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25절(썰매)171219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요한복음 15장 25절, ‘그러나 이제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연고없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이유없이, 이유없이 나를 미워했다. 이유없이 나를 미워했으면 어떤 상황이냐 하면은 미움 자체가 원인없이 미움이 결과로서 미움이 등장한 상태를 말하죠.
그런데 그 미움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율법에 기록한데로죠. 그러면 25절이 이 말씀은 말씀안에 어떤 내용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되어있었냐 하면은 율법안에 말씀이 미움을 발생시키는 힘이 이미 말씀안에 담겨있다 이렇게 보면되요.
이 세상 자체가 그냥 세상이 출연된 것 아니다 이말이예요. 그냥 출연되고 난 뒤 일이 벌어진게 아니고 이 세상을 밑에서부터 외부 그 뒤에서부터 밀어올리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무슨 힘이냐 하면은 미움이라는 내용의 힘이 이 세상을 출연시키는 원인이다 이렇게 보면 되요.
이 세상. 요새 건물도 있고 사람도 있고 뭐 하늘과 땅과 별도 막 있잖아요. 이 자연세계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미움에 의해서 조성될때만 이 자연세계는 있어야 될 이유가 발생되는 겁니다. 있어야될 이유가.
미움이 없이는 이 세상은 있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미움에 의해서 만들어 낸거예요 이게. 이걸 신약에 보면 뭐냐 하면은 인간은 태어나서 죄 짓는다가 아니라 인간은 죄로 태어난거예요. 죄로.
인간 자체가 태어 날 때부터 죄가 밀어 올려서 죄 덩어리로서 태어났는데 모양은 사람모양이다 이말입니다. 이 죄나 이 미움이나 같이 보면 되요. 죄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할때만 죄가 되는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하는데 달랑 두가지예요. 사랑이냐? 아니면 미움이냐? 이것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사랑받게 되게 되면 사랑받고 미움 받게 되면 미움 받는다. 지금 제가 말장난 하는 것 같지만 나름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더 말장난을 하게되면 말장난 아니지만 사랑이 사랑이 되고 미움이 미움이 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보기에 말장난 이지만 왜 이게 말장난이 아니고 진지한 이야기냐 하면은 사랑, 미움은 창세전에 이미 숨어 있잖아요. 숨어 있으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등장하고 미움이 미움으로 등장해야 이게 정상인데, 숨어 있다 보니까 막상 등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맨드라미 채송화 뭐 그런거란 말이죠.
자연세계 + 인간이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뭐가 안보이는 거예요? 숨어있는 사랑과 미움 이 자체가 안보이는 겁니다. 안보이니까 이 자연세계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되어 버렸어요. 스스로.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고 ‘어? 태어났네? 잘 살아보세.’ 이게 끝이예요.
언젠가 제가 설교 할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살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일 없다고. 잘 먹고 잘 사는게 끝인거예요. 인간 세계에서는. 잘 먹고 잘살면 행복하고, 행복하면 그게 족하다는 겁니다. 뭐 다른 의미 찾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끝나는 거죠. 그런데 사랑과 미움이라것은 원초적인 사랑과 미움은 없어요. 인간끼리 살다보면 이제 나를 미워하면 왜 날 미워하냐? 날 좋아하면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자기들끼리 좋아서 결혼도 하고 이러는데 문제는 여기에 누가 왔느냐하면 요한복음 15장 24절이 뜨는 거예요.
23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아버지를 미워한다. 미움부터 등장하지요. 미움 등장합니다. 미움입니다. 자, 미움을 집어 넣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너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너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너희가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미워하였도다.
22절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와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되어 있지요? 예수님 이야기 딱 등장하니까 내가 키가 얼마고, 몸무게가 얼마고, 재산이 얼마인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행복하냐? 불행하냐? 그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출몰한 것, 출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출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은 왜 있어야 되고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은 누가 와야 비로소 다 들어난다? 예수님이 와야 다 들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보냈습니까? 알아서 혼자서 왔어요? 누가 보낸 분이 계시잖아요. 누가 보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보내 버린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요청해서 온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결국 와서 최종 정리정돈을 결국은 해야되는데 그때가 곧 예수님 이 때이니이다.
이미 이제 마지막 때예요. 종말이라고 하죠 종말. 끝, 종말이란 말이예요. 모든 것은 종말로 향하여 달렸고 종말이라하는 것은 역사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의미와 이 세상이 왜 있느냐 하는 그 원초적인 그 근거가 찾아들 때, 이 세상은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되면 사랑쪽이냐? 미움쪽이냐? 로 이게 갈라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느냐? 아니면 하나의 미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어났느냐? 이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미움이라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수님은 미움이라는 그 이야기 하면서 그 미움 속에서 뭘 끄집어냈느냐 하면은 사랑을 끄집어 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처음에는 사랑이 없고 이 세상에서는 미움밖에 없는데, 미움이라는 것을 통해서 미움을 다른말로 하면 배격이예요. 또는 배척. 배척되는 과정을 통해서 숨겨져 있는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부부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부부가 같이 있을때는 사랑을 못 느끼는데 그냥 일상인데, 서로 갈라서고 그리고 서로 배격하고 헤어질 때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그런 노래 있는거 같아요.
이제 우리 헤어지네요 라는 노래있잖아요. 백지영이가 부른 노래.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더라고 뭐 있잖아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이제 헤어지네요. 헤어지면서 미워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쪽에서 실시하는 사랑은 이게 사랑이 아니였음을. 이것도 노래 가사 같다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김광석 노래. 사랑은 그냥 있으면 모르고 이렇게 미움속에서 생기지요. 그러면 미움밖에 없을때는 사랑이 없지요. 그래서 사랑은 뭐냐 하면은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없는 거예요. 사랑은 없는 겁니다.
이 문장이 굉장이 어려운 단어예요. 없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되요. 아예 처음부터 없는건데 사랑은 없는것이라 해서 없는 것 속에서 없었는데 그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사랑을 이끌어 내는 그 솜씨, 그 능력.
그 능력은 이 땅에서 사랑과 미움 양쪽을 다 갖고 계시는 분이 이 땅에 출몰했을 때, 이 땅에 방문했을 때, 들어오셨을 때 미움받으면서 사랑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미움 받으면서 사랑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사랑에서 사랑을 끄집어 내 버리면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니냐 하면은 내 존재에 이유가 미움 없이 그냥 내 존재 이유가 와버리면 주님의 사랑이 일방적이 아니라 나도 조금이나마 나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안되는게 인간은 피조물이거든요. 피조물은 감히 창조자에 회의에 의견 개진를 못합니다. 창조자 끼리 의논을 할 때 그 결과물로 피조되야 되기 때문에 만들어 져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견 할때는 인간은 없는 존재가 되야되요.
없는 존재가 되면서 거기에 사랑이 옴팍 담겨야 되지, 있지도 않은 인간이 ‘저도 사랑했는데요!’ 손들고 나오면은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고 사랑에 대한 훼손이죠. 제가 주일 낮에 탕자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탕자가 집을 떠나서 집 떠나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것은 탕자의 의미가 아니라 했습니다.
플러스 알파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그 알파가 뭐냐 하면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게 아니고 아버지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야 이게 탕자예요. 아버지의 마음 속. 아버지의 마음 속이 예수님과 하나님 마음속이거든요.
그러면 들어오려면 탕자가 자기 것 가지고 들어왔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나는 아들이라는 칭함을 받기에 합당치 아니하다. 나는 배격당해도 마땅하고 배척 당해도 마땅합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때 100% 하나님의 그 인간 없을 때 만들어진 그 사랑이 옴팍 다 여기에 담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앞에 전철이 뭐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밀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배척하는 것. ‘예수님 필요 없어요. 나 예수님 안 믿을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뭐 그런 경우 같은 거예요.
실제로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나는 배격한다. 예수님을 배격한다. 미원한다.’ 그런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할수 있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격하고 배척하는 방법은 뭐냐하면 이거예요. 자기일에 관심있는 것. 자기 일에 관심있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있어 버리면 그 다음의 일들은 전부 다 이거는 그다지 중요치 않는 관심 둬도 그만이고 안둬도 그만이고 나랑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려요. 사람이.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다. 뭐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다 해도 예수를 우리가 ‘예.’ 고개 끄덕이면서 인정해주께요 라고는 할수 있지만 자기 일은 완전히 접어버리고 저게 중요해! 라고 예수님 일에 풍덩 뛰어드는 그 정도가 아니면 예수님에 일에 관심 있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할 때, 자기 일 따로 있고 ‘성경 보자.’ 이렇게 해가지고는 성경이 이해가 안되요. 내 일이 있고 그 내 일이 나를 살리고 있는데, 구태여 성경봐가지고 주님 살려주세요 할 필요 없잖아요. 이거 성경 안봐도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데 뭐하러 성경 보겠어요.
이미 자기 관심사가 성경을 지금 가리고 있는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일에 대해서 완전히 희미하나마 별로 이렇게 거기에다가 안중에 별로 없어요. 눈 돌리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께서는 그냥 말 그대로 하면 보혜사인데 성령께서는 사실은 보혜사는 우리를 정죄하는 우리를 치는 거예요. 이것은 대구 강의에서 제가 이야기 했는데,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어떤 분이 중요한 이야기 했어요. 똑같다.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똑같다. 구조가 똑같다.
다만 뭐가 다르겠어요? 주인공이 다르지요. 이미 내가 나의 일에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주인공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신다? 그것은 모실수가 없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무슨 모십니까?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그러면 자기 일이 망가지든 완전히 부러지든 병들어 죽든 이렇게 해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나와 줄 때, 온통 정신이 정말 예수님한테 관심있구나 하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 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고린도전서 4장엔가 나오는 것 있죠. 딱 이 세글자예요. 만물에 쓰레기로 취급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사도바울은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은 ‘나 상받았다.’ 쓰레기 됬는데, ‘나 상 받았다. 세상에 천사도 부러워하는 신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언급할때는 사도바울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얼마나 자기관리를 했느냐를 보면 안되고 어디를 봐야되느냐 하면은 자리. 사도바울을 떠받치는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를 주목 해야되지 사도바울처럼 해야지 이러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그 인생은 그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예요. 같은 자리이여야해요. 같은 자리. 그럼 같은자리라고 말하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렵잖아요. 그걸 살짝 바꾸겠습니다. 썰매. 그것도 아주 각도가 예리한 썰매.
여기 썰매를 타고 사도바울 탔다. 그런데 이 썰매에 브레이크가 없어요. 그럼 썰매는 눈 덮인 썰매가 내려올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냥 거침없이 하이킥이죠. 거침없이 내려오죠.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예요.
뭐 로마가도 어딜가도 거침없이 여기 어떤 사람이 말리잖아요. 나도 성령 받았는데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3차 전도여행 마치고 가는 길에 당신 예루살렘 가면 반드시 체포됩니다. 사도바울은 체포 된다는 말 들어도 stop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건 브레이크가 없으니까. 사도바울은 그냥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운명을 말릴수가 없는 겁니다. 본인에 대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실린데로 다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썰매가 사도바울만 타는게 아니고 사도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썰매를 타는데 이 썰매는 뭐냐 하면은 지옥으로 내려가는데 거침 없어요. 오늘 제목은 거침없음. 거침없이 어떻게 복음이 아닌곳으로 내달리는지, 이것은 예수님이 어디 미혹 돼서 그런게 아니고 본인의 자리, 본인의 썰매가 본인도 어쩔수가 없어요.
아무리 그 교회에 나와서 복음 듣게 하고 싶어도 발을 못 빼게 만들어요. 그 썰매가 그렇게 속도감이 있으니까 속력감이 있으니까. 거침없이 내려가요 거침없이. 꼭 교회 나올려고 하면 ‘월급 올려줄게.’ 뭐 좀 할려고 하면 ‘너 하나 더 맡을래?’ ‘그래도 나갑니다!’ 이번에 ‘설교 한번 할래?’ 이런식으로.
‘잘 하면 1년만 하면 청년들 20명 줄게.’ ‘처음 나와서 월급 없을 때는 교회에서 월 100만원 보조해줄게.’ 계속해서 하는데 보조를 받아서 머무는게 아니고, 이 썰매가 자기 자신을 단도리 하도록 자꾸 붙잡는게 있어요. 안놔줘요 마귀가. 마귀가 앞에서 쭉 당기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두 종류 밖에 없어요. 성령이 잡아 당기는 건지 사탄이 악한 영이 잡아당기는 건지 둘중에 하나지 중간 지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전도는요 사람이 해가지고는 단 한명도 전도 못해요.
보내심을 받은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이 자연세계 출연이 무엇의 결과라고 했습니까? 두가지였었죠. 사랑과 미움이죠. 사랑과 미움이 이 자연세계를 이렇게 솟구쳐 오르게 하는거예요.
자연세계가 있고 죄가 생긴게 아니고, 죄를 위하여 자연세계와 죄를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진거예요. 인간은 죄로 태어난거예요. 그 점을 여러분들이 죄로 태어났다는 그 점을 제가 오늘 강의 하면서 여러번 계속 강조할겁니다.
왜냐하면은 우리가 거듭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게 필요한겁니다. 니고데모가 거듭 태어나는 것을 오해해서 내가 거듭 태어나는 것을 생각한거예요. 이 말은 엄마가 자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너의 엄마가 만드는게 아니고 엄마라는 말을 예수님이 바꿔줬어요. 육이 태어나게 한거예요. 육에서 낳다고 본거예요. 육에서 낳다. 육이 너를 밀어낸거예요. 생물에 보면 히드라 하는게 있지요? 이 히드라라 하는 것은 무성 생식이 되가지고 뭐 하나 뚝 떨어지면 아메바 비슷하게 뚝 떨어지면 또 새끼인지 어미인지 구분안되고 또 생기죠. 암세포 비슷하게.
또 뚝뚝뚝 떨어지죠. 그냥 그걸 생식이라 하지않고 그냥 분활 되는 겁니다. 분열 또는 분활. 둘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데서 또 하나의 뭐가 새롭게 발생되는 것이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육이 태어났다고 보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보고 인간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고 육이 태어났다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영이고, 영으로 다시 육이 태어난 구조와 영이 태어난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육이 분활 되듯이 영도 분활 되어서 영적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방금 제가 인간 태어나면 인간이 인간 태어난다는 것은 없지요.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임신 안됩니다. 안되요. 이 세상에 태어난게 혹불 나오듯이 태어나요. 혹불. 혹이 나오듯이 혹이 돋아나듯이 여드름 나오듯이 그냥 솟구쳐 올라오는거예요. 자꾸.
내부에 열에 의해서 여드름이 나오잖아요. 내부의 열과 먼지 공기중의 먼지와 결합해서 여드름 된다고 하는데, 자꾸 뭔가 내부의 부글부글이 외부의 하나의 흔적들을 이렇게 남기는 겁니다.
그러면 태어난다는 말이 사실은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태어난다는 말이 성립이 안되고 돋아난다는 말이 되죠. 태어남이 없어요. 돋아남이죠. 왜냐하면 태어남이 되면 이게 무에서 유가 된다고요. 없던데서.
그러나 돋아남은 비록 무에서 그 다음 유가 생기니까 무, 유 두 개가 있지만, 무 없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하면은 있음이 뭔가 있기에 이 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생각하다보면 무가 되는데, 성경에서는 무가 아래쪽에 있다고 했죠. 이거 어디 강의할 때 했는데 어디서 했지? 했어죠 제가.
아래쪽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거예요. 무 보다 작은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 했는데. 없음보다 없음 아래. 말이 참 이상하잖아요. 없음아래. 0보다 아래를 가지고 마이너스라고 합니다.
0보다 아래 내려가면 마이너스. 마이너스 위치에 있어요. 마이너스 위치에. 모든 플러스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마이너스에서 위로. 그런데 이미 인간들은 있음이 있으니까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어디만 보느냐 하면은 ‘아이고 살다가 뭐 죽으면 그만이겠지.’ 라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말이암아 모든일은 종결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인간의 종말은 내가 죽는 것이 종말이 아니고 누구를 만난다? 예수그리스도가 나한테 원천으로 찾아오면 그게 우리의 육의 종말이예요. 육의 종말이고, 영의 개시고, 영의 시작이고,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와 예수그리스도에서 다시 태어나는걸 말합니다.
탕자의 이야기 다시 해볼께요. 탕자가 집에 있는데 집에서 가출해서 허랑방탕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탕자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지요. 탕자의 의미는 집이라는 주거, 주거공간에 도착해 버리면 주거공간에 누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전에 아버지 말 안 듣고 갔다가 나는 돌아왔다 이렇게 되면 계속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은 내가 계속 살아 있어요. 내가 계속 살아있고 돌아온 나도 계속 살아있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나’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나 안에 나만 들어 있어요. 나나나. 나만 들어 있다고요.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까지 들어가 버리면 아버지의 마음 안에 나 가 되어 버리면 아버지의 마음이 뭐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창세전에 창조 이전에 있던 그 마음까지 쑥 들어가버린다 말이죠.
쑥 들어왔을 때 이건 뭐냐. 플러스 알파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가락지 있잖아요 가락지. 그리고 한우 소고기 잔치 벌린 것. 그게 한우인지 이스라엘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소고기 잡아서 잔치 벌리고 좋은 옷 입히고 가락지 끼우는 것.
이것은 돌아올 때 예상 했습니까? 예상 안했지요. 이게 플러스 알파인거예요. 플러스 알파가 만들어낸, 새로 창조해낸, 새로 지어낸 자가 뭐냐하면 이게 탕자입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아버지하고 딱 옆에 붙어 있었던 큰 아들 있잖아요. 큰 아들은 어디까지 가냐하면 아버지 옆에만 갔어요. 어디를 못갔냐? 아버지 마음 속 까지 못들어 가요.
이걸 뭐라고 하냐하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 예수 안에 들어가 버리면 날마다 육이 영으로 육은 죽이고 영은 살리는 그 작업의 대상이 되고 말아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내가 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그냥 생산물이고 그 생산자가 누구냐? 예수님 본인이 본인 숙제 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 설교 제일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말씀은 사람보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한다고 했지요.
이 이야기를 제가 주일 날 끝까지 이야기 했어요. 끝에도 한번 더 했어요.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해 볼래요? 이게 아니고 선언하는 겁니다. 선언 해버리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완전히 우리는 받지도 않아요.
‘예,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런 의지도 안 받고 결심도 안 받아요.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이건 누구의 숙제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자기 과제가 되고 자기 숙제가 되기 때문에 안 받아요. 육이 무슨 영의 일을 합니까?
인간으로 우리가 태어난 것은 육으로 태어난거예요.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무엇의 바다? 이 세상을 아까 미움의 바다. 미움의 세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 25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할수도 있고 자기 의지로 또 사랑할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딱 주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은 다 누구를 미워한다? 예수님을 너나 할거 없이 다 미워하게 되어있다. 이게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작전이고 이게 성취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수도 있고 미워할수도 있는 결정을 내가 낼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딱 이 세상에 등장하고 보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에서 만들어진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있고 죄를 짓는게 아니고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다가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에덴동산에다 무엇을 만들었느냐 하면은 이것을 만들었어요. 금지죠.
에덴동산에 창세기 2장에 보면 따먹지 말라했죠. 금지죠. 자 생각해 봅시다. 금지가 있다는 것은 금지가 있다는 말은 이게 어떤 가능성이 있느냐 하면은 금지할 가능성을 내다보고 금지 법을 만든거예요.
위반할 가능성이 없으면 금지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지법을 했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미 금지해 놓은것에 저촉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일부러 그렇게 몰아가신 거예요.
왜? 그래야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만든 세상이 되기 때문에. 만약 이 세상이 세상이 있다가 실수로 죄 지었으면요 실수한 부분만 수리점에 가서 정비소에 가서 고치면 되요. 그리고 아예 금지법이 아예 없었으면 그 자체가 최종 완료 상태가 되고 완성상태가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 시작, 끝. 그게 끝이 되버려요. 자, 에덴동산 시작! 끝! 더 이상 필요치도 않아요. 그대로 살면되요. 선악과 없이. 선악과 없는 경우는 요한계시록 22장에 있어요. 그때는 생명나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창세기 2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금지가 있어요. 금지가 있다는 말은 금지의 취지를 살려서라도 금한 것을 위반을 해줘야 된다니까요. 위반을. 위반을 해줘야 그때 금지가 이렇게 응축된 금지가 비로소 날개를 펴고, 치토스 먹고 말거야 이렇게 본격적으로 너희는 이제 나한테 한번 당해봐라가 본격적으로 개시가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이고 여자고 남자고 전부 다 흙이 되어가는 거예요. 다 흙이 되어가는 겁니다. 아담의 이름은 흙이라고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지요. 하나님이 이름을 지을때는 이것은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하는 것이죠. 흙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여자는 남자한테 복속되니까 여자도 같이 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이라고 지었지요 생명.
생명이라고 지은 것은 뭐를 보느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긴다 해서 주님께서 해결책을 줬을 때, 그 여자가 결국은 우리에게 비록 흙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약속이 성취되는 날 생명을 주시는 그 내용을 여자의 후손이니까 이 여자한테 주셨다는 것을 믿고 하와라 생각한거예요.
아담이 일종의 선지자의 계시가 되고 선지자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아담 자체가. 아담이 벌써 이 생명을 내다 본다는 것은 아담부터가 약속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약속이 구체화 되는거죠.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죄, 죄에다가 뭐가 들어오느냐? 약속이 들어온 겁니다. 죄의 세계에 약속이 들어오는데 그러면 약속이 약속의 눈으로 볼 때, 약속을 사람이라고 본다면 어떤 분이라고 본다면 약속의 눈으로 봤을 때 여기 죄 속에는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약속의 눈으로 봤을 때 없지요?
그러니까 약속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어떤것이라도 뭐가 되야 하냐면 죄가 되야해요 전부다. 죄가 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약속이 왔을 때 예수님이 왔을 때 결국 인간간의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전부 영어로 ALL이죠. 모두가 죄다.
예수님 생각은 이것이고, 인간세계는 뭡니까. 죄도 있지만 선도 있다. 이게 인간세계잖아요. 부자청년처럼.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죄도 있고 선도 있다. 또 다른말로 죄 지을 가능성도 있지만 잘만 하면 선하고 의로울 가능성도 있습니다가 인간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죄의 쪽보다는 착하고 바르게 살고 최선을 다하고 성의와 정성을 다하면 이쪽에 무게를 두고 죄가 없다고 우기지만, 내가 일단 오게되면 이 기준은 완전히 깡그리 완전히 개무시 해버린다.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무시하는 방법을 한번 봅시다. 무시하는 방법은 인간이 죄와 선 이렇게 갈랐을 때 인간이 보통 죄 지으면 벌이 뭡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죄 지었으면 벌을 뭐로 내리지요? 살인, 강도 벌을 뭘로 내립니까?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 사회에서. 살인, 강도 했을 때 벌이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 두 개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전부 다 사람들 보기에 한통속이다. 한통속이다. 질이 같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통 그 당시 사람이 강도질했다 하면 그 사람을 뭐라고 하냐 상당히 초라하게 보겠죠 이 모습 행적이. ‘아이고, 인간아 살다가 어떻게 강도질해서 살인당하나.’ 초라하게 보죠.
초라함1, 초라함2. 그 초라함 속에 누가 들어 갔어요? 하나님 = 인간 속에서 초라함이 되는 거예요. 초라함을 앞에 보내봐요. 어떤 하나님? 초라한 하나님, 볼품없는 하나님, 아무도 관심두고 싶어도 얼굴을 돌리게 만드는 하나님.
그러니까 죄가 되어버린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왔어도 아무도 믿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결국은 인간은 모두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한통속이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결국은 예수님 앞에서 한통속입니다. 다 죄인들입니다. 저주 받을 죄인들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도 시중에 가짜 예수가 거의 99.999% 되다 보니까 뭐 니가 믿는 예수 나도 믿는 예수 편하게 다 믿는데 진짜 예수, 진짜 예수를 강도와 강도 사이에서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오실텐데 하고 기다린 사람 있어요?
아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기다리면서 죄인들만 달리는 그 형무소 있잖아요. 사형장 거기 서 가지고 아 주님 올 때 됬는데 왜 도착안하지? 이런식으로 예수님을 거기서 기다린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작전을 벌일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예요. 예수는 아무도 믿을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그 똑똑하다는 그 사울까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사울도 예수를 믿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믿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여겼습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괜히 했겠어요? 전처를 정답을 다 알고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나 된 것은 이것은 절대로 내 쪽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눈치채서 한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래서 내 속에 사탄의 가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내게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내게 족하다.
이제 무엇을 집어 넣었든 가시를 집어 넣었든 선인장을 집어 넣었든 독약을 집어 넣었든 그래서 일찍 죽이든 살리든 사나 죽으나 뭘 집어 넣었든 ‘주여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할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님을 알지요.
그렇게 될려면 우리 주둥이를 다물게 할려면 완전히 모든 것을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구약에 그와같은 상황이 구약에 욥기에 보면 그와같은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냐면 욥기에 보면 욥이 하소연 합니다.
‘나를 위한 변론자가 없나이까?’ 없어요. 내가 살아서 재판하면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변론할것이 기다린다 이렇게 했거든요. 주님은 안기다렸어요. 안기다리고 미리 와버렸어요. 미리 와버렸어요.
사람이 변론이 될려면 일말의 의로움이 있을때나 이 의로움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변론자, 나를 이렇게 변호 해주고 보호해줄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만약에 의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죄밖에 없다면 죄 변론합니까? 안되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변론자로 오는데 변호사인데 성령이 보혜사인데 우리의 죄를 의로 바꾸신 주님의 변론자로 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떤 팔자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느냐 하면은 그 아까 이야기한 초라한 하나님이라 했죠.
그 초라한 하나님의 그 현상을 이제는 우리가 답습을 하게 만들어 버려요. 예수님을 욕했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그 비난이 아버지의 맘까지 탕자가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마음까지 쑥 들어온 사람은 예수님이 당했던 그 미움과 서러움과 비난과 그 초라함과 욕됨을 같이 그리스도를 공유해서 같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사탄의 가시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 비록 삼층천 올라갔지만 현실에서는 뭐냐하면은 초라한 행객, 초라한 행세예요. 사도바울 니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 한번 보자. 그거 볼 필요 없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뭘, 오래 살면 복이고 그러면 오래살면 의인되고 일찍 죽으면 죄인 되는 겁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33살인데 그야말로 진짜 죄 많이 지은 사람이겠네요. 그 잠언서에 보면 의로운 사람은 장수하고 의로운 사람은 오른손에는 장수 왼손에는 부귀, 가질 것 다 가지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 신약에 온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둘다가 없어요. 인자는 뭐 둘 곳도 없다? 머리 둘 곳도 없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고 이 땅에서 오래 살지 않고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사도바울도 맨날 굶고 이랬다 이말이죠.
그게 뭐냐하면은 계속 미워하게 유도하는 겁니다. 미워하도록. 미워져야 되요. 미워졌는데 이 미운 인간을 용서를 해줄 때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 인생이 이러면 되겠습니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어떻게 더 나올수가 있냐 이말이죠. 더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는거죠.
주께서는 그런쪽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성령이 임해서 성도라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 거북스럽고 불편한 인생만 그렇게 살아야 되고 남들이 부러워 하는 인생은 살면 안됩니까?
주께서 남들이 부러워 하는 인생을 못 살게 만들어요. 왜냐하면은 우리 안에 영이 들어 있으면 남들 보기에 좀 집 한 두채 있고 부동산 한 뭐 서울에 강남에 노른자 땅 한 5천평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그런게 있는 것을 자랑치 않기 때문에 남이 흉내를 못내는 겁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정도 되게되면 ‘봐라 복받았다.’ 이렇게 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 있더라도 ‘나의 관심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어.’ 이런 마음을 흉내를 못낸다 이말이죠. 재산의 여부, 자식 잘되고 그 여부와 관계없이 마음 씀씀이가 나는 죄인인데 나를 죄인되게 해주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나올 때 누구하고 대화가 됩니까.
동창생 만나가지고 품위있는 여자들 만나가지고 대화가 안되잖아요. 안되지요. 충청도 말 하면서 이쁜 입으로 혼쭐나야되겠어요. 조끼 이런거 입고 김선아가 이런거 입고 품위있는 모임에 가봤자 돈 자랑 자식자랑 밖에 더 합니까?
그런데 거기서 십자가를 자랑해 보세요. 분위기 다 깨놓습니다. 너 내일부터 오지마라. 그게 보통 복입니까? 물론 이제는 그것도 귀찮아가지고 그것도 내 의가 될까 입 다물고 아무 소리 안하지요.
그것 마저도 혹시 내가 고난 받는 것마저 내 의가 되면 안되니까. 우리 작전을 바꾸자. 조용히 있다 조용히 살자. 작전을 바꾸니까 고난 받을 필요없고 미움 받을 필요 없고 그저 뭐 남 이용할대로 이용해 먹으면 되고...그러나 기어이 주께서는 티나게 만들고 들통나게 만들어요.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자기는 예수님만 자랑해요. 예수님만,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성령께서 탁 치면 탁 치니까 윽하는 소리나지요. 탁 치니까 갑자기 ‘주님만 자랑했는데 왜 이렇게 나옵니까!’ 이렇게 나오게 되어있어요 반드시.
‘나는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사랑했는데 왜 이러십니까!’ ‘오 방금 나온거 녹음해 놓고 그게 왜 나오지?’ ‘아 이거 있었네.’ 그러니까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것이 어느새 그런 것을 자랑하는 나를 자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사랑.
자기 미움이 아니고 어느새 벌써 자기애에 둘둘 말린겁니다. 그러면 죄에서 출생한 이 육이라는 것이 자기가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자 한번 첫째시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죄에서 출생했다는 말은 다른말은 우리는 이유없이 그냥 무조건 죄인이다. 이유없이. 이유없이 무조건 죄인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자리가 결정하거든요.
그런데 이 자리 썰매, 이 자리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브레이크 없이 그냥 한쪽은 천국으로 꼴아 박고 한쪽은 지옥으로 꼴아 박는 것. 촤~~악 이것은 거침없이 내려가요. 썰매 탄 사람이 조종할 수가 없어요.
지옥가다가 천국으로 자기가 썰매를 옮길수가 없어요. 그런 운전대도 없고 이건 완전히 하나님의 자율 운전이다. 없고 그냥 내려가는대로 내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 내려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내가 주님을 미워한 죄인인 것을 갈수록 점점 더 느끼면서 그 자리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있지요.
왜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는가? 이유가 없어요. 왜 이유가 없어야 되느냐 하면은 내가 죄인된 것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쁜짓해서 죄인된 것이 아니잖아요.
이유 없이 태어났고 태어난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죄가 있어서 죄를 드러내라고 태어났고, 그래서 우리는 죽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 마음 안에서 그것을 깨달았으니까 예수님 마음 자체가 썰매니까
우리는 썰매 속에서 나는 그 죄 때문에 태어났고 예수님은 의 때문에 태어났고 그런데 그 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의로 바꾸는 그 작용이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를 내가 소유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인 것을 의로 늘 바꾸어 주시는 그 작용을 우리는 십자가 작용으로 그것을 감사하게되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죠.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