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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모임2

아빠와 함께 2019. 8. 30. 14:44
2019-08-30 12:25:03조회 : 10         
20190826여수모임 -극단B- 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190826여수모임 -극단B-

 

살아있는 물체가 살려면 방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방식. 마이웨이My way죠. 나의 삶의 방식. 살아오는 방식. 살아오는 방식은 내가 어쩔 수없이, 내 뜻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내 주변의 환경이 나를 그런 식으로 살도록 내몬 거예요. 환경이. 어린애가 있습니다. 어린애는 그냥 어린애만 있지를 않죠. 주위에 환경이 있죠. 환경과 어린애가 주고받으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애가 살아가는 방식을 거기서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겁니다. ‘아, 이럴 때 엄마가 소시지를 하나 더 구워준다. 이럴 때 아빠가 용돈을 내주더라. 이럴 때 맛있는 것을 주더라.’ 애가 그 어떤 방식을 터득하죠. 터득하게 되면 본인한테 이게 뭐냐 하면은 진리가 되는 겁니다. 본인한테.

 

그러면 애가 둘이 있다고 합시다. 둘이 있다고 하면 A라는 애가 아는 진리하고 B라는 애가 아는 진리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사는 환경이 달랐으니까. A는 노비고 B는 양반이라면? 다르죠. A는 노숙자고 B는 재벌가정이라면? 다르죠. 다른 겁니다. 이 다르다는 것, 이 다르다는 것을 고집하게 되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성경에 대한 도전이 돼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해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데, 이 동일한 게 뭐냐, 죄인으로 동일해요.

 

자, 죄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함을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게 죄에요. 하말티아(ἁμαρτία, 죄, 과녁에서 맞추지 못하다.)를 백날 연구 해봐도 그건 소용이 없어요. 안 나와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것이 죄에요. 로마서 3장 23절에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들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식은 내 스타일을 바꾸는 겁니까? 다른 방식이 있는 거예요?

 

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로마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죄의 반대말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의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이 스타일style, 이 스타일은 내 몸에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몸에서 나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님의 몸에서 나왔죠. 그러면 여기에 동의하신다면, 죄 때문에 영광이 되고 의 때문에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이 스타일이 하나님이 원하는 스타일이라면, 내가 살아온, 아까 이야기한 어린아이A, 어린아이B, 이 두 스타일은,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칙 앞에 부정되어야 하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이거는 아니야.”라고 부정되어야 되겠죠.

 

근데 부정을 해야 되는데, 교인들의 꼼수가 뭐냐,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경의 진리를 내 진리에다가 섞어 넣으려고 해요. 섞어 넣어가지고, 하나님 잘 믿었으니까 정작 내 노림수, 내가 노리고 있는 내 삶의 스타일을 크게 부흥시켜 달라, 크게 창대케 해달라, 이런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이런 꼼수를. 주님 시키는 대로 십자가 믿고, 복음 믿고, 선한행동, 성화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내 하는 일도 만사가 형통케 해주셔야 우리 거래가 주고받고, 주고받고 사이가 좋잖아요. 이래야 예수 믿는 보람도 있고 교회 다니는 어떤 기대와 희망도 있는데, 이거 없으면 나 이제 교회 그만 다닌다고, 이런 식으로 뭐 땡깡도 아니고 공갈치는 것도 아니고 이래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가 어디서 나오느냐, 이 스타일을 내가 고집해버리면 이 의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이 옛날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가 나올 것이라고 내가 일방적으로 고집하는 겁니다. 왜 그런 고집을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내가 착해야 하나님께 의가 된다고 하면서 뭘 포기를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존에 내가 살아온 스타일을 내가 더 이상 포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양쪽 다 좋다는 그런 계산을 하는 거예요.

 

성경 로마서 3장을 가봅시다. 과연 그런 스타일이 인정이 되는지. 3장 23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22절과 이렇게 연결시켜보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차별이 없느니라”하고 똑같은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점에서, 어느 대학 나왔느냐, 수입이 얼마냐 상관없이, 직분이 권사냐 집사냐 상관없이, 목사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죄짓는다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어요.

 

이걸 저는 어느 설교에서 무채색이라고 했는데, 시커멓게, 어떤 열 명이 있는데 열 명 위에다가, 거기다가 연탄을 다 뿌려놓으니까, 얼굴이 분명히 미남 같았는데 시커매. 못 생겼는데 시커매. 시커머니까 이거는 무채색이죠. 색깔이 검은색으로 다 칠해진 거예요. 비올 때는 무슨 색으로 입힌다고 했습니까? 보라색 물감으로 다 입히죠. 무슨 말인지 모르죠? 신촌 블루스 노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고 있잖아요. 보라색 물감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전부 다, 응애~ 응애~ 방금 태어난 애까지 전부 다 무채색으로, 검은색 물감으로 다 칠해진 거예요.

 

애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조상 죄죠. 아담의 죄죠. 아담의 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발점을 우리가 새로 합시다. 영광 돌린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영광 돌리지 못할 그러한 자질을 타고났다고 봅시다. 죄만 짓는 재주 외에는 다른 재주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요. 왜? 죄 값은 사망이니까. 뭐, 음주운전 박았다고 하지 마세요. 음주운전 박은 것도 주의 뜻이고. ‘밖에 안 나가는데, 그때 밖에 나가서 괜히 맞아죽었어.’ 이렇게 하지 마세요. 어차피 언제 죽어도 죽을 인간이에요. 맞아죽으나 엎어져죽으나 자빠져죽으나 어차피 죽을 인간입니다. 내 스타일을 보지 마세요. 내 스타일은 항상 내가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의가 뭐냐 하면은, 의는 25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님이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의를 대신해서 의를 생산해낸 거예요. 예수님의 의로. 예수님이 따로 의를 생산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법 지켜서, 말씀 지켜서 한 의는 갖다 버리라는 이 말이에요. 두 가지의 의는, 두 종류의 의는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같이 나란히 세울 수가 없어요. 같을 수가 없어요. 둘 중의 하나는 가짜거든요. 야고보서 2장 17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교회에서 유명한 말씀이에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러면 사람들이 궁금한 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면, 그러면 산 믿음이 되려면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이면 산 믿음이 되겠죠. 그러면 뭐가 궁금 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어떻게 행해야 그게 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모델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모델을 야고보서 2장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딱 두 가지에요. 아브라함이 자식 죽인 것. 그 다음에 기생 라합이, 그냥 라합이 아니고 기생 라합이에요. 항상 라합 할 때는 앞에 기생이 붙습니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거죠. 이게 무엇의 모델케이스라고요? 믿음 있는 행함. 행함으로 보일 수 있는 진짜 믿음의 사례가 아브라함이 자식 죽인 거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겁니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것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조국을 버린 거예요. 요새 조국이 유명하잖아요. 조국을 버렸다는 이 말은, 옛날 조국은 뭐냐 하면은 혈통, 혈족사회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자기 집안을 버린 겁니다. 자기 집안. 옛날 고대사회는 가까운 혈통끼리 모여 있는 거예요. 경주이씨가 유난히 십자가마을에 많다는데. 경주이씨. 안동권씨. 집안끼리 옛날에는 이렇게 골짜기하고 시내가 흐르면, 인구수가 얼마 안 되니까, 강물이 흘러야, 이게 농경시대기 때문에 늘 수자원이 공급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정착을 하겠죠. 정착하다보면 자식을 놓겠죠. 농사짓는 것은 혼자 못 짓잖아요. 모내기 할 때 힘을 모아야 되지 않습니까? 여자가 시집가는 것은 그 집안에 여자 직원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고추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당하리까”라는 그런 말이 나오죠. 노래도 있어요. 아주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생산될 농업생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협동의 결과입니까? 온 집안이 협동해서 생긴 생산물이에요. 집안의 어른이 있죠. 남자 중심의 어른, 부계사회의 혈통이 있죠. 여자는 여자 직원, 요새 여자직원이 그때는 하녀죠. 하녀. 월급도 없는 직원. 그럼 여자의 할 일은 뭐냐, 이 시집에 자식을 낳아주는, 특히 딸은 안돼요. 딸은 또 다른 집으로 가니까. 아들을 낳아 계속해서 신이 주신 이 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사에 합당한 여자가 아니고 남자, 아들을 낳을 때 그거는 아주 훌륭한 여인으로서 칭송을 받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정당성과 자기의 의로움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칭찬을 통해서, 그게 자아 또는 자아정체성이 확립되는 겁니다. 칭찬을 해야 고래가 춤춘다는 말이 있죠. 부부간에 맨날 싸우면 애가 바깥으로 도는 이유를 아시겠죠. 아빠엄마가 있는 이유는, 애들이 어릴 때부터 실익을 찾아요. 아빠엄마가 있는 이유는 행복한 가정이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에 있는 ‘나’라는 정당성이에요. 애들이. 애들이 영악합니다. 걔들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해요. 엄마아빠가 아무리 좋지만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의미 있는 존재로 붕붕 띄워달라는 말이죠. “엄마! 백점이야!”하고 올 때는 뭔가 얼싸안고, 문 열자마자 안아달라는 거예요.

 

근데 엄마가 하는 말이 “바쁘다. 백점? 니만 백점이고 너그 아버지 조국도 백점이었어. 받아쓰기 백점가지고 이게 어디서 빛을 내려고? 공부 더해!” 애는 오기가 나서 공부 잘하려고 하겠죠. 오기로 공부 잘하려고 하겠지만 사랑은 어디서 받습니까?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랑은 자기중심이에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사랑하면, 사랑은 게임오버에요. 끝났어요. 이기주의는 타고났다니까요. 누구보고 이기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다 이기주의면서. 타고난 거예요. 인간은 뭐냐 하면은 전부 다 괴물들이에요. 식구 몇 식구이십니까? 다섯 식구 전부 다 괴물들이에요. 삐지면 전부 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버립니다. 오지마라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거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잔소리한다고 해서 고쳐질 문제가 아니에요. 자식이 이상하게 교회 다니더니 효도를 한다. 그 효도하는 것 다 꿍꿍이가 있어요.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뭐냐, 바로 인간을 배제하는 것이 의에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의는 바로 선악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는다. 천국에서 필요한 의는 출처가 다르다. 너에게서가 아니라 너 말고 다른 데서 나오는 의를 네가 아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럼 네가 아니고 다른 데서 나왔으면 필히 그 과정 속에서 뭘 접어야 돼요? 뭘 포기해야 돼요?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를,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를, 알아서 기어야 돼요. 알아서 포기를 해줘야 된다고요. 이걸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 자기부인이라고 할 때 자기 마누라라는 뜻이 아니고, 자기부정이죠.

 

자기부정이라고 할 때 무엇과 연결시켜야 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와 연관시켰어요. 십자가가 현재성으로 살아있으려면 십자가의 능력이 뭘 만든다? 바로 나를, 지금 현재 있는 나를 현장성으로 뭘 만든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그런 결과물을 낳을 때 그 사람에 속에서 비로소 십자가의 빛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빛이 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내세울 게, 자랑할 게 하나님의 의밖에 없기 때문에. 왜? 자기는 내가 내세울 의가 없다 이 말이죠. 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자기 의를 꼭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착하니까 맛있는 거 더 주더라. 뭐 하나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내가 착하게 살면 복이 오고 나쁘게 살면 뭐가 온다? 저주받는다는 그것이 이미 어릴 때부터 자기한테 삶의 스타일이 된 거예요. 행여 실수로 나쁜 짓 했다면 후딱 회개하고. 금요철야기도나 새벽기도 나가가지고. 그래서 목사가 새벽기도 안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새벽기도 나오면 목사가 겁을 내요. ‘저 집안 무슨 문제 났다. 사단 났어. 저거 분명해. 집에 무슨 부도가 났던지, 애가 사고 쳤던지 뭔가 있어.’ 해결되면 그 다음부터는 새벽기도 또 안 나오죠. 해결됐는데 왜 나와요. 안 나오죠.

 

둘째 시간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의는 그냥 십자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냥 십자가라면 평소에 내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죠. 그러면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데, 선한 일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 믿어주기가 여기에 포함이 돼버려요. 예수님 믿어주고 내가 원하는 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의를 원한다면 나는 거침없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게 뭐 지금 자기부인이에요? 주님을 모독하는 겁니까? 주님 모독이죠.

 

복음 실컷 배우고도, 오직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요. 그거 어디 써먹으려고 그거 믿어요? 왜 그걸 믿죠? 어디 써먹으려고요? 그 꼼수를 주님이 모를 줄 아십니까? 나도 아는데. 그게 무엇에 유익해서, 인간은 실익을 얻지 않는 짓을 안 해요. 모든 인간은 실익을 위해서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거치는 돌,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자빠지라고. 십자가 이용하고 하나님 이용하고 예수님 믿음으로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챙기려는 그런 것들은 십자가 능력 앞에 다 자빠져라! 인간아! 다 자빠지는 거예요.

 

자, 어려운 대목인데 요한계시록을 봅시다. 오늘 본문이 요한계시록 22장이에요.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을 한번 봅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아, 이거 행함이네. 믿음, 믿음 하다가 결국은 행함이네. 그래, 믿음+행함이다. 마트에 가면 세일할 때 뭐 합니까? 1+1하죠. 이건 믿음+행함이다. 이거는 신앙생활의 두 바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두 날개다. 믿음만 하면 안 돼. 날개하나로는 독수리처럼 날아가지를 못해. 믿음에다가 뭘 추가하라고 합니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을 추가해야 하나님께 높아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 행함이 뭐예요? 교회에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뻔해요.

 

자,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바로 호세아 14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호세아는 구약 1269페이지에 있습니다. 아이고, 성도님들은 잘 찾으시네요. 보통 교회 교인들은 호세아가 구약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데 대번에 찾으시네요.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의인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뿐이에요.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은 걸려 넘어지라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의 선의 분류와 선의 항목과 리스트와 악의 항목을 이미 딱 정해놨어요. 자기들은 어디 쪽에 속하겠습니까? 자기가 법을 정해놨으니까 어디 쪽에 속하겠어요? 자기들은 선에 속하고 아주 망나니 같은 인간들은 악에 속하고. 그 중간에 여섯 단계를 나눠가지고 약간의 퍼센테이지가 선 지향적인 쪽과 이쪽의 악 지향적인 쪽으로 색깔별로 나눈 거예요. 검은색에서 흰색 중간에 옅은 회색의 다양한 그러한 항목들을 나열해가지고, 저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 저 높은 곳에 누가 앉아있습니까? 자기들이 앉아있죠. 저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그것이 율법을 적용하는 원칙으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이미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착된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인정했어요. 옳다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인정해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뭐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너희들이 줄 세워놨잖아.”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그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는 마귀새끼다.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다 이 말거든요. 그러면 줄을 세워놨는데, 그러면 열차부분 말고 기관차부분이 악마를 갖고 있는 오야붕이라면, 그걸 부러워해서, ‘아이고 나도 저렇게 성공해야 되는데. 나는 어느 세월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느냐. 너무나 믿음 좋다.’ “권사님! 믿음 너무 좋아요.” 이런 것 있잖아요.

 

기독교 방송에 그런 것 많이 나온다고요. ‘새롭게 하소서’에 보면. 연예인들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우리 차범근 장로님! 너무 훌륭해요.” 돈한테 누가 이깁니까? 아무도 못 이깁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게 하나의 내가 도달할 삶의 스타일, 내 스타일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긍정할 이유가 발생되는 거예요. 긍정할 이유가. 아, 내 스타일은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못사니까. 나도 애써 노력하고 성경보고 새벽기도에 나가면 주께서 은혜 주셔서,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나도 거침없이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선교할 수 있는, 그때는 쌍시옷을 넣어가지고, 나는 믿씁니다. 믿씁니까? 믿씁니다! 믿씁니까? 라고 묻는데 답변을 안 할 수가 없지요. 믿씁니까? 믿씁니다. 믿씁니다*10 방언 터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방언 터지지 말고 차라리 코피나 터져라.

 

중간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거쳐 넘어지는 것이 다 빠져버렸어요. 거쳐 넘어지는 것.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갑자기 노선이 바뀌었어요. 물꼬가 바뀌었어요. 주님한테 가는 말씀이 잘난 나한테 와가지고 내가 막 위대해져버렸어요. 이 교회에 모델이 되고. ‘아이고, 저 집사님 아들은 공부도 잘하지, 사는 것도 안정이 되지, 인물 되지, 키 되지, 스타일 되지, 말 되지, 성경 많이 알지. 나도 좀 저 사람처럼 되면, 나도 그 정도면 형편이 피지 않겠는가?’ 형편이 피죠. 다 같이 넓은 길로 가는데, 지옥 가는데 힘이 모자랄까 싶어서 으쌰으쌰 해서 격려가 되죠. 지옥 가는데 격려가 되는 거예요.

 

중간에 자기를 버려야 되는데,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무거운 짐 같은 나를, 등허리를 끌고 가는데, 젊을 때는 그게 가능한데, 펄펄 날아다니니까. 근육 안 아프지요. 머리 안 빠지지요. 인물 되지요. 교회 일 봉사하니까 칭찬하지요. 나이 70만 넘어보세요. 퇴물이 돼요. 퇴물. “장로님은 좀 빠지시고요.” 젊은 집사가 대놓고 욕하고. “장로님은 좀 당회에 오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젊은 것들이 내가 우리 아버지 돈 가지고 어떻게 한 줄도 모르고, 이것들이 무시하고.” 교회에 전부 다 늙은 사람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했어요. 80넘어 늦게 온 초신자 한테는 이거 뭐, ‘아이고, 니가 어느 세월에 나처럼 장로가 되겠나.’ 봉사하면서 깔보는 이 이중성을 막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의 기업체의 장로로 백날 행세해봤자 집에 가면 자기 부인 권사한테는 쪽도 못써요. “당신 꼬라지를 봐라. 당신이 장로가?” 자기 부인이 대놓고 막 이야기하죠. “이것이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눈뜨는 거봐라. 이거 눈뜨는 거봐라. 이거 또 눈 떴다. 이거 감당 못하는데 어쩌라고 또 눈을 떴나. 또 하루 세끼 챙겨달라는 말인데, 니가 좀 밥해먹어라. 아주 지긋지긋하다 정말. 남들은 다 죽는데 니는 왜 이렇게 명줄이 기냐? 이 괜찮은 권사가 니 때문에 나쁜 년 다 됐다.” 탓을 남 탓까지 돌린다고요. 부부싸움이 그렇게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중간에 뭔가 나를 처리하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쓰레기봉투 드릴까요?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계속. 갈 때까지 가보겠다고. 고지가 바로 저기라고. 조금만 노력하면 저쪽 성화됐다고 칭찬받는다고. 교회는 좋죠. 우쌰우쌰해서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남는 장사니까. 교회는 뭘 추구하느냐, 이걸 추구해요. 실익. 어려운 사람, 돈 안 되는 사람은 가라. 돈 되는 사람만, 십일조 하는 사람만 모여라. 실익이에요. 실익. 돈이나 이익만 주어지게 되면 아주 훌륭한 신자가 돼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깨달음을 넘어선 사람이에요. 깨달음을 넘기 전까지는 내가 행하다가 깨달음을 넘어서고 난 뒤에는 주께서 행함의 대행자로 나서버려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 나온 사람의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자기 행함이 아니고 뭡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면서 발생된 행함들. 그 행함들의 목적이 뭐냐, 목 베인 영혼들이에요. 어떻게 지가 각오해서 목 베일 수가 있겠어요? 주께서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주시니까 베이죠.

 

그러한 예로 기생 라합의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자, 아까 두 가지를 이야기해봅시다. 자, 한번 복습해봅시다. 진짜 신앙다운 행함의 첫 번째 예는 뭡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갈대아 우르에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고 신들이 살아요. 신들. 신 정도가 아니고 신들. 다수의 신들을 섬기는 지역에서, 거기서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거기에요. 왜? 종류대로 백날해도 그 신이 그 신이고 그 신이 그 신이에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존재. 절대적 존재기 때문에, 절대적 존재에 추상적인 존재와 관련된 존재가 있고 그 부수적으로 자기 역할을 하부 신에게 그 역할을 맡겨요. 폭풍이 이는 신, 농사짓는데 비 오는 신, 서리 오는 신, 여러 가지 신들이 하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 가는 날 보는 것, 결혼할 때 보는 것, 뭐 이렇게 동짓날 떡 할 때 하는 신. 신이 다 있죠. 무슨 날에 이사를 가야 돼요? 손 없는 날에 이사 가야 돼요. 손 없는 날에. 그러니까 성도가 어느 때에 이사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까? 손 없는 날에 가면 안 되고 손 있는 날에 가야 되죠.

 

성도가 주택을 구입할 때 어떤 주택이 제일 맘에 들어요? 귀신 나오는 집이 아주 헐값에 나오죠. 귀신 나오는 집에 가습기만 설치하면 돼요. 왜? 물 나오니까. 거미줄은 빗자루 하나 사가지고 쳐내면 돼요. 성도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함께 있죠. 습기 차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도 습기 차는데 같이 습기 차면 좋잖아요. 신들이 뭐라는 것을 알아요. 신들은 신을 위한 신들이 아니에요.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거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바로 이 우상 신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거래할 때 조건이 뭐냐, 헬프 미HELP ME! 어쨌거나 저쨌거나 살려주세요! 가뭄이나 홍수가 나지 않게 해주옵소서. 농사 신을 심어놨는데, 그 다음부터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하되 나머지기는 어디에 맡긴다? 하늘에 맡기는 거예요. 이거 동양철학이 아닙니까? 유교에 나오잖아요. 신에게 맡겨요. 신에게 맡겼는데, 신이 만약에 농사를 잘 되게 해주면 까짓 거 추수감사절 그게 문제겠습니까? 드리겠습니다. 드린다는 거예요. 그 제사가 창세기 4장에서 누구의 제사입니까? 가인의 제사입니다. 가인의 제사.

 

제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가인이 살고자 하는 제사, 살고자 하는 신과 제사 드리는 나를 죽이는 신, 어느 쪽이 참된 신입니까? 나를 죽이는 참된 신이죠. 왜냐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서 죽었으니까. 그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인간들이 다 조작해놓은 거예요. 우상은 아예 없어요.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뭘 붙여도 없어요.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삼위일체, 백날 붙여도 그런 신은 없어요. 왜? 나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지적해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당하고 죽어도 괜찮아요.

 

또 나왔다. 또 나왔다. 카드가 또 나왔어요. 눈에 보이는 내 몸을, 스페이스 케이를 없애주는 신이죠. 이걸 없애줌으로서 진짜 하나님이 생각한, 다이아몬든 퀸을, 창세전에 예정된 나를 이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줄 때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거예요. 스페이스 케이, 나만 보일 때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 나는 이제는 내 힘으로 안 살 거야. 다이아몬드 퀸, 주님의 힘으로 살 거야. 주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바뀌는 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하죠. 왜? 가리었으니까. 카드를 잘 보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에요. 애들은 있어도 괜찮아요. 스페이스 케이, 이게 빠져야 돼요. 이게 빠진다고요. “주여, 오늘도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이게 기도제목이에요. “나는 날마다 어떤 식으로 오늘도 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애를 썼습니까? 얼마나 착한 일 해서 복 받아서 내일 또 살겠다고 내가 악바리처럼 애를 썼습니까?”

 

참새를 보세요. 참새에게 내일이 있습니까? 들풀에게 내일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들풀의 특징은 뭡니까? 저녁이 되면 베여가지고 내일 어디에 들어가요? 아궁이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누가 길러줘요? 하나님이 진짜 들풀을 길러줘요. 들풀이 미리 알았으면, 들풀로 자라고 있으면서도 내일 들어간다면 벌벌 떨면서, “하나님이여, 이 들풀이 내일이 들어갈 건데, 아니 왜 지금 죽기 전에 잘 먹인다는 뜻입니까? 하나님이여!” 이래 나올 거예요. 들풀은 그런 생각도 안 해요. 그저 오늘만 살자! 오늘만 살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누가 불렀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그 사람은 그 노래 불러서 돈이 좀 됐어요.

 

절대적인 신이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다가 니가 복이 된다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났을 때, 니 자식을 니 손으로 죽여라. 근데 그 자식이 미운 자식이 아니고 어떤 자식입니까? 세상과도 안 바꾸는 자식이에요. 서로서로 어른끼리 싸울 때는요, 사람이 성격상 참아요. 성격 좋으신 분이 여기 계시거든요.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어요. 그냥 참아요. 근데 자식을 건드린다? 이거는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나를 건드리지. 자식을 건드린다? 그 자식이 가출 열두 번 하고 이럴 것 같으면요. 참, 주의 뜻이라고 좋은 변명거리가 있겠지만, 나는 절대로, 내가 다쳐도 다치지 않아야 될 자식. 나는 굶어도 절대로 굶어서는 안 될 자식.

 

친정엄마가 딸을 너무 좋아해도요. 딸이 결혼생활 하는데 곤란해요. 시도 때도 없이 자기가 비밀번호 다 바꿔가지고, 자기가 알아서 바꿔가지고, 사위는 뒤늦게 “장모님, 우리 집 비밀번호가 뭐예요?” 이정도로 자기 집처럼 해가지고 “이 자식이 어떤 딸인데,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맨날 입에 발린 소리가 이런 자식, 이런 딸은 없다는 거예요. 없죠. 자기 딸이니까. “내 딸은 평생 말썽 한번 피운 적이 없다.” 사위한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협박이에요. 근데 우연히 시어머니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니 자식만 자식이가?” 또 싸워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사는 보람은 나의 기쁨, 그거는 니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니고, 니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누구나 다 있어요. 그런 것이 누구나 다 있어요. 주님께서는 기다렸어요. “보자~ 저 인간이 뭘 그렇게 지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지를 보자. 저거 딸이네. 내가 우에 죽여 버릴까?” 차라리 음주 운전하는 자가 죽어버리면 애통하기나 하고 억울하다고나 하지만, 만약에 내 손으로 내 애를 죽인다면, 아, 이거는 참을 수 없습니다. 이거는 정말, 그걸 어떻게 감수를 합니까? 감당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죠. 아까 믿음 있는 행함은 뭐다? 이런 거죠. 이걸 오늘 제목으로 한다면 저는 ‘극한’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극한에서 일을 시작한다. 극한에서. 인간의 어중간한 회색지역이 아닙니다. 극한에서부터 일의 스타트를 해요. 극한에서부터. 니가 극한을 아냐? 이 말이죠. 아버지에게 미운 자식이 아니에요.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 사랑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여야 될 자식.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려야 될 보석. 내가 애지중지한 그 명품, 루이비통 명품가방. 내가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그 가방을 내가 잃어버려야 되는 그런 사태.

 

다시 말해서 내가 귀한 것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기에 버티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과 사건의 연발. 그게 바로 주님의 스타일입니다. 주님 스타일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겁나가지고 이제는 나에게 귀한 것 없습니다. 귀한 것 다 가져가세요. 간식도 가져가시고 냉커피도 가져가세요. 꼭 내놓는 게 별로 안 좋아하는 것 내놓는 거예요. 지 딴에는 이제는 하나님하고 협상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내 귀한 것 이거 가져가세요. 1960년대 이거 도둑맞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가지고 하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숨기기에요. 인간이 남과의 모든 대화나 행동은 가장 귀한 것을 빼돌리는 거예요. 누가 그런 짓을 했습니까? 야곱이 에서의 자객을 만났을 때, 이게 야곱 생각이었거든요. 이 밤중에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은, 형이 그 전에 사백 명을 몰고 들어왔잖아요. 죽이려고 온 거예요. 미움이 계속되니까. 인간의 미움이 중간에 바뀔 리가 없으니까. 얍복 강가에서 나를 죽이려고 했다 이 말이죠. 근데 야곱의 본성이 뭐냐, 죽음은 실패고 내가 살아남는 것은 인생 성공이라는, 이게 극히 야곱적이에요. 그동안 인간을 상대하면서, 삼촌상대하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인간이라는 전체 속에 비전체로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까발리기 위해서 흔해 빠진 인간들의 그 작은 모습으로 나에게 도전할 줄이야! 나의 죄를 들통 낼 줄이야! 야곱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또 이겼다고 할 때, 또 이겼다, 내가 진리가 있겠어? 하는데 날이 샌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떠나야 된다. 밤의 세계는 천사의 세계. 낮의 세계는 인간이 자기의 노동력을 과시하는 세계. 밤에는 인간의 노동이 스톱이 되면서도 생명이 부지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부지되는 시간대, 그 시간대로 사라지는 거예요. 야곱이 하는 말이 “나는 죽었다. 나는 죽어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 줄을 몰랐다.” 내가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는 것은 서로 의견이 안 맞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백날 믿어봐야 믿는 내 주체가 전혀 하나님과 상반되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서 이야기했죠. 백날 하나님께 영광 돌려봐야 인간은 타고난 것이 죄밖에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안 돼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돼요. 교회 목사는 좋아하죠. 돈 바치고, 시간 바치고. 목사는 좋아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니까요. 오직 영광은 뭡니까?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의 피를 믿고, 믿어주는 것이 아니고 그 피를 믿음으로서 나는 그 맞은편에 뭐하라? 나는 시답지도 않은 존재이었음을, 내가 하는 모든 시도가 주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요소로서 주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사실을 같이 경유해서 발견할 때,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내 몸을 통해서 발산되는 순간입니다. 몇 초 가지도 않지만.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몇 초 안 가야 돼요. 왜? 내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주께서 그 순간 나를 소유한 겁니다.

 

쭈쭈바를 아시죠? 쭈쭈바. 아주 단단한 합성수지로 만든 용기에 담아 얼린 얼음과자가 안에 들어있죠. 쭈쭈바 앞을 빨아먹으면 맛있는 게 나오는데, 여기에 무슨 실수를 해서 쭈쭈바가 찢어져보세요. 갑자기 여기서 뭐가 분출합니까? 빨간 얼음조각이 분출하겠죠. 내 인생은 누구를 위해서 산다? 나를 위해서 살아요. 타고난 거니까 그걸 자꾸 회개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회개한 것이 더 나빠. 자기가 뭐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반성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반성해봤자, 나 반성했으니까 복달라고 나올 위인이기 때문에, 반성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요. 없는데, 중간에 성령을 통해서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구멍을 뚫었는데, “나는 죄인이다.”라고 튀어나와버렸죠. 이게 몇 초 가지도 않지만, 하여튼 몇 초를 가지 않지만, 내 인생 구멍 났다가 되죠. 내 인생 구멍 난 거예요. 신자입니다. 내 인생에 구멍이 나야 돼요. 뭐라고 칭찬을 해도 그 말 듣지 마세요. 지는 내 구멍을 몰라. 내가 구멍 난 것을 몰라. 내 본색이 주님 십자가 앞에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인 것을 니들이 뭘 알아? 내 사연을 알아? 나는 죄인이야. 자꾸 닦달을 내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이거는 미친 사람이라고 또 욕하죠.

 

바로 아브라함이 구멍 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자기는 이삭을 죽입니다. 드라마 끝에 보고 뭐 안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의 머리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수풀에 양을 마련해놓은 하나님은 없어요. 그거는 뭐냐 아브라함이 그것을 기대할 자격도 못되고, 그러할 권한도 없어요. 제가 주일 낮 끝에 그런 설교를 했지만, 저격수의 할 일은 뭡니까? 내 총에 저격되는 그 사람의 직업이 뭐고 살아온 인생이 뭔지 알 필요가 없어요. 명령대로 쏴라고 하면 쏘고 돈 받아서 챙기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걸 믿었어요. 아브라함의 순종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에요. 자기의 능력의 믿음으로 한 게 아니고,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내 노력에서 믿음이 나온 것이 아니고 선물로 와서 이 구멍 난 것이 발견된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뭘 운반했습니까? 겉으로 보면 내가 내 아들을 잡은 것으로 되어 있겠지만, 속에는 뭐가 들어있겠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내 후손을 통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는, 그런 일이 내 속에 미리 예고편으로 알려 준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구의 때를 봤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바로 내 때 보기를 기대했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했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성경해석 할 때 어느 것 지키면 복 받습니까? 하지 말고 내려가세요. 구멍을 파세요. 시추하세요. 시추해보면 모든 것이 예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이렇게 지하자원에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천연가스에 비하겠습니까?

 

“목사님, 이거 하면 복 받습니까? 이거 열심히 하면 되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까?” 이렇게 깔짝깔짝하지 마시고, 깊숙이 내려가세요. 내려가게 되면 내가 뭘 한다는 것도 주의 은혜로 하는 것이지 내가 행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내가 배고파서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배고프게 하셔서, 주의 주시는, “어! 냉장고에 밥이 있네. 웬 밥이야?” 지가 밥을 먹게 된 거예요. 배고픈 것도 누구 뜻이다? 주의 뜻이고. 마침 밥이 있는 것도 누구 뜻이다? 주의 뜻이에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우리가 거지냐?” 그렇게 하지 마시고. “니가 거지정도면 말을 안 해. 죄인이야. 내게 대드는 인간이야. 니가. 니가 거지정도 같으면 말을 안 해. 그 정도 같으면 내가 인간이라고 해줄게. 거지가 아니고 나한테 반발하는 인간이야.” 매사에 반발해요. 매사에 우리는 앵그리 버드Angry birds, 화난 새입니다. 매사에 우리는 화를 내고 있어요. 안 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 자체가 지옥이니까 꾸역꾸역 참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 내가 지금 믿음이 좋아서 참습니다.” 이런 식이라.

 

두 번째 나오는 예가 누굽니까? 기생 라합이죠. 라합이 거짓말을 했습니까? 라합 말고 여리고 성에 있는 다른 주민들이 거짓말을 하고 살아왔습니까? 어느 쪽이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의 이스라엘 정탐꾼이 오기 전까지는 같은 혈족이니까 기생 라합이나 다른 식구나 똑같아요. 어떤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를 모를 때는. 애굽에서 있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사이좋은 관계입니다. 사이좋은 관계기 때문에 그들의 정의, 그들의 진리는 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다.”에요. 내가 살아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은 인간의, 한국조선민족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 이걸 어떤 쪽에서의 주장은,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똑같은 자료를 보고 둘이 달리 보는 거예요. 둘이 공통점이 있어요. 어째나 저째나 우리는 살아 있잖아. 그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나도 살아 있잖아. 대한민국의 사람으로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있거든요. 뭐냐 하면은 위안부라는 것은 없고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정식으로 자료를 보게 되면. 그 자료를 공개한 겁니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전부 다 엉터리가 된 겁니다. 일제감정 때문에.

 

“호남지역의 쌀은 수탈이 아니고 수출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양반이 인도했다고 하지만, 양반이 차지했다고 하지만 70-80퍼센트가 노비였다. 80퍼센트를 압제하면서 그들이, 양반끼리 언어와 문자, 한자를 다루면서 그들은 자기나라인 것처럼 착각했다. 그게 유교다. 유교적이다. 그 유교를 아직도 주장 하느냐? 이 인간들아! 아직도 근대국가 되지 못하고 근대인들이 되지 못하느냐?” 이게 반일 종족주의에요.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우리보기에는 어느 것이 정의입니까? 내 주장이 뭐가 돼요? 내 주장이 정의죠.

 

프로타고라스가 하는 말이 있어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했어요.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이것이 모든 진리의 수레입니다. 누가 극한이에요? 오늘 제목을 극한이라고 합시다. 누가 극한입니까? 나 여기 있다. 일단 나 건드리지 말고 두 번째 내 자식 건드리지 말라. 죽여 버린다. 고유정이라는 여자가 남편을 왜 죽였다고 합니까? 자기를 성폭행하려고 해서 먼저 죽였다고 합니다. 약 먹여가지고 먼저 죽였다는 거예요. 성폭행하려고 하는 기미가 있어가지고. 그러면 성폭행이 왜 나쁜데요? 그 사람한테 그러면 성폭행이 왜 나쁩니까? 내가 기분 나쁘잖아. 당신 기분 나쁜 것이 왜 진리죠?

 

물어봅시다. 내가 기분 나쁜 것이 왜 진리입니까? 여기 혹시 손들고 답변할 사람. 내 기분 나쁜 것이 왜 진리죠? 왜 진리이어야 되고 정의이어야 됩니까? 나는 무조건 안 다쳐야 되고, 나는 무조건 건재해야 된다는 이것을 내부에 감추고, 숨기고 살아온 거예요. 이 숨긴 것을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누가 공격합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가지고 공격하는 거예요. 십자가 끝이 뾰족하죠. 뾰족한 것으로 파내버려요. 세상은 니 중심밖에 모르지? 세상은 내 중심이야. 골로새서 1장 16절. 파내는 겁니다. 매일처럼, 매시간 그렇게 되지 않아요.

 

우리는 평소에 나의 마이웨이, 내 스타일대로 살다가 쭈쭈바 구멍 터진 것처럼, 갑자기 어느 날, 내가 지금 말씀을 보면서도 이 말씀과 상관없이 나만 챙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도대체 이게 있을 수 없는, 나한테 이런 생각이 나올 수가 없는데 이게 왜 나오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보증이에요. 성도가 그런 거예요. 성도는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멍 난 사람이에요. 아, 제목을 바꿀까? 구멍 난 사람으로. 구멍 난 사람이에요. 빵꾸난 사람이에요. 빵꾸.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말미암아 기존에 내가 살던 내 환경을 전부 다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다가온 이스라엘의 침략군 앞에서, 그들은 전부 다 현실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정의도 모르고 까맣게 모르면서, 서로서로 아는 체 하면서 주고받고 정보를 교환하는 거짓말의 제국, 나라였다는 것을 기생 라합을 통해서 증거 했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할 일은 괜찮죠. 이 짐승 같은 아, 대한민국이 모조리 다 민주당이든 한국당이든 이 세상 어떤 정당이든 관계없이,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거짓의 기운, 악마의 기운으로 지배당하는 나라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 나라를 어떻게 하면 개혁시키고 이 나라를 신앙의 나라로 바꿀까요? 바꾸지 마세요.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봅시다. 지금 2분 남았어요. 시간 딱 맞춥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나는 매듭이 처음이고 나중이다. 그럼 뭐도 포함이 됩니까? 중간도 주님의 뜻대로 되죠. 성도는 이게 구멍 난 순간, 빵꾸나는 순간 이걸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죄지었다고 했던 어릴 때, 열네 살 때, 스물한 살 때 뭐 이렇게 음주운전 했던 것, 그것마저 누구의 행함이다? 주님의 행함이니까, 행함대로 우리는 상을 받는 거예요.

 

음주운전해서 우리는 천당 가는 거예요. 그때는 몰랐죠. 내가 잘못해서, 내가 건방져서, 내가 예수를 몰라서 죄지었다고 했는데, 알파와 오메가요를 딱 대입하는 순간, 그랬었어야 했었어요. 나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 태어났었어야 하고. 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로 태어났었어야 하고. 나는 저 남편을 지금에서는 바꾸겠다고 하고 싶지만, 내가 그때로 돌아가도 역시 돌아오는 패가, 백날 패 돌려봐야 그 패가 그 패에요. 지금 남편에게 딱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 몸은 내 역사가 아니고 주의 역사니까. 창세전부터 정해놓은 거예요. 내가 할 것은 뭐냐, 감사밖에 없어요. 감사하면서 반드시 있어야 돼요. 뭐냐, 나는 주 앞에서 시시합니다. 따라서 나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극한이지 내가 극한이 아닙니다. 주님이 진리지 내가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바꿉시다. 나는 진리가 아니요, 나는 생명이 아니요, 나는 길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주의 뜻대로 된 가운데 있었지만, 우리는 내 일에 바빠서 몰랐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해줄 때, 비로소 내 중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주께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