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6장 1절(공백)180102b-이 근호 목사
자, 다음하겠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첫째시간에 한 것 중요한 것 다시 한번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 사는 세상에 예수님이 왔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 인간 생각에 플러스 하나 더 추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게 되면 그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공백이 생겨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예수님 안왔으면 생기지 않을 빈자리가 생겨 버렸습니다. 빈자리. 이걸 왜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이 그림을 그리면 아! 그런 뜻이구나 할겁니다.
자, 인간 세상이 이렇습니다. 수평이 있고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 옆에서 보게 되면은 인간들 사는 세상 인간들만의 세상이예요. 하늘에서 이렇게 오거든요.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 안하고 목수의 아들이니까, 누가 여기서 플러스 한명 인구 하나 더 추가시킨거죠.
그런데 오고 난 뒤에 딱 가니까 여기서 구멍이 생기죠. 구멍이 생기면서 인간들 밑에서 그동안 받쳐왔던 악마가 노골적으로 노출되는 구멍이 생기게 된 거예요. 나만 놀라는 건가?
구멍이 뻥 뚫어 놓으니까 예수님 가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간들만 상대한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상대한거예요? 그동안 인간들한테는 없는 존재. 인간들한테 없는 존재가 뭡니까? 악마죠? 인간들에게 악마는 없어요.
인간들 옆에는 인간들만 있어요. 우리나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지 대통령이 지도자이지 마귀가 지도자라고 누가 이야기 하겠어요? 문재인 잠시 나와보세요. 뒤에 마귀있는지 잠시 보자. 안보인다니까요. 없는 악마와 상대한거예요. 인간하고 상대한게 아니고요.
이게 이제 로마서에 보면 나와요. 주께서는 죄와 죄의 권력과 사탄과 싸웠단 말이죠. 악마와 싸우다 보니까 이 구멍을 통해서 악마는 예수님이 뚫은 구멍 때문에 악마는 몸둘바를 모르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에 의해서 철저히 커버 되었는데, 뻥 하고 구멍 뚫려 가지고 이 빈자리 만큼은 악마가 그대로 노출되니까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을 동원해서 이 자리를 뭘로 매꿔야되요? 매꿔야 되겠죠? 악마가 안나오도록. 그게 뭐냐하면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 종교, 종교 활동이 되는 겁니다.
종교 활동에도 반드시 뭐가 동원되요? 법이 동원되겠죠. 옛날처럼 옛날 법으로 했던.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누구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죄의 자식이나 악마의 자식이나 다 같은 이야기예요. 너희는 죄의 자식이다.
너희들이 한 짓은 너희들의 짓이 아니고 너희들 조종하고 있는 악마가 너희들을 앞잡이로 세워서 한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표면에 나타난 것은 이들의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것은 뭐냐면 뭐 지키자? 율법지키자예요.
율법지키자에 의해서 누가 살해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살해됬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난 구멍은 어디에 구멍내겠습니까? 율법 지키자 그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버린거예요. 율법 지키자에. 율법지키자에 구멍을 이렇게 뚫는거예요. 구멍을. 구멍을 뚫겠지요?
그러면 사탄이 가만 있지않고 이 구멍을 메꿀려고 하겠지요? 법으로. 법으로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의 행함으로란 뜻이예요. 인간의 행함으로. 인간의 행함으로 이 구멍을 메꿀려고 하겠지요.
그러면 메꿔버리면 헤헤 거린다 이말이죠. 예수 당신 백날 해도 당신 죽고 난 뒤에는 똑같애 똑같애 이렇게 될거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면 똑같이 됐으니까 조용하겠지요.주님 혼자 죽었어. 주님 혼자 부활해서 하늘나라 가버리고 다시 조용했어요.
그런데 오순절날 누가 왔습니까? 성령이 오니까 사도들이 미쳤어. 갑자기 사도들이 미쳐버렸어요. 사도들이 뭘 뚫느냐 하면은 그동안 법으로 메꿔놨던 이것을 계속 구멍을 뚫는 거예요. 구멍을 뚫으니까 거기에 누가 반격하겠습니까?
악마의 앞잡이들이 유대인들이 반격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이라고 달려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누구를 죽이겠습니까? 성령 받은 사도를 죽이려고 기어이 달려들겠지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난이 처음에는 베드로의 받은 고난과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받은 고난 그 뒤에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주욱 이야기 한겁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반복성이 이어지는 겁니다. 반복성이.
그 구멍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가 보이거늘 구멍이 보이거늘 다시 말해서 법으로 구원되지 않는 장소가 보이거늘 누가 이 법으로 법의 행함으로 이 십자가의 공로를 누가 가리느냐.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싸워왔던 악마의 얼굴입니다. 악마의 얼굴이예요. 오늘날 교회지요. 오늘날 교회입니다.
자, 교회가 악마의 압잡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은 교회가 지킬만한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들이나 장로나 목사들이 뭘 지킵니까? 뭘 지키죠? 특히 목사들이 뭘 지키죠? 자기 교회를 지키잖아요.
그러면 모든 성경해석은 어디로 통해요? 성경같은 것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그러니까 이 교회에 돈 내고 이 교회에 충성하고 이 교회를 우리 힘으로 지키게 되면 누구한테 영광이다?
하늘님께 영광이다. 하나님과 중간에 교회 그리고 인간의 행함과 법적인 그러한 실이익들을 거기다 모아놓고 그걸 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보내주겠다고 계속해서 그 사람들을 거기에다가 모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에 갈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 보자 이 천국가는 법은 어떤 법을 내가 지키면 되겠느냐?’ 하겠지요. 아까 배운 것을 써먹어 봅시다.
자, 교회올 때 ‘목사님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고, 헌금은 어떻게 하면 되고, 찬양 봉사는 어떻게 하면 되고, 목사 말씀 어떻게 순종하면 됩니까?’ 할 때 그게 주체입니까? 자아입니까? 자아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지키게 되면 천국에 누가 간다? 주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가지요. 그런데 자아에서 주체로 갈때는 아까 구멍 뚫는다 했지요? 법으로 구축되어 있는 자아를 예수님이 주체가 되셔 가지고 구멍을 뚫어버리면 천국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천국가느냐 하면 구멍 뚫린 사람이 천국가는 거예요. 이 자아에.
나는 지켜서 바르게 살아서 천당 갈려고 하다가 십자가 보면서 ‘내가 바로 세리고 창기고 내가 강도고 내가 도둑놈입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구멍이 뚫리지요. 구멍이 뚫렸으니까 거기에 뭐가 불겠어요?
바람이 분다~ 하겠죠? 성령의 바람이 불지요? 어떤 가수가 의자에 앉아서 그 노래 불르는거 있습니다만. 이소라라고 하는. 그 노래 들으면 성령이 생각나요. 바람이 분다하면. 바람이 확 불지요?
바람이 불면서 주님이 내 몸을 이용하는구나. 주님이 내 몸을 이용하고 있어요. 이 고집스럽고 나밖에 모르고 복음들을때는 좋다고 하고 돌아서면 또 남한테 안질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이 철저하게 나를 니가 어떠한 지저분한 인간이였기에 내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가를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지저분함을 계속 더 심화시키는 겁니다.
제가 주일낮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2018년도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심화된다고. 더 깊이 들어가요. 그럼 죄를 더 짓는가? 아니예요. 있는 죄도 충분해요. 계속 파고 들어가면 되니까. 뭘로? 이 말씀을 가지고.
아까 디모데후서 봤잖아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리고 교만하고 이게 전부 다 추상적인 겁니다. 실제로 사람 칼로 찔러 죽이고 이런거 아니거든요. 폭행 아니잖아요. 파출소 갈일 없습니다.
그런데 파출소 갈 일 없어도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게 죄가 되요. 술 취한 것도 죄가 되요. 에베소서에 나오잖아요. 더 이야기 해줄까요?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예 죄인 안될 생각은 아예 꿈에도 먹지 마세요. 남을 용서할 때 남을 용서할 때 우리는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한 두 번? 일곱 번? 490번도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이 계속해서 제공되는 주님의 레벨에 주님이 원하는 레벨에 그 말씀은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지킬수 없어요. 오히려 마귀에 시험들 뿐이예요.
마귀는 어떤 법을 지키게 되면 선악을 동원시킵니다. 법을 지키게되면 우리보고 ‘좀 더 더 힘들게 지키지 너 너무 수월하게 지켰잖아. 다음번에는 힘들게 지켜야되,’ 라고 자꾸 속삭입니다. 힘들게.
기도 한시간 하게되면 잘만하면 ‘두시간까지 끌 수 있는데.’ 헌금 십일조 하면 ‘십의 이조도 가능하잖아. 십의 이조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고지를 탈취해야지. 십의일조 하는 사람 이 교회에 많아. 십의 이조 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되는거야. 너 수능 등급올려야 될거 아냐.’ 자꾸 이런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건 남이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본인이 그렇게 생각되요. 본인이. 더 어렵게 선한일도 이왕이면 더 어렵게 하고 더 아프게 하고 그런겁니다. 그걸 정신분석학 에서는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해요. 쾌락도 심해지면 고통이다.
수도사들이 천주교 수도사들이 꿇어 앉아서 굶어 가면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즐거워요. 즐겁지만 그 즐거움이 성에 안차. 그들은 마귀와 함께 있거든요. 그들은.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마귀가 계속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냥 즐거운 쾌락보다도 아프면서 더 쾌락하는 쾌락을 그들은 이끌지요.
이것은 정말 최고의 쾌락이예요. 아파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감사하는 쾌락이 그것보다 더 큰 쾌락이 없어요. 보통 그 술 못 끊으면 담배 피우고 담배 못 끊으면 도박하고 이런 말이 있거든요. 이런말이 있어요. 하여튼 지어낸게 아니고.
더 쎈 것을 하게 되면 뒤에 것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더 쎈 자기학대를 하게 되면 어지간하게 감사하는 것보다도 더 그것을 능가할수 있어요. 더 능가할수 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목사가 월급을 한 100원 받는데 목사가 마귀 들리면 100원 받는데 저는 선교 헌금을 20만원 냈는데 더 기도를 많이 하다보면 40만원 내고 나중이 자기는 밥도 안먹고 100원 다 내고 그러면서 까마귀가 어디서 짜장면 시켜주겠지. 이래가지고 엘리야 이야기 아니까 이렇게 나오고.
그 보다 더 심하면 꼭 다른게 가겠다는 자기 아들 기어이 신학교 보내가지고 아브라함처럼 자식까지 바치게 한다고. 이런 아이디어 있잖아요. 이런 아이디어로 시간을 다 보내요. 보다 더 아프게 보다 더 남이 못 따라 오는 것. 따라 올테면 따라와봐 이런거 있잖아요.
코스를 더 험난한 코스로 만드는 거예요. 이런 것은 안양에 계시는 전목사님이 잘해요. 암벽타기 하는 것. 암벽을 타게되면 이왕이면 더 어려운 코스 타게 되면 더 유명세를 타는 겁니다. 그러한 기대심리가 인간속에 자아 속에서 자아는 악마가 만들어요. 악마가 계속해서 더 깊은 법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안그러면 방치하겠어요? 어떻습니까? 예? 방치하지요. 왜? 모든 인간 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더 짜릿한게 없는가 찾아 다니는거예요. 더 짜릿한거 없는가.
그러니까 나쁜짓을 찾아다니는 것도 나쁘지만 선한짓 찾아다니는 것도 더 심한 도박이예요. 도박하는 것보다 더 심한 쾌감을 주거든요. 그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가 성령께서 오직 누구만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쪽으로 쓰시는 사람 그쪽으로 쓰시고 이쪽으로 쓰시고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공로로 구원 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유명하다 생각안하는데 하도 남들이 유명하다 하니까 유명해졌는데, 막 살기. 나는 그런걸 강조한적이 없는데 나도 모방된걸 가지고 모방해요.
그 유명한 하춘화라는 가수 있잖아요. 하춘화라는 가수를 김영철 개그맨이 따라하니까 나중에 하춘화 본인이 흉내내는데 김영철이 하는 걸 자기 흉내내는걸 따라해요.
자, 공백이라는 말 했습니다. 이 공백에서 구멍을 뚫어놨다고 했지요. 구멍을 뚫어 놓게되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보다 더 쎈 힘을 가진 사탄이 이렇게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일을 할때는 무엇에 반대, 인간이 하는 일을 반대하겠습니까? 악마가 하는일을 반대를 하겠습니까? 악마의 하는일을 반대하겠죠? 악마의 하는일을 반대하겠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런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보면 참 신기해요. 할 이야기도 많고. 10장 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걸 사진을 한번 찍어보자 말이죠. 누가 사도가 성령받은 사도가 사진을 한번 찍어 봅시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놨다 봅시다. 그래서 재판받을 때 ‘자, 누가 이야기 했는냐?’ 라고 했을 때 이거는 모든 사람 이야기를 누가 했어요? 사도 본인이 이야기 했지요?
그런데 사도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이 한것이다.’ 이렇게 했어요. 어떤 영화에 보면요, 어떤 껄렁 껄렁한 영화에 보면 권투 이렇게 하면서 쉭쉭 하면서 ‘이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야.’ 하는 그 대목이 나와요.
자기가 쉭쉭 해놓고 폼잡고 쉭쉭해놓고 ‘이것은 내 주먹이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람소리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 아니요.’ 라고 일부러 강조하지요. 그거하고 비슷한 이야기예요. 자기가 이야기 해놓고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이 하는 말이다.
이게 통합니까? 비겁한 변명아니예요? 나도 그런 소리하겠다. 이거 아무나 써먹을수 있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해석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해석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그럼 구분지어야 되겠네.
이렇게 한 것은 성령이 아니고 니가 한 이야기고 요렇게 한 것은 성령이 한 이야기고 이렇게 구분을 지을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이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해석이 그렇게 한두가지가 아니예요.
성경말씀이 딱 있잖아요. 성경말씀이 있는데 여기 성경말씀에서 방금 이야기 하면 해석이 몇가지다? 딱 두가지 나와요. 두가지. 하나는 성령이 하는 해석과 또 하나는 악령이 하는 해석이 딱 두가지 밖에 안나와요.
이 말은 문자, 원어, 헬라어 그건 소용없어요. 뭐 한국어 관계 없어요. 누가봐도 해석은 두가지 나와야 됩니다. 성령에 나오는 해석은 뭐냐 하면은 복음을 위해서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의 내용이 나와야 되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플러스 나의 죄인됨이죠. 이게 나오잖아요.
어떤 해석이던간에 이 해석은 십자가 나오고 자기 죄인됨이 나오게 되면 이것은 성령이 하는 해석인데 악령이 하는 해석은 뭐냐 하면은 여기서 십자가만 들고 나와요. 십자가만 들고나온다는 말이 뭐냐하면은 십자가의 복음이 될려면 십자가와 한 조가 있어야되요. 뭐냐하면 십자가를 이야기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가 나와야 되요.
이게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옵니다. 나라 할지라도 이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내가 전하는 복음에서 나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내가 저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사도가 이런 이야기 할때는 뭐냐 하면은 성령으로 이야기 할때는 반드시 나를 하나님이 자기 편으로 간주해준다? 안해준다? 안해준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는 일에다가 이 사도가 하는 일을 들어가게 할때는 복음이 아니고 나는 들어가기는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은 이 복음에 해방자요,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인 입장에서 들어가서 한 조가 되어서 복음만이 복음만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말입니다.
목사가 자기딴에 열심히 목회한다고 목회라 하는것은 교회 붙드는 거예요. 교회 붙드는 거예요. 하면서 나이들어 가지고 퇴직해서 나가라고 하니까 ‘내가 이 교회 처음왔을 때 10명왔는데 지금은 500명왔기 때문에 퇴직금 산정 제대로 하시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렇게 그 전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바라봐야지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백날 이렇게 해놓고 막상 자기가 퇴직해서 나갈 생각 하니까 계산 따따닥 해가지고 가만, 십일조 양이 몇 명되고, 십일조는 아니지만 헌금 연말에 몇 명 이렇게 계산 해가지고 이정도면 2억정도 2억하면 양반이다. 10억정도 5억이상 줘야되지 않겠나? 이렇게 계산 나온다면.
그러면 이 사람 뭐가 나옵니까? 내가 십자가 복음 전한다고 내 공로를 알아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는 그게 없다 이 말입니다. 사도는 나는 누구한테 가이오의 집 외에는 세례 준적도 없고 세례를 준적도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마치 그 가이오의 집을 구원한것처럼 오해 사면 안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리고 나는 십자가 진적 있다? 없다? 십자가 진적이 없어요. 참 말도 어렵게 해요. 자기는 십자가 진적도 없다고 해놓고는 갈라디아서 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말은 맞다. 못이 박혔지 자기가 십자가 진적은 없는거 맞아요. 같이 지신 십자가에 내가 합류될 뿐이지 내가 내 십자가 져서 남 구원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이 성경해석 전체가요 뭐 계속해서 어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항상 무엇의 다툼이예요? 무슨 해석 다툼입니까?
우리는 뭐를 믿어야되. 믿는다는게 지키는 겁니다. 뭘 지켜야되. 뭘 가져야되. 이것하고 주님이 덮치니까 이 자아가 곧 죄인이였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육 있잖아요 육. 이 자아 자체가 계속 죄를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자랑스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억지가 아니고 고마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이제 여러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관계를 알겠지요? 공백이 있어요. 공백. 사람들 사는데 여기에 구멍이 뚫렸어요. 빈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부르짖음이 나옴니다.
이걸 전에 설교할 때 했는데 인간의 자아는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요구사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요구사항을 반영한게 이게 뭐냐하면 충동이고 이게 감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욱하는 거죠. 본인 마음대로 안되요. 본인의 모든 감정들이 악마의 요구사항에 앞잡이가 되어서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때는 의지와 결심, 동기, 이런걸 가지고 행동을 하거든요.
이 의지 내 결심 내 의지이지만 그것을 분석을 해보게 되면 ‘내가 왜 그런걸 의지하지?’ 그러면 인간의 측면에서는 이유없음 입니다. 이유없음. ‘내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하지?’ 이유없음.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악마의 요구사항에 의해서 나로 하여금 이런 의가 발생 되었는데 이게 요구사항이 될려면 이렇게 들어갈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전부이니까. 어딜 들어가냐 하면 십자가라는 빈자리를 통해서 이렇게 들어가야 ‘아 악마가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되는 겁니다.
그 갖고 노는 곳에서 뭐가 나오느냐 이걸 통해서 이 부르짖음이 나와요. 부르짖음. 이 부르짖음이란 말을 왜 여기서 강조하느냐 하면 바로 출애굽 할때에 히브리인들이 뭘 했지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바로왕 때 뭘 했습니까? 압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 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었잖아요.
그리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한테 계속 공격당할 때 그들이 기껏 하도하도 안될 때 줄거 다 줘도 안될 때 뭐해야 됩니까? 그들이 부르짖었잖아요. 이번 다음주 열왕기하 수련회 하는데 거기에 열왕기하에 보면 열왕기상에 보면 아사왕이 있어요. 아사왕.
르호보암, 아비암 그 다음에 왕이 아사예요. 세 번째 왕인데 그 왕이 이디오피아 세라가 공격했을 때 부르짖음으로 이겨요. 부르짖음으로. 부르짖음으로 이기고 여호사밧은 그 찬양하고 이기고 희한해요.
어쨌든간에 우리 자아가 예상한 자아는 자아대로 자기 속 다 보입니다. 자아가 다 하다가 안되면 뭘 하느냐? 부르짖어요. 부르짖는데 그 부르짖는 목적이 뭐냐 하면 이 주체를 살려달라는게 아니고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살려 달라는게 죄예요.
그래서 열왕기상,하 수련회 강의가 그런점에서 좀 이렇게 어려울거예요. 우리는 부르짖으면 되게 대견해 보이잖아요. 아이고 착하다 아주 겸손한거예요. 그게 아니고 부르짖는 것이 이 공식에 의하면 자아가 부르짖는다니까요.
그런데 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참 이 강의 미리 다 하면 안되는데. 왕은 부르짖는데 선지자는 부르짖어요? 안부르짖어요? 안 부르짖어요. 선지자는 까라면 까는거예요. 거기서는 죽이면 죽이는데로 살아요.
어느쪽이 하나님쪽이겠습니까? 자기 살려고 부르짖는 쪽이 하나님 쪽이겠어요? 선지자 쪽이 하나님쪽입니까? 선지자 쪽이죠. 바로 열왕기상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구약은 구약의 왕들은 왕에 의해서 왕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같은 똑같은 인간들끼리 인간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9번 죽여요. 9번. 아 강의할거 다 하면 안되는데. 무릇 9번 죽입니다. 죽이고 거역하면 죽여버리고 저주해버리고 죽여버리고 똑같은 죽인놈이나 죽임을 당한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예요.
결국은 나라 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망하는 인간들끼리 배우가 되어서 한바탕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나라이고 인생 인간사회입니다. 똑같은 인간들로 세팅된 같은 별볼일 없는 것들끼리 세팅되가지고 정권 교체하고 바꾸고 핵 폭탄 개발하고 해안 봉사하고 뭐 이런 전부다 똑같은 인간들이예요.
그러다 그들이 이제 어려울 때 누구를 믿습니까? 여호와를 부르짖고 예수님 부르짖고 교회 세워서 하는 그 짓거리들. 그런 짓거리에 성령받은 그 성도는 바로 선지자 같은 존재예요. 선지자는 소원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소원이 있지요.
제가 어제 이야기 했어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지요? 죽는거예요. ‘주여, 어서 제대 시켜주시옵소서. 어서 어서. 영광도 싫고 다 싫고 어서 그냥 죽여 주옵소서.’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런거예요. 징징대지 마라. 세상 살면서 징징거리지 말란 말이죠. 좀 징징대지 마라.
그게 뭐냐하면은 기도하면서 살려주세요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가위 이야기 했잖아요. 기도한다고 가위가지고 전부다 잘라버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우리 이름으로 하는 것은 이것은 안 받습니다.
‘아니 마지막 기도할 때 예수이름으로 했는데요.’ 어디서 부적을 갖다 부칩니까? 그거 부적 붙이는 거예요. 끝에다가 예수이름 붙이는거. 주문 마치 그 남묘호랑개교 주문 똑같이 갖다 붙이는 거예요. 신기하게 효과 있는줄 압니까?
지금 이 마귀와 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소관이 아닙니다. 인간들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셨고 주님께서 오실 때 그냥 오신게 아니고 주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뭐냐 주의 이름이죠.
주 하고 주의 이름이 달라요. 주의 이름은 존재지만 이름 붙이면 기능이 되어 버려요. 주는 어떤 계신분이고 그의 이름은 이 계신분이 해야 될 일을 기능화 시킬 때 기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그 이름됨이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이스라엘의 이름 원래 이름이 누구 이름입니까? 야곱이죠.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플러스 뭐가? 새로운 이스라엘다운 기능이 추가 된겁니다. 기능이.
아브람은 그냥 존귀하신 아버지예요. 아주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아브람이 뭘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아브라함은 많은 자식의 아버지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름 바뀔 때 자식 한명도 없었어요. 단 한명도 없었어요.
한명도 없다는 말은 존재에서 그냥 많은 자식이 안나오거든요. 존재 플러스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기능이 되면서 여기에 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등장 하거든요.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세때 가면 주의 이름 여호와가 된다 이 말이죠. 주의 이름.
모세한테 이야기 하기를 여호와가 누굽니까? 물으니까 여호와는 여호와다가 아니고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기능을 그대로 이어가서 완성시킬분이 바로 너한테 찾아온 그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라는것은 이름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결과를 이루었을 때, 그 결과의 현장에서 비로소 부를 수 있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이미 구원 받고 난 뒤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말이예요. 이미 구원 받고 난뒤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게 아니고 이미 성령이 와서 주의 이름 부르게 되면 우리는 주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부르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를 이 지경 만든다고 했잖아요. 안 믿겠다 안 믿겠다고 하고 예수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그렇게 했던 나를 주님이 이 지경 만들었다니까 주님이 나를. 신학 공부해서 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이렇게 만들어 놨잖아요 주님이.
뭘 해도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십자가만 복음이라고 주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오게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주의 하신일의 집합체예요. 십자가 말고 또 다른게 있으면 안되요. 십자가예요. 전부 다. 모든게 십자가예요.
사탄을 뚫는 것은 십자가 뿐이예요. 십자가 능력이예요. 다른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다른게 들어 가버리면 구멍이 안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싫어하는게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게 뭐냐 하면은 인간을 배제하고 예수님이라는 분이 혼자 다 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마귀는 제일 싫어합니다.
마귀가 싫어하는지 당신은 어떻게 아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싫어하잖아요. 그들이 싫어하니까 마귀가 싫어하는 거예요. 좀 더 이야기 나가 봅시다. 주라하는 것은 존재고 이름붙이면 주의 기능이죠.
그렇다면 바깥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바깥에 일할때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시는데 그 결과에는 성령의 몫으로 돌아가는게 아니고 성령의 이름으로 돌아가는게 아니예요. 누구 이름으로? 모든 것이 주의 이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하신일로 인하여 지금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는 쪽으로 주의 이름이 장렬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방언, 헌신하는 것 사랑한 것까지 전부 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의 이3름이 할 때 주의 이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아까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파이프를 보면 주의 이름이 이렇게 가게 되면 주의 이름은 여기에 빈 공간에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이미 있어요. 뭔가 꽉 차 있어요. 악마의 힘이죠.
악마의 힘을 주의 이름이 뚫고 들어갑니다. 뚫고 갑니다. 뚫면서 여기서 뭐냐? 계속 피, 피가 나오겠죠. 선지자의 피, 성도의 피,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 계속 흘리겠죠. 계속 흘러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가는 곳에는 우리 이름은 어떻게 된다? 쪼개지는 거죠. 쪼개지고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아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자아가 없어지는게 아니고 망하게 되요. 깨지고 조각나고 망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 자아가 망한다는 말은 뭐냐? 나의 기대와 나의 소원이 박살난다는 뜻이예요. 나의 기대와 나의 소원이 박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상이냐 아니먄 너의 세상이냐를 우리한테 계속 묻는겁니다.
너의 가정이 너의 가정이냐 예수님의 가정이냐를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쪽으로 안 맞거든 갈라선다 이 말입니다. 왜냐면 복음쪽으로 안 맞으면 버티는 것은 바로 내것이기 때문에 버티거든요.
내것을 어떻게 한다? 부수는 거예요. 내것을 다 부수는 거예요. 자식이 복음을 안받아 들인다? 그러면 니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계속 부셔나가는 거예요. 부셔나가면 우리가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안그러면 반항할까요?
당연히 반항하지요. 반항하는게 뭐냐하면 나의 이름이예요. 내 이름으로 벌렸던 나의 전력, 나의 개인사, 개인 인생. 이것이 강력하게 주의 이름에 반발하고 나섭니다.
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누가 이깁니까? 나의 이름이 이기지만 성령이 있는 사람은 누가 이겨요? 주의 이름이 늘 승리하십니다. 여기서 예상못한 새로운 감사가 나와요. 야~ 또 내 힘으로 구원받을려고 헛된 짓을 했구나를 알수가 있죠.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살면서 살면서 가만 지켜보게 되면 나 자아의 입장에서 내 이름으로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 살았다고 생각되는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딱 보게 되면 주께서 박살내기 위해서 오늘 하루하루를 살게 하셨다 그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원대로 안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그래야 내 인생이라는게 없는데 자꾸 나는 과거의 버릇 때문에 내 인생 따로 챙기고 내 자식 챙기고 내 남편 내 아내 따로 챙기고 내 회사 따로 챙기고 내 교회 챙기고 계속 내 것 챙기는데 온 스트레스를 거기다 온 정신을 거기다 다 팔고 있어요.
주님께서 이 회사를 어떻게 박살내는지 박살내고 있겠지만 그건 나는 모를 일이지만, 부수면 ‘아니되옵니다.’ 붙들고 ‘이것만큼은 아니되옵니다. 이거만큼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남겨주면 또 박살, ‘아니요. 아니되옵니다.’ 계속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지요. 나는 박살나고 복음은 전파되고. 왜?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이 만드는 하나의 이용물 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뭐냐면 우리는 반항해야 되고 반항해야 적점이 형성 되니까 주님의 실존이 느껴지니까.
만약에 순순히 부수어 버리면 내가 알아서 내가 부순게 되 버리기 때문에 이거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내가 부숴버리면 이게 누구 공로가 되겠어요? 내가 알아서 손들고 벌서는 셈이 되잖아요. 이것은 매를 더 맞아.
그냥 막 살아야 되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 줘야 실제로 살아계신 진짜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조지는지를 실감나게 느낄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소설 써가지고 이러면 벌 받는데 내가 알아서 꿇어 앉고 내가 알아서 헌금해야지 교회 갖다 바치고 이런 짓 하지 말란 말이예요.
챙길거 다 챙기고 주여 아니되옵나이다 라는 말을 이것 만큼은 손대지 마옵소서. 강렬하게 반발할 때 그것마저 손가락 확 꺽어서 요게 어디서 까불어. 니가 믿음있어도 백날 너만 살아있지 나는 없는거지? 그렇지? 여기있다 하고 없는 존재의 예수님이 실제 있는 존재로 나타날때는 내것이 박살날 때입니다.
내 모든 의도가 우상될 때 세상 사람들에게 향하세요. 너희들은 예수님이 죽은줄 알았지? 살아 있었어. 정말 살아있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고백을 하게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는 내 이름 가지고 맞짱 뜬다는 것, 그리고 이 싸움이 죽을 때 까지 계속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가 나오고 나와봤자 돌아서면 또 내것 챙기고 부서진 것 있잖아요. 이거 또 챙깁니다. 이게 바로 사사기고 이게바로 열왕기상이고 열왕기하고 계속해서 나의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해요.
사람은 중심이 있어야 되는데 오뚝이처럼. 그 중심을 누가 잡겠습니까? 나한테 내가 중심이예요. 이 자아가 중심이예요. 주체는 자아가 있고 자아를 부수기 위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주체이지 처음부터 주체는 없어요. 처음부터는 내 이름 밖에 없어요.
깨어져도 다시 주워 모으면 내 이름되요. 이게 터미네이터3 에 나오잖아요. 액체로 만든 외계인을 칼가지고 찔러도 그때 뿐이야. 그냥 뭉개지고 불속에 녹아져도 금방 나와서 이래가지고 군복 탁 입고 와가지고 터미네이터와 싸울려고 덤벼들고 영화에 나오잖아요.
우리의 자아는 백날 부셔도 돌아서면 주여 잘못했습니다. 헤헤헤 잘못했습니다 해놓고 씨익 웃으면서 또 나와가지고 회개했으니까 두 번 다시 벌은 추가된 벌은 없겠지 해서 또 주워서 남아있는 힘들 다 끌어모아가지고 또 다시 시작해요. 반복 계속 반복.
그래서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가지고 계속 우리를 또 공격하고 이 공격하는 것이요 우리가 진작에 버려야 할 것을 안버리고 있으니까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버리면 될텐데 버리는 방법을 몰라요. 우리는 왜냐? 우리는 그 식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것만 챙기는 식 외에는 다른 식은 없어요. 우리는 할수 있는 것은 뭐냐? 내 것 챙기기 그것만 주특기지 다른 주특기는 우리는 욕심내면 안되요. 다른 주특기는 주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주님의 대행자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나를 친다는 것은 이것은 건방을 떨어도 보통 떤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하기를 사도들에게 예수님이 말하기를 베드로 보고 이야기 했지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왜 이런 이야기를 왜 했겠어요? ‘베드로야 너 정신 차렸지? 니가 하는 일이 곧 내 일이야. 걱정하지마.’ 이게 아니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띄고 그것도 단디, 단단히 띠 띄고 질질 끌고 가듯이 끌고 갑니다.
우리의 반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의 반항도 끝까지 보통 고집이 아니지요. 자,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떠나지 아니하면 뭐가 온다?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떠나가게 되면 예수님이 처음에 이땅에 왔을 때 이것은 꼭 이야기 해야 되겠어요. 예수님 이 땅에 오실 때 요단강에서 뭘 받았습니까? 속에는 물 받았고 위에서는 뭐가 왔고? 물과 성령의 만남이죠.
성령은 하늘에서 오고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속에 들어간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죄속에 집어 넣어 놓고 죄속에서 성령 받은 사람을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왔을 때 어떻게 해서 우리가 육에 속하면서도 육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 되느냐를 예수님이 앞당겨서 이미 앞당겨서 그 원형을 원판을 미리 보여준것이고 그 원판에다가 우리를 성령께서 거기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는 그 코스대로 우리가 그 코스를 그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알아서 했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했다? 성령께서 시킨대로 했는데 성령을 누가 보냈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셨죠?
그러면 성령오게되면 예수님께 성령왔다는 말은 결국은 예수님은 누구 품으로 간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결국 어디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그 하나속에 결국 우리가 합류가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원형이 되고 성령은 그 예수님의 원형 한것을 우리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이제는 완성된 입장에서 그러니까 뭐가 우리에게 이익이냐는 것은 미완성의 미완성의 연속이 아니고 이미 완결된 상태에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마음놓고 인생을 살아도 좋다 이말이예요. 그게 우리한테 유익이다 이말입니다.
구원파의 구원은 자아 구원이고 우리는 주님의 일을 마음껏 할수 있다는 데서 온 것이죠. 자아만 나가 아니고 주체도 나예요. 예수님이 만든 주체가 있잖아요. 예수님과 연결된 주체. 그것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어떤 환란이 와도 연결되있다 이 말입니다. 그 자체가 완성이예요. 그게 성령께서 그걸 계속 고정해주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 할 때 세상은 뭐가 됩니까? 하나의 피고가 되고 죄, 의, 심판을 결정 짓는 분은 판사님이 되겠지요.
그 판사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또는 성령께서 판사님이 되셔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피고를 세웠으니까 그러면 그 자체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정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인간세계에서는 자기가 생존에 필요한 자연환경이 되지만 성경을 보게되면 이것은 하나의 법정이 아주 엄위하신 하늘나라의 재판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어야 되는데 그것을 누가 주도 하느냐? 바로 성령이 주도, 그 일을 바로 세상을 그렇게 하도록 성령이 그렇게 지금도 주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 듣고 저 같으면 이 강의를 들었다면 저 같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성령이 지금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시면서 일하는 성령의 자기 작업장이다.
작업장이다 생각하고 날씨가 많이 추웠다가 약간 풀렸다가 또 추워가지고 온통 독감걸리고 감기 걸리고 환자들이 많더라도 그것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것이고, 감기 걸렸으니까 나 예수 안 믿는다 하는 사람 지금이라도 싫으니까 갈려면 가라.
그래서 결국은 감기 날씨가 추운것도 예수님 믿는 사람 맞냐 안 맞냐를 계속 구분, 법정에 세워서 그걸 가려내는 그 작업 때문에 북극에 그 냉기류가 내려온거예요. 북극의 냉기류가. 추우니까 예수 안 믿을래 이런거예요.
환란과 곤고와 핍박, 기근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가 뭐냐 하면은 죄에 대해서 예수 안 믿는게 죄고요. 의라는 것은 예수 믿는게 의고요. 그 다음에 심판이라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자, 예수 이름이 곧 심판을 행하시는 당사자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 예요.
죄, 의, 심판. 이걸 전부 다 예수님의 기능에 대해서 주의 이름의 기능에 대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라.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를 몰라서 그렇고 여기서 죄라 하는 것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워해서 그게 죄가 되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예수님이 세상을 세상이 지도자가 예수님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곧 세상 사람은 이렇다 라는 사고 방식에 전부 다 매여있다라는 것을 이미 땅땅땅 규정을 한 규정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끝으로 이제 하나 묻고 마치겠습니다. 자,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무슨일을 하십니까? 무슨일을 하십니까가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는 기준이 뭡니까 질문을 다시 할께요. 성령께서 일하는 기준은 뭡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만 심판 하십니까? 믿는 사람도 관여하십니까? 믿는 사람도 계속 관여 하시는 거예요.
관여해서 이미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계속 자기 살던 데로 살겠지요. 세상은 세상에 대해서 성령의 법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인간의 생존의 환경이라 여기고 뭐 나만 밥먹고 잘 살면 되지 하나님 덕분에 뭐 이런식으로 계속 버텨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함으로서 이제는 연습을 평소에 연습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연습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바로 드라마를 보든지 신문을 보든지 간에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성령이냐 악령이냐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한번 이렇게 계속 평가를 해보는 거예요.
평가를 해보게 되면 그 평가가 뭐냐? 어떤일이 나타나도 고맙고 감사함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맙고 감사하게 되는 것. 세상돌아가는 교회를 교회를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항상 무슨 일을 당하던지 간에 쭉 보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천에 계시는 구목사님이 롯데팬이예요. 부산사람이니까 롯데팬인데, 롯데가 시합하는데 졌어.
자, 아까 배운거 다 해봅시다. 자아는 부산출신이거든요. 부산출신이니까 자아에 뭐가 누적되어 있습니까? 내 고향 야구팀은 무조건 이겨야 되요. 무조건. 자아는 그것이 누적되어 있으니까.
이겨야 되는데 시합해가지고 제일 꼴찌가 꼴찌 비슷한 한화 대전팀하고 졌다. 졌다고 해 봅시다. 졌는데 기분이 어떨까요? 기분? 기분 나쁘지요. 기분 나쁜게 뭐냐 하면은 이게 자아가 예수도 믿고 롯데도 이기고 이랬으면 좋겠어. 예수도 믿고 롯데도 이기고.
우리나라합시다. 축구팀이 일본하고 했는데 4:1로 졌다. 4:1로 졌다. 아니 4:1로 이겼다. 기분 좋지요? 그런데 4:1로 졌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 4:1로 졌다 기분좋지? 할수 있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서 나왔는가? 평소에 자아는 이 밑에 있는 사탄의 요구에 의해서 감정이 생기거든요. 그러면 보고 배웠으니까 실습을 해보는 거예요. 도대체 축구가 뭔데! 축구를 옛날 말로 등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스튜핏 영어로 하면. 옛날에 축구를 등신이라고 해요. 한자로. 할아버지가 맨날 우리보고 너 축구 좋아하면 등신이라고 했어요.
축구가 뭔데. 그거 게임이잖아요 게임. 아이들도 뭐 컴퓨터 게임하면서 뭐 돈 주고 받는게 있는 모양이예요. 그거 잃었다고 울고 불고 하는거 있잖아요. 그 게임이 뭔데?! 인터넷 게임이 뭔데 그것 때문에 울고 불고 합니까?
그게 어디서 나왔는가? 보니까 이게 악마에서 나오는걸 어떻게 아느냐?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그 십자가는 결국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악마한테 앞잡이 되어가지고 롯데 이겨야 세상 좋은 세상으로 여기는 그 내 자아의 기분좋음을 때문에 예수님은 희생된거죠.
그러면 그 결론은 뭡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늘 즐거워 하고 감사해야 되지요? 해야되지요 라는 말을 강조하세요. 예수님 때문에 늘 기쁘고 고마워 해야되지요? 그런데 예수의 이름은 어떤 경우에만 이게 감사한다고 했습니까? 누구하고 부딪힐 때?
그래도 롯데가 이겨야지 그래도. 한화 저거 대전 저거 완전 눌러야되.‘ 그래도 라는 이것이 주님과 만났을 때 실제적으로 여기서 ’주님이여 이럴수 있습니까? 내가 롯데를 얼마나 응원했는데. 또 지면 못 올라가는데 질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해 놓고 누구 입을 칩니까? ’내가 미쳤어 미쳤어 그게 뭐라고!!‘
그런데 이론은 그게 뭐라고 라고 하고 내 가슴의 심정은 ‘그래도 기도 얼마나 했는데, 그때 안타 치라고 기도 얼마나 했는데.’ 이러한 이중성, 이중성에 의해서 주님은 오늘도 고난 받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것 건드리면 누구라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이 육의 본심을 어떻게 감출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 마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그 사실에 저희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