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강-고후 11장 22-27절(사도됨의 증거들)1709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22절-27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22-27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 하면,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 고생해야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이만큼 고생 안하면 천국 끝나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질문은 이거예요. “목사님, 저 사도바울의 이 대목을 보고 너무 감동을 먹어서 저도 이만큼 고생했으니 저 구원받은 사람이 맞지요?” 하는 그 질문 그게 더 골칫거리입니다.
퀄리티가 달라요. 고난은 양(量, quantity)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정도가지고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질이 달라요. 나는 노래방에 다섯 번 갔고, 나이트클럽에 열두 번 갔고, 놀러 스무 번 갔고. 그게 사도일수 있고 그게 성도일 수 있습니다. 퀄리티가 다르다는 겁니다. 골프를 지금까지 20년 쳤고, 마라톤 매일 하고, 그런 것 있잖아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흉내를 낼 수 없는 어떤 퀄리티가 있어야 돼요. 오늘 우리교회한테 사도가 지금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자기 잘났어. 자기는 뭐 영적이고 어쩌고 하면서 영적이라고 들이대 봐야 내가 보면 육적이고, 저희끼리 잘나면 뭐합니까? 제 3자가 끼어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사도바울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귀담아 들어봅시다.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가짜, 악마가 당회장으로 있고 좋다고 천당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악마가 당회장으로 되어 있는 그 악마의 조직원의 입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입만 떼면 복음이고 입만 떼면 예수고 입만 떼면 성령 나와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흠을 잡고 티를 잡아야 될 것인데 잡을 것이 없어요. 어제 토요일에 하도 설교준비 하다가 몸이 폭발할 것 같아서 영화를 봤어요.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영화입니다. 혼자 봤어요, 혼자. 거기에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놈들이 있다. 누가 죽여도 죽여야 될 인간들이 있다. 그거 내가 죽이겠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청소를 해야 되기 때문에.”
쓰레기는 치워야 되거든요. 가족을 개 패듯 패는 인간부터 해서 주인공이 열 몇 명을 죽여요. “이런 인간은 이 세상에서 법으로 할 것도 없이 내가 희생해서 내가 죽일게. 저 인간 살 필요 없어.” 그런 거죠. 고양이 뱃속에 다이아 반지 들어갔다고 고양이를 다 해부해서 다이아반지 꺼내는 여자 같은 인간은 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죽이지요.
그 이야기 듣고 제가 왜 동감을 했느냐 하면, 정말 제가 죽이고 싶은 울컥 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영광 이야기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하는 사람들,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이야기하고, 언약 이야기하고, 구원 이야기하고, 교회중심 이야기하고, 예배 잘 지켜야 된다는 그 이야기하는 사람들, 죽이고 싶어요.
뭔가 신학교 때 배운 가락이 있어서 그런데 이게 돈벌이가 되거든요. 도대체 지금 사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냥 “여러분, 저에게 배우세요.”가 아닙니다. 적이 있어요. 가짜 사도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가짜 사도와 자기를 분간하는데 교인들은 바보 같아서 몰라요. 사상체질에 의하면 꼭 소음인 같아요. 아주 소심한 사람을 소음인이라고 하지요.
바보등신 같아서 뭐가 뭔지 몰라요. 예수 복음 나오고 성령 나오면 그 교회 가면 다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23절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그런 뜻이에요. 네가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편지를 보는 고린도교회는 누가 정신이 없고, 누가 막되 먹고, 누가 이상한 사람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상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교인들은 자기 목사를 아무리 봐도 흠이 없어요. 천하에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그리스도의 좁은 길을 앞장서서 가는 사람인데, 입만 떼면 복음이고, 입만 떼면 십자가고, 입만 떼면 예수 중심이고 하나님중심이고 주권사상인데 어디를 티를 잡아요.
사도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중심, 예수중심, 복음중심, 십자가중심, 언약중심, 그리고 예배 잘 드리는 예배중심, 교회중심, 구원중심, 그게 여러분에게 모독감을 주던가요? 그게 여러분에게 모독감을 주던가요?
지금 가짜 사도와 자기를 구분하는 무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고린도교회 지도자와 여러분에게 모욕감, 모독감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맞아죽어도 싸지요. 그리고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이 맞아죽어도 싸요. 23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이게 몇 대 맞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좋은 게 좋잖아요. 은혜로운 것이 좋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사도가 전하는 그 복음 안에 뭐가 담겨 있는가? 창세기가 담겨 있어요. 그냥 “여러분 뭘 원하십니까? 구원받기 원하시지요? 구원받는 방법 알려드릴까요? 알려드리니 돈 내세요.” 그게 아니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다 한마디한마디 다 들어 있습니다.
이제 그 창세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도 안에 창세기가 어떤 식으로 완료된 상태에서 지금 복음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지를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우리가 없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 말 맞지요? 창세기에 의하면. 그러면 제가 “여러분, 우리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없었던 존재입니다.”라고 하면 “예, 동의하지요. 믿지요. 그래서 없었던 존재인데 은혜로 잘 살고 있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옆구리를 팍 차고 들어와요. 뭐냐 하면, “이거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옆구리를 팍 차고 들어오면 갑자기 입에서 “No!”라는 말이 나와요. 지금 머리 나쁜 사람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우리가 없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우리의 바탕은 없는 겁니다.
없는데 어떤 법, 지시, 명령이 들어오니까 “아니요!”라는 말을 했을 때 갑자기 없던 나가 생겨버렸으니까 없었던 적이 있었다는 창세기의 원리원칙에 지금 위배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뭐야? 갑자기 네가 어디서 생겨난 거야?” “이거 해줄래요?” “아니요!” 누가? 내가 아니오, 라고 판정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창세기 속의 내가 없었는데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버릴 때 결국 나 중심으로 벌써부터 뭔가 시작이 된 거예요. 창세기는 뭐냐 하면, 없었던 적이 있는 것에서 뭐로 바뀌는가 하면, 흑암으로 바뀌어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는 내가 있다. 팩트에요. 내가 있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게 팩트가 아니고 네가 있기 전에 하늘나라에 누가 계시다는 것 그게 팩트에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분이 있음을 증명하라고 여기에 우리가 생긴 겁니다.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찾지를 못하고 결국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인데 이상하게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있게 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아니요, 가 생겨요.
“나 그 일 못합니다. 아니오!”라고 하지요. 누가? 내가 아니오. “저는 아니오, 라고 합니다.” “이유는?” “이유는 묻지 마세요. 내가 싫다는데 왜 말이 많아요?” “누가?” “내가요.” “너 어디서 나왔지?” ‘내가 어디서 나왔지?’ “나왔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어디서 생겼는가, 그것은 창세기에 의하면 안보여요.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그 보이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흑암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사야 42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하는 대목이 있어요. 아까 교독문에도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이 흑암이 될 때, 어두움이 될 때, 비로소 그 흑암의 일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내 원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찾지 못하는 곳에 계시다는 것이 연결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조직사회에서나 누굴 만날 때에 사회라는 것, 이 세상 자체가 그래요.
뭔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와서 “이거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할 때 역겹지요. 응대를 해 주면서 응대하는 손이 뻣뻣해집니다. 부자연스럽고요. 내가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되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거예요. 우리 집사님이 가끔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무 힘들 때는 울고 싶다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에 다들 동감할 거예요. 내가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되는가. “아니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순간 그게 바로 어두움이라는 사실, 벌써 내가 결정한 단어라는 사실, 이게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신이, 성령이 흑암가운데 있었더니, 드디어 하나님의 일이 개시해나가는 거예요.
“보자, 보자. 한 번 볼까?” 그런데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것보다 더 못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래, 내가 아니오, 라고 해야 되지만 또 주의 종이 시키니까, 영적인 일이니까 해야지.’ 해서 “예, 하겠습니다.” 하는 이것, 더 미워.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뭔가 ‘이것은 내가 하기 싫지만 강요하니까 억지로라도 주의 일을 받자.’ 해버리면 반드시 뒤에 뭐가 오느냐 하면, “이거 할 테니까 무슨 보상 해주렵니까?”결과를 딱 계산하게 돼요.
그러면 결과를 따로 계산하는 보상창고가 만들어져요. 내 안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로 복 주시든지 구원을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창고가 마련돼요. 그러니 이것은 아니오, 해도 문제고 예, 해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차피 둘 다 흑암에 속하니까. 지금 제가 퀄리티, 고난의 퀄리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 사도들이 하는 이 고생, 교회 돈 빼먹는다고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가짜들의 이 고생과 진짜 사도의 고생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 중요해요. 말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미래에 입각해서 과거를 재조립하시는 그것이 사도가 하는 고생입니다.
미래에 입각해서 과거를 재조립해요. 쉽게 풀이하겠습니다. 사도가 아는 과거 있잖아요. 그 과거를 주님께서 전부 다 무효화시키고 “이미 사도 너는 구원받은 입장에서,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은 입장에서 피와 연결된 채 너는 이러한 의미로 나에게 이끌려 왔다.” 하는 것으로 쫙 깔아버리는 겁니다. 사도의 과거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사람들 잡아 죽였잖아. 그래야 했어야 했었어, 너는! 네가 일곱 살 때 오줌 쌌지? 지도 그렸잖아요. 그렇게 했어야 했었어.” 인간은 자기에게 보상창고에 넣을만한 괜찮은 자기의 경건과 거룩, 그런 것만 기억을 하거든요. 일방적인 기억이에요. 그 보상창고에 있는 그것을, 그것을 저는 결산장부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착했는가, 그것은 퀄리티(질)가 아니고 퀀터티(양)의 문제입니다.
양으로 내가 얼마나 착한 일을 하고 열심 내어 살았는지 그것을 검사하는데 그게 바로 폐기처분 되어야 할 지옥 갈 과거였습니다. 그런 일 하세요. 하되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일 조차도 해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해야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피은혜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너는 그 따위 짓들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점점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루하루가 과거가 돼요. 과거가 되면 여러분은 뒤돌아보면서 ‘내가 그다지 나쁘게 살지는 않았잖아.’ 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가짜사도와 같은 삶이 되는 겁니다.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그래, 견디자. 주님이 고난의 길을 갔으니 나도 고난의 길을 가야지.’
이걸 누가 했느냐 하면, 베드로가 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제 몸 헌신하겠나이다.” 했어요. 그게 바로 마귀소리입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는 그걸 가지고 신앙에 귀의한다고 하는데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 여러분,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몸을 드리고 귀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주님이 난입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허락도 없이 그냥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필드 하키, 아이스하키에서 공을 몰고 가듯이 뒤에서 몰아붙이고요, 앞으로 잡아당기고요, 좁은 길은 없어요. 없는데 가다 보면 그 때 그 때 잠시 잠시 보여줄 뿐이에요. 그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내가 길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천로역정>이라는 그 책에서나 찾으라는 말이지요.
하여튼 청교도니 이런 사람들 진짜 죽이고 싶은데 성경에서 심판은 내게 맡기라고 했으니까 내가 그럴 잽도 못 돼고요. 난 청교도라고 해서 얼굴이 파란 줄 알았어요. 청포도처럼. 뭘 귀의 합니까? 그냥 막 살지. 막 살아도 주님 안 찾아오더라. 그러면 그냥 막 사세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날라 가버리고, 완전히 다 거덜 나 버리고, 지금까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했잖아요.
성경 뭐 봅니까? 나옵니다 분명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께서 쫙 깔아준 과거입니다. 어떤 과거인가 하면, 왜 나 같은 인간은 피만으로 구원되어야 될 정도로 더러운 인간이냐는 말이지요. “자 보자.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 그게 바로 사도가 겪어야 될 사도이 고난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아스팔트, 과거를 새로 깔아준 거예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과거를 새로 깔아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과거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지요. “지금 열심히 믿으면 나중에 구원해주겠지.” 그런 마귀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맞아죽어도 쌉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산다고 구원, 그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어디서 내 인생은 사단 나야 되고 어디서 내 인생은 어두움이 되어야 되느냐?
다시 말해서 나는 창세기 1장의 입장에서 “너는 흑암 돼.” 흑암에 처한 자를 옥에서 나오게 하는 그 역할은, 그 사명, 그 숙제, 업무는 내 담당, 예수님담당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담당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냥 편하게 살면 돼요. 어차피 잊혀야 될 그거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사도가 하는 일은 그거예요.
육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 목사가 할 일도 그겁니다. 육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영의 자리에 옮기느냐 하는 겁니다. 수십 년 이야기했지만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못 옮깁니다. 왜? 단절이기 때문에. 아직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영의 자리로 옮기게 해줘야 그게 사도요 그게 오늘날 성령받은 목사의 일입니다.
그러면 육의 자리와 영의 자리가 끊어져 있는데 그 연결고리가 있단 말입니다. 그 연결고리가 뭐냐 하는 겁니다. 연결고리를 알아야 돼요. 그 연결고리가 뭐냐? 알려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이요. 이 본문 진짜 재미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했어요. 여러분이 이 성경대목을 한번쯤은 봤었을 거예요.
하나님이 구원해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 작은 어린애, 작은 소자, 무시하면 무시될 만한, 얕잡아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네가 만약 유혹해서 실족하게 되면 그 책임을 너에게 묻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연자 맷돌 그 무거운 돌을 가지고 목에 매서 깊은 바다에 빠져야 된다는 거예요. 해석에 있어서 그 연자 맷돌을 소자에게 하느냐, 실족하게 한 인간에게 하느냐, 하는데 대부분은 실족하게 한 그 인간에게 하는 저주라 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다시 말해서 목사가 되어서 교인 하나를 실족케 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면 그 목사에게 연자 맷돌을 매서 바다 깊은 곳에 빠트린다는 거예요. 목사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집사나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은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세상에 지옥 갈 뻔 했다. 말조심해야 되겠구나. 같은 교인끼리 말조심해야 되고 특히 목회자들은 주의해야 된다. 실컷 잘 하다가 교인 하나 실족시킨다면 지옥 가는 거야. 안되지. 이 말씀 안주셨다면 나 큰일 날 뻔 했다. 정신 차려서 행동이나 말에서 조심해야 되고 절제해야지.’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그게 엉터리입니다. 이게 어두움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사도는 무거운 돌을 자기 목에다 감아버려요. 이 소자가 처음부터 어느 바닥에 있다고 주님의 은혜로 끄집어내졌는가를 실증하는 그 바닥의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그 바닥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면 뭐가 기다리는가 하면, 어떤 인간도 주님의 십자가의 피 은혜 없이는 이것을 풀고 심연을 헤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는 이 본문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목에다가 이 돌을 달겠습니다.”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약속이 그거예요. “저주의 바닥을 쳐라.” 아무도 갈 수 없는 저주의 바닥, 누구도 회피하는 그곳에 가라는 그것이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뿐만 아니고 성경 본문에서, 화가 있으리로다, 저주를 받을찌어다, 여기에 대해서 아낌없이 사도는 다 뛰어듭니다. 그것이 뭐냐? 사도가 줄줄 새는……지난 시간에 활어차 이야기했지요. 활어차 지나가면 물 다 흘리고 가잖아요. 줄줄 새고 있는 거예요. 그 고생이 사도에게서. 그게 퀄리티가 달라요.
모든 인간은 자기 지키기에 급급해요. ‘그래. 목사가 되어서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돼. 집사가 되어서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돼. 이것은 주의해야 돼. 마태복음 18장에도 있잖아. 연자 맷돌, 무섭지. 무서우면 그런 행동 하지 말라고 주신 말씀이야.’라는 생각을 해서 벌벌 떨면서 자기 챙기기에 급급한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창세기의 원칙에 있어서 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는 그 원리에 위배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내가 있다는 이것이 팩트가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 아니에요. 나를 있게 하신 그분이 사실이에요. 나는 내가 없음으로 자꾸 환원되어야 됩니다. 내가 있으면 골치 아파요. 사단이 나요.
이것은 해야 될 것, 이것은 안해야 될 것, 성경말씀에 비추어서 순종해야 될 것, 이것은 안해야 될 것, 이렇게 판정하는 내가 이게 곧 어두움이 돼버려요. 내가 없었던 적이 있다는 이 말은, 내가 배가 고프다, 몸이 아프다, 그것 가지고 징징거리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그것 가지고 불평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너 뭔데? 너 원래 없었어. 없는데 왜 징징거리고 마치 내가 영원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창세기도 모르고 착각하느냐?” 그 말이에요. 사도가 이 저주의 말씀에 뛰어든다는 당신의 주장의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로마서 9장 3절에 나옵니다. 미국 뉴저지교회에서 첫날에 했던 강의.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무슨 말입니까? 이미 나는 구원받았기에, 말이 어려워요, “이미 나는 구원받았기에 나는 왜 저주에 합당한 인생일 수밖에 없느냐를 나는 주저 없이, 주저 없이 그 생을 살리라. 비난해라. 욕해라. 원래 나는 그런 인간이야. 나 개야. 원래 그래. 그리고 그런 가운데의 일부야. 죄인중의 괴수야.”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죄 없는 자가 저 여자를 돌로 치라.”는 그 말은 너희들 내 앞에서 다 그렇고 그런 인간이니 저 여자 치려거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말이지요. 지금 주님은 창세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자기 살리겠다고 급급해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나왔습니다. 저 죽고 난 뒤에 천당가야 되겠습니다.” 이거에 급한 거예요. 네가 뭔데? “그것은 모르겠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게 마귀 생각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실 때 이 세상을 소각하려고 준 겁니다. 신명기 4장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24) 소멸하는 불, 불 질러 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과연 어디부터 따져야 되느냐, 우리가 과연 이 땅에 두 발 딛고 살 자격이 있는 가부터 따져봐야 돼요.
민수기 16장 31-33절에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평소에 우리가 땅 딛고 살 때에 이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열어버리니까 죽었어요. 그 말은, “네가 누군지를 모르지? 너는 땅 딛을 자격이 없어.”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일단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 하라고 만들어놓았어요. 그것을 가지고 콘크리트 타설이라고 봅시다.
보통 어릴 때 공사하는 것 보잖아요. 콘크리트를 1층과 2층 사이에 부어요. 그러면 편편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며칠 기다려야 돼요. 옛날에는 실력이 없어서 그게 굳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양생이라 합니다. 사흘쯤 뒤에 인부가 가 본다고요. 가보면 세상에 여기저기가 고양이 발자국으로 구멍이 파여 있어요. 그러며 일군들이 얼마나 화를 낸다고요.
“들어가지 마세요.” 하는 것은 사람한테나 통하는 언어지 고양이한테는 ‘들어가면 안 되는구나’ 그런 것이 없잖아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세상을 만들어놓았는데 뽀글뽀글 인간들이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고양이처럼 철딱서니 없이 구멍을 다 뚫어놓았어요.
이것은 우리교회, 저것은 너네교회, 어느 교회가 더 크냐, 어느 교단이 더 크냐, 전부 자기 사정, 사적인 자기가정문제, 개인문제, 직장문제, 뽀글뽀글 하니까 피를 생각할 여유도 없고 틈도 없는 거예요. 자기 복 받겠다고 교회 오니까, 자기 천당 가려고 교회 오니까 철딱서니 없는 고양이 발자국을 남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소위 파열, 찢어짐인데, 네 맘껏 밟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온통 자기 세계인줄 알고 거기서 하나의 사회를 만들었어요. 국가를 만듭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권력관계에요. 힘입니다. 권력관계라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면 개인보다 사상이 더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개인보다 사상이 더 중요해요. 개인이라고 우기지요. 사상이 하나 들어오면 훅 따라갑니다. 오늘 아침에 장로님이 이야기하시는데 어디 가니까 자기 아내를 누가 붙들더래요. 박사모에서 붙든 거예요. “지금 박근혜가 인권침해 당하고 있다. 보수의 구심점이 없으니까 박근혜가 빨리 풀려나와서 다시 재도전해야 됩니다.” 하면서 서명해 달라고 한 거예요.
장로님 아내가 “나는 박근혜가 싫어요.” 했답니다. 마치 공산당이 싫어요, 와 똑같은 거예요. 얼마나 현명합니까? 왜냐하면 힘없는데 언제 내가 힘없는 박근혜를 좋아했습니까? 힘 있는 것을 알고 좋아했지요. 힘 빠졌는데 왜 좋아합니까? 이처럼 인간은 사상중심으로, 이미 권력관계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말이지요.
어떤 분이 교회 꾸준히 나오고 말씀 좋다고 소문도 내고 하면서 한 2년 지났습니다. 성도인 것 같아요. 잘하면 성도일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주일 빠지고 수요일에 빠졌을 때 ‘성도구나.’ 비로소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게 바로 성도다.’ 빠질 때 빠질 수 있는. 아! 전에는 복음이라고 하면서 꾸준히 오기에 ‘성도일 수도 있다.’ 하도 그런 사람이 왔다 갔다 해가지고.
“바빠서 빠졌습니다.” ‘아, 성도였구나. 나의 어른이시다. 정말 내가 본받아야 할 어른이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가 귀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 몸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몸을 우리를 위해서 바쳤어요. 원리를 알아야 돼요.
원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보통 어떤 열차에 보면 바퀴에 홈이 파여 있어요.
궤도 자체가 그 홈을 딱 받쳐줘요. 높은 산에 올라가는 궤도열차, 스위스 같은데 있거든요. 그것은 아무리 해도 탈선되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고생이 보여주는 것은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가는데 그 이음새가 아무리 해도 탈선이 안되는, 영원히 탈선이 안되는 그 연결고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이 피로 구원받았기에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어떤 일이 발생되더라도 이 천당 가는 궤도는, 피로 가는 궤도는 탈선이 없습니다.
퀄리티가 달라요, 퀄리티가. “이거 고생하면 구원받습니까? 나 이만큼 고생했으니 구원받는 것이 맞지요?” 이거 아니에요. 이거 다 가짜고 전부 마귀들의 소리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한테도 똑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스님이 두분 찾아와서 노래를 한 곡 불렀답니다. 60좀 넘은 스님이. 내가 “무슨 노래를 불렀습니까?” 하는 그 질문을 차마 못했는데 노래를 하나 불렀대요. 부르고 난 뒤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집사님께서 그 스님 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복음을 듣고 하는 말이 “내 평생 똑바로 눈 쳐다보고 영적 이야기 하는 사람 처음 봤다.” 합니다.
중 복장 다 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똑바로 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는 거예요. 집사님이 선제공격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가만있지 않지요. 중 노하우가 있잖아요. “그래요. 절이나 교회나 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어느 교회 다니는지 모르겠으나 교회 다니면서 구원해줬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우리 집사님이 “구원시켜주지도 않는 목사나 교회에게 왜 헌금을 해요?” 이렇게 해버렸어요. “목사가 구원하고 교회가 구원해요? 거기다가 돈을 왜 내요?” 이렇게 하니까 그 승려가 벌써 두 방이나 맞았지요. 두 번이나 다운 된 거예요. 그랬더니 “당신 이단이지?”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자기가 아는 모든 교회는 자기 상식상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약간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중이 하는 말이, “맞습니다. 내가 땡 중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땡 중임을 시인했어요. 졌다는 패배감이 미리 있었던지 “그래도 내가 집사님을 탁 보니 노란색을 쥐고 있으면 그 노란색이 기운을 줄 것입니다. 노란색을 늘 가까이 하게 되면 나중에 책임 있는 위치에 가는 여성분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하고 가면서 두 사람이 팁을 주고 가는데 큰 스님 8만원 주고 다른 하나 작은 스님은 4만원 주고, 12만원 챙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보고 그랬어요. “그게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야기를 또 들어보니 그 큰 스님이 또 왔어요. 그냥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고 산나물을 뜯어서 성의와 정성 다해서 온 거예요.
다시 와서 하는 말이, 노란색을 가까이 하면 팔자가 좋을 것이고, 그걸로 시작해서 49제니 뭐니 자기 레퍼토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사주팔자 보는데 5만원이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마중물이라는 것이 있어요. 약간의 돈을 먼저 주고 단골 삼으려는 마중물.
교회에서 이웃사랑 먼저 해서 그 사람을 자기 교회 삼아서 십일조 빼내는 수법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성격의 마중물이든지 안 그러면 껄떡대는 것인지. 딱 둘 중 하나입니다. 더러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위선과 조작, 신앙을 조작해요. 사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할말이 있어요. 신앙을 조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 앞에 귀의, 바치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목에다가 연자 맷돌 달고 “이미 구원받았냐?” 그러면 아낌없이 주께서 가라 하면 가면 돼요. 골프장에 가면 되고, 등산가도 되고, 평소에 잘 하는 것 있잖아요. 하세요. 찾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이러한 짓거리도 이미 이것을 하는 것과 예수의 피로 용서받는 것과 관련성이 있는데 이게 틈이에요.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면 안돼요. 성령 받은 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틈을 자랑하는데 틈이 뭐냐? 십자가 피입니다. 그 틈, 주께서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서 우리를 받아서 용서했다는 그 틈을 증거 해야지 “그러니까 나 구원받았잖아. 나 성령 받았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 틈, 십자가 틈, 그게 팩트입니다.
달나라 가는 것 맞아요. 내가 존재하는 것 팩트 맞아요. 있어요. 꼬집으면 아파요.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팩트, 사실이에요. 진짜 사실은 하나님이 피 흘려 죽었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 손에 맞아 피 흘려 죽었다는 것,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 자꾸만 내 생각만 합니다. 남에게 잘했는지 못했는지, 얼마나 책임감을 느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내가 의로운지 악인인지. 마치 베드로가 마귀한테 속아서 그런 식으로 주님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처럼 이 수상한 과거, 이 가짜이 과거,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이 과거 속에서 십자가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