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가락강의-썰매 1712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22. 06:57
홍민희 (IP:221.♡.139.88)17-12-21 18:39 

가락-요한복음 15장 25절(썰매)171219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요한복음 15장 25절, ‘그러나 이제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연고없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이유없이, 이유없이 나를 미워했다. 이유없이 나를 미워했으면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미움 자체가 원인없이 미움이 결과로서 미움이 등장한 상태를 말하죠. 


그런데 그 미움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율법에 기록한데로죠. 그러면 25절이 이 말씀은 말씀안에 어떤 내용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되어있었냐 하면은 율법안에 말씀이 미움을 발생시키는 힘이 이미 말씀안에 담겨있다 이렇게 보면되요. 


이 세상 자체가 그냥 세상이 출연된 것 아니다 이말이예요. 그냥 출연되고 난 뒤 일이 벌어진게 아니고 이 세상을 밑에서부터 외부 그 뒤에서부터 밀어올리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무슨 힘이냐 하면은 미움이라는 내용의 힘이 이 세상을 출연시키는 원인이다 이렇게 보면 되요. 


이 세상. 요새 건물도 있고 사람도 있고 뭐 하늘과 땅과 별도 막 있잖아요. 이 자연세계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미움에 의해서 조성될때만 이 자연세계는 있어야 될 이유가 발생되는 겁니다. 있어야될 이유가. 


미움이 없이는 이 세상은 있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미움에 의해서 만들어 낸거예요 이게. 이걸 신약에 보면 뭐냐 하면은 인간은 태어나서 죄 짓는다가 아니라 인간은 죄로 태어난거예요. 죄로. 


인간 자체가 태어 날 때부터 죄가 밀어 올려서 죄 덩어리로서 태어났는데 모양은 사람모양이다 이말입니다.
이 죄나 이 미움이나 같이 보면 되요. 죄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할때만 죄가 되는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하는데 달랑 두가지예요. 사랑이냐? 아니면 미움이냐? 이것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사랑받게 되게 되면 사랑받고 미움 받게 되면 미움 받는다. 지금 제가 말장난 하는 것 같지만 나름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더 말장난을 하게되면 말장난 아니지만 사랑이 사랑이 되고 미움이 미움이 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보기에 말장난 이지만 왜 이게 말장난이 아니고 진지한 이야기냐 하면은 사랑, 미움은 창세전에 이미 숨어 있잖아요. 숨어 있으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등장하고 미움이 미움으로 등장해야 이게 정상인데, 숨어 있다 보니까 막상 등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맨드라미 채송화 뭐 그런거란 말이죠. 


자연세계 + 인간이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뭐가 안보이는 거예요? 숨어있는 사랑과 미움 이 자체가 안보이는 겁니다. 안보이니까 이 자연세계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되어 버렸어요. 스스로.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고 ‘어? 태어났네? 잘 살아보세.’ 이게 끝이예요. 


언젠가 제가 설교 할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살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일 없다고. 잘 먹고 잘 사는게 끝인거예요. 인간 세계에서는. 잘 먹고 잘살면 행복하고, 행복하면 그게 족하다는 겁니다. 뭐 다른 의미 찾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끝나는 거죠. 그런데 사랑과 미움이라것은 원초적인 사랑과 미움은 없어요. 인간끼리 살다보면 이제 나를 미워하면 왜 날 미워하냐? 날 좋아하면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자기들끼리 좋아서 결혼도 하고 이러는데 문제는 여기에 누가 왔느냐하면 요한복음 15장 24절이 뜨는 거예요. 


23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아버지를 미워한다. 미움부터 등장하지요. 미움 등장합니다. 미움입니다. 자, 미움을 집어 넣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너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너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너희가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미워하였도다. 


22절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와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되어 있지요? 예수님 이야기 딱 등장하니까 내가 키가 얼마고, 몸무게가 얼마고, 재산이 얼마인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행복하냐? 불행하냐? 그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출몰한 것, 출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출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은 왜 있어야 되고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은 누가 와야 비로소 다 들어난다? 예수님이 와야 다 들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보냈습니까? 알아서 혼자서 왔어요? 누가 보낸 분이 계시잖아요. 누가 보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보내 버린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요청해서 온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결국 와서 최종 정리정돈을 결국은 해야되는데 그때가 곧 예수님 이 때이니이다. 


이미 이제 마지막 때예요. 종말이라고 하죠 종말. 끝, 종말이란 말이예요. 모든 것은 종말로 향하여 달렸고 종말이라하는 것은 역사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의미와 이 세상이 왜 있느냐 하는 그 원초적인 그 근거가 찾아들 때, 이 세상은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되면 사랑쪽이냐? 미움쪽이냐? 로 이게 갈라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느냐? 아니면 하나의 미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어났느냐? 이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미움이라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수님은 미움이라는 그 이야기 하면서 그 미움 속에서 뭘 끄집어냈느냐 하면은 사랑을 끄집어 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처음에는 사랑이 없고 이 세상에서는 미움밖에 없는데, 미움이라는 것을 통해서 미움을 다른말로 하면 배격이예요. 또는 배척. 배척되는 과정을 통해서 숨겨져 있는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부부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부부가 같이 있을때는 사랑을 못 느끼는데 그냥 일상인데, 서로 갈라서고 그리고 서로 배격하고 헤어질 때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그런 노래 있는거 같아요. 


이제 우리 헤어지네요 라는 노래있잖아요. 백지영이가 부른 노래.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더라고 뭐 있잖아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이제 헤어지네요. 헤어지면서 미워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쪽에서 실시하는 사랑은 이게 사랑이 아니였음을. 이것도 노래 가사 같다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김광석 노래. 사랑은 그냥 있으면 모르고 이렇게 미움속에서 생기지요. 그러면 미움밖에 없을때는 사랑이 없지요. 그래서 사랑은 뭐냐 하면은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없는 거예요. 사랑은 없는 겁니다. 


이 문장이 굉장이 어려운 단어예요. 없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되요. 아예 처음부터 없는건데 사랑은 없는것이라 해서 없는 것 속에서 없었는데 그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사랑을 이끌어 내는 그 솜씨, 그 능력. 


그 능력은 이 땅에서 사랑과 미움 양쪽을 다 갖고 계시는 분이 이 땅에 출몰했을 때, 이 땅에 방문했을 때, 들어오셨을 때 미움받으면서 사랑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미움 받으면서 사랑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사랑에서 사랑을 끄집어 내 버리면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니냐 하면은 내 존재에 이유가 미움 없이 그냥 내 존재 이유가 와버리면 주님의 사랑이 일방적이 아니라 나도 조금이나마 나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안되는게 인간은 피조물이거든요. 피조물은 감히 창조자에 회의에 의견 개진를 못합니다. 창조자 끼리 의논을 할 때 그 결과물로 피조되야 되기 때문에 만들어 져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견 할때는 인간은 없는 존재가 되야되요. 


없는 존재가 되면서 거기에 사랑이 옴팍 담겨야 되지, 있지도 않은 인간이 ‘저도 사랑했는데요!’ 손들고 나오면은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고 사랑에 대한 훼손이죠. 제가 주일 낮에 탕자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탕자가 집을 떠나서 집 떠나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것은 탕자의 의미가 아니라 했습니다. 


플러스 알파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그 알파가 뭐냐 하면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게 아니고 아버지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야 이게 탕자예요. 아버지의 마음 속. 아버지의 마음 속이 예수님과 하나님 마음속이거든요. 


그러면 들어오려면 탕자가 자기 것 가지고 들어왔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나는 아들이라는 칭함을 받기에 합당치 아니하다. 나는 배격당해도 마땅하고 배척 당해도 마땅합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때 100% 하나님의 그 인간 없을 때 만들어진 그 사랑이 옴팍 다 여기에 담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앞에 전철이 뭐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밀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배척하는 것. ‘예수님 필요 없어요. 나 예수님 안 믿을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뭐 그런 경우 같은 거예요. 


실제로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나는 배격한다. 예수님을 배격한다. 미원한다.’ 그런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할수 있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격하고 배척하는 방법은 뭐냐하면 이거예요. 자기일에 관심있는 것. 자기 일에 관심있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있어 버리면 그 다음의 일들은 전부 다 이거는 그다지 중요치 않는 관심 둬도 그만이고 안둬도 그만이고 나랑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려요. 사람이.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다. 뭐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다 해도 예수를 우리가 ‘예.’ 고개 끄덕이면서 인정해주께요 라고는 할수 있지만 자기 일은 완전히 접어버리고 저게 중요해! 라고 예수님 일에 풍덩 뛰어드는 그 정도가 아니면 예수님에 일에 관심 있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할 때, 자기 일 따로 있고 ‘성경 보자.’ 이렇게 해가지고는 성경이 이해가 안되요. 내 일이 있고 그 내 일이 나를 살리고 있는데, 구태여 성경봐가지고 주님 살려주세요 할 필요 없잖아요. 이거 성경 안봐도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데 뭐하러 성경 보겠어요. 


이미 자기 관심사가 성경을 지금 가리고 있는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일에 대해서 완전히 희미하나마 별로 이렇게 거기에다가 안중에 별로 없어요. 눈 돌리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께서는 그냥 말 그대로 하면 보혜사인데 성령께서는 사실은 보혜사는 우리를 정죄하는 우리를 치는 거예요. 이것은 대구 강의에서 제가 이야기 했는데,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어떤 분이 중요한 이야기 했어요. 똑같다.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똑같다. 구조가 똑같다. 


다만 뭐가 다르겠어요? 주인공이 다르지요. 이미 내가 나의 일에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주인공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신다? 그것은 모실수가 없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무슨 모십니까?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그러면 자기 일이 망가지든 완전히 부러지든 병들어 죽든 이렇게 해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나와 줄 때, 온통 정신이 정말 예수님한테 관심있구나 하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 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고린도전서 4장엔가 나오는 것 있죠. 딱 이 세글자예요. 만물에 쓰레기로 취급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사도바울은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은 ‘나 상받았다.’ 쓰레기 됬는데, ‘나 상 받았다. 세상에 천사도 부러워하는 신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언급할때는 사도바울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얼마나 자기관리를 했느냐를 보면 안되고 어디를 봐야되느냐 하면은 자리. 사도바울을 떠받치는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를 주목 해야되지 사도바울처럼 해야지 이러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그 인생은 그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예요. 같은 자리이여야해요. 같은 자리. 그럼 같은자리라고 말하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렵잖아요. 그걸 살짝 바꾸겠습니다. 썰매. 그것도 아주 각도가 예리한 썰매. 


여기 썰매를 타고 사도바울 탔다. 그런데 이 썰매에 브레이크가 없어요. 그럼 썰매는 눈 덮인 썰매가 내려올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냥 거침없이 하이킥이죠. 거침없이 내려오죠.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예요. 


뭐 로마가도 어딜가도 거침없이 여기 어떤 사람이 말리잖아요. 나도 성령 받았는데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3차 전도여행 마치고 가는 길에 당신 예루살렘 가면 반드시 체포됩니다. 사도바울은 체포 된다는 말 들어도 stop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건 브레이크가 없으니까. 사도바울은 그냥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말릴수가 없는 겁니다. 본인에 대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실린데로 다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썰매가 사도바울만 타는게 아니고 사도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썰매를 타는데 이 썰매는 뭐냐 하면은 지옥으로 내려가는데 거침 없어요. 오늘 제목은 거침없음. 거침없이 어떻게 복음이 아닌곳으로 내달리는지, 이것은 예수님이 어디 미혹 돼서 그런게 아니고 본인의 자리, 본인의 썰매가 본인도 어쩔수가 없어요. 


아무리 그 교회에 나와서 복음 듣게 하고 싶어도 발을 못 빼게 만들어요. 그 썰매가 그렇게 속도감이 있으니까 속력감이 있으니까. 거침없이 내려가요 거침없이. 꼭 교회 나올려고 하면 ‘월급 올려줄게.’ 뭐 좀 할려고 하면 ‘너 하나 더 맡을래?’ ‘그래도 나갑니다!’ 이번에 ‘설교 한번 할래?’ 이런식으로. 


‘잘 하면 1년만 하면 청년들 20명 줄게.’ ‘처음 나와서 월급 없을 때는 교회에서 월 100만원 보조해줄게.’ 계속해서 하는데 보조를 받아서 머무는게 아니고, 이 썰매가 자기 자신을 단도리 하도록 자꾸 붙잡는게 있어요. 안놔줘요 마귀가. 마귀가 앞에서 쭉 당기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두 종류 밖에 없어요. 성령이 잡아 당기는 건지 사탄이 악한 영이 잡아당기는 건지 둘중에 하나지 중간 지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전도는요 사람이 해가지고는 단 한명도 전도 못해요. 


보내심을 받은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이 자연세계 출연이 무엇의 결과라고 했습니까? 두가지였었죠. 사랑과 미움이죠. 사랑과 미움이 이 자연세계를 이렇게 솟구쳐 오르게 하는거예요. 


자연세계가 있고 죄가 생긴게 아니고, 죄를 위하여 자연세계와 죄를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진거예요. 인간은 죄로 태어난거예요. 그 점을 여러분들이 죄로 태어났다는 그 점을 제가 오늘 강의 하면서 여러번 계속 강조할겁니다. 


왜냐하면은 우리가 거듭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게 필요한겁니다. 니고데모가 거듭 태어나는 것을 오해해서 내가 거듭 태어나는 것을 생각한거예요. 이 말은 엄마가 자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너의 엄마가 만드는게 아니고 엄마라는 말을 예수님이 바꿔줬어요. 육이 태어나게 한거예요. 육에서 낳다고 본거예요. 육에서 낳다. 육이 너를 밀어낸거예요. 생물에 보면 히드라 하는게 있지요? 이 히드라라 하는 것은 무성 생식이 되가지고 뭐 하나 뚝 떨어지면 아메바 비슷하게 뚝 떨어지면 또 새끼인지 어미인지 구분안되고 또 생기죠. 암세포 비슷하게. 


또 뚝뚝뚝 떨어지죠. 그냥 그걸 생식이라 하지않고 그냥 분활 되는 겁니다. 분열 또는 분활. 둘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데서 또 하나의 뭐가 새롭게 발생되는 것이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육이 태어났다고 보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보고 인간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고 육이 태어났다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영이고, 영으로 다시 육이 태어난 구조와 영이 태어난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육이 분활 되듯이 영도 분활 되어서 영적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방금 제가 인간 태어나면 인간이 인간 태어난다는 것은 없지요.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임신 안됩니다. 안되요. 이 세상에 태어난게 혹불 나오듯이 태어나요. 혹불. 혹이 나오듯이 혹이 돋아나듯이 여드름 나오듯이 그냥 솟구쳐 올라오는거예요. 자꾸. 


내부에 열에 의해서 여드름이 나오잖아요. 내부의 열과 먼지 공기중의 먼지와 결합해서 여드름 된다고 하는데, 자꾸 뭔가 내부의 부글부글이 외부의 하나의 흔적들을 이렇게 남기는 겁니다. 


그러면 태어난다는 말이 사실은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태어난다는 말이 성립이 안되고 돋아난다는 말이 되죠. 태어남이 없어요. 돋아남이죠. 왜냐하면 태어남이 되면 이게 무에서 유가 된다고요. 없던데서. 


그러나 돋아남은 비록 무에서 그 다음 유가 생기니까 무, 유 두 개가 있지만, 무 없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하면은 있음이 뭔가 있기에 이 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생각하다보면 무가 되는데, 성경에서는 무가 아래쪽에 있다고 했죠. 이거 어디 강의할 때 했는데 어디서 했지? 했어죠 제가. 


아래쪽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거예요. 무 보다 작은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 했는데. 없음보다 없음 아래. 말이 참 이상하잖아요. 없음아래. 0보다 아래를 가지고 마이너스라고 합니다. 


0보다 아래 내려가면 마이너스. 마이너스 위치에 있어요. 마이너스 위치에. 모든 플러스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마이너스에서 위로. 그런데 이미 인간들은 있음이 있으니까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어디만 보느냐 하면은 ‘아이고 살다가 뭐 죽으면 그만이겠지.’ 라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말이암아 모든일은 종결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인간의 종말은 내가 죽는 것이 종말이 아니고 누구를 만난다? 예수그리스도가 나한테 원천으로 찾아오면 그게 우리의 육의 종말이예요. 육의 종말이고, 영의 개시고, 영의 시작이고,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와 예수그리스도에서 다시 태어나는걸 말합니다. 


탕자의 이야기 다시 해볼께요. 탕자가 집에 있는데 집에서 가출해서 허랑방탕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탕자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지요. 탕자의 의미는 집이라는 주거, 주거공간에 도착해 버리면 주거공간에 누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전에 아버지 말 안 듣고 갔다가 나는 돌아왔다 이렇게 되면 계속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은 내가 계속 살아 있어요. 내가 계속 살아있고 돌아온 나도 계속 살아있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나’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나 안에 나만 들어 있어요. 나나나. 나만 들어 있다고요.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까지 들어가 버리면 아버지의 마음 안에 나 가 되어 버리면 아버지의 마음이 뭐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창세전에 창조 이전에 있던 그 마음까지 쑥 들어가버린다 말이죠. 


쑥 들어왔을 때 이건 뭐냐. 플러스 알파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가락지 있잖아요 가락지. 그리고 한우 소고기 잔치 벌린 것. 그게 한우인지 이스라엘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소고기 잡아서 잔치 벌리고 좋은 옷 입히고 가락지 끼우는 것. 


이것은 돌아올 때 예상 했습니까? 예상 안했지요. 이게 플러스 알파인거예요. 플러스 알파가 만들어낸, 새로 창조해낸, 새로 지어낸 자가 뭐냐하면 이게 탕자입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아버지하고 딱 옆에 붙어 있었던 큰 아들 있잖아요. 큰 아들은 어디까지 가냐하면 아버지 옆에만 갔어요. 어디를 못갔냐? 아버지 마음 속 까지 못들어 가요. 



이걸 뭐라고 하냐하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 예수 안에 들어가 버리면 날마다 육이 영으로 육은 죽이고 영은 살리는 그 작업의 대상이 되고 말아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내가 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그냥 생산물이고 그 생산자가 누구냐? 예수님 본인이 본인 숙제 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 설교 제일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말씀은 사람보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한다고 했지요. 


이 이야기를 제가 주일 날 끝까지 이야기 했어요. 끝에도 한번 더 했어요.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해 볼래요? 이게 아니고 선언하는 겁니다. 선언 해버리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완전히 우리는 받지도 않아요. 


‘예,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런 의지도 안 받고 결심도 안 받아요.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이건 누구의 숙제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자기 과제가 되고 자기 숙제가 되기 때문에 안 받아요. 육이 무슨 영의 일을 합니까? 


인간으로 우리가 태어난 것은 육으로 태어난거예요.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무엇의 바다? 이 세상을 아까 미움의 바다. 미움의 세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 25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할수도 있고 자기 의지로 또 사랑할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딱 주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은 다 누구를 미워한다? 예수님을 너나 할거 없이 다 미워하게 되어있다. 이게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작전이고 이게 성취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수도 있고 미워할수도 있는 결정을 내가 낼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딱 이 세상에 등장하고 보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에서 만들어진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있고 죄를 짓는게 아니고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다가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에덴동산에다 무엇을 만들었느냐 하면은 이것을 만들었어요. 금지죠. 


에덴동산에 창세기 2장에 보면 따먹지 말라했죠. 금지죠. 자 생각해 봅시다. 금지가 있다는 것은 금지가 있다는 말은 이게 어떤 가능성이 있느냐 하면은 금지할 가능성을 내다보고 금지 법을 만든거예요. 


위반할 가능성이 없으면 금지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지법을 했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미 금지해 놓은것에 저촉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일부러 그렇게 몰아가신 거예요. 


왜? 그래야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만든 세상이 되기 때문에. 만약 이 세상이 세상이 있다가 실수로 죄 지었으면요 실수한 부분만 수리점에 가서 정비소에 가서 고치면 되요. 그리고 아예 금지법이 아예 없었으면 그 자체가 최종 완료 상태가 되고 완성상태가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 시작, 끝. 그게 끝이 되버려요. 자, 에덴동산 시작! 끝! 더 이상 필요치도 않아요. 그대로 살면되요. 선악과 없이. 선악과 없는 경우는 요한계시록 22장에 있어요. 그때는 생명나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창세기 2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금지가 있어요. 금지가 있다는 말은 금지의 취지를 살려서라도 금한 것을 위반을 해줘야 된다니까요. 위반을. 위반을 해줘야 그때 금지가 이렇게 응축된 금지가 비로소 날개를 펴고, 치토스 먹고 말거야 이렇게 본격적으로 너희는 이제 나한테 한번 당해봐라가 본격적으로 개시가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이고 여자고 남자고 전부 다 흙이 되어가는 거예요. 다 흙이 되어가는 겁니다. 아담의 이름은 흙이라고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지요. 하나님이 이름을 지을때는 이것은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하는 것이죠. 흙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여자는 남자한테 복속되니까 여자도 같이 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이라고 지었지요 생명. 


생명이라고 지은 것은 뭐를 보느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긴다 해서 주님께서 해결책을 줬을 때, 그 여자가 결국은 우리에게 비록 흙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약속이 성취되는 날 생명을 주시는 그 내용을 여자의 후손이니까 이 여자한테 주셨다는 것을 믿고 하와라 생각한거예요. 


아담이 일종의 선지자의 계시가 되고 선지자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아담 자체가. 아담이 벌써 이 생명을 내다 본다는 것은 아담부터가 약속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약속이 구체화 되는거죠.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죄, 죄에다가 뭐가 들어오느냐? 약속이 들어온 겁니다. 죄의 세계에 약속이 들어오는데 그러면 약속이 약속의 눈으로 볼 때, 약속을 사람이라고 본다면 어떤 분이라고 본다면 약속의 눈으로 봤을 때 여기 죄 속에는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약속의 눈으로 봤을 때 없지요? 


그러니까 약속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어떤것이라도 뭐가 되야 하냐면 죄가 되야해요 전부다. 죄가 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약속이 왔을 때 예수님이 왔을 때 결국 인간간의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전부 영어로 ALL이죠. 모두가 죄다. 


예수님 생각은 이것이고, 인간세계는 뭡니까. 죄도 있지만 선도 있다. 이게 인간세계잖아요. 부자청년처럼.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죄도 있고 선도 있다. 또 다른말로 죄 지을 가능성도 있지만 잘만 하면 선하고 의로울 가능성도 있습니다가 인간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죄의 쪽보다는 착하고 바르게 살고 최선을 다하고 성의와 정성을 다하면 이쪽에 무게를 두고 죄가 없다고 우기지만, 내가 일단 오게되면 이 기준은 완전히 깡그리 완전히 개무시 해버린다.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무시하는 방법을 한번 봅시다. 무시하는 방법은 인간이 죄와 선 이렇게 갈랐을 때 인간이 보통 죄 지으면 벌이 뭡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죄 지었으면 벌을 뭐로 내리지요? 살인, 강도 벌을 뭘로 내립니까?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 사회에서. 살인, 강도 했을 때 벌이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 두 개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전부 다 사람들 보기에 한통속이다. 한통속이다. 질이 같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통 그 당시 사람이 강도질했다 하면 그 사람을 뭐라고 하냐 상당히 초라하게 보겠죠 이 모습 행적이. ‘아이고, 인간아 살다가 어떻게 강도질해서 살인당하나.’ 초라하게 보죠. 


초라함1, 초라함2. 그 초라함 속에 누가 들어 갔어요? 하나님 = 인간 속에서 초라함이 되는 거예요. 초라함을 앞에 보내봐요. 어떤 하나님? 초라한 하나님, 볼품없는 하나님, 아무도 관심두고 싶어도 얼굴을 돌리게 만드는 하나님. 


그러니까 죄가 되어버린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왔어도 아무도 믿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결국은 인간은 모두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한통속이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결국은 예수님 앞에서 한통속입니다. 다 죄인들입니다. 저주 받을 죄인들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도 시중에 가짜 예수가 거의 99.999% 되다 보니까 뭐 니가 믿는 예수 나도 믿는 예수 편하게 다 믿는데 진짜 예수, 진짜 예수를 강도와 강도 사이에서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오실텐데 하고 기다린 사람 있어요? 


아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기다리면서 죄인들만 달리는 그 형무소 있잖아요. 사형장 거기 서 가지고 아 주님 올 때 됬는데 왜 도착안하지? 이런식으로 예수님을 거기서 기다린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작전을 벌일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예요. 예수는 아무도 믿을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그 똑똑하다는 그 사울까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사울도 예수를 믿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믿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여겼습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괜히 했겠어요? 전처를 정답을 다 알고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나 된 것은 이것은 절대로 내 쪽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눈치채서 한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래서 내 속에 사탄의 가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내게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내게 족하다. 


이제 무엇을 집어 넣었든 가시를 집어 넣었든 선인장을 집어 넣었든 독약을 집어 넣었든 그래서 일찍 죽이든 살리든 사나 죽으나 뭘 집어 넣었든 ‘주여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할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님을 알지요. 


그렇게 될려면 우리 주둥이를 다물게 할려면 완전히 모든 것을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구약에 그와같은 상황이 구약에 욥기에 보면 그와같은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냐면 욥기에 보면 욥이 하소연 합니다. 


‘나를 위한 변론자가 없나이까?’ 없어요. 내가 살아서 재판하면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변론할것이 기다린다 이렇게 했거든요. 주님은 안기다렸어요. 안기다리고 미리 와버렸어요. 미리 와버렸어요. 


사람이 변론이 될려면 일말의 의로움이 있을때나 이 의로움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변론자, 나를 이렇게 변호 해주고 보호해줄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만약에 의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죄밖에 없다면 죄 변론합니까? 안되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변론자로 오는데 변호사인데 성령이 보혜사인데 우리의 죄를 의로 바꾸신 주님의 변론자로 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떤 팔자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느냐 하면은 그 아까 이야기한 초라한 하나님이라 했죠. 


그 초라한 하나님의 그 현상을 이제는 우리가 답습을 하게 만들어 버려요. 예수님을 욕했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그 비난이 아버지의 맘까지 탕자가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마음까지 쑥 들어온 사람은 예수님이 당했던 그 미움과 서러움과 비난과 그 초라함과 욕됨을 같이 그리스도를 공유해서 같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사탄의 가시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 비록 삼층천 올라갔지만 현실에서는 뭐냐하면은 초라한 행객, 초라한 행세예요. 사도바울 니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 한번 보자. 그거 볼 필요 없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뭘, 오래 살면 복이고 그러면 오래살면 의인되고 일찍 죽으면 죄인 되는 겁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33살인데 그야말로 진짜 죄 많이 지은 사람이겠네요. 그 잠언서에 보면 의로운 사람은 장수하고 의로운 사람은 오른손에는 장수 왼손에는 부귀, 가질 것 다 가지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 신약에 온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둘다가 없어요. 인자는 뭐 둘 곳도 없다? 머리 둘 곳도 없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고 이 땅에서 오래 살지 않고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사도바울도 맨날 굶고 이랬다 이말이죠. 


그게 뭐냐하면은 계속 미워하게 유도하는 겁니다. 미워하도록. 미워져야 되요. 미워졌는데 이 미운 인간을 용서를 해줄 때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 인생이 이러면 되겠습니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어떻게 더 나올수가 있냐 이말이죠. 더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는거죠. 


주께서는 그런쪽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성령이 임해서 성도라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 거북스럽고 불편한 인생만 그렇게 살아야 되고 남들이 부러워 하는 인생은 살면 안됩니까? 


주께서 남들이 부러워 하는 인생을 못 살게 만들어요. 왜냐하면은 우리 안에 영이 들어 있으면 남들 보기에 좀 집 한 두채 있고 부동산 한 뭐 서울에 강남에 노른자 땅 한 5천평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그런게 있는 것을 자랑치 않기 때문에 남이 흉내를 못내는 겁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정도 되게되면 ‘봐라 복받았다.’ 이렇게 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 있더라도 ‘나의 관심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어.’ 이런 마음을 흉내를 못낸다 이말이죠. 재산의 여부, 자식 잘되고 그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 씀씀이가 나는 죄인인데 나를 죄인되게 해주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나올 때 누구하고 대화가 됩니까. 


동창생 만나가지고 품위있는 여자들 만나가지고 대화가 안되잖아요. 안되지요. 충청도 말 하면서 이쁜 입으로 혼쭐나야되겠어요. 조끼 이런거 입고 김선아가 이런거 입고 품위있는 모임에 가봤자 돈 자랑 자식자랑 밖에 더 합니까? 


그런데 거기서 십자가를 자랑해 보세요. 분위기 다 깨놓습니다. 너 내일부터 오지마라. 그게 보통 복입니까? 물론 이제는 그것도 귀찮아가지고 그것도 내 의가 될까 입 다물고 아무 소리 안하지요. 


그것 마저도 혹시 내가 고난 받는 것마저 내 의가 되면 안되니까. 우리 작전을 바꾸자. 조용히 있다 조용히 살자. 작전을 바꾸니까 고난 받을 필요없고 미움 받을 필요 없고 그저 뭐 남 이용할대로 이용해 먹으면 되고...그러나 기어이 주께서는 티나게 만들고 들통나게 만들어요.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자기는 예수님만 자랑해요. 예수님만,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성령께서 탁 치면 탁 치니까 윽하는 소리나지요. 탁 치니까 갑자기 ‘주님만 자랑했는데 왜 이렇게 나옵니까!’ 이렇게 나오게 되어있어요 반드시. 


‘나는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사랑했는데 왜 이러십니까!’ ‘오 방금 나온거 녹음해 놓고 그게 왜 나오지?’ ‘아 이거 있었네.’ 그러니까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것이 어느새 그런 것을 자랑하는 나를 자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사랑. 


자기 미움이 아니고 어느새 벌써 자기애에 둘둘 말린겁니다. 그러면 죄에서 출생한 이 육이라는 것이 자기가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자 한번 첫째시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죄에서 출생했다는 말은 다른말은 우리는 이유없이 그냥 무조건 죄인이다. 이유없이. 이유없이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자리가 결정하거든요. 


그런데 이 자리 썰매, 이 자리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브레이크 없이 그냥 한쪽은 천국으로 꼴아 박고 한쪽은 지옥으로 꼴아 박는 것. 촤~~악 이것은 거침없이 내려가요. 썰매 탄 사람이 조종할 수가 없어요. 


지옥가다가 천국으로 자기가 썰매를 옮길수가 없어요. 그런 운전대도 없고 이건 완전히 하나님의 자율 운전이다. 없고 그냥 내려가는대로 내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 내려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내가 주님을 미워한 죄인인 것을 갈수록 점점 더 느끼면서 그 자리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있지요. 


왜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는가? 이유가 없어요. 왜 이유가 없어야 되느냐 하면은 내가 죄인된 것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쁜짓해서 죄인된 것이 아니잖아요. 


이유 없이 태어났고 태어난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죄가 있어서 죄를 드러내라고 태어났고, 그래서 우리는 죽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 마음 안에서 그것을 깨달았으니까 예수님 마음 자체가 썰매니까 


우리는 썰매 속에서 나는 그 죄 때문에 태어났고 예수님은 의 때문에 태어났고 그런데 그 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의로 바꾸는 그 작용이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를 내가 소유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인 것을 의로 늘 바꾸어 주시는 그 작용을 우리는 십자가 작용으로 그것을 감사하게되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죠. 10분 쉽시다.

 홍민희 (IP:221.♡.139.88)17-12-21 18:40 
가락-요한복음 15장 25절(썰매)171219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처음부터 아브라함 오지 말고 예수님 오시고, 모세 오지말고 예수님 오시고, 노아 오지 말고 예수님 바로 오면 안되겠어요? 그런 생각 안해봤습니까? 


그렇게 긴긴 텀 두지 말고 뜸들이지 말고 아담 타락했다 바로 예수님 오셔가지고 십자가 달려가지고 구원하시면 어떻습니까? 간편하잖아요. 그렇지요? 


왜 이스라엘 해가지고 이슬람 망하고 왜 예수님 오실 때 그렇게 아주 긴 역사 이스라엘 역사 끝나고 난 뒤에 이스라엘 역사가 또 유대나라가 되고 유대나라가 또 그렇게 마귀의 짐승의 나라가 되가지고 그렇게 할 때 왜 예수님 오셔야 되느냐? 


이게 두 번째 시간에서는 그걸 생각해봐야되요. 국가는 짐승의 긴 그림자다. 이게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에 느부갓네살 왕이 동상을 금신상을 만드는데 금신상이 안에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이 다 들어있어요. 끝까지 바벨론이예요. 큰 성 바벨론. 끝까지. 


국가는 짐승의 긴 그림자다 라는 말은 이 우상이 다니엘이 보니까 이게 첫째 짐승, 둘째 짐승, 셋째 짐승, 넷째 짐승이다 이말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 없애 버리면 뭐만 남아요? 이놈도 짐승 저놈도 짐승 모든 국가는 짐승이예요 짐승. 


자, 짐승. 국가가 짐승이다. 환상이죠. 좀 어렵습니다. 환상 맞지요? 우리가 아는 짐승은 네발 가진 짐승이잖아요. 그런데 국가가 짐승이다라고 했으니까 나라가 짐승이다 했으니까 민족이 짐승이다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현재 자연세계에서 언어와 대비하면서 얻을수 있는 개념은 아니잖아요. 


무슨 미국이라는 짐승이 어디있어요? 없잖아요. 짐승이라 하면 뭐 가축이나 소나 개나 멧돼지 이런게 짐승이잖아요. 노루, 고라니 이런게. 그런데 성경은 국가가 짐승이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고, 그 현실이 아니니까 그걸 환상이라고 보자고요. 환상. 현실에 적절하게 대응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환상부터 시작해서 문제는 환상에서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환상이 어느새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이 현실이 되버리는겁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환상이 환상이야기로 끝까지 붕 떠야되는데 그게 아니고 환상이 실제로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났잖아요. 


태어났으면 엄마가 마리아고 아버지는 요셉이고, 이것이 현실이 된겁니다. 베들레헴 아이들이 죽고 하는 그것.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설쳐댔고 동방박사가 설쳤고 12제자 뽑았고 현실이잖아요. 


환상이 현실이 된다는 말은 현실에서 환상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느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백년 나와봐야 북한 미사일처럼 가다가 톡톡톡 떨어져요. 현실은 현실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구성하는 이 단어, 말, 언어, 개념은 환상을 충족하게 담을수 가 없어요. 현실을 생각하는 그 언어를 뭐 헬라어 히브리어라고 봅시다. 원어라고 하잖아요. 원어분석 해봐야 현실적인 자기 주체, 자기 존재만 다시 되비쳐 나올뿐입니다. 


여러분 거울앞에 서게 되면 누가 비칩니까? 자기 모습이 비치죠? 그런데 성경앞에 서면은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모습 비추듯이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거울용으로 내가 오늘 뭘 해야되고 자기 모습을 되비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착각입니다. 잘못입니다. 


성경에는 놀랍게도 내 모습이 안보입니다. 성경에서 누구 모습 나오느냐? 성경에서는 예수님만 나와야되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아요. 거울에 비췄는데 거울에 내가 비춰야될 거울이 다른 사람이 와서 나를 비출 때 우리는 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 나는 없고 예수님만 있다면 그러면 나는 뭡니까?’ 예수 안에 있는 존재거든요. 예수안에서 그냥 있는 존재 아니고 예수 안에 나는 살아 있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죽은체로 예수 안에 있는 존재가 되요. 죽은자로 규정되는 조건하에 예수안에 있는거예요. 


그래서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고, 나는 그리스도가 사는데 성경을 안보고 세상을 보게되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살아 있다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세상의 거울은 자기 모습만 되비치기 때문에.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말이 약간 어렵지만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본디오빌라도 앞에 재판 받기 위해 섰을 때 본디오빌라도 앞에서 그 분이 하나님으로 보입니까? 그냥 유대시민으로 보입니까? 어떻게 보입니까? 예수님이. 유대시민 중에 한 사람이죠. 현실의 눈에는 현실만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말이 있어요. 내가 너 살려주면 너는 살 것이고 내가 너를 죽이면 죽인다. 나는 너를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는 권한이 내게 있다 했잖아요. 그때 예수님의 답변은 현실로 답변한게 아닙니다. 환상으로 답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면 너는 그러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지 않는다. 그러한 능력, 그런 자격도 없어. 본디오빌라도가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 말 안하죠. 현실에서 말하는 진리, 인간을 위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환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진리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가 지금 진리가 인간들 속에 섞여 있잖아요. 자, 그렇다면 교회에서 전도할 때 현실을 이야기 해야되겠습니까? 환상을 이야기 해야 되겠어요? 환상이 담겨 있는 현실을 이야기 해야 되겠죠. 


그러면 환상이 담겨 있는 현실이라면 같은 현실을 이야기 하는데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고 개념을 사용해도 그 개념이 중첩되어 있죠. 그 개념을 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성령받지 않은 사람은 제발 믿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던지는 내용이 설교이여야한다 이말이죠. 갈려면 가라 이말입니다. 꼬시지 않을테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환상에서 짐승이라는 예를 들었지요. 환상에서 환상이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역사속에 예수그리스도가 들어와 버리니까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이 자기의 신하잖아요. 자기의 부하 직원 아닙니까. 


그런데 다니엘이 알고 있는 것은 자기가 어제밤에 잊어 버렸던 꿈 내용까지 알아버리면 느부갓네살 왕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분간이 안되는 겁니다. 누가 머리 꼭대기 위해 누가 앉아 있는지 안되지요. 


다니엘을 잡아 죽여서 문열고 기도 했다고 해서 모함해서 다른 하여튼 탕평책을 안썼어. 파당 지어가지고 고발해가지고 다니엘이 잡혔잖아요. 그때는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고 뒤에 왕인데 하여튼 그래서 다니엘이 잡혔잖아요. 


사자가 굶어서 물어야 되는데 다니엘을 안 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하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단어의 나열, 단어의 나열은 반드시 뭐가 되느냐? 법이 되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단어들의 나열로 되어 있어요. 


이것 하게 되면 이런 처벌 받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게 되어 있고 그 언어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되어 있고 적용을 하게 되어 있는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내가 죽인다 사형시킨다라는 인간의 법이 있잖아요. 


그 법이 어디에 통합니까? 현실에 통하잖아요. 그런데 현실을 다리오 왕이 동그라미를 칠 때 너무 좁게 쳤어요. 현실을 자기 영역이다. 영역, 자기 구역, 이걸 일본말로 나와바리라고 하는데 자기 구역에 법을 정했는데 여기 누가 들어와 있습니까? 다니엘이 들어 있잖아요. 


다니엘이 들어 있어도 다니엘도 자기 법에 획일적으로 여기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다니엘이 지배받는다는 말은 뭐냐 구체적으로 법이 적용되는 대상이 되야 될텐데, 물어! 물어! 물어! 사자가 물지를 않네요. 


또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신상에 절 안하면 불에 태운다. 태웠는데 타지 않는 세포가 있습니까? 세포는 유기물 탄소, 그리고 인 뭐 이렇게 수소 이런구조로 되어 있거든요. 과학적으로. 그들은 과학을 진리라고 하는데. 


왜 불에 안타지요? 단백질은 200~300도가 되면 타게 되어 있어요. 탄다는 말은 산소가 개입되고 산소가 결합이 되서 타게된다 이야기 한다 말이죠. 뭐 산소가 차단됬는가? 왜 안타지요? 


‘주님! 왜 다니엘 세친구는 왜 불에 안탑니까?’ 물으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왜 꼭 타야되는 이유가 있나? 너희들 주장이 왜 맞다고 생각하지? 너희들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해본적 없나? 너희들이 서로 통하는 너희들끼리 통하는 그 법이나 진리나 원칙이 전혀 환상의 세계에서는 안통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냐.’ 묻는거예요 도리어 다니엘 세친구를 통해서. 


그러면 ‘너는 어느 나라 갈 거야 정말?!’ ‘주의 나라 갑니다.’ 주의 나라 갈 것 같으면 평소에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내게 적용시켰던 모든 그 법칙과 삶의 원리와 생활 방식을 죄인줄 알아야지요. 


이게 지금 천국에 전혀 먹히지도 않는 것을 나는 그것에 휘둘리면서 벌벌 떨고 살았다는 것을 자기가 고백해야지요. 기껏 허수아비 같은 이것에 매달렸고, 이것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고, 이것 때문에 벌벌 떨었고, 두려워 했고, 쫓기고 있고, 무서워 했다는 거예요. 


그게 왜냐? 주님을 몰랐으니까 그렇지요. 주님을 몰랐으니까 주님의 환상의 세계를 몰랐으니까 모르고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지요. 그게 전부인줄 알았던 거예요.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예수님께서 다니엘, 왜 아브라함때 안오고 왜 모세때 안오고 왜 다 이스라엘 망하고 난뒤에 와야되는가. 현실은 현실속에 환상을 집어 넣는데 그냥 환상이 현실을 그냥 넘어가는게 아닙니다. 


환상이 현실속에 들어 갈때는 반드시 죄가 숙성되야되요. 창세기 14장 15장에 나오지요. 4대만에 애굽에서 나와서 4대만에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될 이유가 죄가 숙성되야 공격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죄가 숙성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다 죄인이였다가 최종 판정이 나야되요. 모든 인간은. 그런데 모든인간이 판정될려면 그러면 한 인구가 한 500만되어도 모두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됬느냐? 


죄의 폭이 하나님을 죽일정도 까지 되는 죄의 폭을 형성해야 됩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왜 아브라함때 예수님 오시지 않았는가. 죄가 숙성되야 된다. 숙성되는게 뭐냐? 죄의 깊이가 더 깊어야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때 죄를 끝까지 깊이 만들어 놓고 예수님 오시면 되지 않느냐. 


그것은 아까 이야기 했던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와 이것이 동일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진짜 어려운 겁니다. 자, 동일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이게 오늘 26절, 27절 말씀과 관련되어 있어요. 


더 어렵게 하기 전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면,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은 사탄, 악령이 벌려놓은 모든 것이 다 노출될 때 성령이 보혜사가 그 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그 깊이 사탄의 그 깊은 은밀한 것까지 다 공개될 때 성령이 와야되요. 


그러면 그 공개되는 그 방식을 지금부터 제가 될수 있는 대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현실로 한번 돌아와 보겠습니다. 환상은 약간 접어두고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20대에 대학4년생 또는 대학 졸업생 또는 대학을 졸업했다 칩시다. 그럴 때 그 대학생 젊은 대학생이 사회에 대해서 뭐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이 사회보고 젊은 사람이 나에게 뭔가 나에게 일을 좀 맡겨달라는 거예요. 이 사회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 일단 맡겨줘놓고 일할수 있는 기회를 줘서 일 못하면 그 때 못하고 잘하고 이러면 되는데 아예 처음부터 일을 안맡겨주게 되면 기회조차 날라가겠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게 중요한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호명해줬으면 좋겠어. 누가 나보고 오라하는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라하는데 가서 가게되면 직접 일을 해볼게 아니겠습니까. 해보게 되면 뭘 아느냐? 내가 누군지를 알아요. 내가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내가 이 일은 적성에는 맞는데 과연 오너가 요구하는데로 내가 그걸 전부 소화시킬수 있는 사람인지, 이 모든 것이 결국 뭐냐하면은 내가 누군가? 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사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누구인가? 이거 아니예요. 뭐냐 내가 누구인가예요. 그래서 한 27살 되가지고 여기 세미원에 입사했다 칩시다. 입사 했다 이말이죠. 


입사해서 영업직 한 6개월 했는데 실적 없다. 그때는 조용히 종용해버리죠. 나갔다 할 때 여기서 6개월 다니고 다른 회사 취직하게 되면 결국 계속 이 사람은 끝까지 뭘 보느냐 하면은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지연시키는 거예요. 다시 또 미루게 된거죠. 


그래서 다른회사 가서 15년 일했다. 15년을 일했는데 차장에서 부장 승진되었다. 그것이 자기 일까요? ‘아 지겹다. 다른 큰 회사가 스카웃 안해가나?’ 또 뭘 원하냐? 호명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어디에서? 이 사회가.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하면 인간은 사회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정하는 것으로 그게 곧 ‘나’ 라고 확정짓고 싶은겁니다. 인간은. 그리고 이런 생각은 모든 인간은 다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다고요. 


만약에 교인이 한 500명 되는 목사인데 지금 500명에서 막 600명 될려고 하는데 스카웃 들어 왔어요. 교인수가 15명인데 오실렵니까? 월급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데 오실렵니까? 하게되면 목사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또 뭐 고생하겠지 하겠지만 누가 가만있지 아니하냐 하면 사모. 사모님도 아니야 사모. 


사모가 ‘미쳤나 이거. 지금 첫째 미국에 유학 보내가지고 월 200만원 들어가고, 둘째가 지금 호주에서 뮤지컬한다고 해가지고 한달에 200 들어가는데 당신 거기 가가지고 한달 월급 다 주게되면 어떻게 살라고. 적어도 1000명에서 부른다면 월급이 오를거니까 이제는 딸 시집갈 때 집한채 사야되는데 계산되는데 당신 미쳤어!’ 이렇게 된단 말이예요. 


‘당신 가오가 있지. 당신 위신과 체면이 있는데 어딜 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은 내가 누구냐가 이미 어느 선에서 이미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는데 그 남자 입장에서는 목사 입장에서는 누가 오라하게 되면 또 다시 그 본인 자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결국은 이겁니다. 사회가 호명하는 이것을 가지고 주체가 되는 거예요.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이걸 이야기 한겁니다. 마르크스 주의의 사회학자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뭐냐하면은 우리말로 하면 이념인데 앞에 붙지요. 허위이념.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념을 이데올로기라 하고 그 이데올로기에서 호명을 해주기를 모든 개인이 호명을 받게 되면 그 인간은 철저하게 이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안정적인 자리확보라고 그렇게 굳게 믿고 또 믿게 되는 거예요. 


그거하고 성령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이 말은 개인은 없다 이말입니다. 개인은 없어요. 개인은 내가 되고 싶어서 허락해준 사회가 아니예요. 누가 불러줘야되요. 누가 불러줘야 된다고. 


젊은 사람들이 시험친다고 아무나 시험보러 오는게 아닙니다. 저기 시골에 농사짓는데 원서내세요. 아무도 원서 안냅니다. 농사짓는데 왜 원서를 내요. 소 똥 치우는데 왜 원서를 냅니까. 삼성그룹에는 원서 내지요. 소 똥 치우는데 왜 원서를 내요. 거기에. 


새우잡이에 원서 내는거 봤습니까? 새우잡이에. 그것은 납치되서 하는 거예요. 납치되서 가서 하는 거예요. 납치되서 가보면 미얀마 2명에다가 캄보디아 3명, 네팔 5명하고 같이 일해요. 일하는데 힘드는데 균형이 안 잡혀가지고 일은커녕 서 있지도 못해요. 힘들어가지고. 


바닷물에 흔들려 가지고. 바닥이 안전해야 못을 박든지 하지 이게 흔들리는데 미칠지경인데 멀미나는데 뭐 일을해요. 그러니까 새우잡이가 힘든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인간은 이 사회를 벗어날 의사도 없고, 이 사회가 만약에 별자리라면 나는 어느 별 어느 별로 붙박이처럼 팍 박혀 가지고 평생을 나는 안정성 있게 인생을 끝내느냐 그것으로. 


별이란 그 별자리 바깥에 있는 표면적으로 풍선에 안쪽있죠. 풍선에 안쪽에 별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 참 부럽다. 내가 저 자리 잘 할수 있는데 이런 쪽으로 인생 그 생각들이 뭘 이루느냐 그게 바로 사회를 이루는 겁니다. 호명으로 사회를 이룬다. 


그러면 이거하고 성령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하면은 성령은 주님의 환상세계를 마련합니다. 구조가 똑같아요. 아까 구조, 육의 구조 말씀드렸습니다. 육의 구조에서 내가 얼마 버느냐, 내가 얼마나 신체가 건강하냐, 취미가 뭐냐, 내가 얼마나 이쁘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내가 있는 자리, 그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어떻게 했다? 호명했지요. 


너 간호사관학교 갈래? 간호사관학교에서 시험치고 합격하면 그게 호명이예요. 간호사관학교에서 불러주는 겁니다. 들어가기 힘들어요. 그렇죠? 힘들죠. 굉장히 공부 잘해야 되요. 나라에서 공짜로 밥 먹여 주는데 공부 얼마나 잘해야 되요. 


세무대학 그리고 철도 대학.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 철도대학은 일류 였습니다. 굉장히 사관학교 비슷해가지고 나오게 되면 중간급 철도회사 중간급 간부로 들어가 가지고 그들이 전부 다 부장 다 해버리잖아요. 


지금은 경찰대학. 딱 나오면 경위라. 자기 아버지 8년한거랑 똑같애. 8년이 뭡니까 16년한거랑 똑같나디까 경위가. 그게 바로 이 사회가 말하는 자리예요. 자리, 호명. 거기에서 뭐가 생긴다? 이 호명을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예요. 이게 바로 무슨세계? 바로 육의 세계.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인거예요. 현실. 그러니까 다니엘에서 다니엘과 세친구는 어디 남들보기에 어디 취직한겁니까? 느부갓네살에 그 국가체제에 취직이 된거예요. 느부갓네살은 자기 국가 자기 나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짐승이라고 해요 짐승. 


이게 너희들 보기에는 현실로 보이지? 우리 보기에는 환상으로 보면 짐승의 세계에요. 짐승의 세계.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짐승이예요. 왜? 체제가 인간의 호명하는 체제와 똑같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세계는 주님의 호명만 있으면 되요. 주님이 호명해주는 거예요. 누가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는 취직할려고 내가 설치지만 주님은 뭘 하느냐 하면은 죄를 의로 바꾼 사람을 주께서는 찾아오셔서 죄를 의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 자리가 죄인의 자리를 뭐로 바꾼다? 주님의 자리, 의인의 자리로 바꾸는데 있어서 주님께서는 호명해주셔가지고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면서 거기서 십자가만을 자랑하고자 하는거예요. 


자, 그렇다면 짐승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때 예수님 바로 보내지 않느냐? 온 세계 전체가 국가가 하나의 국가, 단일 국가, 곧 바벨론으로 될 때까지 죄를 숙성시킨겁니다. 


‘마귀야 너 할 일 다 해야지. 너 할 일 다해. 온 나라를 온 세계를 사탄의 짐승의 단일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해야지. 그렇게 해야지.’ 하고 딱 전체를 단일국가로 만들어 버렸어요. 만들어 버리니까 거기에 있는 구성원 인간들은 아무 생각 안합니다. 


그저 취직해야지. 취직해서 돈 벌어서 모아가지고 주택부금 넣어가지고 그래도 전세에다가 좀 보태가지고 아버지한테 돈 보태가지고 아파트라도 이렇게 전세라도 해야 그 다음에 이제 여자를 데려와도 여자를 데려와서 살지 이렇게 되지 돈도 없는게 여자 데려와서 뭐 할라고. 돈도 없는게. 여자 돈버는거 그거 넘봐가지고 할라고. 


하여튼 세상은 내 자리 확보. 그 내 자리 확보가 어느 자리 확보? 짐승의 나라에 내 자리 확보하는 거예요. 짐승의 나라에 내 자리 확보. 어떤분이 질문을 했어요. 사회가 신과 영혼에게 어떤 힘을 실어준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는 질문이 왔어요. 내가 보기에 약간 뜬금없는 질문인데 설명을 했지요. 


신은 인간의 이상적인 세계예요. 그리고 내 영혼은 신이 살려준다는 이 이데올로기 이념을 사회가 보장해준다는 쪽에서 사회는 돌아가고 있다. 이 말은 국가라는 것은 신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국가가 주어집니다 라고 하면서 국가는 나름대로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념입니다 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그렇게 답변했는데, 현재 지금 이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예수님의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자리를 확보해주신 고마우신 대한민국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이.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의로 바꾸는게 기쁩니까? 아니면 일본은 4:1로 이긴게 기쁩니까? 


37년만에 석점차로 세골차로 이긴게 기뻐요? 월드컵 4강 간것이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늘도 내 죄를 의로 바꾸는게 기쁩니까? 아니 4강보다도 지금 내가 과장인데 부장으로 승진된 것이 기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좋아요? 어느쪽이 좋아요? 


‘승진된것도 좋지만, 아니야 이건 정답이 아니야 주님의 십자가.’ ‘그러면 쫓겨나도 좋습니까?’ 하는데 ‘구조조정 당하면 애들 식구 5명인데 지금도 이 추운날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쫓겨나면 좋습니까?’ ‘그것은 안되요!’ 그거는 안되요가 뭐냐하면 나는 짐승의 나라가 좋아라고 하는거랑 똑같아요. 


나는 짐승의 나라가 좋아. 때려죽여도 짐승의 나라! 짐승의 나라가 최고야! 짐승의 나라가 최고인거예요. 짐승의 나라가. 그것을 그게 뭐냐? 주께서 그렇게 뭐하느냐 숙성시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짐승의 나라에서 벗어날 생각도 없고 벗어날 마음도 없어요 우리는. 


예수고 하나님이고 간에 누구 와서 너 우리 회사 와서 일좀 할래? 월금 한 300줄게. 젊은이들에게는 그 소리가 기쁜 소식이예요. 사자성어로 기쁜소식, 두자로 복음이예요. 이게 악령과 사탄과 함께 있습니다. 사탄의 구조, 악마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똑같이 닮았어요. 


뭐냐하면은 성령께서 그 구조를 하는겁니다. 성령의 세계에서 이 전체를 뭘로 보느냐? 죄로 봐요. 죄로 보면서 죄를 사탄을 이용하는 겁니다. 사탄을 누가 일하게 하시고 누가 보냈습니까? 사탄을. 주님이 보내잖아요. 주님이 보냈어요. 


교회를 누가 만듭니까? 주님이 만들어요. 교회를 만들어 놓고 그 교회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좋아요? 내가 교회보다 복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교회 다닌다면 아이고 집사님 칭찬해주고 사랑해주고 추앙해주고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하는 그게 막 실감하잖아요 현실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뭐하느냐 하면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푹 젖어 있는 우리를 뭐로 바꾸느냐? 뭐로 바꾸겠어요? 현실적 존재를 환상적 존재로 바꾸는데 누가 하신다? 성령이 하시는데 어떻게 하는가. 이 현실적 존재를 무조건 무조건 이것을 죄로 규정하면서 환상적 존재로 바꿔줍니다. 


그럼 우리쪽에서 할 것은 뭐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너무나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고 내 욕구와 욕망을 만족하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지금 현실 사람들이 못 따라오는 현실의 사고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수도 없고 따라올수도 없는 환상속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안에 있는 사람이예요. 


바르게 산다고요? 바르게 살면 뭐 무슨 바르게 살아도 별 달라질거 없어요.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이런 현실세계에 집착하고 그것이 우선적이고 그걸 자랑삼아 합니다. 하면서 환상과 함께 있을때는 바로 그렇게 하게 해 놓고 뒤에 소급해서 


‘봐라. 내가 손 안대면 또 니가 이 모양 이 꼴 나잖아. 봐라. 니가 자랑한거 봐. 입가에 미소 띠는거 봐. 보너스 받았다 이거지. 좋지? 이게 십자가 보다 이게 훨씬 좋지?’ ‘좋습니다!’ ‘기쁘나?’ ‘기쁩니다!’ ‘죄인인걸 아나?’ ‘압니다!’ ‘아이고 이쁜 것.’ 


주님께서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면 환상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 환상되시는 분이 현실속에 들어 와 있기 때문에.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환상이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위대한 예수 찾지 마시고 우리처럼 같은 현실을 지금 활동하시는 분 누구냐? 성령입니다. 주의 영이예요. 


옛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던 것처럼 그점을 대구 강의에 했는데 그점을 다시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같이 있었잖아요. 같이 있었지요. 사도행전 1장에서 승천하기 전에 있었잖아요. 


사람들은 제자들은 이것을 믿음으로 본거예요. 믿음으로. 같이 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갔어요. 제자들은 멍하고 같이 있어야 되는데 떠나버렸어요. 그러면 제자들이 따라 갈려면 제자들이 손오공처럼 뭘 불러야되요? 빨리 자가용 구름을 불러야되요. 


‘주님, 잠깐만! 잠깐만! 같이 갑시다.’ 하고 구름 불러야 되요. 구름 불르면 옵니까? 드라이아이스 올라타면 그게 올라타 집니까? 자기들은 같은 공간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 눈에 보이는 자기 시선안에 있으면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데, 붕 떳을 때 주님께서 떠났을 때 과연 이게 믿음이 될려면 인간쪽에서 가는 것은 실패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쪽에서 와서 성령이 와버리면 같이 떨어져 있어도 뭐가 되요? 믿음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날 뭐가 옵니까? 오순절날 성령이 오잖아요. 오순절날 성령이.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마음놓고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거예요. 주님 안에서 주와함께 정도가 아니예요. 주님안에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마음껏 하는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되냐? 그래야 예수 환상적인 존재가 현실쪽에 존재에서 함께 있어줘서 활동한 그 활동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볼 때 사람들은 현실로 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 아닙니까? 하늘에 속한 분이거든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누가 하게 되느냐. 제자들이 그걸 계속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받고 난 뒤 예수님이 하는 일이 성령의 일이고 환성적인 일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 사람 아버지 누구지? 저 사람 아버지 목수, 저 사람 아버지 이름은 요셉이고 직업은 목수래. 아이고 고향은? 나사렛. 아이고 나사렛에서 무슨 별것이 나오느냐. 


이러한 조롱과 무시를 당하는 그 역할을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했고 오늘날 성령받은 오늘날 이 시간에 성령받은 우리들이 그 일을 역할을 하는 겁니다. 분명히 나는 죽고 내 안에 살 것 같으면 우리는 환상적인 존재예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남들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고 ‘지금 누가 겨울에 저렇게 살쪘니?!’ 이런식으로 극히 현실적인 존재로. ‘아이고 감기도 잘 걸리더라.’ 이런거. ‘그렇게 하나님이 좋으면 감기도 안걸려야 할텐데. 맨날 콜록콜록하고 다니면서 성령받은 티가 안나. 맨날 감기 걸려가지고.’ 그 초라한 행색에. 아까 초라하다는 말 했잖아요. 초라한 행색에 누가 믿겠느냐. 


이게 현실은요, 현실은요 절대로 현실밖에 못나옵니다. 안나와야 되요. 안나오고 내가 받았던 성령과 동일한 성령이 와줘야 아,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되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성령도 맞아요. 성령안에서 하나의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사도신경이 틀린말이 아니예요.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예요. 각자 집에 있더라고 성령안에서 이미 한 형제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는 제가 강의한 것을 집어 넣으면은, 


환상은 반드시 현실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안에서만 뭐가 있다? 환상이 있는 방식을 예수님이 채택했기 때문에 우리도 오늘날 우리를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 육의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우리는 환상적인 조치가 계속 가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된거죠.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거울 앞에서 성경 앞에서 현실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만, 환상적인 존재는 성경에서 뭘 본다? 나를 보는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리스도안에 자세히 보니까 그 안에 나는 내가 들어 있는게 아니고 죄인의 죄인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 성경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 있잖아요. 그 바리새인이 나고, 그 못때먹은 가롯유다가 나고. 왜? 우리는 죄인인데 현실적인 존재인데 환상적인 영적존재로 늘 바꿔주니까. 가롯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양심에 가책을 느꼈지요. 이 양심에 가책이 됬다는 말은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진다?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진다? 끝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누나 미안해. 힘들었어 그동안’ 샤이니의 종현의 유서가 공개됬잖아요. 샤이니라는게 있어요. 사람들이 나를 기대하고 호명하는 것 그것은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나는 사회한테 인정받아야 되고 사회한테 사랑받지 않으면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그게 바로 죄의 숙성이예요. 계속 우리 안에서 바리새인이고 가롯유다고 우리안에 계속 숙성되는데, 그게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예수 안에 이미 환상적인 존재만 그걸 알아요. 


여러분 다니엘이 메시아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그냥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분이죠. 그래서 내가 오후예배 때 그걸 뭐라고 했느냐 이렇게 했어요. 그걸 더빙한다고 했잖아요 더빙한다. 더빙할때는 영화 미국영화 영어로 된 영화가 어떻게 되요? 소리가 죽고 음성은 뭘 넣습니까? 성우들이 더빙하잖아요. 


활동은 누가하고? 예수님이 활동하고 거기에다가 더빙은 누가하고? 우리를 앞장 세워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 모세, 여호수아 전부 이것은 해설사예요. 해설사. 그래서 심순애가 목소리 이상하게 하잖아요. 화면 따로 나오고. 


옛날에 소리 안나오는 무성 영화 옆에서 해설하는 사람 뭐라고 합니까? 변사. 변사 있잖아요 변사. 그래서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단 말이냐 말이냐 말이냐 자기 혼자 하는거죠. 예수님의 활동이 우리안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의 활동을 증거하는 사람이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뭐가 왔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오는겁니다. 


성령 오게되면 바로 내가 죄인이고 죄인을 택하사 의인을 변사하는 해설하는 이 귀한 직분을 우리에게 맡겨 준거예요. 자, 이야기 지금까지 이렇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제 슬슬 세상사람들은 머리 짜내면서 반박할려고 애씁니다. 반박할려고 이 이론에. 


여러분 예상되는 반박이 어떤 것이 있겠어요? 예상되는 반박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고 성령오게되면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한다 아무래도 별 반박할게 없지요? 그런데 성령 없는 사람은 되게 기분나빠. 괜히 찝찝해. 


분명히 맞는데,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맞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분명히 맞는데 그 다음에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거기서 뭘 끄집어 내느냐 하면은 이렇게 해요. 나는 뭘하면 됩니까? 


자, 1번 성령과 함께 있는 나 두번째 나 독자적으로 있음. 그러면 질문은 어떻게 되요? 나는 무엇을 합니까? 라고 묻게 되면 이것은 바로 현실에서 환상을 좇아 가는 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실패로 끝난다고 했지요. 주님 구름타고 올라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렇다고 할 때 어~~가시면 안되는데 라고 제자들이 했잖아요. 그 버릇이 어디서 나오는 버릇입니까? 그동안 3년동안 따라다닌 버릇이예요. 


주님 옆에서 시키면 일하고 눈에 보이는 주님 시키면 일하고 가면 같이 따라가는 그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다 보니까 주님과 떨어졌다 하면 대번 하는 소리가 우리는 어떻해?!! 아이고 어찌해? 어찌해? 어떻하지? 이러는 거예요. 


나는 어찌해? 이 버릇이 뭐냐하면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분이 시키면 해 주는 버릇이죠. 왜 목사의 말을 듣습니까? 이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어서. 목사한테 평소에 어떤식으로 교육 받았습니까?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성경을 하루에 3장 읽고, 십일조 하시고, 1년에 1명은 전도해야지. 자꾸 시키다 보니까 정기적으로 봉사하시고, 교회 10:30부터 나와서 찬양 준비하시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까 목사 없으면 교회 안되는줄로 알고 있어요. 목사 없으면.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 아시는 분한테 장로님인데 그렇게 하지말고 교회 돈내지 말고 돈 모아놨다가 본인이 설교하세요. 그 뭐 되도 않는 목사 돈만 밝히는 목사 왜 따라다니느냐. 이게 왜 내냐 하면은 평소에 버릇이 목사말 잘들으면 누가 복을 준다? 하늘에서 복준다는 이런 신앙이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 위주입니까? 누구 좋아라고? 나 위주이지요. 그럼 나는 지금 어디 박혀있습니까? 별자리가 어디입니까? 짐승의 나라에 있지요. 


짐승의 나라에 있는 이 별자리를 유지하고 싶고, 그걸 견제하고 싶어가지고 그저 나 이 자리만 지켜 준다면 뭐든지 다 바치겠습니다. 충성하겠습니다. 이런 아주 이쁜 입으로 못땐 말을 하는 혼쭐나야될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거예요. 


성령 + 나는, 성령은 나를 뭘로 본다? 죄로 규정하거든요. 죄로 규정하면서 이 죄는 벌써 의로 해결이 난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왜? 그게 죄인속에 누가 오기 때문에? 환상의 세계에서 죄인속에 누가 왔다? 모든게 죄 밖에 없는데, 더 나아가서 어떤 누구도 죄에서 스스로 죄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는데 분명히 합시다. 


어떤 인간도 죄를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오직 바라기는 누가 왔다? 요청하지도 않은 주님의 의가 온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성령받은 예수님이 왔을 경우에는 오직 성령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인줄 압니까? 


바로 이 죄를 구원하러 온 메시아인걸 알잖아요. 안다면 자기일은 없고 이미 여기에 주께서 이미 나를 호명 했잖아요. 호명 했으면 호명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누가 시킨 일이다? 우리 주님이 나에게 맡긴 일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맡긴대로 살면 되잖아요. 빵사오면 예수님이 시킨줄 알고 빵 사오면 되고, 남은거 갖고 싶으면 가져 가면 되고. 어느 것 하나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더 보탤 것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 하던대로 죄 지으시면 됩니다. 여러분 하던대로 잘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번 주일날 제가 잠깐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막 간거 같아요. 이렇게 쉬운 것을 죄 지으면 되는 걸 이것도 못하느냐고 막 또 자제를 못해가지고 톤이 올라가 버렸어요. 하면서도 참 자제 안되는것도 문제다 싶었는데, 죄만 지으면 죄 짓는거 잘하잖아요. 이 현실 붙드는거 잘 하잖아요. 


말레이시아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고민하는 그 죄. 그거 잘한다 말이죠. 그거 뭐 초월했다고 복음 안다고 그거 초월합니까? 이렇게 복음 들어도 집에가면 또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애는 어떻고. 그거 주께서 유발시킨거예요.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노는 인간인지를. 주님이고 뭐고 현실적으로 내 자리 확보하고 내가 그거 지켜내고 그거 남한테 자랑질하고 이것밖에 할 줄 모르는 그 정도로 너는  탕자 였다는 것을 이렇게 점점 더 죄를 숙성 시켜주는 그 고마움. 


강의 이제 그만해야 되겠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못 빠져 나옵니다. 우리 현실에서 이 이데올로기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가 죄를 느끼는 그 현장이 주님께서 전도하는 현장이고, 다른 사람 볼 때에 ‘저게 미쳤나? 자기 죄만 자랑하네.’ 이런식으로 오해케 하는 그럴 때 이미 주께서 딱 이 세상을 두 동강 내는 겁니다. 


썰매, 오늘 강의 제목은 썰매로 확정했습니다. 한쪽은 멈출수 없을 정도로 같이 죄 짓는데 한쪽은 천국으로 가는 죄, 이쪽은 지옥가는 죄. 한쪽은 예수님이 함께 환상세계 만들기 위해서 탔고, 이쪽은 성령이 없고 주님이 없고 자기혼자 사탄에 의해서 사탄이 함께 태워서 그냥 꼴아 박는 그 세계. 이 세계를 어떻게 구원 전도 합니까? 그것은 주님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와서 증거하신다는 그 증거의 역할을 우리가 가로막거나 훼방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고 주께서 하신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 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