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강-YouTube강의(후벼 파기)20180807-이 근호 목사
제 245강, 제목은 ‘없어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후벼 파기)’입니다. 서해안에 모래사장에서 피서객들이 조개 같은 것들을 잡죠. 조개가 기어 다니다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면 쏙 들어가 버립니다. 안보이게. 못 잡도록. 당연한 거죠. 그럴 때 어린애나 어른들이 보고 조개가 방금 저기에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어요. 대부분이 그걸 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손가락가지고 후벼 파겠죠.
없어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을 약간의 촌스럽게 제목을 정한다면, ‘후벼 파기’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벼 파는 거예요. 전에 요한계시록을 강해할 때 그걸 ‘우물파기’로 강해를 했는데, 사람은 본성상 자기를 숨기는 본성이 있어요. 이게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렸습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죠? 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알아야 자기 자신을 아느냐 하면은, “내가 왜 수치스러워 해야 되지?” 이 이유를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의 마지막 최종지점입니다. “왜 나는 남한테 망신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왜 나는 남들한테 멋있게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전부다 같은 말이에요.
사람하고 동물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동물들은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물론 수컷이 암컷을 꼬실 때는 그렇게 한다고 동물학자들이 말하는데, 그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고요. 참새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생식의 본능 때문에 그렇다고 치고요. 평소에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죠.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거짓말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요. 거짓말 할 수 있는 아이큐가 되려면 인간정도의 아이큐가 도달이 되어야 되지, 원숭이 정도 돼가지고는 거짓말을 못해요. 교묘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자, 거짓말을 왜 하느냐 하면은, 진짜 자기의 뜻과 그리고 그 뜻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다른 제스처를 취할 때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니 빵 먹었어? 안 먹었어?”라고 자식한테 이야기를 하면, “엄마, 저 빵 안 먹었어요.”라고 이렇게 하죠.
뭘 생각하는 거예요? 빵 먹은 내 모습이 자랑스럽겠어요? 수치스럽겠어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했을 때, 수치스럽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의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결국 인간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같이 있다고 봐야 돼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따먹지 말라는 그 명령이 인간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밑에 숨은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숨길 것은 숨기고 숨긴 것은 들키지 않는 용도로, 다른 식으로 보여주는 행동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특히 어떤 말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데서 나타나는 것은 전부다 감춘 것을 더 깊숙이, 깊숙이, 안 들키게 꼭꼭 숨기고, 누가 찾아도 찾지 못하도록 계속 숨기는 용도로 행동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서해안의 조개 숨듯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질 때는, 이렇게 좋게 테이블에 앉아서, 하나님이 옆에 계시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성도 여기에 있고 해서, 좋은 게 좋다고 하는 이런 식으로 하겠어요? 아니면 예수님 말 하는 것을 성도가 제대로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죠. 왜냐하면 성도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짓거리가 자꾸 자기를 감추는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으로 누굴 내세우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6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을 보게 되면, 물론 거지나사로도 그 대목에서 유명하지만, 유명한 대목이죠. 장례식장에서 보면 이런 본문이 나오잖아요. 그 앞에 대목이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하면서 9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런 대목이 나와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한 재물이니까, 이건 횡령한 것, 나쁜 짓 한 거잖아요. 나쁜 짓을 앞장세우고 살라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본성상 나쁜 짓을 앞장세울까요? 안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출까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겠죠.
인간은 자기가 잘난 존재이고 싶어 해요. 당당하고 싶다 이 말이죠. 누구 앞에서도 자기가 욕 얻어먹지 않는 정당함을 계속 쌓고 싶어요. 그리고 부모들이 자식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 가르쳐요. “니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나만 욕 얻어먹는다. 그러니까 니는 이 정도 실력을 쌓고 공부 열심히 해가지고 남들이 너를 볼 때에, 아, 저 사람은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이 부모가 너를 양육한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니냐?”라는 그런 쪽으로 계속 압박을 가하거든요.
여러분들 친척 가운데서 영웅적인 사람이 있으면 그걸 자랑해요? 자랑 안 해요? 자랑 안 하죠.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지 더러운 것을 주제로 합니까? 자랑스러운 것을 이야기합니까? 자랑스러운 것을 이야기 하죠. 자랑스러운 것이 밑천 떨어졌으면, 지 아는 사람, 자식이야기, 남편이야기가 거덜 났으면 친구이야기, 교회이야기, 교회 장로이야기부터 해가지고 하여튼 그 이야기를 줄줄이 끄집어내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것보다 낫다는 것, 상대적으로 우열하다는 것, 누굴 씹어 먹을수록 내가 높아진다는 것,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모자라요. 밤새도록. 새벽 두시까지 이야기를 해도 그 점에 있어서 지치지를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후벼 팝니다. 계속 후벼 파요. “니 못난 것을 내놓고 같이 못난 사람끼리 만나라.” 이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 거지나사로 이야기가 나와요. 자, 거지 있다, 부자 있다고 한다면 누가 나의 가까운 친척이고 싶어 합니까? 누가 나의 절친이고 싶어 해요? 거지하고 엮이면 평생 고생합니다.
그런데 부자하고 엮이면 평생 이거는 내 인생의 담보물이에요. 조금만 어려우면 찾아가서 돈 얻어 챙길 수가 있어요. 우리보고 선택하라고 하는 거예요. 선택하라고 해놓고 주님 쪽으로 감추어요. 우리만 감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감춥니다. 뭐냐 하면 부자 뒤에는 지옥으로 감추고, 거지나사로 뒤에는 천국으로 감추고. 낙원으로 감추고.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니까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를 친구로 삼겠어요? 어느 바보가 삼겠어요? 나중에는 내 돈까지 다 훔쳐갈 인간인데. 그러면 거지를 친구로 하겠습니까? 그냥 거지가 아니에요. 안 아프면 희망이라도 있지, 이건 아파서 개들이 핥을 정도 같으면 이거는 노동력도 박탈당할 사람이에요. 희망은 일체 없어요. 우리는 부자를 그리워하고, 우리는 부자가 찾아오기를 원하고, 부자가 찾아올 때 우리는 인생 횡재했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뭘 감추고 있어요? 부자가 문제가 아니고 불의한 청지기가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참, 코 후비듯이 우리를 후벼야죠. 우리를 후비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도망치죠. 왜 도망치느냐? 앞면 보여주고 뒷면도 보여주기 때문에 도망치고 그런 거예요.
이제 주께서 불러줄 때는 앞면 내세우지 말고, 평소에 남들에게 내세우지 말고, 우리 무능한 뒷면을, 우리 무가치한 뒷면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로 살아왔지, 그래서 이 날까지 자식 놓고 결혼해서 사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지, 내가 아등바등 요령 부려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을, 그 정도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서 저 동남아로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늘 주께서 후벼 파는 그 손길에 같이 딸려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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