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25절(미움)171205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요한복음 15장 21절, 요한복음 15장 21절에 보게 되면 거기부터 할 차례예요.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였음이라.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지금은 예수님께서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고 누구를 남기는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땅에 남깁니다. 남기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핍박이 바로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관계를 맺을 때, 이것은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뭘로 관계를 맺느냐 하면은 이걸로 해요. ‘미움’
세상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세상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근거해서 누굴 미워한다?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 다음에 누굴 미워해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거예요.
초반부터 좀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은 할수 없어요. 이건 어렵게 해야되요. 제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 구체화되지 않고 제자들은 없어요. 잘 들으세요. 이게 어려워요. 제자들 나는 제자입니다. 이건 거짓말이예요. 제자들은 없는거예요. 유보 된거예요. 지금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미움이 대상이 되는 그때는 제자가 되는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아야 됩니다.’ 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유도 합시다.’ 도 아니예요.
‘나는 제자인데 제자답기 위해서 미움을 받는 짓을 하자.’ 이것도 아니고 미움이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미움이. 그러니까 뭐냐 나는 제자이고 싶어하는 그 모든 소원, 소망 이거 전부 다 없애라 이 말입니다.
‘나는 천국가는 주님의 제자다.’ 라고 누구든지 그렇게 마음 먹고 싶어요. 그건 자기 마음이고, 자기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이건 없애버리자 이말이예요. 없애버리면 제자 만들기의 주체, 제자 만들기의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제자 만들어요. 나는 제자입니다 손들고 나오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 제자 되고 싶어요.’ ‘집에 가라. 애나 봐.’ 주께서 안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대로 해요. 자기의 말씀이 헛 말씀 안되는 쪽으로 주께서는 세상을 그렇게 이끄시는 겁니다.
따라서
제자됨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예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예요. 우리의 소원 아니고, 예수님의 소원으로서 태어나야 그게 제자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진짜 제자한테 물어보기를 ‘당신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원해서 제자 되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진짜 제자는 뭐라고 합니까?
‘나요? 나는 제자 안될려고 했지요. 그런데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 이 팔자와 내 인생을 내 미래를 이렇게 이끌고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어떤 어떻게 How 어떻게 해서 제자 됬는지 묻지 마세요. 그것은 제 소관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제자 만들었습니다.’
제자라는 말 대신 성도라는 말 집어넣어서 ‘일방적으로 주께서 성도 만드셨습니다.’ 할 때 그 사람은 예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의 증인입니다.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뭐냐하면 타율적이고 수동적이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그렇다면 진짜 제자 된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겠습니까? 주는대로 갚죠. 무슨말이냐하면 세상이 미워해서 제자 됬잖아요. 그러면 제자가 세상볼 때 뭐로 보겠습니까? 마찬가지죠. 미움. 미운 털.
양 쪽이 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미워. 미움이 되면 여기서 뭐가 깨지느냐 하면은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협력과 소통은 됩니까? 안됩니까? 협력과 소통은 안되지요. 이게 깨지지요.
협력과 소통을 깨는게 뭐냐하면은 놀랍게도 성령의 교제라는 겁니다. 성령의 교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가 되는 겁니다. 우리 성령 받았으니까 협력합시다. 우리 소통합시다 이러잖아요. 교회에서. 결집력을 보입시다.
교회가 이렇게 단결을 보여야 야 저 사람들은 진짜 교인들은 어떻게 저렇게 서로 잘 나누고 서로 도와주고 어떻게 저렇게 한 마음이 됬느냐 라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것이라는 착각은 해서는 안되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가 교회를 깬다고,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를 깨버려요. 성령의 교제가 인위적인 모든 협력과 소통을 깹니다. 왜냐하면 인위적인 모든 협력과 소통은 이게 의도가 있어요. 사람이 교회에서 협력과 소통하는 것은 의도가 있는데, 그 의도가 뭐냐하면 바로 존재입니다.
우리교회가 다음주도 우리교회이길 원해요. 그 다음달도 2018년도 우리교회가 존속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이게 존재의 특성입니다. 존재의 반대말이 뭐냐하면 생성이예요. 생성은 있다가 사라져도 그 순간 만족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다가 사라지게 한 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가 있는 이 존재에 대해서 내가 믿거나 의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거든요. 예를 들어서 지난 주 남편이 나를 사랑했다. 만약에 존재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이 나를 사랑했다 그러면 나는 뭐냐하면 남편한테 사랑받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런데 자기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생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지난 주 남편이 나를 사랑이라는 것을 나한테 만들었다. 그러면 남편이 있는 이상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주 되면 남편이 또 다시 뭘 주겠어요? 생성을 주겠지요. 또 그 다음 달 생성을 주겠지요. 생성. 사랑이라는 것이 생성 되겠지요.
자, 존재와 생성의 차이점이 딱 들어오지 않습니까? 존재란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억지로 계속 끌고 가는 것이 존재라면 생성은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있게 하신 그 쪽의 존재가 더 중요한 것이 생성이죠. 이해되십니까?
그게 파블로프의 실험에 나와요. 개한테 먹이 줄때마다 종을 쳤다 이말이죠. 개한테 먹이줄 때 종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원래 처음에는 먹이 주면 먹이 보고 침 흘리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반복하다 보니까 이제는 먹이 없는데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철처하게 저쪽에 어떻게 됬다? 철저하게 의존적이다 철저하게. 그러면 존재는 의존적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존재는 자기가 만들어진 내 존재에 의존적이죠. 내가 내 존재에 의존적이라니까요.
한번 이렇게 멋있게 됬잖아요. 그게 하나의 기준이 되어가지고 내일은 이것보다 더 나은 내일. 지금이 기준이 되어가지고 보다 더 플러스 알파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생성은 생성을 알게 되면 항상 어디 가 있느냐 하면은 바닥에 가 있어요. 바닥에.
다시 없는 자리예요. 없는데서 있게 했다면 우리는 쫓아 어디 가야 됩니까? 없는 자리에 가야되겠죠. 없는 자리에. 이게 생성이예요. 그러면 현재 주님이 우리를 성도로 생성하겠습니까? 존재케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생성하는 거예요.
한번교회는 영원한 교회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예정론이 그래서 틀린거예요. 칼빈주의 예정론이. 예정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와요. 나오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칼빈주의 예정론은 이것을 생성에서 받아내 줘야 될 것을 ‘하나님, 창세전에 저 예정되었지요?’ 이 말은 뭐냐? 내 존재, 이 존재 안 버릴거지요? 이렇게 나온거예요.
이 존재 안 버릴거라고 딱 다짐을 하고 나온 부터는 그 다음 부터는 본인이 본인을 고매해요. 그런데 내가 나쁜짓 하면 어떻게 되느냐? 나쁜짓 하면은 예정이 취소 되느냐? 한번 보자 취소되는 구절 한번 보자 히브리서 6장을 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아이고 이거 큰일났다. 큰일났구나. 칼빈주의 예정론이 이렇게 나쁜거구나.’ 이렇게 했다가 그 다음에 성령의 보증으로 이렇게 하면 ‘어?! 이미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자를 의롭게 하셨다.’ 아오리스트라고 하는데 헬라어로 이게 뭐냐 하면 단순 과거 인데 과거에 확정된 것은 그게 미래까지 쭉 간다는 이야기예요.
이미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것을 영화롭게 그 다음에 뭐예요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끝장내고 확정 지었거든요. 하셨느니라. 그러니 교인들이 그것 가지고 전도사 목사 붙들고 질문들을 해대는 거예요. 어느 교회도.
‘예정 되었는데 나쁜짓하면 취소 되는 겁니까?’ ‘취소 안되지요. 우리 장로교는 예정론 믿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이 대목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알렉산더는 사탄에게 갔다 이 대목은 어떻습니까? 특히 구약에.
구약에 성신 받은 자가 누구냐? 사울 왕이거든요. 그 사울 왕 어떻게 되었어요? 다윗이 골리앗 이기고 난 뒤에는 창 들고 벽에 꽂을려고 했지요. 그때 성경에 뭐라고 했냐 하면은 성신 들었다는 그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다는 거예요.
다윗이 딩가 딩가 기타 치니까 그 때 좀 낫고, 기타 치면 뭐합니까 세 번 씩이나 잡아 죽일려고 그렇게 설쳤는데. 그때 뿐이지요. 그러니까 내 존재 죽어서 천국가는 존재 되기를 기대하면서 오는 교인들에게 시작부터가 뭡니까?
시작부터가 생성이 아니고 존재로 시작하니까 성경을 천독 만독을 백독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게. 맨날 성경 봐도 우리는 구원 받았으니까 맨날 구원론이예요 맨날 구원론. 교회 10년 다니고 20년 다니고 목사 장로되도 목사님 저 구원 된거 맞습니까? 질문자체가 자기 존재 걱정이예요.
자기 존재를 어떻게 단도리 하는가? 내 존재가 우선이고 제일 시급한 문제가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느냐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또 성경에 이런게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이렇게 하니까 아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 가지거든요.
자기를 부인하고 두 번째가 자기 십자가 지고 세 번째가 뭐냐? 나를 따르라. 세 가지 거든요. 이거 세가지 다 하면 저 구원 받습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할 때 뭐가 날라가야 되요?
자기 존재에 대한 모든 기대가 같이 날라가 줘야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고란 말을 뭐라고 오해하냐 하면 나를 반성하고로 이야기 해버리죠. 나를 반성해버리면 이것은 어디에 빠지느냐? 오늘 여러분 잘못 걸리셨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를 계속 해야하는데, 나도 약간 걱정되지만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 알아서 할 문제고요.
인간의 한계가 외재적 한계있고 내재적 한계 두 종류가 있어요. 이게 말은 굉장히 어려운데 설명 들어보면 아 이런 거구나 알것입니다. 외재적 한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항상 현실을 볼 때 그냥 보지 않고 지평선에 둘러싸여서 현실을 봐요. 싸인 현실. 지평선에 둘러싸인 현실. 지평선.
이게 뭐냐하면은 지금껏 나이 한 60이상 사시면서 친구가 있잖아요. 목사님 친구가 한 몇 명 된다고 봅니까? 본인하고 뭐 이렇게 싸우지 않고 이야기 전화로 한 5분정도 할 수 있는 친구. 잘 있었나? 안부 전할수 있는 친구 몇 명있다고 봅니까? 한 3천명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목사님에 있어서 지평은 3천명 까지예요. 그 다음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이게 지평이예요. 그런데 이 지평선을 보게되면 이게 지평이 거리감이 없어요. 그것을 무한이라고 해요. 무한. 다가가면 지평선도 같이 물러가요.
그런데 만약에 연세가 70되가지고 친구를 한 500명 사귀었다. 그러면 3천명에서 500더하면 얼마입니까? 3500명이죠? 3500명 만큼 그게 또 지평선 이예요. 하여튼 지평선 너머는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인간은 현실을 다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현실을 모른다는 말은 누구를 몰라요? 나를 몰라요. 3500명 둘러싸여서 너는 이렇다 너는 이렇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3500명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내가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결국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이것이 외재적 한계인데 이건 뭐냐하면은 지평 너머는 모른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현실이 뭐냐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뭐냐? 자기가 살면서 경험한 것 주워 모아서 현실을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렇지요?
이 구성한 현실 속에 뭐가 있느냐? 윤리 도덕이 만들어 지거든요. 윤리 도덕. 나 이렇게 살아야 되. 여기서 막 가면 안되. 지평선이 몇 km 입니까? 그건 아무도 몰라요. 왜? 다가가면 지평선에 다가가면 지평선도 그 만큼 물러가니까.
꼭 그 님그림자에 나오는 달그림자 같아요. 달을 잡으려고 하면 달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그만 그만큼 떨어져 나간다 이말이죠. 그래서 사람은 평생 살아도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평생 살아요.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산다는 말은 내가 지금 이 윤리 도덕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해가지고 나름 이것이 선하다고 여겨도, 자기가 구성한 현실 안에서 선하지 이 바깥에서 이게 선인지 악인지를 본인이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이 바깥에서 3500명 되겠습니까? 35만명 넘어요.
그래도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지평선 안에서 윤리 도덕을 만드는 것은 이것은 순전히 자기 의 자기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둘이 만난다는 것은 참 이것은 위험한 짓이예요.
어떤 사람이 말했어요. 가장 나쁜짓은 가장 위선적이고 가장 가증한 짓은 결혼이다라고 했어요. 인간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나는 이 남자만 사랑하기로 했습니까? 동의 하십니까? 예! 그 때부터 그 사람은 가장 가증적인 사람입니다.
왜 그러한 위험한 짓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결혼하지 말고 여러 남자 사귀는 것이 이게 지극히 정상인데 자진해서 비정상 인간을 자진해서 비정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합니까? 사회가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사회가.
정말 별 소리 다하지요. 결혼이 가장 나쁜짓이라는 거예요. 결혼이.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느냐 이말이죠. 이런 주장이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외재적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재적 한계는 뭐냐 하면은 객관적으로 한계가 있잖아요. 객관적 우리 한계가 있죠? 친구가 3500명이지만 5000명은 아니잖아요. 그만큼 무시하지요? 세상에 아는 것 없지요? 없으니까 객관적 한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주관적 한계로 바꿔요. 주관적으로 바꿔 버리면 뭐라고 하느냐? 나름 노력을 다 했습니다. 나는 노력을 다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따라잡을수 없는 무한, 객관적으로 따라 잡을수 없으니까 주관적으로 절대 선을 만들어 놓고 이 객관에서 미흡한 것을 그래도 내가 노력하잖아요 하는 이것으로 절대 선 하나님을 따르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노력하는 주관적으로 스스로 노력하는 것으로 그만 이것을 퉁치자 이 말입니다. 노력한 것으로.
그러면 비록 모르지만 비록 이 지평선 넘어는 모르지만 이것은 얼마든지 내가 최선의 노력은 다 할 수 있어요. 최선의 노력.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노력이 어떤 노력이냐 하면은 가상한 노력이죠 가상한. 착해질려고 가상한 노력. 가상한 노력이 그 만큼 비축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무식하면 무식할수록 나는 점점 더 선해진다는 모순이 발생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저 지평선 넘어 뭐인지는 모르는 그 객관적을 주관으로 전환시켜가지고 내가 모르지만 항상 열심히 이 바깥세계 신의 세계, 모르는 세계를 인간은 신의 세계거든요.
신의 세계를 내안에 들여놓는 거예요. 내안에 들여와서 신 앞에서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재롱을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게 되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이렇게 뒤 꽁무니로 점점 더 이렇게 생산물이 쌓이잖아요.
그 쌓인게 뭐냐하면은 자기 의로움이 쌓이는 거예요. 그러면 힐끗힐끗 돌아 볼때마다 교회 10년 다닌것보다 20년 다니고 집사보다 장로 목사되고 그러면서 뒤돌아 보게 되면 거기에 한껏 뭐가 쌓여 있습니까? 자기 의로움.
그 자기 의로움은 무엇의 반영이다? 신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던 자기 의로움이죠. 그 쓰레기를 버릴 용의 되어 있습니까? 어떻해서 모은 의로움인데. 버릴래요? 못버리죠.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가.
예수님을 미워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뒤 돌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쌓여 있는 자기 의로움 그걸 버리기는 뭘 버려 고이고이 간직하지요. 고이고이. 그 고이고이 간직한 사람들이 누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 이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되니까 이 사람이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외재적 한계를 내재적 한계로 바꾸어서 최선을 다하는게 이것이 잘못됬다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을 미워하니까 잘못됐지요? 자, 오늘 강의는 이것입니다. 이들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 이들이 뭐가 잘못되었어요? 오늘 이거 안 풀면 정말 오늘 집에 못갑니다.
이들이 이렇게 사는게 뭐가 잘못됐어요?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있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남한테 남편은 남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아내로서 본분을 지키고 자식들 잘 키우고 뭐가 잘못입니까? 이게?! 하나의 시민으로서 질서 지키고.
신은 뭐냐? 절대 선이잖아요. 선하게 노력하는게 그게 왜 잘못입니까? 성경 말씀 순종하라는 말씀 다 순종하는데, 다 순종하는데 그게 왜 잘못이냐 이말이죠. 자기 의 주께서 생기게 했는데 내가 생기게 한게 아니고 주께서 생기게 했는데 왜 잘못이냐 이말이죠.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잘못이냐? 아까 이야기 했어요. 벌써 잊어버렸죠? 아까 제가 무엇과 무엇을 비교했습니까? 존재와 생성 이야기 했지요. 생성은 의존적이라고 했지요. 의존적이라는 것은 생성이 생성 될려면 나 존재보다 우선되는 존재가 있어줘서 그 존재가 나를 건드려 줘야 되요. 늘 건드려요.
신앙인의 특징이 뭐예요. 본인이 설치는 것이 신앙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와서 건드려주는 것이 신앙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렇지요. 이삭이 그렇지요. 야곱이 그렇지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공식 그 공식의 맞춤에 맞춰진 자가 성도잖아요.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뭐라고 하느냐 믿음의 모델,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니까 믿음의 조상은 항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냥 두지 않고 건드렸잖아요. 터치했죠?! 터치했다는 말은 뭐냐하면은 한번 터치해서 존재가 되면 그 다음은 터치 안합니까? 계속 터치했죠. 계속 생성이잖아요 계속.
생성이란 말은 현재 내 존재가 예상 못한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예요. 이 존재가 예상이 되어 버리면 내가 나를 건드린 것이 되요. 내가 나를. 그런데 생성이란 말은 존재가 아니고 나는 생성이 될려면 지금 나를 건드신 그 분이 내일 되면 내일치 건드릴거고 모레되면 모레치 건드릴거고 그 다음 두 시간 뒤에 또 건드릴거고.
찬송가 있잖아요. 한걸음 한걸음 누가 인도해요? 주께서 인도 하잖아요. 찬송가에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주여 이만하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왜 주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존재가 아니고 생성이기 때문에.
생성이란 것은 존재가 될 수 없는거예요. 그러면 생성이 생성되기 위해서 다른 존재가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믿음이란 뭐냐하면 내가 얼마나 의를 모았느냐가 믿음이 아니라 나를 건드려 주시는 그 분이 어떤 일을 하셨느냐를 관심있게 보는 것, 그분에게 모든 것을 거는 그것이 믿음 이라 이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가 이 생선된자가 바깥으로 노출시킬 내용이다 이말입니다. 그 내용을 가지고 존재는 아닙니다. 이걸 뭐라고 하냐하면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나 하나가 나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고 나를 나 되게 했던 주님의 살아있음을 주님의 존재가 지금도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우리는 사건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툭 던지지요. 목사님 지금껏 누구 덕분에 살았어요? 이렇게 툭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답을 알고 있지요. 집사님은 지금까지 나이 40까지 어떻게 사셨어요? 물어보면 정답은 알고 있잖아요. 주의 은혜로. 머리 속에 들어 있어요. 주의 은혜로.
예수님의 존재가 진공상태가 아니고 지금 미운 털 미운 털, 지금 예수님 존재의 주변에 뭐냐하면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틀이 있는거예요. 똑같은 팔자로 지금 우리가 합류된겁니다. 내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희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꾸 질문을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지 말고 지금 다 같이
우리는 뭘 해야 하냐 하면 예수님은 지금 무슨일을 하십니까? 거기에만 꽂히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슨일을 하는가?
지금까지 이야기는 뭐냐하면은 제자는 본인이 손들고 하고 싶다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건드려 줄 때 제자 되는데 건드려 주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세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뭘 준다? 미움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움이 세상이 아무나 미워하잖아요. 그것말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미움만이 제자되게 해요. 세상에 미운게 한두가지 아닌데.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미움이 도달되야 제자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더하지고 빼지도 않았어요. 딱 그거예요.
나를 미워했던 그 미움이 있을 경우에는 내 제자가 된다 이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자기 제자 만들려면 어떻게 합니까? 계속 세상으로 부추겨서 나를 미워했던 미움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세상을 흔들어 대겠죠? 지금 이 이야기 하고 우리 미움 받으면 안되니까 밉지 않도록 좋은 행동해서 착함 받읍시다 지금 이거 하고는 지금 정 반대예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상을 줘가지고 착하고 바르게 칭찬 많이 받으면서 편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가 반대 이야기 하는 겁니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예수믿는 보상은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 분명히 해야되요.
예수 믿으면 뭔가 돈 주겠지, 예수 믿으면 건강 주겠지 그런거 없어요. 일체 예수 믿는 보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가 아니고 생성 이기 때문에. 존재 같으면 보상을 주지만 생성이기 때문에 그게 없어요. 보상 없어요. 보상 없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자체가 이미 보상이예요.
사도 바울은 그게 바로 내가 받은 상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은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천사가 부러워 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보상을 받아 버리면 우리는 소유가 되어 버립니다. 소유가 되버릴려면 존재가 기정 사실화 될 때 소유가 되고 많이 받으면 많이 증거가 되고 적게 받으면 적게 되고, 소유가 아니고 생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소유가 아니고 생성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하나의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경로 하나의 관계성 이것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계시고 우리가 이렇게 제자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관계 있잖아요. 예수님이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는 계속해서 생성을 유발해요. 그러면 이 관계가 바로 복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내가 소유할 수는 없어요. 내가 소유하면 내가 주님이 되니까.
이렇게 우주선하고 우주 밖에 나와 헤엄치고 있는 우주 비행사 하고 이렇게 끈으로 엮어져야 되잖아요. 그 끈이 중요한거예요. 이 끈이 뭐냐하면 이게 하나님의 의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이 끈을 만약에 자기가 소유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끊어지고 내가 뭐가되냐하면 존재가 되버려요.
이제부터는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해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를 믿느냐? 자기 자신을 믿어요. 예수 잘 믿는 자기 자신을 믿게 된다고요. 지금 개혁주의 신앙이 다 이렇게 빠졌잖아요. 예수님 이용해서 구원받고 이제부터 착한 일해서 단독적으로 천당가자. 자기 혼자 갑니까? 천당을? 성령의 세례를 왜 하는데요?
늘 이 관계가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받는 관계에 있다니까요. 주시고 받아서 받는 관계인데 이것이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뭐냐? 예수의 증인되요. 예수의 증인. 이것 내것입니다가 아니라 주님 주신것입니다 라고 될려면 늘 이 파이프가 하나가 되어야 되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항상 주께서 하라해서 한거예요 하라고 해서. 단독적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라고 해서 한거예요. 설거지 했다 주께서 하라하신 한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그런 생각 안들어요. 설거지 하다가 그릇 두 개 깨봐야 아 주께서 성질 급한거 알게하는구나.
그러니까 어떤일을 하던지간에 주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어요 우리가. 여기 추운 날 오신것도 주님의 허락하에 오신겁니다. 그럴 때 같은 성도들이 볼 때 뭘 보느냐 하면은 그 사람을 소중히 봐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중한거예요. 본인이 착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만남. 이 만남, 관계가 소중하지 내가 소중한게 아니다 이말이죠.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을 사랑해야지 그 사람 사랑하면 안되요. 만약에 어떤 사람을 사랑해 버리면 그 사람이 만약에 배신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해 버리면 어떻게 되요? 그동안 들인 밑천 생각나가지고 가방 사주고 뭐 이런거 화나겠죠.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소유지요.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항상 사랑의 원천은 주께서 만나게 해줬다는 만약에 부부인데 한쪽이 복음을 거부한다 ‘이럴거면 헤어져.’ 헤어지면 되죠. 주신자도 주님이요 가져간자도 주님이고 헤어지면 되잖아요. ‘아효 슬프다.’ 왜 슬픕니까? 생성인데 왜 슬퍼요?
갑자기 슬픔이라하는 것은 뭐가 있다? 자기를 뭐로 보는거예요? 생성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존재로 보는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 예수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우는 것도 니 마음대로 안되고 웃는것도 니 마음대로 안되. 신랑이 없을 때 울어야 되고 신랑이 있거든 울고 싶어도 히히 웃어야 되요. 지금 나혼자 웃고 있다. 아이고 민망해라. 나 혼자 믿음있나.
주님의 들러리 이거든요. 주님의 들러리면 왜 주인있는데 우리가 불평을 해대냐 이말입니다. 내 인생, 내 꼬라지가 이렇습니까?! 자기 혼자 있으면 그런 소리 할 수 있는데, 주인이 그렇게 박아놨다면 그 자리에 박아 놓은 거예요. 그런데 왜 자기 신세 타령하고 있느냐 이말입니다. 감사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혼자 살면 남하고 비교해서 저 사람 저렇게 잘됬는데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가장 적합하게 주님이 원해서 생성해서 줬다면 날마다 생성으로 날마다 생성의 기쁨이 솟아 나와야지 왜 남하고 비교 합니까? 남의 인생하고 비교하냐 이 말이죠.
이런 소리 하게 되면 꼭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 있어요. ‘너 이혼 안해봤지?’ 개인의 체험을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금 그렇게 일을 하신다는 이야기지. 누구 남의 체험을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 하는거 아니다 어디서 그런 세상적인 평가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미움, 죄 언급하는데 지금 서론이 이렇게 긴 이유가 있어요. 서론이 길어야 되요. 왜냐하면은 예수님의 완성은 타락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는 뭐냐? 예수님이 타락하다 하니까 자기는 거부해서 그래요.
구원의 완성은 타락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타락이예요.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어요. 하나님만이. 이것을 누가 믿겠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완성을 뭐로 봤느냐 하면 아까 했지요. 내재적 한계. 아까 했지요. 자꾸 그걸 돌리면 뒤에 뭐가 산다 했어요? 자기 의가 나오죠.
자기 의를 가진 사람이 무엇무엇을 미워했다면 그 미워했지요. 미뭐했다면 이 미움 받는 사람의 내막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추적할 수 가 있어요. 자기 의가 가득한 그 의를 치중하고 그걸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누구를 지독하게 미워한다면 그러면 상대방 이쪽에는 결국 어떤 내용을 가졌기에 미워할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까? 어떤 것을 이야기 했기에 미워했습니까?
우리는 그 예수님 시대에 안살아서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의 미움 받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미워한자가 누구인가 보니까 미워한자가 바로 절대적인 것을 주관적으로 내부적으로 계속 실천에 옮길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예요. 율법으로. 그 중에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누구지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전에 사울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그런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보고 독사의 새끼들아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세례요한도 그렇게 이야기 했고 예수님도 독사의 자식들아. 그렇게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앙숙이 관계에서 한쪽은 알아요. 한쪽은 자기의를 추구한 것을 아는데 그런데 이 사이가 미운관계라면 이쪽은 다시말해서 예수님쪽은 뭐라고 주장했는가 이말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이 어디로 흘러 들어온다? 오늘날 날마다 생성을 통해서 오늘날 날마다 제자군이라는 제자들을 생성해내고 한번 제자로 끝나는게 아니고 계속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자 답게 살도록 하거든요.
그러면 그 흘러들어오는 그 원천되는 그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주장이 뭐냐? 저수지 같은 주장에서 뭘 주장했습니까? 자기 의와 정 반대되는 내용이죠. 자기 의와 정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그거 아니면 설명이 안되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그랬어요.
예수님의 주장이 저 사람이 말하는 핵심이 뭐냐? 핵심은 바로 인간은 죄를 못 벗어 난다. 인간은 죄를 못 벗어 난다. 자, 그렇게 보시고 22절 한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5장 22절 :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이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죄에 대해서 민감하고 예민한지를 몰라요.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해서 하나하나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고 를 딱딱 가려내는 그 일에 전문가들이 바로 누구냐 하면 그 당시 유대지도자들이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한다는 그것은 그것이 틀렸다고 이야기 할려면 그들의 존재 말고 다른 존재가 와야 되겠죠. 그 다른 존재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뭐라고 했냐하면은 21절에 보면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누구 누구를 알지 못함이라. 거기 누구누구를 알지 못함이라고 되어있습니까?
이는 나 보내신자가 누구예요? 아버지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아버지와 나는 서로 아는 사이인데,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이에서 모르는 그런 입장에서 어디로 간다? 아버지께로 가고자 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분과 모르는 사람이 딱 맞닥들여 보니까 이게 서로 보충의 관계가 아니고 ‘아 그런건 어떻습니까 보충하네.’ 그런 보충이 아니고 서로 대척 관계 미움관계 서로 충돌하는 관계에 있는 거예요. 충돌하는 관계에.
그리고 이러이러한 현상이 예수님 혼자만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그것을 누구한테 계속해서 생성케 한다? 제자군 또는 제자무리 제자들에게 계속 그러한 상황을 물려주고 있는 거예요. 계속 물려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물려주면 계속 누가 살아남아야 되요? 자기 의를 붙들고 주장하는 그들이 계속 활발하게 왕성하게 활동을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미움이 안 사그라지고 계속 미움 미움 미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 예수님 믿고 편하게는 끝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예수 믿는 목적이 예수믿고 편하게 살 것 같으면 벌써부터 본문 자체부터 어긋나 있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가 묻는 것부터 잘못이예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은 생성이 된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 존재예요. 내 존재가 천국 가겠습니까?를 원했는데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일방적으로 나를 제자 삼아버렸다 이말이죠.
제자 삼아버리니까 우리는 무엇과 싸우냐 하면 내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을 날마다 이것을 사리지게 해야 되겠죠.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어떻게? 내 존재가 구원받는다라는 구원론을 이야기 해버리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게 아니고 악수를 받아요. ‘너 나하고 생각이 같네. 우리 이렇게 해서 천당 갑시다.’ 이렇게 하는데,
제자들은 뭐냐하면은 내 존재가 구원받는게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계시기에 지금도 나는 그 안에 살아있어서 예수님 증거한다 이런 쪽으로 나가 보니까 그 맞은편에 뭐냐하면은 내 존재는 장차 어떻게 되지?라고 걱정하는 자들이 제자들을 미워하지 않을수가 없는 거예요. 말이 통해야 대화가 되지요.
‘목사님 구원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확답 받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복음을 아는 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이미 성령 받았으니까 예수님 제자이지요?’ 라고 하니까 말이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뭐라고 하냐 하면은 교인들이 목사님 저 예수님한테 관심있는게 아니고 나한테 관심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도움을 줄것인가? 내가 위주고 내가 제일 중요하고, 중요한 나에게 도움 줄 때는 예수님을 섬길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그런 자세로 임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과하게 이야기 하는겁니까? 교회가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 아니예요? 예수님 사랑해서 옵니까? 아니면 자기를 사랑해서 오는 겁니까? 끝까지 자기 사랑해서 오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빼 놓고는 전부 다 한통속 이거든요. 예수님 빼 놓고는 다 한통속 이잖아요.
그럼 누가 누굴 미워해야 되요? 우리가 누구를 미워해야 되요? 우리가 예수를 미워해야지요. 우리가. 안그래도 미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미워했어요? 안했어요? 결국 미워했지요. 그게 정상이예요.
우리는 내 존재가 걱정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의 속성따라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그 사랑이 이 미움마저 뚫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놀라운 솜씨예요. 예수님의 놀라운 솜씨예요.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거기에 개의치 않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3장에 나오죠.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 그 하는 방법은 요한복음 15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되어 있죠?
주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안에 열매를 맺잖아요. 그렇죠? 열매를 맺죠? 포도나무에 열매를 맺잖아요. 이 말은 뭐냐하면은 짝대기가 어디까지 들어온다? 내 존재까지 내가 제일 지키고 싶은 존재까지 완전히 푹 쑤시고 들어오는 거예요.
주님의 짝대기가 십자가 끝이 뾰족하잖아요. 십자가 가지고 끝까지 쭉 들어와 버려요. 작대기가 쑥 들오면 여기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은 나는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은 내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피해자가 되요. 피해자에게서 뭐가 흘려집니까? 예수님 피가 흘러 내리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복음은 뭐 밖에 없다? 피 밖에 없는 거예요. 무엇을 고려한겁니까? 내가 나라는 이 엉터리같은 내 존재를 감안한 복음이다 이 말이예요. 그러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복음이 아니라 그것만 복음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가 같이 이야기 해줘야 이게 복음이 되요.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줘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른다는 것이 결코 내 힘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주께서 십자가 작대기 그 뒤에 달려 있는 모든 주께서 이룬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압장 세워가지고 다 등장해서 다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바늘 끝에 뭐가 있지요? 구멍이 있고 그 안에 뭐가 통과하고 있습니까? 실이죠. 실을 꿰멜 때 바늘 뭉툭한데를 하는게 아니죠? 바늘 뾰족한곳을 쑤셔 가지고 뭐가 끝까지 들어 옵니까? 달린 실을 가지고 바늘 구멍 구멍 난곳에 쫙 잡아 당기면 누비게 되잖아요.
떨어졌을대 누비면 실이 와서 통과해가지고 전부 다 되잖아요. 그 실이 뭐냐하면 모든 성경말씀을 다 이룬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의인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죠. 뒤 따라 오는 실 속에 모든 은혜가 다 들어 있으니까.
이거 안 쉽습니까? 무시로 기도하라. 니가 내가 너를 사랑함 같이 서로 사랑하라.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 그거 누가 지키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쑤신 그 뒤에 산상수훈 그 실이 다 들어오죠.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우리가 언제 의에 주리고 목말랐습니까. 우리는 목이 마르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죠.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이유는 뭡니까? 십자가 때문에.
그러면 십자가가 뭐냐하면은 우리가 가해자이기 때문에 존재가 피해자죠 예수님 피해자되죠. 피해자 되게 되면 결국은 뭐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타락이 됬다는 것을 타락이 됬다는 말은 육신의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육신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룬거예요. 부활해서 다 이룬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 지으면 지을수록 주님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안에서 계속 십자가가 다 이뤄진게 되요. 그러면 주님께서 실로서 계속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말씀을 보고서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킬생각 합니까? 그 말씀에 대해서 배척할 생각 합니까? 배척하지요.
왜냐하면 그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숨이 막혀 못살아요. 있는 것으로 족한줄 알라. 어떻게 있는 것으로 족할줄 어떻게 지킵니까 못지키죠. 그러니까 숨이 막혀 못사는 그것이 어디로 소화된다?
주님에 대한 뭐로? 원망과 불평과 미움으로 소화되는 거예요. 목사인데 왜 인생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까? 내가 교회 50년 다녔는데 왜 내 꼴이 이렇습니까? 이런식으로.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