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복음의 원천(갈1'11-17) 1801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4. 12:59
2018-01-07 12:45:11조회 : 212         
   복음의 원천18011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복음의 원천(갈라디아서 1:11-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ovsSUcjgsd8, Hit:47
 이근호18-01-07 13:34 
복음의  원천 

2018년 1월 7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1:11-17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배워야 정답을 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배워도 소용없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겁니다. 아 사실은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고, 진리를 찾는 모든 궁극적 노동의 결실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필히 유대교를 거론합니다. 그것은 유대교를 최고 정점으로 해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비로소 복음이 현실에 등장했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 세계에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유대교는 그 모든 종교를 대변하고 대표합니다. 이는 유대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유대교는 말합니다. “모든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합니다. 유대교가 말하는 구원은 이런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원받고부터는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유대교는 ‘신의 기적’을 탄탄한 기초로 삼습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와의 차별화를 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적의 증거물을 그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요 율법입니다. 사두개인은 성전 우선주의로 나가고, 바리새인들은 말씀 실천으로 나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혈육을 받아들이시기로 하셨다’입니다. 즉 ‘버리기 위한 육’일 리가 없다는 겁니다. 살아남기 위한 모든 우리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부정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매사에 정교한 율법체계를 다듬어나가면서 인간들 끼리 뿐만 아니라 확장되어 하나님에게도 인정받고자 신학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복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마저 “아니다!”입니다. 사도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상당히 미안해합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천국에 들어왔으니’ 미안한 겁니다. 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혈육에 대해서 발라내어버립니다. 인간 세상에서 혈육이란 도무지 끊어낼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도 ‘아브라함 혈육의 특수함’을 위한 신학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혈육이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구원해내시는 증거가 된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2-13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원형과 모델을 주위의 신앙좋은 사람들에게 찾지 마세요.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의 하강은, 소위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들만의 세계에 죽음을 위치하기 위함입니다. 곧 이 현실은 죽음을 장착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 자리를 만드는데 있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도 버림받고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인간들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 천국에 합류할 의도로 종교, 곧 모든 종교의 대표인 유대교를 형성시켜 온 겁니다. 이 유대교 안에는 신을 즐겁게하고 만족할 모든 아이디어들이 집대성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어도 결국은 인간들의 ‘자기 존재 증명’, 곧 ‘자기 증거’입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세상’으로 확장하기 위한 노고입니다. “세상 사람들아, 모두들 나를 위하여 존재하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내뱉는 평범한 발언까지 모두 명령어로 번역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집중하고, 자기에게 정을 보내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고 위로해주어서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조성된 바로 그 ‘나만을 위한 세계’를 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버릇을 그대로 하늘의 신까지 내딛게 됩니다. “신이시여,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여 주시고 구원해주소서” 

이런 작업을 벌리면서 유대교 및 모든 종교는 자체적으로 법제적 장치를 동원하게 됩니다. 신의 형상을 대신해서 성전이나 교회당이나 법당을 조성하여, 그 지정된 장소에 우월한 초월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시설물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들에 대한 인건비와 관리비를 위해 돈을 거두되 성경적으로 합법화를 가장합니다. 

눈에 보이는 시설물을 유지하므로서 인간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 자신의 힘을 비대하기 위한 시대를 하면서 필히 법을 동원시킵니다. 그리고 그 법으로 명령하고 지시해서 각자 신의 법의 실천자로 행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요한복음 6:53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죽음의 자리에서 새롭게 개시되는 ‘생명의 판’이 따로 조성된다는 겁니다. 이 현실판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모조리 죽은 자들이 됩니다. 이 세상에 소위 산자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현실판을 조성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도 자신의 죽음의 자리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과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결코 생명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도처럼 이 현실판에 들어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동원된 인간들은 필히 ‘자기 증거가 곧 죄’다는 된다는 인식의 파도로 휩싸이게 됩니다. 끊임없이 분수가 하늘을 향하여 뿜어내듯이 성령께서는 ‘죽은 분이 산 자 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말씀하고, 그 분수물 위에 수동적으로 떠다니는 탁구공에 해당되는 성도는 이런 현실판을 밀려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만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배후에 ‘죽음의 힘’이 작용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령껏 살아봤자 모든 게 멍청하게 산 세월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8-01-12 06:39 
271강-갈 1장 11-17절(복음의 원천)1801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1장 11절-17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 이야기 가운데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이 말은,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사도바울 본인처럼 본인을 집어넣어야 본인에게 예상 못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어떤 필드, 장에 속했는데 복음이라는 장에 속했을 때에
방금 읽었던 동일한 고백이 같이 나와 줘야 된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서 뭘 배우려고 오는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예수님한테 뭘 배워서 그 배운 것 가지고 천국에 들이밀려는 수작을 안 부렸다는 그 말입니다. 

태풍이 오게 되면 태풍한테 뭘 배웁니까? 태풍한테 그냥 휘둘리지요. 그냥 떠밀려 갈 뿐입니다. 홍수가 오면 떠밀려가는 거지요.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냥 떠밀려갈 뿐이지요. 떠밀려가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내 조상의 유전” 유전이란 전통이거든요, 지금까지 내려온 신학전통, 모든 신학적 전통을 발라내는 겁니다. 이게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16절에 보면,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모든 혈육, 내가 끊을 수 없다고 소문난 그 가족, 혈육, 가족의 그 정, 그 정은 무서운 거예요. 초코파이, 그 정을 발라내는 겁니다. 마치 갈치에서 뼈에서 살 발라내듯이. 인간의 정, 그리고 모든 신학적인 전통. 개혁주의고 칼빈신학이고 그 모든 전통을 다 발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서 이 복음을 알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필히 할 거예요.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나올 수 있는 영역의 사고방식과 정신상태가 질문이라는 이름으로 응축이 되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누구한테 질문을 던진다든지 어떤 해답을 구할 때는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이런 식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질문하기를 “당신은 복음을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이 복음을 어떻게 정립했습니까?”라고 한다는 자체가 평소에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한테 들어서, 누구한테 배워서, 그래서 내가 획득하는 식으로 내가 복음을 장착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해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지금 자기는 어떤 세상에 속해 있는가를 그대로 까발리는 거예요. 나는 평소에 이따위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노출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전통적인 신학도 거부하고, 발라내고, 혈육도 발라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에 의해서 떠밀려 왔다는 그것을 두고 15절에 보니까,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예정되어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사도바울은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겁니다. 오늘도 저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 독감에 다 아파야 되거든요. 살아남은 자의 여유? 이런 것처럼, 나는 왜 안 아프냐 그 말입니다. 

아파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 굉장히 미안한 거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분위기 주신 것은 천국가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난 것도 없고 저 사람보다 더 열심 낸 것도 없는데 되게 미안한 거 있지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열심히 싸대면서 파키스탄 선교도 안하고, 선교 헌금 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농땡이도 그런 대농땡이가 없을 정도로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지금 천국을 가고 있으니 너무너무 미안하고 탈락된 사람에게 죄송한데 그게 두자로 ‘택정’입니다. 택정함을, 예정을 입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달리 다른 단어가 적절하지 않아요. 

시합을 붙여서 누가 더 속도를 높여 밟았느냐, 했으면 야무지게 밟아서 속도 올려서 천국 갔다고 이야기하겠는데, 그런 것 한 적도 없는데, 주님한테 떠밀려서 너는 천국 가야 된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 한 백일 이상 외손녀를 만나서 함께 지내왔어요. 처음에 외손녀를 만났을 때는 ‘왜 나에게 이런 질고를 주십니까?’ 생각했는데 가만 지내고 보니……, 지금 생중계 다 듣고 있어요. 

애가 장난감을 치우는데 “치우자, 치우자” 하는 노래를 부르거든요. 노래 안 부르면 장난감을 안 치우니까. 장난감을 치울 때 치우는 통이 달라요. 이쪽 장난감 통 따로 있고 저쪽 장난감 통 따로 있어요. 아무리 철없는 아이지만 장난감을 어느 통에 집어넣어야 되는지를 다 알아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장난감으로 만들어놓고 적절한 통에다가 분류를 시켜서 분류된 통가지고 그냥 데려가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우리가 행동을 할 때 의미라 하는 것은 그 의미 단락단락으로는 의미를 몰라요. 그게 통 안에 놓여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아는 겁니다. 결국 인생이라 하는 것은, 몸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물결 같은 거예요. 생각이라 하는 것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고. 느낌이라 하는 것은 거품 같은 것이고. 

인간의 의식이라 하는 것은, 성경 이사야에도 나오지요, 바람 같은 것, 그리고 안개 같은 것이고 그리고 의지라 하는 것은 풀 같은 겁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요. 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같은 인간들끼리 계속해서 뭔가 꾸역꾸역, 잡히는 것이 없지만 임시적으로 뭔가 구성을 자꾸 하는 거예요. 가정이라는 것, 사회라는 것, 자꾸 구성을 하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참 미안한 거예요. 세상에 어떤 법을 어기더라도, 어떤 법에도 저촉을 안 받고 살아가는 게 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미안스럽겠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 노골적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어요. 

제발 거짓말 안 해도 같이 살 수 있는 그런 사람 만났으면 참 좋겠다. 거짓말 안 해도 살 수 있는 사람. 부부. 맨 날 거짓말이야. 맨 날 술이야, 하는 노래가 있지만 맨 날 거짓말이야. 하여튼 부부부터 시작해서 자식, 부모, 모든 사회, 모든 관계가 한시라도 거짓말을 안 하는 순간 몰락하는 순간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거짓말을 해야 돼요. 

교인과 목사사이, 집사와 집사사이, 오직 거짓말로 무장하고 무장한데다 더 무장하고, 더 교묘하게 거짓말로 치장하고 위선하고 기만해야 되고요. 얼마나 본인들이 스트레스 받습니까? 거짓말이 워낙 많으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그렇고, 거짓말을 방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법을 집어넣고 또 법을 집어넣는데 사도바울은 예수님한테 구원을 받고 보니까, 그딴 법을 전혀 신경 안 써도 천국을 가는 사람 되었으니까, 세상에 법 지켜야 인간된다고 여기는 사람한테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합니까.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 나는 세상에 빚진 자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빚진다고 그리고 이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거짓말 더 이상 할 필요 없는, 거짓말을 더 이상 할 필요 없다는 말은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오늘본문 내용은 12절에 길게 나옵니다만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길게 나오는 이 말을 그대로 말하면 뭐냐?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는 정답 모르지.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정답을 안 이상은 정답을 알기까지 애써야 될 모든 사다리는 발로 차버리세요. 정답 알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단계들, 제자훈련이니 그런 단계 있잖아요, 그런 것 다 발로 차버리라는 말이지요. 그런 쓸데없는 것들로 뭘 하느냐는 말이지요. 

제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기도해서 주의 뜻을 안다는 식으로 한다고. 그래서 지난 시간에 가위이야기 했잖아요. 가위 가지고 잘라버리라고. 사람이 뭔가 질문을 한다는 것, 사람이 뭔가 요구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살아왔던 그 사회의 더러운 짓거리를 그대로 노출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서 내 필요한 것을 얻어왔습니다. 챙겨왔습니다.”라는 것이 기도에 꽉꽉 모여 있어요.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런 기도를 주께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지요. 만약에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줘버리면 마치 천국에 지옥을 박아 넣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천국은 인간들이 생각도 못한 예수님만의 공로로 형성된 세계인데 거기에 자기가 놀던 가락을 왜 집어넣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하나 지켜내기 위해서 거짓말로 점철된, 중복된 행세와 사고방식을 천국에서, 뭐가 모자라서 그걸 받아줍니까? 받아줄 필요 없지요. 

기도부터 가위가지고 잘라버립니다. 기도하지 말라, 가 아니라 기도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꾸역꾸역 기도하지요. 계속 기도하게 만들고 계속 퇴짜 만들고. 기도하고 퇴짜 놓고, 기도하고 퇴짜 놓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오직 네 이름이나 네 체면이나 위신은 통하지 않는 세계, 오직 주의 이름만 통하는 세계. 그래서 기도에는 주의 이름이 붙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모든 기존의 인간의 전통을 거부합니다. 특히 14절에 보면,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이렇게 되어 있는데 복음을 설명하면서 유대교를 집어넣었어요. 사도바울이 유대교를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전체가 다 이야기하는데 그중 2장 20절에 보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해서 십자가의 전에 있던 사건이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사건을 유발했던 그 유발요인이 지금 여전히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는데 그 십자가사건,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하나님을 애매하게 인간이 죽이는 엄청난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거든요. 

그 십자가사건에 근접해서 인간들의 정신이 이렇게 하나로 뭉쳐져서 드러났는데 그 대표적인 행위가 유대교라는 겁니다. 이것은 십자가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사라지고 어떤 종교가 대표하느냐 하면, 유대교가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를 대표해 주는 거예요. 대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모든 종교는 유대교 안에 들어가게 되면 종합선물, 해태종합선물처럼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기적이 있어야 된다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사람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도 유대교에 다 들어 있어요. 유대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원받고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이게 유대교의 구조입니다. 

이런 유대교의 구조가 사도바울 이전의 사울부터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흡수되고 빨려온다는 것은 사람들 속에 유대교를 양태 할 수 있는 재료들이 이미 가득 넘쳐나고 있다는 거예요. 유대교 하니까 여러분들이 골치 아프다 하니까 유대교 치우고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이 내용, 그 다음에 구원받았으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 선한 열매 맺어야 된다는 이것, 이것이 이미 유대교 안에 다 장착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이 사실, 지금 구라치는 것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다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면서 저희들이 만든 유대신학은 실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떤 증거를 남기는데 그 증거가 뭐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두개인이 주장한 것인데 성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세운 성전을 절대로 파기하지 않는다. 

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장했던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율법,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방금 이야기한 유대교의 모든 신학은 최종적, 결정적인 증거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유대교의 특징은 뭐냐? 배우는 거예요. 그걸 배우면 되는 거예요. 유대교의 새로운 버전, 이게 식상된 버전이지만, 뭐 별다른 버전이 아니지만 이걸 현대적인 새로운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성경을 주셨는데 성경은 우리 힘으로서는 못 지킨다.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성경말씀을 지킬 수 있다. 성경말씀을 지키는 증거가 뭐냐?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사람만이 천국 간다. 그게 바로 유대교의 새로운 버전입니다. 새로운 편집본이에요. 

그러면 일반교인들이 “목사님, 그걸 어떻게 배웁니까?” “교회에서 배우시면 됩니다. 단계별로.” “배우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유대교는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돼요. 왜냐? 유일한 증거니까. 교회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머리되신 주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 교회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교회를 관리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유대교의 두 가지 요소가 들어갑니다. 하나는, 관리하기 위해서 사람이 필요하고 인건비 필요하겠지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교회 운영비 필요합니다. 가게 세를 내야 되지요. 가게 세 청산하고 이제 단독건물, 고딕건물 지어야 됩니다. 주차장이 있어야 식당도 가거든요. 그래서 주차장도 넓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를 무시하지 마라. 교회가 있는 것이 곧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다. 성전이 있는 것이 곧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 멘트하고 똑같이 갑니다. 그러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줬던 역사를 유지해야 돼요. 역사를 유지하게 되면 교회의 역사가 전통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14절에 ‘유전’이라 하는 거예요. 그 전통은 조사해보면 그 내용이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집사들 뽑을 때는 과반수이상, 목사를 뽑을 때는 세례교인 삼분지 이 이상이 찬성하게 되면 목사가 되고, 목사를 계약직으로 하지 않고 종신직으로 하려면 위임목사가 되어야 되고, 계약직으로 하려면 매년 공동의회를 열어서 해야 되는데 공동의회가 1월 첫 주 오늘입니다. 

오늘 공동의회 여는 날인데 공동의회는 세례교인만으로 해야 되고 세례교인 아닌 교인은 공동의회 할 때는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 그 멘트 하나하나가 전부 다 법적이에요. 법으로 되어 있다니까요. 거기서 수십 년 동안 대를 이어서 2대, 3대째 계속 교회를 다니다보면 몸에 배겨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을 알고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인지 아닌지의 절대적 기준이 생겨져요. 기독교가정의 전통적인 기준이 생겨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오늘은 공동의회다. 오늘은 고난주일이다. 오늘은 맥추주일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봉투 돌리는 날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뭘 해야 된다. 오늘은 송구영신예배가 있다. 반드시 함에 돈 넣어야 된다. 일 년 예산이 또 있고. 

예산 이야기 나오니까 또 예산 맡은 장로님과 집사님 욕하는 거 아닙니다. 그런 것이 마치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주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취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 하니까 여러분 표정이 어떤 표정이냐 하면, ‘목사님, 귀한 설교시간에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지금 몇 분이나 계속 하고 있습니까? 그거 우리 다 극복하고 온 사람들이니까 그 이야기 하지 말고 딴 데 갑시다.’ 하는데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유대교 이야기하고 있고, 전통 이야기하고 있고, 혈육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통이야기 했고, 유대교 이야기 했습니다. 진도 나갈까요? 그러면 그 다음 이야기 혈육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기서 긴장하셔야 돼요. 

요한복음 1장 11절부터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다음 13절에 보게 되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지금 이러한 요한복음의 문장은 그 원형을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돼요. 잘 믿는 사람, 대대로 집안 좋은 사람 찾지 마세요. 3대째, 5대째 기독교집안에서 찾지 마세요. 믿음 좋은 어떤 장로나 목사한테서 찾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사람에게는 한 마디로 귀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은 죽음을 삶 안에 위치할 수 없는 그런 현실판이라는 겁니다. 죽음을 삶이라는 것, 이 삶 안에 위치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판을 인간은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총집합 말고 죽었는데 여전히 살아계신, 누구보다도 더 살아계신, 우리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우선되어서 살아계신, 그 살아계신 분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되어지는 새로운 현실판을 설립하고 그것을 팽창시키고 확장시키는 작업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이것은 자리문제입니다. 소속문제에요. 참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람이 혈육과 끊었다는 말은, “혈육과 끊어진 채로 태어난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라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거든요. 부모님이 태어나게 하지 않았는데 여기 살아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에요. 

얼마나 이게 어려운 말이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자기 모친이야기를 언급합니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날까요, 라고 해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영으로 와야, 영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육과 영 사이는 연결점이 없다는 것을 그 사람들만이 안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서로 엮이려고 하고 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이라는 이름으로 친해지려고 하고, 이렇게들 엮이려고 하는데 인간 대 인간의 모든 관계는 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그 둘을 완전하게 결합시키는 매개체, 연결체가 없어요. 연결방법이 없다니까요. 인간 대 인간은.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같이 잠을 자도 딴 꿈을 꾼다고요. 한 몸이 될 수가 없어요. 부부도 한 몸이 아니에요. 자식도 한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 아닌데도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조건 내 사람으로 삼키겠다는 인간의 야욕을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오늘 날씨가 춥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날씨 춥다고 하니 너는 무조건 춥다고 동의해.’ 그런 뜻이잖아요. 그런 뜻이에요. 

인간의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 했습니다. 언어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무심코 내뱉는 모든 것은 듣는 사람에게 명령질을 하는 거예요. 그 명령질이 뭐냐 하면, 네 의미를 끊어버리고 내 의미에 통합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돼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누군가를 확인하겠다는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을 때 비로소 내가 된다는 겁니다. 

이 무슨 되도 않는 일방적 주장입니까? 내가 남에게 인정받아야 되고 내가 남에게 사랑받을 때 비로소 나는 숨 쉬고 살겠다. 결국 이 말은, “세상 모든 사람이여.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라.” 그 이야기잖아요. “세상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여! 나를 위해서 존재하라.” 하여튼 선악과 안 따먹은 줄 알고 따먹은 티를 다 내요. 따먹은 티를! 

“너 나 인정 안 해줘? 이러려면 헤어져.” 그러려면 헤어지겠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인간이 먹는 것을 이야기해요.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거기서 자기를 위한 현실판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파전에 밀가루를 부으면 파전이 넓게 펴지잖아요, 중력에 의해서 퍼져나가듯이 자기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 자기영역을 계속 확장해나가요. 

확장되는 그 몸이 애초부터 꾸역꾸역 뭘 먹어요. 먹는다는 말보다 처먹는다는 말이 적절해요. 뭔가 자꾸 계속해서 처먹고 있는 거예요. 처먹고 힘이 나서 나를 인정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친구 삼으려고 돌아다니고. 예, 아멘,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60넘어서, 70넘어서 동창생한테 전화오거든 그것은 백발백중 혼자 술 먹는 맛 안 나서 술 먹자고 전화 오는 거예요. 

술 먹기 위해서 전화한 거예요. 50넘어서 친구 찾는 것은. 술친구 하려고. 자기영역확장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반격은, 예수님의 복음은 간단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와요. 요한복음 6장이 성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 이 이야기 듣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개인적 의견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6장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한쪽은 꾸역꾸역 고기 뜯어 먹고, 치킨 먹고, 피자 먹고, 밥 먹고, la갈비 먹고 있는데 한쪽은,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해요. 

같은 먹는 행위에요. 같은 먹는 행위. 그런데 이쪽은 먹으면 그게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의 실체를 폭로하는 그 짓거리가 맛 집 찾아다니는 거예요. 윤선생 식당이 어쩌고, 또 강식당인가, tv켜면 전부 먹는 이야기에요. 먹는 행위라는 것은 죽는 행위라니까요. 먹어서 그 다음에 뭐할 겁니까? 또 자기사람 포섭하려고 할 거예요. 

그런데 이쪽은 뭐냐 하면, 내 살과 내피를 먹으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는 거예요. 이쪽이 생명이 있다는 말은, 다른 이쪽은 먹는 행위로 죽어 있다는 것을 티내고 있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는 말, 식인종도 아니고 요한복음에 왜 그런 말씀이 나오는가? 

이 말씀을 딱 보게 되면 여러분은 일거에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교회 제직회를 어떻게 하고, 일 년에 몇 번 봉투 돌려야 되고, 예배당은 어떻게 지어야 되고, 주차장은 몇 평 되어야 하고, 이런 모든 것이 모조리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지금껏 했던 교회 다니기가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지옥 보내는 행위를 본인이 원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새로운 현실팽창이거든요. 자기중심의 현실팽창. 인간의 현실세계에서는 죽은 자는 거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죽은 자는 멀리 치워버려요. 산사람끼리 굴러 돌아가는 것이 문명이고 문화라 하는 겁니다. 그게 과학이에요. 산사람끼리.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가지고, 혈육으로 좆아 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오신 그분이 죽음,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현실판 한 가운데다 죽음이라는 것을 장착을 시켜버립니다. 

그 죽음부터 새롭게 파장이 퍼져나가면 그게 생명의 퍼짐이에요. 참 인간을 이렇게 보게 되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거의 23시간 정도는 뭐하느냐? 멍청해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일하면서도 멍청하고요. 제가 내당 3동에 있을 때에 집에서 하는 가내공장들이 있는데 아줌마들 예닐곱 명이 지하실 먼지 나는 곳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그걸 제가 보고 느낀 점이 뭐냐? 그들이 한 열 시간 이상 일하는 것 같아요. 종일 라디오가 틀어 있어요. 엠비시 라디오만 계속 듣고 재봉틀만 밟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멍청해요. 이것은 판사도 마찬가지고, 의사도 마찬가지고, 교사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멍청해요.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이게 죽는 일인지 사는 일인지. 

그게 뭐냐? 기존의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의미가 내 안에 응축되어서 그래요. 의미가 응축된 것, 아까 인간의 몸은 물결이고, 생각은 아지랑이고, 느낌은 거품이라고 했지요. 거품, 아지랑이, 물결, 그리고 풀, 바람, 이 모든 것은 성경도 같이 사용해요. 인간의 언어는 응축되고 압축되지 아니하면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따라서 인간이 성경을 백독을 해도 이것이 응축되고 함축되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성경을 백독을 해도 백번을 멍청한 채로 봐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뭐야 이거? 이게 뭔데? 갈라디아서 이 말이 무슨 뜻이야?’ 몰라요. 오늘도 일독 했다. 그렇게 끝나버려요. 성경 보라고 해서 계속해서 성경 보는데 성경 보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멍청한 채로 성경을 계속 보고 있는데. 

성경은 보는 게 아니에요. 보이는 거지. 성경은, 비로소 말씀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뭐냐?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어 있으면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죽은 자가 내 사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십자가의 살아 있음이에요. 

그 십자가가 살아 있어가지고 십자가가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삶의 영역을 계속 팽창해 나가는데 파도치듯이 물결이 파동으로 나오는데 그 물결에 우리는 휘말린 거예요. 휘말리다 보니까 주님이 우리가 이 땅에 살도록, 죽어도 괜찮은데 살도록 주께서 그렇게 시킨 거예요. 성경 보는 것도 성경 보라고 시킨 것이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라고 시킨 것이고, 교회 나오는 것은 교회 나오라고 시킨 거예요. 자꾸 뒤에서 떠미는 거라니까. 

자주 가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유럽에 가보면 분수가 있어요. 제가 로마에 간 적이 있는데요. 분수를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그 분수에 작은 공이 있다면 그 공은 어떻게 움직일까. 그것은, 분수가 사그라들면 공도 같이 내려갔다가 분수가 쫙 하고 뿜어내게 되면 공도 같이 엄마야, 하고 같이 허공위로 올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이 분수고 성도라 하는 것은 그 위에 얹힌 탁구공이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형편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런 조로 보면 성경 다 풀립니다. 복음으로 보게 되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에 취하라는 뜻인데 우리교인들은 하도 믿음이 좋아서 술 먹어본 적이 없어서 제가 설명하기가 굉장히 난감~합니다, 지금. 참 난감해요. 술 먹어본 적이 없어서. 술 먹어본 적은 있겠지만 술 취한 적이 없어서 난감한데 하지만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헤롱헤롱해요. 

그것을 두고 보통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오줌 눌 데다가 안 누고 담벼락에다 누고, 꽥꽥거리고, 헤롱헤롱해요. 술 먹는 이유가 그런 상태에 돌입하기 위해서, 그것을 노리고 술을 먹거든요. 취하지 않으려면 술을 미쳤다고 먹습니까? 돈 내가면서, 세금까지 바쳐가면서. 

그 취한 상태에서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 헤롱헤롱이 갑이 되고 내 몸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술 취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령에 취하는 것이 뭐냐?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인데 똑같이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지. 어느 노래에 나와요. 술처럼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성령에 취하면 거기에 대해서 어떤 기대나 고대하는 바나 희망이나 이걸 접어버려요. 

성과나 결과에 대해서 본인이 접어버립니다
. 생각 안 해요.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이것이 바로 죄군요. 내가 소망하는 이게 바로 죄군요.’ 주신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게 분수위에 있는 작은 탁구공 같은 심정이에요. 성령,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이거든요. 그러니까 부활했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다 그런 말이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누가 시키더냐?” “십자가에서 시키더라.” 십자가에서 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죽음, 죽음이 나름대로의 새로운 현실판을 구성해 나가는데 내가 그 파동에, 그 바람에 말려들어갔어요. 

성령을 요구한적 없는데 성령이 와서 나를 덮쳐버리고 나를 삼켜버렸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나의 땅의 뿌리는 완전히 뽑히고 분수대의 물로서 위아래, 위위아래, 위아래, 주께서 수위조절해가면서 인생을 자기 원하는 대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네가 판사가 되라 하면 판사가 되고, 네가 교사가 되라 하면 교사가 되고, 네가 사업하다 망하라고 하면 망하고, 부도나라면 부도나고, 독감 걸리라고 하면 독감 걸리고, 전부 다 주께서 조절하기 나름인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유대교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이렇게 해서 천국 왔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자기소개, 자기증거, 남에게 “나도 이렇게 대단한 신앙입니다.” 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반면에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예수님만 증거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오게 되면 ⃞다. 그 네모 안에 뭐냐? 오직 나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 증인 되는 겁니다. 이미 네가 귀신이라는 거예요. 이미 네가 죽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죽음을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그 죽음을 반복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의 육이라는 탁구공을 가지고 계속 혼쭐나게 하시지요. 정신 나가게 만듭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정신 차려야지’ 하는 정신은 이런 뜻이에요. 육신이 살면서 갖고 있던 그 상처를 정신이라고 해요. 상처가 생겨버리면, 트라우마가 생겨버리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고상한 것으로 덮는데 급급합니다. 그것을 정신세계라 해요. 

그 정신세계에 교회생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뜯어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요? 어릴 때의 상처가 들어 있어요. 분에 받친 것, 세상을 보고 분통 터뜨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상한 용어는 다 동원시켜서 맨홀뚜껑 덮듯이 덮어요. 

주여, 내 상처가 이렇게 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성령의 역사, 십자가의 피, 이러면서 맨홀 뚜껑으로 덮는데 그 맨홀 밑의 메탄가스를 어떻게 다 덮을 수가 있습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주님이여, 이런 어려움은 두 번 다시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억누르고 있는데. 이번 수련회도 그렇게 억누르고 있는 사람이 한 둘 오는 게 아닐 거예요. 많이 올 거예요. 

수련회 참석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가지고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데 나중에 똑같은 현상이 터져버리면 30년, 40년, 장로, 목사, 신앙생활 한 것 맨홀뚜껑은 공중에 날라 가버리고 에이 씨, 다 도루묵이 되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동안 교회 다닌 것도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존재증명 하기위해서 교회 다닌 거예요. 

신앙 좋은 거 가지고 남에게 자랑질 하고 인정받으려고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십자가가 고마운 것은 바로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죄가 점점 더 나타난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미국에서 어떤 분이, LA에 계신 분이 메일로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감리교회인데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렇게 했어요. 

김정은도 인간이니까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목사님, 맞습니까?” 답변을 아니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분이 꾸준히 몇 년 동안 복음을 들었던 거예요. 이 복음이 해답이거든요. 해답만 본 거예요. 해답만 자꾸 보다 보니까 응용문제에 약해요. 막상 복음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데 실제에 맞닥트리니까. 김정은도 인간이니 사랑하라 했다고 호세아를 가지고 그런 설교를 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동성애자도 인간이니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이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얼마 전에 동성애문제로 질문하신 분이 있어요. 심각하게. 답변을 해 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이 이미 들어온다는 말은,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 이 땅에서 하나님한테 버림받고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가 새로운 현실을 장만합니다

하나님한테 버림 안 받으려는 것이 유대교거든요. 그게 기독교잖아요. 하나님한테 버림 안 받고, 사람에게도 버림 안 받겠다는 그것과 대조해요. 대비를 하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버림 안 받고 하나님한테도 “하나님, 저 어때요?”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인간에게 인정받으려는 그 버릇, 그 개 같은 버릇을 그대로 하나님한테 이어서 하나님도 나를 인정하고 예수도 나를 인정하기를 바라는데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것과 결부시켜서 나오는 그 모든 사랑의 모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탄의 짓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을 딱 놓고 서로 다른 통, 천국과 지옥으로 갈 통에서
각기 두 개가, 어떤 설교가 서로 대척이 되고 대조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말씀 준 거예요.
그 이웃사랑의 대표자가 유대교입니다. 구제정도가 아니에요. 자기를 학대해서, 더욱 어렵게, 사랑을 하더라도 더 어렵게어렵게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하는 거예요. 

백날 희생하고 백날 어렵게 해도 그게 결국은 자기 존재의 소유로 옵니다. 자기증명이에요. 자기증거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그것은 그 세계에 들어가면 그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그쪽에 도사들이 있어요. “돈 몇 푼 줬다고 그것도 사랑이야? 나는 간 떼 줬어.” 그렇게 자랑하는데 뒤통수 때립니다. “간 떼 준 것도 사랑이야? 나는 문둥병자 씻은 물을 마셨어.” 

이게 천주교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요. “문둥병 손 씻은 썩은 물을 마셨는데 그런 물 마실 수 있어?” “졌습니다.” “어딜 까불고 있어.”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마귀가 거기서 “더, 더 해야지. 더 어렵게 해야 되고 더 아프게 해야지. 네가 편하게 했잖아. 네가 수월하게 했잖아. 그래가지고 영광되겠어? 더 심하게 해야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이조 해야지. 십의 삼조도 해야지. 다 바쳐야지. 과부처럼.” 

얼마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잘남을 하나님한테 인정받으려고 할 때 마귀는 여러분 곁을 평생 따라다니면서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상처가 아파서 교회 와서 더욱더 기도하게 될 것이고 맨홀뚜껑 가지고 자기의 허접한 것을 감추려고 그 짓을 하면서 계속 마귀에게 또 시달릴 겁니다. 

성경 한 장 더 보고, 기도 더 하고, 가족전도 더 할 것이고. 결국은 악마의 독감 걸려서 교회도 못나옵니다. 천국에 못나오는 거예요. 그 짓 하다가. 오늘 못나온 사람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요. 뭐냐?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좀 미안해하세요. 이 긴긴 이야기 딱 간추리게 되면, 좀 미안해하세요. 이런 법 저런 법 하나도 안 지키고, 그저 내 성질대로 살았는데 천국 가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택정했는데 나보고 그렇게 멱살 쥐지 마세요. 나도 그냥 뿜어 나오는 분수의, 성령님위의 탁구공일 뿐입니다. 주의 계시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 사도 짓 하고 있습니다. 왜? 거기는 나보다, 여러분보다 현재 주님이 더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은 주님 안에서 죽은 거예요. 그러나 주께서, 죽어 있는 분이 정말 살아 있다,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지금 한조각의, 모자이크의 일부로서 우리는 임시땜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행동 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행동인 것을 알고 이제는 도리어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실컷 하면서도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이 자유함이 사탄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도록 주께서 복음으로, 십자가로 늘 우리 코앞에 크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