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에서 아깝게도 받침 하나 틀려서 비켜간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동그라마를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모를 쳐준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하면 세모를 쳤을 망정 그것은 동그라미가 될 수 없는, 정답이 아닌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가짜라는 것을 숨길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욥의 실체로 오신 분 때문이다.
내가 만든 십자가라는 우상은 폭파되어야 한다.
내가 예상하고 생각했던, 이미 점쳐 놓은 고난은 내 주체를 깨부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주체를 견고하게 세워나갈 뿐이었다.
이유없이 찾아든 낯선 고난.....만이
내 주체를 부수고 내가 만든 십자가도 부순다.
매일 같이 가짜 인생을 살면서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진짜처럼 행세했던 그 인생을......
주님은 우리에게 정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셨음에도
우리는 정답을 내놓을려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쥐어짜고 애를 썼다.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인생은
낯선 고난이 찾아와야만 했는데......
이것이 없는 정답은 가짜였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우리가 내놓는 정답은 정답이 될 수 없었다.
딱 한 사람만이 정답을 내놓을 수 있으시다.
그 한 사람은 "하나님께 지목당한 사람" 이다.
그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만이 낯선 고난의 피해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짜였다.
나 대신 죽으신 그 분이 내 안에서 내놓으시는 그것만이 정답이다.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말하고 있고 정답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다. 중독이다.
우리는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오직 정답은 그 분만이
예수님만이 아시고 말씀하시고 사신 분이시다.
우리는 다만 정답을 내놓는 분의 도구일 뿐이다.
정답이라는 것은 한 가지이지 두 가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수 천가지, 수 만가지의 정답이 존재하고 있다.
그 정답 속에는 각자의 주체가 들어 있는데 그 정답을 가지고 들이대기 때문이다.
주체를 깨어지게 하는, 낯선 고난이 찾아들기 전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처럼 아주 은혜스럽게 정답처럼 말할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만들어낸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와 상관 없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낯선 고난을 이유없이 베푸셔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그런 하나님을 소유한 고정된 주체를 가지고 그 관념 안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며
언약 때문에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죽으신 그 분의 죽음앞에서는 관람자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영혼의 평화를 깨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자기만의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좋은 것이 좋다라는 식으로 좋게 좋게 살고 싶어한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령께서는 우리를
나라는 주체를 깨부수고 예수님만이 주체가 되셔서
관람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의 고난의 길로 가게 만드신다.
그리스도께서 주체가 되셔서 끌고 가시는 인생앞에는 이유를 댈 수 없다.
이유없는 반항만이 오늘도 있을 뿐이다.
예수님 오직 한 분 만이 지신 십자가라는 트랙터가 다 깔고 지나가면 자기 정당성을 숨겨두고 자기 관리를 하려고 했던 본색,
"왜 하필이면 나에게....."가 한없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분이 들고 찾아 오신 낯선 고난으로 나라는 주체가,
내가 만든 십자가가 해체되고 폭파되어지는 작업이 매일 같이 이루어지기만을.......하소연 한다.
강사로 수고해 주신 이근호 목사님. 말씀을 준비하시면서 "왜 하필 나에게" 라는 이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질 수 밖에 없지 않으셨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만큼 욥기 강해를 명쾌하게 선포해 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밑바탕에는 엄청나게 수고해 주신 분들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