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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모임 1908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8. 29. 18:11
2019-08-26 23:09:02 조회 : 159         
여수 모임 190826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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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 19-08-29 09:29 
20190826여수모임 -극단A- 

자,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할 본문을 제가 마련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책 제일 마지막에 있는 겁니다.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성경 제일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최종적이라는 뜻이죠. 마지막이라는 것은 최종적이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안 주겠다는 거예요. 안 주겠다는 말은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마지막에, 최종성이 이래되어버리면 이것은 거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기준, 또는 기준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준이에요. 그러면 이 기준에 미달되어버리면 벌칙이 있겠죠. 기준의 마지막, 최종적이니까, 모든 기준은 여기서 다 끝났습니다. 더 추가하거나 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이 기준에 위반이 되면 벌칙이 있겠죠. 그 벌칙이 뭘 하느냐 하면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한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한다.” 이게 벌칙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하면, “뭐, 안 먹으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이 들겠죠. 안 그래도 요새 제철과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포도, 뭐 복숭아, 많잖아요. 

물론 복숭아와 생명나무, 포도와 생명나무, 수박과 생명나무의 차이점은, 일반 복숭아나 포도나무는 이게 먹어도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먹어도. 먹어도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일시적으로는 목숨이 유지가 되는데, 그 다음에는 얼마 먹고 난 뒤에는 목말라지죠. 목말라집니다. 인간의 몸이 있는데, 여기에 복숭아가 있다고 합시다. 이 복숭아를 먹고 싶어요. 먹고 싶어서 먹으면 일시적으로는 속이 시원하죠. 그러나 그 복숭아 한두 개 먹고는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니니까. 이게 다시 목마름이 되는 거예요. 또 갈증이 생긴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이 과실이 문제가 있습니까? 인간의 몸에 문제가 있어요? 어느 쪽에 문제가 있어요? 인간에게 문제가 있죠. 복숭아, 포도, 옥수수... 뭐, 다 먹어도 이 몸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몸이. 그래서 이 몸에다가 생명나무를 집어넣어봤자, 이 생명나무가 흡착이 안 되죠. 뭐가 문제입니까? 이 몸이 문제기 때문에 그래요. 몸이 문제기 때문에. 몸에는 먼저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이미 선악과실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악과실을 따먹은 자는 절대로 뭘 따먹을 수가 없다? 생명나무과실을 따먹을 수 없다는 그 준칙, 그 규칙이 에덴동산에 이미 정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몸 가지고 성경공부하고 부흥회 다니고 교회 다니고 백날 다녀봐야, 이게 선악과요소가 있는 이상은 아무리 성경공부 많이 해도 이 몸이 영생이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를 수가 없어요. 우리 몸에 문제가 있어요. 성경말씀을 배웠다면 이 선악과가 마중을 나오죠. “그래, 선해지자! 악은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해야지!”라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대했던 그 몸, 더 바디the body는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몸은 아니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될 그런 몸을 원했건만,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아는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피하는 몸이 된 거예요. 기피하는 몸을 가지고 교회 다니고 십일조내고 선교하고 기도한다고 해봤자, 몸이 벌써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가 여기 인간의 몸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그러면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책은 여기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보면 나와요. 굉장히 긴데요. 여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기니까, 중간에 보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이렇게 되어 있죠. 목 베임을 받았으니까 이거는 살은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었죠. 근데 죽었는데, 나를 죽게 한 이유가 있어요. 원인이 있는 게 뭐냐 하면은 예수의 증거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나와 있잖아요.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나한테 뭐가 미쳤는가 하면은, 내가 목 베임을 당한 거예요. 목이 다 달아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몸을 생명나무에 흡착이 되고, 결탁이 되는 몸이 되게 하려면 조치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 몸이 죽기는 죽어야 되는데 어떻게 죽느냐 하면은, 무엇에 죽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의 증거에 대해서 살해당하든지 목 베임을 당하든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든지, 뭐 이렇게 일어나야 된다 이 말이죠.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니까 우리 신앙생활하고 점점 더 멀어져가죠. 지금 이 성경, 요한계시록과 점점 더 상관없이 되어버렸죠. 

애 키우고 살림하고 빨래 툭툭 털어서 널고 아침에 밥하고 끝. 이게 우리 생활이잖아요. 갑자기 강도가 와서, “니가 예수 믿는다면서 니 목을 내놓아라!” 이런 현상이 없죠. 전혀 현실성이 뚝 떨어지는 이야기를 요한계시록에서 한다 이 말이죠. 예수의 증거에 대해서 죽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놀랍게도 사망이라고 하지 않고 첫째부활이라고 해요. 부활. 이걸 설명해야 되겠죠. 우린 분명히 죽잖아요. 죽어야 되는데, 첫째사망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부활이 되는 거예요. 죽었는데 부활이 되는 거예요. 

자, 하나의 예를 들면, 제가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카드를 가져왔습니다. 오천원주고 오다가 샀어요. 카드가 이렇게 있는데, ‘스페이스 케이spade K’ ‘다이아몬드 퀸diamond Queen’ 두 장이 있는데, 앞에 스페이드 케이가 돼버리면 스페이스 케이만 있고 뒤에는 안 보이죠. 근데 이걸 잠깐 치워보자 이 말이죠. 치워버리면 뭐가 있죠? 다이아몬드 퀸이 나오죠. 이게 스페이드 케이로 가리어져있으니까, 가린 것이 뭐냐, 선악을 아는 몸으로 가리어져 있어요. 근데 앞에 이 스페이드 케이, 이 몸을 죽여 버리면 사망의 몸이 아니에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뒤에 가리어진 다이아몬드 퀸, 예수님의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부활의 몸이 나오는 거예요. 

스페이드 케이, 내 몸이 죽음으로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다이아몬드 퀸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죽일 때 뭐 목 베어서 죽여도 되지만, 그런 죽음만 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양원에 가서 서서히 죽는 것도, 코에다가 호스하나 꽂고 서서히 죽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거거든요. 아주 도발적으로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목 베는 것 말고, 서서히 기침하다가 죽는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어쨌든 간에 그 죽음을 애도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물에 빠져서 죽든지, 세월호 배타고 빠져 죽든지, 애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어차피 이거, 스페이드 케이, 내 몸은 치워져야 되는 거예요. 

이 치워지는 그것을 가지고 세월이라고 해요. 세월. 갑자기 세월호 생각이 나는데, 세월. 시간. 흐름. 이게요, 다들 남고 때나 여고 때 이뻤잖아요. 그런데 누가 나를 힘들게 해요? 세월이죠. 세월은 지금 하나님의 일이 확실하게 잘 진척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 가리어진 것을 이렇게 치우는 겁니다. 스페이드 케이를 치우면 다이아몬드 퀸이 나오도록.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이 가리어진 다이아몬드 퀸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없으면 그건 신자가 아니죠. 없으니까 자기 몸만 죽어라고 지켜야 되죠. 운동하고 근력 키우고. 사랑에는 나이가 필요가 없다느니~ 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하면서 청춘을 돌려달라고 바닥을 치면서 뭐 난리도 아니죠. 

그래도 누가 우세합니까? 내가 우세합니까? 세월이 우세합니까? 세월이 우세하게 되면요, 목부터 척추 모든 게 중력에 반해가지고 허물어집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와요. 모든 척추가 허물어지고, 연세 많으신 분한테는 죄송합니다만, 잘 안 들으신다니까 제가 마음 놓고 합니다만, 모든 것이 주저앉을 때, 직업이 필요합니까? 뭐 민정수석 이런 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어느 대학 나왔냐가 필요가 없죠. 뭐 자식이 몇 명이 있고, 월수입이 얼마냐, 아파트 몇 평에 사는가, 그런 거 관계없죠. 직업이 목사냐, 집사냐, 그런 거 관계없죠. 그냥 세월 앞에서는 전부 다 동일한 겁니다. 세월 앞에서는. 

앞에 있는 이거, 스페이드 케이는 치워버리는 거예요. 치울 때, “이거 치워주세요!”라고 할 때는 뭐에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 앞부분은 걸레 같고 개똥같아도, 뭣에 관심이 있다? 가리어진 다이아몬드 퀸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앞에 가리어진 이것, 스페이드 케이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이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아멘. 

여기서 대조가 되죠. 자, 대조가 되는 것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할 때 믿음에 대치되는 것, 반대되는 것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이는 것이죠. 보이는 것. 이 카드 잘 가져왔네요. 이제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앞에 있는 것이 뭘 가린다? 앞에 보이는 것, 스페이드 케이가 이 진짜 믿음, 다이아몬드 퀸을 가려버리죠.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 스페이드 케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걸 사수하고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넓은 아파트나 애들 공부 잘하는 것, 내 건강한 것, 이것 지키려고 빠득빠득 애를 쓴다는 이 자체가 뭣이 없다는 말입니까? 뭣이 없어서 허전하다는 말이에요? 뒷부분이, 다이아몬드 퀸이 없어서 허전하다는 뜻이에요. 

이게 없는 것이 혹시 들킬까봐서, 남한테 발각이 될까봐서 겁이 나는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이 뒤에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는데, 뒤에 것이 바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는 거예요. 이미 부활한 몸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면 누구든지 부활한 몸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왜냐하면 성령은 부활의 영이거든요.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그 거주지가 뭐 후패하든, 망가졌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번 수련회 때에 했지만,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성전이죠. 함께 한다. 이 몸에. 앞부분 말고. 함께 있으려면 이 앞부분, 스페이드 케이는 거추장스럽죠. 일종의 때. 목욕탕에 가면 때를 더 붙이려고 갑니까? 붕붕 떠다니는 남의 때를 막 이렇게 붙이려고 갑니까? 아니면 벗기려고 갑니까? 완전히 벗기려고 가죠. 그래서 돈 주고 자기 바디를, 몸을 남한테 맡겨서 박박 밀잖아요. 

그러면 교회에 왜 가요? 때 벗기려고 가야죠. “주여, 돈 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바로 때였습니다. 주여, 벗겨주옵소서.” 이래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교회 부흥되게 해달라고 한 그게 때인 줄 몰랐습니다. 주여, 교회 부흥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것에 내가 현혹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저쪽의 집사가 더 잘 사는 것에 내가 부러움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게 설교단에서 나와야 될 설교가 아니에요? 다이아몬드 퀸, 이걸 아신다면. 근데 만약에 목사가 이게 없다면? 다이아몬드 퀸이 없고 스페이드 케이밖에 없다면? 교인들을 모아야 돈이 되니까 무당 짓을 하는 거예요. 

무당 짓이 뭡니까?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 무당 짓이에요. 얻기 위해서.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무당이 뭐냐 하면은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무당을 찾잖아요. 그렇죠. 그래, 무당 찾으면 투박스럽고 교회 다니면 고상한 거예요? 마리아 섬기면 고상한 겁니까? 아니죠. 목적이 뭐냐? 목적이. 목적이 이겁니까? 이거에요? 음성으로 듣는 사람은 이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목적이 스페이드 케이입니까? 다이아몬드 퀸입니까? 앞에 가리는 시커먼 거예요? 뒤쪽에 가려져 있는 빨간 거예요? 예수의 피 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우리가 이 스페이드 케이, 내 잘났다고 증거 하려고 교회 다녀서는 안 되겠죠? 그럼 누구 증거 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니가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뭐가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땅 끝이 뭐냐, 이 지점이에요. 말씀이 임한 지점이 땅 끝이에요. 저 멀리 북극에 간다고 땅 끝이 아니고. 거긴 춥기만 하고 그렇지. 내가 거주하는 이곳이 주님의 땅 끝이에요. 땅 끝에 이 스페이드 케이 증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다이아몬드 퀸 증거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의 몸이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의 몸이 가리어져있어요. 신자도 마찬가지고. 가리어져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제대로 증거를 못하겠죠. “주여, 이거, 스페이드 케이는 벗겨주옵소서. 성령을 통해서 제거시켜주옵소서. 달랑 이거만으로, 다이아몬드 퀸만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쉽게 말해서 “주여, 죽게 하옵소서.” 왜? 부활되었으니까. 이제 산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부활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자살 같은 것은 하지 마세요. 그거는 너무나...,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어야지, 지가 번개탄 피워놓고 죽으면 지 잘났다는 것밖에는 안 되니까, 그거는 아니에요. 주께서 아마 돌아가시게 할 거예요. 연세 82니까, 모르겠습니다만, 97정도는 살아야 사셨다고 할 게 아닙니까? 어차피 97을 살든 100을 살든,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이에요. 정한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계시가 확정되었다는 말은 딴 겁니다.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마시고, “나는 왜 죽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미 그 정답은 확정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바로 내 죄 때문이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갑자기 사고의 범주가 확 넓어졌죠. 확장되었죠. 넓어지면서 내 사적인, 개인적인, 가정의 문제라든지, 자기 건강문제라든지, 자식문제라든지, 남편문제라든지, 아내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는 갑자기 큰 확장 속에 이게 희석이 돼버린 겁니다. 

삼계탕 할 때, 닭 한 마리 넣고 국물을 닭 몸통의 ½을 넣게 되면 어디가 부각이 되죠? 닭이 부각되죠. 근데 닭 한 마리 넣고 국물을 한 드럼통 넣으면 뭐가 부각이 됩니까? 닭이 아주 사소한 것이 돼버리죠. 범주를, 하나님이 생각한 범주를 넓혀버리면 그동안 나한테 시험거리가  되었고, 고민거리가 되었고, 나를 절망케 했던 그 일이, 그 하나님의 넓은 범주 안에서 시답지도 않는 시시한 일이 돼버린 겁니다. 

간단한 것을 제가 한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이왕 카드를 갖고 왔으니까.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여섯 장인데요, 한 장씩 보여줄 테니까, 나는 저 카드를 찍었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세요. 자, 이 카드 마음에 드십니까? 이 카드. 그 다음에 이 카드 마음에 드십니까? 이 카드. 뭐 아무거나 해도 돼요. 다 다르죠. 이 카드 마음에 드십니까? 이 카드. 한 장에 찍어놓고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생각한 것만 생각하면 돼요. 이 카드는요? 이 카드는 마음에 드십니까? 마지막으로 이 카드 마음에 드십니까? 여러분의 입맛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자, 카드 정했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어떤 카드를 골랐는지 제가 알아맞혀보겠습니다. 와! 이거는 뭐 성령의 역사인지, 알아맞히겠습니다. 자, 아까는 카드가 여섯 장이었는데, 지금은 다섯 장의 카드를 쫙 펼칠 테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카드가 빠져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자기가 생각한 카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나타나죠. 없죠. 여러분 생각하는 카드가 없죠. 제가 다 맞춘 셈이 되죠. 어떻게 그런 일이??!! 

제가 아까 삼계탕 예를 들었잖아요. 내가 어디에 꽂혀버리면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제가 아까 것을 다시 할게요. 우리는 뭐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의 반대말이 뭐라고요? 반대말이에요. 반대말. 보이는 것이 믿음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반대말이에요. 보이는 것에 치중해버리면 반대니까, 뭐가 날아가 버려요? 믿음이라는 것이 상관없이 돼버리는 겁니다. 지금 선악과를 아는 그 몸 가지고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성경을 백날 봐야 이게 흡착이 안 된다고요. 이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한 가지 카드를 봤잖아요. 그 카드를 찾는데, 제가 도사가 아니지만 제가 여러분들의 카드를 다 맞췄거든요. ‘내 카드가 어디에 갔지?’ ‘어떻게 알았지?’ 이래 됐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 다섯 장의 카드는 아까 여섯 장의 카드 전체를 다 바꾼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골랐어도 전체 다 바꿨으니까 있을 리가 없죠.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내 몸을 바꾼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환경을 다 바꿔놓는 거예요. 

우리는 선입견이 뭐냐 하면은 내 모자람을 채우려고 하는데, 내 몸을 위해서 채우기 위한 그러한 현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몸은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치중한 그 카드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은, 보이는 것에, 내 몸 스페이드 케이에 치중하고 있어요. 특히 애들은, 청소년들은 여기에 치중을 해요.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이 엄마 따라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 하잖아요. 립스틱을 자기의 믿음에다가 바릅니까? 어디에 발라요? 보이는 입술에 발라놓고 거울보고, 학교에 가서 친구보고 또 보라고 이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세월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걔가 중학교 때 교회 와서 기도한다고요. 무슨 기도하겠습니까? “이 립스틱이 이쁘게 나오게 해주옵소서.”라든지, “친구들이 내 얼굴화장이 잘 됐다고 칭찬 듣게 하옵소서.” 이래 기도하겠죠. 이 스페이드 케이를 포기를 해요? 안 해요? 이걸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덧입히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도금. 계속 도금하는 거예요. 그러다 자기 뜻대로 안 되게 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만사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니까, 내 작은 일 하나를 못 들어줍니까? 너무 섭섭합니다. 이번 일만 도와주시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뭐 이런 식으로. 그래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뭐 나무랄 수도 없는 게 태생이 그러니까. 태생이 그래요. 태생이. 그거 노리고 교회에 가는 거예요. 무당집에 가듯이. 무당집은 좀 천박하고 교회하면 좀 고상하잖아요. 거기나 그 세계나 똑같은 거예요. 한쪽은 바람에 대나무 흔들리고 한쪽은 십자가가 있을 뿐이지, 십자가를 대나무 꽂아놓으면 똑같은 거예요.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누구보고 십자성호를 긋습니까? 마리아상보고 하는 것이나 달마도사보고 하는 것이나 똑같은 거예요. 심지어 그걸 예수님 모습으로 한다고 해도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은 나의 무당이니까. 

보이는 것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쉬운 것이 뭐냐, 보이는 것에 대한 보충이죠. 제거가 아니고 보충이에요. 이제 카드 오천 원 다 날렸다. 자, 다시 해봅시다. 보이는 것의 반대말은 믿음이죠.
자, 어떤 교회에 간증집회하려고 왔습니다. 그 사람은 보이는 것의 암 말기, 암 4기다. 그런데 기도했더니만 암이 나았다.

그 사람은 이게 반대가 아니고 화살표를, 보이는 암이 치료가 됨으로서, 그 사람은 어느 세계에 진입할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까? 믿음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무당이죠. 이게 무당이에요. 아무리 뭐 예수다, 철야했다, 백날 기독교적인 어떤 것을 동원해도 다 소용이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주술적이라고 하죠. 주술적. 여러분 주술적이라는 의미를 아시죠? 주술적.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면 같은 효과, 효험을 보는 그게 주술적이에요. 그게 주술적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뭘 붙입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붙일 때와 붙이지 않을 때가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아로나민 골드를 먹는 날과 아로나민 골드를 먹지 않는 날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차이가 난다고 선전하죠. 아로나민 골드 모르십니까? 알지요. 어떤 주일날에 교회 간 것과 한 달 째 빠진 것과 내 생활에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주술적이에요. 주술적. 

주술적인 것이 우리에게 나쁘다는 인상이 있잖아요. 주술이 나쁩니까? 내 몸이 나쁩니까? 어느 쪽이 나빠요? 내 몸이 원래 나빠요. 나쁘니까 나쁜 것만 찾는 거예요. 이익만 보면 되니까. 제가 방금 이익이라고 했는데, 실익만 보면 되니까. 지금 이거 녹음이 되거든요. 카메라 영상이 됩니다. 목욕탕에 물 새는지, 뭣 때문에 왔다 갔다 하셔서 못 들으셨는데, 제가 간 후에 다시 또 듣고 또 들으시면 돼요. 오늘날 문명의 이기(문명의 발달에 의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나 기구)가 얼마나 감사한지. 

실익이죠. 실익. 다른 말로 하면 이익. 두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뭐 사업을 하든지 뭘 하든지 이렇게 만납니다. 둘이 대화를 하죠.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내용이 뭐겠어요? “내가 너한테 해줄 테니까 너는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이거에요. 엄마가 애한테 뭐라고 합니까? 공부하라고 했죠. 근데 애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해줄 테니까 엄마는 나한테 뭐해줄 건데?” “스마트 폰 사줄게.” “콜call” 이래요. 콜(상대방의 뜻에 동의할 때 친근하게 하는 말)이 돼요. 어릴 때부터 가정이라는 것도 작은 단위의 사회잖아요. 사회에서 뭘 배우느냐 하면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내가 이 눈에 보이는 것, 스페이드 케이를 어떻게 지탱할 수 있는가, 그 수완과 전략과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 전략과, 내가 실익을 얻는, “내가 이것 줄 테니까 당신 뭘 줄 거야?” 이걸 할 줄 모르는 것을 이 사회에서는 지진아 또는 정박아라고 해요. 자폐증. 사회성이 뚝 떨어지죠. 이런 사람이 사회성 결여가 되고, 사회성 결여 같은 것으로 요새 범죄가 많이 나오죠. 사회성 결여가 되면 자기밖에 모르죠. 뭐, 사람 죽이고 이런 것 하죠. 사회성 결여라고 되어 있지만 더 넓은 의미는 뭐냐, 자의식 결핍이 되죠. 자의식 결핍. 그러면 가정교육이든 학교교육이든 뭘 목표로 삼습니까? 자의식 결핍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니 스스로 거래가 안 될 것 같으면 너는 사회에서 못 사니까, 결국 학교교육은 곧 뭣을 정당화시키는 겁니까?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 나는 나다를 고취시키고 정당화시키는 교육을 학교에서 받게 돼요. 대단하다 이거에요. 대단하다. 

내가 스스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먼저 선점에서 우뚝서버리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조국이 날 위해서 뭘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너희들이 조국을 위해서 뭘 할까를 생각하라고 할 때, 그 조국이라는 그 개인. 현재 법무부장관 내정자로 지목된 조국. 16살 때 서울대에 들어간 사람이거든요. 천재조국이에요. 얼마나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물로 비치겠어요. 시기질투를 하세요. 시기질투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그 사람이 먼저 가질 때 시기질투가 나오는 거예요. 같은 여성들끼리 옷 스타일이 멋있고 얼굴이 예뻐 보세요. 괜히 뭐가 발생이 됩니까? “아이고 뭐 인물하나는 빵빵해가지고, 뭐 어련하겠나?” 괜히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를 만들어가지고, 아니 뭐 이쁜 것도 탈났어요. 뭐 이쁘지 않은 사람 같으면 그런 걱정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모든 것이 한마디로 뭐냐 하면은, 내 몸, 보이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신다. 따라서 챙기자. 어디 가서? 교회 가서 챙기자.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챙겨서 내 것 만들자. 그 주의죠. 근데 그 사람이 모이는 곳이 방금 어디라고 했습니까? 교회죠. 예배당이죠. 그럼 예배당 꼭대기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십자가 있죠. 십자가 달리신 분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한테 챙겼습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버림받았죠. 왜? 예수님 몸은 중복되어 있으니까. 아담의 몸으로 죽고 뭐로 살고? 영의 몸으로 부활되고. 이게 아까 요한계시록에서 본 첫째부활이에요. 

첫째부활은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증거, 또는 예수님의 증거의 완성이죠. 이 첫째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첫째부활로 인하여 죽게 될 때, 목 베임을 당할 때, 이 사람은 바로 첫째부활에 같은 단체입장으로, 같이 들어온 사람이라 이 말이죠. 첫째부활에. 첫째부활이 이래 돼버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하고 첫째부활하고 결부시킵시다. 자의식과 첫째부활, 여러분 복습이니까 한번 답변해보세요. 자의식을 고취하게 되면 첫째부활에 참여합니까? 못합니까? 못하죠. 공부 잘해서 첫째부활, 천국에 갑니까? 아니죠. 뭐 주일학교 노래를 꼭 불러야 됩니까? 어여뻐도 못가요~ 돈으로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자, 돈, 부자가 된다. 첫째부활 안 되죠. 그 다음에 건강해도 안 되죠. 그럼 노래에 보면 뭣으로 들어간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과거가 회상이 되죠. 잠재된 회상.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 가죠. 근데 아까 공식이 뭐였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 대조가 되면서 나타난다? 무엇과 대조가 되죠? 보이는 것과, 이 보이는 것과 대조가 되면서 믿음이죠. 그러니까 이 노래 가사에도 앞에 있는 것과 대조를 시켰잖아요. 이 논리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 지금 이 논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문제가 있죠. 

그러면 믿음이 귀하다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뭘 쳐내야 돼요? 이거 보이는 것에 대한 욕망을 쳐내야 되죠. 쳐낼 수 있는 위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못 쳐내요. 못 쳐냅니다. 쳐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디 갔어요? 카드 버리려다가 못 버리겠다. 자, 앞에 있는 스페이드 케이를 쳐내고 싶잖아요. 쳐내고 싶은데, 이 몸이, 앞에 있는 아담의 몸이 그냥 몸이 아니고 여기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마귀가 들어있는 거예요. 마귀는 누구보다 셉니까? 내 의지보다 강하기 때문에 쳐내기는커녕 더욱더 가려버리죠. 예수님의 몸, 다이아몬드 퀸을. “예수 믿어줄 테니까, 내 몸 주세요.” 이래 된 거예요. 

아까 한 것을 복습해봅시다. 인간의 몸은 뭐한다? 거래하죠. 애들도 거래하죠. 공부할 테니까 뭐 사 달라? 스마트 폰으로 바꿔달라고 하잖아요. 거래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내가 믿음대로 살 테니까, 이거, 내 몸 주실랍니까?” 이거 누가 그런 소리하겠어요? 마귀가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마귀가. “믿음대로 살 테니까 우리 친정엄마 살려주세요. 15년간.” 해시계가 뭐 이렇게 길어지던지 해가지고 살려 달라. 교회가면 그런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교회가면 그런 사람들만 줄줄이. 그런 풍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논리적으로 왜 아닌지를 몰랐잖아요. 성경이 잘 조립이 안 되니까.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이래서는 아닌 것 같은데, 십자가 밑에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목사가 그런 설교를 안 해야 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거기에 사람들이 아멘소리가 더 크게 나올 때, 그게 뭔가 이상한 거예요. 춘향전에 그런 가사가 있답니다. 춘향전에 보면. 사또의 풍월소리가 더 높을 때 백성의 원망소리도 더 높다는 말이 있죠. 교회가 이 눈에 보이는 것, 스페이스 케이를, 내 몸을 추구할 때 주님의 신음소리가 더 높죠. 왜? 보이는 것과 믿음은 반대니까. 

그러면 더 논리를 진척시켜봅시다. 자,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 보이는 것을 버려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이것을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이걸 못 버리죠. 버릴 수가 없죠. 자, 버릴 수가 없다면, 한번 아이디어를 내보세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세상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버려야 되는데, 아니 버릴 수 없다고 했잖아요. 못 버려요. 버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면 돼요? 간단해요. 안 버리면 돼요. 안 버리면 되는 거예요. 안 버리게 되게 되면, 이걸 안 버렸으니까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겠죠. 그럼 죄인으로 살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굉장히 쉬운 거예요. 

믿음으로 살고 싶어도 보이는 것이 앞을 가리잖아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이아몬드 퀸이 믿음이라면 앞에 있는 것, 스페이드 케이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고린도 
후서 5장 7절에 보면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보이는 것과 믿음은 병행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대치되는 거예요. 반대되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도 포기하기 싫은 거예요. 그리고 또 믿음도 있어야 구원된다고 하니까 둘 다 포기를 하기 싫은 겁니다. 

성경에서는 대치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한테는 융화가 돼버렸어요. 우리가 이상해요. 우리 몸이 이상한 거예요. 돈도 벌고 천당도 가고. 지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시도한다 이 말이죠. 뭔가 이상해요. 그것은 바로 우리 몸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실익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으니까, 혹시 늦게 오셔서 못 들으신 분은 이렇게 녹음을 딱딱 해놓고 동영상까지 찍어놨어요. 증거를 다 이렇게 해놨어요. 왜,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아실 겁니다.  

자, 좀 더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인간의 몸이 있는데, 한번 복습해볼까요? 몸은 아담의 몸에서 뭐가 나온다? 선악과 과실의 후유증의 있죠. 그럼 선악과는 하나의 원칙입니다. 창세기2장, 3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은 자는 반드시 뭘 못 따먹는다? 생명나무를 못 따먹죠. 그러니까 논리상 간단해요. 선악과를 아는 이상은 뭐는 물 건너갔다? 생명나무는 물 건너간 거예요. 이거 어렵지 않아요. 어렵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안다는 것은, 여기 선악과가 몸에 흡착되어 있어요. 전체가 선악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냥 무장된 게 아니고 중무장 되어 있죠. 선악과라는 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죠. 

누가 안다?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이라는 것을 그 다음에 뭡니까? 안다는 거예요. 안다는 것을 안다는 것으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구원이 되기를, 구원의 능력을 여기서, 안다는 것에서 끄집어내려는 겁니다. 선악을 알았으니까 천국 보내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성경에서 이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미 단서를 붙여놓은 거예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했으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천국은 선한 사람이 모인다면서요. 그러면 저도 악을 버리고 선했으니까, 완전치는 않지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 노력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가상한 노력을 봐줘가지고 좋은 사람의 분류에 넣어주세요.”라고 시도할 때, 그 사람은 계속 지금 뭘 못 버리고 있는 겁니까? 

선악이라는 체제를 못 버리고 있는 이상은, 아무리 선을 추구해도 바탕 자체가 선악체제라 안 돼요. 바탕 자체가. 형틀 자체가. 냉장고에 보면 요새도 그런 얼음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구형 냉장고에 보면 얼음 틀 칸막이에 생수 부으면 얼음이 되잖아요. 이미 형(形)이 딱 정해져있죠. 그런데 네모난 것에 물을 부어놓고 하트모양이 나오기를 바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형틀은 이미 정해져있는데. 선악 형틀이 있으면 결국 나오는 것이 뭐냐, 나는 선했냐? 나는 이번에 악했냐? 이 둘 밖에는 안 나와요. 생명이 안 나온다니까요. 왜? 못 따먹었으니까. 모르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생명은 여기에 같이 결속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이거는 뭐 하나의 법칙이니까. 저보고 멱살 쥐고 따질 수가 없어요. 생명이 없으면, 생명나무가 있다면 천국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여기에 이미 틀이, 선악틀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게 선이고 악인 것을 알지만 오히려 누가 누구를 이긴다? 내 속에서 악이 선을 이겨버려요. 오호라 나는 절망적이다. ‘곤고’라는 것은 절망적이다. 나는 절망적이다. 선한 나, 악한 나를 해서, 또 이걸 종합해서 악한 것도 있지만 대다수의 95퍼센트는 선하다는 것을 조립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버려요. 그럼 나가 몇 개냐 하면은 나1, 나2, 나3, 이 셋 중에 어느 게 나입니까? 이 셋 중에 어느 게 나라는 것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 하면은, 이 셋 다 죽여 버리면 돼요. 이 셋을 죽일 때 기준이 뭐였습니까? 선악 때문에 죽이죠. 선악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죽이는 기준이잖아요. 선악을 안다는 것 때문에 죽잖아요. 죽여 버리면 나3, 날아가죠. 나2, 날아가죠. 나1, 날아가죠. 없잖아요. 결국 죽어 마땅함이 남죠. 죽어 마땅함이. 

아까 카드 마술한 이후에 왔잖아요. 그러면 늦게 오신 분만 보세요. 제가 한 장씩 보여줄 테니까 이중에서 자기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 생각해보세요. 빨리 갑니다. 이거 뭐 고민할 것도 없어요. 맘에 드는 것만 하면 돼요. 아무거나 골라잡으세요. 자, 했죠. 그럼 여러분들이 뭘 생각했는지 알아 맞춰보겠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이 제가 보여주는 이 카드 중에는 빠져있습니다. 맞지요? 없지요? 생각을 안 했습니까? 여기에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은 인간이 뭘 생각할 때는 자기에게 꽂힌 생각만하지, 그 환경 자체가 다 달라진다는 것을 인간은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이 속임수는 뭐냐 하면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제가 이 카드 자체를 다 바꿔버렸기 때문에, 환경 자체를 다 바꿔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한 것이 이 카드 중에는 포함될, 있을 리가 없죠.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악과 있는 자기 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 아름답게 만든 이 세상이 나를 위해서 있기를 원했어요. 그 환경은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 나를 위해서 만든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꾸 기도해서 도와달라는 거예요. 누구 좋아라고?선악과 만든 이것을 주께서 버리지 말라고. 내 몸을 못 버리면 뭐도 못 버려요? 선악과를 못 버리면 그럼 생명나무는 언제 얻는데? 영원히 얻지를 못하잖아요. 차라리 반대가 되어야죠. “선악에 주눅 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죠. “선과 악에, 나의 선함에, 나의 착함에 내가 휘둘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것에 내가 신경 쓰지 않게 하옵소서.” 

“선하면 복을 얻고 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 규칙 자체에서 내가 벗어나게 하옵소서.” 이 규칙 자체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다면 주어진 모든 것은 그냥 은혜로 주어진 감사일뿐이고, 왜 감사하냐면, 감사하라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고, 이 은혜는 누구를 향하느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같이 돌아가는 것을. 내 몸이 아님을. 내 몸을 위해서 세상 돌아가지 않음을 깨닫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아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천동설, 지동설을 배웠죠. 하늘이 도냐, 지구가 도냐, 그런 것 있잖아요. 오랫동안,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오랫동안 하늘이 돈다고 했어요. 그래서 천문학이 발달한 거예요. 지구는 그냥 있는데 여기에 해와 달과 별들이 돈다고 했어요. 중심은 어디가 중심입니까? 지구가 중심이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여기에 본인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게 아니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고 이렇게 했어요. 자, 1번, 지구가 있고 태양이 돈다. 2번, 태양이 중심이고, 하여튼 은하계가 중심이고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①번, 1번이 정답이다. ② 번, 2번이 정답이다. ③번, 둘 다 정답이 아니다. 몇 번 입니까? ③번, 둘 다 정답이 아니죠. 

그럼 정답은 뭐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정답은 뭐예요?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구 중심으로 돌죠? 예수님 중심으로 돌죠.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돌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7절이 뭡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른 분들이 좀 희생을 합시다. 다시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7절. 신앙은 희생이에요. “아이고, 좀 일찍 오지.”라고하지 마세요. 희생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이걸 제가 자꾸 하는 것은 반복해서 이걸 좀 익혀놓으세요. 그런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하지 마시고, 어디 몇 구절에 분명히 있다고.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늦게 오신 분 중에서 읽어보세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됐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믿는 것은 아니고, 라는 말을 집어넣었죠. 내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변화하죠. 자, 또 질문 들어갑니다. 보이는 것이 변화됩니까? 내가 변화됩니까? 어느 게 변화됩니까? 내 중심이 될 때는 보이는 것들이 변화가 돼요. “당신은 변했어. 자식도 변했어.” 전부 다 자기 빼놓고 다 변했대. 자기는 한결같은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전부 다른 사람들은 다 변했대. 옛날에는 나한테 잘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것은 변화한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내가 나답게 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쫓아가야 되겠죠. 쫓아가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인생입니까? 같이 달라지면 되는데. 아까 카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같이 달라지면 되거든요. 다이아몬드 퀸이 믿음이에요. 스페이드 케이가 보이는 거예요. 스페이드 케이, 보이는 것이 뭘 가리고 있습니까? 다이아몬드 퀸, 믿음을 가리고 있죠. 근데 자꾸 뭘 추구해요? 스페이드 케이, 보이는 것의 동질성, 나는 한결같다고 자꾸 이걸 주장하다보니까, 보이는 것을 자꾸 허겁지겁 따라가는 거예요. 허겁지겁. 

우리 젊을 때, 결혼할 때 단칸방에 비키니 옷장만 있어도 마냥 행복했어요. 세상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은 한방에 있다는 것이 웬 떡이고 웬 기적이냐! 이럴 수가 있느냐? 방이 하나밖에 없어요. 부엌도 없어요. 방에다가 버너 피워놓고 밥하고 이랬어요. 그래도 뭐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좋았어요. 왜? 그대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어요. 요새 젊은 애들은 그 헌 아파트 안 들어갑니다. 빚내서 새 아파트 들어가죠. 행복주택인가 있죠. 왜 그렇게 살아요? 왜 그렇게 삽니까? 그대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대 플러스알파(그대+α....)가 막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 버너 하나 있었지, 3만원 주고 중고 TV하나 있었고, 기타하나 있었고. 기타하나 동전하나 노래처럼. 기타 하나 동전 하나 있었고. 아무 필요 없어요. 요새는 다 갖추어야 돼요. 특히 친정에서 다 갖추고 시댁은 목돈 드는 집 해주고. 어느 세월에 시집보내고 장가보낼지,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부모들은 노후대책 해놓으려고 꼬불쳐놓은 돈 지금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아들 결혼한다고 대출한 돈, 대출금 갚아준다고 힘들게 되었어요. 그래도 자식들이 좋아합니까? 늦게 오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아까 자식이 뭘 요구한다고 했습니까? 일찍 오신 분들은 아는지 모르겠네요. 

자식들이 요구하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두자로 뭐라고 했죠? 실익입니다. 나에게 실제 이익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모가 어릴 때부터 교육했고, 교육받아왔고, 결혼할 때도 실익을 생각하는 거예요. 저 여자와 만나서 실익이 뭐냐? 저 남자와 만나서 나한테 실익이 뭐냐? 자식을 그렇게 키워놨으니까, 자식이 결국 뭐냐 하면은 자의식이죠. “내 돈 가지고 내가 하는데 엄마가 왜 그러느냐?” 지금 귀한 성경시간에 딴 것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이게 전부 다 보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보이는 것과. 

아이고 51분이 됐는데, 딴소리 한 거 빼고 실제 성경이야기 들어가겠습니다. 보이는 것은 변화하는데, 이 변화가, 이거 질문하고 첫째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보이는 것이 나쁜 쪽으로 변화합니까? 없어지는 쪽으로 변화하겠어요? 계속 유지하는 쪽으로 변화하겠어요? 늙어가지고 보이는 것들을 붙잡았다 싶으면 이미 10미터 저 밖에 가 있어요. 이정도 했으면 나도 살만큼 산다는 소리를 듣지, 인간답지, 라고 하는데, 벌써 인간다운 것은 멀리 가 있어요. 애 스카이(SKY)해가지고 내가 컨셉 살리고 하면 되겠지, 하면 벌써 다른데서는 가라(가짜)로 의대전문대 가 있어요. 가라로 벌써.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미흡함이 뭐로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주여, 같은 신앙을 믿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만드십니까? 무슨 억한 감정이 있어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면 주께서 “밥 먹나?” “밥은 먹지요.” “그러면 성경이 왜 있느냐?” 성경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한 것하고는, 이건 완전히 그냥 내팽겨 쳐진 거예요. 왜?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내가 나쁜 쪽으로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뭐하면서? 소위 교회 다닌다는 소일거리 때문에 내가 이미 주님과, 이 앞에 것, 보이는 것, 스페이드 케이를 강화한다고 뒤에 것, 다이아몬드 퀸에서, 믿음에서 벌써 멀어진 거예요. 이게 있는지도 몰라요. 있는지 없는지 10분 뒤에 한번 확인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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