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강-신 28장 49-57절(저주의 땅)1709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49 - 57절입니다. 구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서 필경은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필경은 너를 멸절시키리라,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하나님께서 아예 작심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특정 공간에다 가두어 둬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 축복의 땅이라 행복의 땅이라 그렇게 간주 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 할 때에 가장 근거가 되는 것을 빼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대로 지킬 때,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 때’ 그 때만 그게 축복이 되지 율법대로 안 살고 말씀대로 안 살게 되면 옛날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 중립의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 땅은 곧장 저주의 땅으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쭉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이 저주 속,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이 저주에서 절대로 누구하나 빠져나갈 수 없이 철저하게 저주에 당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언어도 모르고 낯설기 짝이 없는 이방 민족이 독수리처럼 날아와서 자기가 먹고자 키웠던 양이나 소나 몽땅 다 가져가 버리고 자기 가족과 자기가 먹기 위한 포도주나 기름 농사지은 거 다 가져갔고,
자기가 가족을 위해 농사지은 먹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먹고 그 다음 완전히 성을 포위해가지고, 어느 정도로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냐 하면 이제는 먹을 게 없으니까 어린 자식을 식용으로 공급해야 될 그런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자기 아이를 식용으로 내놓았는데, 아직도 아기가 있는 옆집에 있는 그런 부부에게서, 아무리 착하고 유순하고 온유한 자라도 그때는 악마의 마음으로 질투하고 질시하는 그런 마음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이 점잖다, 깨끗하다, 유순하다하는 그런 것을 완전히 바람에 날려 보내고 결국 그 밑바닥에 남는 것은 짐승의 본성만 달랑 남기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나오기를 ‘유순하고, 착하고, 어진 아내라 할지라도 굶고 배고픈 데 앞에서는 눈이 뒤집힌다는 거죠.
눈이 뒤집어 져 가지고 남의 자식이라도 자기가 먹고 싶어 하는 그 악마적, 좀비 같은 본성을 노출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던 그 저주의 무게하고 실제 역사 속에 현상과 용량을 같이 만들겠다는 겁니다.
‘말씀, 뭐 그 까짓 것 대충 안 지켜도 되지’ 하는 그 말씀, 그 말씀이 그 안에 뭘 품고 있는 가, 바로 저주를 품고 있는 데 그 저주의 양 만큼 말씀이 그 만큼 가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엄중하다는 거죠.
말씀의 가치를 저주의 무서움으로 그 가치를 연결시키고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못 지켰을 때의 저주와 지상에서 인간이 설마 이 정도까지 심각하게 주께서 우리를 짓밟을까 하는 인간으로서는 마지막 기대, 마지막 기대마저 저주 앞에서는 이게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갖고 싶고 지키고 싶은 거 다 날아가고 달랑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말씀의 저주가 그냥 저주로 온 게 아니고 “거 봐, 니 본심이 저주스럽잖아, 저주스러우니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것은 이 혹독한 저주밖에 없지.” 그래야 이게 합치가 되거든요.
말씀이라는 원인과 그에 대한 저주스러운 결과가 딱 합치될 때 주님께서는 만족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저주를 누구한테 하느냐, 자기 백성에게 이 저주를 퍼부어 대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죠.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다 배반하고 도망갔는데,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그냥 예수님의 사적인 개인적인 부활인 줄 알았죠. 그들이 문 닫았는데, 주께서 그 문 한 가운데로 들어와 버렸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있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죽은 자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는 죽어있다는 것이 우리네 판단인데 우리의 판단이 잘못 된 거예요.
우리네 판단이 잘못 되었다는 말은 이것은 복 받고 싶어도 결국은 저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결정이고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이 누가 죽은 자냐 누가 산자냐 하는 그것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처지에서는 우리가하는 모든 선택과 결정은 결국은 우리를 저주로 저주로 몰아세우는 그러한 시도에 불과한 거예요.
제 어릴 때, 중학교 때인가, 그런 기억이 나는 데요. 버스를 탔는데, 그때는 저도 아주 심약한 때가 있었어요. 웃겠지만 하여튼 있었습니다. 마음이 굉장히 여릴 때가 있었습니다. 뭔가 잘 못 돼도 말도 못하고 그런 때가 있었어요.
어떤 때냐면 버스를 탔는데 노선을 잘 못 탔어요. 그러면 다음 노선에서 내리든지, “잘 못 탔으니까 세워주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노선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너무 마음이 약해가지고 ‘아이고,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하니까, 점점 가는 방향과 각도가 벌어지는 거예요.
저리로 가야하는 데, 이리로 가고. 오늘날 이 세상은 주님이 보시기에 공간적으로, 더 어렵게 말하면 위상적으로, 공간적으로 모든 인간은 딱 두 가지 공간 밖에 없어요. 주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주님이 안 계신 곳인가 두 공간에 다 몰쳐있습니다.
그 중간 지역이 없어요. 죽어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이미 살아있으면서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두 공간으로. 그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그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하나의 예로써 구약 때 이스라엘을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으로 있어서는 서로 탐구해가지고는 모른다, 내가 준 율법과 말씀 앞에 설 때에 니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시면서 주님께서 철저하게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몰친 거예요, 약속의 땅으로.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약속의 땅과 그 외의 땅, 그렇게 되거든요.
이걸 더 쉽게 이야기 하면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 율법을 줬다,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결과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예요. 하나의 율법이 와서 결과는 둘로 나뉘어 진 겁니다.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약속의 땅을 아브라함에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뭐냐, 약속의 땅이 아닌 밖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는 약속의 땅답게 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게 뭐냐,
바로 예루살렘이 있어서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게 되면 그들은 계속해서 약속의 백성으로서 복을 누리고 이방 민족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주의 언약을 모르면 저주받게 되어있다는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게 되면 그렇게 생각해서 안일에 잠길 수도 있는 문제인데 주님께서는 아예 이스라엘사람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을 저주의 절정을 보여주는 처참한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여기 오늘 본문 49절에 보면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분명히 이방인이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이 약속의 백성을 친다는 것은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여호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여호와 보다 더 센 신은 없잖아요, 그러면 여호와 없는 곳이 여호와 믿는 백성에게 징벌 당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을 친히 하나님께서 치게 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이 알고 있는 논리와 안 맞는 거예요. 그런데 이 독수리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한다는 말은 이거는 사실 바벨론인데요, 그 바벨론이 치고 싶어서 치는 게 아니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게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치게 하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논리하고 앞뒤가,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해가지고 앞뒤가 안 맞단 말이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과, 여호와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오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없죠.
결국은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있어요. 뭐냐 하면 땅을 놔라, 땅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내가 니가 차지하고 있는 약속의 땅마저 내가 저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땅을 놓고 땅을 포기해 버리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약속한 그 땅 준다는 그 땅, 그 땅을 놔버리고, 그걸 포기하고, 떠나버리라는 겁니다.
떠나야 산다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너한테 줄 수 있는 복은 뭐냐, 니가 죽는 게 복이라는 겁니다. 니가 용서 받은 선물은 니가 살고 있는 땅이 잘되는 게 용서받은 선물이 아니라 죽음이 니가 용서 받은데 해당되는 하나님의 종합선물, 추석선물이 될 것이다, 그걸 말씀하는 거예요.
보통 교회에서 보면, 금요일에 기도회로 모입니다. 기도회로 모일 때에 모이는 제목, 기도의 제목과 목적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교회가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구역을, 이 지역을 넓혀 주옵소서라고 제목을 달아요.
이 구역을 넓혀 주옵소서, 역대기에 나오는 뭐 이상한 그 이야기 가지고, 그 본문이 그런 이야기도 아닌데, 이 지역을 넓혀서, 그러니까, 부동산 장사하게 해 주옵소서, 이왕 하는 거 부동산 값 오르게 하옵소서.
만약에 지금 이 땅이 우리 땅도 아니고 남의 땅인데, 만약에 이게 우리 땅인데, 재벌이 와서 뭐 하겠다고 열배 주겠다고 팔라 하면 기도의 응답이라고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자, 땅을 팔았다 칩시다, 땅값이 올라서.
그거 가지고 뭐 하겠습니까? 또 어디 가서 땅 사겠지요? 뭘 팔든지, 뭐 코인을 팔든지 해서 땅 사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땅을 크게 소유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구약적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이게 저주받을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주님은 아예 이 땅을 떠났는데, 인간은 땅만 빙빙 돌아다니는 거예요. 여기서 더 좋은 땅, 여기서 더 좋은 땅, 학군 좋은 땅, 수성구, 그 동네 계속 돌아다니면서, 계속 헤매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식 군에 보내면, 후방에 빼달라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여호수아 1장 거론하면서 “니 말씀 잘 들으면 후방으로 빼준다” 하면서, 세상에 여호수아 1장에 니가 기도하면 후방 빼준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 왜 전방가면 안 돼요? 그러면 전방은 불교 신자만 가는 겁니까? 제사 지내는 사람 전방 다 가요? 맞아 죽으라고. 그러면 멀쩡한 상주는 무슨 죄가 있어서 사드가 거기 배치되어 있어요? 성주교회는 뭐했어요? 기도 안하고. 이제 핵폭탄의 타겟이 되고 말았어요. 여기에서 참 어려운 게 있어요. 뭐냐면 땅을 놔버리라고 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은 땅이 아니었습니까? 하고 묻게 되지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준 약속을 가지고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라고 착각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의 약속에 포함이 된 것 뿐이에요. 아브라함 가지라고 준 게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땅을 포기 할 것을 요구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았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잖아요.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갈 바를.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갑니까?” 주님의 뜻은, “죽어라! 죽어버려라! 죽는 그 길이 니 갈 길이다.” 죽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약속이 오게 되면 지금 이미 죽어있고, 죽어야 마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러면 죽어서 어디 갑니까?’ 하는 데, 이게 공간적으로, 위상학적으로 공간이 달라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죽어서 만든 공간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줬는데, 그 아브라함의 약속이 신약에 와서는 너희들이 말하는 땅의 약속이 아니고 성령의 약속이었다라고 되어있어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나옵니다. “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 또는 성령을 약속으로 준거예요.
성령이라는 새로운 처소, 새로운 땅, 새로운 공간이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죽으면 어디 가느냐, 전부다 예수 안으로 가요. 그리스도 안으로 간다고요. 거기가 새로운 공간이에요. 불교에서 말한 천당가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갑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왔고, 또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 소원이 지금 내가 있는 공간에서 이제는 이 몸을 벗어 버리고 주와 함께 영원히 얼굴을 보며 같이 사는 거’ 이게 소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보통사람하고 다르지요.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세상을 볼 때, 이 현실을 볼 때, 현실 때문에 진짜 현실이 가리워졌다고 그런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거예요.
현실이 있는데, 육에 속한 현실이 앞을 가리고 있어요. 이 세상 신이 자꾸 얼쩡거리고 가리고 있어요. 내가 죽게 되면, 몸을 떠나, 육신을 떠나게 되면 비로소 더 이상 얼쩡거리는 게 없게 되요.
주와 영원히 함께 있게 돼요. 살아 있으면서도 함께 있는데 희미하게 보이지 않고 이제 똑똑하게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죽어서 어디 갔는가, 그거는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주님께서 나타났잖아요. 영혼을 받아 갔어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어디 있느냐, 맨 그 자리에 있는 데, 위상학적으로 같은 자리인데 눈에 보이는 그거 말고, 안 보이면서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뿐만 아니고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 갔던 아브라함의 품에, 그게 천국인데, 지옥은 어디 있는가, 천국에서 보여요.
보인다고요, 위층남자, 아래층 여자처럼. 지옥 가서도 ‘저 나사로 좀 데려오라고’, 물론 그때까지는 천국이 아니고 낙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 하셔서 쉽게 들립니다마는, 제가 말한 것은 지금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거 다음 시간에 할 건데, 삼층천 할 때 할 거예요.
제가 말한 것은 위상학적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주님은 어디 있는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에요. 지금 너희 안에, 너희 안에 있는 거예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육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것으로 계속해서 지체되고, 이어지고 하는 이 육적인 현실성,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가서 짬뽕 배달하고, 짜장면 시키시는 분, 그런 거 생각하지 마세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고 짜장면 배달해주고, 라면 끓여 먹고 하는 그런 동네가 아니에요.
그리고 하늘나라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시집도 장가도 안가요. 결혼 그렇게 하고 싶거든 이 땅에서 원 없이 12번 하든지, 13번 하든지 하세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다섯명 여섯명 하란 말이죠. 나중에 가면 못해요. 나중에 ‘할 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될 때, 땡겨 줄 때 하세요. 하더라도 일단 하늘나라는 그것과 상관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 본문에서 저주를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 저주 이야기가 그들에게 개과천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저주로 오면 올수록 사람은 오기가 더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요한 계시록에 나와요. 사람이 나무라면 오기가 나서 더 반항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그 당시 고린도 교회를 화나게 만들어요. 고린도 후서 세 번째 편지 없어요. 고린도 교회 지금 다 날아가 버렸어요.
고린도 교회 지금 관광지 됐어요. 거기 신자 없습니다. 분노하게 만들어요. 신명기뿐만이 아니고 신약의 모든 말씀이 그래요. 분노하는 죄를 범해라. 하지만 은혜는 넘치느니라. 이걸 제가 광주 강의에서는 우리의 불의함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해체시키지 못 한다했던 이걸 믿어야 돼요.
내가 아무리 불의하고 땅에서 죄를 져도, 주님의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의는 손톱만큼도 요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하신 일을 믿는다는 말이거든요. 구원은 주님의 업무고, 주님의 홀로 하심의 솜씨지 우리가 거기서 관여하고 개입하고 토론하고 그렇게 상담해서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주 할 때 우리보고 뭔가 저주한다는 말은 놔라는 말이죠. 놔라. 이게 안 놔지거든요. 안 놔지거든 그것을 하되 이것은 잊지 말라는 거죠. ‘이것을 내가 지키고, 놓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못 놓겠습니다’ 하더라도 이 불의, 나의 불의로 인하여 주님의 구원에는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믿어야 돼요.
세리가 돈 포기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창기가 창기질 그만 두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강도가 새사람 돼서 천당 간 거 아니에요. 강도는 그냥 끝까지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그냥 오늘 밤에 낙원에 간 거예요.
주님과 같이 달렸거든요. 그날 밤에 낙원에 갔잖아요. 강도가 개과천선해서 ‘강도짓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할 수 있는, SNS에 사과문 올리고 그런 시간이 없었어요. 그거 하려면 일단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컴퓨터 쳐야하거든요.
그런 기회도 안줬어요. 그냥 달린 채 그냥 갔어요. 우리는 왜 못 갑니까? 죄 짓고 있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왜 주님께 못 간다고 여깁니까? 누가 그렇게 엉터리로 가르쳤습니까? 한국교회가 그렇게 가르쳐요. 한국 교회가. 돈 빼 먹을라고.
그만큼 자신에게 돈을 썼으면 이제는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돈 내라 이 말이거든요. 무슨 하늘나라 확장이 있습니까? 하늘나라가 몇 평인데요? 새로운 위상적인 공간은 평수가 없어요. 몇 제곱미터 이런 거 없어요. 하늘나라는 이런 거 없어요.
하늘나라에 뭐 좁은 게 있어요? 미어터진 게 있습니까? 좁은 게 있고. 하늘나라가 다락방입니까? 주님은 한 열 명만 들어가도 꽉찬다하는 그런 거 없어요. 십만 명, 십사만 사천 명 다 넣어도 널널해요. 수많은 사람이 천군천사와 함께 오더라도 충분히 수용이 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걱정을 해도 주님이 걱정 하는 데, 왜 본인이 걱정합니까?
무슨 하늘나라가 확장됩니까? 좁아 터져도 괜찮아요. 좁아 터져도. 밀실이라도 괜찮아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철저하게 주께서 저주로 다가오시는 것은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사람 없고, 오히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짓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가 더 한곳에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신약에서 결국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저주를 알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저주스러워도 우리 속에는 되지도 않는 오기와 성질이 있어가지고, ‘착하려고 했는데 왜 못하게 하십니까?’ 이런 되지도 않는 반발이 있어요.
주께서는, 낮에도 이야기 했지만, “도대체 니가 뭘 지키려고 하느냐?” 지금 이 순간 지키려고 하는 게 뭐냐는 거죠. 니 잘남을 지키고자 하느냐, 아니면 주님의 은혜를 지키고자 하느냐는 거죠. 똑바로 하란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잘남이 계속 있는 한, 주께서는 이 저주대로 우리를 끝까지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 겁니다.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해 주실 거죠. 분명히 그렇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더 살게 해주십니까하는 그런 목적을 만들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죽는 마당에 사도 바울의 소원처럼 이왕 죽는 거 좀 일찍 데려가시면 안 됩니까.
하지만 “그것도 너의 욕심이다, 나 니 굴릴 데로 다 굴리고 데려 갈 테니까 98세에 아니면 102세에 링겔 꼽고 자식들 ‘뽑냐 마냐’ 소리 다 들어가면서, ‘참 우리 아버지 지저분하네’ 온갖 험한 말 다 들어가면서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라는 그런 험담까지 다 들어가면서, 아무리 들어도 오늘 들은 저주 보다는 덜 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못 지키는 우리, 아직까지 저주 받으려면 한참 남은 우리,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손 떼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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