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다른 복음(갈1;6-8) 1712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25. 12:53
2017-12-24 12:46:58조회 : 77         
   다른 복음 17122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다른 복음(갈라디아서 1:6-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lPQpG4AcYQ, Hit:4
 이근호17-12-24 13:36 

다른 복음 

2017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1:6-8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사도는 단정지으므로서 복음에 관해서 자신이 독점적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 할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 환상이 같이 섞여 있어서 성령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분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에서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원래 별이란 하늘에 있고, 지상에는 인간들이 사는 양상입니다. 인간들이 별을 생각하는 경우는 땅에서 위로 쳐다보는 식이 답니다. 설마 저 높은 곳에 박혀 있는 별이 친히 인간들이 사는 동네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 불과하다고 짐작할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현상이 현실 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짐작하는 현실과, 환상이 현실로 변해버린 현실이 마구 섞여 있습니다. 이런 일로서, 이 현실 세계는 인간들의 자체적인 법과 원칙의 말을 듣지 않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인간 사회에는 인간들이 자치적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 힘으로 세상을 품고 안고 운영하고자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법과 제도에 부합되도록 살아야 된다고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는 예수님 가족은 전혀 이런 요구에 부응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따로 나름대로의 원리가 있습니다. 곧 ‘하늘의 원리’이지요. 이 하늘의 원리가 이 지상에서 기존 현실과 섞여서 움직이게 되니 예루살렘 동네에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마 2:3) 사람들은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소동은 안정성을 깨트립니다. 불안을 유발합니다. 

자신의 안전 도모가 수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소동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런 인간의 기대를 무시합니다.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 ‘악한 세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복음에 대해서 이해할 때는 필히 구약에서 줄곧 이어져온 노선을 끊어지게 하면 아니됩니다.   

구약적 노선이란 딴게 아니라 인간들은 뭐든지 법을 준수하므로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자신의 삶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구약을 통해서 알다시피 ‘법 준수’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저주를 받아 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법을 못 지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몸 자체가 아담의 몸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분신’입니다. 아담을 다루는 방식이 그대로 대대로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이름 자체가 이미 저주를 품고 있고 결국 ‘흙’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을 둘러싼 삶의 환경마저 저주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해변가에 아무리 인간들이 솜씨를 부려서 글씨를 써놓아도 파도치면 그 글씨가 다 지워지는 것처럼, 모든 인간 사회에 구석구석, 어디에도 하나님의 저주만이 결국 펼쳐지게 됩니다. 남극이나 북극에 살아도 저주입니다. 저주란, 율법 적용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실시되는 처벌입니다. 

그런데 이 처벌을 복음과 겸해서 주어졌다는 말은, 더 이상 인간에게는 기대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인 입장인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십자가나 복음마저 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피 믿으라는 법을 지켜드리고, 예수 믿으라는 법을 지켜 드리겠습니다”라는 투로 나옵니다. 

그런 태도는 여전히 어떻게 하든 ‘근원적으로 저주받았다’을 기어이 부정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로부터 새로이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에 자신이 나서서 협조해 드릴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분신’이라서 아담이 받은 저주를 재현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은 ‘저주받기 위해’, 저 정확히 말해서 ‘저주를 알리기 위해’ 태어나는 겁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자기 죽음 뿐입니다. 곧 하나님의 죽음 뿐입니다. 이 죽음으로 함께 죽을 때만 건짐받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뭐든지 법으로 이해하므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를 끝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외칩니다. “우리가 할지라도,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 인간의 형편이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일에 협조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다 더 보태거나 대신할 그 어떤 사항도 예수님께서 남겨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자신이 나서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쉽게 말해서 “나는 죽기 싫다”는 겁니다. 이 일방적인 생존에 대한 집착과 매달림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터져 나오는 걸까요? 인간들은 자신들이 갇혀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항상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안과 그리고 밖으로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안과 밖을 경계짓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본인 힘으로 불길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때, 인간들은 본인들이 선택한 안과 밖에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외부에서 결정지은 ‘안’ 쪽으로 몰아세워져 있는 형편을 수용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저주란 영원한 굴레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존재입니다. 여기에 기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을 죽은 자로 통보하고 그 시신 위에 예수님의 죽으심의 도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이도록 한 겁니다. 이 덮어주신 죽음의 천, 피 묻은 천이 중요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사람이 추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이 아닙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강도와 눈을 마주치듯이 그것으로 사건 종결난 상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2-25 12:24 
269강-갈 1장 6-8절(다른 복음)1701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6절-8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다른 복음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도바울에게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야 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복음은 뭔데?”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 받는다’고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직설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입 다물라는 이야기에요. 입 다물라는 말은, “모르면 가만있어.”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인격모독입니다. 협의해서 운영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줄 때 나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동양적 철학에도, 성경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생각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서 진리를 구성해가는 것이 인간이 삶을 더 낫게 발전시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이것은 도중에 강도나 도둑이 뛰어들듯 갑자기 난입해서 하는 말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 말은 뭐냐? 오늘 설교 제목을 다르게 바꾼다면, 세자로 할 수 있어요. “그 눈 깔아.” 

눈 깔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딜 쳐다봐. 어떤 분이 tv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가 누굴 가르치면서 욕이 막 나오려고 한다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 “네가 지식이 깊어? 아는 게 많아? 네가 중국집 주방장이야?” 백종원이가 하는 이야기거든요. <백종원의 푸드 트럭>이라는 프로에서 “요리에서 흰 색 낸다고 달걀흰자를 쓰면 되겠어?” 하고 막 나무라는 거예요.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욕이 나오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듣는 젊은 요리사가 “전 그런 적 없습니다.” 하니까 피디보고 촬영한 것 틀어 달라 해서 “봐라. 그렇게 했잖아. 네가 아는 게 많아?”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노두유가 안 맞는다고?” 노두유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한번 써보고 안 맞아?” 하면서 나무라고 “고기는 후지가 좋다고? 싸니까 쓰는 거지 무슨 목살보다 후지가 좋아.” 

무슨 이야기인지 도대체 모르는 이야기인데 그런 식으로 계속 나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네가 뭘 알아.” 이런 뜻이에요. “요리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느냐.” 방송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나무라더라는 말이지요. 지금 오늘 본문이 그거예요. “네가 복음을 알아? 어디서 내 앞에서 복음을 이야기해. 나는 사도야. 눈 깔아.” 

인권을 옹호하자는 민주주의사회에서 갈라디아서 1장 8절은 정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이 말을 정말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갑자기 한밤중에 쳐들어온 도둑과 눈이 마주쳐야 됩니다. 칼 든 강도와 눈이 마주칠 때 우리는 절로, 순간적으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 마음 아니면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요. ‘난 죽었구나.’ 

도둑놈과 눈이 마주치는 것, 그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을 현장성이라고 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저주의 현장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믿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가 아니라 저주의 현장성, 저주의 현장성을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사도에게 물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사도라는 너, 네가 아는 복음이 도대체 뭐기에 내가 전한 복음 외에는 복음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고 그렇게 ‘눈깔아’ 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사람을 하대하고 모욕하느냐?”라고. 

그렇게 할 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복음이란 이 악한 세대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자기 몸을 바친 것, 이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벌써 한 주 지났다고 다 잊었지요. 이론인가요? 안 그러면 현장성인가요? 그리고 실제성인가요? 악한 세대에요. 악한 세대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저주가 차고 넘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시력이 약해서, 눈이 희미해서, 미세먼지 때문에 그런지 이 저주성이 안보이고 그저 살기에 숨통 텄다 싶으니까 ‘이대로 그만 살지. 놀러나 다니면서.’ 이렇게 되는데 복음을 안다면 악한 세대가 차고 넘치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있다는 말은 저주가 늘 파도같이 밀려오는 거예요. 

해변가에 글씨를 써보세요. 글씨를 써놓고 파도가 밀리는 것을 기다려 보세요. 글씨를 아무리 예쁘게 써도 파도가 왔다가 물러가게 되면 글씨가 말끔하게 다 지워지고 없습니다. 이 세상은 저주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거예요. 아무리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봐도 저주의 파도가 한 번 왔다가 물러가면 저주만 그저 덮여 있을 뿐이에요.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악한 세대’라고 하는 겁니다. 전 세상이 사각형이라면 사각형 전부가 악한 세대, 구석구석 빠짐없이 악한 세대에요. 이것은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스가랴 예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서남북 천사를 말 태워 보내서 천사들이 모퉁이까지, 청소년들 담배피우는 그 자리까지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사각형을 꽉 짜서 조사를 해보니까 모두가 저주가 있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이민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남극이나 북극에 가도 마찬가지에요. 거기에도 저주가 있어요. 악한 세대라는 응축된 개념, 집약된 개념 안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그리고 요한계시록 말씀에 의하면 이게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장입니다. 

저주 안에 있는 거예요. 바깥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용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이 복음이 왔다는 것은 딴 게 아니에요. 그 저주성을 확인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저주라는 것은 법의 징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조치를 가지고 저주라 합니다. 

법의 징벌, 더 이상 봐주는 것 없기, 봐주는 기회는 이제 날라 가버린 그런 상태.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저주가 동반하거든요. 율법대로 지키기 아니하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28장에 나와 있습니다. “내 말과 내 뜻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받으리라. 농담인줄 알아? 이스라엘 봐라. 망했잖아.” 

이게 현장성이 있어요. 현장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과거에 그렇게 겁주고 그 다음에 조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꾸준하게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는 거예요. 법이 있는 곳에 법을 지켜야 될 이스라엘이 못 지켰다는 말, 대표로 못 지킨 것은 어느 인간이 나서도 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십계명을 줬다는 것은 어느 인간도 십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없으면 우리는 저주받는 겁니다. 

저주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저주를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당신은 저주받기 위해……” 저주의 현장성, 현재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태어난 거예요. “법 있다. 인간 태어났냐? 지켜봐라. 못 지켜? 저주받아 죽어. 그 다음, 또 태어났지? 한번 지켜봐. 못 지켜? 죄 값은 사망, 죽어!” 네가 있기 전에 저주를 부르는 법이 먼저 있고 그 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저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상하게 정리하면 ‘인간은 아담의 개별체’라고 해요. 아담의 응축, 그 때 그 아담에서 우리의 몸이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담의 몸이 확장된 것, 또는 부풀어진 것, 돋아난 것, 아담의 몸이 크게 확장된 거예요. 아담의 몸이기는 마찬가지고,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몸이 흙이고,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결국은 흙이 되어야 될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아담만이 아니고 아담을 힘들게 하는 주변의 상황도 다 저주에요. 저주 안에서 우리는 저주의 몸으로 태어났고 우리가 저쪽 상황과 같이 손잡고 보여줄 것은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저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시편 2편 4절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좋아서 웃으시겠습니까? 비웃는다 그 말이에요.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저주를 저주로 확정 심판하기 위해서 심판주를 이 땅에 보냈다는 겁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요? 기쁘다, 심판주 오신 겁니다. 심판주가 오셔야 내가 누군지를 알지요. 심판주가 와야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창세기부터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인간아, 너는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지음 받은 자는 네가 스스로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아느냐? 인간은 지어주신 분이 와야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그 지으신 분이 현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사실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하늘의 별이 움직여요. 이것을 서울 가락강의에서 이렇게 했어요. 환상이 현실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환상이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실에서 환상 쪽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상이 현실이 되어버리면, 인간이 아는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것과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과 같이 섞여 버려요. 요셉이 꿈을 꿨잖아요. 그냥 개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꿈이 현실이 되어버리면 형제들이 아는 현실과 요셉이라는 인간이 품고 있던 환상의 원천, 그 원천이 현실화로 넘어오는, 전환시키는 그 현실 같은 환상이 같이 섞여 있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은 곡해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쨌든 환상이 현실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이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이게 환상인지, 망상인지. 우리는 현실이 아니고 일방적인 망상 속에 있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그 현실성을 포기를 못해요. 그게 자기의 소속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십자가 마을에 저의 신학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놓았어요. 그동안 그런 류의 글을 왜 안올렸는가 하면, 사람이 누군가를 비판하려면 성의 있게 비판해야 돼요. 

성의 있게 비판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설교 한 두 개 해 놓은 그것을 가지고 비판하면 안 돼요. 강의 한 것 중에서 한 두 마디, 한 두 구절을 빼서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에요. 책을 봐야 돼요. 책은 문자로 박혀 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책을 보고 비판한 글이 오랜만에 올라왔거든요. 굉장히 반가웠다는 말이지요. 책을 보고 했기 때문에. 

설교할 때는 흥분해서 나오는 말들도 더러 있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지저분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책 내용을 보고 비판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 글을 그대로 올려줬어요. 그 비판의 기준이 뭐냐 하면, 정통개혁주의신학과 다르다는 거예요. 정통개혁주의신학을 왜 주장하느냐 하면, 본인의 소속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이 그 자리에서 자라났고 본인이 소속된 자신의 환경 속에서 자아를 구축해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만든 그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도둑놈과 눈을 못 맞춘 거예요. 주님이라는 도둑은 갑자기 들이닥치거든요. 십자가 피 흘린 분을 도적같이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나올 것은 뭐냐? 놀래서 헉! 그 다음에 나오는 반응은 “아! 이거였구나.”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십자가 지신 분과 눈을 마주쳤는데 무슨 구시렁구시렁 할 말이 있습니까? 동방박사에서 별은 그냥 하늘에 계셔야 돼요. 그냥 별이 하늘에 계시면 돼요. 그리고 우리는 그 별을 올려다보면 돼요. 그런데 그 별이 이동합니다. 별이 미쳤어요. 별이 이동, 환상이 이동해서 현실 속에 같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니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 마태복음 2장 3절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거든요. 여러분, 별 따라 왔다는 말은, 별이 사는 동네의 법칙은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법칙에 저촉을 안 받아요. 따로 논다고요. 환상 속에 운영되는 그 원리원칙은 인간의 소속감 때문에 거기서 생긴, 내가 살기 편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그 법, 신학이라는 것, 체계라는 것, 정통신학이라는 것, 이것과 전혀 안 맞게 되어 있어요. 

맞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렸겠습니까? 이게 안 맞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안 맞게 되니까 소동이 일어난 겁니다.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 대목을 마태복음 2장, 크리스마스 때 주로 인용하는 이 대목, 특히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까를 늘 고민하고 있었어요. 금요일에 광주에서 모임마치고 늘 10시 40분 심야버스타고 대구로 돌아오거든요. 

그런데 9시 50분부터 이 나오는데 성탄절이라고 교인들 이야기가 나와요. 거기에 피아노를 전공한 새댁이 나오고 너덧 살 먹은 애도 하나 있고요. 남편은 연구원인데 본인도 암에 걸리고 아내도 림프종이라는 혈액암 4기에 걸렸어요. 남편이 아내를 간호하고 보양하면서 치료를 도왔습니다. 그렇게 극진한 도움으로 아내가 나았어요. 

남편도 대장암 4기에요. 이 집안은 걸렸다 하면 4기라. 그 내용을 소개하는 중에 욥기가 자막에 죽 깔려요. 평소에는 하지도 않으면서 크리스마스시즌이라고 기독교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거예요. 욥기의 구절을 자막으로 깔고 또 그 사람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모습도 보여주는데 그 남자가 성경구절 두 개를 거론했어요. 

시편 50편 14절에 보니까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대목이 딱 나왔어요. 참 옛날에 많이 듣던 대목이거든요. 그리고 예레미야 33장 3절이요. 여러분도 기억이 새롭지요?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구절을 집에 붙여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저게 바로 소동이에요. 저게 소동난 거예요. 둘 다 암 4기. 그들은 “주여, 살려주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살려주옵소서. 

그걸 9시 50부터 10시 40분까지 하니까 제가 35분까지 봤어요. 보면서 왜 살아야 되느냐 그 말이지요. 당신은 저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당신은 저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저주 받는 대표자로서, 왜 이세상은 악한 세대인지를, 나는 왜 악한 세대에서 악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를, 나는 왜 죄지은 아담의 분신으로서 태어났는지를, 그 역할 하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고마워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암 4기가. 제가 지금 엉뚱한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발악을 해요 발악을.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닙니다. 악랄해요 정말 악랄해. 죽기 살기로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 붙들고. 아, 기억이 새롭네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이런 것,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런 거요. 교회에서 목사가 이런 것을 가르쳐줬겠지요. 

교회는 죽으라고 오는 거예요. 그냥 죽지 말고 네 꼬라지 알고 죽으라고 오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은 심판주입니다.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소동을 일으켜서 바닥 다시 한 번 깔아보자. 도대체 뭐가 현장성이냐, 뭐가 현실이냐 그 말이지요. 누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삶에 대해서 집착을 하도록 만들었느냐는 말이지요. 집착은 반항이고 반발이지요. 

집착은 반드시 원망입니다. 좀 건드리면 화나고, 건드리면 분노하고. 누가 누굴 보고 분노해야 됩니까? 주객이 전도되었어요. 하나님이 분노해야 될 대상이 자기가 분노하고 있다고요. 친손자 감기 들었다고 분노하고, 콧물 난다고 분노하고. 이 남자가 암 4기 걸려서 또 해프닝이 일어나네요. 잠시 좋아졌어요. 

잠시 좋아진 사이에 교회에서 간증 집회하는 것을 죽 찍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나았습니다.” 6개월도 안되어서 재발했어요. 꼭 후라이보이 곽 규석 같아요. 온 교회 돌아다니면서 간증해 놓고는 암으로 죽어버렸어요. 평생을 살아도 내가 누군지를 알아본 적이 없어요. 누가 알려주지도 않고. 도둑을 안 만나 봤거든요. 도둑과 눈이 안 마주친 거예요. 

갑자기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확 들어와서 “네 것 몽땅 다 내놔라. 내가 다 빼앗아간다. 네 목숨까지.” 그런 도둑놈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한순간도 고백한 적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복음은 ‘악한 세대’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옛날이야기고 아직까지 숨쉴만하거든요. 

꼬박꼬박 월급 나오지요. 그래서 숨쉴만하니까 내가 지금 보여줄 저주를 제대로 안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복음을 만들어내요. 장난삼아서 복음을 만들어내요. 그런데 그 복음을 뭘 로 만드느냐 하면, 법으로 만들어내요. 저주받은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법에는 법으로 마주치는 겁니다. 법으로 주게 되면 그 법을 지킴으로서 저주를 모면해 보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아무렇게나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찬찬히 이야기해 볼게요. 법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지치기 마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 처음 복음 들을 때는 좋지요. 한 3년만 지내보세요. ‘지친다, 지쳐’ 그렇게 돼요. 왜? 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가 구약이 아니고 신약이라는 말이지요.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는 이방인들이니까 이 신약을 법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 복음을 법으로 여겨서, 법으로 형성시켜서 받아들이려고 해요. 여러분이 정비소에 가면 차 본네트 열고 정비사가 엔진오일 체크할 때가 있지요. 엔진오일 체크할 때 단추처럼 보이는 꼭지를 빼내면 그 뒤에 길게 박혀 있는 긴 쇠막대에 오일이 묻혀서 나오잖아요. 

우리는 복음을 이야기할 때 그 끝에 나와 있는 단추만 보고 그것만 소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복음을 집어내면 그 뒤에 구약성경, 율법의 상황이 길게 다 딸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십자가, 달랑 세 글자, 그것만 단추처럼 뚝딱 하고 떼어내고 그것만 가지면 십자가 되는 줄 알고, 예수 피가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 뒤에 달린 기다란 것은 다 없어요. 

복음은 뭐냐 하면, 최종 율법의 완성상태입니다. 복음은 마지막 때 오니까 완결된 상황이라야 비로소 하늘에서 이 땅에 적용시키는 원리인데 그게 비율법적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최종단계, 완결된 단계인데 완결된 단계기 때문에 복음 안에는 모든 율법이 다 응축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복음으로서는 무조건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최종판정이 나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최고의 징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저주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게 되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되어 있어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말 자체가 좀 어폐가 있지요. 다른 복음이 없으면 아예 그 이야기를 안해야 되는데 다른 복음을 없나니, 그 말을 집어넣어요. “또 다른 복음은 없나니.” 이렇게 ‘또’라는 글자를 집어넣어야 돼요. 또 다른 복음이 없나니. 복음은 우리에게 저주를 통보하는 겁니다. 

“목사님, 그러면 방금 말한 것과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하는데 복음이 주어지게 되면 그 주변에 반드시 저주가 형성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제가 마태복음 2장에서 소동이라고 한 거예요. 저주를 받은 상태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법의식 가지고 하늘과 땅을 이으려고 하는 겁니다

법의식의 특징이 뭐냐? 뒤에 나오는 것이 있어요. “지켰습니다.”라는 말이 붙으면 앞에 뭐가 있든지 다 법이 되어버려요. 예수 믿는 것 지켰습니다, 복음 받아들이는 것 지켰습니다, 하면 그것은 진짜 예수가 아니고 법적으로 변형된, 전환된 예수요 그 복음은 법적으로 전환된, 그것은 복음이 아닌 가짜 복음이 되는 거예요. 

복음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하나님은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열심히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선언하는 거예요. 왜? 어떤 인간도 아담이라는 그 몸뚱이의 원칙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의 분신이라니까요. 우리가 백날 해봐야 아담이에요. 

인간은, 아담의 몸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 안에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흙이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사단과 결탁해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잘됐다 해가지고, 사탄과 결탁한 그 인간 몸 자체가 저주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목욕탕 갈 때 특히 여자분들 목욕할 때 유리문이 열리고 닫히고 하잖아요.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보통 사람들이 목욕탕 들어갈 때 열고, 나올 때는 또 열고 나오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안과 밖을 내가 선택해서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건물 1층 천장에서 불이 떨어져서 자동차에 불이 붙어버리니까 자기가 안이라고 여겼던 그 안이 자기가 선택한 안이 아니고 주어진 상황이에요. 

불속에 가두어진 거예요. 주어진 상황입니다. 그 아줌마들은 깨끗하게 씻고 목욕탕 문 열고 나와서 집에 가려고 했던 거예요. 집에 가려서 목욕탕 문 나서면 바깥이고 목욕탕 안은 안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안과 밖이라는 것을 결정지을 어떤 권한도, 어떤 안목도 우리한테는 없어요. 우리는 그냥 안만 있지 그 바깥은 몰라요. 없습니다. 사실은 있어도 갈 수가 없고 그래서 없다니까요. 

그냥 쉽게 생각합시다. 우리는 저주 안에 있어요. 심판 불, 유황불속에 그냥 갇혀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순도순 애 키우고, 돈 벌고, 농사짓고, 장보고 하면서 해외여행도 가고. 주변은 다 지옥불인데 그 지옥불 속에서 따뜻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캐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부르면서 지옥 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너는 저주에 포위되었다는 겁니다. 저주에 포위된 것이고, 그리고 저주에 포위된 이유가, 그 안에서 마음껏 저주받을 짓들을 하는 겁니다. 복음이 오게 되면 저주가 자동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니 복음이 오기 전부터 저주가 있었는데 복음이 옴으로서 이 저주 안에 있음이 확연하게 다 드러난 겁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말이 두자인데 네 자로 하면 ‘기쁜 소식’이거든요.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이야기했다고 할 때 그 기쁜 소식은 어디서 기쁜 소식이냐 하면, 법의 저주가 있는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다른 원칙을 또 다시 그 복음에 담아서 줬다는 겁니다. 저주가 있어요. 저주는 율법으로 저주가 된 거예요. 

제가 어렵게 안하겠습니다. 율법으로 저주가 되었는데 거기에 복음이 옴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내가 사는 동네가 저주로 분명해졌습니다. ‘아, 저주받았구나.’ 그런데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저주에서 너희가 벗어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지키는 식으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해봤자 결국 주어지는 것은 못 지켰다는 저주의 판정밖에 주어질 수밖에 없는 너희에게 이제는 그 법 말고 법이 아닌 방법으로 너희에게 저주에서 벗어날 것을 주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먼저 우리는, 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왜 저주 속에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밝은 낮에 휴대폰 액정의 글씨들이 잘 안보입니다. 그러면 어디가야 보이느냐? 그늘에 들어가야 글씨가 좀 보인다고요. 복음은 그저 살만한 인간에게는 전혀 안 들립니다. 잠만 올 뿐이에요. 

그런데 어디에 들어가야 됩니까? 그늘에 들어가야 돼요. 목욕탕에 가야 돼요. 이제는 목욕탕 갈 때 죽을 각오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통상 여자목욕탕은 2층에 있거든요. 사우나 제대로 작동하는지, 또는 아래층에서 높이가 몇 미터인지, 다리는 부러질 수 있어도 죽지는 않겠다는 것도 참고하고, 또 옆에 뚱뚱한 사람이 있는지 날씬한 사람이 있는지 봐야 돼요. 

뚱뚱한 사람이 있으면 안심이 돼요. 그 사람보다 빨리 창문 열고 뛰어내릴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날씬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2순위로 밀리기 때문에 안돼요. 

그런 것들을 다 각오하고 사우나 가시기 바랍니다. 자동문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열었다 닫아보고. 닫혀서 안 열려 버리면 안 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이게 저주의 유발요인이에요. 이미 결과가 나와 있다면 결과만 보지 말고 결과로 이어지는 그 경로, 과정을 겸해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천사가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기쁜 소식 이야기할 때는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이 기쁜 소식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너희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공생애의 길을 가십니다. 가면서 점잖은 체 하고, 잘난 체하고, 율법 지켰다고 우기고, 말씀대로 산다는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저거 없애야 해. 죽어야 돼.” 가락교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런 것은 역겹고, 구역질나고, 더러운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와서 나에게 보태준 것 아무것도 없거든요.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잃어버리게 해주시는데 잃어버린다는 말이 뭐냐 하면, 잃어버려야 비로소 아, 그동안 얻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챙길 수가 있어요.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겨야 주님한테 얻어진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빼앗기면 그 빼앗긴 그것에 미련이 있어가지고 ‘채워주시겠지.’ 하는데, 금요일에 kbs에서 방영한 암에 쌍으로 걸린 그 부부는 진짜 걱정돼요. 우리 교회에 데리고 오고 싶기도 하고. 저주받은 교회에 가서 저게 무슨 짓이냐 이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그날 은혜 받은 것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다 양식 있고 배운 사람들이에요. 심성이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아프니까 악마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살려달라는 거예요. 뭘 잘못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죽이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욥기는 달달 외워요. 언젠가는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차라리,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다단계할 때 가져오는 그런 것이나 써먹지요. 

거기서 느낀 것은, 인간은 아파도 인간 안 된다는 겁니다. 망해도 인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왔는데 참 이거 하려고 아껴 두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이 부분 다시 한 번 설명 드리면, 인간은 소속감이 있고 소속감에서 자아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러면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저주받은 마귀의 모습을 늘 유지합니
다. 복음은 뭐냐 하면, 저주거든요. 살아야 되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니까 너는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 자체가 역겨운 거예요. 듣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바꿉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바꿔요. 바꿔버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복음의 뒷부분에 해당이 안돼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건지신다는 그 과정과 경륜, 예수님이 보여준 것은 뭐냐 하면, 법대로 죽는 그것, 예수님이 법대로 죽었거든요, 법대로 죽는 그것, 이 악한 세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주님이 죽이시는, 하나님이 죽는 그 죽음에 의해서 같이 죽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죽음에 나도 같이 죽게 되는 그것이 유일하게 이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게 하기 싫어서 법으로 이해해서 “십자가를 피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주의 희생을 믿습니다!”라는 법 지키는 쪽으로 나와 버려요.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대로 같이 합세해서 죽으면 되는데 그 경로가 싫어서 그냥 내가 어떤 새로운 법인 줄 알고 그 법을 지켜 버린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본인은 멀쩡한 거예요.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자기는 이제 안심 푹 놓는 겁니다. 한 숨 돌렸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남은 것은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이런 질문이나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추울 때 이불 덮잖아요. 자다 보면 세로로 길게 덮어야 될 이불이 가로로 가는 수가 있지요. 이상하게 같은 이불인데 발이 시원해. 

그 때는 이불을 바로 돌리면 발까지도 덮이잖아요. 주님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서부터 다 덮어줘요. 인간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주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딱 한 경우 있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염하고 난 뒤에 장의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줍니다. 발까지 안보이도록. 그게 복음입니다. 까불지 말라는 말이지요

내가 너를 죽은 자로 염해서 다 덮어줬으니까 까불지 말고, 법 지키려고 하지 말고, 말씀 지키자 하지 말고……, 그 장의사가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장의가사 되어서 덮어주는 그 죽음의 도포 안에서 감사하면서 그냥 살면 돼요. 그리고 왜 이렇게 내 실력도 있는데, 내가 말씀 지키고 순종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시체한테나 덮어주는 그 도포를 왜 나에게 덮어줍니까, 라고 따지지 말고 그냥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돼요. 

그런데 몸부림치게 되면 발이 나온다고. 그러면 그 발에서 시원한 기운이 옵니다. ‘네가 성경 석장을 읽는다고 맹세해놓고 안 읽었잖아.’ 그러면 금방의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그래, 어제 두 장 읽었지. 오늘은 넉 장 읽어야 어제 것 까지 메워지지. 반드시 읽어야지. 주여, 읽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불안이고, 공포고, 저주성입니다. 불안불안 한 거예요. 

몸부림을 왜 쳤어요. 잘난 체 한다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 아예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주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라 그 말입니다. 아예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 행세만 하면 돼요. 이것도 못 지키고 저것도 못 지키고 아무것도 제가 지킬 것이 없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자살하느냐 하면, 사는 게 무서워서 자살하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왜 죽이느냐? 같이 사는 것이 무서워서 죽여요. 무섭지 아니하면 죄가 안 나옵니다. 뭔가 무섭기 때문에 분노가 나오고 화가 나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데 지장되기 때문에 밀치고, 거부하고, 나가라고 하고, 너는 네 집으로 가라고 하는 거예요. 

뭔가 무서운 것이 있어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은 뭔가 포근하게 덮어주는 담요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살아도 내 인생 내가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아주 그걸 실감하기 때문에 혼자서 예수 믿어야 돼, 교회 나가야 돼, 돈까지 벌어야 돼, 자식 키워야 돼, 남편 봉양해야 돼, 아내 기분 맞춰줘야 돼, 이러니 스트레스도 그런 스트레스가 없는 거예요. 

아내 림프종 걸려서 4기죠, 자기도 대장암이지요. 아들 암 걸리니까 시어머니가 어느 날 자살하고 말았어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어요. 설교 끝에 이 이야기 다시 하니까 여러분 지금 가만 보니 이게 웃을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소동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소동유발요인이지요. 

소동을 일으켜요. 이 악한 세대에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바쳤다. 이게 기쁜 소식이다. 끝. 왜? 너는 저주밖에는 나올 것이 없으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왜 걷어차느냐. 8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자, 다른 복음을 나타나게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나라는 것을 따로 챙길 때, 그러니까 우리, 또는 천사, 하나님의 뜻대로 죽지도 못할 우리가,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따로 복음을 따로 챙길 때 있는 저주가 저주로 그대로 드러난다는 그 말입니다. 주께서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에 구원받잖아요. 

그러면 우리를 덮어주는 그 이불, 도포는 예수님이 온전하게 자신의 행함과 죽으심 그 외에는 딴 게 절대로 섞이면 안돼요. 섞이면 안 되는데 자기가 협조하겠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기가 협조하고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도와 드리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도와준 나의 가치를 제발 무시하지 말고 알아달라는 거예요. 

내가 자식들 서너 명 키우는데 이렇게 키웠으니 하나님이 복 주세요, 하고 똑같은 거예요. 늙어 치매 걸린 부모 이렇게 모셨으니까 나의 공로를 알아달라고 할 때, 내가 저주 안 받아도 될 대상인 것처럼 부각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바로 다른 복음이다. 그러면 오늘 결론은 간단하네요. 복음은 이미 있고 우리 속에서 내가 까불거리면 까불거릴수록 예수님의 복음과 내가 임의로 알아달라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그 복음, 아담의 몸, 육에서 나온 본성이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그 다음 내용을 죽 보게 되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아예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또 쏟아냅니다. 죽은 인간들이 왜 더 살려고 하는가? 그러니까 이 복음이 훼방되고 복음이 방해받는다. 그냥 주님 오실 때 ‘아, 나는 이미 어떻게 살아도 죽은 존재고,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그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뭘 보여주게 되느냐 하면, 덮어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만 감사하고 그것으로 고마워하는 그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살 수가 있어요. 오늘 분위기가 너무……, 고요한 크리스마스. 까불지 마시고요.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장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결정 난 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한 것도 모르고, 왜 내 뜻대로 안되고 내 소망대로 안 되느냐고 반항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우리. 주여, 아직도 살만한 가치 있다고 우기는 우리, 다쳤다고, 아프다고, 누구 죽었다고 통곡하는 악에 받친 저주의 모습, 이런 현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의 속에 담긴 것이 바깥으로 터져 나왔던 현상인 것을 이제 우리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