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저주유발 복음(갈1;9-10) 1712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 15:18
2017-12-31 12:31:10 조회 : 63         
   저주 유발 복음 171231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저주 유발 복음(갈라디아서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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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7-12-31 13:22 
저주 유발 복음 

2017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1:9-10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저주란 근원적인 성격을 드러냅니다. 근원적인 것이 마지막 때에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저주받는데 있어 모든 인간들이 제각기 그 몫을 담당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즉 “이 악한 세상에서 저만은 살려주세요”로 할 근거는 없다는 말입니다. 같은 통속이고 한 통속이었던 겁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유인할 그 어떤 공감적인 면을 제공한 그 어떤 의사도 없습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교회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복음이 복음대로 현실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은 이런 겁니다. 

로마서 3:25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꾸준히 하나님의 ‘자기 영광’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나서서 이 영광을 가로채고 훼방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단언합니다. 즉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도리어 사람들에게 저주를 유발하게 하는 가짜 복음의 요소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 본인의 존재조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해물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즉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그 어떤 관계이든지 복음 앞에서 부정적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복음에는 ‘법을 지킬 당사자’를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본인  조차도 본인의 구원의 훼방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모아놓은 ‘자기 의’가 자신을 저주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느냐”가 관권입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있느냐 아니면 천국에 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개의 ‘하나님상’이 성립됩니다. 하나는 ‘하늘에 그냥 계시는 하나님’, 다른 하나님은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 이 둘 중에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을 선호할까요? 지상에 오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싫어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로 하여금 부정적 이미지를 사방팔방으로 남기시기 때문입니다. 

처참하게 망가지신 하나님 보다, 고상하고 거룩한 풍채를 유지하는 하나님을 선호합니다.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불려집니다. ‘하나님이냐’ 아니면 ‘아버지냐’ 하는 여부는 성령의 내주와 관련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은 것은, 그 신을 자기의 마음먹은 대로 떼 낼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붙어 있는 신을 떼 내는데 안달이 나 있는 지경입니다. 필요할 때만 호출할 때 ‘쪼르르’ 달려오는 신을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신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신입니다. 

마지막 때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눈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 앞에 자신의 몸을 개방하셨습니다. 거침없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죄가 예수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들이 스며듭니다. 하지만 갈수록 집단화되고 하나로 응축된 양상을 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죄는 권력화된 죄입니다. 따라서 그 죄의 무게에 의해서 예수님은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속으로 죄가 채이기 시작했고 그 끝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저주받으시기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봐야 할 표적인 바로 이런 ‘요나의 표적’입니다. 죽음의 바다에 빠지는 요나의 몸이 지닌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자신을 망하고 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모른다는 말은 곧 자신의 멸절되어야 될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들’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인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정작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자리인 아들의 자리는 인간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저주성은 사실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는데 있는 당연한 하나님의 처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사랑은 오직 인간을 건져내신다고 치러야 할 그 ‘빚’의 형편을 표면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복음에 대해서 관람객이나 손님이나 구경꾼이나 쇼핑객이 아니라 복음 전개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반에 물 세례 받고 성령 세례 받으셨는데 이제 남은 세례가 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 세례’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즉 전에는 물로 심판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합니다. 피할 생각 마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방법은 다니엘 세 친구들처럼 ‘자기 의’를 가지고 불 속에 미리 던져넣는 일입니다. 거기에 미리 불세례 받으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내 자랑’을 용납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나의 가치를 날마다 묵살하는 자리에 내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둘이 사는 겁니다. 여태 가보지 못한 곳으로 그분의 것이 된 채 함께 가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때로는 두려울 겁니다. 하지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과 성도 사이에 ‘사랑의 힘’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표면으로 드러내시고, 속에는 자기 의로 인한 죄 인식을 심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전히 자기 생각뿐인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신 지상의 동기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1-01 13:33 
270강-갈 1장 9-10절(저주유발복음)17012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9절-10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1:9-10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지금 협박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것이 사실일까요? 지금 사도가 이런 투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람 꾀어서, 사람 모아서 목회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을 건지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사람을 건지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람에게 통하는 공통점을 제공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에게 약간이라도, 이것 당신에게 이익 되거든요, 이거 당신에게 유리하거든요, 실익이 있습니다, 이거 여러분이 받아들이시면 나중에 괜찮게 될 겁니다, 라고 약간의 그 사람과의 연결점을 구성하려고 노력할 텐데 그렇게 노력하려면 뭘 빼야 되느냐? “아직까지 저주는 유보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저주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때가 중요합니다.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사도바울은 인간과 상대할 맘이 없어요. 

“여러분, 나는 뒤에서 떠미는 대로 그냥 여러분 앞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뭐가 떠미는가? 복음이 나를 떠밀고, 복음이 떠미니까 자빠지듯이 인간세계에 툭 등장했는데 그렇게 등장하면서 복음이 유발하고 같이 끌고 온 것이 있어요. 복음이 떴다, 동시에 저주가 떴다, 같이 보자는 겁니다. 복음이 왔다. 이미 저주의 심판은 시작되었다. 

그것을 종말의 시작이라 하는데 이미 종말의 시작, 복음이 뜬 순간 이미 종말이 시작된 거예요. 만약에 사도바울이 사람을 구하는 인간 쪽에 서 있다면, 아파트 문마다 다 두드리는 겁니다. “피하세요! 피하세요!” 왜? “빨리 벗어나야 됩니다.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집니다.” 하고 1층부터 2층, 3층 막 두드리면서 “피하세요. 마지막 때입니다. 집에서 라면 끓이던 것 놔두고, 애 보채는 것도 놔두고 그냥 나와야 됩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두드려 봤자 어디로 가야 되는데요? 갈 데가 어디 있는데요? 

그리고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옛날의 물 심판 같으면 어디로 피하면 되는가? 방주로 피하면 돼요.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같으면 그 도시에서 빠져나오면 되는 겁니다. 마지막 때는 이 방법, 저 방법마저 다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쉘터(Shelter)라 하는데 도피처, 피난처입니다. 핵폭탄에 대비하기 위해서 지하벙커 만들어놓고 40만 불에 파는 피난처인데 그런 피난처가 없다니까요. 

교회가 피난처입니까? 더 위험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이럴 때 복음이 뭔지를 알고, 복음이 저주와 심판을 유발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뭘 바꿔야 되느냐 하면, 자기 의를 포기해야 돼요. 

자기 의. 교회 다닌 의. 그동안 누적된, 자기 것 가지고 자기를 구원해보려고 시도한 모든 것. 헌금하기 기도하기, 예배참석하기, 교회 다니기, 충성하기, 그런 것이 자꾸 누적이 되거든요. 그게 자기 자신을 살릴 수가 없어요. 그것으로 살려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방식대로 나를 건져내는 것, 그것은 구약적방식입니다. 

신약에는 법을 지킬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려요. 율법으로 테스트하는 시간은 이미 끝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법으로 테스트를 다 해봤어요.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 그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복음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기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누구도.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를 못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믿으면 필히 지옥 갑니다. <신과 함께> 지옥가요. 영화에 보면 나와요. 그 영화 다 평해 놨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 지옥가요.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을 뭘 로 바꾸는가, 아버지로 바꿔야 돼요. 

하나님을 계속 믿으면 안 되고 아버지로 바꿔야 됩니다. 우리의 현재 자리는 하나님을 찾는 자리에요. “하나님, 건져주세요. 만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호산나,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는데 이것은 구약적방식이에요. 구약에서 이미 다 했는데 실패로 다 끝났습니다. 

자리가 문제에요. “목사님,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앞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아야 되겠지요? 성도라면 뭘 해야 됩니까?”라는 그 질문자체가 나와서는 안 되지요. 지금 내 자리가 어느 자리입니까, 라고 물어야 돼요. 자리를 엉뚱한데 잡아놓고 그 자리 안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무엇을 하면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살면, 어떻게 바르게 살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순수함과 거룩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자기 자리가 어느 자리인줄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제천에 화재 났을 때 화재현장에 있던 어떤 학생인데 죽기 전까지 밖에 있던 아버지와 1시간 2분 15초 동안 통화를 계속 했답니다. “아버지,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원래 없어요. 문이 고장 났어요. 불기둥 속에서 나갈 수 있는 문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아버지에게 전화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 죄악 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하나님은 대답 없어요. 

지금 네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는데. 이 세상이 지옥이 되고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는 그러한 세상이 되는데 네가 한몫을 한 거예요. 네가 담당한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각각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일방적인 요구,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살고보자는 겁니다. 사는 게 남는 거라는 거예요. 

지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딱 보내보니까 그것은 살아야 될 자리가 아니고 이 세상은 죽어 마땅한 자리라는 거예요. 교회를 다녀요? 예수를 찾는다고? 삼위일체 공부를 해요? 하나님을 찾아요? 왜, 왜? 왜 하는데? 

“여기서는 힘들어서 못사니까 죽어서는 좋은데 가려고.” 그렇게 하거든요. 왜 가야 되는데? 네가 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르거든요. 자기 자신의 뭘 모르냐 하면, 내가 왜 멸절되어야하는지의 근거가 없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야 되는 그 근거를 찾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안 살고 있습니다. 내가 잘되어야 할 이유만 찾는 거예요. 자기 못되면 전부 다 남 탓이고 잘 되면 지 탓이에요. 

내가 대충 이야기한 그것만 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거든요. 나는 잘 살아야 된다. 나는 누구 덕을 봐야 마땅하다. 내가 하는 것은 탓하지 말고 남들의 불의는 내가 못 참는다. 왜? 세상 기준 내가 세운다. 나는 행복해야 된다. 이유는 없어요. 무슨 이유가 있어요? 

‘따지지 말고 나는 행복해야 된다. 나는 다치지 말아야 되고 나는 독감 걸리지 말아야 되고, 남의 집안은 모르지만 무조건 내 집안은 괜찮아야 되고. 제천 불났는데 우리 애와 상관없으면 괜찮다. 우리 애 세월호 사건으로 바다에 안 빠졌으면 인생 살만하다.’ 

사람은 중심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제시한 중심은 뭐냐 하면, 나를 영화롭게 하라, 나를 기쁘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자기를 기쁘게 해야 되는 쪽으로 누구로부터 압박감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무조건 나는 나를 기쁘게 해야 된다. 이유도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그동안 나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인하여 막혀 있었던 겁니다. 그 나를 기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교회 다녀서, 말씀 알아서, 그 말씀가지고 나는 천국 가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만 가면 안 되고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과 같이, 부모와 같이 천국 가야 되겠다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누구 기쁘게? 날 기쁘게. 나의 구원이 나를 구원 못되게 방해하는 이유는 나를 구원하겠다는 그 바탕이 나의 기쁨이 선행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우선 기쁘게 하고, 그 다음에 ‘나를 구원해준다면 그까짓 거 십일조, 헌금 정도 못해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구원하는데 그까짓 거 푼돈 못 드리겠습니까?’라는 조로 하나님과 거래에 나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오는 1월 7일 날 있을 수련회 준비한다고 열왕기하를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3장 19, 20절에 아주 특이한 말씀이 등장했어요. 유다나라에는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어요. 그리고 북쪽에는 여호람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린 것만 이야기해도 한 시간 이상 걸립니다. 

나라가 왜 둘로 나뉘어졌는가? 왕이 왕을 통해서 왕을 잡아먹도록 왜 하나님께 그렇게 하셨는가? 왕이 정치를 못하면 선지자가 간섭을 했는데 그러면 선지자 네가 하지 왜 굳이 왕보고 하라고 했는가? 선지자 지가 정치하면 되는데 왜 선지자는 가만있다가 왕이 잘못했을 때 나와 가지고 “왕이시여,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 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해라, 네가. 지가 정치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그 이유는 뭔가? 그리고 선지자가 그렇게 지적질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돌아서면 우상숭배, 또 돌아서면 우상숭배, 우상이 뭐 길래 그렇게 죽자하고 여호와를 안보고 우상섬기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의 자기노동의 성과에서 자기가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그 나라를 자기노동의 성과, 자기통치의 성과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왕인 이상 이 나라는 잘될 때 자기 자신이 기뻐지는 겁니다. 

 
2017년도를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일년 내내 살았거든요. 
살았으니까 아직까지 살아남아서 볼펜으로 끄적거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계속 살아 있잖아요. 
그렇게 살아 있으면서 그 1년이 참 어지간히도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노골적으로 욕한 적은 없어요. 하나님을 발로 차고 미워한 적은 없는데 

1년 내내 관심사는 뭐냐? 내가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할까, 어떻게 나를 행복하게 할까, 그것뿐이었습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것은 모아봐야 몇 초 안될걸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1분도 안되지 싶어요. 

우상숭배를 왜 하느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이미 우리 자신이 우상인 겁니다. 



그래서 열왕기하를 보게 되면 왕들이 와서 이방민족을 쳐요. 우상숭배자가 우상 숭배하는 자를 친다고 보시면 돼요. 그들을 칠 때 하나님께서는 못난 놈들을 통해서 이방민족을 통해서 치면서 뭐가 하나님께서 들춰내는 것, 가려진 것을 폭로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 폭로하는 의도가 뭐냐? 원래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요……, 벌써 수련회 시작한 것 같다. 원래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빚을 탕감하면서 주신 땅이에요.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렇게 보통 이야기들 해요. 공짜로 들어가는 것이 전부 다 빚이 된 것인데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을 들어가게 함으로서 그 빚값을 치러야 돼요. 

이스라엘백성을 위해서 같이 가는 제물들, 소와 염소와 양, 그 제물들,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에 대해서 대신 갚아주는 절차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땅이 햇빛과 공기와 젖과 꿀이 흘러요. 조건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빚을 갚아서 그걸 주게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빚 갚아 주면 고맙다 해요. 땡, 끝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빚을 갚아주고 그 빚을 표면화 시킵니다. 그 빚을 갚아줬을 때 그 희생에 대해서 계속 이해하는 자와 이해하지 않는 자를 가려내는 작업을 약속의 땅에서 해요. 이게 구약에 나오고 그걸 테스트하고 역사적으로 실험시키는 것이 열왕기상하입니다. 그런데 여기 열왕기하 3장에 보게 되면, 여호사밧과 여호람이라는 두 왕이 연합해서 모압 왕을 칩니다. 

모압왕이란 이방나라 왕을 말합니다.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 엘리사가 예언을 하는 겁니다. 열왕기상하를 공부해보게 되면 제일 답답한 것이 뭐냐? 선지자가 왕들이 어떻게 망하고 그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 것을 이미 하나님에게 지시를 받아서 다 알고 있어요. 

저도 답답하고 듣는 여러분도 답답하고 모든 인간들이 보기에 제일 답답한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게 되면 예방해서라도 말렸어야지요. 그게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신앙생활 3, 40년을 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잖아요. 지옥 가는 것을 알면서도 지옥 간다고 계속 예언만 하는 거예요. 예언만 하지 말고 말려야지요. 그게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본문자체가 사람을 꾀이기 위해서 뭔가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어요.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복음을 안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그러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사도가 알면 말려야지요. 열왕기하를 보면서 지금 선지자에게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는, 망하는 줄 알면서 말리지를 않아요. 그 이유가 뭐냐? 

그건 수련회 참석해 봐야 알아요. 당신의 손에 붙이겠다고 엘리사가 했다는 말이지요. 열왕기하의 왕과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일이 뭐냐? 어떻게 하면 자기에서 하나님을 떼 낼까, 그건데 아주 발악을 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쇳덩이 같아요. 우상 숭배자에게는, 인간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을 떼 내면 뭔가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인간의 자유는 이미 예고된 범위 안에서는 발악에 불과합니다. 열왕기하 3장 19, 20절에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과 모든 아름다운 성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에 미쳐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이 말은 뭐냐? 모압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엘리사가 예언을 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남쪽 유다나라 여호사밧, 북쪽 여호람, 에돔왕까지 세 나라가 연합해서 모압을 치게 되어 있어요. 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우물을 메우는 거예요. 그 다음에 좋은 과실수를 다 베어버립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가 사용하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오게 댐을 완전히 말라버리게 만들고 우리가 좋다는 것들, 가뭄에 들어서 농토에서 곡식한 톨 안 나오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억울하거나 화낼 잽이 못 된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늘 저주를 기본 토대로 하지 아니하면 약속 자체의 의미를 몰라요. 지금 사도바울이 과하게 협박하고 공갈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바닥과 우리의 원천을 다시 확인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열왕기하 구약성경 내내 이야기해줍니다. 너희는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왜? 이 땅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요 모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치면 필히 너희에게 주어진 그 맛있는 우물물, 그리고 잘 자라는 과실수는 너희의 몫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물에서 샘이 나오고 과실수가 자라는 것은 그 원천이 우리의 노동이나 우리의 수고에 있지 않고 그 연결선이 딴 데 있어야 해요. 다른 곳에 있어야 돼요. 

그 다른 곳이 뭐냐? 예수님의 희생에 있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기에. “신이시여, 도우소서.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몸 아픕니다.” 하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땅위에 보냈어요. 자, 이제부터 하나님이 두 종류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직도 하늘에 있는 하나님 찾을래. 아니면 땅에 오신 하나님 찾을래.”로 바뀝니다.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찾지를 않아요. 모든 말투나 그 모습이 너무 부정적이에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몸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 성령을 입은 몸은 개방된 몸이에요. 개방된 몸이라는 말은 육신의 몸으로 바뀌면서 인간의 모든 죄는 그 안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님께서 하는 행동들이 과격하지는 않아요. 상처가 좀 적어요. 그런데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화된 죄들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미워해도 몇몇 사람들이 미워했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본격적으로 권력으로 처단합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하나로 집중되어 있고 모든 유대사회의 권력은 그들이 노끈 쥐듯이, 풍선 끝 쥐듯이 꽉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나라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전 미국 대통령이 연말 맞이해서 트위터에 이런 말 남겼어요. “미국인들이여, 계속 변화하라.” 변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미국인들이여, 계속 변화하라.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변화가 아닙니다. “심화하라. 더 깊이 있게 내려가라.” 

너 자신이 왜 저주받아야 마땅한지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라. 변화될 것은 없습니다. 이 자리가 우상이 나오는 자리고 하늘에 있는 신을 우상화하는 자리기 때문에 변화해 봤자 더 갈 것도 없어요. 제천의 여자목욕탕 같아요. 변화해 봐야, 여기 밀고 저기 밀어서 깨끗하게 해봐야 역시 불구덩이 속에서 못나옵니다. 1시간 2분 15초 동안 버텨도 못 나와요. 죽어서야 나옵니다. 

“아빠, 문 열어주세요.” 문 없어요. 문이 없다니까요!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고 주님이 던진 말씀이 말씀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이 자연세계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세계는 인간의 변화를 충족시키는 세상이 아니고 인간을 가두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1, 2, 3, 4, 5, 6일 동안에 인간이 없어요. 

6일 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어놓았어요. 1,2,3,4,5,6은 결국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1,2,3,4,5,6을 만들어놓았어요.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서 인간은 갇혀 있는 겁니다. 그 그리스도가 이제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왔어요. 

땅에 내려왔을 때 하나님이 두 종류가 되고 말았어요. 하늘에 있는 하나님, 별처럼 박혀 있는 하나님이냐, 아니면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이냐.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 있는 별이 그냥 하늘에 그냥 계시지 내려오기는 왜 내려왔습니까? 별 따라 동방박사가 왔지요. 환상으로만 여기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현실이 있다 했지 않습니까?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변화산에서 두 가지의 현실이 나옵니다. 이런 것은 mbc나 kbs 뉴스에 안 나옵니다. 이 세상은 두 가지 현실이 있다. 하나는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 오바마같이 변화를 요구하는 이 세상과 심화를 요구하는 또 다른 현실. 

그 현실을 보니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같이 동거하고 있어요. 동거라는 말을 아십니까? 아까 주고받았던 그 교독문 요한 1서 4장 7절에서 1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 마지막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 현실의 모델은 변화산이에요. 자꾸 우리 쪽에서 교인들끼리 “사랑하는 형제모여……” 노래하면서 어깨동무하는 그런 데서 찾지 마세요. 인간들 모아놓고 사랑이라고 운운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사랑의 원형은 변화산이에요. 거기에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동거하고 있었어요. 사랑으로 묶여 있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동떨어진 현실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현재 제자들은 전혀 그 세계를 몰라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놀던 행세하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집이 없어서 주택부금 넣는 줄 알아요? 여기서는 집이 없으면 안 되는 모양이라. 집이 없으면 안 되니까 자기 딴에 성의 표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빌라 세 채 지어드리겠다는 거예요. 신동아 빌라지요.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기쁘게 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줄로 오해를 하고 있어요. 내가 평소에 누구를 사랑하면 기분 좋듯이 그런 사랑가지고 주님 사랑하면 좋아할 줄 알아요. 모든 출발점을 자기 기쁨과 자기 즐거움을 바탕으로 하던 행세, 그 더러운 행세를, 그 우상 숭배적 행세를 그대로 하나님께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연결을 가위로 끊어놓는 겁니다. 가위 하니까 갑자기 탁 생각이 나네요. 집에 택배가 오게 되면 우리 외손녀가 가위들고 설칩니다. 자기가 하겠다고. 외손녀가 가위 들고 설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걸 끊어버리는 겁니다. “네가 뭘 바쳐 네가! 무슨 네 기도가 응답 돼?” 우리 기도가 응답되려면 우리이름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교회에서 가르친 것이 전부 다 엉터리에요. 이것은 무당집이에요, 무당집. 하나님이 뭘 기뻐하는 거냐?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해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그 믿음은 뭐냐 하면, 너 자신을 믿지 않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거예요. 내 구원이 진짜 나의 구원을 방해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를 믿음이라고 말하면 안돼요.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였습니다. 왜? 인간은 중심이 없으면 못사니까. 인간은 중심 없으면 못살아요. 아무리 교회 나오고 설교 들어도 문 열고 나가면 중심은 자기중심이에요. 왜냐하면 중심 없이는 못사니까요. 그래서 오뚜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불가능하지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살고 싶은데 주님의 마지막 심판은 네 중심을 포기하라고 하니까 “내 중심을 포기하면 나는 삽니까?” 이것도 자기중심이잖아요. 

대책이 없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점차점차 세상의 죄가 자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용납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병도 고치고 했지요. 마치 침몰하는 배에 물이 스며들게 되면 꼴까닥 하면서 완전히 잠기듯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충분히 흡입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받을 벌은 저주였습니다. 

차츰차츰 예수님생애의 변화는 이 세상의 무게를 측량해주는 하나의 바로미터, 표식이 돼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보일 것이 없다. 내가 너희들이 벌인 죄에 젖어서 아버지로부터 어떻게 지옥까지 버림받는지 이 모습을 너희가 보지 못하면 너희는 구원 없다.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축 쳐져서 늘어지고 있어요. 

얼마나 우리가 이기적인 인간이고 나 중심인지. 교회 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떠밀어서 와야 되는데 자기가 알아서 오겠다는 거예요. 안 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알아서 안 오겠다는 거예요. 오는 사람이나 안 오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내가 인터넷 듣고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가 자기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관람객이 아니고, 구경꾼도 아니고, 쇼핑객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 예수님의 복음의 전개에 합류할 때만 그리스도 안, 그 복음 안에 들어온 거예요. 합류가 되어야 돼요.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받을 불세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세례 받았지요? 성령세례 받았지요? 이제 남아 있는 세례는 불세례입니다. 불세례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런 소감을 나타냅니다. 참 내가 답답한 게 있다 그 말이에요. 노아 때는 물로 세상을 멸망했습니다. 지금 마지막 때는 불로 합니다. 불로 세상 멸망할 때는 피할 곳은 없어요. 못 피합니다. 못 피하면 어떻게 하느냐? 나의 의를 가지고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야지요. 거기서 예수님이 불세례 받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니엘 세친구가 이미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이여, 억울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우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죽인다.” 했잖아요. 안 걸리게 해주면 좋은데 또 일부러 걸리게 해서 세 친구가 용광로 속에 던져지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는 데 왜 이렇게 죽음의 길로 가느냐? 

막상 불속에 들어가 보니 그게 유일하게 사는 길이에요. 나는 불속에 들어가도 마땅한 자입니다, 하는 그것을 십자가복음 앞에서 고백하는 거예요.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 구원하지 않아요. 자기로부터 자기를 뜯어내야 돼요. 여러분, 제모하는 거 알지요. 파스같은 거 가지고 하는 거. 아이고, 생각만 해도 느낌이 좀. 우두둑 뜯어내잖아요. 

혼자 도 닦듯이 자기를 낮추고 그런 것 하지 말고, 철야해서 뜯어내지 말고 십자가 파스 붙여가지고 같이 우두둑 뜯겨 나오면서 ‘아,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평소에 얼마나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쓸데없는 우상숭배 짓을 했는지. 기독교가 뭐라고. 교회가 뭐라고. 도대체 내가 뭔데 나를 구원해야 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전개에 동참하기 위해서 주는 겁니다. 십자가 붙여서 뜯어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이 복음이 만약 너희 속에 들어왔다면 이것은 내 솜씨, 사도의 말주변이 아니고 성령께서 너희로 하여금 십자가 파스를 붙여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가 새롭게 나오는 방식으로 복음 전개에 동참하고 그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사람, 성도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본인을 구원하겠다는 꼼수가 아닙니다. 분명히 본인을 건지겠다는 수작을 벌인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요새는 설교 좀 길게 한다고 잠을 자싸서 …… 그래서 좀 짧게……. 사람들이 이 복음 듣고도 계속 도망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아직 종말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여분의 시간에다 자꾸 미루는 겁니다. 

2017년도는 이랬어도 2018년도에는 뭐가 있겠지. 자꾸 시간에다 미뤄요. 그러나 종말이 되면 시간을 삼킵니다. 뭐냐 하면?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함께 있는 그 현실이 기존의 현실을 개 무시하듯이 삼켜버려요. 온전히 삼켜버리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제자리에서, 그 갇혀 있는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것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내년, 내년, 하다가 어느새 80되고 90되고, 치매는 벌써 들렸고. 내년에, 내년에, 내 가치, 내 의미, 내 노동한 것, 그것 계속해서 미루는 거예요. 그냥 복음에 의한 불쏘시개가 되면 되는데. 나는 주님의 불세례에 같이 타죽게 되면 이제 나의 자리는 하나님 찾는 자리가 아니고 아버지를 찾는 자리가 돼요. 예수님의 자리기 때문에. 

예수님만의 아버지거든요. 아무도 몰랐던 그 아버지, 같이 부를 수 있는 그 아버지. “네가 뭔데 아버지를 불러?” 하면 “주님이 같이 있거든요.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내일이라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 내년이 오지 않더라도, 내일이 오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유황불이 떨어져도 우리는 이의를 걸 입장이 못 됩니다. 

공짜로 주신 수돗물과 공짜로 주신 햇빛과 공기를 마시면서 이것이 자기 노동의 대가라고 여기고 있어요. 하나님이 보낸 사자가 와서 우물 메워버리고 완전히 곡식 안줘도 우리는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원천을 잃어버렸어요. 처음부터 잘못된 자리, 마귀의 자리에요. 우상숭배, 내 사랑, 내 행복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우리, 그 자리를 주님께서 방치할지 싶습니까? 

천만의 말씀. 반드시 저주하고 그 저주의 소식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심지어 사도가 너희에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8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내가 전한 복음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나라 할지라도 나는 저주받는다. 내가 전한 이 복음에 대해서 내가 나중에 딴소리 하게 되면 나라도 저주받는다, 라고 이야기한 것은 제발 눈에 보이는 이 사람들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남들의 모든 의견을 철저하게 개무시하라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무시에요. 그러면 앞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10절에 보게 되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러니까 목사가 교회를 하게 되면요, 교회가 우상이 되거든요. 왜? 거기에 자기의 공로, 노력, 역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교회에서 몇 십 년 복음 전했습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저주받는 거예요. 교회 하면서 저주받고 있어요. 딴 길로 게걸음처럼 미끄러져 가고 있어요. 썰매처럼 브레이크도 없이 지옥으로 빠져가고 있는 겁니다. 

좋다고 와가지고 돈 내고. 그러면 주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죄 속에 개방해서 죄가 스며들고 침몰했다 했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그것을 아버지는 사랑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내 사랑을 확장시키지 아니하고 나를 미워하게 만들어요. 

축복과 저주가 있지만 축복과 저주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사랑과 미움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은 1이 아니고 2에요. 내가 아니고 우리가 됩니다. ‘함께’ 그러면 우리 곁에 누가 있어야 돼요. 우리 곁에 누가 없으면 진짜 제가 한 말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저 혼자 삽니다.” 이거 곤란합니다. 반드시 우리는 사랑해야 돼요. 

그런데 내가 사랑하면 안돼요. 나는 내 사랑을 내가 미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내 사랑해봐야 그것은 저 사람을 내 것 만들기 위한 야심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부모를 사랑한다? 내가 외손녀를 사랑한다? 외손녀가 호작질을 해 보세요. 저절로 ‘안가나?’ 하고 미운감정이 막 생기게 되어 있어요. 결국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결국 자기를 위해서 신도 있고 가족도 있잖아요. 그러한 위선을 언제까지 가릴 겁니까? 

어떤 사람의 이런 노래가 있어요. 우리에요, 우리. 나가 아니고 ‘함께’의 그 우리. “우리 뭔가 함께 찾아가고 있지. 가본 적 없는 그곳으로.” 아까 말한 그 변화산. 지금 내 위주의 현실 말고 다른 위주의 현실. “가본 적 없는 그곳으로. 나는 가끔 두려워할지라도 나는 내 곁에 계신 분에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power of love, 사랑의 힘. 셀린디온이 부른 노래의 가사입니다. 둘이 같이 이곳에 없는 것을 찾아가는데 동행하지요.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현실을 현실이 아니라고 하니까. 내가 만든, 나에게 유리한 현실이기 때문에, 내 중심을 인정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짜거든요. 이것은 자신의 의를 계속 써먹어야 되는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만큼 헌금하고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봐주겠지.’ 계속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는, 자기 법 지키는 주체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 있는. 순종의 주체자가 자기 자신이에요. 그것은 백프로 지옥 갑니다. 지옥가면 그런 사람 다 모여 있어요. 몰라요. 가본적도 없는 곳에는 법의 원칙도 없어요. 그냥 사랑이에요. 사랑할 수 없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아까 말한 대로, 빚을 탕감했다고 했는데 그 빚을 수면에 표면화시키지요. 주님의 십자가가 계속 우리 속에서 표면화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밖에 모르는데 내 표면, 바깥에 십자가피로 둘러싸여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한껏 죄를 심화시키고, 네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2018년도에 혹시 더 산다면 더 깊이 있게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하는 것을 심화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두렵지요. 이걸 버린다는 것이. 하지만 우리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게 power of love, 사랑의 힘이에요. 오늘 집에 가서 한 번 틀어보세요. 이산가족 찾을 때, 헤어진 사람 찾을 때 나오는 배경음악이 그거예요. 사랑의 힘. 그 사랑의 힘이 성령의 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한해 동안 어지간히도 주님을 욕보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하나님이 저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참 따지기도 야무지게 따졌습니다. 하나님을 내 속에서 떼어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지독한 발악을 해왔었습니까? 나 잘난 맛에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쳤습니까? 이제 내년에는 내 못난 맛에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