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강-갈 5장 4절(끊어진 자)1807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4절입니다. 신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사도바울이 상당히 과격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과격하냐 하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언급을 하거든요. 사람을 상대로 해서.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지옥이 무엇입니까?”라고 서울에 계신 분이 질문을 했는데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과 끊어진 것이 지옥입니다. 예수님께 관심 없는 것이 지옥입니다. 예수님과 결별한 것이 지옥입니다.
제가 한 그 말이 맞다면 사도바울은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하면, 상대방을 볼때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슨 티가 나느냐 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회유하거나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중개방송, 그것도 생중계방송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 사람 봤지? 끊어진 자야. 저 사람 봤지? 안 끊어진 자야.” 그렇게 실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열 내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를 말이지요. 주께서 알아서 하는데 우리가 애쓸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노시는 분 같으면 우리 쪽에서라도 설쳐대야 구원에 약간의 희망은 있는데 주께서 일해 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소용이 없거든요.
아까 장로님 기도할 때 새로운 이미지를 제공했습니다. 땡볕에 일하시는 하나님. 땡볕은 다 피하기 마련인데 오곡백과 키우기 위해서 땡볕에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뭐냐? 땡 볕에서 일하시는 분의 수고를 공짜로 서늘한데서 얻어먹는 사람이지요.
이것이 은혜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에요. 은혜에 있는 사람은 뻔뻔스럽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고생은 본인이 한 적이 없어요. 고생은 남이 하고 덕은 자기가 보고.
그렇게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는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라고 해서 세상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율법을 내세워서 세상을 나처럼 봐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율법을 앞장세워서 세상보기를 하게 되면 뭐 하나 놓치지 않고 몽땅 다 파악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해서 본다는 것은 율법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옥 가는 사람이지요. 예수님과 결별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지요. 그렇게 떨어진 사람의 대표적인 모델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의 특징은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에요.
자기친구 하나 구원하려고 그렇게 용을 쓰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친구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강의에 참석을 하고서도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 이유는 뭐냐? 가룟유다가 모델이에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가 빠졌느냐? 율법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뭐든지 율법을 앞장세워서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왜 은혜에서 끊어진 자인가?
그들은 율법을 앞장세우면서도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느냐, 그렇게 생각되겠지요. 사도바울도 옛날에 그랬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겼던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어요. 옛날에 바리새인중 바리새인이고 그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유대인들과 어떤 차이성을 드러내느냐 하면,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여겼던 그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할례라는 것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할례의 완성이, 율법이 완성이 이미 나타났다는 겁니다.
할례의 완성을 골로새서에서는 세례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례를 설명할 때 할례와 연결 지어서 세례를 설명합니다. 세례의 특징이 뭐냐? 세례요한 당시에 세례의 특징은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그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그것.
그걸 가지고 세례라 하는데 정확하게 해서 물세례입니다. 제가 아까 어렵다고 한 이유가 있어요. 할례에서 세례로 옮겨졌다면 할례를 받지 않고 세례요한이 말하는 물세례 받아야 구원받느냐, 라는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할례를 받았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복음을 거부하게 된 그 이유가 세례 받으면서 ‘아 이래서 잘못이구나’ 하는 것을 또렷하게 드러내면서 세례를 받아야 돼요.
할례에서 세례로 옮겨갈 때는 왜 인간이 할례를 받아도 구원이 안 되는가, 이유를 할례와 자기와의 연관을 통해서 그것이 다 들춰짐을, 세례 받으려면 ‘이래서 할례 받아도 안 되는구나’ 하는 이유를 알고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한 대신에 물세례 받으면 된다, 이렇게 돼버리면 할례 받아서 망한 이유를 모르는 채 물세례를 받는 셈이 돼요. 그러면 할례도 율법이고 오늘날 물세례 받는 것도 율법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회개가 아니에요. 회개가 되려면 왜 인간은 할례라는 말씀을 지켜서 몸에 새겨도 왜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되는가는, 할례언약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할례언약과 결합된 이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것을 알아야 그게 회개가 되는 겁니다. 회개는 울고불고가 회개가 아니에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세상을 보는, 그래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할례를 받아도 구원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그리스에서 끊어지고, 라고 되어 있는데 끊어진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인간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졌어요.
끊어진 상태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셔서 그 끊어짐에 대해서 창세기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 자는 죽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죽음이라는 말은, 먹는 그 순간에 헉, 하고 목이 막혀서 물, 물, 이렇게 죽는 것이 아니고, 농약 마시듯이 죽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는 영생의 나무가 있는데서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생명과 짝을 이뤄야 의미가 생겨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 지옥이에요. 지옥은 뭐냐?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것이 지옥입니다. 잘 먹고 잘살고 재벌로 살아도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그 자체가 지옥이지요.
요트에 자가용에 비행기에 집은 오십 채, 그런 지옥도 있어요. 지옥도 가지가지 하니까. 그런 지옥도 있지만 어쨌든 그리스도 없이 사니까 그것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으리라, 했을 때 우리 인생에 대해서 ‘너는 죽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선악을 아는 지식이 결국 인간을 죽게 한다는 그 원칙을 인간으로 하여금 내보냄으로서 계속해서 살아서 움직이는 그 인간을 통해서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인간을 죽게 했다는, 하나님이 처음에 천명한 그 원칙은 영원토록 살아있는 원칙이라는 것을 인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면 끊어짐을 뭐로 연결해야 되느냐 하면, 기호로 연결해야 돼요. 선과 악을 아는 이상은 선과 악을 완벽하게 다 지켜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의 몸에다가, 이스라엘을 택해놓고 그 택한 자에다가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있잖아요, 선악을 아는 자는 죽는다는 그 원칙을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결합시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백성은 하나의 움직이는 기호가 돼요. 어떤 기호냐 하면, 하나님의 원리원칙을 실어나르고 그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기호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호가 되어버리면, 내가 어떻게 살고, 내가 어떻게 행복할거냐, 하는 것은 전혀 주의 뜻하고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몸이 건강하고 행복합니까?”라는 것은 질문을 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취지가 그게 아닌데. 너는 그냥 하나님께 끊어진 자가 어떤 모양새를 띄느냐, 라는 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기호로서만 다뤄질 뿐이에요.
옛날 교회사 책을 보니까 초대교회 때 소위 선생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교부라고 이야기하고 그 시대를 교부시대라고 합니다. 교부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 로마교황 시대가 되는데 그 당시에 많이 밀려오는, 소위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온 사람들에게 교부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 가르쳤다는 그 내용들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어요.
그 내용들이 뭐냐? 세례 받으면 모든 죄를 용서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례 받는 순간, 거기 나온 표현대로 하면, 하늘의 영이 왔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는 깨끗한 의인이 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옛날 사람들이 상당히 복음적으로 가르쳤어요.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세례 받고 죄지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교부들은 성경의 마태, 마가, 누가, 성경을 죽 이야기하면서 세례 받고 나서 죄를 지으면 취소가 됩니다, 하는 식으로 가르쳤어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교육을 받았어요. “세례 받은 순간부터 여러분 과거에 지은 죄는 다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았으니까 이제는 세례 받은 값을 해야 되는데 세례 받고 난 뒤에 죄를 짓게 되면 여러분이 용서받은 것이 다 무효가 되고 천국에서 탈락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사람들은 급한 것이 있는데 구원이 급해요. 주께서 어떻게 나를 다루는지 그런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주님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게 급해요. 나 구원받는데 주님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뽑아내느냐, 그게 급선무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교회에 찾아온 거예요. 자기 죄를 용서해준다니까. 그것도 아무 대가없이 용서해준다니까 누가 안 오겠어요? 옛날에 얼마나 지저분한 짓을 많이 했겠어요? 그래서 막상 교회 오니까 교회에서 달랑 붙드는 겁니다. “됐어요. 당신은 이제 세례 받고 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죄 짓는 것에 대해서는 장담 못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래서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래서 생긴 게 교회잖아요. 교회 역사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온갖 성경구절 다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디에 주목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에 있어서의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율법의 완성차원이 인간차원에 내려오면 뭐냐 하면, 너는 이미 끊어졌음을 확인시키는 그런 과정을 구체화시킨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할례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가지고 내가 스스로 구원되고자 시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음을 누가 아느냐?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롭게 변화된 세상보기, 세상 보는 안목이 되는 겁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네요. 쉽게 하겠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원하고 사랑해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문제는 상대가 나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미치는 거지요. 이게 미치는 겁니다. 상대는 재벌 2세입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여직원한테 들이댈 수 없는 위치에 있어요.
그런데 마음 낮추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 아르바이트 하는 아가씨가 “당신은 날 좋아할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도 십년 동안 짝사랑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벌 2세는 같이 살래요, 하고 있고 상대는 같이 안 살래요, 하고.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우리교인들 다 보고 있는 드라마.
짝사랑하는 그 괴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같이 못살겠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요.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을 원합니다. 구원을 원해요. 구원받는 운명을 원합니다. 그런데 운명이 나를 원치 않아요. 우리는 주님을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원하지 않아요. 이 낭패를 어쩌면 좋아요. 이 낭패를.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 쪽에서 주님께서 예뻐할 만한, 주님께서 나를 내치고 싶어도 못 내칠 그러한 온갖 좋은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열심히, 또 열심히, 예쁨 받으려고, 사랑받기 위해서 다 해봤자 짝사랑입니다. 소용없는 짝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율법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내가 율법에 흠이 없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주님께 핍박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다메섹에서 서기 32년경에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3년 동안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갑니다.
사막에 있으며 뭘 생각하느냐? 주께서 주신 기호가 있어요. 네가 하나님께 열심 낸 그것이 왜 예수그리스도께 핍박이라는 반대작용으로 적용이 되는 그 논리를 곰곰이 생각한 거예요.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님을 더욱더 핍박하는 양상이 되는 거예요.
도대체 나는 주님 앞에 어떤 기호로 쓰이느냐 그 말이지요. 이 몸이라는 것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기에 하나님, 하나님, 영광 돌릴수록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의 티를 내는 결과를 낳는 그 안에 구체화된 논리가 어떤 거냐 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초대교회 때 순교를 많이 했는데 오늘날도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순교가 지금도 계속돼요. 순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배신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끊어진 자의 모델을 가룟유다라고 했지요. 가룟유다가 그리스도를 따라다닌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따라다닌 거예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배신한 자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예수 믿고 예수 믿은 성도답게 성령 받아서 성령의 삶을 살겠다고, 열매를 맺겠다고 바르게 사는 그것이 예수님을 배신한 대가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기 때문에 자기거룩을 챙길 수가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자기경건과 자기거룩을 챙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배신한 그 터전위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원래 제가 아까 이야기한, 나는 살아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이왕 사는 것 하나님 보기에 바르게 산다는 소리도 듣고,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자기 삶이 자기의 목적이 되고 만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게 목적이 된 겁니다. 그게 목적이 된 이상은 주님께서,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그 규정에 대해서 더욱 더 격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는 속성들이 나와요.
제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이해가 잘 되고 있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지만.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어린이집에 자기애를 보내놓고 가끔 전화하면 “201동 아이 오늘도 어린이집에 잘 와 있습니다. 여기 있는데 바꿔드릴까요?” 이렇게 선생님이 이야기해요.
그렇게 어린이집에 늘 아무 탈 없이 갔다가 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집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오후 네 시 반인데 “댁의 아들이 지금 안 보이네요.” 이런 소식의 전화를 받았다고 칩시다. 아침 9시에 인솔교사에게 보냈는데 오후 4네 반이 되어서 그제야 전화가 와가지고 댁의 아이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럴 수 없습니다. 주님!” 이 더운 날에 뒷자리에서 종일 있었으니 거의 죽었다고 봐야 되지요. “이럴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럴 때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이럴 수 없습니다, 주님! 내 인생을 이렇게 작살낼 권한은 주님한테 없습니다.” 하고 대들 때 그 때 우리는 그동안 창세기 2장과 3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온 거예요.
왜냐하면 사는 목적이 내 삶이 고상하고 찬란하고, 내 삶이 건강하고, 아무 탈 없이 사는 것 이것이 목적이 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으면 왜 죽는지 그 주님의 원칙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로서 움직이는 것이 주의 뜻인데 우리는 그 주의 뜻을 생각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 내 삶을 챙기는 것, 이게 목적이 되고 마는 거예요.
어쨌든 애는 떠죽었습니다. 그렇게 죽든지, 어린이집 교사의 육중한 몸집에 깔려 죽든지 애가 그렇게 죽었다고 했을 때에 거기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8장 50절에 나와 있어요. 그 해답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8장 50절에서 이야기한 해답은 이겁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믿음이 나오는 겁니다. 끊어졌어요. 내 인생 끝났습니다. 작살났어요. 그런데 주의 해답은 뭐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전에 믿은 것은 뭡니까? 그것은 믿은 것이 아니지요. 회개가 안 된 상태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회개란 내 삶이 목적이 되었다가 내 삶이 목적이 아니고 주께서 본래의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기호로서, 언어로서 사용하는 것, 주의 원칙을 가지고 활용하는 이 관계, 이 관계로 나와 세상을 다시 보는 이것이 회개라는 말이지요.
내 삶이 목적이 되면 내가 나를 놓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걱정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것은 내 것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인을 왜 합니까?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도둑질을 왜 해요? 내 것이 풍족하기 위해서 도적질을 하는 거예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 챙기기 위해서, 내 삶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지었다가 돌아온 것은 뭐냐? 죄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이 돌아오는 거예요. 내 것 때문에 걱정근심이 계속 오는 거예요. 비록 죄는 안 지었어도 내 것이 날라 가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 이게 다 내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내 것이라는 것이 원래 없고 주님께서 원래의 창세기 2장 3장의 원리, 에덴동산의 원리, 선악지식을 아는 자는 죽으리라 하는 그 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냥 주님 것으로 활용했는데 우리는 그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자꾸 내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잘해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고집을 부려서 그 말을 듣지를 않아요. 제가 우연히 tv를 봤거든요. 평소에 잘 안 보는데 우연히 보니까 백종원이라는 셰프가 나와요. 젊은 사람이 차린 그 경양식식당운영 잘하게 도와주려고 초짜 주인한테 일일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음식준비는 이렇게 해야 되고, 손님은 이렇게 해야 되고, 그릇 배치는 이렇게 해야 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자기가 고려대학 나왔다고, 고려대학 나왔다고 버티면서 시키는 대로 안하는 거예요. 보신 분들도 있지요? 그것도 서울 뚝섬에서 가게 내면서. 백종원 셰프가 화가 나서, 나 너하고 말 안한다고.
고집이 있는 거예요 고집이. 내 인생이라든지 그런 인간은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내 삶을 아름답게, 그런 인간이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 인간이라는 것은. 어딜 봐서 인간이에요? 인간 아니에요. 인간 아니라니까요. 끊어진 거예요. 이미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거예요.
그런데 끊어진 것이 필요에 의해서 끊어진 겁니다. 끊어져야 그 다음에 무슨 단계에 들어가느냐 하면, 믿음으로 천당 가는 단계가 성립이 된다니까. 끊어져야. 할례를 행한 것은 네가 끊어진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할례를 행한 거예요. 할례를 행하고 그 할례가 ……, 좀 어렵지만 지난 것을 해 봅시다.
5장 3절을 봅시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할례를 가지고 율법전체로 의미를 확대시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할례가 뭐냐? 할례라는 것은 몸에다가 법을 새기는 거예요. 이 몸에 문신처럼 하나님의 법이 있으면 움직이는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움직이는 율법이 어떤 행동을 해도 내놓는 것은 저주받을 짓, 지옥 갈 짓밖에는 내놓지 않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을 모델로 해서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밖에 없다고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제가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모릅니다. 고집이 세십니까? 몇 번을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이 자기가 자기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 설치는 것, 그게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거예요. 은혜에서 끊어진 거예요.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거예요. “모르게 한 것도 죄냐?” 이렇게 반박을 받았다는 겁니다.
모르게 지었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죄를 지었으니까 죄 아니라고 우기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느냐? 원래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거든요. 그 죄를 모르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몰랐다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는 얼추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과 악을 저울질해서 선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약간은 선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직도 자기 죄를 모르고 있으니까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몸 자체가 뭘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법을 새긴 겁니다.
율법이 있는 자가 그 율법이 있는 것 때문에 자기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버리고 십자가사건을 유발했거든요. 모든 것이 내 것이 있다는 그것 때문에 죄가 계속해서 가만두지 않고 우리를 건드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체가 더욱 가증스럽게도 예수님을 핍박하는 짓을 그동안 계속 해왔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 믿고 십자가 길을 가라 해서 십자가 길을 가는데 십자가 길이 왜 그렇게 무겁습니까, 힘듭니까, 이렇게 힘든 것이 십자가 길입니까, 이렇게 진지하게 물어요.
자기는 복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마다하지 않아요. 믿는데 십자가 길을 가려고 하니까 양보할 것도 너무 많고 희생할 것도 너무 많아서 자기가 감당이 안 되고 감당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제가 보기에……, 뭐냐 하면, 지금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돼요. 제가 예루살렘에 가봤잖아요. 또 자랑질이 나온다. 물론 고난의 길을 올라갈 때는 힘들어요. 그런데 십자가의 길은요, 내려갈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살면 살수록 본인의 가치를 점점 더 포기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목표가 된다면 십자가의 길은 신나지요.
잘나야 돼, 나는 잘나야 돼, 잘나야 돼, 이것이 얼마나 고난의 길입니까? 십자가는 지고, 잘나기도 해야 되고. 예수님이 쉬었다 갔다는 식으로 무려 그 길이 6단계인가 7단계까지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못나기, 더욱더 못나기, 이것은 뭐 거저먹기지요.
막사는데 힘듭니다, 하는 그런 사람 있습니까? 막국수가 왜 막국수입니까? 먹는데 수월해서 막국수 아닙니까? 막 먹고 막 뽑아낸다고. 막 사는데 그게 뭐가 힘들어요. 나는 못난이, 그런 옛날 노래가 있어요. 딕 패밀리가 불렀던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계속해서 나는 못난이로 살아가는 거예요. 십자가의 그 가는 길. 누가누가 못났나.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수월한 길. 아주 수월한 길. 가훈, 못나기. 우리는 못난 가족. 못난이 가족.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려니 힘들지만 십자가지고 내려가는 길은 굉장히 수월해요. 그래서 끊어진 자의 모델은 가룟유다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본 것밖에 몰라요. 본 것 중에 자기 자신을 자기가 보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끊어지지 않는 자의 모델이 어디에 있습니까?” 궁금하지요.
그걸 알려드리겠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람의 모델. 마태복음 15장 25-27절에 보면 끊어지지 않는 사람의 모델이 나옵니다. 좀 어려워요. 오늘 설교가 좀 어려운 구석이 많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 단어가 나와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온전한 빵을 먹는 것은 온전한 빵을 먹을 만한 자식이기 때문에 온전한 빵을 주는 것이고 온전한 떡을 주는 것은 온전한 떡을 먹을 만한 자식이기 때문에 온전한 떡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것은 너는 온전한 떡을 먹을 자격도 못 된다는 의미에서 부스러기를 주는 겁니다.
나는 개들에게 떡을 주지 않는다, 하니까 개도 부스러기는 먹잖아요, 라고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여인이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온전한 떡을 먹을 자격자로 보지 않고 부스러기만으로 족합니다, 하는 위상으로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옛날 코미디에 나왔던 ‘밥풀때기’라 하는 거예요. 부스러기, 또는 밥풀때기.
주류가 되지 못하고 변두리에 겨우 끼는 것.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믿음이 중앙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네 믿음이 핵심부분에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오늘 이야기하는 그 끊어짐을 믿음의 내용의 본질로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끊어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천국의 본터에, 본부석에 앉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왜? 끊어짐을 계속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끊어진 자에게 밥풀때기가 웬 횡재입니까? 웬 떡이에요. 세상에 밥풀때기라도 주게 되면…….
여러분 흥부전을 알지요. 형수가 주걱 가지고 흥부의 귀싸대기를 때리니까 흥부가 밥알 훌쳐 먹으면서 “맛있어라. 얻어맞아서 먹는 밥이 더욱 더 맛있구나.” 우리가 아는 흥부전에 나오잖아요. 이것은 흥부전보다 더 해요.
“개가 어디서 기웃거려. 저리 가 개야!” 하니까 “개도 먹고 남는 것은 먹을 수 있잖아요.” 먹고 남는 것. 완전히 개죽이지요. 쓰레기 죽, 먹다 남은 음식 이것저것 막 섞어서 주는 개죽, 개가 맛있다고 먹잖아요. 요새는 개 그렇게 안 키우지만. 개가 막 핥아 먹는 것. 어릴 때는 개 다 그렇게 키웠잖아요.
“개 밥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개밥 주세요.” 이게 바로 두려워말고 믿으라, 고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행함으로 했더니 다 끊어지고 지옥갈 수밖에 없었는데 주께서 웬 은혜인지, 웬 떡인지, 웬 개밥인지, 이미 끊어진 자에게 후차적으로 제공해주시는 여분의 것, 한도 초과된 은혜, 한도 초과된 은혜입니다.
로마서 5장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리라. 은혜가 한도초과 될 것이다. 그거나 핥아먹고 천당 가라. “주여, 웬 떡입니까? 저에게는 이거라도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믿음을 가지려면 사도바울처럼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자기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개가 되기를, 나는 끊어진 자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으면 이 할례언약의 완성, 세례, 그리고 믿음,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발생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른 성경 대목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언급해야 될 것이 있어요. 마태복음 19장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2장의 이야기입니다.
항상 창세기 2장의 원리가 계속 유지되고 있어요. 사람이 이미 자기 몸을 가진 이상은 자기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는 은혜에서 끊어진 자고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그런 발상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자기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중요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보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친 자식은 죽은 자식 뒤에 온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와 부활이거든요. 친 자식,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은 죽음 뒤에 오는 거예요.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는 내가 천국 가는 운명, 그런 팔자를 원하지만 운명이 나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백날 해도 구원 못 받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운명이 먼저 있고 그 운명에 의해서, 운명에서 파생되어서 새롭게 발생된 몸이라면, 그 운명의 자식이라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믿는 것이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목과 방금 읽었던 대목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예수님을 대상으로 해서, 내가 부족합니다, 들은 것이 있어서, 나는 개입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모든 행세도 결국은 내가 스스로 나를 살리는 수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꼼수는 주께서 안 받아줍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사 모든 대인관계에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노력하잖아요. 이런 것을 우리가 절대로 접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지 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만나야 될 사람이 있어요. 인간사회에서. 그게 누구냐? 자식입니다. 아니 자슥입니다. 이놈의 자식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 몸을 통해서 태어나 버렸어요. 내 몸의 연속이고 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버리고 싶어도 못 버려요. 계속 따라오니까.
밥 달라고 따라오고, 밥 주면 놀아달라고 따라오고. 엄마는 지금 잠이 오는데 잠자면 강제로 눈꺼풀 열어가지고 자기하고 그림책 보자가 떼를 쓰지요. 발로 차게 되면 아동학대로 걸리고. 어쩔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로 말미암아 발생된 태생이거든요.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존의 몸에서 몸으로 나와야 기존의 몸이 갖고 있는 그 미래와 영원함과 팔자와 운명에 자동적으로 딸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원리를 성도의 발생을 통해서 설명해 주는 겁니다.
네 힘으로 아무리 믿습니다, 해도 다 거짓말이에요. 믿습니다, 하는 그것도 내가 믿으면 구원받겠지, 하는 하나의 법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몸이 먼저 있고, 그것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몸이 먼저 있고 그 몸에서 파생된 몸에 의해서만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여자라고 이야기해요. 마태복음 19장 6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고 되어 있어요. “네 눈에는 둘로 보이냐? 원래 한 몸이다.” 한 몸이기 때문에 남자가 가꾸어놓은 모든 것에 여자는 자동적으로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장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라고 했는데 의롭다 하는 것은 뭘 해서 얻는 것이 아니에요. 남편이 의롭게 되면 아내는 남편 소속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누가 뭐래도 그것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그게 나와 있어요.
남자 하나 잘 만난 거예요.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이태리 남자 잘 만나서 아침마다 여자가 늦잠자고 있으면 남자가 다 호텔음식을 해줘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또 다른 남자가 프랑스 사람인데 이 사람은 집이 오십 채고 헬기타고 다녀요.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여자가 이렇게 호강을 해요.
그러면서도 큰소리 칠 것은 다 쳐요. 모든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다 바꿔놓고. 여자라는 게 원래 그거 하라는 팔자가 여자에요. 하나님께서 여자를 준 것은. 남자 홀랑 다 빼먹으라고 붙여준 배우자가 여자에요. 남자들 오해하지 마세요. 돈 버는 것은 남자가 벌고 홀라당 자기 이름으로 바꾸는 것은 여자가 해야 될 책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남녀를 부부로 만들었는가? 왜 성을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로 통일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처음부터 만들 때 성이 다르게 만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원리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그것에 공짜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기백성 만들기, 창세전의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그 계획이기 때문에 그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 남자 여자를 붙여놓고 “둘로 보이냐? 한 몸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은, 네가 스스로 의인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 말고 너에게 남편이 있나? 있습니다. 그 남편이 의인이 될 것 같으면 너는 아내의 자격으로 어떤 짓을 해도 의인이 된다.” 이게 사도바울이 말하는 복음인 겁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줬습니까? 율법은 주님과의 몸이 섞이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몸을 가지고 법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 악마적인, 선악을 알고도 생명을 얻겠다는 이 기본적인 악마적인 본성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 설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그런 사람의 설침에 의해서 누가 피해를 보고 핍박을 받느냐 하면 진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갈 우리의 남편이 고난 받고 죽은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은 몸이 있어줘야 그 다음에 진짜 몸이 나타난다고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했고 부활의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몸은 율법자체로서 저주받아서 완전히 찢어질 몸이고, 완전히 엉망진창이 될 몸인데 그 몸을 예수님 자신의 영인 남편의 영을 보내서 이제부터는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선언을 해서 우리를 무상으로 자기에게 초청하신 거예요.
그러면 한 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짝 지운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해요. 심지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리스도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은혜에요. 은혜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남편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주어지게 되면 비로소 회개의 심정으로 자기자신을 보게 됩니다. “주여, 그동안 내가 죄지은 이유가 내 몸 따로 내가 내 몸을 살리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였군요.” 예수 믿고 말씀 지켜서 거룩하게 되고 경건하게 되어가지고 나중에 하늘나라 보너스 받겠다는 이 모든 것이 지옥 갈 짓이었다는 사실, 이게 마귀 짓이었다는 겁니다.
왜? 내 것이 있으니까. 내 인생이 따로 있으니까. 사도바울은 여기서 아주 단호하게 분개합니다.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자야.”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생각해보지 않는 인간들아. 그게 바로 지옥이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끊어진 자의 모델은 가룟유다입니다.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에요. 부러운 것이 많지요. 보는 것이 전부에요. 이 몸 여기 저 몸 저기 있구나. 그게 끝이에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아요. 은혜도 보이지 않아요.
그게 이미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끊어진 상태를 선악의 원리를 보여주는 기호로 사용하시고 그 다음에 찾아와 주시는 겁니다. 찾아와 주셔서, 네가 나를 핍박했다고 언급함으로서 “저 핍박했어요.”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핍박하는 자라고 자기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안목을 공통적으로 가졌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기쁨으로 자인하는 거예요.
그걸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핍박자를 밥풀때기로, 그야말로 은혜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이만큼 와도 구원받고 요만큼 와도 구원받아요. 주에게서 떨어진 그 십자가의 피를 마시게 해서 영생으로 움직이는 기호가 되게 하는 겁니다.
이제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이 이만큼 은혜롭다는 것, 주께서는 용서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이제 움직이면서 주님을 증거 하는 기호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 그게 이 땅에 남아 있는 예수님의 신부, 우리의 역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우리가 죄인 되었음을 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야말로 겁내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일어난 사태, 사건인 것을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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