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강-신 28장 58 - 68절(저주와 언약 )1710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58 - 68절입니다. 구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의 확신 같은 것이 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입견이죠. “너는 반드시 우상을 섬기게 되어있다” 좀 더 덧붙이자면 “만약 안 그러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 뭐 이런 뜻이죠.
“너희는 반드시 우상을 섬길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선택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들이 여호와를 믿도록 그냥 두지않겠다”라는 거죠. “너희들의 시선과 모든 것을 우상 쪽으로 돌려놓겠다”라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인간을 알거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거든요. 이스라엘과 율법과는 원래 합치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몸은 아담에서 나왔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거든요.
예수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에서 나온 그 줄기와 이미 범죄한 아담에서 나온 줄기와 이게 매치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천당 갈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제는 전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머물렀다면 이제는 이 순간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어떻겠느냐에 대해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모든 복은 다 받은 겁니다.
어차피 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이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고 버티게 되면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추가적인, 추가적으로 법을 주십니다. 자기가 뭐 먹방 나올 정도로 먹는 거는 자신 있다고 아무리 자신을 해도, 처음엔 짬뽕 곱빼기하면 ‘그 까이것’ 하며 먹습니다.
거기에다 짬뽕하나 더 하면, ‘그 까이것’하며 계속 먹어요. 그러다 계속 추가 하게 되면 ‘니 나 죽일라고 하느냐’며 화내겠죠. 지금까지 저주받는 법은 어디까지 저주 받는 가를 보게 되면 신명기 28장까지 주어진 법이에요.
그렇다면 그 뒤에 율법이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감당할 수 없어요. 이것도 감당 못하는 데 뒤에 나오는 추가적인 법에 대해서는 인간은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 뭘 하느냐 하면 ‘이렇게 너를 저주로 밀어붙인다면 차라리 율법이 없는 곳으로 피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는 힌트를 주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박받고 서러움당하고 저주 받는다는 그런 잔소리를 듣게 될 것 같으면 ‘내가 다른 신을 믿으면 되지’하고 피해버리면 그 순간 이 두꺼운 성경책도 다 날아가지 않습니까? 안보고 안 들으면 속 편하잖아요.
성경을 괜히 펼쳐서 고민하지 말고, 성경 보지 말고 다른 여성 잡지나 뉴스나 보고 이렇게 성경과 빠이빠이 하면 이런 고민도 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아이디어를 하나님 쪽에서 넌지시 제시하는 거예요.
영화 보면 이런 게 있죠. 아주 독한 변호사가 하는 말이 “내가 니 변호 하려고 하는 데, 니 형량 5년 밑으로는 못준다. 니는 너무 나쁜 놈이야. 그러니까 내가 나서서 5년 이상 할 거야. 싫으면 다른 변호사 찾고.” 뭐 이래 나오죠.
‘싫으면 다른 변호사 찾고’
여러분이 이 성경을 가만히 보시게 되면
여기에 저주를 계속 받을 대상으로 관계가 유지 된다는 그것만 해도 큰 다행입니다.
이게 정말 복 받은 거예요.
‘저주 받는다. 너는 이 모든 질병들이 니 몸에 일어나라는 말씀에 대상자로서 여전히 유지 하고 있다는 그것만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을 좀 어렵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를 주시되 행위처벌을 하지 않고 개인 처벌을 한다는 그 점이 중요해요. 존재 처벌을 해요. 행위처벌을 한다는 것은 나쁜 짓 했을 때만 처벌을 한다는 거고.
개인 처벌, 존재 처벌은 뭐냐 하면 “이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전에 99점 맞아도 소용없어. 니는 나한테 맞아야 돼.” 이게 개인처벌입니다. 이게 여러분 잘 알다시피 야고보서에 보면 나오거든요.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온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다 어긴 것이 된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율법을 주신 게 아니고 겨냥한 게 있어요. “니가 과연 내가 준 율법을 전부 다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가를 한번 보자” 이렇게 나오신다는 겁니다. 니가 그것을 감당 할 수 있는지.
그러면 방법은 이겁니다. “나 그런 소리 안들은 걸로 치겠습니다. 나 성경이고 하나님이고 떠나겠습니다.” 이런 방법도 있고, 나는 하나님의 법을 그나마도 남보다는 더 오래 더 많은 양을 지켜서, 다는 못 지켰지만 얼추 많은 양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쪽이 나올 거고,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고요.
아예 율법과 빠이빠이 한 사람들이 이방인들이고요, 그렇지 않고, ‘아, 주님께서 겨냥하는 게, 율법이 겨냥한 것이 나라면, 나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율법을 못 지키는 존재로 이 땅에 출생 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알아보면 그거는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몸을 줬기 때문에 시험 칠 때, 빵점 맞을 생각을 하고 살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
율법을 니가 받았다는 그 자체가
니는 저주를 받을 만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라는 고백을 그대로 주님 앞에 하면서
저주 받은 인생을 주께서 쓰시도록 내밀면 되는 겁니다. ‘
나한테 나올 것은 저주밖에 없어요.
이거라도 쓰시려거든 써 보시기 바랍니다.’하면서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원이라는 것이 ‘니가 얼마나 행했는지 보자’가 아니라 ‘니가 누구냐’를 제대로 알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저주 받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는데,
이 율법 안에 완성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율법과 구원과의 관계가 뭐로 되느냐 하면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고 누구를 영접함으로 되요. 영접함으로. 히브리서 13장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 한다”
천사를 대접했다는 이 말은
율법을 내가 이렇게 한번 지키겠다는 그 의도가 아니라 널브러져 있는 거예요.
‘아이고, 나는 안 돼.’하고 포기 했는데, “계십니까?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이렇게 방문을 하게 될 때, “아이고, 뭐 나 같은 누추한 사람까지 다 챙겨주십니까? 하나님, 천사님.”
이래가지고 그냥 받아 챙기면 이제는 그 분이 나의 대행자가 되어 가지고
나에게 찾아 온 그 분하고 하나님하고 거래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천사를 그냥 대접했을 뿐이고
이제 구원 문제는 내 선에서 저 쪽으로 넘어 갔습니다.”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천사 대접이죠.
천사를 대접한 다는 것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누군가 대행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접수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저주에 대한 모든 조항이 우리한테는 아주 신이 나는 겁니다.
굉장히 감사할 문제예요. 내가 지키겠다고 상상하니까 ‘나는 이 저주 항목만 생각해도 내가 이렇게 망하고, 안 아픈 데가 없고, 귀도 아프고, 다 아프고, 난 이렇게 못 산다’ 이렇게 되지만, 이거는 내가 어떻게 해볼라고 계속 유지하다 보니까 이런 상상이 오는 거예요.
이번에 오랜만에 제 외손녀가, 처음이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손녀를 봤는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동영상이 수백 개가 날아 왔거든요. 그런데 동영상 속의 외손녀가 보고 싶어요. 동영상 속의 외손녀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그때가 좋았어요. 그게 왜 그러냐면 내 상상력이 가미가 되거든요. 상상력이. 얼굴도 좀 크게 나오고.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못 알아봤어요. 너무 작아서. ‘저렇게 작았어?’ 코알라처럼 딱 붙어 있는데 껌딱지처럼 붙어가지고 너무 작아요.
그런데 동영상 보면 얼굴 위주로 찍으니까 큰 거예요. 내 상상력과 너무 달랐던 겁니다. 그러게
율법을 내가 지킬 때 율법과
율법을 못 지킨다고 내팽게칠 때의 율법이
모양이 달라요. 적용이 다릅니다.
그러면 이 율법의 적용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율법은 나한테 저주로 왔다가 대행자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이 되요.
이런 게 참 말씀 드리기 어려운데. 정어리 떼가 있잖아요. 남태평양에 정어리 떼를 보면 정어리 떼가 수십 마리가 있어요.
하늘의 공중에 있는 철새들도 마찬가지고. 분명히 한 마리 한 마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돌아다니는 거 보면 꼭 전체가 한 몸체처럼 움직입니다. 한 몸체처럼. 정어리 떼도 그렇고, 공중의 새떼도 그렇고.
누가 지도자가 있는지 하나로 움직여요. 그걸 권력 집중성이라고 합니다.
권력 집중성.
모든 율법의 말씀이 우리는 다 하나하나 지켜야 되는 줄 알고 있는 데,
그 모든 율법이 전부다 한 분을 겨냥해서 다 같이 같이 움직여요.
그 말씀이 어디 나왔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1점 1획이라도 나는 빼는 것 없이 다 지킨다’라고 말씀 하셔 놓고, 그 율법이 다 지키는 것이 예수님 자신이 그 율법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지키느냐 하면 십자가 달리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한방으로 끝내 버리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뭐, 마음속으로 간음도 간음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온갖 잔소리 잔소리 다 해 놓고, 산상설교 5장, 6장, 7장에서 그렇게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고, 주눅들게 만들어 놓고 8장에 딱 넘어가게 되면 문둥병이 있으니까 문둥병을 졸지에 낫게 해 버렸어요.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 세상에 죄를 사하러 왔다. 병 고치러 온 거 아니고 죄를 사하러 왔다.” 하시며 한방에 끝내 버립니다.
그렇게 죄를 더욱더 늘려 놓고, 추가적인 율법을 줘서 죄를 더 늘려 놓고 실제로 그 해결책은, 해결책은 뭐냐 하면 저주가 우리에게 오지도 못하게 중간에 인터셉트(intercept)로 가로채서 다 가져가고 하시는 말씀이 8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너 대신 진다. 대신. 너에게 갈 모든 율법을 나에게로 대신 짊어져서 너희들 대신 내가 대신 죽음으로써 너희가 죄 사함을 받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율법을 대신 다 가져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가져갔다 할지라도 그 다음 문제가 어떻게 우리에게 분배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알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다 가지고 갔다. 감사합니다.’ 이러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율법을 주님 혼자 다 가지고 가십니까? 그 점이 풀어져야 돼요. 그 점이. 그 점이 율법 안에서 다 해소가 되고 해결이 되어야 돼요.
그것은 아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참 고맙지요, 사도 바울이 고마운 게 아니고 사도바울을 통해 그런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쭈욱 나열해 준 주님께 감사하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요게 율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율법 안에.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가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죄는 대신 받는 그것조차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 땅에서는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분으로 예수님만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율법의 죄 때문에 죽는 건데 예수님만큼은 죄에서부터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의인이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 뭐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물을 것도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때문에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를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걸 안 따지기 때문에 뭐도 없느냐 하면 저주나 처벌도 같이 없어요.
산다는 것이 힘들고 내 뜻대로 안 되지만 그것마저 축복입니다.
우리는 매사가 내 행함대로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축복을 나누어 준 대로
우리 인생은 이런 식으로 이런 쪽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뭐 별 마음에 들지도 않는 축복이지만, ‘이러려고 내가 예수 믿었나’ 할 정도로.
하지만 어쨌든 각자에게 적당한 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그래야 니가 너의 눈을 너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에게 돌리는 거예요.
제가 오전설교에서 그랬잖아요.
자기에게 주목하지 말고, 자기 생각하지 말라고요. 좋고도 나쁘고도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미안해하지도 말라 그 말이죠. 뻔뻔의 극한이죠. 뻔뻔의 극한입니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할 정도로. 특히 성도한테는 그것이 성도끼리에서 성도냐 아니냐를 만나보는 하나의 암호처럼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 암호를 내가 한번 알려 드릴게요. ‘안녕’입니다. 안녕. 모든 관계를 다 끊어 버린 거예요. 모든 관계를. 자식 부모관계, 부부관계, 모든 관계에 대해서 ‘안녕’을 선포해야 됩니다. 그리고 같이 만나면 고맙고, 또 아버지라 불러주면 고맙고 그런 거죠.
그 관계는 주께서 계속해서 관계를 가져가는 거예요.
결혼 즉시 이혼이죠. 출생즉시 남남이고.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니까.
내 중심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니까.
내 중심으로 돌아와 버리면 이 저주의 폭탄을, 화살을 피할 길이 없어요.
율법이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냐, 그 율법의 표적이 되어 버려요. ‘똑바로 해, 똑바로. 아니면 너 저주 받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자꾸 이것을 내가 유발해 버리면 귀신 다 달라 들어요. ‘니가 요번에 아픈 것도 니가 똑바로 안 해서 그렇다’ 하면서 일곱 귀신 열 귀신 다 달라 들어요.
농업에서 추곡수매 할 때에, 제가 본적은 없습니다마는, 농협 직원이 와가지고 쌀 품질을 보면서 쌀가마 옆구리를 팍 쑤시잖아요. 율법으로 팍 쑤시고 딱 내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니는 복음이 적당한 몸이냐 아니면 복음이 없는 곳에 적당한 몸이냐’를 늘 쑤시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복음이 있는 곳이 좋습니까?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 좋습니까? 한잔 더 한잔 마시는 그 동네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늘 복음이 들려오는 그곳이 좋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 보러 결정을 내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자, 내가 준 몸’ 하고 찔러 보시면서 자기가 준 몸 자기가 관리해요.
율법을 집어넣었을 때, ‘주님, 이거 나하고 상관없잖아요.’ ‘오, 그렇지. 니가 복음에 적당한 몸이지.’
그런데 율법을 탁 집어넣었는데 ‘주여, 순종하겠나이다.’ 이건, 기성교회죠. 이건 지옥 가죠.
이건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면 그거 지키면 또 남아 있으니까. 그 다음 또 율법 줄 거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 몸이 과연 복음에 적당한지,
아까 전에 마태복음 8장에 나온 것처럼, 이미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는데
깨끗하게 했던 그 이후의 몸이냐, 깨끗하게 할라고 애쓰는 몸이냐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는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복음을 어떻게 분배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26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28절에 보면 거기에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가 나와요.
항상 예수님 생각할 때는요,
‘믿어 드리자, 믿자’라고 이렇게 하면 안돼요. 예수님을 오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일 처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으로 이해해야 돼요.
여기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몸을 주면서 그 몸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일방적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들이대시는 거예요.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했습니다. “살을 먹고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언약의 피.
그러면 그 당시 제자들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의 언약 안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말려 들어가고 끌려 들어온 셈이 되요. 끌려 들어온 거예요. 여러분 팽팽 엔진 도는 데 종이 넣어보면 쑥 빨려들어 가잖아요.
주님의 언약의 엔진에 쑥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빨려 들어갔는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평소에 확인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또 생각들을 하실 거예요. 골로새서 2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데요, “이는 저희로 마음에서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비밀은 이미 통합되어 있어요.
그리스도로 이미 묶어져 있습니다. 세상 과학과 뭐 철학은 없어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되면 뭐냐 하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이 빵빵해요. 그 안에 내 행함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내 잘남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가 놓쳤던 거, 몰랐던 진짜 감취어 진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언약의 엔진 통 안에 들어 있어요.
이걸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다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보게 되면 딱 두 가지로 나누어 져요. 자기의 아직도 붙들고 사는 사람과 자기의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 딱 두 종류로 보입니다.
특히 교회 교인들 만났을 때, 요걸로 직방입니다. 자기 의냐? 내가 기도를 얼마나 해야 병이 낫겠느냐? 헌금을 얼마 해야 자식이 이번에 수시 치는 데 잘 되겠느냐? 어떻게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하느냐? 이렇게 자기 의와 결과를 연관 시킨다면, 그것은 율법아래 있는 저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식으로, 주께서 이 일을 당하게 하셨다는 식으로 나는 그냥 하나님의 언약만 발산하고, 언약만 표현하고 드러내는 영화관에 스크린 막에 불과 한 거예요. 하나의 연극 무대에 움직이는 배역 맡은 배우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사도바울한테는 그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그리고 주께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지 뭐. 살면 또 살고. 심지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결혼 주례하는 사람들 곤욕을 치르게 만드는데요. “그 결혼을 왜 하냐, 이 인간들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아이고, 그렇게 고생하고 또 고생하려고 결혼하느냐?”
“하지마, 그거. 근데 못 참겠다 하면 해! 하는 데, 내가 딱 보니, 니 고생 바가지야. 고생 바가지.” 얼마나 자신감이 있으면 세상을 예수님의 보화를 경유해서 세상을 이해했으면, 모든 정답을 미리 알고 있잖아요.
“니가 이왕 못 참아서 결혼하는 거 할 수 없지만, 고난 오는 데, 너무 심하다 싶으면 헤어져. 그것 때문에 고생할 필요 없어.” 이건 뭐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이죠. “ 돈 좀 있어? 그거 다 못 써. 곧 끝나. 돈 있을 때 팍팍 써. 그거 다 못 쓴다고. 돈 없어? 그럼 빨리 와. 천당으로.”
뭐, 세상 참 편하게 봐요. 하여튼 편하게 삽니다. 그러한 여유, 그것은 바로 다른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안에서, 그 안에서 놀기 때문에, 언약의 엔진과 같이 휘말려가기 때문에 별 시답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는 일에 별 고민 할 거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런 저주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바로 내 모습이 이 육의 모습이 저주 받아도, 백날 받아도 우리는 주님 앞에 원망할 조금의 자격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그런 입장에서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이야기 감사합니다. 받아도 마땅하고 우리가 날 때부터 말씀 못 지키는 자로 확정된 것을 소급해서 회상해서 또 다시 감사합니다. 주님 아니었으면 지옥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인생에 유일한 자랑이 되고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