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 살수록 복음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믿을 것이 못 됐었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뿐이다. 이 고백은, 그럼 그동안 복음을 내가 믿을 수 있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인한 만남은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고, 그 인식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한다. 그 선택은 늘 자기정당성, 자기변명, 자기합리화, 자기존재증명, 자기안정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세운다. 그것은 곧, 뭘 해도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줄 모른다.
이미 만들어진 필드에 인간은 그냥 던져진 존재였던가.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거기에 순응하며 그 환경에 적응하며 그냥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환경에 살면서 덧붙여져서 일어나는 외부의 변화에 끌려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괴물이 숨어 있었다. 화려하게 펼쳐져있는 변화의 힘이 나를 지배하고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나라는 괴물은 자기를 위한 힘으로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선택당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택을. 외부가 나를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외부의 장악을 역으로 이용해서 나의 정당성을 위한 판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무도, 자기정당성이 없는 자는 없다. 세상이, 사회가, 환경이, 남들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둘러 댈 수 없다. 왜?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밖에 모르도록 선택하게 만든 이 괴물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 괴물을, 배후에서 누가 보살펴주고 있고 누가 돌봐주고 있고 누가 먹여살려주고 있고 누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인가? 바로 사탄이다. 사탄의 출처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대로 저주받은 뱀이다. 뱀은 이미 정해진 대로 자기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들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야만 한다. 뒤에 숨어서 자기를 위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도록 해야 한다. 행복을 찾도록 해야 한다. 사랑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인류애, 인권을 주장해야 한다. 인류의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유혹이었다. 이제 더 이상 생명나무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끝을 맺는 것이다. 사탄은 정면에 나서지 않고 인간을 앞장세워서 자기의 앞잡이 노릇을 철저히 하도록 하는 이유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기필코 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여자의 후손을 겨냥한 액션들이었고 여자의 후손이 한 일, 십자가를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땅뿐이었다. 하늘을 살피는 것은 단지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을 것이라는 날씨분별이나 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잘 살고 누가 잘 못살았는지, 누가 잘 되고 누가 잘 못됐는지, 누가 성공했고 누가 실패했는지, 누가 영광을 얻었고 누가 수치를 얻었는지, 누구 집안이 번창했고 누구 집안이 몰락했는지... 땅의 일들은 하루만 지나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고 정보마당에 쫙 깔린다. 그러나 비교하고 재고 따지고 판단하는 이 모든 일들은 땅에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하늘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니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별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그냥 저주받으라고 주신 말씀인 것을(마16:3-4), 그 누가 알랴!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닌 것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늘은 그냥 하늘이요, 우주는 그냥 우주일 뿐이었다. 다 나 좋아라고 만든 우주만물이다. 내가 없는 이 세상은 끝난 세상이고, 내가 있는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여부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또는 이미 죽은 자들이라고 하게 되면, 그리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미쳤거나 돌았거나 둘 중 하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한 발짝도 내딛을 수도 없고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복음의 경계에 서 있다. 이쪽으로 가면 살고 저쪽으로 가면 죽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쪽으로 가도 죽고 저쪽으로 가도 죽는다. 결국 죽음만이 이 경계의 완성이었다. 죽음만이 위로 올라가게 한다. 예수님이 그어놓은 십자가사건은 우리를 죽여서 하늘로 올리는 것이지 땅에서 살게 하지 않는다. 이 땅마저 우리를 토해내고 저주를 내뿜는다. 모든 게 흐릿했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었다. 전 인류, 아담의 후손들에게 죽음만은 비켜갈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아무리 착해도... 다 죽는다. 아무리 좋은 데 갈 거라는 위로도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지, 죽은 후에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감춰놓고 시작한 삶이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했고, 뱀(사탄)은 결코 너희들이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죽음이 이겼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뱀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기에, 아담의 후손들은 여전히 살아있음에 죽음이 무서워 일생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한 죽음만 보인다. 이 죽음이 모든 인류를 두 부류로 갈라지게 한다. 여자의 후손의 죽음에 속하였는지... 뱀의 후손의 죽음에 속하였는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는 이 말씀이, 왜 타락한 인간에게 당연한 말씀이 되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유발하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죄를 지었으면 벌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만은 살아야 한다는 정당성 때문일 것이다. 이 정당성은 뱀(사탄)이 심어준 것이고, 심겨진 대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뱀의 후손이고, 뱀과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멸망당해야 하는 피조물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은 먼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셨다. 아마도 어쩌면 생명이셨기에 죽음은 전제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 심어진 생명나무가 이 땅에 선악과나무로 심기셨다. 이미 심어져있는 선악과나무들을 뽑으려고 심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갈이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흙갈이를 하시는 것이다. 땅이 이미 죄로 물들었기에 죄로 물든 땅에 그 무엇을 심어도 죄만 생산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악체계가 형성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긴 그 잣대, 모든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정죄하시는 것이다(골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으면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예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시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롬11:36).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사탄의 대가리를 쳐서 영원한 둘째 사망, 지옥의 불못(계21:8)으로 던져버리는 유일한 원천이시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사탄의 앞잡이가 된 인간의 손에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했던 그 죽음이, 그 십자가만이 사탄을 쳐부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은... 아니, 알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몰라야 했다. 감춰진 비밀이었다. 비밀은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의 창세전의 약속이셨으니까. 사탄이나 인간은 이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반드시 들러리를 서줘야 한다. 한편의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어야 하는지 그 이유의 정당성을 밝혀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물밑 작업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약속의 땅에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 안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졌다. 언약대로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복을 받고, 약속의 땅에서는 일절 전쟁이 없이 평안한 가운데 솔로몬 제국의 안연함처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그 말씀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언약의 모형으로서 밑에 깔아놓는 당연한 작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찌하여 이 땅에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고 강대국의 압제로 인한 슬픔과 배고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이 멈추지를 않았던 것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나라에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 죽음의 검은 그림자만이 음산하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들에게 일방적인 특권으로 준 율법과 제사는 오히려 그들의 악마적인 본성을 과감 없이 드러나게 했다. 곧 자기 의를 쌓는데 그것들을 소유화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정신, 희생정신은 읽어낼 줄 몰랐다. 죄 지은 당사자 대신 제물이 왜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하는지, 제사의 본질을 파헤칠 줄 몰랐다. 단지 율법 지켜서 솔로몬 제국처럼 강대국이 된다는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그것에만 눈이 어두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외식적인 제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복은 복대로 챙기고, 죄값은 그냥 웃어넘기고, 선지자들이 주는 거짓평안에 오히려 안도감을 얻고, 어찌되었든지 잘 살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때가 되어 드리워졌던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살아서 덮쳐왔다. 다 죽이고자 작정하고 부른 나라였다.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모든 나라를 다 멸망시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모든 나라는 아들의 나라만이 영원한 나라임을 밝혀주는 수단이었고 도구로 사용된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율법이다. 성경말씀, 구절구절마다 적셔있는 예수님의 피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제물의 죽음은 그냥 제물의 죽음이었다. 어차피 제물의 죽음이 나 대신의 죽음이었다는 것으로 연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다 꺼져도 결코 꺼질 수 없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 등불이 홀로 타고 있었다. 다윗의 등불이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만 되는 예수님을 위하여 다윗만은 알게 하셨다. 주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시51:17). 희생이 없이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우리아의 꺾어진 뼈로 인한 용서였음을. 다윗 자신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의 죽음이 곧 자기를 살렸음을.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내용이었다. 이 다윗 언약의 실체로 오신 분, 예수님만이 언약의 주인공이셨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예수님의 긴긴 모형이었던 그들의 죽음과 희생은 실체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만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편51:5).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 고백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으며, 무엇을 구하였으며,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을 주기를 바랐는가?”라고 예수님이 물으신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며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제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마실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마실 수 없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실상을 아셨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망함이 아닌 성공을 보려고 나갔으며, 돈을 구하였으며, 힘을 기대했으며, 천국주기를 바랐습니다.’라는 그 속마음을. 예수님은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이라는 말조차도 거론될 수 없는, 땅의 영역을 넘어선 하늘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천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죽고 떠나야 너희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갈 수 없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를 마시고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먹을 수 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힐 수 없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밑도 끝도 없이 쏟아 붓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뭘 기대했을까? 여자와 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 뭘 기대했을까? 영웅이 되고 싶었나?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 내가 싸워 이겨서 내 잘남을 간증하는 싸움이 아니다.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이다. 예수님 외 사탄과 모든 인간이다. 우리는 사탄 편에 속하여 열심히 포탄 날라주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와주기는커녕 예수를 믿는다고? 예수를? 성령이 오셔서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성령님과 나는 한패 먹고 함께 거룩한 일을 한다는 취지아래, 말씀대로 산다는 이것이 개혁주의신앙의 본질이었다. 유대종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말씀 지켜서 복 받겠다는 그 심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 빼고 다 시체다. 유대교 지도자들보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그 원천을 드러냈을 때 예수님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죄질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오늘날 유대인들이고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들이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를 사탄이나 인간이 바라기라도 했던가? 지금이 좋을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 사탄과 한 통속이 되어서 자기정당성, 자기존재증명, 자기합리화, 자기 안정성이나 바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 바라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에서 손 털고 떠난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힘의 동원이 없이는 안 된다. 붙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뿐인데... 왜 주님께서 사탄을 대결자로 삼으셔야 했었나?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면서 자기중심으로 선택하고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서 모든 환경들을 역으로 이용했던, 그 세력을 무산시켜서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죽음의 실체를 눈앞에 밝히 보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탄이 무엇을 감추고 속였는지를 똑똑하게 목도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탄이나 사탄이 후손들이 바라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로운 피조물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살면 살수록 복음은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와서 그냥 끌고 가는 것이었고, 아무것도 모르게 그냥 보쌈해서 가는 것이었고, 복음은 그 무엇에게도 주님의 택한 백성을, 성도를, 교회를 양보하지 않으심만을 고백하도록 하신다. 죽음이 그냥 죽음이었던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