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믿음
2018년 7월 29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5-6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효력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것을 받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원인이 되는 식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하려고 하는 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일은 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효과를 얻는다면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효과를 기대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효과 유발자로 상정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인간이 행한 모든 것이 효력이 없는 것으로 단정 지어진다면 이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의미합니다. 즉 천국 입성은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의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있어 인간 존재는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3:16-17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사랑하시는 분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몸을 하나님의 존재와 결부시키게 하십니다.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하나님께서 확정지으시면서 ‘사랑’의 모델를 굳혔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자신을 모델로 두고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효력없이 된다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몸’과 ‘우리 몸’을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 몸과 단순히 다른 몸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몸에 의해서 떠밀려서 돌아가신 몸이십니다. 즉
인간의 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몸이신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 예수님 몸으로 인해 밝혀진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 몸 가지고 예수님이 가 계시는 천국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되려면 몸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바뀌어지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이 되려면 예수님이 가셨던 코스를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완성한 것이 있으니 바로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즉 십자가 사건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사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사건으로 나타남’이란 존재자로서는 그 사건을 취득하거나 소유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건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보여줄 때만 보여주고 휑하니 없어지는 겁니다. 원할 때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도 이 사건화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이 땅에서 몸으로 계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몸’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몸이 인간 세상에 나타날 때는 ‘사건된 몸’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죽을 몸’도 부활의 몸으로 살려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먼저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는 그 효과 있는 혜택을 주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이렇게 되면 오늘날 성도의 몸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흔적이요 증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자신의 몸으로 획득한 믿음을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 안에는 두 종류의 믿음이 대치되면서 다른 믿음은 철저하게 십자가 사건으로 분해되어야 합니다. 부정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사랑이 보이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몸 자체는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곧 인간은 뭐든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몸에 의해서 구성된 환경은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쁜 사람이 심은 감자가 예쁜 감자를 얻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남들 보기에 예쁜 사람이 예쁜 포즈로 감자를 심지만, 일단 감자씨가 땅 속에 들어가면 거기는 새로운 환경 속에 놓이게 됩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경 작용에 의해서 감자는 결정됩니다. 사람의 행함으로 자기를 예쁜 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란 환경에 의해서 기존의 몸을 죽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몸만 고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몸 앞에서 성도의 몸은 그저 ‘일시적 사건’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인생을 길게 오래 살아도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다시 왕래하신 성령님이 보시기에 그저 한순간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사건에 불과합니다.
즉 십자가 사건 자체가 모든 존재의 마감을 제대로 소개하시는 겁니다. “너는 단지 사건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이 선물로 성도에게 주어지면 성도는 비로서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이란 둘(2)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제거하게 됩니다. 즉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라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사랑 앞에서 자책하는 것도 예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반성해대는 것은 일종에 아직도 자기 의로움에 미련 두고 자기를 아끼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개란 ‘후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모든 것 불만스럽지만 사랑하는 분을 만났다면 더 이상 자기는 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저주와 심판을 넘쳐 흐를 겁니다. 일종의 배설물로서 평생을 두고 계속 빠져나와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히를러 죽어셔야 했는가를 두고 두고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성도는 일종의 철갑옷 안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있어 예수님께서 보시는 식대로 세상을 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주의 일이 있을지언정 자기 일은 없습니다. 성도는 즐거히, 마음껏 무능할 수 있자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만나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 은사로 존재가 사건으로 분해된 자들끼리의 만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끼리의 만남입니다. 주눅 들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빼놓고 다 시야에서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9강-갈 5장 5-6(사랑의 믿음)1807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5-6절입니다. 신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뭐가 없다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실시한다고 해서 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없다고 이야기한 것에 유념하라. 없다고 이야기한 것에 유념하라. 뭐가 없느냐? 할례 받은 것 소용없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할례는 모든 율법의 시작점이요 마무리도 할례가 되거든요.
할례 받은 것도 구원받는데, 천국 가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 효력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러면 할례를 안 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무할례도 효력이 없다.
할례라고 하면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냥 율법 지킨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것자체도 천국에 소용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말씀을 안 지키면 될 것이 아니냐?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 안하면 되고 주일성수 안하면 될 것이아니냐? 그것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왜 없다는 이야기를 구태여 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하라는 겁니다. 없다는 말을 섞어넣지 아니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것이 뭐냐?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이 땅,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전제로 하고 천국이 있는데요.
물론 이 땅은 덥고 지옥 같지요. 지옥이지요. 그러면 천국은 이 지옥 같지 않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냐? 네가 사는 이 세상 같지 않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참 사도바울은 쉽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교회 다니면서 뭘 생각하느냐? “목사님, 뭘 지키면 됩니까? 뭘 행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사도는 말합니다.
“천국은 뭘 행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야. 천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야. 뭘 하고, 십일조를 하고, 그런 것이 아니야.” 교회 나와 주고 그런 것이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력하는 세계에서 노력 없는 세계로 가는 겁니다. 거저 주는 세계로의 입성, 그걸 여러분이 이해했다면……,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걸 이해했다면 ‘신난다’에서 머물면 안 되고 왜 노력하는 것이 문제인가, 노력하는 것이 어디서 잘못되었기에, 노력이 왜 틀려먹은 짓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사도의 취지에 따라줘야 돼요. 노력하는 세상,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인생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었다 하잖아요.
노력하는 세상에 살던 사람을 노력이 없는 곳에 보내려 하니 주님께서는 노력하는 그 습성과 습관을 내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노력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우리로서는 사도바울의 이러한 기쁜소식, 복음에 대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저항을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저항에 의해서 효력 없다는 그 소리에 불쾌해서 왜 이렇게 효력이 없느냐고 대들 때 우리는 이미 주어진 천국의 원리와 그냥 살던 대로 천국 갑시다, 라고 우기는 그 지옥의 원리가 상충되고 충돌 되겠지요. 그 충돌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일로 사도바울이 십자가사건을 내세우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어떤 아저씨의 몸이 죽었고 그 다음에 그 죽었던 몸이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소식은 있는데 보지는 못한 몸. 복잡하지요. 무덤에 가보니 무덤에 시신은 없는데, 그리고 어떤 사람이 사건적으로, 우발적으로 봤다는 사람은 있는데 보편적으로는 못 보는 몸.
세상에서는 어디에 몸이 있으면 찾아가서 보면 돼요. 몸이 거기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몸은 찾아가도 보이지 않는 몸이에요. 보이지 않는 이쪽에서 잡으려고 하니까 잡히지 않는 몸. 잡히지 않는 몸 같으면 아예 입 다물고 조용하게 있어야 되는데 또 본 사람은 있대요.
주님이 살아났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대요.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발적으로 등장한다는 이 긴 문장을 간단하게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은 바람 같아서 등장할 때만 나타나고 그 다음은 사라지잖아요. 그 사건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이쪽을 두자로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존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있음, 존재. 존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람 같은 사건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잡으면 존재 입장에서는 없으니까 비존재라고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가만있으면 또 나타나네? 잡으려면 못 잡고, 가만있으면 나타나고.
나타났으니 그것은 있음이 되는데 있음인데 있는 것도 아니고. ‘현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사건이 나타날 때는 그냥 존재라고 하면 안 되고 현존이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분명히 있다. 있는데 존재가 그것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약을 올리는 식으로 천국을 주려면 확 주지 감질나게 나타나고 내빼고, 나타나고 내빼고,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것은 천국에 가려는 이 존재로서는 안 되고 이 존재를 십자가사건으로 파생된 연발된 사건으로 완전히 쪼개서 분해시켜야 돼요. 쪼개서 존재가 사건으로 분해된 상태에서 주님과 더불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고기 잡아놓고 고기를 손질해야 되지 않습니까? 제주도 은갈치를 막 토막 내듯이 우리를 하나의 사건으로 토막 내는 거예요. 토막 내면 수술해야 되느냐? 아니요.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아도 나중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평생이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주님께서 그렇게 칭해주는 겁니다. 너는 평생을, 90년을 살아도……, 90년이 기분 나쁩니까? 10년을 더할게요. 백년을 살아도 한줌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짧은 사건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보기에는 긴긴 인생 같지만, 제주도 갈치같이 길어진 지겨운 인생, 긴긴 세월 같지만 주님의 사건 입장에서는 잠간 나타났다고 사라진 토막사건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게 사건화 될 때 우리는 나의 있음을 보는데 왜 당신은 그걸 사건으로 보십니까, 이렇게 우리한테 물으면, 인간은 왜 존재하고, 인간은 왜 화를 내고, 인간은 왜 분노하고 하나님께 대드느냐 하는 그 모든 의미는 인간이 존재에서, 그 있음에서 아무리 분석해도 안 나오고요, 십자가사건, 그 사건을 두고 볼 때 인간은 왜 태어나야 되며, 왜 살아야 하며, 인간은 왜 하나님께 대들어야 하며, 그런 인간을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천국에 넣어야 하는가? 그것은 십자가 사건 안에 함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사건 안에 어떻게 함축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사건에 죽었던 당사자가 한분이에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 죽었던 몸만 사흘 만에 부활시킨 거예요. 다른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만 부활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사건 안에 주인공인 예수님의 몸이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가 들어있다고요. 거기에 비해서 우리존재는 따로 있거든요. 결국은 십자가사건중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드러내겠다는 말은, 비교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과 네 몸이 둘 중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것이 사랑받을 몸이냐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구름 위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쉽게 말해서 네 앞에, 네 눈에 몸 보이지? 그 몸이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몸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네 몸 따라가지 말고 저 몸 따라가야 된다고 주께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몸과 몸의 만남이에요.
예수님의 몸이 천국에서 받아주는 몸이냐, 주께서 죽어도 부활시키는 몸이냐? 아니면 우리 몸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 몸, 이 몸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살해한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내친 몸이기 때문에 이 몸을 천국에 넣어주지는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몸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부활의 첫 열매는 우리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부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만 건집니다. 이 몸만 건지는데 그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예수님 몸 빼고 다른 몸에 의해서 저주받은 몸이에요.
밉상 받은 몸이고 싫어 버린바 된 몸이에요. 그 몸만 천국에서 받아주십니다. 그 말은 논리적으로 뭐냐? 우리 몸은 천국에 못가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가면 예수님 몸 하나만 달랑 있겠네, 라고 생각하겠지요. 오늘 본문 5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성령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쏘아대는 예수님의 몸의 영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선물이라 하고 은사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만 한 것이 아니고 그 때 비둘기같이 뭐가 내려왔느냐 하면, 성령이 내려왔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의 몸은 정말 내가 기뻐하는 몸이라는 근거가 뭐냐? 성령이 도달된 몸이에요. 성령이 장착된 몸이에요. 성령이 함께 있는 몸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성령을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기의 택한 백성,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에다 성령을 부어줘 버립니다.
성령을 부어줘 버리면 그 사람의 몸은 비록 죄 된 몸이라도 예수님의 완료된 몸의 모든 혜택이 그대로 무상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도달이 되어버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의 레벨의 입장에서 다루어지는 몸이 되어버립니다.
몸은 몸인데 기존의 몸에서 나오는 자아를 보여주는 몸이 아니고 예수님은 지금 현존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그 내용을 우리의 허접스러운 이 죄 많은 몸을 통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보이는데 성공시키는 겁니다.
그걸 다루시는 거예요. 그걸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몸이 성령이 없이는 아버지 뜻을 이룰 수 없어요. 예수님의 몸에 성령이 오니까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도록 성령께서 계속 촉구하시고 도와주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있을 때에도 성령이 와서 예수님의 죽은 몸을 성령으로 건져줬다고 되어 있어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죽어도 성령은 안 죽었다 이 말이지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시는 그 영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죽을 몸을 살리는 것이 성령의 주특기에요. 성령의 전문분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 앞에서 어떤 몸이냐 하면, 죽은 몸이에요. 죽은 몸이니까 존재라고 할 수 없고 죽은 몸을 통해서 발산되는 성령의 활동하심,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 하는데 성령의 은사가 마구 활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믿음을 좆아”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금 눈 감고 계시지 말고 성경 보시라는 겁니다. 눈 감고 성경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령 받으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좆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으로 믿음을 좆아.
나는 가만있는데 외부에 계신 주님의 현존, 주님의 살아계심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몸을 마구 다루는 거예요. 여기서 믿음이 나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믿음이 나오도록. 그런데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의 원판이 성령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러면 성령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의 몸이 들어있지요. 그러면 믿음은 뭐냐?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 땅을 사시면서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된 그 관계, 그 관계가 성령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마무리 지은 그 믿음이라는 관계, 그 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우편에 계셔서 이제는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믿음을, 자기 믿음이에요, 자기 믿음을 성령이라는 선물, 택배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평소에 우리한테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 여기 있음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나 여기 있음에 강력하게 집착합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이에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내가 나를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내가 하는 행위를 믿는 것, 내가 아는 것을 믿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실적을 남기는 것을 믿는 것, 이게 믿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졌던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우리믿음은 개코도 이것은 믿음도 아니에요. 오히려 믿음을 방해하는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짓거리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믿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 할례 행하는 것도 믿지 마시고, 나는 할례 안하는 것도 믿지 마세요. 신약에는 십일조 없습니다, 하니까 아주 사람들이 신이 났어요.
그러면 십일조 안 해도 되겠네. 십일조 하는 것도 믿어서는 안 되지만 십일조 안하는 것도 믿어서는 안돼요. 왜? 돈만 좋아하니까. 그것도 믿으면 안돼요. 교회 나오는 것도 믿지 말고 교회 안 나오는 것도 믿지 마세요. 이러나저러나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그런 노래 있잖아요.
이 존재는,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믿는 것이 이 몸을 믿거든요. 그런데 이 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문제성 있는 몸으로 드러났어요. 십자가사건이 우리 존재를 건드리게 되면 이미 인생의 몸의 모든 것을 아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이 연발로서 우리의 존재를 보여주면 우리 존재의 마감, 존재의 끝부분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네가 열심히 행했고, 율법 지키고, 율법 안 지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저주 받을 짓이고 심판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몸을 통해서 발산되는 것이 뭐냐? 저주받는 것만 나오고 심판받을 이유만 80평생, 90평생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저주받을 이유와 심판받을 이유, 그것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외 다른 것은 나오지를 않아요. 오직 그것만 나와요. 예수 믿는 것이 저주받을 짓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안돼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예수를 믿을까요? 답답해서.
나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 하는 것도 아무 효력도 없고 기도 안 해도 효력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기도하는 순간에 기도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기도해놓고 기도하는 그 당사자를 보면서, 이게 저주받을 짓이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 안 받으면 몰라요. 헌금을 하면서, ‘이게 바로 아주 저주받을 짓을 해. 헌금을 했기 때문에 내일은 온도가 45도까지 올라가도 괜찮아. 왜? 저주 받아야 마땅하니까.’ 자식 잘 키웠다고요? 저주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라오스 댐이에요. 댐 터졌어요. 계속 저주가 범람해요. 심판이 범람했어요. 어떤 행동을 해놓고도 꼭 자기가 했다고 해요. 효력이 없다는데. 내가 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 몸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거든요. 하나의 고집 같은 거예요.
죄 지었다고 반성들 하는데 죄 지었다고 반성하는 그것도 자기 지키겠다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무엇인 것’이 아니에요. 이미 십자가사건, 종말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죄지은 것에서 후회는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뭘 후회할 가치도 없어요. 후회한다고 인간 질 더 낫게 될 것도 아니고요.
죄지은 것도 후회도 하지 마세요. 후회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다시 보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세상은 후회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렇게 해서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는 그것이 제대로 된 천국 가는 거예요. 왜? 천국은 무상으로 가니까.
내가 회개한다고 반성한다고 그 대가로 주어진 천국이 아니에요. 그냥 주어진 거예요. 그냥 주어진 것. 이해 잘 안되시지요? 살던 가락이 자기 때문에 살다보니 이해될 리가 있겠어요? 쉬운 예를 들어서 예쁜 사람이 감자를 심으면 예쁜 감자 나옵니까?
예쁜 사람 없어서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만. 예쁜 사람이 감자를 심었다고 해서 예쁜 감자가 안 나오는 이유가 예쁜 감자 심을 때는 심는 자기존재가 부각되지만 감자 심어놓으면 감자는 다른 환경에 종속돼요. 땅 밑의 흙이라는 환경에 종속되면 환경이 달라요. 이미 예쁨하고는 격리된 거예요. 예쁨하고는 바이바이, 한 거예요. 이제는 흙이 제 맘대로 해요.
흙 때문에 예쁜 감자가 나오는 겁니다. 감자 심을 때 손 모양을 예쁘고 곱게 한다고 해서 감자 좋은 것 나오는 것 아니잖아요.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의 환경이 덮쳐버린 거예요. 존재를 완전히 토막 내버린 거예요. 존재를 하나의 은사, 사건과 사건으로 토막 내버렸다는 말이지요. 존재는 없고 사건의 연속이에요. 사건의 다발.
우리는 매일 주어진 사건을 만납니다. 만날 때 우리가 죄 된 그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요. 뭔가 들이닥치면 들이닥쳤는데 나중에 기억하는 것이 뭐냐? 내가 뭘 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은 주님인데 또 다시 자기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어요.
어제 개기월식이 있었지요. 블러드문이라고 하던데 개기월식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집사님이 기도해서 일으켰어요? 아니지요. 그냥 일으켰지요. 그런데 개기월식을 보고 나오는 것은 뭐냐? 나는 봤다. 꼭 나를 집어넣어요. 나는 그것을 봤다는 거예요. 사람 살아가는 것이 개기월식과 똑같아요.
주께서 추가적인 사건을 유발시켰는데 그게 아침에 보니까 눈 뜨더라, 그거거든요. 하나님께서 살려주는 사건을 했건만, 우리는 아침에 눈 떠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오늘도 살아야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누가 살려줬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지, 가 후차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살려준 은혜는 날라 가 버리고 이제는 악착같이, 악바리같이 살아남아야지, 라고 우기는 겁니다. 계속해서 존재로 나가요. 천국에 그래가지고는 못 들어가지요.
천국은 예수님처럼 존재가 되었던 몸이 아버지의 사건, 율법의 완성, 말씀의 완성이 몸을 사건화 시켰어요. 무슨 사건? 십자가사건화 시켰어요. 그 십자가사건을 하나님께서 부활사건으로 이어줘서 만들어진 것이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코스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야 돼요. 그 통로를 그대로 따라가야 돼요.
존재가 사건으로 달라져야 됩니다. 개념자체가 함축되어서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하는 데는 노래만한 것이 없어요. 존재에 집착했을 때 어떤 가사가 나오느냐? 제가 가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글쎄요.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죠?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2절 가사거든요.
저녁 늦게 잠이 들었어요. 그 때 김종환이 중국집에서 짜장면 배달하는 아르바이트 한다고 힘들었어요.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손에 사진을 잡고 어쩌고, 뒤에 그런 가사가 나와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이거 누구한테 묻습니까? 문재인 대통령한테 물어요? 누구한테 묻는 거예요?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여러분이 젊을 때, 일 열심히 할 때, 피곤할 때, 쓰러져서 잠을 잤지요. 지금도 쓰러져서 잠자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지만 하여튼 그럴 때 무슨 생각합니까?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싶지요. 뭐라고 위로합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나 왜 이렇게 살아? 이거 말고 달리 사는 방법 없어?’ 존재입니다. 이거 존재거든요. 아직 존재에 대한 강력한 집착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사건으로 해결해야 되는데 사건으로 하지 않고 그냥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걸 비겁하게 피하려고 합니다.
그걸 피하는 가사가 또 나와요.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 떠나요 제주도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피서입니다. 제목은 <제주도 푸른 밤> 신문도 없고 방송도 없고 월급봉투도 없는 그곳으로 훌쩍, 이효리가 살던 그 제주도, 피서가면 해결됩니까? 그것은 해결책 아닙니다. 그냥 눈감고 아웅하는 거예요. 여름에 비행기타고 피서 간다고 해서 그 존재를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존재를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세 번째 가사, “연극이 끝나고 난 뒤 / 혼자서 객석에 남아 /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 이젠 다 / 멈춘 채 무대 위에 / 정적만이 남아있죠 /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 노래하며 춤추고 /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 바삐 돌아가지만 /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 자기의 옷을 입고 뭔가 보여주는, 날 보라고, 나 이런 존재라고 보라고 연극을 하고 있는데 그 연극에 따라서 무대 조명이 비추게 되어 있어요.
이 가사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 불빛이 배우를 따라 가듯이 우리는 은연중에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관심을 끌고 내가 유명인사 되는 것, 그게 인생성공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불빛이 뭐냐? 요즘말로 하면 여론이고 언론이에요. 방송에 출현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여자 걸그룹이 3백 개에요. 그 중에서 성공률이 0.01퍼센트. 걸그룹 되려고 수천만 원씩 때려 넣는데 그중 성공률이 0.01퍼센트에요.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불빛이 배우에 따라서 바삐 돌아가는 그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가수 되려고 하는데 그 가수 중에서 뜨는 가수가 랩가수예요. 방송국에서 랩가수 모집했는데 8십만이 몰렸고 그 8십만 명 중에서 예선에 1차로 통과한 사람이 3천명이라는 겁니다. 그 중에 문섭이 뽑혔어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왜 그거 되고 싶어요? 배우에 따라 불빛이 거기 비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불빛도 끝나고, 배우도 옷을 벗고, 남는 것은 정적뿐, 무덤, 빈 무덤이에요. 우리의 시체도 나중에 박테리아가 다 뜯어먹으면 나중에 빈 무덤이에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어서 지금 사는 것이 전부라고 알지만 성령을 받아서 철이 난 예수님께서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모든 존재의 끝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 인간이 살아있을 때는 생생하게 느껴지고, 치맥페스티벌 한다고 우우 가서 술 마시면서 자기존재를 확인하지만 그러나 지나서 뒤돌아보면 벌써 어제라는 그것마저 내 꽁무니에서 떨어져 나갔어요.
어제도 없어요. 남은 것은 당장 오늘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생 아무것도 아니에요. 군에 가서 제대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제대할 때쯤 되어서는, 취직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이 달라져요. 인간은 그 때 그 때 생각이 달라요. 그래서 인간은 사건의 연속이고 다발입니다. 존재도 일시적 존재밖에 안돼요. 따라서 인간에게 존재라 하는 이것은 허망한 거예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이것은 내가 속아 넘어갈만한 거짓말이에요.
본문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했는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상당히 어렵지요. 이걸 쉽게 하면, 사랑을 알아보는 믿음, 사랑을 알아보는 믿음, 주님의 십자가를 알아보는 믿음은 십자가에서 사건화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십자가사건이 그토록 좋은지를 몰라요.
그걸 사랑이라 하거든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뭐냐? 그분만 있으면 나는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을 해봐야 알지 뭐. 당신만 있다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으면 나라도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강의할 때 그러죠. 제발 좀 사랑 좀 하라고요. 사랑 없으니까 나라도 붙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토닥거리고. 다시 5절 봅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내용에서 너 자신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너는 너를 믿으면 그것은 존재에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은 저주가 나올 뿐이고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이 나와야 될 존재인데 사랑이 나와 버리면 내가 사랑하는 주님만 존재로 인정하고, 주님만 존재로 인정한다면 주님과 우리가 연관된 관계로서의, 은사로서의 우리자신일 뿐입니다. 이 말 하면서 우리 윤 집사님 안경 보니까 뱀같이 생긴 그 테가 보이는데 안경 끈이 있잖아요. 그 끈이 안경의 본체와 연결된 끈이거든요.
우리는 사랑의 끈이에요. 주님의 것으로 연장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 가게 되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긴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우리 존재의 잘잘못 때문에 주눅 들었는가, 그 말입니다.
주눅들 필요 없는데 주눅 들었다는 말이지요. 눈물이 왜 생깁니까? 주눅 들어서 생기는 거예요. 억압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믿음을 주는데 그 사랑이 뭐냐? 사랑은 사랑해야 될 그분 그 둘 빼놓고 나머지를 다 제거할 때만 사랑이 등장합니다.
흔히 연애할 때 짓궂게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질문 있잖아요. “오빠 나 사랑해?” 이렇게 물어놓고 사랑한다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이거예요. “오빠, 엄마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져줄 거야?” 하고 묻지요. 그러면 남자가 순간 당황하게 되는데 당황할 것이 없어요.
지금 자기는 존재가 아니고 그 순간에 사건입니다. 사건을 사건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이 들어왔기에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너를 건지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엄마가 물을 때는 또 엄마와 함께 있을 때의 사건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그 때는 “엄마가 중요하지 애인이 뭐 중요해?”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자기답변에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 아니니까.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 때 그 때 다르다니까요. 그 사람이 존재에 말려들 필요가 뭐가 있어요? 여자를, 상대방을 사랑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게 하신 주님이 계셔서 주님의 현존이 그 여자를 통해서 “오빠, 나 사랑해?”라는 말을 하게 했기 때문에 거기에 적절한 말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성도를 사랑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냥 존재와 존재로 사랑하면 안 되고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토막이 나야 돼요. 완전히 분해되고, 분해된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 그것을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둘 다 사건 속에 있을 때만 성도끼리는 사랑을 해야 돼요.
성도사랑이라 하는 것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이웃사랑이라고 하는데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할 때 예수님 말씀이, 율법을 다 지키면 된다.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이 뭘 의미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할 때 그 다음에 율법사가 말하기를,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면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그 다음 이야기가 선한사마리아인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난데없는 사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가 예상하지 않았는데 뭔가 사건이 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있고 사건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가 사건으로 바뀌어라 그 말입니다.
이번 여름수련회 때 정말 수련회 참석하려고 몇 년 전부터, 참석해야지, 참석해야지, 그렇게 하셔도 주께서 참석 못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몇몇 돼요. 제가 보기에. 주께서 참석을 못하게 하시네요. 너는 거기에 참석하지 말고 다른데 가서 사건을 벌이라고 지시를 받는 것 같아요. 지킬 존재는 없으니까. 나는 가고 싶지만 성령께서 참석 못하게 만들었어요.
비비 꼬는 것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왜냐하면 참석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참석 안함도 의미 없음을 통해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인 것을, 다시 한 번 주님의 현존을 직감해야 돼요. 참석하고 참석 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압력도 여러 가지 식으로 해서 이것이 압력을 가는 방법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석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뜻에 의해서 참석했다, 안했다는 식으로 논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절대로 평가해서는 안돼요. 설마 복음 전하는데 나는 듣기 싫어서 안가겠다, 이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가고 싶지만 주께서 하필 그 시간마다, 성령께서 말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은사가 어떻게 오는가?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려면 은사가 와야 되는데 은사라는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사도행전에 보면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3장 16절이 중요한 대목이 여러 개 있어요. 우연이지만.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 아시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도행전 3장 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존재로 보이는 모습으로 사건을 거기에 실어버린 겁니다. 사도요한과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이 아니고 또 그 사람의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물로 집어넣은 은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 현존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매개체로 앉은뱅이가 우뚝 선 거예요.
앉은뱅이 자기도 자기한테 어색해.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할 정도에요. 이것은 내가 의도한 내 인생이 아니고 내 팔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셨지요, 이런 거예요. 자기가 꾸역꾸역 꾸려가는 인생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주께서 주님 증거 하라고 매일 같이 사건을 잇고 또 잇고 이어가는 세월을 보내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4장 27절에도 보면 나와요.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안디옥이 두 군데가 있으니까, 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도바울에게 누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믿음의 문을 열었다. 믿음이라는 것이 라오스댐 같은 것인데 믿음이 있어요.
댐으로 채워져 있는데 주께서 허락하신 사람에게는 그 댐의 문을 열어버려요. 문을 열면 그쪽에, 천국에 고여 있던 그 믿음이 안쪽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만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령께서 이야기해준 것은 뭐냐 하면, 네가 환란 받더라도 네가 걱정하고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실적 적다고 걱정하지 말라. 왜? 이 성에 영생 얻기로 예정된 사람,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만 다 믿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딴 데 따로 있다가,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이지요, 그 선물로, 은사로 받은 사람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은 뭐냐? 나를 믿을 필요 없다는 것, 이제 나는 안 믿는 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 왜냐하면 나는 믿으나 안 믿으나 없어져도 괜찮고 주님만 있으면 그걸로 나는 상관없다는 것, 예수님만 증거 하는 그 믿음은 이렇게 은사로 문을 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터키에서 이제 그리스로 넘어온 거예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그 여자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주체가 주님입니다. 주께서 그 루디아 자주장사하는 여인의 마음을 드르륵, 문을 오픈, 열어젖힌 거예요. 누가? 주께서 문을 열어준 거예요. 그러면 그 전에는 뭐냐? 그냥 문이 닫힌 거예요. 사람이 열수 없어요. 사도바울이 열수 없습니다. 어떤 설교자여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드르륵’이 안돼요.
주께서 문을 열어주니까 뭐를 알 수 있느냐 하면, 주께서 지금 우리처럼 똑같이 살아있습니다. 다만 주님은 인간의 모든 존재가 끝나고 난 뒤에 사건으로 존재하는 그 세계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해 계시는 방식으로 살아있고 우리는 존재에서 나와서 세월에 의해서 이게 너덜너덜해 지거든요.
너덜해지고 후패할 수밖에 없는,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너덜해진 그 몸 붙들고 있는 그런 몸이에요. 이 죄악 된 몸에다가 주님의 부활하신 그 몸의 능력으로 드르륵, 오늘 제목은 ‘드르륵’입니다, ‘드르륵’ 문을 열어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니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가 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나 살아있고 너 살아있네, 가 아니라 주님만 살아있고 주께서 허락하신대로만 살아 있다가 없어지게 되면 전에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고 없다가 잠간 나타났던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성령이 들어왔다.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둘 사이 빼놓고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제거해나가지요. 사업한 것 믿지 마시고, 애 공부 잘하는 것 믿지 마시고, 가정화목 믿지 마시고, 몸 건강한 것 믿지 마시고, 반대로 아픈 것 믿지 마시고, 사업 망한 것 믿지 마시고, 자식 애 먹이는 것 믿지 마시고. 그것은 아무 문제꺼리도 안돼요.
오직 사랑은 예수님만 살아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살아 있다면 평생 후회할 필요도 없고 주눅 들어 살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언맨.
아이언맨이라 하는 것은 큰 철갑 속에 사람이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철로 만든 외부의 물질적인 육체의 구조라면 이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바로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거예요. 성도는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보는 안목을 같이 드르륵, 창문열고 세상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겠는가?
“주여, 날씨가 덥습니다.” “나도 덥다. 왜 더운 줄 알아? 더워도 마땅하니까. 47도까지 올려도 너는 군소리 하지 마.” “그러다 죽는데요?” “죽어도 상관없어.” 아이언맨처럼 안에 어떤 주인공이 들어있어서 바깥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보는 것을 같이 보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그것이 바로 감사요, 그게 믿음이고, 그게 소망이고,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주눅 들지 않는 것.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사건이 그냥 옛날 일이 아니고 지금 반복되는 일인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세상에서 오고가는 대화들이 전부 다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르륵, 주님 안에서 보니까 그게 다 망상이고 악마의 앞잡이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책임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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