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말씀의 권위.극장과 교회 1809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6. 09:17
2018-09-05 00:00:31조회 : 32         
유튜브 강의 (248강, 249강) 말씀의 권위, 극장과 교회 18090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48강          음성      동영상


24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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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09-06 00:24 
248강-YouTube강의(말씀의 권위)20180905-이 근호 목사 

  

제 248강, 제목은 ‘말씀의 권위’입니다.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없어요. 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다, 라고 하는 말이 과연 그것이 옳은 말인지, 그게 바른 이해인지, 그것은 보류해야 돼요. 누가 올 때까지 보류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보류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한테 최고의 대우와 최고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아요. 아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심으로 받지는 않잖아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권위라고 하는 것은 높인다고 해서 권위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권위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아져요. 만일 우리가 상대방에게 아주 잘해주게 되면, 그렇게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나 자신도 덩달아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저렇게 높여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견하게 여기는 그런 결과를 또 낳게 되죠. 

  

마태복음 5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어요. 27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너희가 들었으나, 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리고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먼저 뭐부터 하시느냐 하면, 너희가 들었던 것부터 먼저 거론합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그치?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야기하니까 잘 들으라고 하면,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죽 잘 듣겠다고 각오를 하겠습니까? “예. 말씀만 하옵소서. 권위 있는 주의 말씀을 우리가 안 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대개 들을 준비를 하는데, 주님의 방식은 그 방식이 아니에요. “니는 이 정도로 지금 생각하고 있지? 그거 아니거든.”이라는 요소를 먼저 설정해버립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들은 것을 내가 아는데, 니가 아는 그것은 엉터리거든. 그거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아.”라고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주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또는 순종하려고 하는 그 마음 자세, 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주님께 성의를 다하여 영광 돌리겠습니다.”라는, 이 순수한 마음자체도 결코 주께서는 순수하게 안 본다는 것을 그들은 느껴야 되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에게는 순수한 게 없어요.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본다는 자체가 아무 근거가 없는 겁니다. 달리 생각해야 돼요. 

  

특히 목사 같은 경우에, “이 몸 바쳐서 주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고 생각할 때, 그걸 백퍼센트 순수하다고 본인은 생각하죠. 그것조차 음흉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할 리가 없습니다. 전혀 노림수가 없고 어린애 같은 그러한 순진한 마음으로 이 몸 바치겠다고 하는 여기에 무슨 하자가 있겠느냐고 감히 생각을 못하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권위를 빙자한 자기 사명의 권위가 생겨버립니다. 오늘 제목이 말씀의 권위인데, 말씀의 권위가 되려면 반드시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권위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엉터리 권위라는 것을 염두 해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권위는 나 자신을 박살내는 권위만이 진정한 권위에요. 자기의 괜찮음과 자기의 장점을 살리지 않습니다. 

  

또 마태복음 5장 31절에 보면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을 주님 쪽에서 먼저 제시해버려요. “너희들은 이정도 알고 있지? 그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 3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시작하는 그 말씀은 우리를 안 건드리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건드려놓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너희는 이렇게 알고 있지? 하지만 나는 너희들과 달리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게 권위입니다. 

  

내 생각과 주의 생각은 같다가 아니라 다르고, 그 다름에 의해서 나는 옳지 않고 주님은 옳다는 두 개의 요소가 같이 한 자리에 있을 때 발생되는 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나를 조지든지, 주님께서 나의 인생을 찢어버리든지, 나를 그만 살게 하든지, 나를 처참하게 망가트려도,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행사하시는 권위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줄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고 그냥 내 쪽에서 하나님께 잘해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요소가 그 속에 스며들어있는가 하면은, 잘해준 만큼 나에게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 내 것 안 다치겠지, 라는 그러한 노림수가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실패였다고 한다면 그거 괜찮은 권위에요. 그거 일이 잘 된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권위는 나의 실패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주님도 잘 되고 나도 잘 되는 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그런 식이 돼버려요. 얼마나 우리가 안일하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성경 마태복음 5장을 우리가 수십 번 봤을 것 아니에요? 백날 보면 뭐합니까? 그런 요소를 빠트리면 안 되겠죠. 

  

33절에 봅시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옛사람이 나와요. 옛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34절에 또 나오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님의 권위를 우리가 갈라먹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주님의 권위를 우리가 빼먹을 생각 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은 우리를 묵사발 만드는 권위에요. 그게 주님의 권위입니다. 주님의 권위에 같이 숟가락 얹을 생각하지 말고 끼어들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주님의 일에 일체 우리의 일을 안 받습니다. 주님의 일은 철저하게 우리를 배제하고 실시됩니다. 왜?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 현실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기 때문에. 아는바가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은 아시잖아요. 그게 자유고 그게 믿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주께서 안 줘도 괜찮아요. 그야말로 내가 지옥가도 괜찮아요. 그게 믿음이잖아요. 내가 영원한 유황불에 가도 그게 주의 뜻이라면, 그게 주의 뜻에 합당하다면, 주여 그렇게 실시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권위를 인정한 나라가 그게 천국입니다. 면류관도 반납할 판에 어디 자기 꿍꿍이속을 챙기겠습니까? 

  

34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이렇게 쭉 나옵니다. 또 나와요. 38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거는 들은 정도가 아니죠. 이거는 다른 데 말씀에 나와 있는 거죠. 이거는 출애굽기, 신명기에 반복해서 나와 있잖아요.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또 너희에게 새롭게 이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문자 그대로 받았느냐?” “예. 우리는 문자 그대로만 지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잘못됐다는 거예요. 

  

아니,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도 잘못됐다면, 그러면 애초부터 우리는 안 잘못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죠. 뭘 해도 잘못됐죠. 그걸 어떻게 아느냐,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 앞에서, 주님의 권위 있는 지시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알아차리는 겁니다. 내가 뭘 해도 가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우리는 무가치한 거예요. 우리의 행함에서 우리를 놔주세요. 자기를 놔주는 것, 이걸 두 글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나에 대해서 너무 기대하지 마시고,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목표로 삼지 마세요. 그냥 내가 나를 놔주세요. 이게 주님의 권위에 대한 진정한 복종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09-06 00:26 
249강-YouTube강의(극장과 교회)20180905-이 근호 목사 

  

제 249강, 제목은 ‘극장과 교회’입니다. 극장과 교회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관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 이게 관련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가 이미 극장화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극장은 공연하는 곳이에요. 무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무대가 마련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그걸 관람하죠. 구경꾼이 되는 겁니다. 극장의 특징은 전문가들이 거기서 공연을 하고 아마추어들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그들의 공연을 즐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마추어기 때문에 프로가 하는 것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해주고, 프로가 하는 그 공연에 대해서 신뢰하면서 자기가 미처 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해주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치죠. 

  

예를 들어서 자기는 노래를 잘하고 싶은데 노래를 못하잖아요. 근데 거기에 소향이나 누가 와서 3단 고음을 하게 되면 아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치죠. 박수를 친다는 말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대신해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뜻으로 치는 거예요. 그리고 가정으로 인해 마음이 답답했는데 뮤지컬을 보고 속이 확 풀렸을 때에, 내가 스스로 내가 풀 수 없는 것을 거기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다 풀어주니까, 돈 5만원, 10만원을 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해주죠. 

  

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최고의 음악, 최상급의 질을 제공하고자 그런 클래식 음악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걸 수십 년 동안 전공한 사람이 제공해주게 되면 그 음악에 흠뻑 빠집니다. 최고의 양질의 예술에서는, 그래서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하잖아요. 조수미에 대해서. 이거는 마치 신이, 천사가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 수많은 돈을 아끼지 않죠. 

  

그렇다면 사람 속에 들어온 그런 예술적인 욕망, 또 그런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종교적인 욕망이 있잖아요. 그러면 종교적인 욕망을 신에게 내가 해서 영광을 돌리고 싶은데, 어떤 전문가들이 대리해줘서 공연하게 되면 카타르시스가 또 확 풀립니다. 그럼 교회예배라고 하는 것은 전담자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전담자가. 

  

그걸 강단이라는 이름의 무대에서 공연을 해요. 큰 교회에서는 공연이 4부 공연, 작은 교회에서는 1부내지 2부 공연이 있죠. 공연하게 되면 약간의 헌금을 내고, 입장료죠. 그리고 박수대신 아멘으로 화답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공연의 효과는 뭐냐 하면 한주 동안 욕심을 부리고, 세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나 잘되기 위한, 자기가 보기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을 많이 했을 거잖아요. 내 한 몸,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잘못들을 했습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그 죄책감이 계속해서 누적이 되는 거예요. 누적이 되게 되면 언젠가는 그 죄에 대해서 처벌이 주어진다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따라서 신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뭔가 니 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좀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위로를 누가 하느냐, 위로 전담 전문가들이 해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찬양을 원한다. 이 찬양을 전문가들이 내 대신 해주면 좋겠어요. 

  

기도할 때, 나는 말도 더듬고 어설프고 잘 못하는데, 기도 잘 하는 분이 대신 기도해주는 공연을 해주게 되면 대리만족을 해서 뒤에 같이 뭘 붙이는가 하면, 그 기도에 나도 동조한다고 아멘을 붙이면 되죠. 그리고 자기 신앙의 죄책에 대한 고백을 누가 대신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이렇게 섬기고, 이렇게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고, 비록 세상에 나가서 돈 번다고 바쁘지만, 마음은 늘 주님과 가까이 있다는 말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근거해서 누가 내 대신 고백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설교가 되겠죠.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내가 내 사업체가 있고 내 일이 있어서 좀 소홀히 했는데, 교회에 대해서 늘 생각 안 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생각하면서 어떻게 교회에 기여할까? 보태줄까? 라고 생각할 때, 그걸 교회에서 광고시간에 이야기합니다. “우리교회는 선교를 다섯 명 했는데, 지금 선교지에서 병원을 하나 세운답니다. 학교를 세우는데 자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기의 능력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명목을 달아가지고 보태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가 연관 지어서 해보니까, 그것은 뭐냐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내가 일원으로 등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마음속으로 돈 번다고 지었던 모든 죄가, 이런 착한 일로 만회하잖아요. 교회 가서 예배에 참여하는 착한 일. 그리고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습니다.” 이러거든요. 

  

마음속으로 화답하게 되면, 그냥 화답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참여하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받는다고, 예배라고 하지 말고 공연이라고 합시다. 그 공연시간에 그렇게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멘으로, 참 아멘이 필요해요. 아멘으로 화답을 한 거예요. 동참을 한 겁니다. 그러면 뭐가 돼버려요? 내 속에 있는 그것이 그걸로 전부 다 해소가 되죠. 하나의 도장을 찍은 것이 돼요. “하나님 오늘도 예배에 참석해서 내 지은 죄를 다 목사님의 축도와 더불어서...,” 다 해소가 된 거죠. 

  

축도의 내용이 뭘까요? 그냥 주시는 거잖아요. “사랑과 평강과 그 은혜가 있을 지어다!” 있을 지어다! 에요. 하나님이 목사를 매개체로 해서 우리한테 준다는 겁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꿀꿀한 마음도 없어지고, 거기다가 공연이 끝났을 때에 듬뿍 복을 받고 가니, 축도니까, 복이라는 복, 복이라는 것을 받고 가니 그 공연을 매주 한 번씩 참석한다는 것, 돈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또 점심 먹고 가라고 해서 점심까지 챙기면, 그게 또 음식을 통한 교제가 되고, 초대교회처럼 성만찬이 되니까. 이거 뭐 마다할 리가 없죠. 안 바쁜 이상 교회 참석해서 마음속의 정화, 카타르시스가 정화가 되니까요.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그 연극무대에 동참을 해서 정화가 되니까 그거 뭐 참석할만하다가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니까. 

  

그래서 극장과 교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핍박이 없고 우호적이라는 겁니다. 고객만족입니다. 고객위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또 원하고 있고. 모든 것이 긍정적 마인드를 제공하고. 미래의 그 희망을 만들어서 제공해주고. 어느 것 하나 손해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자, 그러면 뭐가 문제냐, 걸림돌이 없죠.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배 참석한 이것이 죄라고 교회에서는 지적질을 안 하죠. 여러분들이 한 헌금과 봉사가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 여러분들이 하는 그것이 여러분이 구원받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그러한 이야기는 그 교회라는 이름의 연극단체에서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냥 지옥에서 마귀가 벌이는 한편의 공연입니다. 이벤트에 참석한 거예요. 

  

진정한 예배는 성령이 와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까발릴 때,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고, 바로 그 관계가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