽음이 관련성이 있어요.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뭘 발췌해내느냐 하면,

인간의 죽음의 보편성을 끄집어내서 인간의 죽음의 보편성을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면 죄의 보편성과 연관을 시킵니다. 죄의 보편성으로 연관을 시켜버리면 어디까지 연결되느냐 하면, 의의 보편성으로 연관이 돼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인간이 죽는 이유, 착실하게 살고, 공부 많이 하고, 책 많이 내고, 열심히 선교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그것이 죄의 보편성에서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가, 요건이 못돼요. 네가 어떻게 살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든 인간은 필히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죄가 네 행함보다 더 월등하고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마음껏, 자기 딴에 선하다고 여기는 것은 다 해보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성취나 실현이 피조물의 행함의 차원에서 완료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죄를 끄집어내기 위함이고 그 죄는 보편성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남보다 더 낫게 되면 나의 미래가 나에게 유리하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 그 잘못된 생각이 개인을 통해서 계속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찾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에게는 장래의 운명이 이미 벌써부터 적용되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장래의 운명이, 우리가 가보지도 않은 어떤 덩치가 벌써 우리 인생 속에 계속해서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간섭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는 거예요. 다스리고 있는 거예요. 

장래의 일, 이미 결정된 사항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 개인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내 미래를 결정한다는, 완전히 완결 짓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이것을 또 내세우게 됩니다. 그 격돌하는 장소가 인간의 심성이 되고 인간의 본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하나님께서 볼 때 인간은 없어지고 육과 영의 대결장으로 인간을 주시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하나라고 여기지만 나올 때는 육으로 나오고 영으로 나오고 두 가닥으로 나와요. 물론 성도에게만 해당되고 불신자는 그런 것이 없어요. 불신자는 육만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검은 색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검은색이지만 거기서 두 가닥이 나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어두컴컴한 동굴처럼 보이잖아요. 밝은 대낮같은 인생을 살다가 숨 끊어지면 어두운 한 곳에 간다. 그 미지의 곳, 알 수 없는 곳. 

그런데 그곳이 두 가닥이에요.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 있는 어두운 동굴 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직까지 다 살지 않아서, 아직 죽지 않아서 모르는 그 세계가 일찌감치 확정된 운명으로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의 몸은 그 미래의 결정된 계획에 준해서 육이 되든지 영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의 기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둘 중 하나에요. 그것은 변경될 수 없어요. 바꿔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은 벌써 알고 있어요. 우리의 몸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자는 겁니다. 어제 장례식에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형님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걸 제가 수정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땅에 남겨진 거지요. 

우리가 정신 좀 차립시다. 고향이 어딘지를. 이쪽이 고향이 아니에요. 여기에 미련두면 안됩니다. 떠나야 될 곳을 먼저 떠난 거예요. 그것도 순서대로. 장례식장에 가보세요. 한 구에 18만원 합니다. 18만원 주고 장례 치르는데 줄을 죽 서 있잖아요. 기다리다 보면 그 줄이 보이거든요. 우리 인생의 줄은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줄을 서 있어요. 

하루에 백 명씩 치르니까 하루 지나면 줄이 백 명 앞당겨져 있어요. 제가 보기에 앞당겨진 분들 여기에 많이 있어요. 젊은 분들은 아직 저 뒤에 있다고 장난치고 축구보고 2대 1로 이겼다고 좋다고 하는데 줄 죽죽 빨리 빠집니다. 죽죽 빠지고 있어요. 줄 서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걸 사도바울이 미리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육이야, 아니면 영이야, 라고 묻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알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의 이 말을 누가 말릴 수가 없어요. 교회라는 것이 결국은 유사흉내를 내는데 해방 후에 오영진이라는 작가가 희곡작품, 연극대본에 이런 것이 있어요.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남들은 일제치하에서 압박을 받으며 살았는데 이 사람은 친일을 하면서 온갖 비리, 이기주의로 목재소 만들어서 돈을 떼로 벌었어요. 광복 후에도 계속해서 비리를 일삼다가 경찰이 그 비리를 알고 쳐들어오니까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 지키고 안 잡히겠다고 술책을 쓴 것이 ‘나 죽었습니다’ 하고 죽은 것으로 꾸몄다 해서 이름이 이 중생이에요. 

죽은 체 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을 체포하지는 못하잖아요. 그렇게 장례를 치렀어요. 그런데 그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 주인공 이름이 이 중생(重生), 거듭남이에요. 실제로는 본인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도 교회 나가서 ‘나 거듭났다’고 우기는 사람들 있잖아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어쩌면 그것과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돼요. 

이미 죽은 자로 체포도 안 되고 신나게 사는데 아들이 일제 때 징용 나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그 허세를 알고 나무라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이중생이라는 그 아버지가 진짜 자살해서 죽어버렸어요. 그런 코미디 같은 희곡이 있습니다. 주인공 이름도 이 중생(重生), 요한복음 3장 8절. 영으로 다시 거듭난다는. 

오늘 본문 19절부터 죽 카테고리가 나와요. 죄의 범주가 나온다고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카테고리가 죽 나오고 그 뒤에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가 나오니까 바짝 긴장하는 겁니다. 

‘나 이런 짓 안해야지.’라는 식으로. 이 중생이 따로 있습니까? 마음은 이 세상에 가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쪽으로 다 가 있으면서 성경에서 천국 못 들어간다는 대목이 나오니까 이런 것들을 피해보려고 죄의 항목들을 기억했다가 “나는 안했습니다. 이것 피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 잘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극복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늘어놓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을 너무 좁게 봤기에 그렇습니다. 너무 가볍게 본 거예요.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는 일이 뭐냐?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거예요. 살고자 한다는 그 자체가 육이에요. 

하관할 때에 죽은 사자에게 깨끗한 사람의 옷을 입히거든요. 모시옷으로 입히는데 그게 바로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그 모습이에요.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사람의 옷을 걸치고 마치 사람인양,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인양 그렇게 행세합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 19절부터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죽 나오니까 갑자기 살아 있는 것을 계속 한번 살려보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이걸 피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카테고리, 이 항목들, 죄의 범주들은 필히 나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라는 증거물을 네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뽑아내 주는 거예요. 간호사가 주사 놓고 혈액을 뽑듯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가지고 주사를 놓게 되면 필히 이런 것이 나옵니다.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음행 나오고, 더러운 것 나오고, 호색 나오고, 우상숭배 나오고, 술수 나오고,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이런 것들이 주사기에 뽑혀서 나와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 이런 것들이 나한테 있었구나.’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살아있는 거예요. 죄가 살아있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가 살아있는 것을 두고 우리는 그저 덮고자 열심을 내요. 그저 덮을 생각만 해요. “주여, 믿씁니다. 싸랑합니다.” 쌍시옷 넣어가면서 열심을 내가지고. 

그러고는 분쟁이나 분리가 나온다 치면, 저건 이단이라고 하고 욕을 하면서 자기는 마치 아닌 것처럼, 나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는 것처럼 하는데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했잖아요. 죄의 보편성이라고요. 그렇게 착하면 왜 죽습니까? 

죽는다는 것, 죽음의 보편성 이전에 이미 죄의 보편성을 주께서는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하고 계신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몸입니다. 죽은 몸인데 죽은 몸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거든요. 어차피 죽은 몸부터 내가 다룰게, 라고 보여주는 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을 애굽에 먼저 갇히게 만들었어요. 애굽에서 못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열 재앙을 때렸지요. 열 재앙을 때리고 마지막 재앙이 뭐냐 하면, 애굽에 살던 모든 맏이는 다 죽는다. 

맏이라는 것이 뭐냐? 육의 적나라한 모습을 집약해서 보여준 거예요. 왜냐하면 맏이를 아비의 첫 번째 기력(창 49:3), 힘, 에너지라고 본 거예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자기 안에 약동하고 펄떡이는 그 힘을 보고 싶을 때는 뭘 로 보느냐 하면, 첫 아들이 날 때 그 아들의 모습이 내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 기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맏이 놓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모든 민족의 보편적인 문화가 조상숭배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아들이 나를 기억하겠지. 제사 드려주겠지.’ 조상숭배, 제사가 모든 민족에는 예외 없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주목하고, 어디를 표적삼아 미사일을 날리느냐 하면, 그 아들을 끊어버려요. 

그 아들이 죽는다는 말은, 죽을 아들을 네가 낳았다는 말은, 아비야, 백날 아들 낳아봐야 아들 낳으면 죽이고, 아들 낳으면 죽이고, 아들 낳으면 또 죽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할 그 정도로 육은 죽음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음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렇게 죽을 인간 같으면 낳기는 왜 낳게 했습니까? 왜 살려주십니까?” 너 좋으라고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샘플로 사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먼저 죽는다면 그 분은 나의 샘플이에요. 샘플이라는 말은,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알려주는 것이 샘플이라는 겁니다. 타인은 나의 샘플이고 나는 또 타인의 샘플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우리는 같은 범주에 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파트에 각 동호수가 많지요. 201, 202, 203, 많지요. 아무리 아파트에 각 호수들이 많더라도 곽 지어진 같은 동에 다 포함이 되잖아요. 같은 동에 있으면, 여름에 에어컨 과부하 걸려서 정전 되면 같은 운명입니다. 다 같이 정전돼요. 빌라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고소하기 짝이 없어요. 이게 시기와 질투라는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에요. 뭘 잘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남에게 일어나는 그 불상사가 바로 나에게도 진즉에 일어났어야 될 일이에요. 외제차 몰고 칼치기 운전하다 여배우 태우고 들이박더라도. 왜 성질이 급하냐고 하는데 남은 안 급합니까?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 하면, 결코 그런 일이 이미 잠재적으로 내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다. 그거 가지고, 나는 잘 되었다고 하지 마세요. 너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서 18명 죽인 겁니다. 너도 같은 동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죽음, 같은 죽음밖에 없는데 성경에서는 그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을 또 이야기해요. 이게 복음입니다. 우리의 보편적 죽음을 낳게 한 원천죽음이 있어요. 

그 죽음을 말씀드리면,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것이 함유된 죽음, 그 죽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생이라 하는 거예요. 

영생은 죽음 속에 들어있지 죽음바깥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죄 속에서 찾아야 돼요. 사도바울이 육의 열매의 카테고리를 좍 나열하고, 다음 시간에 살피겠지만 성령의 열매의 카테고리도 있잖아요. 사랑, 희락과 화평과……, 이렇게 나열하니까 사람들은, 육의 카테고리는 제켜버리고 이제는 영의 카테고리를 내가 행함으로 열매를 맺으면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의 카테고리,

성령의 열매는 어디서 찾느냐? 
육체의 카테고리 안에만 있어요. 순서가 육의 열매 그 안에 들어가야 천국의 입구가 그 안에 들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부터 찍어냈지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파가 그래서 이단이에요. 구원파만 이단이겠습니까? 세상 교회와 성당까지 다 마찬가지지만. 주님께서 이사야 53장에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 대신 죽음의 그 특수한 죽음, 유일한 죽음, 그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편적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자식 낳고 번식하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악마의 통치를 받는다, 지옥 간다, 여기서 지옥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악마가 늘 상주했기 때문에, 늘 거기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께 양도받은 지배력, 악마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그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 그게 지옥이에요. 

하나님께 위임받은 통치를 가지고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면서 그걸 행사하는, 그걸 실행시키는 그 영역이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이라 하는 것은 악마가 간 곳에 합세하는 것이 지옥이거든요. 그런데 벌써 인간세상 자체가 이미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 양도된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그게 욥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보고, “맘껏 인간을 통치해 봐라.”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한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천사니까 통치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쓸데없는 것, 성도한테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어떤 것을 배웠느냐? 예를 들어,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그게 악마의 소리고 악마에게 배워서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악마에게 배운 그것이 죄의 보편성이에요. 그대로 교회에 다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다 들어왔는데, 어떤 목사가 죄에 대해서 설교할 때 고객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설교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오늘 읽었던 본문인 거예요. 

“여러분, 육의 열매가 이런 것들이니 여러분은 그것들을 피해야 되고,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 천국에 가지 만약에 이런 것에 걸리면 천국 못갑니다.”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 항목들 다 몇 개입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 총 15개입니다. 

수능과목이 열다섯 개에요. 과탐, 사탐에다 역사, 선택과목이 전부 15개 과목인데 사도바울이 이걸 언급하는 것은 열다섯 과목으로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대로 카테고리가 늘어나는 거예요. 지킬 수 있거든 한 번 지켜보라는 겁니다. 

더 세밀화 시키면, 더 간격을 촘촘하게 깔아버리면 수백 개, 수천 개 무한대로 늘어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것을 지켜서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재주가 있는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육의 열매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의 열매는 근처도 못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의 카테고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가 있어요.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구름 위에서 직접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예수의 말이 아닌 육의 부모부터 해서 세상적인 말, 세상의 말이란 말은 다 듣고 살아요. 그 기억들이 우리 내부에 쌓입니다. 육의 열매가 이미 꽉꽉 차 있어요. 살면 살수록 그게, 육의 열매가 더 쌓입니다. 

사람 말을 들어요. 주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사람 말을 듣는다고요.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사람 말도 듣고, 주의 말도 듣고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사람 말과 주의 말이 비슷하면 들으면 되는데 이쪽은 악마가 지배해서 악마가 가르치는 동네고, 주님의 말은 그 악마로부터 피해 받고 배척받은 분이에요. 

생각이 같은 것이 아니에요. 대척, 서로 충돌한다니까요. 이렇게 설명해도 여러분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세상 말을 듣는지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맹자라는 옛날 중국의 고대철학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어요. 

인간은 네 가지의 본성이 있고 일곱 가지의 욕정을 가졌다 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착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성선설이라, 날 때부터 인간은 선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성선설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되어 있는데, 인의예지, 인자하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식이 있다는 것. 인간이 태어날 때 이렇게 아주 곱게 태어났다는 거예요. 곱게 태어난 그것이 내부에 감춰져 있거든요. 감춰져 있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바깥에 튀어나오게 되면 4단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단(端)이라 하는 것은 실 끄트머리, 실이 있으면 풀리는 그 끝 지점을 단이라고 해요. 실마리입니다. 실마리가 뭐냐?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볼 때 불쌍하게 여기는 것. ‘참 안되었다. 일본이 2대 1로 지다니.’ 이런 것 있잖아요. 측은지심입니다. 별로 측은하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수오지심(羞惡之心), 나쁜 짓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사양지심(辭讓之心), 남이 좀 잘 되어도 겸손하고 양보할 수 있는 미덕입니다. 그 다음에 시비지심(是非之心), 시비지심이라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거예요. 

동양철학에서는 맹자가 그렇게 했지요? 서양철학에서 플라톤도 못지않아요. 네 가지의 덕이 있어 한다고 했어요. 그걸 4주덕이라 합니다. 전체 사회는 정의로워야 되고, 지도자는 지혜로워야 되고, 무사계급은 용감해야 되고, 생산계급, 노동자 농민은 절제해야 된다. 그래야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그게 나오는 겁니다. 

이걸 분석하면, 인간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나눠요. 나눠서 정신노동을 하는 자가 육체노동을 하는 자를 지배해서 계급화시키는 겁니다. 이게 조선시대부터 벌써 나왔어요. 양반과 상민, 두 개의 차원으로 나누는 거예요. 윗계급이 아랫계급을, 또 다른 말로 하면 글을 아는 계급이 무식한 계급을 지배해서 점잖은 쪽이 개망나니를 다스려줘야 나라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회가, 국가가, 민족이, 우리 가정이, 집안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는 거예요. 집중을 어디에 하느냐 하면, 사회, 국가에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께서는 어디를 주목한다? 인간의 영혼에 주목하는 거예요.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보면 인간은 죽을 때 되면 죽겠지, 하면서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있잖아. 우리 미래의 세계, 우리의 문명, 우리 인류의 고귀한 지혜는 무궁하리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계속 간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영원함을 손에 쥐겠다는 겁니다. 

너는 죽더라도 우리 가문은 빛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가정과 가문은 빛내야 돼요. 그러려면 꽂이, 고기와 고기를 꽂이에 끼워서 만든 음식처럼, 제사를 가지고 우리 집안을 계속 키워야 된다는 거예요. 광산김씨 같은 것. 안동권씨가 경주이씨. 광산김씨 이야기 이제 그만하라고 하네요. 그 프로 안보는 사람이 많다고. 

계속 이걸 끼워나가야 되고 여자가 시집온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너는 우리 집안의 일부라는 겁니다. 살아 있는 것을 계속 살리겠다는 그것, 그것이 인간의 정신이에요. 악마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 섞지 마세요. 진심이 하나도 없어요. 살고자 하는 자체가 진심이 없어요. 

제가 어머니 장례 치르면서 죽음과 삶이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습니다. 살고 난 뒤에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음에 완전히 포장되어 있어요. 죽음으로 포장되어 있어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잠 잘 때. 

이게 평소에 주무시는 모습인지, 운명하신 모습인지 구분이 안돼요. 똑같아요. 똑같이 주무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냐? 우리가 죽음에 둘러싸였다는 표시가 잠잘 때입니다. 잠잘 때 동영상으로 찍어보세요. 안 죽어봤으니까 그게 잠자는 것으로만 보이지요. 타인은 나의 샘플이에요. 남 잠자는 그것이 우리의 죽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설치던 우리의 행함이 중지되는 곳이에요. 행함이 중지되는 겁니다. “그만해라. 미치겠다, 내가.” 행하는 것을 못 보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멋도 모르고 자꾸 주께서 값없이 주는 이 생명을 어디서 오는 것도 모르고, 값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계속 써먹기만 한 거예요. 계속 소비만 한 거예요. 

소비하면서, 건방 떨면서. 음행하면서 소비하고, 더러운 것 하면서 소비하고, 호색하면서 소비하고, 우상숭배하면서 소비하고, 술수하면서 소비하고, 원수 맺는 것으로 소비하고, 분쟁하면서 소비하고, 시기하면서 소비하고, 분내면서 ……, 화는 왜 내는지 몰라, 분내면서 소비하고, 당 짓는 것으로 소비하고, 분리하는 것으로 소비하고, 이단으로 소비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면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그 귀한 목숨의 은혜를 우리는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이 목숨을 누가 대신해서 영생 주는지도 모르며, 출처도 모르고, 어떻게 도와주시고 살려주는 것도 모르면서 소비하고 있어요. 양초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다이너마이트의 심지가 계속 타들어가는 것처럼 그냥 빼먹기만 해요. 잔고가 많이 남은 것처럼 계속 카드를 계속 긁고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빠라빠라빠라빰, 이러고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성도한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마치 거북이의 목과 같습니다. 목 내놔 봐라 거북아. 영생 내놓으면 영생으로 가고요. 지옥 내놓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숨지 말고 목을 한 번 내놔봐. 어떤 모습인지. 

주님께서 의인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 부르러 온 거예요. 그 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은 뭐냐? 죄 짓는 것만 하세요. 딴 것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죄 짓는 것만 하세요. 왜냐하면 이사야 53장에 보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거든요. 

그 대신하심의 내용을 위해서 우리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사항을 내놓으면 돼요. 죄 짓는 것만 하라니까요. 성도 아니면 못합니다. 그놈의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조심하게 돼요. 조심에 또 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게 사단칠정이거든요. 그거 해놓고는, 나 왜 이렇게 착하나,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칠정(七情)이라 하는 그것은 인간의 정욕인데 그것은 착함이 칠정이라는 것, ‘희노애락애오요(喜怒哀樂愛惡慾)’이라 것이 있는데 그것을 조절해야 도 닦는 선인군자가 된다는 겁니다. 선인군자가 이미 된 사람은 덜 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그래서 양반계급이 정당화되는 거예요. 이게 조선시대의 성리학이에요. 

기쁘고, 분노하고, 슬프고, 두렵고, 사랑하고, 그리고 부끄럽고, 탐내고. 이러한 것들, 그런 카테고리를 가만 생각해보시고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 이렇게 나오지요. 그런데 이미 교회 온 사람이 예수님의 말은 뭔지도 모르고 이미 악마가 통치하는 악마의 이야기를 이미 줄곧 들어왔거든요. 

들어왔으니까, 물론 맹자의 성선설도 잘 모르지만 뭔가 선과 악을 아니까, 나는 스스로의 행함으로,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이왕 한 평생 사는 거 착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야 되겠다는 욕구가 있거든요. 그런 욕구로 교회 와서, 교회 오기 전까지도 착하게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한다고 협박 공갈을 놓으니까 ‘교회 가 주자.’ 해서 아내 말 듣고 왔는데 와 보니 이제 예수 믿어야 되거든요. 

예수 믿으니까 예수 믿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더니 보니까,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까 교회 실컷 다니고 본전도 못 찾으면 안 되잖아요. 본전 찾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항목들 보면서 주의하고 조심스럽게 하는 겁니다. 

왜? 본인은 성선설이거든요. 맹자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모든 인간은 자기만 구원, 괜찮은 인간, 더 살아야 될 가치 있는 인간으로 자부합니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남이 나를 스크래치 할 때 분노해요. 나를 놓고 험담할 때 분노합니다. 

분노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보기에 별 문제가 없는데 왜 나에게 시비를 걸고 나를 험담하느냐는 그것 때문에 분노하거든요. 거기서 생기는 것이 분리함과 투기함과 이단과 당 짓는 거잖아요. 하여튼 건드리면 나와요. 이 육체의 열매가. 

그러니까 이 중생처럼 그걸 감추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육체의 열매는 피하고, 이런 나쁜 짓은 안하고, 그 다음에 후딱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성령의 열매 쪽으로 가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쪽으로 매진하고 여기에 온 성의를 다 표하는 겁니다. 위선자고 이중생이에요. 이중인격자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먹히느냐? 왜 교회에 그게 먹힐까요? 이미 악마의 지배를 고스란히 그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내가 알다니, 그것은 악마가 집어넣어줬는데 이걸 뺄 생각을 못하고 마치 하나님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어줘서 착하게 살라고 격려하는 줄 알았던 거예요.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세상 말만 들었어요. 주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착하게 살아라, 하는 그것을 주의 말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교회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 줬겠습니까, 여러분! 지키라고 준 것입니다. 왜 지키라고 줬습니까? 지킬 만해서, 그런 능력이 있기에 지키라고 한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 믿고 좋다고 끝나지 말고 이제부터는 정신 바짝 차려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착함에 열심을 내시고 더욱 더 착하게 사세요. 구원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달려갑시다.” 

달려가 봤자 지옥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주께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영광이 아니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영광이에요. 

“너는 안 돼. 왜 그래? 미쳤어 너? 너는 원래 안 돼. 너는 지옥이야, 지옥행이야.” 그러한 주님의 이야기,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으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것이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면이 서요. 아버지의 면이 선다고요. 아버지의 명예가 서요. 살아나요.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짓을 안 하면 되지 안 되는 것을 왜 꾸역꾸역 하려고 합니까? 

지금 안하고 있으니까 내가 마음대로 외치는 거예요. 안하고 있으니까.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만, 교회 헌금하는 것은 창문열고 돈 갖다 뿌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뭐든지 행위를 하게 되면 반드시 어떤 대가를 요구하잖아요. 헌금하는 것은 낭비하는 겁니다. 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돼요. 

이상하게 이게 헌금 강요하는 것으로 또 비춰지네. 낭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셔야 됩니다. 자기 인생 어차피 버린 몸이에요. 왜 그걸 쥐고 꽃단장 합니까? 하관예배입니까? 왜 죽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왜 그래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어요! 무슨 제목인데 죽은 놈이 프라다를 입는다고요, 프라다를. 프라다, 명품옷을 입잖아요. 

서로 문상하면 돼요. “아직도 살아계십니까, 안 죽고?” 이런 식으로. “아직도 주께서 안 데려가셨어요? 내가 보니 줄이 별로 길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주께서는 대신 죽으심을 위해서 죄를 아는 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 죄를 아는 자는 그냥 죄를 아는 것뿐만 아니고 그 아는 죄에서 알았다고 쳐도 못 빠져 나오는 사람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그 죄는 인간의 선악과에 막혔어요. 인간의 선악과는, 악마의 통치는, “너는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네가 선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선한 구석을 쥐면 너는 천당 간다. 네가 회개하면 구원받는다.” 그렇게 나와요. 

회개하는 그것까지 다 발라내야 돼요. 화장터에 가니까 어떤 분이 설명을 아주 친절하게 해줬어요. 빼빼한 사람은 화장하는데 오래 걸리고 살찐 사람은 화장이 빨리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뭔가 고기도 멋들어져야 다시 재발아가 되거든요. 삽겹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있어야 빨리 붙어요. 아무것도 떨어지는 것이 없으면, 뼈만 남아 있으면 오래 걸린다고요. 

죄가 있어야 용서가 있어요. 지옥을 느껴줘야 주님의 천국이 보입니다. 자기가 착한데 무슨 천국이 보입니까? 지가 완벽한데. 50년, 60년 열심내면서 목사 말 다 들었는데 그 사람이 이 세상이 좋지, 그리고 남과 비교해서 자기자랑질이나 하지 어떻게 이 땅을 떠날 생각을 하겠어요. 

지옥 같은데서 오래 버티면 뭐합니까? 부지런히 죄를 적금 넣으세요. 이자 쳐줍니다. 2.5프로. 새마을금고는 더 쳐주지요. 이 죄, 오늘 본문의 열다섯 가지 육체의 열매, 한 번 보세요. 해당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가만있어도 와서 건드려요. 분노를 유발하게 해요. 

왜?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시다. 점잖은 나를 건드려요. 시기 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점잖은 체 하지 마라. 또 잊었나?” 주의 말씀은 생각이 안 나고 또 마귀 말을 들어서 ‘나 착하다’는 선악구조에 의해서, 악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기에 나는 괜찮다, 이것으로 남과 시합하고 대결구조 벌이실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행함은 아예 보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죽음만 보십니다. 매 맞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 분의 죽음을 빛내기 위해서, 그 죽음과 관련된 사람을 이미 확정된 운명을 가지고 주님의 영이 찾아온 거예요. 

“너 나와 관계있다. 내가 너를 죄인으로 만들어줄게. 그래서 너는 죽는 것이 마땅함을 내가 너에게 통보해 줄게. 내일도 산다고 네가 기대하지 마. 그것은 네 몫이 아니고 네 권리 아니야.” 언제든지 데려가면 가되, 가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영원히 잠자는 겁니다. 얼마나 고생들 했습니까? 

꼭 마지막 순간 같다. 참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는 구경꾼으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착함, 율법 주셔서, 말씀 주셔서, 우리가 스스로 착하다고 여길 때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깨우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7장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게 성령 안 받으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사망의 몸. 자기 몸이 사망이 밑거름 된 몸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게 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아까 집사님 기도에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교회 영원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서 깜짝 놀랐는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말립니다. 예수님 죽지 말라고. 

우리가 죽어야, 이미 우리는 미래의 영생이 우리한테 장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날마다 체험하는,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로만 우리가 영생을 얻음을 자랑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그네라는 말을 입술로만 이해했는데 참으로 우리는 1400도 불속에 놓여 있는 입장에 있음을 우리가 잊어버렸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당겨지는 이 세월 살면서 우리는 주님 데려갈 때까지 왜 세상이 지옥인가를 마음껏 구경하는, 신나게 구경하는 자유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