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강-갈 5장 7-10(심판을 넘다)1808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7-10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7-10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심판이라는 말은 함부로 입에 놀릴 사항이 아니잖아요. 심판을 말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나는 너와 상대 안 해, 이렇게 끝장내고 난 뒤에 심판을 언급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할 때는 함부로 성급하게 먼저 심판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 그 관계가 굉장히 사납게 되어버리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상당히 뭔가 성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그렇게 심판을 발설하고 맙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달래든지 좋은 관계, 좋은 말로 유인해서 예수 믿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하고 새삼스럽게 상대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왜 그러냐 하면, 주 안에 있을 때 본인이 저 사람과 사귀고 싶어, 저 사람에게 뭔가 얻고 싶어, 이렇게 계획을 잡아서 우리 한 번 사귀어 볼까요, 좋은 관계 한 번 맺어볼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8절에 보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주안에 있게 되었고 성도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에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이 요소를 성도가 자기 맘대로 제거하거나 뺄 수가 없어요.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부르신 주님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그 주님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미 믿음으로 최종적인 것을 다 보여줬어요. 믿음으로.
심판 이후에 도달된 사람은 이미 주님이 부르셨다는 그 이유 때문에 믿음이 발생된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어렵지요. 그러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을 넘었어요. 지옥구역에서 천국구역으로 선을 넘은 거예요. 선을 넘었기 때문에 선을 넘게 했을 때에 거기에 작용했던 요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부르셨다. 그것밖에 없어요. 내가 이렇게 했다, 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설쳤다, 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심히 구원을 원했다, 가 아니라 그냥 주께서 부르셨더니만 선을 넘은 거예요. 윤리도덕의 선을 넘어버린 겁니다.
선을 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을 넘은 자를 주께서는 붙들고, 그 다음에 뭐냐? 누구든지 내가 선을 넘게 한 이 사람을 흔들리게 하면, 주의 부르심의 그 가치를 훼방하면 내가 너희에게 심판이 있으리라, 고 선언하는 겁니다.
우리의 가치라는 것이 주께서 부르시는 순간 내가 나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그러한 의도는 이제는 포기해야 돼요. 포기하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면 그야말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처럼 심판받을 자와 심판받지 못할 자, 또는 나처럼 선을 넘은 자와 선을 안 넘은 자가 좍좍 갈라지는 계기로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함부로 심판을 언급해도 될 입장에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10절에 보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이게 나의 선언이 아니고 주님의 선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살아 있다고 보이느냐?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다고 이해하라.” 그 말입니다. 주님이 여기 살아있다고. 물론 형체는 인간형체인데 기능 자체가 낯선 기능이에요.
철학과 과학에서 나올 수 없는, 학교에서, 인문학에서 배워주지 않는 이상한 기능들이 나와요. 나 건드리면 지옥 가는 거야, 라는 이상한 기능들이 작렬하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 쉽게 말씀을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심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경과되고 난 뒤에 판정내리는 것이 최종 심판입니다. 최종성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지금 사도바울이 최종성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최종성이 될 때, 더 이상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최후심판을 감행하잖아요. 그 최후심판을 지금 언급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사람 건드리면, 이 사람에 대해서 뭔가 시비 걸면 최후 심판을 받는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거예요. 최후성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을 언급하는 거예요. 마지막이 이미 도달했고, 이제 선을 넘었고, 마지막에 도달했고, 마지막에 도달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작되는 시작점을 성도나 사도는 품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 마지막과 시작의 결합체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에게 이야기할 때는, 성도를 대할 때는, ‘아, 저 사람은 이미 마지막을 다 통과한 사람’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시작점에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 이렇게 보자는 말이지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이제 스톱! 연필 다 내려. 종쳤어. 문제 그만 풀고 다 손 내려. 이제 점수 매긴다.” 이게 심판성이라는 말이지요. 세상이 다 끝이 안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이미 주 안에서 세상 끝의 성질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누가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하는 것은 이미 통지되었다는 겁니다. 주께서 부르신 자는 이미 합격이고 안 불러주면 불합격이에요. 그리고 합격된 사람은 이미 선을 넘었어요. 그러면 선을 넘은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그러면 아직까지 여기 주 안에 없는 사람, 주께서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심판을 대비해서 뭔가를 준비하려고 허덕이는 사람이에요. 뭘 하면 되지, 뭘 하면 나는 지옥 안가지, 이것을 아직도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런 인간은 건드려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인간 백날 건드려도 심판 안 받습니다. 주께서 불러준 적이 없고 주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최종성과 최종성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시작점의 결합체가 아니에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런 결합체가 없어요. 그런 요소가 없어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데 믿음은 뭐냐? 믿음이라 하는 것은 현실영역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어디까지 확장시키느냐 하면, 심판이후, 세상끝장까지 다 확장시킨 사실을 한꺼번에 알게 될 때 그게 믿음이에요.
지금 2018년도만 알아서는 그게 믿음이 아니에요. 서기 3천년이 되든 서기 5천년이 되든 간에 갈 때까지 가도 그 모든 것을 미리 다 본 사람, 그렇게 돼야 그 사람에게는 확정적인, 최종적인 심판기능이 발휘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해 보고 안 되면 수정하지, 그래가지고는 그것은 해보나마나한 소리에요. 그 때 가서, 내가 몰랐네 하면서 머리 긁적이면 그래가지고는 안돼요. 그래서는 믿음 아니에요. 믿음은 한 번 해보자, 그게 아닙니다. 확장될 때까지 끝까지 확장된 그 상황에서 이미 선을 넘었다고 통지받은 사람, 그 사람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주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자기백성을 부를 때에, 한 번 해 볼래,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할 것 없어, 이래서 부르는 거예요. 내가 좀 불러줬으니까 네가 마무리는 해, 이거 아니에요. 그거 아닙니다!
십자가로 내가 용서는 해줬으니까 앞으로 착하게 사는 것은 네 몫이다. 그거 아니에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지점은 이 점입니다. 여러분도 의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안 믿으면 심판받는 줄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성도를 건드리면 심판받는가? 왜 심판의 기준이 그렇게 확대되었는가? 그게 왜 갑자기 많아져버렸는가? 보편적이 되었는가?
그게 좀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난 인간하고 상대 안 할 거야. 나는 예수님과만 상대해서 예수 안 믿으면 심판받고, 지옥가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난 예수님만 상대할거야.’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 안다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안일한 상식인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나를 안 건드려도 나 믿는 사람 건드리면 너 지옥 가, 이런 식으로 심판의 기준이 폭이 그만큼 두껍게 되었으니까 어째서 그 폭이 예수님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건드리면 지옥 간다는 폭으로 넓혀져야 되는지, 저만 궁금합니까?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행동을 조심합시다. 지금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불러준 사람, 주 안에 있는 사람이 기존의 심판의 대상으로 지옥 갈 사람과 비교해서 아주 특이한 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특이한 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런 특이한 점이 없는, 보통 지옥 갈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그것은 바로 주 안이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했던가를 보면 알지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자기 책임에 아주 철저에 철저를 가했던 사람을 한 사람 이야기할게요. 제가 성경 보고 그 사람을 찾아냈는데요. 쉽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피서 간다고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데, 점심 먹고 난 뒤에 바로 운전해서인지, 날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깜박 졸았어요.
잠시 졸았는데 자기 차 앞부분이 완전히 박살났고 저 앞에 자기 차보다 작은 모닝이라는 차가 뒹굴고 있어요. 그 차 안에는 젊은 신혼부부가 피서 간다고 가다가 졸음 운전하는 내 차에 받혀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요.
그래서 사고 낸 사람은 ‘즉사 했네’ 하고 아무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으매, 꼭 모세가 사람 죽였을 때처럼 그렇게 아무도 없으매 그냥 가버렸어요. 아무 사고수습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거예요.
그런데 요새 한국이 어떻습니까? cctv가 가는 곳마다 다 있으니 그 시간에 지나간 차량들 조회 다 해보면 들키잖아요.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졸음 운전했기 때문에 저 사고당한 젊은 신혼부부가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가 내 차에 받혀서 죽었구나. 그렇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 해.
따라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아는가? 빨리 119부르고 사고수습 한다고 했는데 남자는 죽었지만 다행히 여자는 살아남았는데 하필 그 여자가 임신이 되어 있었더라. 이래가지고 복잡해졌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 재산 다 팔아서 보상해주고, 그 여자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자기는 유치장에 들어가고, 그렇게 했습니다.
졸음 운전했던 그 남자에게 계속 누적되면서 쌓이고 쌓여서 남아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자책감입니다.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말은 입에 달렸고 재산까지 다 처분해서 남아 있는 여자와 뱃속의 아기까지 다 책임진다고 했지만 결국 자책감을 견디지 못해서 수습이 다 된 것을 보고 나서 그 다음에 아파트에서 투신해서 자살했다.
이게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도리를 다하는 거요. 책임을 다하는 것. 이런 자가 지옥 가는 겁니다. 반면에 졸음운전 해가지고 차 박았는데 아무도 없는 것 보고 휑, 하니 내뺐다. 그런데 나중에 경찰한테 걸렸지요.
“당신이 차 박아놓고 왜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도망갑니까?” “그냥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5년의 징역에 처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재산도 다 넘어가고 5년 징역살이 하는 그것이 왜 좋습니까?”
“밥을 먹게 하신 것도 주님이고, 밥 먹은 후에 졸음운전하게 하신 것도 주님이고, 하필이면 졸음 오는데 좀 쉬었다가야 되는데 휴게소 안 들르고 그냥 가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신 것도 주님이고, 하필 내가 운전하고 갈 때 앞에서 얼쩡대다 받힌 모닝 운전자도 주께서 그렇게 배치한 것이고, 사고낸 후에 짜증나서 그냥 뺑소니칠 마음먹게 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고, 잡힌 것도 주의 뜻이고, 교도소에 온 것도 주의 뜻이고, 내 잘못이 뭐가 있습니까?”
이것이 천국 가는 사람의 마음이에요. 자기 인생에 책임지면 안돼요. 수습하면 안 됩니다.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질 수 없어요. 이걸 분명히 아는 거예요. 일은 주님이 일으켰고 수습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수습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문제가, 사단이 여기서 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 때 하필 졸음 운전한 것, 좀 휴식을 취해야 되는데 그럴만한 곳도 없어가지고 그냥 차 몰고 싶었어.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졸음운전해도 껌 씹으면 되겠지, 했어요. 왜? 주께서 그런 마음을 집어넣어 줬기 때문에.
그리고 점심 먹고 좀 자야 되는데 낮잠 안자고 그냥 운전하기 전에, 점심 먹기 전에 자기 엄마를 만났거든요. 그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난 거예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먼저 태어난 것이 주의 뜻이고, 안 태어나고 싶은데도 엄마가 날 태어나게 해서 서른세 살 때 졸음운전 해서 사람 죽이게 만든 그것도 주의 뜻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아이고, 내가 수습해야 돼. 내가 책임져야 돼. 내가 뒤처리해야 돼.’ 그래서 서둘러서 구급차 부르고, 다 하지요. 그래서 제 말은 뭐냐? 어느 인간도 구원 받을 인간은 없어요. 왜? 수습에 나서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도리기 때문에. 그 도리가 자기를 지옥 보내는 겁니다. 그 도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할 수 없어요. 그것은 타고난 도리에요. 양심이 없고 자책감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 양심이, 그 자책감이, 내 인생에 책임져야 되겠다는 그 감각이 한발자국도 천국으로 못 가게 만들어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승 팔았다고 자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런 인간은 없거든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지옥 갔습니다. 그게 악마의 마음이에요. 이 세상에 악마의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악마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자기자책감 없는 인간은 없고, 조금이라도 후회하지 않는 인간은 없고, 모든 인간은 나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다 그런 마음이 있어요. 자진해서 악질, 어떤 사고를 내놓고 사고처리도 안하는 그것은 악랄한 것이고 악질이에요. 악랄하고 악질을 하면 되는데 내가 그렇게 안하고 싶어. 나는 독한 악질이 안 되고 싶고, 남이 보든 안 보든 내가 악랄한 인간이 되기 싫어요. 그래서 인간은 지옥 가는 거예요.
제가 왜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될뿐더러 구원받는 길은 없어요. 목사가 구원받는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없는 구원의 길을 목사가 이야기하잖아요.
백프로 사기지요. 구원의 길이 없는데 구원의 길을 이야기한다고요. 사람의 허영심을 부추겨서 붕 뜨게 만들었어요. 제가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어요. 횟집에 수족관이 있으면 그걸 유리판으로 덮었다고요. 수족관을 두꺼운 유리판으로 덮어버리면 그 안의 고기들이 산소가 모자라서 유리판 위로 올라오려고 애를 쓰잖아요.
하지만 유리판 때문에 수면 밖으로 못나가요. 해운대가면 아쿠아리움이 있지요. 큰 유리벽 너머에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다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아쿠아리움, 그 수족관 안이 그들의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고 세상이에요.
거기에 보면 양반물고기, 상놈물고기, 점잖은 물고기, 고상한 교인, 악질적인 교인, 우아한 교인, 착실한 교인, 농땡이 교인, 다 있어요. 수족관 안에 각종 물고기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유리벽 안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구원은 없어요. 설교 여기서 끝내야 돼요. 구원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졌으니까……, 하면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래.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 지게 한 죄인이구나.’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에요. 그 양심의 가책이 든다는 그 순간 그 사람은 가룟유다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악질이 되고 악랄해도 그 악질과 악랄에 대해서 ‘너무 내가 심했지’라는 죄책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그 죄책감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고 지켜야 돼요. 더는 나쁜 짓 하지 말자는 식으로요. 이만큼 해도 많이 했으니까 더는 말자. 아까 우리 집사님 기도할 때, 죄가 무엇이냐. 아주 노골적으로 물으셨는데 죄란 자책감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지옥 안가도 자책감 느끼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불편해요. 마음이 불편해서 못살아요. 아무리 예수 믿고 아무리 찬양을 백날 해도 뒤돌아서게 되면, ‘성경 다섯 장 읽어야 될 것을 세상밖에 못 읽었다. 착한 일 세 가지 해야 되는데 두 가지밖에 못했다. 전도 열 명 해야 되는데 한 명밖에 못했네. 주께 영광을 많이 돌려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다.’
이러한 자책감은 무슨 숟가락을 가지고 긁어낼 거예요. 못 긁어냅니다. 긁어낼 수가 없어요. 긁어내면 그 밑바닥에 또 양심 또 나와요. 자책감 또 나옵니다. 더 할 수 있었는데. 더 찬양할 수 있었는데. 더 선교할 수 있었는데. 또 나옵니다. 인간은 수족관에 갇혀 있어요. 고상한데 못 빠져 나와요. 고상한 물고기인데 구원은 못 받아요.
맨 날 회개하는데 천국은 못 갑니다. 회개하면서 지옥가야 돼요. 그렇다면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오늘 본문에 주께서 불러줬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주님께서 그 수족관을 깨요. 길은 없어요. 길은 없는데 주께서 찾아올 때 찾아오는 그 순간 그게 길이 되는 거예요.
길이 올 때, 주께서 우리에게 천국 가는 길을 열어줄 때 주께서 손해 안 봅니다. 주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너를 꽁꽁 결박했던 삶의 원리가 악마의 원리라는 것을 노출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수족관 물이 굉장히 맑아 보이지요.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은 그게 먹물인지를 몰라요. 외부에서 쏟아낸 죄와 또 자기가 뿜어낸 죄가 한데 엉켜서 된 시커먼 먹물인 줄도 모르고, 악마가 퍼질러 놓은 그 먹물 속에서 그들은 같은 인간들끼리 좋다고 행복을 추구하면서, 철학과 과학을 논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 수족관 안에서 어떤 사람은 프로야구 즐기고, 어떤 사람은 골프, 어떤 사람은 서핑, 거기에 미쳐서 외국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빠라빠라빠라빰, 바이크에 미쳐서 돌아다니는 사람, 어떤 사람은 등산, 누굴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암벽타기, 난치는 것, 다도, 시커먼 악마의 먹물 속에서 굉장히 건전해 보이는 거예요.
굉장히 건전해 보이고, 그 안에서 ‘저런 인간은 교도소 집어넣어야 해. 최순실 저건 죽여야 돼.’ 자기는 괜찮아요. 아주 건전해요. 그 안에서 선과 악을 논하고요. 옳고 그름을 논하고 그 안에서 재판을 행사하고.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성도는 아무도 재판할 필요도 없고 재판 받을 필요도 없다. 성도끼리는 고소하지 마라. 천사를 재판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판사에게 재판을 받느냐. 수족관 안에서 먹물 먹은 변호사에다가 먹물 먹은 판사한테 진리의 훈계를 들을 것이냐.” 그렇게 나와요.
15세기에 쿠자누스라는 독일신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극과 극은 만난다.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인데 왜냐하면 다 같이 수족관에 있기 때문에. 그게 선악과에요. 선악과의 후유증입니다. 선을 논하지만 나중에 보니 악이 되고 악을 논하지만 나중에 선이 돼요.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어떤 구멍이 없어요. 구멍이 없는데 주님께서 구멍을 뚫는 바늘로 오십니다. 바늘로 톡 찌르면 거기서 구원의 길이 열리면서 그 뒤에 실이 딸려오지요. 주님의 삶의 원리가 그 바늘구멍 따라서 줄줄 이어져 들어옵니다. 들어오면서 그 줄에, 그동안 인간들이 악마의 수족관에 묻혀 있었던 그 환경이 실에 매겨지게 되지요.
그 먹물이 실에 매겨지게 되면 거기서 피가 발생되지요. 먹물에 피가 섞여 버리면 그게 핏물이 돼버려요. 피 흘리게 한 그들의 죄를 감당해야 될 세상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논하면서 등산하고, 피서가면서 오늘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죄를 몰라요. 예수님이 오셔서 먹물에 피가 묻히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이 완전히 먹물, 예수님을 죽였던 그 핏물에 휘둘리면서 우리는 하루하루 세끼 먹으면서 에어컨 켜대면서 살고 있어요.
이게 뭐냐? 심판입니다. 이게 심판이에요. 무슨 책임을 지고, 양심에 가책을 받고, 그런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연락처 달아놓으나 안 달아놓으나 아무 의미 없어요. 인간에게 미안할 필요도 없고, 누구한테 사과할 필요도 없습니다. 뻔뻔의 극치, 뻔뻔의 끝판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지난 날 한 것에 지금 현재 책임지지 마세요. 앞으로 할 것도 책임지지 마세요. 나의 여기의 현존은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와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할 때 앞에 율법사가 예수님한테 물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된다. 그것이 율법이다.” 했어요. 율법사가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시작한 거예요.
거기서 어떤 법칙이 나오느냐 하면, 2대 1의 법칙이 나와요. 2대 1의 법칙이 뭐냐? 두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가버렸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책임지지 아니하고, 뒷수습 없이 그냥 가버렸어요. 왜? 자기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세 번째의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수습을 해요. 뒤처리를 합니다. 그 뒤처리를 하는 모양새를 한 번 보세요. 상당히 과도합니다. 넘칩니다. 그냥 뒷수습해서 데려가는 정도가 아니고 나중에 모자라면 연락처 줘서 다시 내 돈을 빼서 그 사람을 치료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되어 있어요. 오버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의 의미, 율법을 준 것이 뭐냐 하면,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라는 말이지요. 그 과도함까지 다 할 수 있거든 네가 해보라는 그 말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그저 땜질하듯이 때울 수는 있지만 정말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그 과도한, 무한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 인간은 어떤 인간도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율법이 원하는 그 무한한 책임, 그 강도만난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치료비까지 댔는데 나중에 그 강도만난 사람이 치료 다 받고 와서 고맙다고 하면서, “고마운 것은 고마운데 강도 만난 뒤에 회사에서 잘려서 갈 데가 없는데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든지 생활비 월 150씩 제공하든지 해주세요. 안 그러면 대출받아서 치킨집이나 커피점 하나 차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게 되면 어때요? 그것까지 책임져야 돼요, 말아야 돼요?
책임져야지요. 책임진다고 한 1억 들여서 카페 차려준 뒤에 살만하니까 결혼시켜 달라는데 여자 구해줘요, 말아요? 구해줘야 돼요. 결혼해서 애를 낳았는데 애가 네쌍둥이라. 그거 키워줘야 돼요, 말아야 돼요? 키워줘야 돼요. 책임지려면 끝까지 책임져야 돼요. 무한대로 책임져야 돼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어느 인간이, 아담 출신의 어느 인간이 그걸 다 해냅니까? 2대 1의 방법에서 1은 누구냐? 바로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본인이 끌고 온 바늘의 레벨에서의 율법성취는 무한의 사랑까지 이 땅에 끌고 들어온 거예요.
소경 낫게 해준 것이 책임이 아니에요. 소경을 낫게 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을 구원의 끝이 아니에요. 자기 목숨을 바쳐서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악마의 원리로 살았던 우리의 그 목숨자체를 교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자기 목숨으로.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니들 눈으로 보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냐?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주님이 여기 살아 있는 거야.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너희들이 소경이라 잘못 보고 있는 거야.” 그런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의 뜻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뜻이에요.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남에게 사과하거나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면 안돼요. 안되기 때문에 그냥 건성으로 하세요. 미안합니다, 그거 왜 못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죄송해라, 미치도록 죄송해라. 그 말 왜 못해요. 건성으로. 천번 만번 하겠다.
왜냐하면 먹물 안의 인간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마가복음 8장 2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희한한 말씀이 있어요. 22절, 23절부터 보면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그 다음 24절에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 말이 맞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접촉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걸어 다니는 마네킹이에요. 나무에요. 캘리포니아 산불 났을 때 나무 몇 그루가 걸어서 도망갔습니까?
나무는 산불에 도망 못갑니다. 취약성이 있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타죽는 겁니다. 이 세상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어요. 그냥 소리 내는 마네킹이고 걸어 다니는 나무에요. 마지막이 오면 올수록 인간은 없고 나무 같은 것들, 마네킹 같은 것들, 물체에 불과한 것들인데 전에는 인간으로 봤어요.
인격이 고매하다, 저 사람은 우아하게 산다, 그 사람은 양심의 가책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남에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요만큼 손해 봤는데 배나 갚아줄 정도로 인격이 풍부하다, 아, 저 사람은 본받아야지, 안중근 의사 대단한 분이다, 새마을 운동한 박정희는 정말 훌륭하다, 한 경직 목사는 훌륭하니 어떻고 하는데, 점점 더 마지막 때로 오게 되면, 믿음의 범주가 확장되고 나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므니다! 본받을 요소가 손톱만큼도 없어요.
30대에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가 40대면 자식은 열 살이 되지요. 나는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50대 된 아버지. 아버지가 한평생 자식을 위해서, 저렇게 야근까지 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코피 쏟아가면서 자식 공부시키고, 유학까지 보내려고 하는데 난 아버지 존경해. 60 아버지. 머리가 희어도 저렇게 고상하게 머리가 희어질 줄 몰랐다. 70대 아버지. 자꾸 뭘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평생 고생하셨으니 고생의 후유증으로 보자. 80대 아버지. 괴물입니다. 90대 아버지는 귀신이고. 100세 아버지는 이미 요단강 건너갔어요. 살아있어도 산자가 아닙니다.
뭘 존경해요? 누굴 존경해요? 아무도 존경할 사람 없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게 정답이에요. 인간을 존경하지 말고 인간을 사랑하지도 말고. 이것은 마네킹, 허수아비거든요. 바람에 날리면서 서 있는 허수아비를 왜 좋아해요?
이게 이래야 돼요. 이래야 되는데 인간이 평소에 살던 악마의 습성, 그 먹물이 그대로 우리에게 남아 있어요. 이게 죽어야 빠지거든요. 그대로 그게 남아있다 보니까 이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있어요. 그래서 예수 믿고 남에게 잘해주고 싶은 거예요.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만 천당 가면 미안해요. 그래서 내가 정성을 다해서 내 주변에 있는 나무들, 움직이는 마네킹들, 그런 사람들까지 좀 같이 손잡고 천국 보내고 싶어. 그것도 주제넘게.
그래서 밑천 들여 교회 올 때마다 5만원씩 주고, 복음 전한다는 명목으로 밥도 사주고, 그렇게 다 했는데, 다 했는데 그거 헛짓하고 있는 겁니다. 가만 보니까 그 사람 구원하고 내가 하는 것 하고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해주는가? 그냥 헛짓을 하고 싶어. 더운데 많이 하세요. 그냥 헛짓 하고 싶어요.
해놓고는 내가 말을 잘못 전해서 지옥 갈까 싶어 걱정하는 그 자책감. 가룟유다의 자책감. 내가 실수해서 저쪽에서 교회 안 나온다고 삐지면, 내가 또 불쌍한 영혼 하나 죽이지나 않았는가, 하는 책임감. 일을 자기가 벌려놓고 책임도 자기가 지고.
엉망진창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이. 정말 자기가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받는 것처럼 남들도 똑같은 입장이에요. 해준다고 감격해서 교회 나와 주는 것 없어요. 교회 나와 줘도 천국 가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와 주지요. 나와 주면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삼손이 머리카락을 잘랐잖아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니까 힘이 빠졌다는 겁니다. 지금 삼손의 머리카락은 그 의미가 아니에요. 삼손의 머리카락이 빠지니까 가는 노끈가지고도 묶여요. 그것도 일곱 겹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의 노끈 가지고도 삼손은 꼼짝도 못했어요.
그래서 삼손을 그림으로, 이미지로 그린다면 주의 사항이 있어요. 삼손을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로 그리면 안돼요. 그냥 살포시 머리만 길게 그리면 돼요. 머리를 깎으니까 보통 사람하고 똑같아요. 노끈 하나로 다 묶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악마의 노끈에 묶여 있는 상태에요.
삼손이 머리카락 잘리니까 다시 현재의 악마에 묶여 있는 그 상태를 노골적으로 노출시킨 겁니다. 삼손은 양면성을 다 보여줘요. 예수님의 피 앞에서 성도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피 앞에서 우리는 악마의 먹물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성도는 주께서 불러주니까, 그리고 주 안에 있으니까 그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버려요. 우리의 죄를 교체를 시킨 거예요. 우리의 모든 행함을 대신해 버린 겁니다. 마지막 심판에 책이 두 책이 있어요. 행위책이 있고 생명책이 있는데 행위책은 뭐냐? 모든 행위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cctv에 그대로 다 찍힌 채로 그대로 다 남아있어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런데 생명책은 그 모든 우리의 행위가, 남의 물건을 훔쳤던지 누구를 패던지 관계없이 모든 행위가 주께서 의도해서 주께서 일부러 일으켰다고 주께서 책임지고 나선 행위가 되어버려요.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그런 행위가 유발되는 변수들이 본인이 골라잡은 변수들이 아니고 주께서 의도한 변수에요.
어느 날 어느 집 아들로 태어나서, 서른세 살 때 강의를 하나 하고 점심 대접받고 돌아오다가 휴게소에서 잠깐 눈을 붙여야 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계속 오다가 졸음운전 할 때 이 모든 연쇄관계,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가 전부 다 이것은 주님만 살아계셔서 주께서 한 것이고 자기는 시다바리, 자기는 죽은 자로 거기에 끌려갔을 뿐이에요.
왜?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거 하기 위해서. 차 박아놓고 책임 안지는 그것도, 주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구원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 가운데 죄책감이 있다면 그 죄책감에 묶여서 너는 지옥 갔어야 될 인간이었었었었었었어.
너는 그 죄책감, 양심, 가해자로서 피해자에게 할 도리를 다 안했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나쁜 놈이고 그런 일만 안 생겼으면 나는 건전한 인간인데 졸음운전해서 사람 죽여 놓고 그래서 나쁜 일, 나쁜 놈이 되어서 나는 정말 자살하고 싶어.
자살한다는 것이 뭡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 자살 아닙니까? 마지막까지 날 지키는 방법이 자살이에요. 술도 그렇고. 왜 과음합니까? 이런 식으로 내 것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과도한 담배, 술, 과도한 도박, 전부 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이런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오늘 본문에서 할 때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얼마나 미워하겠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심판하는데 네가 건방지게 ‘이런 자에게 그 믿음을 흔들리게 행함을 집어넣는다면 누구든지 지옥 가는 저주를 받는다.’ 하는 것은 듣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그 먹물 수족관 안에서 그들이 듣고, 배우고, 양육 받고,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 모든 내용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서로 돕고, 소통하고, 도와주는 그것이 인간적인 도리잖아요. 내빼지 말고 책임지고, 수습하고, 뒤처리해주고. 선한사마리아인의 그걸 법으로 만들어가지고요.
그런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오른뺨을 치는데 왼뺨을 내놓을 수가 있습니까? 주께서 내놓은 모든 말씀은 인간이 못 지키게 하기 위함인데 그것은 인간이 나쁘지만 인간을 둘러싼 그 환경, 악마가 심어준 평소의 삶의 원리자체에 네가 꽁꽁 묶여 있다는 겁니다.
묶인 채로 어떤 인간도 그것은 하나의 나무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악마의 원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다른 원리가 생각나지를 않는 거예요. 제가 농담 비슷하게 할 테니까 여러분이 무슨 말인지 알아보세요.
제가 매주일 만나는 여자가 있어요. 그 이름이 오미자에요. 이거, 오미자(차). 안 맞지요. 왜냐하면 이것은 차인데 여자하고 레벨이 안 맞지요. 지금 사도바울은 레벨에 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나?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어.”
여러분, 이게 안 믿는 사람에게 납득이 됩니까? “네가 인간된 도리를 다하라. 인간의 인격의 도리를 다하라. 예수 믿었으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야지.” 그 착함이 곧 악이에요. 선악에서는 착함과 악이 같은 뜻이에요.
가룟유다는 선하려고 자살하고 그것으로 악마의 종이 된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해봐야 소용도 없고. “목사님,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빠져나올 길이 없지요. 구원의 길은 없어요.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없는데 주께서 불러낸 자는 ‘이제 거기에 내가 구애받을 필요가 없구나.’
내 자책감, 내 양심, 내 뒷수습, 뒤처리,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도리,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도리, 이 세상은 그런 것 생각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자식이 지옥가든 말든, 자식이 멀리 가 있는데 한국에 있는 엄마가 책임지겠어요? 네 마음대로 살아라, 네 마음대로. 화산이 터지든지 말든지 그냥 네 마음대로 살아라.
이제 제발 책임지지 마세요. 어떤 도리를 해 달라고 남에게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아직도 먹물이 너무 심한 사람이에요. 밟아서 먹물 확 빼고 싶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불러줬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구원의 구멍인지, 주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현실인지, 주 안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닌데도 이미 선을 넘었음을 감격가운데서 오직 주님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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