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종의 멍에(갈5;1) 1807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9. 17:52
2018-07-08 12:50:03 조회 : 675         
   종의 멍에180708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종의 멍에(갈라디아서 5:1)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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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8-07-08 13:32 
종의 멍에 

2018년 7월 8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1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는 지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필요치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선뜻 마음 내끼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귀한 것이란 돈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활이 돈이 바쳐져서 회전하고 있습니다. 

즉 돈이 없는 탈락이라고 이런 경우는 상상만 해도 고통스럽습니다. 궁핍, 가난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 없는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남들 앞에 자기 인생을 내놓을 때 수치를 유발하게 됩니다. 즉 “더러워서 더는 못 살겠다”고 결심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행복이란 ‘자유’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돈이 만족스럽게 소유하지 못해서 있습니다. 

이런 마음상태는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는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압니다. 하지만 사도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자유’를 언급합니다. 이 ‘자유’는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다 더 보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자유답게 되기 위해서는 현 자신의 상태가 ‘종의 멍에’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무능함’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 무능함은 ‘구원 불가능함’을 당연한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서 거기서 나름대로 삶의 보람과 자랑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유’라든지 혹은 ‘종의 멍에’라는 개념을 밀칩니다. 이러한 밀침이 곧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게 만든 성향의 연속을 말해줍니다. 즉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 끼리의 말은 알아듣지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 결과가 예수님을 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란 바로 이 내침의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5-7에 보면,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신의 알맹이는 빠지고 근처에 수의만 곱게 개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의미가 확보하려면 필히 ‘사람에게 버림받아 죽었음’이 선행 요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 아무리 이야기하셔도 사람들은 그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본질로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일단 ‘나 여기 있음’부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작점으로 인하여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만 받아들이면서 일방적으로 “믿는다”고 말해버립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대해서 여전히 이해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부활하신 예수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자신이 죽은 자로 취급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성도는 일종의 예수님이 벗어놓은 ‘세마포’ 같은 존재들인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일단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시작하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14:30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먼저 홍해 바다를 건너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건너왔던 그 홍해바다가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무수한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네의 뒤를 따라 홍해바다를 건너고자 했던 애굽의 군사들이었습니다. 이는 곧 애굽인들이 비정상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 자신들의 운명이 상식밖의 비정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놀라야 하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은 이미 자신들이 물에 빠져 죽은 ‘시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은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지를 못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을 추진하는 과정이요 계획이었던 겁니다. 즉 인간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였던 겁니다. 

인간은 창세기 3장이 된 입장에서 도로 창세기 2장 시절로 되돌아가 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역량이나 소질이나 성격이나 인품을 문제 삼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집단으로 다루십니다. 마치 가두리 양식장 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율법이라는 살충제를 뿌려버립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하지만 인간들과 결속되어 있는 악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악은 자신의 先在(선재)성을 감추어버립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먼저 있고, 그 인간이 나쁜 짓을 했을 때에만 악이 나오고 죄가 나온다”는 식으로 악마는 자신을 철저하게 숨겨둡니다. 즉 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먼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인간보다 죄가 먼저 있는 처지랍니다. 죄 중에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시 51:5) 따라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그 죄의 원인을 자신의 행함으로 마감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이 후유증으로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소멸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5:39에 보면,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죽어있었던 겁니다. 죽은 것도 모르고 악마에 미혹되고 자꾸만 사는 쪽으로 희망을 갖고 ‘안 죽으려’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을 앞세운 성령을 통해서 자신이 이미 죽은 존재에 불과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은 遺品(유품)에 불과함을 압니다. 이 썩을 육신을 데리고 다닌 것이 불편하지만 재미있습니다. 안정감을 가집니다. 침착합니다. 그 누구와 비교할 게 없습니다. 

이로서 그 누구로부터도 협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죽고, 성령으로 인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삶에 주눅들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을 보면서, 홍해 바닷가에 널부려진 시신들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96강-갈 5장 1절(종의 멍에)1807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바울이 성경을 통해서 이런 말을 할 때는 사실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요. 방금 했던 이 말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했고 그래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그 말이 오늘날 우리가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상당히 받아들이기가 곤란해요.

돈을 벌고 돈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입장에서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가 언제 자유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미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버리면 우리가 아는 자유는 그게 전부에요.

남한테 피해 입히지 않는 한 남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그것을 사회계약이라고 하는데요. 이게 헌법이지요. 미국의 민주주의 헌법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그 말은 뭐냐 하면, 본인 나름대로 행복하면 더는 자유가 필요치 않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행복한데 무슨 자유를 또 달랠 필요가 없잖아요. 자유를 달라고 했을 때는 행복하지 않기에 자유를 달라 했는데 이미 자기가 능력껏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여건이 되어 있는데 자유가 아쉽고, 자유가 배고프고, 그런 것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리고 자유라 하는 것은 자기가 마음먹기 달려서 마음을 낮춰버리면 그 자체가 행복이기에 자유를 더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동화사 주지부터 중들이 “우리에게 고기 먹을 자유를 달라.”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채소 먹으면서 그것을 족하다고 하는 거지요. 물론 겉으로만 그렇고 사실 고기 다 먹지만. 

고기 먹게 해달라고 자유를 달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는데 받는 우리가 자유를 원하지 않고 있는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이 말이 우리에게 먹히지 않는 거예요. 아쉬운 것이 없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누구를 위한 자유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우리한테 먼저 질타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지금 뭔가 자유롭다고 느낀다면 더 이상 추가적인 자유는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그 자유가 누굴 위한 자유냐 하면,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여유를 위한 자유잖아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건 마음을 겸손히 먹으면 나름대로의 숨통 터 가면서 살만해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는 자유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 살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그 자유는 아니에요. 따라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자유를 주겠다고 했을 때에 그것은 뭐냐? 이 자유란 말조차 못 알아먹는 그 무능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성경 펼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을 정도로 완전히 맛이간 존재다. 그것을 여기서 질타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그 말씀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과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주고받는 말이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사단난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필요한 말씀과 이 세상에서 인간이 태어나면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 말과 서로 내용이 차이가 난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도 하나님이 같이 원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그 내용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내게 필요치 않는, 내게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그래서 “내가 언제 이런 것을 달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 뿐이에요. 교회든 가정이든 국가든 돈이 최고잖아요.

우리는 돈에 목말라 하고 돈에 대한 욕망은 끝도 없어요. 돈만 주면 하나님 힘들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조로 나가는 입장에서 주께서는 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유를 주겠다고 하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왜 주려고 하지?’ 

이 말은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영 글러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잘못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그냥 자유를 주겠다고 하면 되는데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유라는 것이 뭐냐? 멍에 매지 않는 상태를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장갑에 짝이 두 개 있는데 한 개가 없으면 뭔가 허전하잖아요. 자유를 설명할 때 종의 멍에라는 개념과 짝을 이루어서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사도바울이겠지요, 그 사람은 전에는 종의 멍에를 매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제는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매지 않고 그 상태에서 풀려나서 자유의 상태에 놓였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경과, 그런 과정, 그런 상태를 하나님이 원하는 합당한 인간으로 규정을 했는데 혹시 이 규정에 대해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는 쪽으로 사도바울이 편지에 쓰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한테 하나마나에요. 왜 하나마나냐 하면, 현재 내 처지가 종의 멍에를 쓴 처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제공한다는 자유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이미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면 전에 있던 내 상태가 종의 멍에를 맨 상태였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유를 주세요, 할 이유도 없는 거예요. 

이래도 자유를 못 얻고 저래도 자유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 이 갈라디아서 5장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지금 일을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차원에서 벌이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기 작업에 대한 계획서를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거예요.

지금 너희들이 뭐라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자유를 주고 자유를 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 일을 진행시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실 때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뭐냐? 종의 멍에는 뭐고 자유가 뭐냐? 이게 궁금하지요.

그걸 아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했어요.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간단히 풀려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와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요한복음 20장 5절과 7절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고 난 뒤에 하루, 이틀, 사흘째 되는 날,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무덤에 예수님 시체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까 거기에 예수님 장례치를 때 입혔던 세마포는 차분하게 놓여 있는데 당사자 예수님이 없는 상태였어요. 교회에서는 이것을 부활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부활이라는 말의 전제가 뭐냐? 이 땅에서 사셨던 적이 있어야 되고 죽으셨던 적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이 부활이라는 것이 의미 있는 겁니다. 사셨고 죽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다? 부활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종의 멍에를 맨 자기 백성에게 자유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한 논조를 가지고 연결해 보면, 오늘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이해하는 그 사람은 이미 부활된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몸은 뭐냐? 개켜 있는 세마포같은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무엇을 남겼느냐 하면, 자기가 입었던 옷을 증거물로 내세웠어요. 

왜 그 증거물이 필요하냐 하면, 전에 돌아가고 나서 장례치를 때의 그 옷이거든요. “장례 치렀다. 이미 이분은 확실하게 죽었어.”라는 것을 이 지상에 계속 유포하고 그것을 증거함 으로써, 살았어, 살았어, 를 짝을 이루어서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성도가 이미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미 새사람 되었지만 이 육체, 썩어가는 육체, 늙어가는 육체가 계속 있어야 되는 이유가, 이 늙어가는 육체를 통해서 부활되었음을, 이미 자유를 얻었음을 증거 하는 증거용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이미 자기는 새사람 되었어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이미 살아서 활동하시는 그 양상은, 사도바울에게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도바울의 신체, 육체, 그 육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돼요.

참 이해하기 힘들지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 나는 죽고 다시 사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그 당시 유대사회나 제자들은, 사람은 죽으면 부활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는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은, 나는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그런 레벨에서 말씀을 하셨고 듣는 입장은, ‘사람은 죽으면 끝이야. 사는 게 없어.’라는 쪽이고 그래서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못 알아들어야 돼요. 못 알아들어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틈새가 됩니다. 알면서 예수님을 죽일 리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듣고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야 죽이잖아요. 그래서 주님의 뜻은 뭐냐? 이 땅에서 계속 아무리 알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유지가 되어줘야 돼요.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보고 있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해야 돼요. 그 알지 못하는 것이 주님의 일의 성공입니다. 그게 우리 구원의 성공이고요.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뭘 알아야 믿고 믿어야 구원받지 않습니까?”라고 나오는데 그게 구원의 실패에요. 

그런 식으로 주께서 구원한 적이 없어요. 알고, 알고 난 뒤에 내가 믿어서 예수 믿었다는 그 공로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런 논리는 성경에 아예 없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고. 교회는 장사하려면 무슨 소리는 못합니까?

실제로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하면 뭐가 필요치 않느냐 하면, 성령의 오심이 아무 필요가 없어져요. 성령은 언제 오시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승천되고 난 뒤에 오시거든요.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이미 예수님이 인간에 의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할 때에 아무도 알지 못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알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그냥 줬다는 말은, 내 힘으로 손톱이 닳도록 노력해봐야 구원은 안 되는 그곳이 천국이고 그곳이 영생의 세계이고 그것이 구원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뒤늦게 소급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 우리가 모르는 상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죽음이라고 해요. 그 죽음을 오늘은 종의 멍에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표현하지만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면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우리의 모든 구원의 노력에 절망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성령 받아도 안 되고, 삼위일체 공부해도 안되고, 교회 다녀도 안 되고, 이래 해도 안 되고 저래 해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거예요. 

성경공부해도 안되고, 예배참석해도 안되고, 주일 낮에 대표기도해도 안되고, 어떻게 해도 안 되고, 안되고, 안되고, 그 안 된다는 그것 때문에 찬미가 돼야 돼요. 그 안 됨을 내용으로 해서 찬미가 되어야 되는데 그 찬미가 천사의 레벨의 찬미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오심이에요. 성령이 와서 보니까 처음부터 이게 안 되는 일이었던 거예요. 성령이 오고 나서야 비로소 눈 뜬 거예요. 아, 이게 안 되는 일이구나. 십일조 해도 안 되고, 교회 참석해도 안 되고,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철야해도 안 되고, 금식해도 안 되고, 회개해도 안 되고.

찢어지는 회개도 안돼요. 안되니까 남는 것은 찬미, 천사의 찬미 외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그 때부터는 침착해지지요. 안정성을 얻습니다. 안정성을 얻은 사람은 뭘 해도 괜찮아요.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존재기 때문에. 

내 행함으로 내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긋하게 즐길 수가 있습니다. 실수해도 안 되었고 성공해도 안 되었고 어떤 경우도 구원의 성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서 신나지요. 즐겁지요. 즐거운데 여기서 즐거움에 멈추지 말고 더 나가야 돼요.

왜 나는, 인간은 안 될까?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종의 멍에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제야 그 자유라는 것과 짝을 이루는 종의 멍에가 왜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는지를 아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뭐냐?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호강하는 천당에 가느냐? 인간이기에 천국에 가야 해, 라는 생각이 우선되는 거예요.

모든 신학이 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이 무능이지요, 무능. 인간이라는 내가 먼저 있고 그 인간이라는 나를 거울 보면 내가 비치잖아요. 이 나를 죽어서 좋은데 천국으로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내가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삶의 관점자체가 변동이 일어나야 돼요. 그게 부서지고 새롭게 조립되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종의 멍에와 거기서 벗어난 자유함에 관한 기능을 부여받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지금 인간은 지금 여기 내가 있고 그 여기 있는 나를 어떻게 천국에 보낼 것인가, 해서 관심사가 나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면 관심사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 자체가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 안 들어 있어요. 이게 들어있지 않아요. 

종의 멍에를 진자는 진자로,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야 될 자는 벗어난 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방적으로 다루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 4장 22절에 나옵니다. 22절에 보면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서 죽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계집 종,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두 부류로 정해버렸어요. 정해놓고 율법 안에 있는 자를 종으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리고 율법과 상관없이 영원히 살아야 될 사람을 자유자, 자유하는 어머니라 해서 그 자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 하면, 인간들이 서울대학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늘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거예요. 주어진 그 내용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이야기를 다 했었어요. 했는데 인간 자체가 인간끼리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듣는 거예요.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님이 아무 쓸데없는 존재가 되어서 죽여 버린 겁니다. 인간에 의해서 죽어버린 예수님을 아버지가 다시 살림으로서 갈라디아서 4장의 내막이 그대로 우리에게 다시 소개 된 거예요. 성령과 더불어서. 그러니까 비밀을 알게 된 거예요. 아, 나부터 출발하는 이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겁니다.

이걸 아까 안정성이라 했지요. 그러면 인간부터 출발하는 것이 왜 안 되는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악마와 한통속이 된 이상 다시 자력으로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걸 제가 아까 무능성, 무능함이라고 했어요.

인간은 무능함이 있어요. 인간은 온갖 과학발전을 하고 유능하지요. 하지만 천국 가는 데는, 영생의 나라 가는 데는, 창세기 2장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는, 처음 인간을 만들었던 그 본래취지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데는 인간은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능함에서 구원받을 재주가 나올 리가 없지요. 그 자체가 무능함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을 줘서 그 무능함을 꽉 눌러버려요. 전체가 다 무능함이라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 이야기니까 이것은 구약의 민족이야기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 출애굽기 14장 3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그 다음에 잘 들어봐야 돼요. 이스라엘이 바닷가에 가보니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홍해바다에 가서 자기가 통과했던, 그리고 이스라엘을 뒤따라서 그 홍해를 통과하다가 죽어버린 애굽군대의 시신을 목격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저 인간들 왜 죽었지? 우리는 멀쩡하게 통과했는데 저 인간들은 왜 죽었지?’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볼 수 있어야 이게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세상에 나가 보세요. 전부 다 애굽군사들이에요. 넘볼 것을 넘봐야지. 세상뿐입니까? 교회가 보세요. 전부 다 애굽군사인데. 십일조 해서 구원받으려고, 예배참석해서 구원받으려고, 목사 말 잘 듣고 구원받으려고, 성경 백독해서 천당 가려고 나름대로의…….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부터 따지지 않고 천당 있다 하니까 무조건 가보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들이 노력해서 간 나라가 아니에요. 누가 먼저 찾아왔어요. 왕래했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히브리인들에게 투입하니까 모세가 지령을 받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나왔거든요. 

그 때 그들이 할례언약을 행했고, 할례언약은 다음시간에 하겠습니다만, 할례언약을 행하고 유월절 피 발라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피 발랐고 할례언약을 행했다, 이렇게만 나왔지요.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 뒤돌아서 홍해바닷가에 다시 가 보니까 거기에 애굽의 시신들이 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광고에 이런 것이 있잖아요. 치킨 맛을 보니 맛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 때 유명한 멘트가 나옵니다. “대체 이 닭다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가 닭다리라고 본다면 “주님이 저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저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내 쪽에서 하나님께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왜? 해봤자 그것이 무능함이니까. 무능의 발로니까. 

그런데 뭘 했어요. 성령의 오심이죠.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신체를 가졌는데 저쪽은 죽은 존재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도 홍해 헤엄쳐서 건너오라고 하면 빠져죽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홍해를 갈랐잖아요. 갈랐을 때 나를 보고 가른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물에 빠져 같이 죽어야 될 우리를 일방적으로 그 작업에 인부로 집어넣은 거예요. 

돈도 안주지만 하여튼 인부로 집어넣어서 이끄신 겁니다. 집어넣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시내산에서 뭘 줬느냐 하면,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이 뭐냐? 신명기 28장, 여러분이 옛날에 교회에서 함께 심방 다닐 때 많이 들어본 구절들이 나오는데 신명기 28장 아무 구절이나 읽어볼게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고 그 다음에 내가 이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것이 신명이 28장의 내용이에요.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사람들은 복에 관심만 있지 저주를 받는다는 벌칙조항은 자기에게 해당 안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어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또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이 세상을 홍해바다 한 가운데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겁니다.

자력으로 살 자가 없게 만들어 버려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넘어오면 안 되기 때문에. 창세기 3장이라는 것은 악마에게 팔려서 악마의 종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주받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원칙을 인간의 힘으로, 악마의 요구사항으로 이게 깨지면 안 되거든요.

이게 굳어져야 돼요. 이게 원칙이니까. 그 원칙이 원칙대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종의 멍에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 주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멍에가 아니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에요. 율법을 어기는 순간 나는 저주라는 그 소속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가두리양식장이라 하는데 가두리양식장을 해놓고 거기에 살충제를 확 뿌리는 겁니다. 몰살하라고. 우리는 가두어져 있어요. 가두리양식장에 살충제 뿌리면 다 죽어요. 그게 주님의 작업이에요.

죽으라고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성도는 이제는 자기 죽음을 즐겨야 되지요. 사는 게 불편해요. 하지만 재미있어요. 모든 인간에게 직업이나 성격, 인품, 배려, 동정, 성질, 일체 고려하지 않고 다 죽여 버립니다. 율법 앞에서는 다 죽여 버려요.

목사, 장로, 그런 것도 물론 없고요. 몇 년 다녔나, 그런 것도 없어요. 이것은 파스칼의 원리입니다. 물리학에 보면 파스칼의 원리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표면에 작용하는 압력은 일정하다는 겁니다. 파스칼의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뭐냐 하면, 자동차 브레이크에요.

모든 표면적에 닿는 압력은 골고루 동일하다는 거예요. 풍선의 기체, 물론 정지되어 있는 기체고 정지되어 있는 액체일 경우지만, 기체가 들어 있는 풍선을 누르게 되면 누른 그 지점만 압력이 걸리는 것이 아니고 누르는 순간 그 내부의 압력은 똑같이 균등해진다는 원리입니다. 17세기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발견했거든요.

따라서 자동차 브레이크에 압력이 걸리게 하기 위해서는 좁은 면적에 유압을 줘버리면 넓은 면적에 브레이크압력이 동일하게 다 걸리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 미국에 이민가나, 캐나다로 가나, 뉴질랜드로 가나 관계없이 스위스, 이슬람권, 북한, 한국, 북조선, 남조선과 관계없이 모든 저주는 동일한 거예요. 파스칼의 원리입니다.

저주의 압력은 동일해요. 취직이 되어도 동일하고, 취직이 안 되어도 동일하고, 결혼해도 저주고, 안 해도 저주고, 자식 없어도 저주고, 있어도 저주고, 파스칼의 원리, 모든 인간은 종의 멍에를 매었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만 한다는 거예요. 잘못해서 그런 건가? 잘못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태어나야 될 이유가 종의 멍에로부터 출발해줘야 되는 거예요.

왜 종의 멍에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시작이 종의 멍에로부터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조물이 있거든요.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나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시작점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보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이것부터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 착하게 살면 착하게 되고 나쁘게 살면 나쁜 죄인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시작이 아니고 악이 먼저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은 인간들이 먼저 있고 인간들이 나쁜 짓을 했을 때 비로소 악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악이 먼저 있어버리면 인간은 그 악이, 그 죄악이 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순서를 바꾸면 안돼요. 나보다 죄가 먼저 있어요. 시편 51편의 다윗이 고백한 겁니다. 나보다 먼저 있는 그 죄 중에서 내가 출생한 거예요. 이게 성경의 인식입니다. 그러면 악마가 악이겠지요. 인간보다 먼저 악마가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데 인간한테는 하나님도 없지만 악마도 없어요. 하나님도 없는데 무슨 악마가 있겠어요.

인간에게는 항상 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먼저 있어요. 내가 먼저 있고 나한테 필요하다 싶으면 하나님도 만들어 섬기고, 악마도 짝으로 만들어서 기피하고 그런 것이 있어요. 인간의 의식자체가 나부터 먼저 있기 때문에 나부터 먼저 있다는 그 생각 가지고 악마와 상대하게 되면 그 악마는 거짓된 악마, 있지도 않은 엉터리 악마에요.

처음부터 나부터 먼저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들을 하고 계시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돌아가셨을 때에 성령이 오셨잖아요. 성령은 하나님 우편에서 주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 2장 베드로설교에 보면 나와요. 그 출발점이 하나님 우편에서부터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고자 한 의도, 계획, 그것이 시작된 지점이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이지요. 거기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내가 악마를 인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악마야 물러가라, 해도 이미 내가 나부터 챙기고 난 뒤에 생각하는 악마는 괴기영화에나 나오는 엉터리 악마지 실제악마는 아니에요. 악마가 나를 가지고 악을 방출하도록 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악마가 그랬잖아.”라는 말을 안 해요. “이것은 내 잘못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진짜 이게 어려운 말이지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는 항상 성령으로 일하시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이해했으면 예수님을 안 죽였습니다. 예수님 하는 이야기와 인간들 하는 이야기가 전혀 소통이 안 되고 못 알아들어요.

이야기뿐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게 되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나와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자기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지금 예수님한테 부탁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던 그 이론을 여기에 적용시켜 봅시다. 지금 야이로가 평소부터 기도하고 싶어서 예수님 기다린 것이 아니에요.

야이로는 자기가 있고 자기가 있으니까 누구도 있느냐 하면, 자기 딸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있고 내 딸이 있고, ‘있고, 있고’ 입니다. 있음이 출발이에요. 뭐든지 인간은 그게 전부에요. 있음이 출발이에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있다가 내가 없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죽게 되어서 답답해서 예수님 붙들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자, 했는데 이미 가는 길에 그 딸이 죽어버렸어요. 여기서 난리도 아니지요. 장례 치른다고. 38절과 39절에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그 다음에 말씀이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자고 있는 거예요. 자고 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자는 것으로 봤어요. 휴식하고 쉬고 있는 것으로 봤다는 말이지요. 인식이 이렇게 안 맞는 거예요. 잘 때는 어떻게 하느냐? 자는 사람은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깨우는 거예요. “그만 자, 그만 자!” 하고 깨우시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예수님이 보는 관점은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는 거예요. 

왜?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상태, 그 조건 자체가 죽음조건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죽었다고 이야기해버리면 죽기 전까지는 살았다는 것이 정당화되니까 주님나라에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용어 바꾸라는 거예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너는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인식을 안 바꾼 상태에서 성경을 천 독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식 자체가 안 바뀌어 있는데. 우리 신체가 유품이에요. 이미 원초적인 영,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면 늙어가고 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유품이라니까요 유품. 

유품이라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느냐? 집에서 늘 아들하고 싸우고 잔소리하고 또 싸우면서 지내다가 어느 날 아들이 군대 입영통지서 받고 입대한 날 오후에 그렇게도 요란스럽게 맨 날 게임만 하던 아들 방에 한 번 들어가 보세요. 허전~하지요. 텅 빈 공간, 허전~합니다. ‘그렇게도 까불다가 고생하려고 군대 갔구나. 그래, 나라 위해서 해야지.’ 하면서 허전하고 슬프잖아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에 진즉에 가야 될 그러한 입장이에요. 오늘 설교를 딴 제목으로 한다면 <유품정리>에요. 우리 자신이, 내가 나 자신에게 아무 쓸데가 없어요. 쓸데없기에 어떤 승부욕도 필요치 않아요. 그게 안정감입니다. 그게 침착함이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세마포에요.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살아가는 거예요. 껍데기들이 유니폼 입고 공 쫓아다니면서 월드컵 8강이니 4강이니 하고 있어요. 전부 다 껍데기들이에요. 껍데기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남들한테 비교대상이 안되거든요. 비교대상이 안되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협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미투? 미투 백날 해봐라. 

협박받을 필요 없어요. 누구로부터도. “아버지! 갖고 계신 돈 나에게 지금 투자 안하면 나중에 아버지 안 모십니다.” 자식들이 협박하더라도. 그런 자식들은 우리 교회에는 없다 치고요. 없으니까 제가 맘껏 이야기합니다만 “아버지, 이번에 투자하는데 돈 좀 필요하니 주세요. 안 주면 나중에 아버지 연세 많아졌을 때 안 모십니다.” 이렇게 협박받을 필요 없어요.

맛있는 거 다 사먹고 갈 거니까. 세상 누구한테도 협박받지 않는 것, 이걸 오늘 본문에서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실체가 있어야 협박을 받지요. “너 안 그러면 죽는다.” 이미 죽은 놈에게 죽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북한 핵폭탄 서울에 두 방 떨어져서 사람들 죽고 대구에도 떨어지면 큰일 나지. 안되지. 빨리 라면 사놔야 되는데.’

북한이 핵 쏜다고 할 때 라면 동났잖아요. 죽은 놈한테 핵폭탄이 무슨 협박이 됩니까? “쌍용차 직원들 억울하게 쫓겨났으니까 데모하자.” 데모를 왜 합니까, 죽은 놈이? 죽은 놈이 무슨 데모를 해요? 광화문에서. 시사평론? 간단해요. 껍데기입니다. 전부다. 

껍데기에 말려들었고 껍데기에 현혹되었습니다. 지난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유혹받는 존재라고. 유혹을 왜 받아요. 창세기 3장의 인간이니까. 죽어가면서도 살려는 억지를 부립니다. 모든 것이 억지에요, 억지. 뭔가 쫓겨요. 물론 불편한 것은 인정합시다. 불편하지만 재미있어요. 

‘재미있다’의 반대말이 뭐냐? 두렵다, 무섭다, 입니다. 교회 와서 기도 빡세게 하고, 십일조 하고, 왜 그런 짓 합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무섭다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 힘 없이는 못사니까, 더 살려고 하니까 무섭다는 거예요. 누가 살아야 되는데? 내가 살아야 되는데.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영의 대변자에요. 

악마는 없어요. 없는데 나 자체가 악마의 있음을 티내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 그동안 어떻게 해왔습니까? 재밌게 해야 돼요. 재밌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교회 장로 뽑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또 누굴 밟아 죽이려고.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나 할 때는 자기 편하려고 행동해요. 장로 왜 뽑는가? 자기는 대표기도 안하려고. 자기는 편하게 천당 가려고. 주께서 주신 각자의 몫이 있어요. 그 기능은, 너는 종의 멍에에서, 율법이라는 것, 법이라는 것, 파스칼의 원리로 누르는 그 법이 너무 힘드니까 그 법을 지켜서 천국까지 뚫어내겠다는 거예요.

교회가 시키는 대로 다 해가지고 나 이만큼 의롭고 이만큼 착했으니까 천당 가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의 소리에요. 그 악마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서기관들이 주동해서. 그 짓을 교회가 똑같이 또 하고 있어요, 지금. 소비자만족이에요? 그런 거예요? 고객만족입니까?

벌벌 떨면서 오는 그들에게 더욱 더 종의 멍에를 짐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교회 오면 복 주겠지. 그 복이라는 용어를 바꾸면 간단해요. 교회 오면 돈 주겠지. 기도하면 부자 되게 해주겠지. 그런 말이거든요. 부자 왜 되려고 합니까?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기능 때문에 잠자지를 못해요. 지금 잠에 가까운 분들도 계시기는 한데 젊은 사람들은 좀 멀고요. 잘 때 푹 자도록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세요. 불편함은 감수하시되 재밌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게 재미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십자가로만,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니까, 율법의 완성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그것이 성도에게는, 성도는 죽은 자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기능으로 주어져요. 부활의 성령을 통해서 기능이 주어지면 성도만이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라는 것을, 그 경계선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은 육신을 주신 겁니다. 

이 땅에 왜 사느냐? 어딜 가도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경계선상을 표출하라고 이 땅에 온 거예요. 그것도 느긋하게. 아무 걱정 없이. 구원받은 자의 여유, 그런 식으로. 천국 가는 자의 여유, 영생 받은 자의 여유를 가지고 “너희들 율법 하나라도 어기면 다 지옥가는거야.” 이렇게 마음 놓고 외칠 수 있는 그런 느긋함, 그런 자유, 우리에게 자유를 언급하는 거예요.

뭘 하라고? 종의 멍에를 악마에 의해서 짊어지고 있다는 그 현실을 똑바로 증거 하라고. 자유인 입장에서. ‘고생해라.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서 고생해라. 백날 행해봐라. 천당 가는가.’ 이렇게 느긋한 마음에서 그걸 외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자에요. 죽었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 그 양심마저 주님께 넘겨줘 버려요. “주님께서 알아서 양심의 내용물을 채워주옵소서.” 그 내용물이 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내용물들 있잖아요.

그 기능이 우리를 가지고 파스칼의 원리, 이 모든 지역에서 캐나다, 미국, 한국, 어떤 지역에서도 똑같은 주님의 작용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주의 증인이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을 노리고 어떤 의식을 가지고 교회 나왔습니까? 주께서 하신 일의 내용은 모르고 내 승부욕, 내 욕망으로 얻어진 내 뜻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엉터리 같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십자가를 통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사살 시켜주옵시고 우리 빈자리에 주님의 말씀의 기능과 성령의 일만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