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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에 대한 오해(고후11;16-21) 1709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11. 17:47
2017-09-10 12:33:05조회 : 80         
   사도에 대한 오해17091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도에 대한 오해(고린도후서 11:16-21)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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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9-10 13:26 

사도에 대한 오해 

2017년 9월 10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16-21 

(11: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11:21)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사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고린도교회는 자기네들이 정상적인 교회인줄 알고 계속 밀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도 있고‘ 복음’도 있고, ‘성령’도 언급하고 있으니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들 앞에 등장하자 졸지에 그 고린도교회는 악마가 이끄는 교회임이 들통난 겁니다. 

어디가 문제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바닥’을 몰랐던 겁니다. 현 자기네들 욕구를 사랑의 하나님이 순순히 받아줄줄 알았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열망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줄 알았던 겁니다. 악마는, 인간을 구원과 직접 연결시켜주었습니다. 즉 구원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일단 구원될 자격은 된다고 가르쳐준 겁니다. 

실은 이것마저 하나님의 치밀한 전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구원에 관한 온갖 구색은 다 갖추게 해놓으시고 차후에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접하게 하므로서, 오늘날 이미 예수님 십자가 지신지 오랜 기간을 흘렀을 때에 나타나는 양상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사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사도 이후에, 예수님에 관한 조건들을 구색으로 갖추어놓고 지옥갈 교회들을 꾸미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므로서 과연 진정한 예수, 진정한 복음, 진정한 성령, 진정한 교회가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 지를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가짜 교회들은 그 출발점이 보편적 구원욕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즉 ‘어쨌든 나는 구원되어서 천국가야 되겠다’는 겁니다. 누가 마음대로요? 어느 인간치고 자신이 죽어 지옥가는 것을 미래의 기쁜 보람으로 삼는 이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만큼 고생했으면 이제는 보상차원에서 죽어서는 호사를 누리고 싶은 것이 모든 인간들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기 구원을 사도는 문제 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다른 예수요, 복음이 다른 복음이요, 성령이 다른 성령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양상들이 예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몸소 자신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오랬동안 해왔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는 순간, 비로소 그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사울이라는 자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복음’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란 ‘어리석음’과 그리고 ‘복음’의 만남으로 완성형을 보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3-25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성령이 오시면, 인간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연결시키십니다. 하지만 가짜 성령으로 작동하는 자들은 개인과 구원을 직접 연결시킵니다. 그래놓고 여기에 필요한 것이 뭐가 있는 살피는데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 부활, 성령, 복음, 언약, 등등의 각양 좋다는 것을 다 총동원시켜 집중합니다. 

사도의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질책은 교회를 바르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경찰서 형사들이 몽타즈를 작정하고는 수배중인 사람들을 찾으러 다닐 때, 이 몽타즈에 합치되는 사람만 원하듯이, 주님께서 사도에게 이런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은 ‘갈 사람만 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악마는 사람들에게 개인과 구원을 직접 연결이 가능하다고 속이므로서 개인들로 하여금 힘을 모으게 합니다. 이 힘들이 모아져 교회를 구성하기에 그 교회는 오로지 더욱 더 힘 축적에 매진하게 됩니다. 자체적인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온갖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바자회라든지 자체 친목 다짐에 주력합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힘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케한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힘과 힘이 결속으로 다져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질책을 하니 그들은 사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내부적인 에너지가 사도를 향해 사용되게 됩니다. 이처럼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들, 힘될만한 것들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나는 바닥이 아니라’로 자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악마의 술책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3-24에 보면,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평소에 자신들부터 힘 모으기에 온 전력을 기우린 자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교회 지도자는 역시 힘을 발휘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종의 증거됨으로 자랑질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부럽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보기에 그런 지도자가 자신들에게도 자랑스럽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2-23에 봐도, “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희생’입니다. ‘힘’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못난 바닥적 존재라면 에수님이 죽으셨겠는가 라는 사실이
날마다 자기 내부에서 바람처럼 뿜어져나오는 자가 바로 참 성도입니다.
반복해서 자신이 바닥인 것을, ‘말씀의 위력’으로 실감하며 사는 겁니다.

날마다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 아닙니다. 

‘주님의 완성된 말씀’이 새롭게 분출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날마다 바닥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힘 끌어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만 증거하는 도구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색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서,
참된 일은 주님만 지금도 살아계셔서 활발하게 진행됨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54강-고후 11장 16-21절(사도에 대한 오해)1709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16절-21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16-21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지금 이 내용이 무슨 이야기 하면, 사도바울이 비꼬아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해서죠. 고린도교회가 자랑거리가 없다면 그것은 사도가 아니다, 자랑거리가 없다면 이 고린도교회를 지도할 자격이 없지 아니한가, 라는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자랑거리를 가지고 고린도교인들의 마음을 강탈한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악마의 조직원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그것을 미리 알고, 나는 자랑거리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옛날에 이주일이 그런 소리 했거든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했잖아요. “ 자랑거리가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자랑하는데 그 자랑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지만 내가 자진해서 당신들의 어리석은 판에 저도 어리석음을 가지고 끼어들겠습니다. 내가 사도로서 자랑하는 그 질과 여러분이 그렇게 추앙하는 당회장 목사,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그리고 그 자랑거리가 얼마나 크게 다른지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투로 지금 이야기하신 거예요.

보통 경찰서에서 범인을 잡을 때 용의자가 나오면 몽타주 작성해서 비교하고 대조하잖아요. 사도바울의 복음전파가 그래요. 성도라는 것이 있고 그 성도다움 가지고 고린도교회에서 대조하고 비교하는 겁니다. 쉽게 해서 갈 사람만 가자,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만 가자, 그런 겁니다. 성도냐, 아니냐를 따질 때 예를 들어 사진 같은 것을 가지고 “당신은 아니야.” 혹은 “당신은 맞네.” 이렇게 대조하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힘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에 있어요.

나대신 누가 희생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성도고 “우리 힘 모읍시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딱 대조해서 “이것은 마귀 종이잖아. 이것은 마귀집단의조직원이네.” 이렇게 판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걸어놓은 간판 같은 것에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대조의 모델이 있어요. 몽타주처럼 표준모델을 대조해봐서 힘을 붙들고 힘 가지고 교회 하겠다면 그것은 백퍼센트 사탄의 집단입니다.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 힘은 의리에서 나와요. 의리와 인간대 인간의 정으로 나와요. 동정심, 우정, 사랑, 인간 대 인간의 거기서 힘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교회에서 결속력을 다지고 단합대회하고 바자회 하고 자주 모여서 놀러가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힘이 돼요. 

사람은 베풂을 받았으면 채무자가 돼요. 베풂을 받았으면 반드시 베풀어줘야 된다는 채무감 때문에 그 집단에서 발을 못 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돈을 헌금하게 하는 이유가 뭔데요? 교회 경영방법이 그거예요. 어쨌든 간에 목돈 내게 해서 교회에 무슨 물의가 있더라도 발을 못 빼게 하는 겁니다. 발을 못 빼야 목사의 생계비가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후대책도 되고.

그래서 목돈 낼 때마다 승진시키는 거예요. 서리집사에서 장립집사로, 또 장로로. 또 보통 여자집사에서 햇권사로 자꾸 승진을 시켜서 거기서 발을 못 빼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서 거기서 발을 뺐다가는 한 2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남의 결혼식에 부조 다 했는데 그만 발을 빼버리면 내 결혼식에 부조 안 나오잖아요. 그런 것도 감안하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결속력입니다. 결속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서로의 자기 잘하는 짓, 재주 많은 것,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죽 주섬주섬 내놓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함께 있습니다.”를 증거물로 쳐다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자랑거리가 없으면 교회 나오기가 곤란하지요. 

어제 이혼했는데 오늘 교회 나온다. 야, 이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오후기도 때 보니 믿음 좋다 싶었는데 아니었네. 복 많이 받은 줄 알았지.’ 이런 뒷담화를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감당 못하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의 친목모임, 또는 모임이 된다는 것은 뭔가 아직까지 기죽지 않는다는 요소들이 구비되어 있을 때 그 때 같이 모이는 겁니다.

“니 북유럽 같다 왔나?” “난 중국 갔다 왔지.” 뭐 이런 것을 내놓을 것이 있어야지요. 그 대표자를 사도바울은 악마의 집단, 악마가 세우는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악마의 집단에서 예수를 언급하고, 복음을 언급하고, 성령을 언급해요.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예수, 복음, 성령을 언급하는데 하여튼 구색은 다 맞춰 놨어요. 

예수 있고, 복음 있고, 성령 있으니까 하나님의 교회처럼 보이는데 사도가 오기 전까지는 그 예수가 예수인지 알았어요. 사도가 오기 전에는 그 복음이 복음인줄 알았고 사도가 오기 전에는 그 성령이 성령인줄 알았습니다. 내부결속이라 하는 것은 모든 에너지가 내부를 결속하는데 다 집중이 되지요. 

집중이 되는데 거기에 만약 진짜 복음 가지고 사도가 딱 떠버리면 그 에너지가 어디로 향하는가 하면, 이제는 힘으로 우리 내부결속을 다지는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이 나타났다는 쪽으로 모든 에너지가 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사도바울편이냐, 아니면 사도바울과 대적하는 편이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모델이 형성되어 버려요. 구원받는 모델이.

사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언급하는 편이 따로 있고 그게 아니고 인간들의 의리와 정으로 결속되어 있는 교회가 따로 있어요. 제 삼자가 보기에는 모두가 다 예수 이야기하고, 모두가 복음 이야기하고, 모두가 성령 이야기를 하니까 구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작전을 벌여서 고린도교회가 완전히 악마의 수하에 들어가게 만들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셔요. 그렇게 해놓고 거기에 뒤늦게 사도바울의 편지로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함으로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용어를 예수, 복음, 성령 외친다고 그게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바울 시대에 전략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예수라고 한다고 형제가 아니고, 복음이라고 한다고 형제가 아니고, 성령 언급한다고 해서 형제가 아니구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엄연히 이 세상에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구나.’라는 것,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그런 사례를 접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제 해석이 복잡해져요. 

이렇게 하게 되면 속으로 ‘목사님, 우리 교회는 진짜 사도편이지요.’ 이렇게 대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우리는 믿음의 지조와 정조를 굳게 지킵니다.” “목사님, 우리 그럽시다.” 이렇게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어요. 언제 믿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언제 예수 믿은 적이 있어요? 믿어야 믿음의 정조든 지조가 있지요. 자기 맘대로 살면서 뭘 믿었어요.

“나 믿은 것 맞지요”라고 자꾸 저에게 확인시킬 필요 없어요. 제가 가락교회 강의를 하는데 가락교회 김중우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아주 상당히 재미있는 질문인데요. 어떤 교수하고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데……, 이 이야기가 그분 귀에 다 들어갈 수가 있어요. 제 설교를 늘 듣고 있기 때문에요. 그분이 유튜브에서 어떤 괜찮은 목사님의 설교를 봤다는 거예요.

괜찮은지 아닌지 궁금해서 그 초짜 교수님이 집사님에게 물었어요. 그 목사님의 설교가 뭐냐 하면, 십일조 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전도하지 말라, 성경보지 말라, 이런 조로 하지 말라 시리즈로 가는 거예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유튜브에 내놓은 설교 제목들이 그래요. 그래서 집사님에 자기가 판정하지 않고 저에게 넘겼어요.

이 목사님의 설교내용이 복음인지 봐 달라 해서 제가 죽 봤어요. 보니까 참 유사품이 많아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이겁니다. 주와 합일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주와 합일해야 구원받는다는 이 사상은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사상이에요. 개혁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렇게 돼요.

결국 개인구원입니다.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이 화근이에요. 왜 이렇게 사도바울이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예수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성령이야기하고, 서로 교제하면서, 떡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아낌없이 내 것 주면서 왜 그렇게 해서 지옥 가는 교회를 만들었느냐? 사도행전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그것이 사도바울이 오기 전에 지옥 가는 교회가 되는가?

그 내부의 바닥에 안 가봐서 그래요. 예수님의 희생, ‘아, 그거 우리교회도 가르친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희생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희생으로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엘리베이터 타고 저 바닥에 내려가야 돼요. 바닥에 내려가지 않고 예수님의 희생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지옥 가는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이에요.

야구 좀 좋아하는 사람들 ‘바람의 아들’이라 하면 다 좋아하지요. 바람의 아들, 요새는 바람의 손자도 나와 있지만 바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면, 이 종범 선수에요. 하도 치고 빠르게 달리고 도루도 잘해서 별명이 바람의 아들입니다. 이 종범 선수가 현역선수일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바람의 아들 이것이 성도에게 참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바람의 아들이라 할 때 성령은 바람같이 불거든요. 그러면 성도의 성도됨이라 하는 것은 진짜 이 종범 선수같이 바람의 아들이 되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새로워지는 것이 성도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새로워져야 돼요. 그런데 그 뭐 하지 말라 시리즈의 그 사람은 온통 관심사가 자기 구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 받아서 내가 새로워져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깨끗한 신부가 되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는 거예요. 이것은 줄창 자기구원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구원받을 자격이 됩니까?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있다고 간주하고 하는 그 간주를 누가 했겠어요. 마귀가 배후에서 그렇게 여러분을 부추긴 겁니다.

기어이 구원받아야 되겠고 기어이 천국 가야 되겠다는 거예요. 갈수록 돌멩이처럼 딱딱해져 버려요. 바람의 아들이 아니고. 마귀의 아들이지요. 아담의 아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그 아들이에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 좋다는 것은 다 주워 모으는 겁니다. 로얄제리, 알로에, 자기 몸에 좋다는 것, 게르마늄까지 차고, 동충하초니 그런 것까지 하여튼 자기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예수도 끄집어내고, 성령도 이야기하고, 복음도 언급하고, 구색 다 맞춰놓았어요. 그런데 사도가 딱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말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이상적인 교회였는데 사도바울 딱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전부 다 사기였습니다. 돈 사기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영혼을 사기 친 거예요. 그걸 몰랐어요. 오늘 본문 11장 20절에 보면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교회 지도자, 목사지요, 목사가 교인들을 자기의 부하직원으로 부리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전부 다 돈 빼내는 거지요, 자고하다 하거나, 자기자랑, 그리고 뺨을 칠지라도, 심지어 구타까지 해도 이 사람들은 용납하는 정도가 아니고 “할렐루야, 더 때려주세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발언이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정이 이 정도까지 될지를 상상도 못했지요. 사도가 등장하니까, 몽타주를 대조하고 비교해 보니까 이게 마귀라는 것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 말씀에 주의할 것이 또 있어요. 하도 교회가 발달하니까 온갖 묘책이 다 등장해요. 

어떤 교회에서 새롭게 목사를 뽑는데 전임목사가 하도 고린도후서 11장의 이야기처럼 개판을 치고 카리스마 앞세워서 교인들을 자기 종으로 삼는 통에 지긋지긋하고 질려버렸으니까 이제 그 후임자는 정말 섬기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는 소문을 내니까 그 다음에 어떤 선보러 오는 목사가 있겠지요.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 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 본문 가지고 설교하기를 “여러분, 저는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 목사입니다.”라고 그걸 내세워서 그 교회 취직하려고 오는 사람, 주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누가 대장질 하느냐 하면, 장로들이 또 대장질해요.

교회는요, 이러나저러나 구심점, 그 중력의 중심점이 없을 수가 없어요. 그 교회 처음 설립할 때 자본금 많이 댄, 주식 많이 갖고 있는 그 장로는 대를 이어서 그것은 자기교회에요. 특히 시골에 그런 것이 많아요. 땅 바쳐서 하나님께 드렸다고요? 그런 법은 없어요. 자기한테 바쳤어요. 대대로 오는 목사는 그 장로한테 굽신 거려야 되고 장로의 비위를 못 맞추면 언제든지 사표내야 되고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상당히 어렵다니까요. “그래. 우리는 섬겨야 돼.” 섬기는 목사가 수천 명이 됩니다. 취직하려고 “섬기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줄 서 있어요. 줄의 끝이 안보이네요. “한국교회 썩었어. 개혁으로 돌아가야 돼. 목사는 섬겨야 해. 너무 돈 밝히고 여자 좋아하고 그러면 안 돼.” 그런데 줄 서 있는 사람이 저 끝이 안보이게 서 있어요. 

거기에 또 빠져가지고 훌륭한 목사가 왔다고요? 교인들 자체가 언제 믿은 적이 있어요? 믿은 적이 없어요. 그거 교회 붙들고, 교회 붙들면 구원되는지 알고, 자기 구원의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자 그러면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상당히 오늘 본문 해석이 어렵습니다만 어려운 길이라도 같이 들어섭시다.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반대편에 서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향해서 “너 너무 나댄다. 우리 교회가 뭐가 문제인데 그게 불만이어서 자꾸 시비 거느냐?”라고 누구 입장에 서느냐 하면 기존교회 입장에서 서서, 이 본문을 안 봤다 치고, 기존교회 중심으로 사도바울의 태도에 대해서 문제 삼으면 돼요. 그러면 확 이해됩니다. 

‘우리교회가 만나면 인사 나누고, 그렇게 정겹게 지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뭐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노릇 하려고 애를 쓰고. 그런데 뭐가 문제인데 사도는 그게 불만이 되어서 시비 걸듯이 왜 그렇게 닦달을 내는가? 좋은 게 좋은 건데, 라는 심정으로 이 본문을 보시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직장생활 하고 피곤하지만 일요일에 교회 나와 주는 이것도 얼마나 착한 짓입니까? 다른 사람은 아파서 지금 집에서 자고 있다니까요. 우리는 성도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바쁜 시간에도 교회 나왔다는 거예요. 믿는지 아닌지, 어쨌든 ‘믿는 사람이기에 교회 나와 줬는데 여기서 더 요구하면 곤란하지. 여기서 뭘 더 해야 해?’라는 어떤 불만을 가지고 반대로 사도를 공격하는 거예요.

우리가 완전한 자도 아닌데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 말라고 사도를 공격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드러나느냐 하면, 사도가 너무 나댄다. 바빠서 성경 안볼 수도 있고, 바빠서 기도못할수도 있는데 사도는 4차 산업시대에 안 살아서 그래요. 

사도는 한가한 시대에 살았지 요새같이 이렇게 바쁜 시대에 언제 교회가고 언제 성경대로 살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한가할 그 당시의 성경가지고 우리에게 너무 윽박지르지 마, 라는 마음이 여러분 마음에 드신다면 이제 성경해석이 본격적으로 개시가 된 겁니다.

벌써 개시되었지요? 사도가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진짜 예수, 진짜 성령, 진짜 복음은 바닥을 쳐야 돼요. 그 바닥은 어떻게 치느냐? 사도 본인이 바닥을 쳤어요. 어떻게 쳤느냐 하면, 방금 제가 예를 들었던, ‘지금 내가 교회 나가주는 이것도 참 힘들어죽겠는데 더 이상 떠밀면 나 자빠져.’ 하는 에너지의 자기방어체제가 있어요.

나름대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거기서 더 밀면 나는 신앙이고 뭐고 하나님 더 못 믿어, 라는 마지막 마지노선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바울이 사도되기 전의 사울 때에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말이지요. 그 때 누가 찾아왔느냐? 예수님이 찾아왔거든요. 그 때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십자가가 유대사회에서 죄인들이 핍박해서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사형했다는 14, 5년 전의 일로 끝난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고 지금 그 십자가사건이 나, 어리석은 나, 어리석은 나와 그리고 그 어리석은 나마저 용서해주겠다고 피 흘리면서 찾아오신 그 주님의 만남, 그 만남이 지난날이 아니고 지금의 십자가사건으로서, 바람의 아들로서 사도바울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도가 교회를 닦달 낸 것이 아니에요. 제대로 하자는 개선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개선해봐야 그거 교회 아니에요. 힘으로 뭉쳐놓은 교회가 무슨 개선이 되겠어요.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뭐냐? “나 어리석을 게.”라고 한 거예요. 그게 유명한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했거든요. 

십자가 자체가 어리석은 거예요. 바닥을 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제대로 주님 앞에서 하나님 잘 믿는다는 이 사울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게 바닥이에요. 지금 고린도교회를 악마가 장악한 이유는 하나도 어리석지를 않아요. 왜? 힘이 있으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힘으로 살거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바람의 아들, 

존재가 아니라니까요, 존재가 아니고 ……, 무슨 뜻이냐? 

내가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새롭게 되게 되면 

사랑의 완성, 말씀이 완성된 것이 새록새록 바람처럼 나올 때 그게 바람의 아들이에요. 


이종범이 1루에서 2루로 달릴 때 워낙 빨라서 막 바람이 휙휙 불어요.

성도는 살아가면서 말씀의 완성이 나와야 되는데, 아까 말한 그 유튜브 설교처럼 십일조 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성경공부 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는 것은 뭐가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받았음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뭘 노리는가 하면, ‘나는 무슨 수로 구원받지?’ 출발부터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전에는 십일조해서 구원받는다, 예배참석해서 구원받는다, 성경 읽어서 구원받는다고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알아왔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니까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 보는 것도 아니고, 전도하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 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와 합일시켜서 구원시키니까 나는 참을 수 없다.”해서 이걸 하지 말라 시리즈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게 바닥입니까? 내가 구원받겠다는 이 사실이 주님 십자가 앞에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왜? 구원은 주께서 구원하신 사람만 건지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전제가 뭐냐?“나는 무조건 구원받아야 돼.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구원받아야 돼.”이것부터 출발한 거예요.

사도가 예수님 만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옳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왔잖아요. 그게 사도에게는 십자가사건이에요.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바람처럼 사는 거예요. 이제는 주께서 나를 통해서 주님의 자기의 말씀의 완성을 계속 바람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것은 결과물이에요. 주님이 주체가 된 거예요. 구원해주고 안해주고는 주님의 손에 달렸던 것을 나는 왜 바보같이 몰랐을까, 이 어리석은 나, 그 어리석음 가지고 오늘 본문 고린도교회에 찾아가는 겁니다. “나 어리석을 게. 너희 다 지혜롭지? 나 반대로 갈게. 나는 어리석을 게.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어리석지만 너희의 어리석다는 개념에 내가 잠시 발을 담글게. 그래서 너희처럼 내가 어리석어볼게. 내 자랑질 하면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들의 그 지혜롭고 강하다는 그 결과가 뭐냐? 20절에, 지도자가 너희를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사로잡고,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는 희한한 결과를 낳았잖아.”라고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목사님, 어리석다, 는 것이 되려면 뭔가 어리석을만한 계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그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어요. 지금 KBS에서 특집으로 <순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데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드룩파라는 티벳불교의 종파입니다. 이들이 8일 동안 남이 잘되도록 기도하면서 순례하는 게 나와요. 우리나라 같으면 국토종단순례가 있지요. 가면서 얼음바닥에 엎드리고 하는 그 장면을 다 보여줘요.

그리고 두 번째 시간은, 페루 안데스산맥의 천주교인들의 순례입니다. 십자가를 앞장세우면서 이 세상이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벌써 이렇게 무엇이 바닥인지 우리한테 보여주잖아요. 그 모든 종교가운데서 특히 동양 쪽 종교의 원판이 있습니다. 아리안 족이 만든 종교인 힌두교입니다. 

불교가 어디서 나왔는가? 힌두교에서 나왔어요. 불교의 윤회설 이것이 전부 힌두교에서 나오거든요. 힌두교의 <리그베다>라는 그 경전에서 나왔는데 그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신이 있고 선한 신이 있는데 악한 신은 아수라고 인드라라는 선한 신이 있는데 악한 신과 선한 신이 전쟁을 합니다.

전쟁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 무기를, 보급품을 누가 제공하느냐 하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제공해 줄 때 농사를 잘 되게 해주는 그 신이 힘을 낸다는 거예요. 그 보급품을 누가 거두냐 하면, 제사장이 거둬요. 제사장이 보급품을 받는데 왜 바로 못 드리는가 하면, 힌두교를 보게 되면 그 보급품을 준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불을 피우는데 불을 피울 때 왼손으로 피우느냐 오른손으로 피우느냐, 제사장이 제단에 들어갈 때 왼발부터 먼저 들어가느냐 오른발부터 먼저 들어가느냐, 숟가락을 휘젓는데 여섯 번을 젓느냐 일곱 번을 젓느냐, 그런 모든 규칙은 프로인 제사장이 해야 됩니다. 아마추어가 잘못하게 되면 신이 안 받아요.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다섯 세대까지는 전부 다 귀신이 되고 5세대를 넘으면 완전하게 죽음의 세계에 가는데 그 때까지 그들이 필요한 보급품을 지상에서 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조상숭배 나오지요. 신보고 예물을 드리지요. 그 다음에 방금 죽은 귀신은 귀신의 나라에서 어쩔 줄을 몰라요.

그래서 자칫하면 자기가 살았던 인간 세상에 끼어들어서 호작질을 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49일이 걸린다고 해서 49제를 잘 드리면서“어서 가세요. 잘 가세요.”하고 달래주는 이것이 49제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곡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되고 또 고기를 드리면 안돼요. 고기를 드리면 먹힌 소가 나중에 보복하기 때문에 아예 육식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자기가 이 땅에서 행복하고 죽어서 구원받기 위한 겁니다. 제가 늘 이야기했잖아요. 교회와도 주님 믿은 적이 있어요? 자기 믿어요, 자기. 나 좋으라고 교회 온 겁니다. 만약에 귀신한테 제사 안 드린다고 하면 보복이 들어와서 내 자식들에게 해코지가 돼요.

끊임없이 보급품을 줘서 악한 귀신이 우리 집에 오지 않도록 해야 돼요. 잘 전쟁하도록. 그것을 성직자가 챙겨서 부자도 되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만든 교회, 자기구원이 기초가 된 그 교회에 대해서 해석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어느 편에 서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 편에 서지 말고 그렇게“나 좋으라고 교회 나왔다. 어쩔래?”라는 편에 서서 성경을 보시라 그 말입니다. 

이단 아닌 교회 있겠어요? 없어요. 전부 다 이단입니다. 왜? 내가 이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 오게 되면 개인에서 구원으로 연결이 안돼요. 모든 마귀는 인간을 구원과 연결시킵니다. 구원과 연결시키고 거기에 필요한 것이 뭐냐? 십자가고 언약이고 복음이고 부활이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진짜 성령이 와 버리면 나와 십자가를 바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십자가와 바로 연결시켜 버린다고요. 그러면 그 순간 나는 뭐냐 하면, “내가 십자가복음을 몰랐던 어리석은 자고 미련 곰탱이였습니다. 정말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자꾸 주님을 밀쳤습니다. 왜? 나한테 이익이 안 된다고. 내 에너지 손상당한다고. 내 에너지를 강탈하는 그런 나쁜 존재로 여겨서 내 것, 내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주님을 떠밀었습니까?”라는 고백이 나와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 편에 선 사람입니다. 오늘 제목은 ‘사도와 함께 살기.’ 바다에 배들이 많잖아요. 제가 어리석으나마 자랑하겠습니다.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었습니다. 지금 제 자랑질하는 거예요. 거기에 캐나다배가 있고 미국배가 있어요. 우리는 미국 쪽에서 갔기 때문에 미국 배를 타고 갔는데 미국 배는 파란색 비닐우비, 캐나다 쪽 배는 오렌지색 우비를 입고 있습니다.

폭포 앞에까지 가면 물보라 비바람이 막 치는데 거기까지 갑니다. 분명히 멀어질 때도 있고 가까이 붙을 때도 있어요. “헬로우!” 하면서 서로 인사도 하는데 어쨌든 간에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친구로 사귀어도 한번 밑을 보세요. 배가 달라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배가 다르면 결국은 영원히 이별해야 될 사이입니다.

심지어 부부라도 말이지요. 제가 지난 서울 의존교회강의에서 했잖아요.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죽음 저편에서 도로 이쪽으로 건너온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관계가 지금 지상의 관계가 무효가 되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가짜교회는 뭐냐? 힘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이미 예고를 했어요. 마태복음 24장 23, 24절에 보면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힘을 원하니까 힘줄게. 힘 필요하지? 힘줄게.” 그런 실적위주의 교회, 그런 것을 사람들이 원하고 있어요. 그것을 원하니까 자랑질하는 목사를 청빙해서 지도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힘과 힘의 매치에요. 에너지와 에너지의 연결이라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7장 22, 23절 이하에도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만 하면 기적이 나오는 사람을 왜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선호합니까? 예수님이 병고치고 오병이어 기적 일으키니까 수천 명이 따라다녔잖아요. 그래놓고 말 한마디 딱 하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다 떠나버리고 한 명도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몽타주, 대조하는 거예요. 하나도 없었더라. 왜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느냐? 내가 기적을 원해서 그래요. 왜? 사는 것이 너무 궁색하고 너무나 힘들거든요. 지금 재산이 한 5백억 되는 준재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굉장히 힘들어요. 피자헛 회장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산다는 것은 다 같이 힘들어요.

수십억 되는 재산 가진 라면회사 사장도 힘들어요. 전보다 실적이 안 나와서. 라면업계 순위가 바뀌어서 힘들어요. 수백억이 있어도 힘들어요. 삼성그룹의 이재용회장 힘들어요. 그러니까 뭐냐? 힘드니까 힘 달라는 거예요. 왜? 그동안 힘으로 살아왔어요. 나라는 인간을 힘으로 조립해 온 겁니다. 

“바닥은 꼴 보기도 싫어. 나는 바닥에 가기 싫어.” 주님이 주신 바닥은 뭐냐? 우리가 배후에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힘 가지고 생존하려는 생존차원에서 버티려는 이것, 이것이 주님 십자가 앞에서 바닥입니다. 빵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거 뭐 있나.”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바닥을 못 벗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하지 말라 시리즈처럼 돼요. 나 이제 뜬다, 뜬다. 뜨면 안돼요. 바닥을 쳐야 돼요. “나는 힘없이는 못살고 그래서 주께서는 나에게 돈 벌게 해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셔야 믿겠습니다.” 하는 것을 유지를 해줘야 왜 우리가 우리 앞에 이런 힘을 주는 기적이 아니라 요나의 기적,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우리가 그 일부인데 요나의 기적,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것이 진짜 주께서 마지막 주시는 복인지를 우리가 비로소 받아들이고 알게 될 것입니다.

야, 세상에 이런 인간도 아닌……, 인간 말종이지요, 인간 말종, 인간 말종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나에게 십자가를 알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이게 진짜 미국 배에 같이 속한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주와 합일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날마다 말씀에 의해서 해체되고, 못 박혀서 타이어 바람이 새듯이 자꾸 주의 말씀의 완성이, 사랑이 자꾸 용출하고 있어요. 사랑이 분출해요. 사랑이 분출할 때마다 덩달아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쪼다 된다니까요. 얼마나 못났으면 피냐 그 말이지요.

얼마나 못났으면! 얼마나 내가 세리고 창기고 얼마나 도둑놈이고 강도였으면 이 피가 없으면 내가 안 되는가 이렇게 십자가만이 용출이 돼요. 기존교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은 맞아요. 그런데 쓸모없다는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기존교회 다니면서 왜 내가 그들 말에 아멘하고, 같이 합세했고, 거기다 목돈 냈고, 속아 넘어간 것은 그들도 잘못을 했지만 그들 말에 대해서 내가 혹했던 내 내부의 문제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아, 신이고 뭐고 간에 다 나 좋으라고 있었구나. 그리고 이런 버릇은 내일되어도 또 마찬가지라는 것. 

주님께서 이것을 날마다 말씀으로 쪼개고 뼈까지 쪼개서 다 발라내야 주께서 활동하는 그 역력한 능력이 우리에게 뿜어져 나올 때 그게 성령이 임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끼리 모이게 되면 “당신도 기적 받았어요? 그래 안 보이는데? 나만 받은 줄 알았는데.” 하고 오히려 놀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보시게 되면, 베드로나 사도나 교도소에 갔을 때 천사가 불러냅니다. 맥가이버도 아닌 것이 드라이버로 옥문 따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도와줍니다. 왜 도와주겠어요? 사도바울이 귀해서입니까? 베드로가 귀해서? 아니에요. 

그 자체가 너는 지금 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이미 빠져나온 사람으로서 파견근무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 보면 그림들이 있잖아요. 그림속 꽃이 아름답지요. 한 열 시간동안 쳐다봐야 그 꽃은 아무 미동도 없고 반응이 없어요.

오늘날 교회들 보면 복음에 대해서 반응이 없어요. ‘몇 시야? 끝날 때 안됐나? 12시 넘어가는데 예식장 갈 시간인데?’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오늘날 교인들의 관심사는 복음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니에요. 말씀에도 관심없어요. “나 교회 왔는데 천당 보내주세요.” 이것만 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지금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북핵, 그리고 나훈아 콘서트에 있어요. 12월 14일부터 나훈아 콘서트 합니다. 대구는 12월 15일부터 17일까지. 관심사가 그거에요. 나라는 존재가 거기에 참석해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존재 아닌데, 이거 해체되어야 되는데 말씀을 봐야 해체되든지 하지요.

말씀도 안보고, 복음도 안 듣고 “나 교회 왔습니다. 천당 넣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한 주 뒤에 봅시다.” 그래서 나올 것이 자기자랑만 나오니까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우지 않으니까 자기가 어리석은지도 몰라요.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내가 뭐가 문제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부터 말씀 볼 때에 “나는 사도바울편이다.” 이렇게 보지 마시고 “왜 자꾸 사도바울은 나에게 틱틱대는데? 내가 뭐가 문젠데? 내가 바르게 잘 살고 있고 교회 다녀. 예수도 믿어. 자꾸 시비 걸지 마.” 이런 마음자세로서 다시 성경을 보게 되면 여러분 바람 불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바닥이 아니고 붕 떠서 있구나. 악마가 주는 허영심에 붕 떠서 있구나.’ 다시 한 번 바닥을 쳐서 십자가능력, 나 같은 인간도 살렸다는 십자가능력만, 주님의 활동하심만 마음껏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부터 마귀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고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이 성질, 성깔, 성향. 주님, 주님은 어린양으로 화살을 맞았는데 그 화살이 어디서 날라 오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쏜 화살인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능력만 드러내는 바람의 아들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