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두 소욕(갈5;16-17) 1808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27. 18:32
2018-08-26 12:38:38조회 : 78         
   두 소욕 18082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두 소욕(갈라디아서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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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FWWbA21jHmQ, Hit:7
 이근호18-08-26 13:21 
두 소욕 

2018년 8월 26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16-17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은, 자신이 자기를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은 ‘내가 아니면 달리 나를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의 인간상을 기준으로 볼 때, 창세기 3장의 인간은 벌써 ‘죽은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아무리 스스로 ‘인간이다’고 우겨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 혹은 ‘육체’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께서 ‘언약 프레임’이 등장합니다. ‘프레임’이란 세상을 보는 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곧 ‘약속’을 통해서 세상을 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즉 이미 죽어버린 자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몸소 이 세상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아버지 일에 나서기 전에 광야에서 만난 자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라는 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즉 성령님께서 악마를 불러냅니다. 이는 마치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놓고서 하늘 나라에서 일의 파트너로서 악마를 불러다가 일을 시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동안 모든 인간을 장악한 그 악마의 수법을 그대로 욥에서 퍼부어보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표면적으로 ‘소유의식’이요 내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식’을 악마가 심어놓은 겁니다. 

예수님에게도 악마는 이 수법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등장은 눈에 보이는 인간 세계의 표면적 현상보다 인간의 내면에 주목합니다. 육의 프레임(인식구조)은 표층적 프레임과 심층적 프레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표층적 프레임으로는 ‘소유욕’이 작용합니다. 

즉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아니면 손해가 될까를 따지는 겁니다. 반면에 심층적 프레임으로서는 ‘내가 어떻게 더 살 수 있는가’와 관련된 욕구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밝혀진 사항은, 인간은 이미 ‘죽은 자’요 없는 자라는 겁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율법’이라는 것을 제공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자근자근 밟아주면서 확인 시켜줍니다. 즉 인간은 이 율법으로 인해 죽은 자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율법의 처벌을 다 받아버린 겁니다. 바로 인간이 이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은 오로지 첫째는 예수님이 살아계셔야 하고 둘 때는 그 살아계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라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6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사랑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영의 세계, 혹은 성령의 요구와 무슨 관계 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영’을 알기 전에 ‘육’부터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쳤던 경과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표층구조와 심층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표층구조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정보들을 취득(소유)해서, 그 다음에 심층구조의 욕구인 “나는 살아야겠다”에 보탬이 되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을 많이 확보해도 그것은 ‘내가 나를 다루겠다’는 육의 본성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한 자가 여전히 내가 나를 살려내 보겠다고 시도하는 겁니다. 상당히 이성적입니다. 올바른 분석이 나를 살린다는 의식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육과의 단절적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랑을 얻고자 하면 그 현장에 벌써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포기하면 지금 곁에 와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에서 반해버린 것’입니다. 그립고 보고싶을 때, 인간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만 생각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유도 없고 그래야 하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냥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찾아와버린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상대를 마주하게 되면, 자신에게 다가왔던 그 사랑은 그 현장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쪽에서 사랑을 찾아나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이 사랑에 대해서 주도권을 갖는 바가 되기에 주님은 이 방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즉 사랑을 원할 때마다 갖고 싶은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이 성령에게 넘어가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은 그 사랑으로 인하여 포기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 확립을 하는데 있어, 계속 잘라내고 분리하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아니고, 저것은 맞고”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수립하여 그것으로 ‘나의 나됨’을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때부터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육의 성질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 것 건드리냐”는 식으로 분노합니다. 변명하고 방어하고 자신의 가치를 사수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육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들면 마치 ‘나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머물러서 ‘나의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내가 소유했다”고 확정하는 순간, 주님은 어느새 떠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포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나의 독자적 가치를 따로 챙기겠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입각한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의 목을 날마다 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머리 부분이 막혀 있는 자들은 밑에서 썩기시작합니다. ‘선한 쓰레기, 아름다운 쓰레기, 진실된 쓰레기’을 원하지만 쓰레기는 어디까지나 쓰레기입니다.   

사랑은 아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생각을 안 하기에, 자기 프레임을 인정하지 않기에 소유나 살고자 하는 욕구가 성령님에 의해서 방해 받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몸에서 주님의 사랑만 나오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것으로 계속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8-27 17:28 
303강-갈 5장 16-17(두 소욕)18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언급할 때는 무엇을 언급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개인적인 것에 국한한 문제 같으면 평소의 우리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서 어떤 결과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 결과물이 뭐냐? 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물이란, 죄인이 의인되는 결과물을 남긴다는 겁니다. 내가 의인되기 위해서 뭘 한 게 없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서 아무 상관없이 여겨지는 관계에서 죄인이 졸지에 의가 되어버렸어요.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효과는 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효과를 내려면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이 살아 있어야 되고, 두 번째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야 됩니다.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만족해야 돼요. 

예수님은 살아계시다. 그냥 살아만 계시면 뭐합니까? 남남되면 안 되지요. 예수 안에서 우리가 살게 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효과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많이 들었겠습니다만 어떤 논리에 근거해서 이런 결과를 낳는가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해 놓고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는 내 자신을 다룰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을 동원해서 이룰 수 없는 입장에서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어도 인간이고 안 믿어도 인간이다. 믿기 전에도 인간이고 지금도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여요. 예수 믿는다고 코가 두 개나 세 개가 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다 헛말이고 실제로 그 인간 안에서 작용할 때에 옛날에 나는 예수 믿지 않을 때에, ‘나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진다. 내가 알아서 다 책임진다.’ 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나는 인간이다. 결과도 나는 인간답게 산다.’ 이렇게 딱 연결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을 때는. 주님이 살아계시지도 않고,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게 되면 뭐가 없느냐 하면,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인간이라는 그 자체가 날라 가버려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고 성령의 요구사항과 육의 요구사항이 대결하는 장소제공자가 되어버려요.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없어지고 뭐가 되느냐 하면, 육이 되어버립니다. 

육이라는 것은 그 전에는 신체, 근육질, 이것을 육이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그게 육이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이 다가 옴으로서 비로소 파악되는 나의 진짜 내 모습, 그게 육이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다가오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이라고 우기지 육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은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창세기 1장, 2장에서 이미 인간으로 만들어졌어요. 만들어지고 난 뒤에 그것이 창세기 3장에 넘어가게 되면 더 이상 2장의 그 인간이 아닙니다. 

3장에 들어서게 되면 아담 주변에 어떤 환경이 조성되는데 그 환경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움을 벌이는 그 소용돌이 속에 아담과 하와는 놓이게 되어 있어요. 전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에덴동산에 있었어요. 태어나서 사는 것이 에덴동산에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 살았는데 3장에 넘어오게 되면 갑자기, “너 어느 편이야? 여자의 후손편이야, 아니면 뱀의 후손편이야?” 이렇게 패가름이 일어나는 그것을 강요받게 되어 있어요. 운명적으로. “나는 안할래요?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래요.” 이렇게 거부할 수 없어요. 이것은 할 수 없이 그 환경 속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기인생에 대한 주도권은 날라 가버려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아바타로 보는 겁니다. 인간을 대리자로 보지요. 여자의 후손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인간, 뱀의 후손의 대리자노릇을 하는 인간.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모습은 똑같은 인간인데 그 갈 길은 서로 달랐다. 그 배후자는 서로 다른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2장으로 도로 넘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문제가 2장에서 3장으로 왔을 때 다시 3장에서 2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2장에,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해서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은 자, 내가 나 자신을 다룰 수 없는 처지가 죽은 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26일이지요. 그런데 25일의 나는 없어요. 이미 죽었어요. 8월 25일까지 태어나서의 모든 인간은 이미 없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리고 26일, 오늘 있잖아요. 그러면 27일부터 죽을 때까지는 또 죽음이 우리를 강력하게 끌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잡아당기고 있어요. 죽음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고.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압축되어 있어요. 참기름 짜듯이. 밑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오라. 이렇게. 너는 백날 뭘 해봐야, 출세해봐야 죽게 되어 있다. 오라!” 

그렇게 죽게 되어 있고 뒤에서 또 죽음이 밀어내고 있고. 그러면 현재 26일 오늘 살아있는 것은 뭐냐?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사건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아있지?’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줄곧 죽어왔는데 오늘 26일은 왜 허락되지? 이걸 왜 우리에게 용납하시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의 입장에서 보거든요. 왜냐하면 2장에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자입장에서 볼 때에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고 죽은 자에요. 없어도 되는 자인데 하나님께서 없애지 않고 그 새끼를 치고 자식을 낳게 하는 이유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격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출연진들, 역할극을 하라고 인간을 계속 번식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은 늙어 죽는다. 안타깝지요. 하지만 원래 죽게 되어 있어요. 안 죽으려고 애쓰지요. 때가 되매 다 죽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살려고 생각한 그 때는 다 헛방이에요. 인간이 다 살고자 하기 때문에 모든 스케줄을 잡는데 그것은 죽음 앞에 무용지물입니다. 아무 소용없어요. 

살려고 애쓰다가 죽은 것이 아니에요. 죽는 것이 당연한데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연장시켜준 겁니다. 그냥 곧 돌아가실 분에 호스 꽂은 거예요. 주께서 꽂고 주께서 빼면 끝나는 겁니다. 꽂을 때 목숨만 꽂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거기에다 꽂아버린 겁니다. 

너는 인간이 아니고 죽은 인간이고, 네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오늘 살아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생각, 나는 인간이라는 그런 내가 만들어낸 개념의 인간은 이 땅에 없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가, 뱀의 후손이 그렇게 조작한 거예요. 

너는 인간이라고,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고, 너의 가치를 네가 스스로 살려야 되지 않느냐고 자꾸 격려를 해주는데 그것은 창세기 2장을 잊어버리고, 창조주께서 집어넣은 그 원리원칙을 잊어버리고, 이왕 태어난 것 우리끼리 살아야지 어쩌겠나, 라고 자기들끼리 당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 진짜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실체가 어떤 가를 본인이 실습하듯이, 본인이 다 보여줬어요. 이 땅이라는 것은 그냥 땅이 아니고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을 아무리 율법을 통해서도 다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실제로 실습해서 이 땅을 살아보는 거예요. 

살아보고 난 뒤에, 이 땅에 인간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 주인공이 따로 있다, 그게 바로 악마거든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가기 전에 광야에서 악마에 의해서 시험을 받고, 악마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악마에게 시험을 받은 겁니다. 인간하고 상대하기 전에 악마부터 먼저 상대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난 뒤에 악마의 세계에서 돌아가시면서, “인간들아, 현재 너희들이 실정이 이렇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마. 현재 실정이 이래.”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찾아오심으로서 찾아오신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제대로 눈이 뜨이는 겁니다. 자기를 알고 세상을 아는 거예요.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이제 나타나셨는데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계속 인간이에요. 육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육의 세계가 있고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정확한 그 근거를 가지고 우리한테 제대로 된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 말씀에 의하면 너는 이미 없는 자고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예수는 너와 함께 내 안에서 내가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을 때는 이미 우리는 죽은 자요, 이미 없어도 상관없는 자에요. 주님의 필요에 의해서 주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오늘도 있게 하시고, 사건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6절에서 보면, 예수 안에서 함께 사는 거예요. 내가 살았다 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 예수 덕분에 지금 잠시 등장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나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육과 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복음이 왔을 때, 예수님이 왔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13절에서 “형제들아”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형제들아 온 율법에 대해서는 네가 신경 쓰지 말라.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은 자요,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거든요. 

어릴 때 파전이나 해물전을 부칠 때 봤거든요. 식용유 붓고 파와 조갯살이나 오징어 같은 해물 넣고 파전을 부치지요. 이런 소리 하면 누가 또 해준다고 나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정도는 집에서도 해먹을 수 있습니다. 파전 부칠 때 제가 뭘 봤느냐 하면, 주걱으로 눌러주는 거예요. 눌러주니까 밑에서 지글지글 하면서 잘 익지요. 그렇게 눌러주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우리가 율법 안에서 죽은 자라 그 말이지요. 죽은 자가 어떻게 죄에 거하겠습니까?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충분하게 죽을 만큼 죄져 있다는 것이 티가 나버렸는데 죽은 놈 두 번 죽입니까? 일사부재리의 원칙. 한 번 죽은 인간은 또 다시 율법에 대해서 겁낼 필요가 없어요. 겁내서도 안돼요. 겁낸다는 말은 아직도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연구해서. 성경연구해서. 

성경연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연구하기 이전에, 교회 오기 전에, 밑에서 지글지글하게 눌러줘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란 말이지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에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은 성경을 덮어버리거든요. 복음을 안 들어요. 안 들으면 율법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으면 뭐가 남느냐 하면, 선과 악의 지식을 가졌으니 그것으로 거룩과 경건과 착함과 선함으로 살자, 라는 그 고집만 남아요. 그것은 누가 나를 살려주냐 하면, 내가 나를 살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나만 그래요? 다 마찬가지에요. 이 죽은 세상 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아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병에 뭐가 담겨서 자기가 살아있거든요. 마개가 꽉 닫혀 있어요. 그러면 거기서 자기욕망의 가스가 자기 분을 못 이겨서, 스트레스 받아 가지고, 막 부글부글 끓어요. 

분을 막 품는데 이 세상이 악마에 의해서 닫혀 있기 때문에, 꽉 마개로 닫혀 있는 병이기 때문에 그 병에서 가스만 그냥 부글부글 올라와요. 산소 같은 사람 아니에요. 일산화탄소 같은 사람이에요. 일산화탄소만 부글부글 올라오는 거예요. 

광주강의에서 그랬어요. 그래서 그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병의 목을 쳐버려야 돼요. 병목을 치게 되면 비로소 휴~, 하고 머리 부분과 숨통이 연결돼요. 숨통이 연결되면 머리 부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산소를 공급받을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소생하게 되어 있어요. 죽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피가 흐르면서. 

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 하거든요.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계속 막혀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밑의 하체가 썩어요. 썩게 되는데 거기에 어떤 종류가 있느냐 하면, 선한 쓰레기, 진실 된 쓰레기, 아름답고 예쁜 쓰레기가 범람합니다. 

인간의 형편이 지금 이런 겁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비로소 그것이 밝혀진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육이니까 영을 알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 코스대로 밟아가기 때문에. 

영은 이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육이다, 에서부터 시작해요. 육이라는 것을 철저히 하는 가운데서 영을, 성령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얻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육은 사고방식이 어떤 사고방식이냐 하면, 육은 소유하는 사고방식이에요. 

소유하는 이유가, 소유해서 끌어 모아서 가지고 있는 그 자리를 이미 ‘나’라고 확정 시켜 놓은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본성을 심어놨어요. 네가 신이 될 수 있다.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라. 진, 선, 미.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그 모든 것을 끌어 모으면 너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배후에서 조종을 하기 때문에 하여튼 좋은 것, 귀한 것,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 구원해 보려고. 인간의 육은, 그걸 프레임이라고 하는데 그 인식체제……. 프레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림이 있으면 액자의 테두리가 있잖아요. 인간은 세상을 볼 때 어떤 액자를 가지고 보는데, 그 프레임이 인식구조인데 그 인식구조가 뭐냐? 나는 여기 있고,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채택해서 이 프레임안의 환경을 지금보다 개선하려는 식으로 인간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프레임, 인식구조, 인간이 세상을 볼 때 그것 하나로 보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그 내부를 본다고요. 악마에 사로잡힘까지 다 포괄해서 예수님은 보시기에 그 프레임이 두 종류가 됩니다. 편의상 위에 있는 프레임을 표층프레임이라고 단어를 붙일게요. 아래쪽, 안쪽에 있는 프레임을 가지고 심층프레임이라고 단어를 붙여봤어요. 

표층프레임이 뭐냐 하면,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면서 행동에 나서는 그 프레임, 인식. 예수를 믿어라. ‘아, 저건 나에게 좋겠네. 예수 믿으면 천당 가니까, 죄용서 받으니까 저것은 가져와야 되겠다.’ 이게 표층프레임이에요. 육의 구조가운데 표층프레임이에요. 

하여튼 교회 와서 좋은 것은 다 듣는 거예요. 나에게 불이익 되는 것은 버리고, 술 담배 이런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채택하면서 깨끗한 사람 되고자 하는 이것이 표층프레임이에요. 이것이 소유를 통해서 자기이익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심층 프레임은 그것이 아니고, 네가 살고자 하느냐, 죽고자 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표층프레임에서, 표면에서 얻고자 하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결국 내가 나를 살리겠다는 나의 다룸에 관한 그 프레임이에요. 이 두 개의 프레임 전부 다 육이 되는 겁니다. 교회 나와도 소용없어요. 

나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 이용하는 것, 하나님 이용하는 것밖에는 안돼요. 서울법대 나오고 가수하던 최희준이라는 사람이 며칠 전에 죽었잖아요. 그 가수에 대해서 제게 깊은 인상이 있어요. 그 사람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국민학교 6학년 때 들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그 노래가 나왔어요. 하숙생이라는 그 노래가 나오면 저는 굉장히 공포스러웠어요. 왜냐하면 어린 마음에 그 드라마의 내용이 무지무지 무서운 드라마였어요. 보통 하숙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숙을 치는 것인데 그 드라마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젊을 때 마음 두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귀던 그 여자가 막상 시집갈 때는 부잣집으로 가버렸어요. 모든 마음을 다 빼앗아간 그 여자가 시집가고 난지 한 20년 뒤에 그 남자가 그 여자의 옆집에 하숙을 쳐서 그 여자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 <하숙생>이라는 드라마내용입니다. 

국민학교 6학년생의 마음이 얼마나 여리고 순수했겠습니까? 지금도 순수하지만. 얼마나 순수하던지 표층은 그 아픔의 내용을 듣고 심층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느냐 하면, ‘아, 여자는 상종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마음을 굳혔어요. 물론 지금은 아니에요. 그 때는 ‘여자는 절대로 상종해서는 안 되겠다.’ 한 거예요. 

그 때는 어릴 때기 때문에 표층구조와 심층구조가 벌어지지 않고 가까이에 있었던 거예요. 어릴 때는 자기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거든요. 심층이 표층으로 그대로 나오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게 되면 요령이 생겨서 심층 따로, 표층 따로 되어버려요. 

주님께서 어디를 겨냥하느냐? 이 심층구조를 겨냥합니다. 네가 살고자 한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사실을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개코도 모르면서, 인생 몇 년 살았다고 네가 뭐 아느냐는 말이지요. 

천지창조, 창조하신 분이 이 땅을 다녀가면서 이미 내린 결론을 가지고. 이미 결론 내렸거든요. 이미 규정한 것, “너는 그것밖에 안 돼. 너는 이미 죽은 자야.”라는 그 규정을 육적인 그 본심, 악마가 심어준 그 본성대로 그대로 하면서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마저 새로운 정보로 입력해서, 표층구조지요, 소유해서 그것을 안다는 그것으로 천국을 확 뚫어볼까, 시도하는 그것, 그 자체가 악마의 최후의 극단적인 노림수지요.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발견되는가? 성령은 어떻게 발견되느냐 하면, 성령은 우리가 나 자신을 포기하면 거기 계셔요. 그런데 잡으려고 한다면 안 계셔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프레임이 언약프레임입니다. 

언약프레임에서는 우리하고는 상대를 안 해줍니다. 주님은 우리하고 상종을 안 해요. 안하기 때문에 욥기에서는 주님이 자기 상대자를 불러내요. 누구냐 하면, 여호와께서 사탄을 불러냅니다. 하나님은 사탄하고 한조가 돼요. 한조가 되어서 어떻게 이 땅에서 게임을 즐기느냐? 일종의 게임을 벌리는 거지요. 

욥은 내 사람이니까 네가 한 번 건드려보라는 겁니다. 욥은 내 사람이니까. 그러면 사탄이 와서 사탄이 처음부터 인간을 장악했던 그 모든 비법을 욥에게 다 쏟아 붓습니다. “네가 이래도 하나님 믿을래? 이래도 네가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보자.”라는 그 모든 역량을 사탄은 욥에게 다 쏟아 붓습니다. 

그게 뭐냐? 소유에 관한 겁니다. 소유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 죽음에 관한 거예요. 표층구조, 심층구조, 그 두 가지의 무기를 가지고 계속 달려듭니다. 악마는 심부름꾼입니다. 천사거든요. 악한 천사. 그러니 주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나가야 돼요. 계속 움직여 나갑니다. 

그러면 인간은 주님의 소식을 듣고 평소에 악마의 습관대로 주님을 붙들려고 모든 노력을 하겠지요. 모든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은 하면 할수록 그게 실패로 끝나요.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지 한 예를 들겠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이 싯딤에 있을 때 모압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를 했지요. 

7절에서 9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이렇게 해서 언약적조치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으로 찔러버려요. 이미 죽어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찌를 때에 사람들은 무슨 실패를 느끼느냐 하면, 내 쪽에서 노력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을 확 받습니다. 

이렇게 내가 열심히 신앙 얻고자 노력할 때 협조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협조 자체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리지요. “네가 노력해봤자 이걸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확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내 노력을 스스로 놔버리게 되는 겁니다. 모든 노력과 시도를. 

제가 안양강의에 갈 때 KTX타고 가서 광명역에서 내리는데 그런지가 10년이 넘었어요. 그렇게 다니면서 늘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들으면 별 쓸데없는 궁금증인데요. 안양에서 12번 버스타고 광명역방향으로 한 5분 가게 되면 노루표 페인트공장이 있어요. 

뭐가 궁금했느냐 하면, 페인트와 노루가 별로 연관성이 없어요. 페인트 회사인데 왜 노루냐. 되게 궁금했는데 정말 쓰잘떼기 없는 궁금증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곤 했는데 지금은 그걸 풀고 가야겠다 싶어서 노루표 페인트의 역사를 공부해보니까 이런 것이 하나 건져졌어요. 

사람은 감정적존재라는 겁니다. 노루표페인트가 1945년에 대성인쇄로부터 시작해서……, 노루표 페인트는 이런 이야기 들으면 기분 좋을 거예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왜 노루냐? 그 당시 우리나라에 문맹자가 그렇게 많았답니다. 그래서 회사를 홍보할 때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노루라는 동물이 굉장히 순하거든요. 옛날 그 회사뿐이 아니에요. 다른 회사들도 언어에 이미지를 담는 것이 아니고 들에서 뛰어노는 친근한 동물들, 순한 동물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붙인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순수한 회사입니다.”라는 뜻에서 노루표라고 붙인 거예요. 

법적으로 나올 때는 이미 이성이에요. 감정이 아니고. 감정은 심층으로 돌려세우고 표층으로 ‘나 이렇게 훌륭하게 살려고 지금 맘 잡고 있습니다.’라고 티내는 거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감정적 차원으로 되돌려 버려요.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해서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네가 법을 지켜버리면 법 지키는 이성으로 또 뭘 하느냐 하면, 사랑을 해내려고 시도해요. 논리적으로 따져서, 이모저모 따져서. 

“이게 제 사랑인데 좀 더 할까요, 말까요? 좀 뺄까요, 더할까요?” 이렇게 된다고요. 사랑을 측정하려고 하고, 사랑을 따지려고 하고, 사랑을 분석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어버려요.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를 따져서 따진 만큼 자기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이는 악마에 말려든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언약가운데서 먼저 이 땅에는 사랑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엑기스로 삼고 외부에 인간이 쓰는 단어를 거기에 입혀버려요. 사랑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뭐냐? 찾아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가운데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라 할 때 이것은 내 쪽에서 분석하고 구분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 과도한 처벌이 기다려요. 예수 믿으려고 노력하는데 차버리면 이것은 너무 심한 학대처럼 느껴지거든요.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표층을 인정하지 않고 심층으로 내려가요. 심층으로 내려가게 되면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는 무슨 짓도 다 하겠다, 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을 무산시키는 방법은 내쪽에서부터 개시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뚫고 들어와요. 폭탄처럼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현철이 부른 적절한 노래가 있어요. <사랑은 나비인가봐> 고요한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와서 사랑을 심어 놓고 나비처럼 떠나가 버렸어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냐? “사랑은 어디 있어요?” 가 아니라 “내게 찾아온 사랑 어디 있어요? 얄미운 나비인가봐.” 

얄밉다는 생각을 가지는 동시에 이미 주도권은 날아간 나비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사람의 평생은 뭐냐? 얄미운 나비 찾기. 사랑 찾아 나서는 거예요. 이게 온 율법을 이루는 겁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왔잖아요. 어디 계십니까?”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찾으면 없어요. 아, 이게 복음이 아니라도 실제로도 그런 현상이 우리 주변에 굉장히 많아요. 마치 엄마를 옆에 두고 엄마 찾는 기분이에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을 굉장히 사랑하고 그리워해요. “그립다. 당신을 사랑한다.” 했다 그 말이지요. 그쪽에서 마지못해 만나줬어요. 만나줬는데 그 사람이 없어요.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이 없어요. 주님의 뜻은 뭐냐? 왜 찾느냐 하는 그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인간이 뭔가 자기가 나서서 찾게 되면 그냥 찾는 것이 아니고 육적인 본성이 더불어서 찾게 돼요. 찾게 되면 그 찾는 이유가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찾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사는 방식입니다. 인간이 사는 방식은 뭐냐 하면, 이익 되는 것은 남기고 나머지 손해되는 것은 다 잘라버리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왔어요. 그게 20절에 나옵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그 다음에 여기에 주의해주세요. “당 짓는 것과” 

파당이지요.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다음에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렇게 죽 나와 있는데 이게 육의 열매라는 거예요. 

이 중에서 여러분이 당 짓는 것에 주목하기를 요청합니다. 당 짓는다는 것은, 내 쪽에서 재단하는 거예요. 내가 중심이 되어서 판단에 나서는 겁니다. “너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 그리고 너는 필요 없으니 나가.” 이게 하나의 편당이 돼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인간은 줄곧 살아갑니다. 

이 땡볕에 지금 아시안게임 여자마라톤 하고 있거든요. 수입한 흑인 여자가 1등하고 있다고 하게 되면 그 자그마한 여자가 얼마나 고생하는 겁니까? 고생하잖아요. 고생해도 그게 싫어. 왜? 우리 한국 선수가 3등으로 뛰고 있기 때문에. 고생은 1등으로 뛰는 선수가 하는데 3등하는 사람을 왜 자꾸 응원하느냐? 같은 패다 그 말입니다. 같은 패거든요. 

우리나라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게 되면 우리나라라는 것이 없어요. 뭐가 육이냐 하면, 가정이 육이고, 국가가 육이고, 교회가 육입니다. 육으로 교회 만들고, 육으로 국가 만들고, 육으로 가정 만들었어요.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라 했습니까? 

그렇다고 폭행사건 일어난 과천의 ‘은혜로 교회’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 보면서 후딱 넘어가는 버릇이 있는데 누가복음 18장 29절, 30절에 보면 참혹한 구절이 나오는데 찾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하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호로자식만이 천당 간다 그 이야기지요. 호로자식,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 형제나 아내나 집을 버린 자는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아주 강조를 했어요. 주님의 사랑의 방법은 육을 육대로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는 인간이거든요. 표층은 인간인데 안에는 괴물 들었어요. 그러니까 주님은 안에 있는 괴물을 가지고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육입니까,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나만 영이거든.” 영이 오지 않으면 육은 육인지도 몰라요. 주님이 영으로 오셨기에 예수님만 영이고 나머지는 다 육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육을 영으로 바꿀 솜씨를 발휘하는 거예요. 그러면 육은 육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야 됩니다. 

어떻게 노출시키느냐? 표층구조를 심층구조로 뒤바꾸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요. 그 바꾸는 방법은 뭐냐? 주께서 과도하게 성도의 인생을 몰아갑니다. 과도하게. 조금 잘못했는데 엄청난 징벌이 떨어졌을 때에 갑자기 우리는 겸손이니, 경건이니, 거룩이니, 하다가 왈칵 화를 냅니다. 

화낼 수밖에 없어요. “심판주가 뭔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화가 벌컥 나는 거예요. 막 반박을 하고 싶고, 또 반박에 반박을 하고 싶고. 너는 왜 나를 건드리냐, 그 말이거든요. 네가 먼저 건드렸잖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은혜 받고 있어요. 덩달아 십자가마을은 복을 받았어요. 표층구조에 복음을 잔뜩 쌓았는데 심층구조는 들어가지도 않았어. 세상을 살 때 육과 영 겸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내 것, 내 가정, 내 직장, 내 사업체, 그리고 내 교회, 내 모임, 이것 지키기 위해서 영을 도용한 거지요. 

육은 그대로 육인데 영을 도용한 거예요. 그냥 상표만 붙였어요. 그 스티커 떼면 그대로인데 그것 붙였다고 영으로 봐달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심화되어야 되고 스며들어가야 되는데 스며들어가지를 못했어요. 이정도 아니까 복음 안다고 쳐달라는 거예요. 이정도 아니까 영이라고 쳐달라는 거예요. 

영이라고 쳐주고 말씀대로 사는데 집안 거덜 나고 난리도 아니에요. 완전히 깨지고 작살내는 거지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아주 소박하게 서로 잘 사는 동네, 술 익는 마을에 갑자기 KTX 길 내면서 지나가니까 동네 개들이 짖어대고, 왜 소박한 동네를 부수느냐? 주님께서는, 네가 착하다, 겸손하다, 진선미, 진실하게 살게요, 바르게 살게요, 예쁘게 살게요, 우리는 예쁘게 사랑해요,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쁜 사랑이 어디 있어요? 

그게 쓰레기에요, 쓰레기. 요새 쓰레기는 왜 그리 바쁜지 몰라. 전부 다 쓰레기인데 그 쓰레기가 드러나면 좋아요. 이게 복이에요. 쓰레기가 왜 쓰레기냐 하면, 쓰레기가 안 되려고, 이왕이면 착한 쓰레기, 기도 잘하는 쓰레기, 헌금 많이 하는 쓰레기, 복음 아는 쓰레기 되려고 하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너 자신을 붙들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나는 모든 것을 십자가 중심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분은 십자가중심 말고 예수님의 살아계심 중심으로 하는데 목사님, 어느 것이 맞습니까, 라고 비밀글로 물어왔어요. 비밀 글 공개하면 안 되는데. 

십자가 중심이냐, 예수님 살아계심 중심이냐? 그게 아니고 너를 잊으라는 말이에요, 너를. 우리는 없는 존재에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왜 자꾸 꿈틀거립니까? 왜 그리 꼼지락거립니까? 이게 옛날 성품 때문에 그래요. 옛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그래요. 

너무 징벌이 과합니다, 내 인생 이렇게 조지면 어떻게 합니까? 영은 그게 아니고 누구한테 반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있으나 없으나 그것은 신경도 안 써요. 내가 밥 먹는 것이나 몸 아프다는 이것도 신경 안 써요. “왜 사랑만 남겨놓고 그냥 가버렸습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자기를 안 찾아요. 그냥 구원해주신 주님만 찾아다녀요. 이게 영입니다. 이게 영이에요! 

욕을 하든, 누가 비난을 하든, 원래 나는 그것밖에 안되고 신경 안 써요. 같이 살고 싶어요, 하고 찾는 거예요. 같이 살고 싶은 것. 사랑이 자기를 잡아당기는 겁니다. 언약에 보면 일방적으로 저주하고, 일방적으로 사랑 주거든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예수님과 의논해서 된 결과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와버리니까 그게 뭐냐? 나를 버리고 사랑을 찾을 때 뭐가 없어지느냐? 성령의 인도함이 되면, 주님의 인도함이 되면, 사랑의 이끌린바 되게 되면, 19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모든 것은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은 생각도 안나요. 주님사랑하기 바빠 가지고, 주님 바라보는데 바빠 가지고. 우리가 원래 이런 인간이잖아요. 원래 이런 인간에 대한 해결책을 자기가 육을 다루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따라갈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쳐야 돼요. 베드로를 치지 않으면 베드로가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꾸 자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겠다고 자기로부터 개시하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어요. 우리 빌라 옆에서 할아버지가 닭을 키웠어요. 닭이 어릴 때는 잘 못 울더니 좀 큰 뒤에는 제법 울어요. 새벽 다섯 시에 “누가 닭 좀 관리하세요.” 하고 새벽에 고함을 질렀어요. 닭이 제대로 울거든요. 정말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좋았어요. 그날 낮에 그 닭 죽었습니다. 

경찰이 와서 그 닭 잡았어요. 주님께서 병목을 쳐버렸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주님의 사랑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그냥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죽어야 될 대상이에요. 그걸 쳐주시는 그 사랑, 이제는 네 걱정 네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죽은 놈이 네 걱정 왜 하느냐? 이게 바로 영입니다. 호색을 하든, 음란을 하든, 뭘 하든, 주께서 쳐주시는 그 사랑, 그 사랑, 그 사랑, 아마도 우리의 나비인가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따져서, 분석해서, 탐구해서 얻고자 했습니다. 그게 사랑이 아니고 육인데 주여, 주님 찾아오신 그 사랑, 나를 죽은 자로 분명하게 했던 그 사랑, 나 이 땅에 없어야 되는 자로 분명하게 지적해주는 그 사랑, 그 사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