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강-YouTube강의(사는 것과 살리는 것)20180717-이 근호 목사
제 243강, 제목은 ‘사는 것과 살리는 것’입니다. 사는 것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근데 우리는 사는 것조차도 생각 안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라는 것을 언제 생각하느냐 하면 죽음의 순간, 위기의 순간, 이러다가 죽겠네, 하는 그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내가 죽지는 않았어. 아직 살아있어.”라고 할 그때에 사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사느냐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라는 그런 햄릿이 했던 고백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정신을 그런데 팔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거니까. 근데 그냥 살 때에, 아까 말한 것처럼 그냥 사는 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느낄 경우에는 죽음이 왔을 때, 여기서 중요합니다. 누가 죽었을 때에 사는 것을 느낍니까? 누가 죽었을 때에. 바로 내가 죽음의 위협을 느낄 때에 산다는 것을 인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죽음의 위기에 부딪혔을 때에,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그리고 인간이 죽는 것을 죽는 것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참된 죽음과 참된 사는 것의, 그 핵심의 의미를 종결시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을 영생이라, 그걸 사는 것이라고 하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그걸 죽음이라고 하고,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영생, 사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짓지 않는 어떤 사람도, 죽어도 죽음을 모르고 살아도 사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 것도 모르고 사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사이에서 지낸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인생을 보내면서도 내 인생이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세월만 보내고 시간만 보내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순간순간 어떤 위기 같은 것을 느껴가지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안 돼! 내가 여기서 좌절하면 안 돼! 힘차게 일어나서 다시 살아야지.” 자기 사는 것, 자기 죽는 것, 거기에 얽매여서 자기가 밥 먹고 살면 더 사는 것이고, 위기가 되면 죽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일종의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반칙입니다. 퇴장감이죠. 축구에서 퇴장감입니다. 축구할 때, 축구 선수가 운동장에 스물 두 명이죠. 운동장에 뛰는 선수가 스물 두 명인데, 만약에 그런 선수가 없겠지만 그 중에서 단 한 명이 자기편이 공을 줘도, 또는 상대방이 공을 줘도 공에 관심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잔디밭에 눕기만 하고 자기만 한다면, 심판이 그러려면 나가라고 하죠. “그러려면 나가라! 그러려면!”
이번 월드컵 축구 경기장에 프랑스하고 크로아티아하고 축구를 하는데, 난데없이 선수 아닌 세 명의 사람이 뛰어 들어왔죠. 뛰어 드니까 심판이 뭘 중지합니까? 축구 자체를 중지하는 거예요. 세 명이 들어왔을 때는 축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세 명을 내보내겠다는 말은 축구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이 축구장에서 나가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들을 선수로 뛰게 하실 때에,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전부 다 반칙하는 사람, 사는 의미, 죽는 의미를 모르고 뛰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들을 이 세상이라는 운동장에 뛰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전부 다 퇴장감이라는, 나가라 이 말이죠. 하나님이 원하는 게임에 적합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 나가버리면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나가야 마땅한데, 사는 의미, 죽는 의미도 모르니까 나가야 마땅한데, 지옥가야 마땅한데, 그러면 그 중에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을 입은 사람이에요. 그 혜택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려주는 주는 분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는 분으로 인하여 매일같이 살림을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래 되어 있어요.
첫 번째 아담은 육의 몸으로 오고, 흙으로 만들었거든요.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만들기를 왜 만들었는가? 주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 가치도 없고, 산다는 것 자체가 반칙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깔아놓은 겁니다. 아담을 통해서 새끼 깔아놓듯 쭉 깔아놓은 거예요. 그들은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주님의 일의 마무리가 아니에요. 끝이 아니에요. 첫 사람 아담 말고 두 번째 아담이 오게 되면, 첫 번째 아담은 육의 몸에 속했지만, 두 번째 그 분은 신령한 분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46절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신령한 자가 아닌 자가 신령한 나라에 합류하려면, 두 번째 오시는 분, 그 분이 살려주는 영으로 오셔서, 살려주는 영과 결합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있는 아담은 그 아담의 속성과 본질에서 본인이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몸 자체가 내가 미리 생각해서 조립한 3D프린터 기계로 만든 게 내 몸이 아니거든요. 이게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은, 만들어진 몸의 속성대로 내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시작은 내가 아니고 아담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담의 몸에 종속되어 있는 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아담한테 물려받은 아담의 연속, 연장이에요. 그래서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몸 안 아프고 싶죠? 그렇죠? 누구 맘대로요? 누구 맘대로 안 아프고 싶어요? 나는 안 아프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건강한 채로 뭐든지 하고 싶고. 내 맘대로 안 돼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반칙, 아담의 몸이니까 죽으면 되는데, 내 자아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가지고 반칙을 하는 거예요.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을 고집한다 말이죠. 몸은 그 몸이 아닌데. 자, 그러면 그 반칙을 그만둡시다. 어떻게? 살려주시는 분이 와요. 성령이 오잖아요. 주님의 영이 온다고요.
영이 오게 되면, 옛날에 첫 번째 아담한테 내 맘대로 안 되듯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온 그 순간부터 내 맘대로 안 돼요. 내 뜻대로 안 돼요. 이 첫 번째 아담 뜻대로 안 되고 두 번째 아담 뜻대로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미리 알면 되지 않느냐, 미리 몰라요. 성경을 보고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의 뜻은 내가 이렇게 건전하다는 것으로 주의 뜻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오기 전에는 내가 건전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말씀이 오고 난 뒤부터는 내가 문제투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문제투성이로 드러난 채로 그 다음부터는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가더라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계속 폭로시키면서 계속 살려주시는 거예요. 살려주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딴 방식 없습니다. “니 문제 있어. 이래도 문제 아니야?” 그걸 일깨워 주는 것. 그게 주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뭐든지 고집부립니다. 하지만 그 고집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는 식으로 우리를 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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