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삼층천(고후12;1-4) 1710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1. 19:07
2017-10-01 12:36:48조회 : 24         
   삼층천 17100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삼층천(고린도후서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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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10-01 13:24 
삼층천 

2017년 10월 1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1-4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숱한 험난 인생을 보내었습니다. 남들이 봐서는 “도대체 얼마나 신앙생활이 엉망이었으면 하나님께서 인간되라고 그런 저주스러운 징벌을 주었겠는가 더 터지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통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내부 행위자는 사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요소가 있습니다. 생명의 요소입니다. 지금 사도는 대리자에 불과합니다. 이미 성립되는 영적 세계에서 배역을 맡은 것 뿐입니다. 본인이 고생해야 남들이 참 사도라고 알아줄 것이라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길에 접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속해 있는 세계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접촉 불가’의 영역입니다. 요한복음 20:17에서 예수님께서는 “날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처벌입니다. 보편적으로 저주가 임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입니다. 배후에 악마가 있어 갖고 놉니다. 

사도가 다메섹에서 죽을 뻔한 것도 악마가 사도 바울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겉으로 드러난 세상의 질서를 탓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자리잡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주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운영하는 악마의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인간 위주의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인간들은 이미 선악적인 인식이 기본이기 때문에 율법이나 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금지 조항’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자체적인 금지 조항을 만들어 기어이 궁극적으로 ‘선을 넘지 않았음’을 생산해야 내고자 합니다. 

쉬운 예로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5:21-22에 보면,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다음과 같이 변명의 연쇄고리를 유발합니다. “나는 그 사람은 미워는 하지만 있는 면전에서 욕설은 안했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나는 그 사람에게 욕은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은 죽이기는 했지만 우발적이지 결코 계획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을 계획적으로 죽이기는 했지만 나도 같이 상처를 당한다는 취지에서 주먹으로 때려 죽였지 칼로 찌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은 칼로 찌르기는 했지만 연발로 찌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을 연발을 찔렸지만 깊이가 5cm를 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은 깊숙하게 찔려죽었지만 그래서 시신을 후 훼손하지는 않았다” 라는 식으로 기어이 일말의 의로운 요소가 자기에게 남아 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겹겹한 율법층은 모두 율법에 준해서 저주가 주어지게 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갈 3:10)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전혀 자기 생각이나 자기에 대한 주목을 안 하고 있습니다.
먹먹합니다. 그곳은 금지가 없는 곳입니다. 


더 알 것도 없고, 그 나아가야 될 세계도 없습니다. 더 답변할 것도 없습니다. 아쉬워할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습니다. 남에게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그리움도 없습니다. 이런 삼층천 또한 행위자는 사도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를 삼층천에도 보내시고, 굶고, 헐벗고 춥고, 도적의 위험을 겪게 하고 자연의 위험도 겪게 하십니다. 

이 모든 정황은 사도 바울 본인이 선택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점은 악귀도 인정합니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악마도 사도가 어떤 존재인 줄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악마가 추적 체포해서 사형시키듯이 사도 바울도 이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인간 세계가 숨기고 싶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공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는 인권과 인류애과 세계 평화와 이웃사랑과 평화와 평등과 정의구현을 외칩니다. 하지만 악마는 복음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차단하고 박멸하려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애굽’으로 굳어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흔히 ‘애굽에서의 탈출’이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도리어 이 세상 전부를 ‘애굽화’하는 것이 구원작업의 필수요소입니다. 구약 때,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이 율법이 주어지므로서 그 이스라엘 자체가 단단한 영적 애굽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이란 콘크리트의 굳음 속에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발을 빼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5에 보면,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 속에서 ‘행위자’로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실 일을 다윗을 입을 통해서 미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서 구원의 자리를 차지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호소하는 대목입니다. 그 호소가 무사히 응답이 되어서 사도행전 2:35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주의 오른편’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3-36) 

즉 예수님의 위상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옮겼는데 이 오른편의 자리는 출애굽기 15:6에 의할 것같으면 애굽을 쳐부수는 기능이 발휘되는 자리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몽땅 ‘주의 원수의 나라’로 통합하시고 묶는 작업을 벌이신 겁니다. 

따라서 이는 하늘 차원에 몸에 장착된 자가 바로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복음의 영광’ 상태입니다. 율법의 영광도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쓸 정도로 대단하지만 ‘복음의 영광’은 더욱 대단합니다.(고후 3:7-8) 그 현실성을 사도 바울에게 보여준 겁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진행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주변 관계에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관계만 남기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생각에 너무 몰두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10-01 23:01:56조회 : 16         
257강-고후 12장 1-4절(삼층천)1701001-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49.39.140)

257강-고후 12장 1-4절(삼층천)17010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1절-4절입니다. 신약성경 298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1-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바울이 지난 시간 본문에서 보니 고생 많이 했지요. 고생 많이 했는데 고린도후서 11장에 죽 보게 되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 


잠도 못 잤어요.
 “주리며
목마르

여러 번 굶고”

일용할 양식도 없었어요. 주기도문도 몰랐던 모양이지요.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도 안줬어요.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세상사람 같으면요, “대체 당신이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이런 저주를 다 받느냐?” 이렇게 핀잔했을 겁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누가 이런 시련을 당하고 이런 저주스러움을 당한 사람을 표준적 모델로, 신앙의 모델로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너 회개해라. 네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런 모진인생을 사는 거야. 그렇게 모진 세월 보낸 거야. ㅈㅈㅈ……” 이렇게 혀 차면서.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던 사람인 예수님을 그 누구도 못 알아 봤듯이 오늘날 이 사도바울조차도 과연 주와 함께 있는 진짜 사도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했어요.

고생을 해도 너무 하는 거예요. 너무하다, 할 정도로 사람을 골병 들여 버립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환란과 핍박,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내게 준 그리스도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했거든요. 그리스도사랑이라는 것이 숨어 있어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환란과 핍박이 와서 이게 들춰져야 비로소 눈에 띄는 것. 

그냥 건성으로 교회 와서 찬양한다고 그게 그리스도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제가 전에 봉화에 갔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봉화척곡교회에 간적이 있습니다. 토착교회라 해서 107년이 된 교회인데 그 교회에 우리가 찾아갈 때는 단지 사진 찍으러 갔고 우리교회에 사진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것은 못 들었어요. 

나중에 유튜브로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니 장로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받으십니다. 빈 그릇을 준비해서 성전에 가까이 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시면 그 빈 그릇에 하나님이 가득 채워주셔서 주십니다.” 이게 설교요지였습니다. 그 장로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척곡교회 일어설 줄로 믿습니다. 다시 부흥될 줄로 믿습니다.” 이걸 90된 노인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짝 올렸던 그 기도 빈 그릇에 “주여, 태장을 맞게 하시고, 강도의 위협, 도적을 맞게 해주시고, 굶주리게 하시고 춥게 하시옵소서.” 라는 그 내용을 왜 기대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에서 그게 진짜 사도인데. 진짜 주의 종의 모습이 그거거든요. 거기다가 지난 시간에 했듯이 11장 32절에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어요. 광주리탈출사건입니다. 혼났어요, 사도바울. 이 세상이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온 유대사회가 예수님 하나 못 죽여서 환장을 한 것처럼 사도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왜 사도를 죽이려고 했는가? 사탄의 창자, 내장을 쥐고 잡아당겼거든요.

겉으로는 온유와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인류애와 인권과 평등, 껍데기는 전부 다 고상한 가족애, 눈물 나는 인류애, 이런 것들로 치장했지만 세상의 그 바닥을 뜯어보면 그 안에 전부 다 사탄이 쥐고 있으면서 사탄은 이 세상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차단시키고 복음을 박멸하고자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도바울은 가짜 예수가 아니고 진짜 예수를 전하면서 사탄의 내장을 노출시켰어요. 노출시키고 도망치니까 사탄의 졸개들이 “잡아라, 저놈!” 하고 쫓아온 겁니다. 치매환자보고 tv를 끄라고 하니까 리모콘으로 끄면 되는데 어떻게 끄는가? tv뒤에 선들이 있잖아요. 선들을 확 잡아 당겨버렸어요. 겉에 드러난 이 세상. 가족명절이다. 친하게 지내자. 우정이 어떠니, 사회정의가 어떠니, 이웃사랑이 어떠니, 하는 그런 것들, 서로 돕고 지내자는 그런 것들.

그러나 그 뒤에는 전부 다 사탄의 창자와 내장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진짜 예수를 못 전하게 해요.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광주리 타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게 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그 행위자가 누구냐? 그 행위자는 사도바울 본인이 아닙니다. 그 본인과 함께 행동하는 자, 또는 사도바울과 함께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그리스도적 요소’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에게는 생명의 요소, 그리스도적인 요소, 행위자가 따로 있어요. 그 행위자가 세상의 밑에 깔려 있는 더러운 것을 노출시키는 작업에 이 사도바울을 교회에 파견시킨 겁니다. 그것도 교회에 파견시킨 이유는 교회를 이미 악마가 쥐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의 복음을 들어야지 교회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정상이지요. 사도가 복음을 가지고 오기 전까지는 전부 다 자기가 정상인 줄 압니다. 사도가 이런 시련을 당하면서 세상은 배후의 악마에 의해서 조성된 현실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세상은, 모든 것은 용납하되 세상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욕하는 그것만은 용납은 못하겠다는 식으로 “잡아라, 저놈!” 하고 추적한 겁니다.

자기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누가 결정해야 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세상을 쥐고 있는 사탄, 악마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결정지어야 돼요. 악마의 말을 들어야 돼요. 악마의 말을 듣고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결정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 악마의 말이 사도행전 19장 15절에 나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악마가, 악귀가 이야기합니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왜 비정상이면서 정상적인 척을 하고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악마가 말하기를 “너 신자 아니야. 왜 이래. 신자흉내 내지 마. 교회 왔다고 신자 아니야.”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교회에 온 성도가 기도하는 내용이나 소망하는 내용이거나 기대하는 모든 내용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면, 그것으로 신자라고 우긴다면 “아이고 인간아, 차라리 죽어라.” 그 말입니다.

차라리 죽지 그래가지고 교회 왜 다니느냐는 말이지요. 자기 문제 해결하려고, 자기가정문제 해결하려고, 눈에 보이는 사업 잘되려고, 자기 몸 하나 건강해지려고, 이 세상의 그런 것을 원하고 교회 왔다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교회 왜 오느냐 그 말입니다. 거기에다 오늘 본문까지 추가하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교회에 왔으니까 천국 넣어주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너도 똑같아. 너도 혀 깨물고 죽어.” 교회 나왔다고 천국가고 그런 것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천당 가고, 그런 것은 없어요. 예수 믿고 천당 가고자 하는 사람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와 있는 대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이걸 원하겠습니까?

조용하게 살고 싶지 이걸 원하겠어요? 나 예수 믿는다. 조용하게 살다가 천당 간다. 이걸 원할 거잖아요. 자기 몸 편 하려고 교회 왔는데, 자기 몸 편 하려고 천당 가는데 그게 어떻게 사도바울이 말하는, 심지어 마귀도 알아주는 그 사도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가짜지요, 가짜! 그거 가짜인 거예요.

내가 원해서 교회 왔다. 천국 가는 것은 내가 원해서 천국 간다.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원해서 믿는다. 성경에는 일체 그런 것은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언급하는 것은 그겁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해야 돼요. 내가 원하지 말고. 주님이 원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 길도, 좁은 길도 우리가 헤쳐 나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한 순간 한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전부 다 주께서 제거하고 지워버립니다. 왜 내가 천국가고 싶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그것이 왜 천국가지 못하고 지옥 가느냐?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나에게 주목을 하고 있고 내가 내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거든요. 수동적입니다. 이끌려갔습니다. 지가 소원한 것 아닙니다. 삼층천 가고 싶어서 철야기도 한 것 없어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나는 모르거니와. 그 사람도 몰라요. 어쨌든 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에요. 나중에 차후적으로. 사도바울 본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고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목을 안 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붕 뜬 상태에요.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이런 상태에요. 내가 왜 이 길로 가고 있지, 이런 상태에요.

내가 이런 계시를 왜 받았지,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왜 받았지,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이런 계시를 왜 주셨지, 이런 상황입니다. 지난 시간에 본 


광주리탈출사건이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하면서 한번 돌로 맞고, 이거 본인이 원한 것 아니에요

세 번 파선한 것, 본인이 원한 것 아닙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 이거 본인이 원한 것 아니에요.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본인이 원한 것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삼층천에 올라간 것이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에요. 


나는 고난 받는 그런 계시는 좀 뭣 해도 

삼층천 올라가는 계시는 갖고 싶다는 식으로 

음흉한 노림수 갖지 마세요.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나를 잃어버려요. 

자아, 셀프, 에고, 자기를 잃어버려요. 자기를 잃어버려줘야 

이 구원은 내가 원한 구원이 아닌 것을 본인이 소급해서 파악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좋은 나라 간다고요? 차라리 빨리 지옥가세요, 

그런 인간들은. 그래가지고 천국 못가요. 왜?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원하잖아요. 

이것은 장난치는 거예요. 성경가지고 장난치는 겁니다. 그것을 구원론 중심이라 해요. 

아까 마귀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야?” 한다는 말이지요. “너 누구야?” “제가 20년 동안 교회 다녔고 제가 신학교 나온 목사입니다.” 장로가 어떻고, 예배당 짓는다고 집을 두 채나 팔아서 돈을 냈고, 십일조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교회 출석했고, 금요철야기도 했습니다, 하면 주께서 “그거 왜 했는데? 그거 왜 했어?” “저 구원받으려고 했습니다.” “지옥에나 가라!”

왜 했는데? 그거 왜 했어! 돈 바치고 왜 했어? 교회 왜 나왔는데? 누구 좋으라고 나왔어요? 본인의 소원을 만족시켜서 본인 좋으라고 나온 거예요. 수십 년 헛짓 한 거예요.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이런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제가 수백 번 이야기를 했어요. 교회 올 때 내가 왔습니다, 하지 말고, 내가 선택해서 왔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밀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가야 돼요.

주께서 때가 되매 보냈습니다, 혹은 오늘 교회 가고 싶은데 차가 펑크 나서 때가 되매 주께서 못 오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라는 말이지요. 절대로 성도는 누구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거 아주 나쁜 버릇입니다. 주님한테 미안해하고 다른 사람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해 한 만큼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인간이란 티를 팍 내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나도 없는데 누구한테 미안해요? 나도 나한테 신경 안 쓰는데 누구한테 미안합니까? 내가 누구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나한테 잔뜩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에요. 초반부터 복음 나갑니다. 인간은 가짜 예수 밖에 믿지를 못해요. 다른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 고린도후서 11장 초반에 그걸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11장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뭘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너희들이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을 되게 좋아한다 이 말이지요. 예수, 성령, 복음 이야기 한다고 해서 그거 진짜 아닙니다. 그거 가짜입니다. 그 안에 자기 좋으라고 예수 믿고 교회 나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이익 되라고.

온 천지 교회가 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거기다가 진짜 악귀도 알아주는 사도바울을 싹 보내버렸다는 말이지요. 보내니까 그렇게 예수 좋아하고 복음 좋아하고 성령 좋아하다가 “저 놈 잡아라.” 저놈 때려죽이라는 거예요. 들통 팍 난 거예요. 그 이유가 이런 거예요. 주님께서 예수님 보내기 전에 율법을 보냈거든요. 이 율법이란 법입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인간을 금지하는 요소가 들어 있어요. 금지하는 요소. 사람들은 이 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자기 안에 금지의 경계선을 만들어요. 치사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한 변명을 계속 늘어놓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밉다는 말이지요. 분명히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 했지만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직장동료가 있다면, 나는 직장동료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내가 욕은 안했다, 이렇게 해요. 금지를 스스로 해놓고 ‘그래도 내가 다소 착하잖아.’ 이걸 유지하는 식으로 자기금지까지 물러가요. 그 다음에 욕은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더 나갑니다. 내가 죽이기는 했지만 계획적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경찰서에 가가지고.

그 다음에, 내가 계획적으로 죽이기는 했지만 주먹으로 쳤지 칼로는 안 죽였다는 거예요. 또 금지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나는 한번만 찔렀지 여러 번 찌르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금지 들어가요. 찔러도 5센티 깊이로만 찔렀지 10센티까지 깊이 찌르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는 시신을 존중했지 훼손까지는 안했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저지른 예를 들었는데 여러분이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세요. 그 행동에 어떤 식으로 여러분은 변명해 왔습니까? 계속 후퇴하고 주춤주춤 물러가면서 자기가 그래도, 그래도 나는 착하고, 그래도 나는 양심 있고, 그래도 나는 인간답고, 그래도 일말의 의미는 있고. 계속해서 금지라는 그 동굴 속으로 도피하고 또 도피하는 겁니다. 왜? 마지막 자존감만큼은 건지려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 온다고 딱 왔거든요. 목사가 예수 전하고 복음 전하고 성령 전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교회 나왔잖아요. 안 나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교인이잖아요.” 또, 다른 사람은 교회 와서 점심만 먹고 가는데 나는 점심값 하라고 천 원짜리 낸다고, 다른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참석하는데 나는 두 번 참석한다고.

계속 자기 자신에게 율법을 만들어서 끝까지, 나는 그래도 인간 말종 아니라는 것, 막가지는 않았다는 것, 이제 막산다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은 이유를 알겠지요? 막가지는 않았다는 것, 엉망진창은 아니라는 것. 계속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갑니다. 그래도 신앙생활 요새는 자주 못 와도 옛날에는 교육관 지을 때 20만원 낸 적이 있다고.

돈은 많이 못 내지만 아침에 와서 이것은 다 닦았다고. 피아노 반주는 했다고. 또 오후까지 담당 했다고. 계속해서 자기의 의로움과 자기의 남은 자존감 속에 하나님 앞에 드릴만한 착함을 쏙 집어넣어요. 그걸 장착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죽으면 안 되고 나는 엄연히 버젓이 살아 있어야 돼요. 끝까지 남아있는 나의 자존감이 들어있는 주머니거든요. 복주머니에요.

나는 이렇게 망가져도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은 가졌다는 이것. 교회는 안 나와도 세월호에서 죽은 애들에게 내가 위로의 마음은 가질 수 있다는 이런 것. 차라리 인간은 죽는 게 나아요. 더 살아도 소용없어요. 

사도바울이 광주리타고 탈출했을 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야, 사도 참 멋지다. 저렇게 고생했으니까 사도구나. 우리는 뭐냐. 아무것도 아니야. 저렇게 고생하니 진짜 사도답다. 광주리에 탈출시켜서까지 하나님께서 구사일생으로 살렸구나.” 이렇게 감상하듯이 사도바울을 격려하는데 그것은 전혀 지금 그 사도안의 행위자, 그리스도적 요소를 몰라서 그래요.

생명의 요소가 행위자입니다. 사도바울이 행위자가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이래야 사도답다 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거든요. 주의 뜻이면 골프 치라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주님이 원하면 골프도 치고 노래방에 가시라고요. 그냥 고난 받는다 하지 마시고.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한 인생이냐, 주님이 원하는 인생이냐를 분명히 하라 이 말입니다. 이 고난의 절정이 뭐냐? 나도 누군지 모르겠고, 그가 누군지를 모르겠고, 나는 삼층천에 올라갔다. 그러니까 삼층천에 올라간 그 기적이나 광주리탈출사건이나 동일한 기적이에요. 광주리 탈출은 아슬아슬하게 했고 삼층천은 느긋했고, 그거 아닙니다. 

둘 다 그 주체적 행위자는 사도바울이 아니에요. 애들 문방구에 파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훅 하고 불면 입구에서 작은 공이 공중에 뜨잖아요. 공중에 붕붕 뜨지요. 그 뜨인 공이 사도바울이고 주님은 확 불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는 삼층천, 이번에는 광주리탈출, 이번에는 도적의 위험……. 천국이라는 곳은 본인이 원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본인이 원해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집어넣는 것은 결국은 인간들은 어떤 경우라도, 악마가 인간 자아를 앞장세워서 계속 열심히 헌신하고 순종하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섬기고 복음 믿고 예수 믿으라고 격려하다 보니,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의 행함이 들어 있는 이 지갑, 주머니를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이걸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문제는 나인데. 내가 문제거든요. 정말 여러분이 성령 받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도 싫고, 돈도 싫고, 나도 싫고, 금지가 없는 곳, 그 어떤 금지도 필요치 않은 곳, 얼마나 더 알아야 될 필요도 없는 곳, 더 헌신하거나 기도하거나 그것도 필요 없는 곳, 자기가 관리하는 것도 싫고, 더 가고 싶은 것도 없고, 떠나고 싶은 것도 없고, 돌아올 곳도 없고, 떠나가야 될 것도 없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상관없고, 더 질문할 것도 없고, 답변할 답도 없는 곳, 삼층천입니다. 그게 바로 삼층천이에요.

왜냐하면 나에게 주목을 안 하거든요. 내 생각을 안 하거든요. 주께서 훅 불어주니까. 그러면 사도바울로 하여금 성령 받아서 이런 표준적계시, 마지막 때 천국을 보여준 거지요, 이런 천국을 보여줬을 때 이런 천국을 보여주게 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게 중요한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 요한복음 20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접촉 불가에요. 내 몸 만지지 말라고. 애들 같으면 찌지, 찌지! 하듯이 내 몸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 대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나를 건드리지 말라, 네가 건드릴 잽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네가 건드릴 수 있는 그런 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하늘의 모든 완성된 차원을 예수님 몸에다가 담아버린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사도바울의 몸에다가 하늘의 완성된 영생의 차원을 담아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몸 밖에 있든지 몸 안에 있든지 상관이 없어요.

참 신기하지요.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 교회의 앞자리에 앉아 있다고 봅시다. 우리는 얼마나 개무시하겠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다고. 너나 나나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차원이 가득 들어 있어요. 우리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악마가 이야기해요. 예수도 알고 나는 바울도 알아줘요. 우리보기에는 동일한 세포로 구성된 보통 몸이지만.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서도 못 믿은 거예요. 지하고 같은 몸인 줄 알았어요. 하늘차원의 몸이다 보니 문을 닫아놓아도 문을 통과해서 그냥 “잘 있었느냐” 하면서 열두 제자의 모임에 와 버렸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과 함께 동행해도 옆집 아저씨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눈 떠보니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우리가 비정상이라고요. 정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생이 전부인 줄 알고 교회 다니면서 기도해도 이생의 것을 원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한다면 “주여, 이제는 내 필요에 의해서 주님을 믿게 하지 마시고 주께서 배역을 맡겨 주옵소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만지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는 주님의 하늘차원이 이 몸을 관리해서 하늘차원의 모습을 맘껏 드러내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야 돼요.

“그렇게 하게 되면 목사님,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한 번 돌에 맞지요. 그 다음에 세 번 파선하고, 굶고 목마르고 핍박을 받지요. 그러나 뭘 안다고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알지요. 이 몸이 보통 몸이 아니거든요. 오늘 본문 가지고 한 마디로 뭐냐? 이것은 말씀의 완성의, 복음의 영광이라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 복음의 영광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짧게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문자의영광도 이렇게 모세가 수건으로 가릴 정도로 영광스러운데 하물며 복음의영광은 얼마나 빛날까, 하고 그냥 말만 해놓았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말만 던져놓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사도바울이 14년 전에 복음이 주변에 둘러싼 그 영광은 정말 너무 황홀해서 4절에 보면, 인간의 말로는 가히 이를 수가 없다고 했어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영광이 너무 좋아서, 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도 생각이 안나요. 내가 죽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목숨과 바꿀 것이 없으면 사람이 겁을 낸다고요.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고요. 목숨과 바꿀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교회 나와도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요. 교회는 그냥 놀러 나온 겁니다.

목숨과 바꿀 것이 없다면. 그런데 그것을 내가 찾는다? 내가 찾는다면 나는 계속 있어야 돼요. 나에게 주목해야 돼요. 그러면 문제가 더 커져버려요. 주님이 원해야 되는 나라가 천국인데 내가 원한 천국은 있을 수 없는 나라에요. 왜냐하면 나는 비정상이니까. 정상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는데 합세했는데 무슨 정상이겠어요?

자 그러면 남은 문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영광을 사도바울에게 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한 대목이 나와요. 2장 25절입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게 시편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이야기가 다윗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이 말을 쉽게 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 내 우편에 계시다.” 했어요. 주님은 지상에 다윗과 함께 있어요. 다윗의 행위자가 주님이니까, 그리스도적 요소니까 다윗과 함께 있고 예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내 우편에 있는 겁니다. 땅에서 고난 받고 있는 중이에요. 땅에서 고난 받고 있는 중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편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4, 35절에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했어요. 왼편에 있던 주님이, 지상에 있던 주님이 오른편 자리로 옮겨버립니다. 옮기는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옮길 때 그냥 옮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성과와 더불어 그 성과를 움켜쥐고 오른편으로 옮겨버려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을 때 뭘 했느냐 하면,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거기에 오른 편이라는 말이 나와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왔거든요. 여기서 여러분이 해석을 주의해야 돼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출애굽이라 하는데 그 출애굽이 구원이 아니에요. 애굽에서 나온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애굽을 새롭게 영글어내어 만드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구원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지역적으로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네가 있는 자리를 영적 애굽으로 제대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 있는 곳에다 콘크리트를 붓는 거예요. 레미콘으로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자기가 딱딱해지겠지요. 딱딱해지면 못 벗어나잖아요. 

율법을 줘서, 율법이라는 콘크리트를 줘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금지한다. 나는 금지하지만 그래도 착하다. 나는 욕은 해도 죽이지는 않았다. 죽이기는 했지만 우발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율법에 얽매이게 해서, 율법에 꽁꽁 묶여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지지 말라는 그 자체가 뭐냐? 세상에 대한 처벌입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이고 저주하는 거예요. 네가 어딜 감히 나를 만져, 이 말은 보편적으로 모든 세상을 전부 저주해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된 몸을 만질 수 없다는 말은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이고, 이 땅 어떤 인간도 저주 속에 꽁꽁 묶여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을 제대로 애굽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 작업을 누가 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먼저 하셨어요. 마태복음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하게 하시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했어요. 

예수님의 가족은 애굽으로 가고 있는데 성경말씀은 호세아말씀을 인용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이동 경로를 통해서 호세아가 예언한 그 애굽이 제대로 애굽답게 예수님 하시는 일을 통해서 드디어 분명해지고 구체화된다는 겁니다. 빨리 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닌데요. 

사도바울로 하여금 광주리탈출 하게 했잖아요. 왜 삼층천을 본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 험한세상 꼴을 보게 하시는가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애굽이라는 것을 사도를 보내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조차도 자력으로 이 애굽, 콘크리트의 그 딱딱함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걸 벗어나는 것은 주님의 원함이지 사도 본인의 원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구원이 되지 않아야 돼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거든요. 불이 붙어야 할 제단에다가 물을 끼얹어버려라. 은혜 받을 어떤 여지나 소지도 아예 작살내고 자기신앙에 초를 치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걸핏하면 은혜 받을 짓을 해요. 그게 애굽이에요. 왜? 율법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행함은 곧 뭘 유발하느냐 하면, 심판과 저주를 유발하기에 그렇습니다.

설탕 있는 곳에 벌 달려들잖아요. 행함이 있는 곳에 일곱 귀신 다 달려듭니다. “더 해라. 더 해라. 잘한다. 잘한다. 헌금 더 해야지. 봉사 더 해야지. 충성 더 해야지. 주님께 순종 더 해야지. 잘한다, 잘한다. 잘하면 소원 이루어질 거야.” 일곱 귀신, 열 두 귀신 다 갖다 붙습니다. 자기자신에서 손을 놔버려야 돼요. 

왜? 정상이 아니니까. 미친놈이거든요 우리가. 미친놈한테 기대할 것이 뭐가 있어요? 꽁꽁 묶여 있는 애굽에서 유일하게 탈출하신 분이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만 그 왼편에서 탈출했어요. 그리고 탈출할 때 자기가 구원할 사람을 품고 주님의 오른쪽에 가버렸어요. 오른쪽이 어떤 자리냐 하면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런 자리입니다. 

여호와는 용사이신데(4절)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그 오른편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다녀도요, 추석 때라고 가족들 모여서 술도 한잔씩 하면서 아주 재미 져요. 아주 잘 먹고 잘 삽니다.

주님이 치는 것은 원수에요, 원수. 사탄의 내장을 뜯어내는 사도바울처럼 우리의 원수, 악마를 쳐버려요. 그것은 오른손이 있는 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른 손으로 쳤는데 쳤다는 신호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살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요. 

“아무도 할 수 없었다. 네가 구원받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도 네가 꼼짝 못하고 애굽 콘크리트에 박힌 모습이고 그렇게 구원을 사모하고 희망하는 것 자체도 악마의 욕망이었다. 그런 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이 십자가의 피 앞에 서라. 구원은 네 소원이 아니고 내 소원이다.”

예수님 소원이었어요. 왜냐하면 피를 알려준다는 것, 피를 알려줬다는 것, 내 피가 아니잖아요. 내가 알아서 흘린 피가 아니잖아요. 내 행함과 결부된 피가 아니잖아요. 전혀 내 행함과 상관없이 오히려 내 행함 때문에 내 의 때문에 죽으신 그 피가 나에게 들이닥쳤다는 말은, 구원은 주님만의 본인의 과업이었다는 겁니다. 

본인의 과업이었고 나는 거기에 초청받았고 거기서 한 배역을 맡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자기를 주목하고, 자기에게 신경 쓰고,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에 몰두합니까? 거울 보세요. “너 누구지?” 나도 누군지 모르겠고 그거 나는 질문할 것도 없고 답변할 것도 없고. 질문 답변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인데요.

땅 팔고 집 팔아서 이사 가는 것? 이사 간들, 아무 의미 없어요. 사실은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괴롭다고 술 먹어 봐야, 한 잔 또 한잔 먹어봐야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지. ‘별이여 사랑이여’라는 노래의 가사 초반부에 나옵니다.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지.” 가사 얼마나 잘 썼는지 몰라요. 한잔 먹고 취했는데 한잔 더 먹어도 맨 취한다는 말이지요.

인생, 본인의 괴로움에 취해 사는 인생, 그게 바로 원인도 모릅니다. 그래놓고 자기가 비정상인지도 몰라요. 차라리 마귀가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그 다음에 우리보고 “너 누구지? 너는 내 편이야. 넌 마귀편이야. 자꾸 껄떡대지마. 넌 신자 아니야.” 우리는 자신을 잊으세요. 

고린도전서 15장은 이야기합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사탄이거든요. 사탄이 표적을 잃어버렸어요. 표적 잃어버리면 쏘다가 애맨 사람 맞히잖아요. 마귀가 “너는 네 생각만 하지? 쏠 거야. 너는 늘 착하지 그치? 네가 욕은 했지만 사람은 안 죽였다고 계속 너는 도피하고, 또 도피하고 법에 호소하면서 그래도 착해, 마지막 착해, 너 이러려고 했지? 에라, 너는 내 밥이다.”

마귀가 이런 식으로 쏘고 싶은데 우리는 그 복음의 광채에 매료되다 보니까, 내 생각을 안 하다 보니까 마귀가, 사망아 네가 쏠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마귀가 표적을 잃어버렸어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율법에 저촉 받지 않습니다. 어떤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법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복음으로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 요소로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주님께서 나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우리를!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인간으로. 주께서 훅훅 불어주게 되면 우리는 둥기둥기 하듯이 하늘에 떠 있기만 하는 그러한 묵시가 여러분들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어화둥둥 안아서 잃어버린 양, 탕자를 건져서 업고 주님께서 좋다고 천국 데려가는데 우리가 징징대고 원망하고 주님 등에 탔으면서도 짜증내고, 주님을 때리고, 밟고, 차고, 내 인생 왜 이 모양이냐고 따지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의 눈을 다시 뜨게 하셔서 십자가가 왜 복음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