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강-YouTube강의(육의 한계)20180619-이 근호 목사
238강, 제목은 ‘육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육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육의 한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의 목표하는 것도 육이 원하는 것, 인간의 육신이 원하는 것, 그것이 자기 인생의 성공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죠.
인간은 거울을 보면 비치는 것이 있죠. 자신의 신체가 비치는 겁니다. 저 신체를 가지고 뭐 할 것이냐, 그것까지만 생각을 해요. 저 신체가지고 뭐 할 거냐? 따라서 신체라는 것은 육을 벗어날 때, 육을 벗어난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한계라는 것을 쓸 수 있지, 육 자체를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결과와 업적을 남길 것이냐 하는 것에는 그 한계라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를 탔을 때, 차안에서 보는 바깥풍경하고 차를 세워놓고 차 바깥에 나가서 바깥풍경을 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차안에 있으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게 한계입니다. 차라는 그 자체가 한계죠. 우리의 신체를 차로 봅시다. 자동차 구조로 봅시다. 우리는 항상 차안에 있으면서 바깥풍경을 보는 겁니다. 한 번도 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잖아요. 그 기쁜 소식은 어떤 때 기쁜 소식이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계실 때에, 마태마가누가요한의 그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뭐, 죄사함도 되고 천국이야기도 되고, 그렇게 돼요.
근데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중간 중간에 육의 한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덩달아 베드로까지 그 혜택을 입는데,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일었을 때에 제자들은 폭풍가운데 무서워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어떤 시커먼 물체 같은 것이 성큼성큼 물위로 걸어오면서 제자들이 탄 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베드로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본 겁니다. 유령이라고 이야기할 때, 유령의 특징은 인간의 육체가 없는 것이 유령이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겁니다. 유령이라고 해놓고, 일단은 다가오는 대상은 유령이에요. 근데 가만히 가까이서 보니까 많이 낯익은 얼굴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냐, 유령이냐,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어거든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위를 걷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가 예수님한테 끌려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베드로 자기가 지금 신체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물위를 잘 걷다가 자기 자신을 돌아봤어요. 그러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겁니다. 이거는 평소의 생각이 뭐냐 하면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절대로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육체의 한계를 자기가 생각할 수 있고, 자기가 상상할 수 있고, 자기가 구성할 수 있는 그 세계의 전부로 본 겁니다.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뭐, 세상이라는 것은 이 정도까지만 세상이라고 정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는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물에 빠졌습니다. 자, 베드로가 끝까지 차분하게 침착하게 걸어서 예수님에게 갔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죠. 그러면 거기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복이라는 것, 인간이 신체로서 할 수 있는 그 한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걸 능가한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의 한계를 능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뭘 달라고 할 때는 인간의 육의 한계 내에서 자기가 설정한 그런 것을 가지고 달라고 하는 그것은 터무니없는, 예수님에 대한 곡해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죠.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있던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5장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육의 한계 안에, 아까 비유 같으면 차안에 들어있는 것, 차안에서 세상을 보고, 지옥을 생각하고, 신학을 생각하고, 천국을 생각하는 이 인간을 어디서 어디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차안에 갇힌 인간을 차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무도, 차안에 있으면서 자기의 신체를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예수님 빼놓고는. 예수님께서는 차안에 계시다가 차 바깥으로 나가신 거예요. 나가시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육체의 한계에 있는 우리를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바깥으로 내놓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래요.
스데반집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돌을 던진다. 그럼 유대인들이 스데반집사에게 돌을 던지는 이유는, 그 돌의 물리성이 스데반집사의 피부에 와 닿아서, 피부가 손상되어서 스데반집사가 핏줄이 찢어지고 깨어짐으로써 스데반집사를 이 땅에서 제거시키는 목적이죠. 흔히 쉬운 말로 죽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뭐냐 하면 그걸 주의 일로 본 거예요. 나로 하여금 이 육체라는 한계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이, 주님이 쓰시는 방식은 바로 저쪽에서 나의 육신의 한계를 벗어보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우리의 신체를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돌 던진 사람이 상당히 고맙죠. 내 힘으로 내 육체를 벗어볼 수 없는데,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짱돌 들고 스데반집사의 머리나 뼈 조직이나 힘줄조직을 때려주니까. 스데반집사님은 뭐 힘 안들이고 그냥 맞기만 하면 되니까. 약간은 따끔하겠습니다만. 자력으로 안 해도, 자력구원이 아니죠. 타인에 의해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과 제대로 만나는 거예요. 이제는. 전에는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만나다가 제대로 만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죠. 근데 세상 육체의 한계에 있는 사람은, 차안에 있는 사람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쁜 소식이 아니고 슬픈 소식으로 보는 거예요. 짜증난 소식으로 보고 어떤 위기, 괴로움, 좌절, 인생실패,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울 때는 자기 자력으로 육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걸 두 글자로 자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살은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살을 지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뭐든지 밖에 나올 때는 밖에 나오는 방식으로 끄집어내야지, 주님께서 밖에 나오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이 육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성령이 와서 우리를 끄집어내주기까지는, 우리가 빨리 주님을 만나고 싶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너무 성급하게 하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굶지 마시고, 조금 기다리시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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