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강-갈 5장 11-12(걸림돌)1808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1-12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성경을 보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의 있게 말씀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남 도와주고 살면서, 조심스럽게 자기를 살피면서 하나님 믿는 것이 영광이니 하나님을 믿어드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수준에서 섬기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이 지금 화를 내고 있어요. 하나님 섬기겠다는데 화를 내고, 착하게 살겠다는데도 화를 내고, 바르게 살겠다는데도 화를 내버리면 여기서 뭐가 틀어지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착하게 살기, 바르게살기, 말씀 지키기, 가급적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어떻게 하늘 쪽에서 오신 분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돼요. 뭔가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심판이라는 언급을 지난 시간 10절에서 했고, 11절에서 하는 말이,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성의를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할 때 뭐가 지금 누락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가 빠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이, “그 십자가도 믿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믿어드릴게요, 십자가 믿습니다, 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맞습니다. 됐습니까? 이제는 합격이에요?” 라고 묻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인간이 알고 있는 방법이 아니고 십자가를 집어넣는데 십자가는 여기서 거치는 거예요. 걸림돌이라는 말이지요.
걸림돌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천국 앞으로 돌격하는가, 천국으로 나아가자 하는 방식을 익히 주님께서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간파하고 있는 그 방식을 내가 안 받아주겠다는 것이 걸림돌이에요. 걸려서 넘어지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십자가는 의미 없어요. 뭔가 갖고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 천국 가는 방법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장착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서 사전에 먼저 나와서 대결해보겠다는 겁니다. 네 쪽에서 하늘로 밀어붙이는 것이 옳은 방식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식이 옳은지 그걸 비교해보라 이 말이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였다면 메시아가 이 땅에서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사람 손에 죽었다는 말은, 평소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그리고 나름대로 자기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다 가짜고 엉터리고 수상한 겁니다. 배후의 배후자가 인간을 농락한 거예요.
오늘 본문의 ‘거치는 것’이란 그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약간 늦게 오신 분이 있으면 다시 말씀 드려요. 바르게 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좋은 말 많으니까 그대로 지키겠습니다.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고, 살다보면 못할 수도 있는데 그 때는 회개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해서 용서받고.
이게 편합니다. 우리 편한 쪽으로 그냥 갑시다. 아무소리 하지 말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네가 할례를 아느냐, 이렇게 하거든요. 그 할례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 지금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할례라는 것을 왜 알아야 되는지? 굳이 그걸 알아야 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거 빼고 갑시다,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거 빼고 갑시다. 할례 빼고 갑시다. 그런데 할례를 빼버리면 그것은 뭐가 문제냐? 내가 지금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라는 자체가 엉터리라는 점이 발각이 안 되잖아요. 할례를 집어넣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능한 것을 수집해서 그것으로, “하나님,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라고 내미는 그것이 지옥 가는 지름길, 지옥 가는 ktx를 탄 것이고 천국 가는 목표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걸림돌이고 거치는 것이라는 것은 충분하게 네가 내놓을 것을 다 내놔보라는 겁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옳다고 여기는 그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봐라.
그러면 다 끄집어내겠지요. 교회라는 것은 예배드리고, 양육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서로 돌보고. 그걸 줄줄이 다 내놓는 거예요. 그걸 쫙 찢어버립니다. 용서받았으니까 남을 용서하고. 쫙 찢어버려요. 우리가 주님의 사랑 받았으니까 남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쫙 찢어버립니다. 그거 가지고 지옥 가고 있다. 그래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기억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해요. 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어떤 점을 기억하기 싫어하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 할 수 있는 것을 치워버리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들이밀 때 우리는 안들은 것으로 자꾸 외면해 버려요.
교회가 조용해야 된다는데 교회가 진흙탕이 되어야 그게 교회입니다. 진흙탕이 되어야 교회고 우리 십자가마을이 엉망이 되어야 그게 십자가마을 살리는 길이에요. 교회가 진흙탕이 되고 엉망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요. 조용한 교회, 온화한 교회, 평화로운 교회.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느새 우리는 십자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잊어버린 그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 했노라, 가 남아 있습니다. 나름 열심히 했노라, 가 남아 있어요. 단체로 지옥가려면 그렇게 사시든지. 오늘 사도바울은 분노합니다. 그 분노의 증거가 11절에 나옵니다. 고추 떼라, 그 말이거든요. 앞에 달고 다니는 그것 잘라버리는 거지요.
얼마나 분노했으면 그런 심한 말을 했겠어요? 고추 이야기 안 나온다고요? 제가 보기에는 나오는데요.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격분하고 있는 겁니다. 격분을 받아들여야 그게 교회입니다. 주님 쪽에서 나오는 격분을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절대로 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누굴 붙여줘요. 평소에 우리 가운데 남 죽인 사람은 없지요. 얼굴 보니 사람 죽일 얼굴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게 되면 우리는 무엇과 무관한 사람이 되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그 십계명과 무관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말씀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말씀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말씀을 위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돼요. 그러면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은 어디냐? 지옥이에요. 보통문제 아닙니다.
계속 주님께서 할례언약을 이야기하고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께서 장만한 건너올 수 없는 펜스, 건너올 수 없는 펜스를 네가 넘어온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런데 어제도 착하고, 오늘도 착하고, 연속적으로 착함에서 착함으로 이어져 버리면 어떤 경험이 없느냐 하면, 불가능했다는 경험을 가진 적이 없어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왔다는데 죄인 된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고쳤다는데 아픈 적이 없습니다. 알아서 내가 다 했대요. 알아서 내가 운동하고, 조깅하고, 에어로빅하고, 알아서 다 건강을 유지했어요. 왜냐하면 그게 나에게는 가능한 일이니까요.
나는 내가 가능한 일로 천국 가고 싶어 해요. 내가 진흙탕이 되기 싫어해요. 남과 싸워서 얼굴 붉히는 현장 그 자리에서 떠나버립니다. 나 피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되거든요. 계속해서 자기는 우아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점잖은 사람이 되고.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분노하니까 사도바울의 분노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고, 그럼 갈라디아서 5장 11절, 12절은 매직으로 지워버려야 돼요. 이것은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서 나랑 상관없음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살인의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보고, 형제를 보고 화를 내면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살인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화를 내기 전에 내가 그 자리를 피하면 되고, 그 사람을 상대 안하면 되지,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눈 감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점잖아도 사람은 남을 살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어요. 어떤 때 사람들이 분노하고 화를 내느냐 하면, 같이 나쁜 짓을 했는데 혼자 그 난처한 상황, 난감한 상황에서 혼자 빠지고 그 덤터기를 나에게 뒤집어씌울 때. 아무리 사람 좋아도요, 성품이 좋아도 죽여 버리고 싶어요. 죽이고 싶다고요.
혼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보고, 아무것도 안 듣고 할 때는 살인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하고 만났을 때 서로의 만남이 어떤 만남이냐 하면,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잘났나,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만나요.
결혼한 사람도 다 누굴 만난 경우잖아요. 자기 의로움과 내가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보장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표현은 안하지만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담겨 있어요. 남자라고 나의 잘남까지는 아닌데 그저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했는데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저만 덜렁 내리고. 그것도 결혼 초반에.
아내는 알아서 내렸겠지, 하고 보지도 않고 혼자만 내려서 가버릴 때, 내가 저 사람을 왜 만났나, 싶었을 거예요.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만 살겠다고? 지금 궁지에 몰렸을 때 그 사람의 본색을 측정할 수 있는 멋진 타이밍이 온 거예요. 어려움이 왔을 때에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자기 의로움, 자기가 대신 죄를 짊어지고 내가 원하는 나의 착함을 계속 유지 지킬 수 있는……, 내가 지금 웃고 있어요.
유지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계속 가는지를. 아내는 평생토록 살면 살수록 계속 테스트 합니다. “아멘!”이 나왔습니다. 아직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남자인지. 아직도.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지켜줘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해답이 없어요. 무조건무조건이야. 그건 무조건이에요.
왜? 나는 살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살 가치 없나? 네가 뭔데 내가 너를 지켜줘야 돼? 나는 인간도 아닌가? 나는 나를 지키는 것이 왜 안 되는데?’ 양보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 말 듣고 젊을 때 열심히 일을 해야 되는데 가정 돌본다고 양보, 양보에다가 아내한테 열심을 다하면서 회사 다니고 나이 60이 되어서 퇴직을 했습니다. 퇴직을 했는데 그 동안 아내 돕고 살림 거들어준다고 진급에서 좀 밀렸어요. 나이 60이 좀 넘어서 여자가 하는 말이, 남들 그렇게 돈 벌고 열심히 일할 때 당신이 한 것 뭐 있나, 이러거든요.
60이 넘어서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동안 너 보호한다고.” “내 탓 하지 마래이. 어디 비겁하게 남자가 돼가꼬!” 또 그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남자가, “어쩌란 말이가!” “니는 니고 내는 내인 것을 이제와 정신 드노?” 60 넘어서 그 소리 하는 거예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인생 따로 논다는 것 너 몰랐어?”
사람이 제일 골나고 격분하는 것은 뭐냐? 그냥 그 내막은 잘 설명이 안 되고 분석이 안 되지만 인간이 은연중에 만남을 통해서 내가 의롭다는 것, 의와 의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돼요. 갈라디아서에서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태어날 때 그냥 혼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의로워야 돼. 나는 정당해야 돼. 나는 천국가야 마땅한 존재. 나는 지옥가면 안 돼.’ 이것을 뭉쳐서 태어나는 거예요. 이걸 자동적으로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 대표되는 요소로 누가 등장했느냐 하면,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는 율법을 줬습니다. 할례라는 말은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버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이미 이어져 있는 관계라는 티를 내는 것이 할례에요. 할례란, 하나님이 주신 법이 눈에 보이는 식으로 인간의 신체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할례언약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의 움직임은 그냥 움직임이 아니고 움직일 때마다 그 복장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이는 ‘언약맨’ 언약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자부심이 대단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뭐? 내가 할례를 행했기에. 그래서 뭐? 할례를 행하면 그것이 의가 돼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의를 가져서 천국가려고 하는데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으니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그것.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면 되고, 혹시 실수하면, ‘잘못 했습니다’ 하고 회개해서 제사 드리면 되고. 뭐가 어려우냐는 말이지요. 하나님 섬기는 것이 뭐가 어려워요?
그게 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할례 행하라고 해서 할례 행했다.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 나오라고 하면, “예, 시키는 대로 교회 나왔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에요. 교회 나오라고 해서 나왔다.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었다. 십자가 피 믿으라, 아멘, 믿었다. 자, 얼마나 내가 자랑스러우냐 그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미 그걸 해온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고추 잘라버려라, 인간아!” 할례를 한 그 고추를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아니 그게 자랑거리인데, 그게 나의 의인데 그걸 잘라버리면 어떡해요? 고추를 잘라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할례 없는 이방인, 개 같은 이방인 된다고요.
사도바울이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이방인이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진짜 율법을 다 지키고 완수하신 그분이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너희들 앞에서는 율법을 전혀 지킨 적이 없는 귀신의 대장이고, 이단이고, 이방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너희들 유대인들에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문제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체적인 자기 의로움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끌어 모아서 그 마련된 의를 가지고 어디를 뚫어내려고 하느냐 하면, 천국까지 뚫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완전히 바벨탑이에요. 자기 이름을 천국까지 빛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다 안하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안 받았기 때문에 제 멋대로, 자기 맘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사는 그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이 장착되지 않았기에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고, 자기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례를 행했으니까 천국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할례를 행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자에게 자기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죽었어요. 그것은 뭘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유대인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개무시한 이방인 쪽에 오셨는데 아,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요. 율법이 없기 때문에 지킬 수도 없습니다.
지킬 수도 없는데 천국을 가요. 이게 복음입니다. 지키려고 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지킬꺼리도 없었는데 와보니까 천국이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인간의 본성상, 내가 뭔가 해야 그 보상으로 천국 같은 것이 축복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내가 뭘 한 것이 있어야.
그런데 이방인은 한 것도 없는데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해버립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행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었어요. 이제 비교에 나섭니다. 행한 것도 없는데 의인된 것과, 행한 것도 없이 의인된 것을 비교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행해서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을, 메시아를 죽였고 행한 것도 없이 의인된 자는 주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 천국 백성이냐 하는 겁니다. 할례를 행했던 그 고추를 잘라버리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내부에 의가 담겨 있는, 행함으로서 차곡차곡 적금 붓듯 쌓이는 그 의의 창고를 하나님께서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고갈시키고, 기갈 시키고, 황무지로 만들어요. 그것보다 더 통합된 적절한 단어는 뭐냐 하면, 불모입니다, 불모. 내 중심을 불모의 땅으로 그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바짝 말라비틀어진 곳, 그곳이 두자로 지옥입니다. 물이 없는 곳, 말라비틀어진 거예요. 황폐한 곳입니다.
그 황폐한 곳을 미리 앞당겨서 네 내부에 장만해야 된다는 겁니다. 암세포가 있으면 암세포는 활달해요. 고기 먹고 뭐 먹고, 먹으면 먹을수록 암세포가 ‘신난다!’ 아주 신이 났어. 암세포 자체적인 힘을 키우는데 에너지로 다 응집이 됩니다. 그러면 원자력병원에서 주사를 놔서 암세포를 황폐화시키지요.
십자가보혈의 피로 우리 가운데 있는, 그 내 잘났다 하는 그 공간, 의가 저장되어 있는 그 창고를 완전히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요. 투사를 해서. 그 불모가 여자의 입장을 입으면 그것이 불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남편 없는 여자의 자식만이 천국을 갑니다. 이 말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너를 의롭다 하는 그 의가 네가 가능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낸 의냐, 아니면 네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의냐, 이걸 묻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가 안양강의 하면서 복숭아씨를 이야기했어요. 모든 복숭아는 내부에 씨가 있어요. 씨 없는 복숭아는 없잖아요. 다 씨가 있기 때문에 성질 급하게 먹다가는 치과에 가야 돼요. 굉장히 부드러운 복숭아 표면을 뚫고 아, 하고 보면 정말 딱딱한 씨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있어요. 자기 의. 그 자기의는 누가 심어줬느냐 하면, 악마가 그렇게 심어놓은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네가 살릴 것은 너밖에 없지 아무도 네 잘남을 인정해줄 누구도 없다. 싸워라. 너의 의를 위하여.”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두 사람이 가는데 둘이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하고, 위해주고, 서로 배려해주는 것처럼 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당황스럽고 난처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소위 죄 짓는 일이 왔을 때 세상에 비겁하게도 자기만 살짝 빠져가지고 자기만 의인이 되고, 죄의 책임은 상대방에게 덤터기 씌울 때에,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죽이고 싶은 거예요.
두 번 다시 상종하기 싫은 인간, 만나는 주되 거리 띄우고 만나야 될 인간, 밥 맛 없는 인간, 싸가지 없다고 하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이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살인자가 나쁩니까, 살인 유발자가 나쁩니까? 이게 창세기 4장 이야기입니다. 성경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창세기 4장이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는 전부 다 아벨 편에 섰다고 착각을 해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벨 편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가인편입니다. 가인으로 하여금 살인자로 망하게 하신 겁니다. 가인이 동생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니에요. 욱하는 성질에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부적으로 볼 때는 동생 때문에 동생을 죽인 것으로 되지만 더 추궁해 보면 동생 때문에 동생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착함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렇게 착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나를 살인자로 만들었어요. 가룟유다가 사람 팔아먹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어이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스승을 팔아먹는 자로 만들어버려요. 가룟유다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릴게요. 남을 미워하면 그게 살인이라고요. 칼 들고 몇 군데 찔러야만 살인이 아니고 남을 미워하는 것, 그 사람과 엮이기 싫다는 것, 보기만 해도 밥 맛 없다는 그것,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가 잠재적 살인자에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보고,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그 순간 우리는 불가능에 빠져버립니다. 살인 안하기를 넘어설 수가 없어요. 왜? 타고난 것이 살인하게 되는 것인데 그 동기가 뭐냐 하면, 내가 나의 의를, 내 복숭아씨를 계속해서 지키고 싶기 때문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이 나의 의로움이 없으면 나는 살맛도 없어요.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가요. 내 잘난 맛을 잃어버리면 나는 살맛이 없어요.
내 잘난 맛을 포기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하면 안돼요. 가능한 이야기, 불가능을 감추고 가능한 것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남 돌보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백날 해도, 아무리 희생하고, 봉사하고, 봉사하고, 아무리 해도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살인의지를 유발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드립니다.
아프리카 봉사단체에서 성폭행사건 발생한 것 아시지요? 명분은 좋아요. 어려운 나라들 도와준다고. 성매매, 성폭행. 명분이 좋기 때문에 충분히 감출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좋게 보기 때문에. 살인이나 강간,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을 감추는데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 감사하게 여겨야 됩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부부사이나 부모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내 의와 너의 의로서 만납니다. 의와 의로. “나 잘했지, 그렇지?” 상대방으로부터 위로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상장 받고 싶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너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해요.
늙었어도, 얼굴 그대로네, 이런 이야기가 거짓말인지 뻔히 알면서도 기뻐요. 그것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납니다. 칭찬해 가면서 좋은 관계 유지해서, 우리 친구 아이가, 했는데 돈 한 2천만 원 빌려가지고 도망쳐버렸을 때 찾아가서 죽여 버리지요. “돈 사기 당한 것이 왜 기분 나쁩니까?” “사기 당했으니 기분 나쁘지요.” “왜 기분 나쁜데요?” “나를 바보 취급했잖아요.”
왜 바보 안 되어야 되는데요? 왜 바보 안 되어야 됩니까? 답변이 없어요. 내가 왜 남에게 이용 안 당해야 되고 왜 바보 안 되어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이 없다니까요. 유대인은 여자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고 남자한테 행합니다. 남자는 유대인의 대표자면서도 인류의 대표에요. 선택받았기 때문에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대표자를 통해서 주께서 무엇을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를 쌓는 그 재미, 그 보람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의를 쌓는데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그런 역경을 견뎌내고 기어이 자기 자신을 자신이 반할만한 영웅으로 정립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요.
개척교회 열군 데 하고, 천명 전도하고,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 이 모든 자료들이 결국 뭐냐 하면, 그래서 내가 보기에 나는 영웅이라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정말 자랑스러운 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집단적인 결속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고추 잘라라. 잘라버려라. 그 고추를, 자기가 할례를 행했다는 그 자체를. 사도바울은 스스로 그걸 개무시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걸 개무시하게 되면 마법이 풀리는 겁니다. 누구한테 마법? 내가 나의 영광에 휘둘린 그 마법의 그물, 이것은 살인거미줄에 걸린 것보다 더 지독한 그물, 거미줄, 이걸로 평생에 우리를 둘둘 감아서 숨도 못 쉬게 만들었어요.
마법이 풀려버리면 그걸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할례 행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하기 싫을 때는 노, 하면 되고 하고 싶을 때는 예스. 하면 됩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너무 힘들다. 그러면 친구 하고 영화 보러 가면 되고, 야구장 가고 싶을 때 야구장 가면 돼요. 왜? 복숭아의 씨가 없으니까.
복숭아의 씨가 있어버리면 그 씨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행함만 들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지옥가지요. 지옥에 가면 말라비틀어지는 거예요. 지옥은 불모의 땅이에요. 평생 살아 있으면서도 남 의식하면서 지옥생활하고. 죽어서도 지옥가고. 죽어서도 마법이 안 풀렸어요.
십자가의 마법, 고추 자르라는 마법, 네가 너의 대표자가 아니라는 그 이야기를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우리는 나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내가 나의 책임자가 아니에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 그걸 우리가 이제부터는 지키지 맙시다.
마법에서 풀린 사람은 나의 자존심이나 나를 지키지 않아요. 그러면 목사님, 지키지 않는 현상이 뭡니까? 그것은 수치를 이기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을 아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복음을 안다면 이 복음 자체가 모든 수치를 능가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 복음 아는 순간부터 그 어떤 수치감으로도 농락당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떤 수치감에도. 그 어떤 망신살에도 농락당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한테 협박공갈로 나옵니다. “니가 그 짓 하면 니 망신 당한대이. 니 수치 당한대이!” 그 마귀의 협박공갈, 그게 마법의 줄이거든요. 어쩔 줄을 몰라요. 거기에 벌벌벌, 떨어요. 성경 한 장 더 볼까, 기도 더 오래할까, 십일조에 더 보태서 헌금할까, 방언이 터져야 할까, 온갖 ……. 지옥이 따로 없어요. 그게 지옥이에요. 그게 지옥이라니까!
‘이러다가 실제로 망하지. 정말 망하지.’ 망하면 왜 안 되는데? 그 이유도 몰라요. 그냥 마법에 걸렸으니까. 무조건 나는 망하면 안 되고, 나는 죽으면 안 되고. 여러분, 조금 살아도 천국 넣어줍니다. 조금, a little, 약간만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다지 오래 살 필요 없습니다.
잘 먹고 오래 살아야 천당 간다는 그것은 마법에 걸린 거예요. 세상마법에 걸린 거예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그 마법에 걸린 겁니다. 악마의 요술에 걸린 거예요. 가능성의 마법이고 행함의 마법이에요. 천국은 내 행함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아까 설교 처음에 했잖아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러다 혹시 실수하면 회개하면 된다고.
이게 바로 악마의 술책이에요. 수치를 당하면 되는데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아요. 이 시간에, 이 예배시간에 집에 불 안 났으면 좋겠어요. 가스 불 잘 끄고 왔어요. 제대로 잘 끄고 왔기 때문에 불 안 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수치를 당해도 괜찮다는 그런 마법에서 풀린 마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를 유발합니다. 매일같이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에. 매일 같이 분노하고 그 분노한 것만 우리에게 기억되게 되어 있어요. 기억은 두 가지 요소로 됩니다. 하나는 분노하는 것과 그리고 예상 못할 기쁨이 주어졌을 때가 기억에 딱 들어 있습니다.
그 기억된 것을 이야기로 풀면 그게 나의 역사가 돼요. 나의 역사는 내가 분노했다는 것, 내가 짜증냈다는 것과 예상 밖에 내가 좋게 되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담겨 있어요. 그렇다면 이 역사를 통해서, 나는 내가 의로운 쪽으로 살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달리 추가적으로 더 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복음을 방해하는 강력한 힘이 나에게서 바깥으로 번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떠미는 것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는 그 처참한 결말을 극구 계속 떠미는 거예요. 잘났는데 십자가 피가 왜 필요합니까? “열심히 하려고 하잖아요. 내가 죄인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하면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잖아요. 시켜만 주이소. 다 하깨요.”라는 쪽으로 계속해서 십자가를 밀어내는 거예요.
내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천당을 가도 내 행함이 살아있기에, 자기 위신이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깨지면 분노가 일어나고, 그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네가 뭔데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날 수치스럽게 하느냐, 하는 식이 돼요. 따라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방이었다는 거예요. 우리 밖에 있는 ‘외재성’이라는 겁니다.
외재성, 이번 수련회에서 배웠지요? 외부에 계신 분이에요. 자, 그러면 외부에 계신 분이 우리한테 침투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제가 너무 어렵게 해서 좀 미안한 감이 있어서 쉽게 하겠습니다. 의존교회에서 했던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어떤 카페에 한 여자가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습니다. 그 여자를 비스듬히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요. 앞모습을 안 본 것은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옆모습만 봤는데 한 눈에 반했는지 너무 아름다워요.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그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외로움을 마시는 것 같아요. 그것도 어느 겨울에, 찻집에서.
그 한 순간에 그 남자는 여자에게 꽂혔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여자의 존재에요. 그런데 그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지 외로움을 마시고 있었는지, 하여간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외로움을 마시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다 커피를 마시고 막 일어서는 여자의 정면을 봤어요. 그 순간, 영 아니라.
그렇게 되면 여기서……, 진짜 어렵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여자한테 꽂혔다는 말은, 나를 하나의 존재로 보는 겁니다. 내 존재가 그 여자를 아름답게 봤기 때문에 그 상대는 나에게 무조건 아름다워야 돼요. 내가 아름답다고 선언한 순간 아름다워야 돼요.
그래서 그 남자는 자기의 예상보다 못생긴 그 여자가 찻집에서 나가고 난 뒤에 여전히 햇볕이 들어오는 테이블을 비스듬히 쳐다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내가 10분전에 알았던 그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이게 망상이에요. 인간은 내 존재를 망상인 줄 몰라요.
망상이 아닌 존재는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영원히 있는 존재에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전부 다 남자에게서 사라진 그 여자처럼 날마다 변화하는 거예요. 위치 잘못 잡으면 아름답게 보이고, 얼굴 돌려버리면 못생겨 보이고, 집에 가서 원피스 벗고 몸빼 입고 돌아다니면 더 못생겨 보이고, 그러다가 그 남자를 도와주게 되면 갑자기 예뻐지고.
모든 인간은 변화하는 중입니다. be동사 + ~ing, 지금 변화하는 중이거든요. 변화하는 중인데 인간은 어떤 착각에 빠져서 그 변화하는 것을 스냅사진으로 팍 찍어가지고 이게 나라고 확정해 버려요. 그게 존재의 실수입니다. 내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하는 착각의 순간이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인간은 풀의 꽃 같아요. 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변화되는 겁니다.
변화되는 것은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구원은, 영원한 것만이 천국가요. 하늘나라, 천국은 영원한 것만 갑니다. 마태복음 3장 15절에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세례주려 하다가, “어? 당신은 내가 세례 줄 필요가 없는데요?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요?”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자. 그게 의라는 것인데 그 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내가 이걸 ‘하자, 안하자’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내 존재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나의 의가 발휘되는 순간이에요. 내 존재가 스스로 나를 의로운 사람 만들어서 천당보내기 위해서는 내 행함을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천국이고, 반대로 하면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러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교회 오라고 하면 가면 돼요. 내가 오면 안돼요. 주께서 보내시면 가면 돼요. 오늘 점심식사 돼지불고기 한다는데, 돼지 불고기 해주셨어요. 누가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먹으라 하면 먹으면 돼요. 이것 먹고 의롭게 돼야지, 그런 골치 아픈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면 되고, 앞줄에서 너무 맛있게 많이 먹어서 뒷줄에서 먹을 것이 없으면 안 먹으면 돼요.
왜? 우리는 어차피 존재를 펼치는 파노라마 속에 있는 일부니까. 공작새 있잖아요. 공작새 빛깔이 아름답지요? 여러 색깔이 있으니까 공작새가 아름다운 거예요. 공작 자체가 아름답지 그 세부적인 빛깔 하나하나는 가치 없어요. 공작새 몸체에 붙어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치마에 붙어 있는 공작새의 깃털 같이 붙어 있는 파노라마의 색깔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변화되는 우리를 집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으로 줍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마에 물들어가지고 할례 행했다고 고추 내세우고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그 고추를 잘라버려라. 너의 의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네가 유대인이라고? 네가 남자라고? 네 스스로 잘난체 한다고? 이방인 봐라. 아무것도 없었는데 천국 가잖아. 본받아라.”
유대인은 이방인을 본받아야 돼요.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가 그 이야기입니다. “본받되 유대인들은 ‘에라이, 지옥갈 이방인들!’ 그러지 말아라.” 그리고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본래의 가치를 인정해야 돼요. 아브라함시대에 받았던 할례의 본래의미는 뭐냐? 하나님께서 변화하는 아브라함을 고정적인 천국에 넣어줬다는 그 사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존재적인 아브라함의 자아를, 그 복숭아씨를 황폐하게 만들고, 거기다가 예수님 자신을 할례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아브라함 속에 집어넣으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지금 오늘날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모든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와요. 예수님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았다고 유대인 앞에서 껄렁대고 교만하면 안돼요. 유대인덕분에 구원이 온 거예요. 그들이 마다 하니까 그 너머로 흘러넘친 거예요. 유대인을 구원시킬 그 구원이, 개 같은 이방인인 우리가 부스러기 같은 그 십자가피를 먹고 공짜로 구원받은 거예요.
매사에 모든 변화에 대해서 망신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수치다, 그런 소리 입에 달지 말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면 돼요. 분노하시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시끄럽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 믿는다, 나 예수 믿는다, 하는 순간은 교회가 문제 있을 때고 비로소 더욱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교회 문제 있다고 다 천당 간다는 뜻은 아니고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 때문에 간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가정에 문제 있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어야 돼요. 없으면 전부 다 자기 잘난체를 하고, 내가 너 키웠다고, 내가 이만큼 되게 했다고 또 난리도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안에 복숭아씨가 없어야 돼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복숭아 씨가 없는 사람은,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황폐하고 불모의 땅, 불임의 땅이라면, 내 것이 나올 수 있는 어떤 행함도 가치 없는 것이라면 그 과즙이 은혜의 층입니다.
그 과즙 전체가 그냥 은혜에요. 그냥 감사해요. 버림받았기에 주신 은혜의 폭이 그만큼 더 두꺼운 겁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가정과 교회가 제발 씨 있어도 완전히 박살 나가지고 완전히 복숭아 과즙의 그 단맛을 보고 인생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가 분노하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대충, 대충 믿으면 되고 착하면 되는지 알았는데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게 나의 의를 돋우는 짓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악마의 마법에 꽁꽁 묶인 사고방식인 것을 주여, 저희들, 정신의 화전민이 되어서 날마다 우리 내부에서 불타고 또 불이 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