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요약
2017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1:4-5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1: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복음의 일은 인간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책임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나름 선하다고 간주되는 능력을 하나님을 위하여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능력이라도 안 쓰고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능력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들이 아무리 우겨도 이미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악해야만’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추진해 나가시는 그 복음 안에서 우리는 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관점을 ‘완료적 관점’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가 해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근원적으로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란 신을 찾는 겁니다. 절대자를 설정하는 겁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항상 미흡함이 자기 몸을 둘러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날때부터 정신질환자인 이유는, 자기를 표현할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만 있다만 만족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이런 만족이 없고 항상 찝찝함이 작렬합니다. 이 단어와 말은, 남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용도입니다. 즉 자신의 메시지를 타인으로부터 그대로 돌려받지 못할 때, 인간은 불안을 느낍니다. “뭔지? 내가 왜 살지? 왜 나는 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거야?”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찾습니다. 자신의 말이나 언어로 제대로 자신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신을 집어넣고 가동시킵니다. 그러면 비록 자신의 부족해도 신이 쓰는 단어로 그 빈 곳을 메우려합니다. ‘신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용서과 자비와 은혜로’ 라는 식으로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제대로 채웠는지 아니 채웠는지는 본인이 최종 점검에 나섭니다. 곧 자기가 자기에게 행하는 채점행위입니다. 오늘은 몇 점짜리 하루였는지 아니면 올해는 몇 점까지인지, 더 나아가서 나의 한평생은 몇 점짜지 인생인지를 놓고 채점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이런 점수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출발지에 예수님의 피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란 일체 인간에게 점수를 구태여 달지 않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에게 협조를 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 자체가 인간의 채점을 불허합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필요치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일로 인한 평가, 즉 ‘악한 세대’이면 됩니다. 문제는 바로 이점을 우리가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나름의 살림살이를 따로 꾸려보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채점에 나서게 되고, 그 채점에 따라 보상을 기대하게 됩니다.
참된 성도는 채점보다는 자신의 예측하거나 예상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매일같이 자기가 자신에 대해 낯설어야 합니다. “내가 이 정도로 악했었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전에는 악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도 갈수록 ‘악한 세대’임이 실감되는 식으로 인식되는 겁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우리가 ‘악한 세대’임을 자인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나름대로 인생을 통해 ‘보상 챙기기’를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전면적인 ‘악한 세대’에 대한 증거말씀은 마태복음 12:31-32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라보는 세대관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세대관이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이 세대를 판단하기에, 그런 판단을 내리는 본인 스스로는 어떤 기준을 동원해서 악한 세대에서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것으로도 온전히 이 세상이 악한 세대임이 최종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므로서, 성령+인간의 견해와, 인간만의 견해가 결정적으로 차이난다고 보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므로서 ‘모든 인간이 다 악한세대’임은 사전에 확정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심 자체는 세상이 예수님을 향한 심판인 동시에, 예수님의 세상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려 오셨습니다. 구원은 그 심판 행위 한 가운데 같이 움직입니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악하다고 내리시는 하나님의 판정으로 악해져야 하는 겁니다. 이 악함과 결부되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존재로 보기에 그 누구도 다 존재로 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 이 나라에 왕이요”라고 표현했습니다. 조롱의 극치입니다. 이미 자기 영역에서 예수님을 추방시켜놓고서, 그 추방의 선 너머에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극한의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의 ‘악한 세대’ 성격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확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처럼 하나의 존재로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안목의 출발점이 자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랑 같은 자일까?”라는 것으로 예수님을 심사한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자기 존재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하셔야 될 기능을 드러내신 겁니다.
즉 어느 누구도 가담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기능으로, 곧 피로서 죄인을 구원하신 겁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없는 자’를 새로이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성도는 피의 우물에서 나와서 피의 우물로 사라지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이 언약으로 마감됨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12-18 15:54:33 |
조회 : 4 |
268강-갈 1장 4-5절(복음의 요약)1701217-이 근호 목사 |
이름 : 오용익
(IP:183.105.222.42) |
|
268강-갈 1장 4-5절(복음의 요약)1701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4절-5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1: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제안하는 것과 선언하는 것이 다릅니다. 제안한다는 것은, 이렇게 해 줄래, 라고 묻는 거지요. 선언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사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신 그 결정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선택을 포기하기를 압박하지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을 하나님 말씀 지키는데 발휘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능력발휘는 오히려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가진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재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헌금하는 것 사용하는 것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거나 순종하거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할 수 있는 능력을 자포자기하는 겁니다.
“주님, 이런 이따위 것 필요 없지요. 그렇지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딴 것, 전혀 하나님께 필요 없지요?”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의 선언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계획과 주님의 계획이 애초부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에요. 제가 지금 무진장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일인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앞으로 잘되라고 주시는 어떤 정보, 아이디어, 하나님의 제안인줄 알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그래요. 하나님의 일인 것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교회 나오면서도 걱정해요.
마치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들을 하는 겁니다. 기도 안하면 안 되는 줄 알고, 헌금 안하면 안 되는 줄 알고, 교회 참석 안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몸 아프면 안 되는 줄 알고, 집구석 망하면 안 되는 줄 알아요. 자기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백독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선언하셨고 그 선언이라는 것은 일방적 속성을 갖고 있어요. 선언이라는 이것은 그냥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추운 날씨에도 출근을 하니까 애는 생각하기를, 지금 아버지가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추운 날씨에 집구석에 앉아 있지 밖에 나가기는 왜 나가느냐는 말이지요.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보일러 기름 값은 누가 벌어오는데? 애들 생각은, 추운데 밖에 왜 나가느냐는 말이지요. 추운데 뚝딱뚝딱 바깥일은 왜 하는 겁니까? 애들 입장에서, ‘아빠는 나하고 같이 놀지.’ 그러니까 애는 순전히 자기 일밖에 모르는 거예요. 세상 일이 하나님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려서 자기 일로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백날 봐도, 교회 40년 다니고 50년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지요. 인간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방금 읽었던 이 몇 개의 문장만 액자로 해서 집에 걸어놨으면 좋겠어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다시 말해서 네 인생 가지고 인생 성공했니, 실패했니, 내 앞에서 운운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사람이 말이 너무 많아요. 자기한테서 나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이 많아요.
정신질환자들의 특징이 이겁니다. 말이 부족해서 정신질환자가 돼요. 자기를 표현할 단어가 부족해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사람이 점점 미쳐가는 겁니다. 적절한 단어, ‘아, 이건데. 표현할 길이 없네.’ 남자한테 참 좋은데 표현할 길이 없다 하는 것처럼.
정신병자라 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는데 남들에게 표현하고 전달할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혼자서 서서히 미쳐가는 거예요. 어떤 단어를 던져놓고 그 단어에 대해서 본인이 불만족스러워요. ‘그래. 이 단어가 아니야. 이 뜻이 아니야. 내가 이런 뜻으로 한 건 아닌데 적절한 단어가 보이지 않네.’
그게 심해지면 보통 정신병이라 하는데 사람이 자신이 표현할 말, 단어가 부족하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정신병자라 그 말입니다. 제 뜻은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정신질환자에요. 그 정신질환을 메우기 위해서 사람들이 뭘 갖고 오느냐 하면, 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내가 미처 못한 그 빈칸에 하나님의 어떤 일을 집어넣어요.
그래서 내가 비록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중간중간 개입해서 윤활유를 쳐서 인생이 그럭저럭 잘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삼위일체 믿고, 성령 믿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정신병자라는 것이 계속 감춰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믿는데 뭐.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시겠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로만 전능하시겠어? 전능하다는 말 그대로 내게 부족한 것은 마저 채우겠지. 내가 살다보니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못사는데 내게 부족한 것, 천국가기에 모자란 것은 우리 주님께서 채우시겠지.’ 이런 식으로 신을 빌려와서 인생 그럭저럭, 대충 때우듯이,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라는 겁니다. 신을 믿으면서 미흡한 것을 마저 채워서 허전함을 보충물로 보충하는 것, 이게 인간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면 이 모든 성경이 누구를 위한 일이 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경이 쓰인 것으로 확정을 지어버려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절 말씀이 전혀 안 맞습니다. 4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이 악한 세대에서.” 악한 세대가 나와요.
4절이 복음의 요약인데, 오늘 제목도 그런데, 악한 세대가 되려면 우리가 악한 세대의 일부로 같이 여기서 움직여주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하나님 가져왔기 때문에, 보충하기 위해서 가져왔기 때문에 원판 되는 나는 문제가 없어요.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다만 뭔가 모자라요.
모자라기에 욕망의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모자라는 것이지 원판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거든요. 나름 괜찮은데 괜찮은 것을 더욱더 괜찮게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라는 것을 도용해서 갖다 붙인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근사하고 건전해요. 품위유지 할 만 합니다.
탕자 비유가 있지요.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성급한 둘째 아들이 유산 미리 받아서 밖에 나가 허랑방탕 다 쓰고 빈털터리 되어서 되돌아온 그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탕자가 집 밖으로 나갔다. 집 밖으로 나갔는데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전부일까요? 집 나갔는데 그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탕자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지만 플러스알파가 있어요. 집에서 백 년 동안 아버지와 같이 살아봐야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마음을 버리고 가출한 이유가, 왜 세상은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 그거예요. 자기를 위한 아버지에요. 자기를 위한 형님이고 자기를 위한 세상이에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 털어먹고 돌아오니까 지금 내 마음이 소중하지만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 그 차이를 탕자가 몸소 선언하는 입장에서 남들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소중해요. 그러나 성도가 되었으면 이 소중한 것, 누구보다 소중한 내 것, 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게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가출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정신병인 이유가 뭐냐? 자기 자신부터 출발해서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채택해서 설렁설렁 인생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뭘 놓치는가? 악한세대, 그 의미가 와 닿지가 않아요. 악한 세대의 의미가 와 닿지도 않으면서 종교생활 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있어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에 대해서 채점합니다. 오늘은 40점, 오늘은 20점, 오늘은 80점. 마음 같아서는 매일같이 천사가 전화해서 “제발 자신에 대해서 채점하거나 체크 좀 하지 마세요.” 왜? 점수 안 나옵니다. 왜 성도는 점수가 안 나오는가 하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하고 같이 있기 때문에 점수 자체가 내 점수가 나올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시켜 버렸어요.
예수님의 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했던 전설의 고향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아이디어도 참 다양했는데. 우물에서 나온 처녀귀신이 사라질 때 다시 우물로 사라지는 것이 있었어요. 기억이 나요. 우물에서 하얀 소복입고 머리 풀고 올라옵니다. 어떤 분에게 물었어요. 처녀귀신의 머리가 그렇게 왜 그렇게 기냐고 하니까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 더 힘들어서 그렇답니다.
어쨌든 머리를 풀어헤치고 우물에서 나온 그 귀신이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요. 성도라 하는 것은 뭐냐? 피에서 나와서……… 전설의 고향입니다. 피에서 나와서 사라질 때 피로 돌아가요. 무슨 채점할 것이 있어요?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절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것은 네 일이고, 네 종교일이고, 주의 일은 그게 아니고 없는데서,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잃어버린 것을 찾는 거지요.
성도는 없어요. 성도가 없어야 될 이유가 그래야 악한 세대가 돼요. 그래야 보편적으로 악한 세대가 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의가 있으면 그것은 악한 세대가 아닙니다. 백 프로 악한 세대가 되려면 저와 여러분 중에서 아무도 구원될 자격도 없고, 권리가 없는 사람뿐이어야 됩니다. 아무도. 그 정도로 악해야 돼요.
제가 이래도 믿지도 않고 그런가, 하는데 마태복음 12장 31, 32절에 나오는 말씀 듣게 되면 ‘아, 그렇구나. 우리가 애초부터 뭔가 잘못 생각했구나.’ 할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되어 있어요.
여러분, 방금 이 말씀을 나름대로 제가 천천히 읽었는데 딱 느낌이 뭐냐? 이 본문을 직관으로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뭐냐 하면, 성령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 못 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성령이 오기 전에는 모든 인간은 사하심을 받을 권한도 권리도 없고 악한 인간 그 자체로 같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누굴 포함해서? 우리자신을 포함해서. 종교 찾고, 예수 찾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이게 바로 악한 세대에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이 곳, 이 세대에서 한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한 그 상황, 그게 악한 세대거든요. 그 악한 세대의 특징이 뭐냐? 종교입니다. 악한 세대라는 것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 위주로, 내가 사는 위주로, 내 건전함을 계속 유지하는 위주로 신을 자꾸 찾고, 성경보고, 교회 나와서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순종하고, 선교사로 파견 나가고, 봉사하고, 이 모든 것이 악한 세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악한 짓이에요.
거기다 어디 채점을 합니까? 어디다 거기서 자기한테 채점을 해요? 인간은 매일같이 채점합니다. ‘이정도 하면 품위 있게 살았나? 내가 좀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는가? 낮으면 20점, 높아지면 60점.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 자기 점수 매기기에요. 왜 점수를 매기는가? 정신병자라서 그래요. 정신병자가 뭐냐?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데 남들이 보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그게 정신병자냐? 그게 미흡하거든요. 내가 듣기 원하는 목소리를 타인으로부터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것, 그 미흡함으로 오는 것, ‘그러면 나는 어쩌지, 나는 이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치면서 연극을 했는데 남들의 반응이 시큰둥했을 때 나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 어떻게? 무슨 낙으로 살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나는 번개탄 피우고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자살할 밖에 별 대안이 없습니다. 자살은 정신병자지요 뭐. 우울증이니 뭐니 핑계 댈 것 없어요. 평소에 내가 쓰는 단어는 나만 쓰는 단어가 아니에요. 사람은 들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듣고 있고, 보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쪽이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는 겁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내 행동을 관장하고 있고 좌지우지하고 있어요. 세상눈치보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 인생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을 전부 동그라미 쳐버려요. 모조리 다 악한 세대에요. 주고받고주고받고 모조리 다 악한세대입니다.
채점할 때 스스로 채점하지 않습니다. 채점해놓고 서로 바꿔서 다시 맞추잖아요. 우리는 맨날 바꿔서 한 채점, 자기가 하는 채점, 채점, 체크리스트, 여기에 평생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채점 안하고 사는 사람 우리 집에 하나 있어요. 이건 자기 맘 대로에요. 물먹다가도 물 확 부어버리고, 먹기 싫으면 그 자리에서 뱉어내고. 두 살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외부의 채점이 없어요. 눈치를 안봅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요. 그렇게 시달리고 시달리면서 그 악한 세대에서 빠져나갈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다시 말씀드리면, 참 이 대목이 어려운데 좀 시간이 가더라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신이 있다 없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그게 더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안 되고 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면 서로 싸우면 돼요.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아니야, 엉터리,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하나님은 위에 계시니까 지상에 있는 인간들끼리 서로 의견개진 할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모든 입을 다 막아버리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그 아이디어도 알고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누군가 알아봐야 돼요. 그런데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의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1장 4절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숙제이고 하나님이 벌리신 일방적 선언이라고 했고 우리에게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선언을 보니 그 안에 ‘악한 세대’가 나오는 겁니다. 악한세대가 나오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이 악한 인간들아, 악하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지. 그러면 구원해줄게.’ 자꾸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제안이지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악하지 않다고 해도 기어이 너희들을 악한 세대로 만들어주는 그것, 내가 일관되게 방해받지 않고 추진하는 그 일이 악한 세대에요. 그러면 악한 세대의 우리가 뭐냐? 악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악한 사람 되면 되잖아요.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 채점하는 빨강펜 던져버리고 매일 같이 악한 세대 되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힘듭니까? 정말 제가 답답해 미치겠어요.
우리가 할 일은 나를 날마다, 이정도 하면 주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형상 얼마나 본받을까, 그렇게 채점하는 것 하지 말고 본인이 본인에게 낯설어야 돼요. ‘아, 내가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그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가 낯설어야 돼요. 뉴질랜드에서 어제 누가 질문했어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가 있는데 이 지상과 하늘나라에는 연속성이 있어야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거룩한 나라에 가려면 바르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야 그 연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라고 한다는 거지요. 자기가 보기에는 불연속적이고 단절인데 어떻게 연속성을 유지한다고 하는지 답변해주시기 바란다고 질문이 왔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세대에 포함된 우리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낯선 나라에요. 낯선 나라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포함된 사람은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낯설어야 돼요. 어느 정도 낯선가 하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인생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낯설어야 돼요. 사람은 뭐든지 예상하거든요. 사람이 행동을 할 때 뭔가 기대해요.
예상하고 기대하게 되면 그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되어버린다니까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가 계속 자기 자신을 채점을 하게 돼요. 내가 이정도 예상했는데 점수가 나왔으니까 오늘 하루, 또는 2017년도 올해는 그럭저럭 60점은 된다고 채점을 해버린다고요. 채점을 해버리면 자신의 기본적인 자리, 피, 피의 처녀귀신, 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피 묻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출발지점이 날라 가버려요. 사라져 버린다고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새로 만드는데 그게 없는 곳이 아니고 익히 내가 아는 곳이 되고 짐작한 곳이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래야 돼요.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이것은 나한테 낯설다. 내게 이런 면, 이것은 내가 예상도 못했는데?’
지금 전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시는데 그러면 간단하게 세자로 말씀드릴게요. ‘벌러덩’ 이 ‘벌러덩’이 뭐냐? 거북이가 가다가 등을 보이잖아요. 그런데 거북이 등이 아래쪽으로 가고 배가 위로 올라올 때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게 벌러덩 이잖아요. 벌러덩 뒤집어지면 우리는 보면서 ‘아이고 저 거북이 안됐다. 어떻게 바로잡아 가는가?’
아니에요. 우리 성도는 바로 잡아가면 안 되고 벌러덩 자기의 수치와 모든 것을 내놓고 기어가야 돼요. 이게 악한 세대의 합당한 삶이에요. 날마다 벌러덩 해야 돼요. 그런데 ‘벌러덩’ 해서 한 한주 가게 되면 벌러덩 한 그 배에 장식을 한다고요. 난 착한 일 많이 했잖아, 하나님께 순종은 했잖아, 채점을 한다니까요.
그러면 또다시 벌러덩 이지요. 너무 쉬운 거예요. 복음은 12년 동안 피 흘린 여인도 알 수 있고, 세리도 알 수 있고, 창기도 알 수 있고, 강도도 알 수 있는, 문둥병자도 알 수 있는, 심지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너무나 쉬운 이야기입니다. 고개도 못 들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그게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성령이 왔을 때, 성령이 왔을 때 이미 피 묻은 손으로 오게 되면 피가 왔다는 말은, “나는 네 것 안 빼앗는다. 나는 네 인생 관여 안한다. 나는 너보고 아무 요구하지 않는다. 협조를 구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일만 해. 이 인간아.” 너한테 내 일 협조하라고 요청하지도 않아요. 그냥 내 일만 해요. 주님은 주님 일만 해요.
지난 2017년을 돌아보세요. 며칠 안 남았는데 여러분은 여러분 일만 했잖아요. 잘 하신 거예요. 악한 짓 잘하신 거예요. 내년에도 그렇게 되기를 제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악한 짓만 하세요. 딴 짓 하지 말고, 선한 짓은 요만큼도 하지 마시고 계속 악한 짓만 하세요.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은 천국 가다가 갑자기 엉뚱한 길로 빗나가고 있어요.
왜 선한 일을 하면 안 되는가 하면,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인간은 보상을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놓았는데 이제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서 잃어버린 것을 보상해야지.’ 그러면 그것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자기가 자기중심에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그게 다 들어가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 했어요. 문짝 들어내는 예를 들었어요. 홈 파인 선로에 같이 들어서지 아니하면 결국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홈 파인 문짝 들어내면 매끈한 선로가 나오잖아요. 그 홈 파인 선로를 누가 깔아놓았는가 하면, 예수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홈 파인 선로를 깔아놓은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어떻게 하느냐? 성령은 주님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심판주에요. 우리 인간을 다 때려죽여버리려고 오신 거예요. 도끼차고 오신 거예요. 세례요한의 말처럼 도끼차고 오신 겁니다. 악한 자에게 저주의 도끼를 내려치는 그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고 그 주님이 하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실 일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도끼 들고 이마 까라, 해주시는 분을 나는 만났다. 나는 당해도 싸다. 이유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무조건 피 묻은 도끼로 칠 때 나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게 정답인 겁니다.
성도는 완료된 것을 전하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미완료를 전해요. 성도가 아닌 사람은 말이 많고 변명, 핑계가 많아요.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많이 수집해서 그걸 따따따다, 나팔처럼 부는 겁니다. 마구 쏟아놓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 입에서는 피가 막 나와요. 피를 막 뿌려요. 내 속에서 피를 토하고 있습니다.
피를 토한다는 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에요. 신앙생활, 뭐가 어렵습니까? 이제 2017년도 다 지나갔는데 이제는 간단하게 합시다. 인간은 가죽입니다. 인간은 벗어놓으면 그냥 가죽이에요. 차마 연세 많은 분 계신데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가죽이 아니고 바람이 좀 들어있어 보이는 것은 20대나 10대고 30대에 들어서면 서서히 가죽화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점점 더 멀어진다, 안 합니까? 김광석은 점점 더 멀어진다 하거든요. 점점 더 가죽이 되어가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 나중에 가죽이 축 처지는데 무슨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그게 전도서에서 보여주는 거잖아요. 중력에 의해서 다 와르르 와해되는데. 다 무너지거든요.
내세울 것 없어요. 품위 없습니다. 채점 자기가 하다가 싫어서 던져버려야 돼요. 한 70대 되면 채점하던 것 던져버려야 돼요. 채점포기. “난 이제 내 평가 안 해. 할 건더기도 없어.” 그런데 아까 제가 집사님에게 물어봤어요. 70넘어도 그렇게 고집부립니까? 70넘어도 이 고집은, 정신병은 더 심화되는 거예요.
70넘어 80이 되어도 고집은 왜 그렇게……,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왜 그렇게 고집이 센지요. 이제는 안하던 욕까지 막 나오고요. 남들에게 ‘벌러덩’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기 거북등을 내놓으면서 그게 자기라고 얼마나 두꺼운지. 오래 살면서 그것도 두꺼워졌어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주님께서 모두를 악한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존재 믿으면 됩니까? 안돼요. 예수라는 존재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떤 존재, 타자를 믿을 때는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를 거기에 집어넣고, 나 예쁘지요, 라는 그 예수를 내가 잡아당기는데 어떻게 그 예수가 진짜 예수겠어요? 가짜 예수지요. 자기가 만든 장난감이고 노리개인데.
예수 믿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한테 어떤 것을 끄집어내도 우린 구원 안돼요. 삼위일체 신학 다 동원해도 우릴 구원 못합니다. 그것조차 나의 구원과 엮여서 믿는 예수기 때문에 남은 악해도 자기는 안 악하다는 그 본성이 사탄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이구, 저 인간 봐라, 저 인간. 바라 정치 저 꼴로 하는 거. 우 병우 봐.” 지는?
지가 만약 사법고시 되었으면 동네방네 플래카드 걸었을 걸. 인간 참, 참 한번 뒤집혀 봐야……, 인간은 죽어 봐도 인간 안돼요. 그러면 뭐냐? 예수의 존재가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4절에 나옵니다.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말, 자기 몸을 드린다는 그 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성경 전체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몸을 드리심으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약속은 홀로, 혼자, 혼자 다 이루셨어요. 왜? 우리가 워낙 악하니까.
예수 믿는 것도 악하고, 주님한테 사랑하는 것도 악하고, 주님한테 소망 두는 것도 악하고, 안 악한 구석이 없어요. 십일조 했다고 좋다고 그걸 기억하고요. 헌금 한 것 기억하고, 봉사한 것 기억하고, 설교한 것 기억하고, 강의한 것 내가 기억하고, 내가 강의하러 얼마나 돌아다녔고, 설교를 얼마나 했고, 이걸 기억해요.
이러니 올 한해도 저는 악한 짓만 해 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한 명도 구원 못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기다려 보세요. 자기 몸을 드린 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톡톡 두드립니다. “어이! 내가 너 위해서 내 몸을 바쳤어.”
그 증거가 뭐냐? 피라는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믿습니다.”이렇게 나올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가게 되면 악한세대의 극치가 나옵니다. 제가 간단한 문장을 읽어볼 테니까 어느 정도로 악한가를 보세요. “당신은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유대인이 예수님한테 한 이야기에요 “당신은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이걸 조롱의 극치라 하는 거예요. 팻말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거든요. 이 말은 뭐냐? 사람들이 놀리는 거예요. 하나님도 아닌 게 하나님인척 하면서 자기가 구원자요, 심판자라고 행세하니 인간이 그 예수에게 퍼부을 수 있는 것은 마지막에 뭘 로 모아지는가? “어이구, 잘났다, 인간아! 잘났다, 잘났어. 그래, 네가 유대인의 왕이다.”
이것은 이미 경계선에서 내쳐놓고, 내 나와바리에서 나가, 해놓고도 분노를 못 이겨서 거기다 욕설을 하는 것이 뭐냐? “그래, 잘났어. 이 유대인의 왕이여.”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예수님을 내 나와바리에서 자꾸 밀어내기 위한……, 그게 예수라 하지만 사실은 너 대신 피 흘렸다는 이 사실을 계속 밀어내고 있는 겁니다.
나로 하여금 내 채점을 계속 하도록……, 피가 있으면 채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밀어내는 그 작업을 사탄의 지시로서 매일같이 우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알고 모든 인간은 일체 모르는 일을 사도를 통해서 숨겨진 비밀을 제시하면서 1장 1절에 단서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라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리되면 사람들은 이 단서를 붙인 이유를 모르고 “예, 이야기만 하시면 우리가 뭐든지 믿겠습니다.”라고 나오거든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렇게 하니까 ‘악한세대’라는 것은 눈에 안 들어오고 뒤에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래서 “그 십자가 피 제가 믿나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게 악한 짓인지도 모르고. 예수 피를 내가 믿음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게 악한 짓이에요. 악한세대는 예수 피를 하든 뭘 하든 믿어서 구원받을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이것은 주님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아까부터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주님이 우리보고 믿으라고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말씀처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 놀리는 겁니까, 비웃는 겁니까?
뭐냐 하면, 너라는 존재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나)라는 존재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기능, 내 몸을 바쳤다는 그 기능이 능력이 되어서 그게 다 이루어지면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혜사에요. 동행자입니다. 함께 있는 분이에요. 예수님, 인자는 쫓아낼 수 있어요. 제자들이 그랬어요.
그래서 인자를 훼방하고 욕되게 하는 그것, 그런다고 해서 지옥 안갑니다. 물론 원래부터 우리는 지옥 갈 인간이지만. 하지만 그 예수님을 네가 추방했다는 사실마저 성령이 와서 알려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 영원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아,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무조건이야.
그냥 죄인이고 악한 자입니다. 따라서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악한자라고 안다는 것은, 성령이 옆에 있다는 것이고, 성령은 십자가 피를 이야기했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이 땅에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나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잃어버린 양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내 모습 보기에 낯설고, 신기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내가 꼭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내가 꼭 이런 쪽으로 가야했었어?’
종교를 예수님의 피로 구멍 뚫어놔야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종교라는 것을 뚫어버려야 돼요. 찢어버려야 돼요. 남는 것은 이미 완료된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도는 이미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도 아닌 사람들, 정신병자들은 자기 잘났음을, 나 예수 잘 믿는다는 거기에 적절한 단어를 성경 속에서 뽑아요.
뽑아도 그 뜻이 그 뜻이 아니에요. 내가 달라지니 그 뜻도 달라져요. 자기한테 집중하고, 자기를 채점하고, 성경 보면서, 기도하면서, 중보기도하면서. 오늘 아침에도 중보기도에 대해서 질문 들어왔는데 답변해 드렸습니다. 중보기도에 대한 답변을 제가 이렇게 했어요. 기도하는 상황을 우리가 안 만들어냈는데 왜 우리가 중보기도를 합니까?
주님이 만들어놓았으면 주님이 알아서 해결하는데. 해답은 나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라는 것. 홈이 파인 그 노선을 따라가는 거예요. 지금도 주님께서는 자기 일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다 보니 우리가 날마다, 전에는 이만큼 알았던 내 죄를 이제는 더 많이 이만큼 알아요. 또 다시 더 크게 넓게 이만큼 알아요.
전에는 남을 용서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용서할 잽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내가 건방지게 어디서 남을 용서합니까? 내가 어떻게 남을 사랑을 해요? 죄인 주제에. 하는 짓마다 뭘 해도 다 내 자랑거리로, 내 자만으로, 내 채점에 도움 되는 쪽으로 다 돌아오는데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남과 대조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보고, 남에게 들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평생 동안 우리는 그저 가죽이 되어서 늙어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주체가 속에서 실린더처럼 죽 올라오지요.
이제는 갈라디아서 1장 6절, 복음의 요약으로 다져지고 뭉쳐진 새로운 주체, 자아가 아니고 새로운 주체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누가 그렇게 시작을 하느냐? 주께서 우리를 지금부터라도 1장 4절이 태동하고 활동하고 개시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종교생활을 그만두시고 이제는 그냥 사시면 돼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믿는다면서 내 인생 힘들게 했다고 얼마나 비난했고 화냈습니까? 우회적으로,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우회적으로 주님 앞에 성을 내고, 분노하고, 원망 퍼부었던 저희들, 이게 바로 숨겨진 우리의 악한 모습인 것을 들춰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