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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흔적(갈5;2-3) 1807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17. 20:27
2018-07-15 12:48:05조회 : 748         
   할례와 흔적180715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할례와 흔적(갈라디아서 5:2-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BqzqsXg1I9E, Hit:11
 이근호18-07-15 13:37 
할례와 흔적  

2018년 7월 15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2-3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사도의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은 얼른 호응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는 단일한 요소가 다 담당할 수 있는지가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모두 현상을  품고 설명한다?” 터무니없이 보입니다. 벌어지는 일에는 지정된 원인이 지정된 결과만 가져온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자기 집 뒤뜰에서 망치질 한다고 해서 알라스카가 졸지에 열매우림으로 변한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각자 다른 원인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건으로 세상 전부를 유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는 바로 자신의 자리가 이제는 ‘자유’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자리’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완결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완결된 자리’에서 다시 ‘할례’를 거론하는 것은 ‘할례’라는 법의 세상의 변화를 집중시키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할례의 법’에 모든 법으로 그 의미를 확대시킵니다. 

법의 확대는 결국 모든 세상의 저주성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할례 언약은 추상적인 법을 지켜서 추상적인 ‘의로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몸에 법을 심어버리므로 서 ‘몸+법=언약(진리)’이 되게 하는 조치입니다. 문제는 이 할례가 ‘법’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근본적으로 법을 요청하지를 않습니다. 자율권이라는 것을 발휘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하겠다는데 아무도 간섭하지 마세요”라는 식입니다. 

아무리 고분고분 주변 사람에게 순종을 하더라도 근원적인 것은 자기 결정만을 최종 존중합니다. 이렇게 되면 법을 지켰다 아니지켰다를 본인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할례법은 이러한 추상인 결말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아예 몸 자체가 법의 실천처럼 보입니다. 몸에 할례를 행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이미 법의 요구에 최종 부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랑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할례을 몸에 새겼다고 해서 할례 언약의 취지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따라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이지 않습니다. 할례 언약은 그 자체가 표시가 되기에 개인적인 인품이나 성격이나 자질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할례 언약 표시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동등하고 평등합니다. ‘할례’를 했으면 그것으로 ‘언약 완수자 집단’에 소속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원리가 이스라엘 역사 위에 그대로 펼쳐졌기에 개인적인 인품이나 자질이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멸망했고 파괴되었고 저주되었고 심판받았습니다. 

법은, 그 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구체적 증거를 이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율법은 전 세계로 확대시킵니다. 이를 위해서 ‘할례법⇒전체법’이 되게 합니다. 즉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버리는 작업에 하나님이 돌입하신 겁니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유지해야 합니다. 1. 할례를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다. 2. 법의 결과는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모두 저주의 대상이다는 점을 폭로시킨다. 이러한 할례법의 내용은 결정적인 이 세상의 사건으로 인하여 다 공개됩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 죽음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땅에 출생한 존재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치하는 법 안에 ‘할례법’이 같이 들어 있기에 '나만의 평안‘을 일체 허용되지 않는 겁니다. 즉 나만이 즐겁고, 나만이 행복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은 실정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법적으로도 그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할례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이 법의 완성에 모든 인간들이 다 연류되어 있는 그들도 전부 죽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기 위한 ‘다발의 흔적’입니다. 이것을 법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법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이 할례를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그 법이 전 인류를 대표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저주신분인 것을 드러내어준 조치였습니다. 즉 법이 와야지만 인간은 자신의 문제점이 노출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지주시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역대하 24:13에 보면,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악마와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악마를 통해서 인간들의 공통적인 본성을 나타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기만 알고, 자기만 챙기면 그만이다는 의식으로 통합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정신이 악마의 정신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수 믿고 내가 천국 가겠다”라는 정신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흔적일 뿐입니다. 쥐고 가져가야될 본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율권이 제한적이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윗에게 세 가지 징벌 중에서 하나를 뽑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이 자기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자율권을 행사하는 그 의도의 문제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고를 대상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주십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마지막 선택할 게 줍니다. 그것이 바로 무서운 하나님의 징벌을 뚫고 상처받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다윗에게 다른 대안을 잡을 그 어떤 여지도 없이 다윗으로 하여금 징벌을 거두기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곧 ‘홀로 살기’가 아니라 ‘희생하신 하나님과 결합되는’를 결과를 기어이 남기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을 개인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7-16 15:57 
297강-갈 5장 2-3절(할례와 흔적)1807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2-3절입니다. 신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2-3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다 먹혀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상당한 반발을 유발했는데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하는 것에 대해서 대드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제대로 연결되었는지를 본인이 수용 못하겠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도바울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하나의 원인, 하나의 요건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대단히 건방진 이야기죠. 자기가 세상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오래산 것도 아니고, 누가 들어도 “네가 하나님이야?”라고 핀잔을 줄만한 자신감이잖아요. 

지난 시간 1절에 나왔듯이, 사도가 남들이 듣든 말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유는 위층이에요. 소속이 달라진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자리가 달라요. 살아가는 그 터전이 저 동네하고 다른 동네에 옮겨진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위에서 보니 안 보이는 것이 없는 거예요. 다 보이는 거예요. 다 아는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요건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한 가지 일만 내세우면 세상 어떤 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전부 다 연계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의 요건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한 세상인 것을 자유라는 새로운 소속, 자리에서 내려다보니 다 보이는 겁니다. 그 하나의 요소가 이 지상에 구체화된 것을 오늘 본문에서 ‘할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남자들의 생식기 외피를 자르는 하나님이 주신 의식이지요. 하나님의 지시사항입니다. 그것이 구약부터 이스라엘역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이어져온 거예요. 이어져온 그 할례와 하나님이 마지막에 터트린 마지막 사건, 그리고 모든 것 전부를 담고 있는 사건, 십자가와 부활과 연결 지어서 사도바울은 지금 자유의 입장, 자유를 받은 입장, 구원 받은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와 부활 속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다 마무리 되어 파장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너희 유대인들은, 또는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할례 받아야 구원 받는다’ 하는 그것을 왜 계속 고집하느냐? 

그렇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할례는 미완료가 되고 미완성이 되는데 완료되지 못하고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설명할 것이 남아 있는 것이 되고요, 내 인생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고 설명할 것이 남아 있으면 주저주저하게 되는 겁니다. 

주저한다는 것은 겁내고 있다는 것이고 겁내는 일은 아예 하지 말았어야 되는 일이거든요. 겁나거든 하면 안돼요. 뭔가 두렵거든 그 일 하지 마세요. 감사하고 자연스럽고 고맙거든 그 일을 하세요. 그게 어떤 일이든 따지지 말고 미리 걱정하지 말고 저지르세요. 일을 저질러야 돼요. 

그러나 사람들은 일을 저지를 때 전체를 다 알고 있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 요소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일을 저지르는 그것이 하나의 요건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렇게 조바심을 가지고 일을 시작해요. 

그렇게 되면 그 일이 벌어져도, 그 일이 막상 내 뜻대로 된다 할지라도 처음 실시한 그 원인에게만 해당되는 결과기 때문에 다른 결과에 대해서는 또 부들부들 떨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뭉개지면 어떤가, 그 결과가 취소되면 어떤가, 또 걱정이 되지요. 

그렇다면 자기 뜻대로 자기 원대로 되었다 할지라도 안심할 수 없는 세상살이를 계속 지속하게 되어 있어요. 뭔가 되었다 싶은데 욕심이나 욕망은 더 생기고, 이것 되었다 해서 기쁨도 잠시 그만 식상하게 되고 ‘이것 고작 얻으려고 그동안 고생했나.’ 하는 생각도 마구 드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 있는 한 가지 요건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하는데 본인이 되게 좋아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빨리 남에게 알리고 싶어요. 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다 이루었다’거든요. 이제는 끝내도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다. 그런 요소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간만 보고 있어요. 짜나 싱겁나, 간만 보고서 믿고 난 뒤에 계산, 이해타산은 어떻게 될까, 자꾸 따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그들은 자기가 선택했다고 하고 그 선택을 자유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자유를 정량적 자유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정량적자유, 정량적선택. 이걸 풀이하게 되면 양을 측정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나쁜 짓 했다는 것은 나쁜 짓이 원인이 되어서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니까 그걸 저울에 얹습니다. 나쁜 짓은 왼쪽 저울,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더 착한 것을 다른 쪽에 얹어서 나쁜 짓보다 착한 것이 더 무게 나가서, 약간이나마 착한 것이 남아 있으면 내게 돌아올 재앙은 해소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서는 겁니다. 

양을 측정하는 거예요. 나쁜 짓 하면 착한 것을 더하기. 반대로 피곤할 정도로 착한 일을 너무 했어요. 자원봉사 같은 것을 너무 했을 때는 ‘약간의 나쁜 짓도 눈감아주겠지.’ 하는 겁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과 악 사이에서 양을 측정해서 이걸 저울질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의 동기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너무 착해도 되나, 이런 거요. 또는 내가 너무 막가듯이 악해도 안 되잖아, 하는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정량적인 자유발휘보다도 아예 무슨 짓을 해도 자유가 된다면 이것처럼 신나는 일이 없어요. 

인간들은 자기의 선택권과 자율권을 정량적으로 따지기 때문에 자꾸 장래의 결과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작용해요.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작용하게 될 때 그 결과를 보고 어떤 때는 주저주저하고 어떤 때는 용기를 내는데 그 결과라는 것을 따져보자, 한 번 깨보자는 말이지요. 

결과를 깨보면 나에게 유리하고 내게 기쁨을 제공하는 그런 것이 돼버려요. 어떤 결과를 생각할 때 그게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내용으로 들어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행동할 때, 이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할 때 다른 것이 아니에요. 

부끄러운 짓이 내가 원하는 결과에 손해가 주어지면 그것을 부끄러운 짓이라고 보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짓이라고 보고 이익이 될 경우에 그걸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될 일을 부끄러워하고 정작 부끄러워야 될 일은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볼 때 부끄러운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거예요. 

성경에서, 이 수치를 모르는 것들아, 할 때는 하나님의 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 부끄러워요.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손해되는 일을 굉장히 부끄럽게 여기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얼굴에 화상자국이 있다, 이것은 남들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거예요. 화상 입었으니까. 

얼마나 남들이 놀리겠어요. 이것은 자기한테 손해잖아요. 그러니까 행동할 때는 남 앞에 안 나서려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인간의 행동은 내가 보기에 나에게 자랑스러운 행동은 하고 부끄러운 행동은 안한다, 그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세상 전부를 모르고 자기 행한 행위를 원인으로 간주할 때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사도바울은 어떤 행동을 해도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자리로 자신이 이미 옮겨져 버린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의가 작렬하는 곳에 자기가 놓여있는 겁니다. 반도체 공장 들어가기 전에 먼지 떨어낸다고 공기 막 불어대잖아요. 

성도가 있는 자리는 사방에서 하나님의 의가 쏘아대는 곳이에요. 내 지은 죄만 정량적으로 의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에요.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넘치는 자리에 우리가 와 있다는 말이지요. 죄가 있는 자리에 의가 넘치는 곳. 

죄만 용서해버리면 또 죄지으면 우리는 도로 죄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의가 우리에게 넘치게 덮쳐지는 그 자리, 그 자리를 확보했으면 그 사람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그 자유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 되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따라서 주님의 의를 외면하지 않는 한 누가 보기에도 우리는 수치를 느낄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수치가 없기에 두려움이 없고요. 두려움이 없기에 어떤 행동의 선택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게 되지요.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걸 사도바울이 왜 감추겠습니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마지막 결정적인 한 가지 사건, 십자가와 부활 그게 전부에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것이 전부라는 그 결정적 요인, 필사의 요인으로 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그것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걸 안 받아들여요. 사도바울을 미워합니다. 아직도 그들은 할례 받았다고 그걸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뭐라고 이방인들을 억압하느냐 하면, 아무리 이방인들이 우리가 믿는 메시아에 합류해도 일단은 할례를 받고 난 뒤에 우리 구원에 동참해야 된다고 윽박지르고 있는 거예요. 

그 자세한 내용은 이번여름 수련회 사도행전 강의할 때 이야기할 겁니다. 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했는지를. 그래서 갈라디아서 편지가 나오거든요. 한차례 사도바울이 터키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 이야기한 것이 갈라디아서에요. 

가보니까 반대를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반대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거꾸로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사람이 천국 갈 때는 이 몸의 사고방식 가지고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전복, 뒤집어져서 가야 돼요. 

유대인들은 뒤집어질 줄을 몰라요. 어떤 점에서 뒤집어져야 되느냐 하면, 이방인들, 할례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줬다는 말은, 구원의 깊이가, 저 위쪽이 천국이고 아래쪽이 지옥 같은 땅이라면 구원의 낚시 줄 그 깊이가 더 길게 되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을,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령 줘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면 이 긴 구원의 낚싯줄, 능력 줄을 가지고, 짧은 것 가지고 구원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그 짧은 식견을 부끄럽게 만들고 덮게 만드는 작용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시건머리 없는 것인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오히려 이방인을 구원해서 유대인들의 왜곡된 현실관을 공박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은 1장부터 읽어서는 안 되고 28장부터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돼요. 그 깊이 때문에. 그 깊이가 갈수록 더 깊어져요. 무엇무엇 해서 구원받자가 아니라 안 해도 구원받았다, 가 무엇무엇을 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뭘 해서 구원받으면 이게 하나의 요건이 돼요. 세상을 현실화하는 요건이 내행함에 있습니다. 행함에 있어버리면 자기 구원받는 것은 납득이 된다 할지라도 남들이 구원받지 않는 것은 납득이 안돼요. 

유대인 남자들은 자기 몸에 할례를 행했잖아요. 할례 행한 것은 자기 몸에 했기 때문에 나의 구원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나 할례 행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그렇게 돼요. 구원이 구원개인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할례의 취지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할례의 취지라 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나 자율성, 결정이나 마음가짐이나 인품, 인격,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하나의 집단화를 시키는 법이 할례라는 겁니다. 

할례를 행했을 때 그 사람이 노인이냐 어린애냐, 성격이 포학한지 점잖은지를 일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거지요. 하늘나라에서. 할례만 문제 삼겠다는 거예요. 그 할례의 취지가 확대되고 십자가에서 완성되어 버리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집단화가 발생되는 거예요.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 그 예수의 이름이 예수 믿는 자의 개인의 역량과 행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름입니다. 

내가 맘먹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니까 예수 믿게 된 거예요. 논리적순서가 바뀌어야 돼요. 내가 의존교회 베드로전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논리적순서가 뒤바뀌어야 돼요. 

내가 뭘 선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동 똑바로 해서 착한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니에요. 논리상 주님이 먼저고 그 다음이 우리입니다. 활발한 주님의 활동의 여파로 인하여 우리에게 어떤 행동하는 효과가 발생된 거예요. 

주님이 떠미니까 떠밀려진 거예요. 나뿐만이 아니고 구원받은 집단이 다 그렇다는 말이지요. 할례 안에는 개인을 묵살하고 하나님 쪽에서 먼저 집단적으로 ‘이런 집단이 되어야 해’라고 강요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할례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할례라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시내산 언약으로, 말씀으로 준 거거든요. 그걸 외재적이라고 했잖아요. 법이 외부에서 온 거예요. 외부에서 왔다는 말은, 외부에서 오기 전까지는 인간은 자기 몸이 전부에요. 

전부인데 만약에 외부에서 뭔가 추가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내 몸이 전부라는 것에서 인식이 변화됩니다. 내 몸을 내가 알아서 잘 관리한다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외부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내 몸의 미래가 확정된다는 쪽으로 사고방식의 범위가 확대되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은 법이거든요. 법은 지시사항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몸 신체 내부에 법이 새겨져버립니다. 그러면 ‘몸 + 법’이 할례에요. 유대인들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니까 성격이 다 다르고, 인간성 다 다르고, 환경 다 다르고, 지문 다 다르고, dna 다르고, 각자 다 다르지요. 

다르지만 목욕탕 가서 까놓고 보면 전부 다 할례를 행했다는 말이지요. 각자의 몸 안에 하나님의 법을 장착하고 있는 거예요. 법을 소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뭔가 행해서 착해지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에게 주어진 그 할례와 더불어서 할례를 내려준 그 취지가 인간의 결심과 자율성과 결정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계속 뒤따라와서 할례를 받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공동운명체로 묶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멸망이에요. 할례 행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역사는 이스라엘 패망중심으로 의미가 종합이 돼요. 의미가 거기서 구축이 됩니다. 세상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 그게 하나님의 구약성경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시했기 때문에. 언약 받은 백성이 내 말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받고 저주받는다, 심판받는다. 그것이 그대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완전히 까발려졌잖아요. 사도바울이 옛날에 유대인, 할례 받은 사람이잖아요.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모든 세상 중심에는 유대민족, 이스라엘민족이 있다.” 

그 말은 맞아요. 그 말은 맞는데 그 말에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관계없이 택함 받았기에 우리는 택한 백성이고 구원받고 부활된다고,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었거든요, 부활된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바울도 바울되기 전에 사울 때 그렇게 알았었어요. 그런데 그게 뒤틀리고 왜곡된 거예요. 왜 그런가? 할례를 받았다, 할례를 소지했다, 이렇게 내가 할례를 받았으니까 소지용으로 생각한 겁니다. 소유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지속적으로 추가되고 투입되는 하나님의 언약과 뒤따라오는 계획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범조교로 붙잡혀있는 상태거든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어요? 평소에 하나님의 법이 없을 때는, 내가 잘되어야 돼, 내가 잘되어야 돼, 하다가 외부에서 십계명주고 할례를 행하고 뭘 하라고 하니까, ‘옳다구나. 내가 잘되어야 돼. 내가 잘돼야 마땅해.’라는 그 사고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주고 부추겨줘서 ‘이왕 잘되는 것 완벽하게 잘 돼야지.’ 해서 율법주고, 할례주고, 하나님의 법을 줘서 ‘이왕 잘되는 것 더 완벽하게 잘되라고 주셨다.’라고 유대인들은 합력해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 법을 준 것은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법을 줌으로서 평소에 인간들이 하는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도 터무니없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대민족을 선택해서 법을 준 거예요. 

그 법의 결과는 뭐냐?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법을 안 지킨 민족이 망한 것이 아니고 법을 지킨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그것도 율법을 모르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이방의 헬라마케도니아와 바벨론 나라에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법이 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겁니다. 법을 알기 때문에 망했다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교회 안 다니다가 교회 나오니까 목사가 “십일조 하세요. 은혜 받았으면 입 닦지 말고요. 공짜로 구원받으려고 하면 안 되지.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티를 내야지. 적어도 십분의 일은 내야지.” 라고 했을 때 교회 다니기 전까지는 십일조 하라는 말을 몰랐어요. 안식일 지키라, 주일 지키라는 말을 몰랐어요. 

몰랐는데 교회 온 거예요. 오니까 사람들은, “이미 교회 가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사람이 얻어 챙긴 것이 있으면 보답은 해야지.” 십일조 좀 아깝기는 해도 “십분의 일 낼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이 안 건드리는데 다만 이걸 추가적으로 하게 되면 하늘나라 상급도 받고 영광도 돌리니까 보너스가 두둑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이 들어온 것은 저주를 더욱 더 저주되게 하는 거예요. 망하게 하는 겁니다. 교회 십일조 내고 몽땅 망하게 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말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하게 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법이 왔기 때문에 유일하게 너는 교회 오기 전이나 교회 오고 난 뒤나 나는 지옥가도 합당합니다, 하는 것을 유일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십일조 하기 전까지는 나는 저주받은 인간인줄 몰랐는데 십일조 하고 난 뒤에는 “집에 불이 나도 상관없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집에 불난 정도가 아니고 지옥으로 가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입을 틀어막고 모든 사람이 지옥 갈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어떤 변화도 없었음을, 저주 아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줌으로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의 흔적 같은 거예요. 가면 같은 겁니다. 옛날에 연극은 가면 쓰고 했거든요. 

연극배우에게 있어서 가면은 가면 뒤에 본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가면 벗어버리면 어떤 것도 없어요. 가면이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가면 뒤의 또 다른 얼굴을 연상시킨다니까요. 항공사 직원들이 데모할 때 가면 씀으로서 그들이 되게 착해 보이잖아요. 가면을 씀으로서 착해 보인다 그 말이지요. 

저렇게 분노하고 있지만 저 사람이 회사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고생 하겠느냐, 라고 남들에게 왜곡된 자아상을 유포할 수 있는 방법은 가면이에요. 가면을 씀으로서 가면 뒤에 뭐가 있다는 왜곡된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가면을 씀으로서 가면 뒤에 뭐 있음이 하나의 짝을 이뤄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교회에서 신앙 없는 사람이 신앙 있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 시도를 함으로서 자기가 마치 신앙 있는 것처럼 본인이 남들로부터 격려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유대인에게 할례를 지시함으로서, 유대인자체가 신앙이 없는데 할례를 행함으로서 유일하게 신앙 있는 민족으로 남들에게 계속 유포가 되고 할례도 필요 없는 이방인에게 그걸 강요함으로서 강요하는 본인이 세상의 중심노릇을 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가면 한번 썼으면 계속 쓰자는 거예요. 안경알 없는 안경을 쓰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시력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얼굴의 품위를 그런 식으로 외부에 인식시켜 온 거예요. 선입감을 내가 계속 유효하게 활용하겠다는 시도가 있다 이 말이지요.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전 세계인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할례문제를 확대시킵니다.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자라.” 

할례 하나만이 아니고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졌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모든 율법을 행하게 되면 결국 인간은 저주받아 죽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할례언약을 포인트로 해서 할례언약에 해당되는 그 처벌을 전체율법으로 확장시키는 이유가 전체로 확장시킴으로서 결국 나오는 최후의처벌이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약해 드릴게요. 율법은 뭐냐? 인간이 죽는다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을 말하는 흔적이라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겁니다. 할례를 모르고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하잖아요. 죽으면 끝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충분하게 인간의 죽음을 자신을 드러내는 가면으로 활용하신 거예요.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의 죽음 뒤에 본격적으로 다른 현실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호치캐스, 19세기인가에 발명되었다고 하는데 요즘엔 스테이플러라고 부르는데 그걸로 찍으면 종이가 찍히지요. 

찍힌 그 심을 다시 뽑아보세요. 원상태 되는 것 아닙니다. 흔적이 남아요. 누굴 사랑했잖아요. 그리고 까였잖아요. 그러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갑니까? 까인 흔적이 계속 그 사람 맘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지요. 

흔적이라는 것이 뭐냐? 인간의 몸 자체를 율법화시켜 버리면 인간이 죽는 것도 하나님한테 다 필요한 조치에요.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면,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그게 주님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멋진 가면 용도에요. 

흔적용도라니까요. 흔적의 특징은 없다는 거예요. 없는데 그 없음이 실용성이 있는 없음이에요. 없는데 필요한 없음이에요.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그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 마땅한 거예요. 

흔적이 있다는 말은 본질, 실체는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따로 있지요. 예수님이 죽을 때 사람들은 ‘예수 당신 인생 끝이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가 되고 요소가 되고 요건이 되는 이유는 그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죽음을 대표해서 죽는 죽음이거든요. 대표적 흔적이에요.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다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서 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고 모든 인간도 죽고 이 세상에 왔다 간 사람은 다 죽어야 돼요. 다 죽어야 되는데 유일하게 예수님만 거기서 사흘 만에 건져냈습니다. 첫 열매로 건져 냄으로 말미암아 흔적 뒤에 나타난 진정한 진실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세상전부를 알았으니까. 모든 세상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부분, 응축된 핵심부분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떻게 입을 다뭅니까? 이방인에게는 할례, 그리고 이방인에게는 그냥 세상사는 정치이야기, 이 모든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될 사건의 조합입니다. 

변화되고 그리고 모든 현상들이에요. 이 모든 것이.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무엇 때문에 울고 무엇 때문에 웃고, 합니까? 개인적인 이득, 사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자기 자랑스러우면 웃고 부끄러우면 울잖아요. 

세상 모든 인간이 그동안 마귀 안에서, 죄 아래서, 죽음 아래서, 가면이 없으니까, 흔적이 없으니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이 가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이 몸뚱이, 이 몸뚱이가 죽기 전 살아있을 동안만큼은 이걸 꼭 쥐자는 겁니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어떤 cf멘트처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걸 꼭 쥐는 거예요. 내 몸에서 나온 내 새끼는 같이 꼭 쥐고 있는 겁니다. 꼭 쥐고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을 읽을 줄도 몰라요. 이게 갇혀 있는 겁니다.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세상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연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하나라도 따로따로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 안에 통합되어 있어요. 죽어야 하기에 너는 태어나야 했고 반드시 죽어야 하기에 반드시 죽는다. 할례를 받아버리면 개인적인 인품이나 성격, 개인적인 과거의 장단점을 전혀 묻지 않고 할례언약 자체가 유대인들을 멸망케 하고 저주케 하고 심판케 한 것처럼 십자가라는 그 흔적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인품이나, 성격이나, 잘잘못이나, 얼마나 착했느냐, 수고했느냐, 태국 소년들 13명 살리는데 외국인이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잠수해서 훌륭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바깥에서 그냥 구경만 했거나 관계없이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죽이는 거예요. 

인간의 개인적인 역량이라든지 개인적인 성찰, 품위, 그런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 싶어서 참고 견디고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억지로 착한 일을 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것은 전부 다 낭설입니다. 찌라시. 헛된 소식이에요. 전혀 비현실적인 소식입니다. 그것에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살아 있는 내 몸 붙들고 살아있는 내 몸 살리기 위해서 교회 오고, 내 몸 살리기 위해서 예수 믿고, 솔직히는 예수님을 내가 선택하고, 부처 선택 안하고 예수를 선택함으로서 내 자율권을 발휘하고, 그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꾸역꾸역 부끄럽지 않은 인생 살고자 오직 나만을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거든요. 교회가 시키는 것은 다하고. 

문제는 그것이 헛된 짓이라면, 그게 헛수고라면, 그게 하나님보시기에 지극히 더러운 짓이라면, 비거룩이고 부끄러운 짓이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구더기 기어가는 짓이라면. 원래 지옥은 구더기처럼 취급하지만 살아생전에 이미 구더기로 취급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역겨운 짓이에요.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는 그 짓이 구더기 같은 짓이고 역겨운 마귀 짓이라니까요. 기도해서 응답받겠다, 중보기도해서 응답받겠다, 그게 악마의 짓이라니까요. 누구 좋으라고 그 짓 한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그게 다 허구고 헛짓이라면, 그러면 어떡하면 좋으냐? 대책이 있냐? 사도바울처럼 기쁘고 즐겁게, 사도바울은 남 질책하는데 아주 신났어요. “이런 것은 너 모르지 그지?” 하면서. “나 십자가 안에 있어. 하나님의 의안에 있어. 너는 백날 해봐야 하나님이 너의 의 인정하지 않아. 그게 이미 심판의 기준이야. 끝났어 너.” 

인간이 법을 만남으로서 인간은 이미 망했어요. 망하면서도 인간 그 자체는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그 모습,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이는 것을 즐거워하시니까. 이게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죽어가는 것은 본인은 고통스럽지만 주님은 즐거워해요. 머리 아프면 인간은 고통스럽지만 주님으로서는 적절한 조치라니까요.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죽음을 가면으로, 흔적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흔적이니까 안 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계속해서 십자가라는 하나의 요건 속에 변화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목사님, 천국에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요.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고요. 어떤 식으로 그들은 구원받아서 횡재를 했습니까? 자기 몸만 붙들고 살아가는 이 인간이. 다윗이나 아브라함은 자기 몸을 포기했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런 인간은 없거든요. 

어떤 인간도 알아서 그 율법의 저주에서 헤엄쳐 나올 인간은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결국 자기 이익과 자기수치를 계산하기 때문에, 정량적인 행운이 오기를 계산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저주의 흔적이기 때문에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벗어난 결과가 나옵니다.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이한 다윗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탄과 만나게 해줘요. 악마와 만나게 해줍니다. 

악마와 만나서 다윗이 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해요. 거기에 선지자 갓을 보냅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3절에 보면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석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라고 셋 중에 하나를 고르기를 언급해요. 

다윗이 자기 백성의 대단함을 알리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한 거지요. 소위 목사가 교인 수 센거나 똑같은 거예요. 사탄이 그렇게 하게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의 사고방식을 전복, 뒤집어 놓기 위해서. 지금 정량적으로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뒤집어 진 거예요. 

요새 운동장 기울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운동장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돼요. 운동장 이야기는 중국과 미국의 무역에서 균형 잡겠다는 뜻이고요. 완전히 뒤집어져야 되거든요. 뒤집어진 것을 알아서 뒤집을 수는 없는 이야기란 말이지요. 

뒤집어진 것은 처방책이 하나밖에 없어요. 악마를 만나라. 악마와 만나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처방책입니다. 참 쉬운 거예요. 악마의 특징이 뭐냐? 독자적인 가치를 계산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악마의 노림수거든요. 

내 교인 몇 명이냐? 가수 같으면 내 트위터에 몇 명이나 접속하느냐?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얼마냐? 나와 관련시켜서 계속 하는 거예요. 삼성 라이온즈 몇 등이냐? 전반기 7등이거든요. 한화는 몇 등이냐? 2등이에요. 왜? 내가 원하니까. 

악마는 계속해서 독자적인 즐거움과 사는 보람과 기쁨을 테두리 잡아서 정하게 하는 거예요. 난 복음 알았다. 그런 거요. 난 복음 알았으니 걱정 없다. 그런 것. 주님께서 악마를 만나게 하면서 제시한 것이 뭐냐? 처벌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점이 중요한 거예요. 

다윗으로 하여금 자율권을 활용하는 기회를 줘요. 첫 번째 땅이 7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까 그거 택할래. 그 다음에 7년보다는 짧은 기간인 석 달 동안 적들에게 쫓길래. 그 다음에 더 짧은 기간이 나옵니다. 3일 동안 온 나라에 전염병 퍼지는 것. 그 셋 중에 어느 것 할래, 라고 제시를 합니다. 

이것은 셋 중 하나 고르라는 뜻이 아니고 그 세 가지의 벌이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양의 문제가 아니고 질적으로 다윗 네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할례 받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무것이나 집어도 결과는 동일해요. 어떤 결과냐? 이 처벌을 받고 그것으로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제일 짧은 것을 선택해요. 3일 동안의 전염병. 그 선택으로서 전부가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또 선택하게 합니다. 

쉽게 해서 손가락을 가지고 하나를 더 겨냥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이여, 내 죄 때문에 저들을 너무 처벌하지 마옵소서. 칼을 거두어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악마의 특징은 독자적으로 나만 행복하고 즐거우면 돼요. 그런데 다윗으로 하여금 나라는 범위를 깨치고 너 때문에 대신 희생하신 분과 두 손을 마주치게 하는 마지막 최후의 선택을,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맺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도록 주께서는 마귀를 우리 주변에 보내시고 활용하신다는 그 뜻입니다. 독자적으로, 나만 행복하면 돼, 나만 잘되면 돼, 나만 자랑스러우면 돼,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귀를 뚫고 들어오시는데 그 뚫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마귀로부터 큰 고통과 아픔을 뚫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야말로 링거 주사 놓고 링거주사 고무줄 속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고난 받았던 액이 들어오는 것처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동굴에 헤엄을 쳐 들어오는, 죽음을 무릎 쓰고 잠수하는 스쿠버다이버처럼 계속 찾아오는데 기어이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너 하나 인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다. 이거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궁지에 몰렸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십자가 피 안 받아들이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오직 그것뿐이에요. 

그것이 진정한 할례언약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그것이 바로 할례언약의 완성, 세례, 성령의 세례고 십자가에 합류된 거예요. 할례언약은 모든 개인적인 자질이나 인품이나 행함을 무시하고 그 언약완성 자체를 노리면서 끊임없이 꾸준히 집요하게 주께서 언약완성을 시도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완성을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그것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고 그 피 앞에서 어떤 행동도 네가 수치스럽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라는 것, 깨짐을 자랑하고, 주님 앞에 당했음을 자랑하고. 

거지 나사로는 거지가 되었다 할지라도 오히려 웃고 있어요. 너는 모른다. 너는 전부를 몰라. 핵심을 몰라. 거지꼴에 개가 핥고 있으면서도 거지나사로가 자랑스러워한 것처럼, 부자를 비웃는 것처럼, 그러한 대범함, 당당함,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할례를 통한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밖에 모르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것, 마귀와 합작해서 네 본색이 드러나는 주님의 치밀한 십자가를 증거 하는 계획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