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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실상(신28;36-44) 1709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11. 06:53
2017-09-10 14:53:20조회 : 33         
   인생의 실상 17091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인생의 실상(신명기 28:36-4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oYUDoISg4Y, Hit:2
 이근호17-09-10 15:39 
인생의 실상 

2017년 9월 10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36-44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28: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28: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28: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28: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28: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28: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28:43)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28:44)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한결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즉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는 겁니다. ‘인격의 동일성’ 혹은 ‘자아의 동일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만약 이 원칙이 흩으려지면 세상 모든 사회 질서에서 책임질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되는 대혼란이 초래한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들이 걱정하는 게 뭡니까? 현재 자신이 사는 이 시공간이 안정적이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본인이 이 시공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는 것’. 이 정의에 의하면, 생물체는 결코 ‘죽어 있는 것’이 아닌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하루하루 사는 것은 모두  ‘죽음’이 ‘죽음’되기 위한 내부전개라는 겁니다.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실제성을 증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죽음이 인간보다 더 셉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배후에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방민족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냥 무심한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대해서는 그 죽음의 내막과 이유를 알려주는 특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라도 알고 죽어라 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죽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데 있어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까지 펼쳐져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모든 자국에 모든 죄가 다 달라붙어야 합니다. 

우상숭배도 필히 실시할 수밖에 없게 하십니다.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36절) 이스라엘이 자기 의지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몰아넣으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예언이십니다. 일종의 설계도면 같은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우상숭배를 겪어야 합니다

이런 와중 속에서 이스라엘은 전문적으로 메시야를 죽어야 하는 집단으로 전환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세상이 무엇 때문에 창조된 것도 모르고 오직 자기에게 저주가 임하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심성을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처지에 있습니다. “저주란 나를 못살게 구는 저들에게 가야 마땅하다”는 식입니다. 

바로 이런 심성이 구축되도록,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절대적 악이 된다는 사실을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민족을 통해서 내비치시게 하십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참담하게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과학’이 보편적 유일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과학은 인간을 기계로 봅니다. 기계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오직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체는 ‘돈’ 곧 ‘자본’입니다. 따라서 과학주의와 자본은 상호 격려하고 상호 정당화하면서 오늘날의 시대상을 건설합니다. 자본은 노동에서 얻어지고, 노동은 기계같은 자신의 신체와 생산기계가 연결되어서 가치 있는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숱한 기계들이 모두 인간들의 노동의 찬란한 결과물이라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갈수록 자기가 누구인지를 갈수록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벽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그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둘러싼 이 대자연은 인간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들은 ‘우리들은 변하지 않지만 대자연은 변화한다’는 생각이 참으로 잘못된 말임이 드러납니다. 도리어 자연은 변하지 않고 인간이 변해야 합니다. 

대자연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고 냉정하고 무심하게 ‘공무집행’ 중입니다. 저주하라는 말씀에 따라 충실하게 저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대자연은 쉬지 않고 탄식을 내뿜어내면서 썩어가고 있고 후패하고 있습니다. (롬 8:21) 같은 썩어가면서 이런 사실을 인간들이 모르는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노동의 효과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바로 인간들의 이런 천성과 충돌되면서 그 현장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0:1-2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라고 나옵니다. 

포도원에 놀고 있는 일군 네명을 시간대별로 차이나게 투입시켰습니다.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말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제일 나중에 온 일군에게 약속하신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른 일군들이 보면서 절로 자신의 노동성을 감안했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온 일군이 자연적으로 불만을 쏟아냅니다. “왜 노동시간을 감안한 일당을 주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바로 천국의 기능이란 이런 자들을 지옥보내는 작업으로 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즉 인간들이 저주의 약속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자기의 인생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는 말씀은(마 20:16) 항상 이 세상 원리와 배치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겁니다. 이 말씀은 곧, 참으로 천국 백성은 이 세상에서 저주를 받아야 도리어 자신의 입장에 합치된다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냐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영을 통해서 파악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나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이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함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속해 있는 위치를 제대로 안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실시한 모든 일에 감사로 화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9-11 05:39 
150강-신 28장 36-44절(인생의 실상)1709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36 - 44절입니다. 구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나무와 토지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아멘 






제가 이 본문을 이렇게 읽으니까 마치 제가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교회에 분란이 생겨 두 편으로 나누어 졌는데, 이쪽에 목사 반대 하는 편이 앉아 있고 목사 찬성하는 편이 앉아 있는데 이 본문은 마치 목사 반대 하는 편에게 의도적으로 이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가 교회 설교를 순서대로 하다 보니까 마침 이렇게 아다리가 딱 되어있지, 만약에 교회가 분란 일어났는데, 목사가 이 본문 딱 거론해 보세요. 그러면 목사 반대편에서 뭐라고 이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아예 노골적으로 “너희들 저주 받아라”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해라” 라고 나오지 않겠습니까? 






방금 읽었던 이 모든 말씀은 안 받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안 받아야 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마저 이 말씀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마저 그렇게 되셨다면 모든 인간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있는 위치가 바로 이 저주에 합당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복입니다. 그걸 안다는 게 복이에요. 이걸 안다는 게. 자기 주제파악 한다는 게 복이에요. 노동을 했는데 노동의 대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이야기 했고, 그 설명하면서 한 이야기가 포도원이야기 나왔어요. 






아침 10시에, 12시에, 3시에, 5시에 일꾼 4명 뽑았는데 마지막에 하루 일당 줄 때, 5시부터 온 사람부터 1시간 달랑 일했고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이 말이죠. 그걸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부푼 꿈을 꾸었겠습니까? 






나는 8배, 나는 6배, 나는 3배 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다 같이 한 데나리온이에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했으면, “천국은 이렇게 살기 좋고, 천국은 이렇게 이쁘고” 뭐 우리가 그림만 그려도 꼭 천국에 가고 싶도록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게 옳은 데, 주님이 천국을 설명 할 때는, “너희들이 천국을 그리워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너희들의 노동의 대가만 바랄 뿐이다”라는 겁니다. 왜? 니가 주체니까, 니가 삶의 주체이고, 너의 인생의 주인공은 너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너를 화나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너를 신경질 나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이게 이 땅에 이 세상 사람과 천국이 맞닥뜨릴 때 나타나는, 천국이 이미 왔다는 증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도 못 믿는 겁니다. 보인다는 자체가 비밀이에요. 안 보여서 비밀이 아니고, 보여서 비밀이에요. 






저는 그걸 벽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람은 벽 속에 귀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말을 바꾸겠습니다. 벽 속에 입이 있어요. 벽에서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리는 데, 우리가 벽을 볼 때는 내가 보는 그 벽을 되받아서 내가 해석하는 해석을 자꾸 그대로 나에게 환원 되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당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우리가. 






왜냐하면, “신이시여, 예수여, 나에게는 저주가 합당치 아니하니이다” 이러고 나온단 말이죠. “저주는 저 사람한테 해당되고 나는 저주 오면 안 됩니다”가 기본 모토가 되어 있어서, 기본 전제가 되어 있어서 이건 ‘도끼로 이마까’를 해서 없애야 하는 건지. 도대체가. 






아담의 자손은 죄인이라고 아무리 로마서 5장에서 설명을, 설명을 해줘도, 뭐, 받고 돌아서면 ‘나는 저주 오면 안돼’ 도대체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그런 발상을 자꾸 하는 겁니까? “저 못된 사람에게나 가세요. 나에게는 그런 소리하지 말고. 이 저주 이야기는 못된 사람에게만 퍼 부으러 가시고 천사여 나에게는 오지마세요” 하는 거예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와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준 것은 이겁니다. 이게 아주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니 위치가, 니가 보는 그 위치에서 모르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 위치를 내가 저주의 말씀을 줘 가지고 너에게 합당한 자리로 내가 바꿔줄게. 변화시켜 줄게.” 이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우리는 내가 있는 자리에 저주 안 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땅 자체가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땅이 아니고 진실 된 그 땅, 예수님께 마저도 저주가 임하게 하는 이미 저주 받은 그 땅, 그 땅의 저주성을 저주의 말씀과 합치되도록 저주를 퍼 붓는 겁니다






니가 씨앗을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땅이 너에게는 가장 적절한 땅이고 적당한 땅이라는 겁니다. 자식이, 현재 인구가 72억인 데 나중에 유황불 떨어집니다. 제가 안양에 강의 하면서 제목을 실화라 했습니다. 실화. 팩트, 다큐멘터리, 실화입니다. 






하늘에 유황불 떨어지는 게 실화예요. 북한의 핵 개발, 그것만 실화가 아닙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스트리아, 스위스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 수녀가 34년 전에 2명이 왔어요. 소록도에 작은 가방 들고 소록도에 와서 34년 동안 아무소리 안하고 봉사하러 왔는데, 그때 문둥병 환자를 집단으로 모은다는 그 소식 듣고 봉사하러 왔는데, 그때 우리나라가 60년대 초 이고, 에티오피아 보다 더 못살았어요. 



하도 가난한 나라, 자기들이 봉사하겠다고 왔습니다. 그 수녀가 얼마 전에 돌아갔거든요. 돌아 갈 때, 가지고 왔던 작은 가방하나 들고 그대로 돌아갔어요. 참 누가 봐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잖아요. 






그런데 그 수녀가 문둥병 환자들에게 증거 한 게 뭘까요? 제가 소록도 2번이나 가 봤습니다. 뭘 증거 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문둥병 걸려 마땅합니다.” 그걸 전했을 까요?
다시 말해서 수녀가 그 문둥병 걸린 사람들에게 약을 올리러 왔겠습니까, 고치러 왔겠습니까? 






정말 약을 올리러 왔다면 제가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도라고 저는 마음에 단정 짓겠습니다. “너는 문둥병 걸려 마땅해” 그거 지적질 하려고 34년 전에 왔다면 저는 그 수녀님 둘 다에게 박수치고 싶어요. 






근데 천주교가 뭐예요? 위로하는 거잖아요. 그런 거 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위로를 전하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서러움 받지만 쪼그만 참고 눈 감으면 그 어떤 병도 없고 아픔도 없는 천국에 갑니다.” 






분명히 그 이야기 했을 거예요. 아주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기 가서 그 이야기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금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천국이 있어요? 죽고 나면 지옥 가는 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과학을 공부해 보세요. 과학을 공부해 보면 과학이 왜 이단이냐 하면 자연은 변하 되, 인간은 안 변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자연은 안 변해. 니가 변해야 돼. 니가. 잘난 니가 변해야 돼. 내가 변하게 해 줄까? 저주의 말씀으로?” 






“해와 달이 변한다” “아니, 니가 변해, 니가.” 그들은 자기 업무를 다 하고 있어요. 자연은 공무 집행 중입니다. 공무 집행 중이에요. 아주 냉정해요, 자연은. 무성이에요. 무성. 성이 없어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몰라요. 






변해야 돼요. 어디와 만나서? 저주와 만나서. “합당하니이다. 예, 씨를 뿌려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거, 제게 너무 합당하니이다.” 라는 고백을 했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못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하게 되요. 언제? 이것을 종합해 보면 십자가가 되기 때문에. 






이 자연은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독생자가 와도 자연은 자연의 역할을 다 해서 나를 저주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는 겁니다. 이 자연 안에 율법 주어지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저주 받았습니다. 나무위에 달려 저주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그래서 고린도 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죽은 즉, 모든 사람이 죽었다.” 팩트입니다. 이거 실화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뭐만 해주면 되냐 하면 “살아있다는 이것이라도 지금 계속 죽음을 향하여 질주 하고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기능으로써 살아 있을 뿐이에요. 



근데,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생물체를 뭐라고 보느냐 하면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는 것.’ 이것을 생명체라 해요.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는 것. 우리 몸의 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충도 마찬가지고, 바이러스도 마찬가지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는 것’ 이게 생명체예요. 생명체. 다시 말해서 살아 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달리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이단이죠. 과학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마이크가 발달하고, 잔, 자동차 발달하고, 비행기 발달하고, 여기 녹음기 발달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를 더욱 더 건방지게 만들 뿐이죠. 






우리의 사태를 악화시켜요. 사태를 악화시킨다고요. 벽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벽에 너무 회칠을 많이 해서 타일을 발라가지고 안 들리도록, 이제는 과학의 시대지 종교의 시대가 아니고 과학의 시대라 해서 종교는 미신이라 해가지고 과학으로 아주 회칠을 해 놨어요. 






이 과학을 아는 것이 똑똑한 것이고 과학을 모르는 것은 바보, 엉터리, 등신이 돼서 이건 취직도 못하고, 뭐든지 과학적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학의 건방짐과 자고함과 자만함과 교만함은 지금은 하늘을 찔렀어요. 






과학이 발달하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사는 희망을 점점 더 제공하게 되었어요. 살아야 돼. 왜? 생명체는 스스로 자급자족 하면서 생존하는 것이니까. 생명체니까.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왜 인간은 유인원과 다른가? 왜 위가 작아지는 가? 요리하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뭐 온갖 가설을 다. 요리를 하니까 원숭이와 좀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온갖 이야기를 다 끄집어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배설물이,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의 주제 파악을 하면서, 자꾸 배설물이, 더러운 것이 빠져 나오는 데,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이 배설물이 빠져나오는 모습을, 이것도 인위적으로 빼면 도 닦는 것밖에 안됩니다. 의도적으로 빼면 안돼요. 






우리의 의도는 힘을 모으는 것이지 죄를 회개하는 게 우리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걸 의도적으로 해버리면 위선자가 돼요. 그래서 제가 ‘막 살아라’ 하는 겁니다. 춘천 막국수처럼 막 살아라 하는 겁니다. 주께서 빼줘야지 지가 빼게 되면요, 빠진 자기를 숭배한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활어차’, 여러분 활어차 보게 되면 횟집과 횟집에 생선 배달해 주는 차인데, 활어차 치고 길바닥에 물 안 뿌리는 차가 없어요. 하여튼 활어차 지나가면 지지리 궁상처럼 물이 자꾸 빠져요. 






자신도 모르게 빠져요. 성도는 줄줄 흘리고 다녀요. 지 똑똑함과 지 교만과 잘남을. 제발 정신줄 놔라했잖아요. 지 똑똑한 거, 주의 성령이 임하면 똑똑한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똑똑한 게. 줄줄 흘리고 다녀요. 정신 줄 놔라 했더니 또 주무시지는 말고. 






줄줄 흘리고 다니거든요. 이 생명이, 인간들이 얼마나 과학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지 과학 생물에서는 인간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계, 문, 강, 목, 과, 속, 종이라는 것을 중학교 때 외우는 데, 이건 모든 생물체를 분류를 하는 건데, 린네라는 사람이 분류를 해놨어요. 과학적으로. 






인간에게 적용시켜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뭐냐, 계, 문, 강, 목, 과, 속, 종이라는 질서에 맞춰 분류를 하는 데, ‘계’는 뭐냐 하면 큰 범위예요. 인간은 동물계에 속하고, ‘문’은 척추동물문에 속하고, ‘강’은 포유강에 속하고, ‘목’은 영장목에 속하고, ‘과’는 사람과에 속하고, ‘속’은 호모속이고, ‘종’은 사피엔스예요. 









그래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 전체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인간도 그냥 일반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그럼 왜 생물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인간을 조사를 하되 인간의 하나의 물컹물컹한 고깃덩어리로 해서 째고, 수술하고, 조사를 할 수 있지만, 






생명, 사랑, 미움, 우정 이런 것은 칼로 메스로 수술이 안돼요. 행복 이런 거요. 그런 게 자꾸 끼어들면 과학이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이 진리로, 과학은 종교거든요, 종교로 대표 진리가 되려면 이런 요소들을 전부다 빼는 겁니다. 






다 빼버리면 결국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의 기계가 되죠. 기계. 기계가 된다면 기계가 스스로 자립하고 생존하는 기계가 된다면 이것은 더 이상 종교라든지 사랑, 우정 이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나에게 에너지, 기계에다 기름 치듯이,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그 돈, 돈이 최고란 말이죠. 그래서 자본주의가 오면서 과학이 그 만큼 발달한 겁니다. 죽이 맞아요. 자본주의, 돈 최고와 그 돈 최고에 적합한 인간 만들기가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겁니다. 






돈만 주면 뭐든지 다 되는, 그게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쪽으로 쭉 가고 있습니다. 쭉 가고 있어요. 문제는 그렇게 만든 세계가 이미 저주의 말씀에 의해서 저주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저주 외에는 딴게 올 수 없어요. 






오직 저주를 저주답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가도록,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식으로 가도록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신명기 오늘 본문을 봅시다. 신명기 본문에 보면, 약간 난해 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그 다음 단어가 “끌어가시리니” 나옵니다. 끌어가시리니.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만들어 놓고 왕 세워 놓고 왕 죽은 뒤에 왕과 더불어서 백성을 니가 알지 못하는 나라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근데 이 이야기를 이미 모세에게 해 주셨습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하늘에서 유황불 불로써 이 세상을, 이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멸망시키신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 했듯이, 모세가 장차, 모세 개인적으로 어찌 장래를 알겠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계시를 주셔서 모세에게 준 말 그대로 하나의 프로젝트가 돼서, 그게 설계도면이 되가지고, 그대로 장차 이스라엘의 운명이 확정되고 결정된 거예요. 확정되고 결정 된 겁니다. 






그러면 변하는 우리 입장에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확정되고 결정된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다 이루었다” 그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모든 말씀이 다 이루었다’가 덩어리 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신명기 28장의 저주의 말씀을 마음껏 편한 마음으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실현해 내면 되는 겁니다






농사짓는데 아무것도 얻을 것 없다. ‘옳다구나, 마땅하니이다’ 이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잉~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놓치면 안돼요. 성경말씀 자체가 확정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남의 나라로 끌고 갔는데 거기서 뭐가 있었느냐 하면, 거기 말이 더 어려워요.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을 섬길 것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너는 필히 목석을 우상을 섬길 것이며” 요새 말로 하면 “너는 반드시 이 예수보다도”.. 






뭐 교회 와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해놓고 그거 5분 지나고 돌아서서 전화 받으면서 “예, 예, 곧 갑니다, 한 30분후에 가게 문 열러 갑니다.” 돈이라는 우상을 섬기도록 나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이상해. 이상해. 정말 이상해. 이 몸은 떨어져야 되는 겁니다. 주께서, 벽속에 있는 주의 말씀은 영은 땡기고 육은 밀어 내거든요. 우리는 욕심이 많아서 육까지도 같이 ‘나도 갈래’ 이런 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육은 저주 받도록 내놓고 영만 가지고 가야 한단 말이죠.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할 때 우리 몸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냥 흙으로 환원되어 버려요. 자연세계는 모든 것이 썩어짐이 그게 원래 원칙입니다. 






중력의 중심이에요. 중력은 중심을 향해 가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 모든 것은 모든 피조세계는 다 썩습니다. 썩어야 될 몸 가지고 태어났어요. 썩을 몸 가지고요. 썩을 몸 가지고 태어났고 “생일 축하합니다. 와~~~” 이렇게 하거든요. 나중에 필요하신 분들은 동영상 보여 줄게요. 






우리 외손녀가 생일축하 노래 부르면서 고함지르고 이래요. “생일 축하합니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사세요.” 한단 말이죠. 근데 그 아이한테, 2살 안됐지만, 성령이 임한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성령이 임했을 지도 모르죠. “와~~”하는 거 보니까. 






성령이 임했다 칩시다. 그러면 내가 죽는 게 슬픈 게 아니고 ‘아, 이 몸이 있다는 말은 다른 몸이 따로 있다는 거구나.’ 라는 뜻이에요. 이 몸은 아담에서 왔지만 아담에서 살짝 잠깐 몸을 보여준 것은 다른 몸으로 갈아타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몸이 있음을 이 몸 가지고 증명하는 거예요. 이 몸이 썩을 몸이 되면서 다른 몸은 썩지 않는다를 보여주는 몸이 되는 겁니다. 근데 썩는 이유가 뭐냐. 죄 때문에. 그러니까 죄를 우리가 나타낼 수밖에 없지요. 






제가 어떤 곳에서 설교하면서 ‘처벌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오해해가지고 죄가 없다고 하시는데, 처벌이 없다는 말은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에 대해 처벌 받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죄는 죄대로 짓되 처벌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저의 중심에 있어야 돼요. 변두리에 있으면 안 되고. 중심에. 돈이 중심에 있으면 안 되고. 돈은, 돈은 있어야 되긴 해요, 돈은 변두리에 잠시 밀어놓고, ‘돈아 좀 미안하다’ 하면서 잠깐 비껴 놓고, 중심에다가 이 돈 벌라고 얼마나 많은 헛짓을 했습니까? 






중심에다, 아침에 이야기 했듯이, 주님의 희생을 놓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로 가느냐, 예수님의, 메시아가 오는 자리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렇게 끌려가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그들이 기대했던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손을 놔야 될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들은 “그럼, 목사님, 자살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라고 하는데,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죽긴 죽되 말씀으로 인해 죽어줘야, 말씀은 살아날 것 아닙니까? 내가 죽어버리면 나도 죽고, 내 모든 것이 죽지만, 말씀에 의해서 죽어버리면 나는 죽지만 말씀은 살아나잖아요. 






그렇게 매일같이 말씀이 와서 우리를, 이 저주의 말씀이 와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도록 해야 돼요. 기대 걸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이죠. 



“그게 네 숙제야, 과제야, 가서 죄 지어”라는 말이죠. 






다른 교회가면 뭐라 합니까? “가서 복음을 전해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가서 복음을 전해서 하늘나라를 확장해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가서 죄 지으세요.” 그리고 그 여파로 오늘도 살 좀 빠지고, 신경 좀 쓰고, 한 걸음 더 죽음에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아, 이러다 진짜 죽겠네. 피곤해서.’ 






여기에 아까 읽었던 말씀이요, 이 말씀이 참 읽어 보라는 것도 미안한 느낌이 드는데요. 어쨌든 간에 여기 43절 밑에 보게 되면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필경 너를 멸하리라.” 할 때 우리는 진심으로 “아멘” 해야 돼요. 






왜? 이제 챙길 것 챙겼다 이 말이죠. 입 닦으면서 “아멘” 하시면 되요. 이제는 뭐 깨어질 것 깨어지고 갈라설 것 갈라서고 착착 다 정리해야 돼요. 이제 우리 80넘으신 분들부터 정리 하셔야 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서 정리해 드리지만. 






이제 어느 정도 넘어서면 정리하셔야 돼요. 지하철 공짜로 타지 말고. 그것도 돈 내고 타고. 



제가 어디가면 이제 ‘1952년 생’ 이것만 눈에 띄는 거예요. 내년 되면 ‘야, 희망이 보인다, 나도 공짜다’ 하는데, 생각해 보면 ‘내년 돼서 공짜로 탈래? 아니면 내일 갈래?’ 






맨날 노래는 ‘천국 열차 올라타고서’ 노래는 불러놓고 ‘그것도 혜택 보고 가야지.’ 이런 생각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 땅은 함몰할 땅이고 유황불 떨어질 땅입니다. 팩트입니다. 사실이에요. 이것보다 더 큰 다큐멘터리는 없습니다. 이걸 미리 알았다는 것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상한 곳에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땅에 태어났습니다. 희망 없었는데 주께서 우리와 더불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마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