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6장 9절(부재)1801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7절부터 한번 보겠어요.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이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떠나가시는 분이 떠나가시는 분이 우리한테 오신다. 떠나가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겁니다. 세상을 벗어나게 해줄까? 라는 뜻이예요. 세상은 못 벗어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꼭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결국은 구원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그런데 문제는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가 모른다는 거예요. 세상을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기 싫어해요. 우리 자신이. 여기서 잘되기를 바라죠. 6절에 보면 5절도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뭔가 약간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떠나버립니다.
떠난 그 자리가 무슨 자리이냐 하면은 부재의 자리. 오늘 제목이 될 가능성이 후보감인데 부재의 자리. 부재, 존재하지 않는 것, 없는 것. 없는 존재. 부재의 자리. 부재의 자리를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여기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까 함께 있을때는 이건 존재이지요.
존재인데 함께 있다가 떠나버리면 이 존재의 자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존재하지 않는 자리, 이걸 이제 부재의 자리가 되어 버려요. 제자들 가운데 먼저 부재의 자리를 만들어 버립니다. 부재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까?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그러면 보혜사가 오게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만든 이 부재의 자리가 곧 너희의 자리로 내가 해주께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땅에서 떠나서 떠나버리고 이 자리는 없는 자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이 올 때 그렇게 가능한겁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러한 주님의 취지에 우리가 기쁘게 ‘아이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하고 반기는 것만 남아 있어요. 반기는 것만.
그것을 반길려면 이 세상에서 어떤 미련이나 집착이 없어야 되죠. 없어야 될려면 시원하게 푹 떠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시원하게 해주는 방식이 바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 하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겁니다.
있을 자리가 아닌데 너 자꾸 거기에 버틸라고 하지 말란 말이죠. 니가 지금 버티고 있는 존재 자리가 니가 어떤 자리인줄 알아? 그거 하나님한테 책망받을 자리야. 그런데 인간들은 떠날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훌륭하게 되려고 자꾸해요. 훌륭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하게, 거룩하게, 훌륭하게. 여러분 훌륭하게 되는 것이 쉽습니까? 있는 자리에서 훌륭하게 되는 것이 쉬워요? 아니면 아예 떠나는 것이 쉽습니까? 떠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이죠. 슈퍼맨도 아니고 말이죠. 이 세상 놔두고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꾸 떠난다고 해도 제자들이 대꾸를 안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거든요. 왜 귀담아 듣지 않는가? 그들은 떠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라듯이 내가 간다고 해도 왜 너희들 가만 있는냐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어떤 관계냐 사랑하는 관계잖아요.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은 사랑이라하는 것은 뭘로 측정되느냐 하면은 부재 했을 때, 그 사람이 없을 때, 마음에 있는 아픔, 고통의 양이 곧 평소에 그 사람이 가졌던 사랑의 양입니다.
부부니까 한번 시험해봐도 되겠지요? 말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백날 할 필요 없어요. 예비군 훈련 한번 가보세요. 예비군 그거 합니까? 숙식, 합숙 해요? 잠을 부대에서 자요? 몇일 잡니까? 예비군 훈련. 한 3,4일? 2,3일. 2,3일 너무 짧다. 그럼 사랑이 측정 안되겠네.
하여튼 뭔가 없어지고 난뒤에 마음에 심하게 고통이 온다면 그것은 같이 있을 때 평소에 되게 사랑했다는 뜻이예요. 독감 걸려서 안나온다든지. 누가 없어질때에 아이고 없으면 안되는데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예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 제자들도 베드로 같은 경우에 주님을 사랑했잖아요. 끝까지 가겠습니다 라는 말은 사랑하고 있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이제 부재의 그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겁니다. 이 점을 여러분 잘 기억을 해야되요. 굉장히 어려워서 그러는 거예요.
어떤점이 어려우냐 하면은 자리가 없다는 것. 자리가 없을 때 한번 적어볼께요. 부재의 고통이 곧 뭐다? 사랑이다. 왜 그러냐 하면 누가 고통한다? 내가 누가 떠나버리면 내가 아프잖아요. 떠난 사람이 아픈게 아니고 내가 아파요. 어떤 빈자리가 아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내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구성해요. 남이 나를 구성했고 나는 그 구성으로 인하여 나는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나는 고통 당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타인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엄마예요. 엄마. 애들 보게되면 아빠는 별로예요. 아빠도 뭐 양육 휴가 받는다고 하잖아요. 글쎄 그 휴가 받아서 양육하는지 해외 놀러가는지 모르겠는데, 애는 엄마만 찾아요. 엄마만. 기본적으로 아직 갓난애는 엄마만 찾아요.
엄마가 없을 때 아부해서 아빠한테 하지만 엄마만 나타나면 아빠는 그냥 내쳐버립니다. 엄마한테 쪼로록 가버려요. 실제예요. 팩트입니다. 요새 늘 느끼고 있는거예요. 그냥 관찰하거든요.
엄마가 나를 만들었으면 나는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단독적, 독자적으로 사는게 아니예요. 타인의 흔적입니다. 타인의 흔적. 내가 있음으로서 나를 있게 한, 만들어 주신 또 나를 있게 한, 신체만 신체 덩어리만 있게 한 것이 아니고 나의 정신까지 있게한 이런 정신을 만들어서 내게 꾸역꾸역 집어넣어준 그분과 이렇게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떨어질수 없는 종속된 상태. 지금 인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 이야기 하는게 아니고 인간과 관계에서 마찬가지라니까 그걸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빠 엄마가 없으면 이 사람은 이 아빠 엄마를 대체할수 있는 뭐 고아원 원장이든 누구든지 하여튼 계속 인간은 단독적 독자적으로 살아가는게 아니예요.
심지어 자아가 형성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춘기 되면 혼자 큰소리 치지요? 그런데 막상 군대라도 가게 되면 엄마가 보고플 때~ 저기 앞에 계신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다만은 내가 나왔다고 인사말 한다고 우정의 무대라고 옛날에 했거든요. 뽀빠이 나와서 사회보는 거 있어요.
타인의 흔적이예요. 타인의 흔적. 남들이 나를 만들었어요. 나는 혼자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었다. 나는 이제 다 컷다 에헴하고 큰 소리 쳐도 막상 그 사람의 정신 대부분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자기를 낳게한 그 분을 의식해서 그 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조성된 겁니다.
그분의 눈치를 보면서 나를 만드신 분의 눈치를 보면서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 진거예요. 그래서 어떤 영향력을 누가 영향이 크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식구들 만약에 식구가 5명인데 5명 가운데 서로 지금 잘났다고 살아 가지만 이 중에서 누구하나 멀리 떠나버리면 또는 떠나든지 아프든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죽든지.
죽어버리면 가장 영향을 받은 쪽이 가장 많이 웁니다. 너무 아파서. 그러면 주로 시아버지 이렇게 돌아가시면 누가 우느냐 하면은 끝까지 시아버지에게 봉양했고 시아버지 가까이에서 근접해서 시아버지를 이렇게 돌봤던 그 맏며느리가 가장 많이 울어요. 안그러면 딸이 돌봤으면 딸이 울고.
왜그러냐 하면은 자기 일의 스케쥴 아버지가 이렇게 자기 스케쥴의 대부분이 뭘 의식하느냐 하면은 아버지가 시아버지가 아프다는 그것에 완전히 이렇게 젖어 들었거든요. 무슨일을 해도 친구 만나도 ‘빨리 집에 가야되.’ ‘왜?’ ‘우리 시아버지가 아파.’
모든 자기 인생의 스케쥴이 시아버지 아픈걸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그렇게 돌봤는데 떠나버리면 그렇게 나를 원망하고 나한테 행악질하고 똑바로 나를 돌보라고 그렇게 막 그릇 던지고 니가 며느리 값을 해! 욕은 욕대로 얻어 먹었는데 그 정이 굉장히 커요.
욕해주는 정이 굉장히 커요. 욕해주는 정이. 그러니까 씁쓸해서 우는 거예요.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 놓고 어른 혼자 가버리면 당신 때문에 나 정신병 걸리고 우울증 걸린걸 돌아가신 시아버지 당신이 책임 지겠어요!! 항의조로 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울어요. 그분의 인생이 자기를 많이 잠식했어. 많이 잠식한거예요.
지,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진도를 나가 봅시다. 좀 더 진도를 나가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걸 감당할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모든 개인은 그 사람을 둘러싼 타인에 의해서 결정난 타인의 존재다. 타인에게 종속된 존재다 라고 할수 있죠.
그러면 한 인간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오고 가고 가고 오고 오고 간 이것을 본인이 결정할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이 결정 못해요. 예를 들면 애가 한 12살이다. 12살인데 옛날에 저 어렸을적 12살쯤 됐을 때 이 집안에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 같이 대 가족 살았는데 할아버지 쪽에서 경상도 말로 뭐라 하냐 하면 기추라 하는 거예요. 기추. 기추란 말 들어봤어요?
경상도 말 쓰는 사람은 이것은 표준말이라 딱 오는데, 동호회. 또는 좀 약간 표준말 가까운게 뭐냐 계원. 지금 나 혼자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나? 기추 못 들어 봤지요? 계원. 옛날에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상조회가 있었어요. 동네끼리. 그걸 기추라 합니다. 이 상부상조 하는데 틈만나면 모여가지고 술 먹는 핑계대고 나이 많으니까 60 다 넘었으니까. 이 분들이 집에 온다 말이죠.
집에 오게 되면 한번 보세요. 12살 먹은 애가 집에 손님들 오거든요. 오면 거나하게 차려요. 끝나고 난뒤 남아 있는걸 누가 먼저 다 차지하느냐 지금 저 갈치 남은 걸 누가 먹느냐 지금 가족들 딱 있어요. 지금 삼촌들하고 조카들 경쟁자가 되어 가지고. 삼촌이 손 떼라~ 조카가 옴메 기죽어 이래 가지고 하거든요.
그런데 12살먹은 아이에게 그런 할아버지와 그런 친구들이 온다는 것은 이미 본인이 결정한게 아니 잖아요. 아니죠? 그러면 이 분들이 왔을 때 이 분들이 뭐냐? 이게 나에게 타인의 그룹을 타인그룹을 형성하는 겁니다.
나의 인생관 나의 정신관에는 이미 나보다 같이 인생을 살면서 선점한 성인들이 모두 활동과 움직임과 그들의 대화, 욕설, 문장 그리고 언어 이 모든 것이 쏙쏙 내안에 차곡차곡 다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조건을 내가 결정했습니까?
이걸 가지고 던져진 존재라고 하지요. 사르트르가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던져진 존재라 했거든요. 던져진 존재.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모르는게 있어요.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이미 형성된 환경속에 우리가 던져져서 그 자아가 일방적으로 외부영향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확증된다 이렇게만 이야기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예요.
왜 잘못된 생각이냐 하면은 사람이 물론 어린아이니까 자기 인생을 결정 못해요. 하지만 던져진 존재로 인하여 내가 그들에게 이런게 참 이 말이 어려워요. 그들이 일방적으로 100% 영향을 주는게 아니고 그들이 일단 영향을 주게 되면 나한테 무엇이 있어요.
이게 오늘 강의, 무엇이 있어서 받아들일건 받아 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서 그 손님이 나한테 왔을때는 나도 한바탕 그럴 일 없지만은 눈싸움 해가지고 쟤는 어린아이지만 말싸움 못하겠다 하고 이쪽에 변화를 유발 시킵니다. 변화를.
이 요소를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자꾸 빼먹어요. 우리 만났잖아요. 만나면 일방적으로 응응하고 다 받는 척들을 하고 받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 말할때는 내가 오히려 눈 앞에 나타났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영향력을 가미하게 되요.
영향력 가미해서 이쪽에 변화가 유발한 그것을 내가 도로 가지는 복잡하지요. 내가 도로 가지게 되요. ‘저 사람은 나한테 말 잘못해가지고 욕 얻어 먹더니 이제는 내 앞에서 풀 죽었네.’ 이러면 결국은 그 변화된 타인 변화된 타인이 주인공일까요? 내가 주인공 일까요?
둘 중에 누가 주인공 일까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보면 누가 주인공 입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뭐의 흔적이다? 타인의 흔적이니까 타인이 100% 주인공인것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100%는 아니다 이말이죠. 제말은. 100%는 아니고 서로 영향을 준다 이 말입니다.
정답은 둘중에 내가 주인공입니까? 저 사람이 주인공 이겠습니까? 라고 묻는데, 객관식 했는데 객관식이 잘못된 객관식이예요. 왜냐면 정답은 따로 있어요.
뭐가 정답이냐 하면은 행동이 주인공입니다. 행동. 그리고 행동에다가 뭘 붙이느냐? 뒤에다가 행동하는 자를 붙이면 이게 오류입니다. 이게 오류예요.
수련회 갔다 왔으니까 이 정도 어려운건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다 들었으니까. 사람이 제가 실험해 볼께요. 그냥 물 마시잖아요. 물 마실 때 이것은 물 마시는 행동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 물 어디갔지? 누가 마셨지?’ ‘내가 마셨어.’
물 마시는 행동하는 나를 행동에다가 집어 넣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게 죄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다가 나를 내가 했다고 그냥 편하게 갖다 붙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동이 나오게 해서 그 행동하는 주체자로 주인공으로 본인을 거론하는 이 잘못된 결합을 주님께서는 유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행동을 예수님이 행동을 유발하고 있었던 겁니다. 계속해서 유발하고.
예를 들면 이 말이 왜 근거가 있느냐 하면은 본디오빌라도가 왔을 때 본디오빌라도는 지금 방금 이 오류대로 해요. 예수님한테 뭐라하냐 하면은 당신은 나한테 잡혀있다. 나는 당신을 잡아 가두었다. 자, 내 말만 들으면 당신은 난 당신을 풀어줄수도 있고 계속 붙잡아 둘수도 있다.
자, 뭐가 잘못이예요? 남들 보기에 다 맞는 말이죠. 본디오빌라도가 재판장이니까. 이 사람 풀라고 하면 풀고, 죽이라 하면 죽일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뭐라고 했지요?
자, 붙잡아 둔다는 행동 행동에다가 누구를 갖다 붙였어요? 내가 붙잡아 둔다고 붙였지요? 그 다음에 풀어준다. 행동이죠? 누가 갖다 붙였습니까? 내가 알아서 풀어주면 풀어준다 했지요.
자, 이 이야기 할 때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다고요. 진리가 무엇이냐? 오류 아닌게 무엇이냐? 오류와 상관없는게 무엇이냐 물었잖아요. 빌라도가 예수님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 했어요. 예수님께서 아무 소리 안했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냐 하면은 니가 하는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버리면 얼마든지 풀수도 있고 더 맬수 도 있거늘 천사 소관이다. 이 행동에다가 붙일걸 붙여야지 엉뚱한 것을 붙였다 이 인간아! 다시 말해서 니가 나를 붙잡아 두지만 내가 갑이고 너는 을이야 이런 뜻이예요. 이게 진리예요. 진리.
많은 그 유투브에 동영상 보면 목사님들 강의 하는거 많이 나와요. 그런거 어떤때는 어떻게 강의 하는가 싶어서 기대는 안합니다만은 혹시나 싶어서 들어봐요. 들어보게되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지식이 나와요. 지식이.
그러면 교인들 지식 받아 적기 바빠요. 자, 지식을 주는 곳에 갔다. 지금까지 강의 한 것 그대로 적용해보면 나는 어떤 모임에 갔다. 모임에 갔을 때 나라는 인간은 외부에서 뭔가 와야 나를 채운다. 이런 사고방식이 죄라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다들. 어떤 정보가 있으면 그 정보를 얻는 이유가 생활에 편리하기 위해서. 왜 편리하냐 하면 편리해야 행복하니까 편하니까. 편리하면 편하고 편한 것은 행복이고. 어순이 빨갛다 빨간것은 사과 나오지요. 그것하고 마찬가지예요.
편리한 것은 행복이고 그 다음에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는게 아니고 나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잖아요. 나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타인이라니까요. 예수님은 타인이거든요. 예수 아니라도 내게 필요한 타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사르트르가 오류가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던져진 존재다. 일방적으로 어릴 때부터 키웠으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뭐가 부족하다 했지요? 그 외부의 환경을 예예하고 삭삭 비는게 아니예요. 자아가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쪽의 평가를 내가 이용한다니까요.
그 이용할 때 제가 무슨 표현을 했냐 하면 이걸 했다고. 퀘스천 마크로 했어요. 인간의 자아성에 무슨 괴물이 있기에 분명히 어릴 때 부터 부모가 다 키웠는데 좀 크면은 그 다음에 부모를 순응하는 척을 하면서 용돈주니까 척을 하면서 나중에 실제는 뭡니까? 부모를 이용하겠다는 그 심보. 누구야 너!
그 심보 어디서 나온 심보예요? 철학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 심보가. 어디서 저 더러운 심보가 어디서 나왔느냐 말입니다. 형제간에 부모가 분명히 이야기 했을 거예요. 형제간에는 친하게 지낸다. 그 부모가 아담과 하와라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자식은 누구겠어요? 가인과 아벨이죠.
얘~ 너희들 싸워 이러진 않았을거 아닙니까. 친하게 지내라 할거란 이말이죠. 그럼 친하게 지내라 싹싹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르트르에 이론에 의하면 늘 친하게 지내야 되요. 왜? 내가 내 속에 외부의 것이 그냥 들어왔으니까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자 했는데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너 뭐야? 가인아 니 속에 뭐야? 니 속에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을 시기나서 죽이게 한 니가 그 괴물이 가인이냐? 아니면 그 껍데기에 불과한 니가 가인이야? 어느쪽이 너야? 묻는다면 가인이 뭐라고 하겠어요?
나도 몰라요. 내가 왜 그런짓을 했는지 나는 동생 안 미워했는데 욱하는 성질에 죽이고 싶었습니다. 내 속에 괴물이 누군지 나도 몰라요 하잖아요. 그게 나온다고 그게 성경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죄라고 해요. 죄. 그걸 죄라고 하는데 죄가 신약에 오면 인격이 됩니다. 사단이 되요.
그래서 제가 설교하면서 인간은 강의하면서 인간은 사단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대리자. 왜 사단을 구태여 언급해야 되느냐 하면은 사단을 언급하지 아니하면 예수그리스도가 가짜 예수그리스도가 통용되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예수그리스도는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은 사단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하고 상대하는 분이 예수인줄 알고 있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이 오시면 나를 천국 보내주기 때문에 주님한테 아부를 해야될게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 교회 목사님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단아 오너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까? 예? 여러분들이 기도해야되고, 헌금해야되고, 선교해야되고 이렇게 하지요?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이야기 하지요?
그러면 이 말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지금 목사는 지금 누구하고 맺어주는 거예요? 나하고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맺어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경에 맞느냐 말이죠? 그게. 성경에 맞던가요?
오늘 강의한 그 원리를 다시한번 응용해 봅시다.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지금 기존 교회 목사들이 뭐냐하면은 인간들 있고 외부에 예수님이 계시다. 인간들은 예수님한테 주는 대로 받아서 구원받으면 된다 이 논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뭘 시켰다? 우리에게 행동, 행위가 일어나게 했다 이 말이죠. 모든 사항이. 그러면 우리는 뭐 하면 되요? 행동 플러스 뭐 하는 자? 이 행동을 하는 주인공. 주인공을 갖다 붙여 버리면 우리는 이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거죠.
이 행동 가운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행동을 누가? 내가 주인공 돼서 내가 믿어 버리면 누가 구원 받는다? 내가 구원받으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기존의 모든 교회가. 이천년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지금도.
개혁주의 신학말고도 아닌 신학이 있던가요? 전부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사람보고 이야기 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던가요? 왜 베드로로 하여금 부인하게 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게 하도록 베드로가 그렇게 하도록 주님께서 허용한 이유가 뭐예요?
12제자 다 떠나게 하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뭡니까?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해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누구하고 상대하게 되 있어요? 여자의 후손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사탄하고 상대하죠. 사탄하고 악마하고 상대하잖아요. 그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왜 인간보고 닦달냅니까? 세상을 떠나라고요? 신발 신고 팔짝팔짝 뛰어 볼까요? 떠나는가? 예?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라 할 때 니고데모가 뭐라고 했습니까? 얼마나 니고데모가 솔직한 사람이예요?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납니까? 라고 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아니야 아니야 그건 육이야. 그건 니 인간이 니 행위를 조장하는거야. 아니야 육은 육이야. 영으로 와서 영으로 간다면 그러면 거기서 누구는 손떼라? 육 너는 니 구원에 대해서 니가 손 떼라는 말입니까? 적극 가담하라는 말입니까? 손을 떼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 진짜 얼마나 쉬워요. 이 쉬운 이야기를 이만큼 오래 걸렸어요. 얼마나 쉬운 이야기이고 간단하고 단순 어떻게 보면 단순 무식해 보이는 이야기 입니까. 굉장히 쉽지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누구를 개입해요?
본인을 거기다가 육인 본인을 거기에다가 개입시키는 거예요. 본인의 구원과 미래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본인이 거기에 나서서 자기한테 개입할려고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어두움은 빛이 될수 없어요. 어두움은.
그럼 어떻게 되요? 어두움이 더욱더 어둠으로 짙어져야 되요. 손대도 소용 없다는 것.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육으로 되지 않고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죠?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세요. 육으로 나지 않고 혈통으로 나지 아니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말씀 1장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거부하는 이유가 건성건성 넘어가는 이유가 평소의 모든 버릇이 일생의 버릇이 내 일은 누가 해야되요? 내 일은 내가 담당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사탄의 대리자 사탄이 그런 본성을 갖고 있어서 그래요.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기죽기 싫어하는게 사탄이예요.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시도해가지고 반항하는 것이 악마입니다. 그 악마의 정신이 아담이 범죄하고 난뒤에 악마의 정신이 고스란히 그 아담에게 전달되어 가지고 아담이 하는 툭 건들면 나오는 행세가 뭐? 뭐 할까요? 뭐 어떻게 합니까?
대상포진 왔는데 걸렸는데 뭐 했어요? 한 것 없지요? 대상포진은 그냥 온거예요. 그냥 왔어요. 지금껏 이 회사에서 7년동안 그냥 가락모임 한겁니다. 그 자리 내 준 집사님이 정신 나간거죠. 그냥 하다보니 7년 됬어요. 처음에 7년 할 마음도 없었어요.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거예요. 이제는 광고시간입니다. 가락모임이 옮겨 가지고 어디서 한다? 이름도 강남모임으로 바꾸고 장소 이야기해보세요. 서울시 강남 대치동 한티역 2번출구 그 다음 상세한 것은 올리테고 시간도 7시 반이 아니고 7시. 이것도 정신없이 이리로 옮겨간거예요. 정신없이.
자, 이 복잡한 문제를 간단게 어떻게 해결할수 있는 문장같은 것 맨트 같은 것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이 긴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맨트 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행위는 죽음으로 쏠리도록 일어난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하는 모든 일을 다 어디서 쫓아가느냐 하면은 올챙이가 어미 따라서 정신없이 막 눈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한쪽 방향을 향해 막 가지요. 예? 마치 그 정자가 난자를 향해 막 헤엄치듯이 한쪽으로 정신없이 가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들요. 선행학습 같은 것, 중국 여행가는 것, 추석날 친구들 모여서 노래방 가는 것, 노래방에 왜 가겠습니까? 죽을라고 가는 거예요. 이 모임 왜 있습니까? 우리 이 모임 왜 합니까? 죽을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그 매듭이 있어요. 매듭. 다 각양 나오는 모든 실들이 한 묶음이 되어서 하나의 매듭인데, 그 매듭이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교회 20년 다녔나? 죽을라고 다닌거예요. 십일조 했어요. 그거 죽을라고 한거예요. 인간이 고아원 방문하고 이태석 신부는 어디갔어요? 에디오피아 가가지고 울지마 톤즈인가? 그래서 자신은 무슨 암 걸렸더라? 대장암인가 걸려 가지고 나이 얼마 안됬는데 죽고 했지요.
에디오피아인가? 수단인가? 수단에 왜 갔습니까? 죽을려고 갔지요. 죽을려고. 너는 그 죄를 지어서 죽어야되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거예요. 하나님 모든 인간을 이미 죽음으로 확정시킨 겁니다. 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사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사탄의 대리자라는 그 사실을 사탄에 의해서 이게 감추어 져서 사탄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사탄에 의해서 이게 억지로 감추어져 가지고 뭐라고 했냐하면 악마의 자식들이 하는 짓 있잖아요. 악마의 자식들이 한 짓이 있어요.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 받고 경건하게 되고 착하게 되고 순종 못하면 지옥간다. 그것이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생각만이 아니예요.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는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 했잖아요. 유대인들은 모든 인류의 저주를 대표한다고요.
그들은 할례받아 복 받는다고 생각한거예요. 할례가 저주인데. 잠재된 저주가 밖으로 튀어 나오면 그 할례 지켰다는 그것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살해할 때 드디어 등장한 죄의 절정이예요. 죄는 뭐 간음 살인 그게 죄가 아니고 메시아를 부정하면 그게 저주예요.
요한복음 3장에서 아들이 없으면 뭐라고요? 저주예요. 이제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쁜짓을 해도 아들이 있으면 아들과 묶여져 있으면 그게 의로움이예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간단한 것을 지식으로 들으면 안되요.
요새 등장하는 유투브처럼 지식으로 들으면 안되고 뭐냐 하면은 자꾸 이렇게 복음이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는 갈수록 납득이 안되게 만들어요.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는. 성령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을려고 왔다가도 결국 견뎌낼수가 없습니다.
얼추 따라왔다 싶은데 아 도저히 못 참겠다. 헌금마저 죄라는 것은 못 참겠다. 교회의 목회도 죄라는 것은 이건 도저히 참을수 없노라. 해가지고 거의 왔는데 2m만 가면 되는데 뒤로 바꾸해가지고 가는데 얼마나 빨리 가는지 뒤에 고무줄 달렸어. 후딱 가버려요.
가면서 하는 소리가 있지요. 이 세상에 신학이 여러가지인데 이근호 신학만이 다가 아니다. 내가 뭐라고 했나요? 내가 피 이야기 했는데 이근호 신학이 왜 나옵니까? 예수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이게 로마서 3장 10절인가 나오는 말씀아닙니까? 거기다 뭘 더 보탭니까? 뭐 보탤게 있어요?
목회는 의로워야지. 자꾸 찬양은 의로워야지. 이런소리 한다는 자체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어떤 자기 행위에 대해서 계속 주인으로 본인을 뒤에다가 나는 덧붙이면 살고 있습니다 라고 티를 내는 겁니다. ‘하나님, 이것은 나쁜짓이니까 안하겠습니다.’ 그거 안해도 죽고요 안하는것도 죄고 죽고, 해도 죽어요.
그러니까 방법은 막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막 사는 것 밖에 없어요. 육의 한 짓은 뭘 해도 막 사는 겁니다. 그동안 집사님 막 산 걸 감사합니다. 막 산거 밖에 없어요. 막 산다는 말은 행동에서 자기가 행동을 한 나 라는 것을 애초부터 붙을 자격이 안됨을 한꺼번에 일러서 하는 말이 어떤일을 해놓고 ‘나는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나는 막 살았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거 할때는 아주 정신차려서 단디! 경상도 말로 단디, 아주 제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막 살았으니까 이게 아니라 전부 everybody 모든게 막 살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내놔야되요. 고백을.
자, 지금까지 한 것을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의 약속대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갑자기 거기에다가 사탄을 집어 넣어 버려요.
니가 지금 너 정신 없구나. 사탄이 너를 지금 삼킬려고 달려드는지 모르지? 내가 기도 안했으면 너는 진작에 떨어져 나갔어. 사탄이 베드로 너를 노리고 달려 드는데 내가 기도해서 사탄아 그만해라. 그만. 그정도. 그정도 까지만 해야지 내가 말렸더니만 니가 나중에 구원되는 거야.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니가 나를 세 번씩 부인할거라는 그 대목, 누가복음 그 대목 앞에 나오는 그 말씀이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까?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주일날 그런 소리 했잖아요. 병 안아픈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고 아픈게 정상이라고요.
왜냐하면 막 살아놓고 건강하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희생 덕분입니다. 주께서 개차반같은 인간에게 건강하게 해주시는 것은 주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이 봐줘서 건강한것이지 아픈 사람보다 더 착해서 그런거 아닙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몇 명 죽었습니까? 18명인가 죽었지요? 죽었을 때 제자들이 막 긴급재난 문자 보내면서 지금 지금 망대 무너져 18명 죽었다. 망대 주의해라. 지진 주의해라 하는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회개치 않는 자는 그와 같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니가 잘나서 안 죽은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발 너 주제 파악 사태 파악좀 못하나? 이런 뜻이라는 겁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주님은 사탄하고 상대한다. 영은 영끼리 상대하지 육은 나가 놀아라 해가지고 그건 내보내 버립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사탄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보고 이야기 한다는 거예요.
나를 믿어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지금 그 언어를 누구한테 지금 던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보고 던지거든요. 인간보고 던지니까 우리는 지식으로 받아가지고 예 순종하겠습니다. 그럼 천당은 보장 하는거죠? 이런게 자동적으로 나왔잖아요.
그러면 사탄보고 이야기 하지 왜 우리보고 이야기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 알려면 마태복음 12장 한번 봅시다. 지금 목사님 당신 이론이 맞다면 우리보고 한 이야기가 뭐냐 이렇게 되겠지요?
마태복음 12장 31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아 참 아까 광고 잊어 버렸다. 다음 모임은 2월 6일 화요일 7시. 뭐 할거 해야지 집중이 안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쉽게 말해서 영원히 용서 없다 이 말이거든요. 아~ 이게 도대체 뭐냐 이 말이죠.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아요. 예수를 거역하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들은 복음이 그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보면 인자를 거역해도 구원 받는다 이야기거든요. 거역해도. 단 뭐다? 성령을 거역하게 되면 구원 못 받는다 이야기입니다. 이거 설명 필요합니다. 이거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할께요.
있음의 존재의 판입니다. 존재의 판에 부재의 자리를 빵꾸를 내요. 구멍을 내요. 이 부재가왜 부재라 하냐 하면 여기 같이 계시다가 빠져버려요. 빠져 버리고 아버지께로 가버립니다. 아버지께로. 아버지께로 가 버리면 여기 부재가 있지요. 부재.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니까 나도 존재하고 예수님도 존재했다 이 말이예요. 존재, 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렇지 않습니다.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재, 없어지심 이걸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왜? 있음을 믿어 버리면 어떤 사고방식에서 믿게 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있음으로 평가하는 그 있음으로 작용하는 그 기준 가지고 예수님을 있음으로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버리는 거예요.
그러한 잘못된 예가 뭐냐 하면은 흔히 돈주고 파는 기독교 가정에 유통되는 그 사진이 있어요. 중국에 어떤 사진기자가 말타고 가다가 우연히 찍었는데 보니까 눈만 찍었어요. 집에가서 가만히 거꾸로 보니까 거기에 예수님의 수염난 모습니다 말이예요.
그 밑에 해 놓고 그 밑에 있는 거예요. 밥상에 밥을 하나 차려놓고 세 식구지만 밥을 네 개 해 놓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집의 주인이다. 그런 사진 보신적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 사진 나오도록 보는게 문제인데 사실은 거꾸로 돌려버려야 되요. 이게 정상이예요.
그런식으로 할려면 여러분 집에 가서요 여러분 벽지 한번 뚫어지게 보세요. 예수님 아니계신 곳이 없습니다. 전부다 요래 보면 다 예수예요. 눈 툭 튀어 나오고 코 툭 튀어 나오고 그것도 서양예수 동양예수 아니고 수염난 수염 없는거 예수 아니고 수염있는 4세기 이후의 예수.
심리학에 보면 보고싶은 것만 보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있고 보고싶지 않은 것은 옆에 있어도 왔나? 나중에 알아요. 예수그리스도는 존재함으로서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사라지면서 진짜 믿음이냐 아니냐가 확정되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못 믿고 목사를 믿어요. 목사는 눈에 보이니까. 목사를 어떻게 보게 되느냐? 교인수 많이 끌어오게 되면 주의 종이고 헌금 많이 나오게 하면 주의 종이고 헌금 못나오고 교인수 떨어지면 그건 주의 종 아니걸로 봐요.
이게 뭐냐 이번 수련회할 때 왜 백성들이 왕을 찾는지 말씀 드렸죠? 왕 덕분에 자기가 편안히 가자는 거예요. 복된 나라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수련회 첫 강의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사격장 이야기 했잖아요.
사격장에서 인민군 그림 해 놓고 엎드려 총 해가지고 뭔가 툭 튀어 나오면 인민군 나오면 팡! 또 인민군 나오면 쏘지요? 하나님께서 왕 떳다 하면 쏴버리는 거예요. 누가? 선지자가. 인간은 지도자를 원한다는 자체가 자기존재와 결부된 존재로 이해되는 같은 육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따내야 되겠다는 우상숭배적 발상이예요.
우상숭배라는 것은 나 닮은 하나님이예요. 나의 품성과 통하는 하나님 그게 우상숭배예요. 나와 십자가로 결별된 하나님이 아니고 내 손에 필요 없다고 매맞아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근한 하나님, 통하는 하나님, 내 소원 들어주는 하나님, 내 아픔을 위로해줄 하나님, 내 아쉬움을 채워주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게 바로 우상이예요.
그게 바로 교회가 아니라 무당의 집이라니까요. 무당의 집. 제가 그 용어 지어내고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그게 무당이예요. 대한예수교 무당의 집이라니까요. 교회가는게 아니고 무당 찾아가는 거예요. 십자가는 그냥 대나무로 보면 되요. 플라스틱 대나무.
사랑의 교회가 아니고 사랑의 무당의 집이라니까요. 지금 말썽이 되가지고 철거하니 마니 그렇게 되었지만. 무당집 전도사 그리고 사모. 아니지요. 무당을 통해서 도와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더 비겁한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부재의 부재를 존재하지 않는 구멍을 내버린다 이말이죠. 해놓고 그 다음에 누구를 보내느냐 하면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누구를 보냅니까? 여기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버리는 겁니다. 성령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재를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의 존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니 존재에서 연결된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니 존재한다 나는 여기 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살해당한 그 하나님, 존재의 층이 달라요. 내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분.
그러면 주님을 만날려면 나도 같이 어떻게 되야 됩니까? 내가 존재여야 되요? 안그러면 부재여야 됩니까? 부재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온 성도의 소원이 있어요. 그게뭐냐 하면 성도의 소원은 사랑하는 주님을 그리워 하는 거예요.
어서 주와 함께 있고 싶어서 이 세상을 후딱 떠나고 싶어하는 그런 본성을 보여 줍니다. 떠나고 싶어해요.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어서 떠나고 싶습니다. 떠나고 싶습니다.
같이 갑시다. 떠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분이 누구냐? 예수님 사랑해요. 그게 아까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란 어떻게 안다? 부재에서 오는 고통의 양이 바로 사랑입니다.
남편이야 뭐 한달 없어도 괜찮아요. 남편이 한달 있든 없든 뭐 무슨 몸이 아프든 말든 그저 주님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도 있어요. 남편이 어디 갔는지 신경도 안쓰고 우리끼리만 아는데 먼저 온 사람만 아는데 남편이 있던 말던 오직 주님만 사모하는 그런 사모도 있다니까요. 가까운 자리에 다음 모임에 만나게 되겠지만.
아, 정말 성경이 이러면 다 풀리지 않습니까? 왜 성령이 오십니까? ‘가자! 가자! 집으로!’ 집으로 하면 또 어떤 목사 노래하는데. ‘가자! 가자 그냥!’ ‘아이고 목회 성공하고...’ ‘아이 치우고 그냥 가자니까 너 나 안보고 싶어?’
‘보고 싶습니다.’ ‘이게 거짓말.’ 거짓말하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너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지? 남한테 인정받고 싶지? 왜? 너의 몸이 남이 부여하는 그런 관심사가 모였으니까. 자, 어떻게 우리가 가자할 때 보고 싶어서 갈수 있느냐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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