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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체험(고후11;28-33) 1709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6. 06:55
2017-09-24 12:38:35조회 : 80         
   사도의 체험 17092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도의 체험(고린도후서 11:28-3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w2hDiaFWg4, Hit:3
 이근호17-09-24 13:30 

사도의 체험 

2017년 9월 24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28-33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11: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람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반대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다메섹에서 죽다 살아났는데,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대하면서 사도의 위대성을 높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아니됩니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이지 결코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도는 성도라면 누구나 겪어야 될 보편적인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도 그 사람에게는 ‘우리’라고 상호 부르는 무리 속에 일부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의 일원은 곧 그 사람의 사상이나 생각은 그 집단을 대변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대세적인 생각과 다르다면 그 집단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은 어떤 집단에 속하더라도 자신의 개인됨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개인을 위한 집단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요즈음 터키의 다메섹에서 있었던 이 ‘광주리 탈출 사건’은 사도가 위대함을 알리는 사건이 아니라 사도에게 그런 위험에 처하게 하신 다른 영역이 따로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흔히들, 죽음이란 이 생애가 시간적으로 끝나면 찾아오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이 이 세상을 지내면서 이 세상 안에 이미 완전히 다른 공간을 하나님께서 따로 형성하므로서 그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이들의 공간이 곧 ‘죽음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에 그들 눈에 아무리 봐도 ‘죽어서 가는 죽은 자들’의 공간은 안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도 ‘이미 산 자의 공간’과 ‘벌써 죽어 있는 자들의 공간’, 단지 이 두 공간으로 딱 분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의 체험담은 ‘살아 있는 그 공간’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산 자들의 공간’은 특징은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로 통합되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은 사건과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물’ 사이에 무슨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향하여 ‘나’라고 호칭하는 바로 그것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 주님에 의해서 유발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의 주체’로서의 ‘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돌려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에게 ‘나’를 붙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건의 체험을 거론하면서 형성된 의미를 가지고 자기 위주의 이야기를 써나가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전에 이런 사건을 겪었고 거기서 나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했다. 따라서 이런 의미들을 연결시켜 나는 나의 이야기를 꾸며나간다”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주리 탈출사건’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사도 바울에 가려서 예수님에게 나오는 복음의 광채를 못 보게 됩니다. 사도가 주님보다 더 우대받게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사도가 아무리 고난과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도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 광주리 탈출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여하신 사건으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나’→‘우리’가 되기 전에 한 계단 거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2)’입니다. 즉 사도 바울처럼 먼저 예수님께서 타인으로 찾아들어야 합니다. ‘반대의 가치’가 우리 자아에게 쳐들어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적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된 겁니다. 결코 점잖은 양반 입장에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아닙니다. 원수로서 대하게 하신 겁니다. 이 점은 모든 성도에게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이유는, 각자 ‘나’를 지니고 있고 거기서부터 의미를 형성해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이 ‘우리’요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본성적으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인해 끊임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뒤로 돌리는 바로 그러한 성향의 공간이 곧 지옥에요 죽음의 세계입니다. 죽음이란 정신적으로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도록 감금하고 구금한 상태를 뜻합니다. 

죽음과 생명의 규정은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개입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심으로서 사울의 일생은 ‘사울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이야기’가 됩니다. 사울은 그저 걸어다니는 ‘주님의 책’일 뿐입니다. 1에서 2가 되므로서 인간의 존재는 예수님이라는 타인에 의해서 붕괴됩니다. 

존재에 금이 가고 그 금이 경계선이 되어서 그 속에서 예수님의 창조 속성이 삐져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 체험과 생명체험’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붙일 입장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것으로 자신을 나타낼 처지도 못됩니다. 

오로지 지키고 드러내고 발산할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체험담’ 뿐입니다. 그것만이 본래의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10:20에 보면,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모든 성도는 본인들의 이야기 구성을 위해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책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출처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원래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단 하나의 망으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에 예수님을 잘못알았다고 고백하므로서 전에 함께 속했던 그 사회 자체를 부정해버립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이러합니다. 사도행전 26:17-18에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세상에 향한 저주입니다. 복음은 절대로 따로 분류할 학문의 일종이 아닙니다. 진리의 전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구와 일원인지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9-25 22:23 

256강-고후 11장 28-33절(사도의 체험)1709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28절-33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28-33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그 전제가 있어요. 그 전제에 깔린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건방진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 자기도 물론 하나님을 알고 있고. 마치 옛날에 모세가, 나만 여호와를 독대했다는 똑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신앙을 시작하려면 이런 사도바울을 헐뜯어야 돼요. “네가 뭔데? 네가 뭐 별나냐? 하나님은 왜 너를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너를 알아주는 이유가 뭔데? 뭐 특별한 것이 있어?”라고 공격조로, 또는 비난조로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 너나 나나 다 같은 남자고 인간인데 왜 하나님은 너를 알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해버리면 우리의 고유의 가치가,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사도 바울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고유의 가치가 죽습니다. 인정을 못 받거든요. “난 하나님 알거든!” 이렇게 돼버리면 무슨 소리로 들리느냐 하면, “나 사도바울은 네까짓 거와 상대 안 해.” 이런 식으로 들려온다는 말이지요.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내 가치를 유지하려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하고 대화를 하게 되면 “내가 시시하게 너를 상대할 잽이 안 되지.”라는 모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우리는 사도바울에게 공격성을 띌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뭐 별거냐? 네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제가 이렇게 사도바울을 공격하라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너무 점잖아요. “훌륭하신 사도님, 당신의 말씀을 제가 듣겠나이다.” 이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사도님과 나와 좋게 지냅시다. 그래서 사도가 전해준 복음 나도 받아들여서 같이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렇게 되면 정작 사도는 예수님 핍박하고 건짐을 받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점잖 빼는 것 가지고 천당 가려고 덤벼든다는 말이지요. 사도의 구원의 시발점을 주님을 핍박하는 것에 있었어요. 주님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나왔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성이 너무 좋아. “저는 교회를 비난한 적 없습니다. 저는 교회를 이 세상의 참 좋은 사회단체로 봅니다.” 이렇게 시작하게 되면 이것은 하, 이것 참, 구원 안 받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점잖게 나온다면. 왜냐하면 교회 다니면서 그 점잖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됩니다. 

‘난 점잖아서 구원받는다.’ 이게 계속 지속돼요. 수상하지요.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걱정한다고 이야기했고 32절에 보면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반대의 가치입니다. 나를 해코지 하는 그 존재의 고귀함, 소중함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그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존재가 없으면 내 정체성이 정립이 안돼요.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는 기억이 발생되고 ……,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투쟁에서 발생되거든요. 

뭔가 짜릿한 것, 충격적인 것, 그런 기억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데 나라는 것은 내 반대를 통해서 내가 정립이 되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 아레다 왕의 존재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런 남, 반대하는 타자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하나의 사건이거든요. 졸기 전에 빨리 어려운 것 해야 됩니다. 사건을 하나의 경험으로 바꾸려면 필수적으로 나라는 것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돼요. 사건은 터졌는데 “이것은 내가 경험한 사건이야.” 할 때는 앞에 ‘나’가 붙여요. 내가 경험한 사건이야, 라고 붙어요. 

그러면 사건을 내가 경험의 창고 속에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나에게 의미가 부여가 됩니다. 부여된 그 의미는 지금의 나를 나 되게 하기 위해서 부여된 의미에요. 아직까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사건이 경험이 되어서, 나는 옛날에 이런 사건을 겪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거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사건하고
경험하고
이게 떨어지고 분리가 되어 있어야 돼요.
사건을 주신 분은 하나님인데 이게 나라는 것이 정립되다 보니까 그 사건에 의미를 일방적으로 붙여놓고 그걸 내 경험창고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따라서 사도바울이 반대의 가치, 나를 반대하는 가치를 주려면 자기가 죽을 뻔한 이 사건의 의미를 내 쪽에서 부여하지 말고 주님의 서사구조, 주님의 이야기구조에서 이 사건을 출발시켜야 돼요. 

주님께서 주신 사건인데 사도바울은 내가 경험했다고 되어버리면 오늘날 듣는 우리들에게 뭐가 문제냐 하면, 십자가지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인데 사람들에게는 사도바울이 우대받는 오류가 발생해요. 사도바울이 우대를 받는다고요. “아, 훌륭하신 분, 복음 전하다가 고난 받았구나. 대단해라. 사도바울 기념관 만들까? 한경직 기념관처럼.” 

그런 식으로 그렇게 돼버려요. 사도바울이 염려하는 것이 그겁니다. 다메섹 성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도하다가 터키의 다메섹……, 다메섹이 두 군데가 있어요. 터키의 다메섹이 있고 시리아의 다메섹이 있는데 시리아의 것이 아니고 터키쪽이에요. 

거기서 당했는데 그렇게 당할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와, 사도바울은 이런 고생을 했기에 사도 값을 하는구나. 진짜 사도구나.” 이렇게 오해를 한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 전하다가 죽을 뻔했다. 제자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서 성에서 빠져나왔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의미를 해체시키고 다시 주님의 의미로 돌려주는 거예요. 

주님의 의미로 돌려주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이 성경을 보는 우리에게 우리가 죽을 뻔 안 해도 이 의미가 우리를 낳게 하는 것, 우리를 창조하게 하는 겁니다. 논리절차가 그렇습니다. 오늘 약간 복잡한데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다. 그것하고 내가 새로운 창조물 되는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은 교회 30년, 40년, 50년 다니고 목사 장로 되어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돼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것은 옛날이야기고 오늘날 나는 살고 있는데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창조했다. 

혼자 우기는 것밖에 안돼요. 이것은 혼자 우기는 거예요. 3,40년 교회 다녔으니 남에게 이야기할 것은 있어야 되겠고, 우길 것은 우겨야 되겠고. “예수님 십자가 지셔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 되어서 천당 간다.” “무슨 근거로?” “몰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믿씁니다, 쌍시옷 해서 믿는다는 거예요. 

“그걸 객관화해 보라. 객관적인 증거가 있나?” “없어.” 옛날에 일어난 십자가하고 오늘날의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목사 장로 된 것, 신학박사 된 것 그런 것 다 치우고 딱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관계있어요? 관계가 있다면 그 연결고리를 이야기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답변하기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것도 객관화된 어떤 것을 손에 잡은 것도 없이 성경에 있으니까 자기 이야기라고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과 오늘날 내가 천국 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 증거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 뭐냐 하면, ‘나’가 ‘우리’로 바뀌는 겁니다. 

‘나’가 ‘우리’로 바뀌어야 돼요. 이게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고요. “하나님 나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나의 자리는 박탈당해야 됩니다. 나의 자리가. 지금 2천년동안 교회가 이단인 이유는 “여러분, 구원받고 싶습니까?” “예, 나 구원받고 싶습니다.” “예, 교회에서 도와 드릴께요.” 

전부 다 ‘나’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문제가 돼요. 이게 이단 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의 오해는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여기 버젓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평생 세상에서 생활하면서 누굴 만날 때 그 타인과 내가 만나잖아요. 

자아와 타인, 나와 남, 서로 만나는 이 버릇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유지해서 그래요. 어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만 결혼식에 준비할 문구를 생각하다가 주례할 때 그 이야기는 일부러 뺐습니다. 영어로 하려 하다가 자칫 하면 욕할까 싶어 뺐는데요. 보통 영어로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 ‘falling in love’해요. 사랑에 퐁당 빠졌다고. 

이미아 성도님이 주례사를 십자가마을에 녹취를 해놓았어요. 하여튼 빠르기도 해요. ‘doing in love’에요. 사랑은 과정입니다. 멈춰있는 것도 아니고 완료된 것도 아니고 전개하는 것이고 펼쳐지는 거예요. 사랑은 퐁당 빠지면 그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거기에 왜 빠집니까? 

사랑은 차분히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거예요. 행한다. 사랑은 이 지상에 펼쳐서 차근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만들어가는 거예요. 전개하는 겁니다. 한쪽 사랑에 빠지는 것을 열정이라 하는데 열정은 곧 식어요. 구원은 전개하는 것이지 빠져서 내 것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나를 가지고 역사 속에 전개시키는 거예요. 이런 인간도 구원된다, 저런 인간도 천당 간다는 그 주님의 놀라운,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예상 못한 능력을 우리를 통해서 전개하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나는 철저하게 방해가 돼요. 그래서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우리로 바꾸어집니다. 

“그러면 나가 우리로 바꿔지면 되지 뭐. 나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교회 가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교인들끼리 우리라고 합시다. 이름도 우리교회니까 우리라고 합시다.” 그건 안돼요. 그렇게 되는 법이 없어요. 내가 포함된 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단어가 나는 1인칭 단수라서 나고 우리는 1인칭 복수라고 해서 나를 포함해서 우리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것이 아니에요. 나에서 우리로 갈 때 절차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나라는 1에서 둘이라는 2를 거쳐야 돼요. 1에서 2를 거쳐서 2에서 우리가 생산되는 겁니다. 

좀 설명 드리면, 나가 1이거든요. 나 1에게 누가 찾아와요.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주님은 나에게 타인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적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적이 되기에 주님은 나의 적으로 보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나를 속이는 분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님이 와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이것은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사도행전 22장에서도 이야기한 거예요. 나에서 우리로 바뀔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와야 됩니다. 사도행전 22장 19절에서 22절에 보면 약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자기를 변호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먼저 6절에 보면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 다 아시지요? 19절에 이런 말을 해요. 자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라고 했어요. 스스로 자기잘못을 자기가 자백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두고 핍박했는데 그 때는 뭐가 없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옴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찾아옴이 없을 때는 그게 나가 되든 우리가 되든 전부 다 무슨 의미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의미에요. 

우리가 구원받는다 할 때 그 속에 내가 포함되면 우리라는 그 의미가 나를 끼워넣은, 내가 거기에 포함된, 신나게 거기에 담겨 있는, 나를 같이 해서 얼싸안고 우리가 되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내가 나빴어요.” 할 때, 정말 중요한 건데, “내가 나빴어요.” 할 때, 예수님 알고 난 뒤에는 “내가 예수님 핍박한 나쁜 놈이다.” 할 때는 나만 나쁜 게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예수님 만나기전에 당신과 내가 전부 다 한패 먹었잖아.”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내가 예수님 알기 전에 내가 알았던 나와 여러분 사이는 어떤 걸림돌도 없고 전부 다 같은 형제였습니다. 같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옳은 일을 한다고 주장했던 그런 나입니다. 그런데 그 나가 달라졌어요.” 그 말이에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하느냐? 22절에 보면 노골적인 행동으로 나옵니다.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욕입니다.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그들은 왁 하고 달려들은 거예요. 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요.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예수님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만났어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취지에서 이야기하든 말든 그 사람들에게는 뭐로 들리느냐 하면, “너는 원래 예수 잡아 죽이는 그쪽 편이었잖아. 왜 이렇게 인간이 달라졌어, 이 바보야.” 했는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한다고 여겼는데 글쎄 내가 나쁜 놈이야.”라고 하니까 그 뉘앙스가 “이제는 너희가 나쁜 놈이야.”하는 뉘앙스로 들려오는 것을 그들은 감출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놈은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한 거예요. 자,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사도행전 22장 21절. 이런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은 그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잖아요. 예수님을 죽이고 이번에는 누구 차례다? 예수 만났다고 우기는 사울이라는 자를 이제 죽일 차례라는 그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서 나온 것이라면 이러한 사건의 의미는 이제는 사울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의미가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들에게 공유된 체험이어야 되고 경험이어야 되고 의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요 어릴 때 성폭행 같은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되면 커서도 정신병자 되거든요. 생활이 힘들 정도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자살로도 이어지고 하는데 그 때 치료방법은 뭐냐 하면, 기억으로 기억을 없애는 방법을 사용해요. 기억함으로 아픈 기억을 없애는 방법이 뭐냐? 

당했던 기억을 내가 설명하는, 남의 폭력에 의해서, 타인에 자기 인생에 의해서 희생자가 되어서 꼼짝도 못하고 평생 고생하는 나, 이제 그 나의 위치를 바꾸는 거예요. 그 사건을 내 힘으로 내가 설명해버리면 나의 긍정적인 서사구조, 이야기구조에 의해서 그 사건은 내가 다룰 수 있는 기억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정상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거든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네가 당했던 사건을 네가 유지해버리면 이것은 예수님 보다 자기가 영광 받아 버려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나를 안 알아줘?”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적들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이야기 속에 포함되었다면 너와 나중에 누가 더 난 놈이냐, 못난 놈이냐를 차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차별 없는 그것은 하나의 선물이 되고 그것은 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주님이 만든 우리가 되는 거예요. 가락강의 하면서 제가 지저분한 예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를 설명하면서 든 예가 있어요. 그냥 포도나무와 가지는 많이 들어서 식상하니까 살짝 바꿨습니다. 

“주님은 다리요 우리는 털이니.” 그랬다고요. 주님은 다리요 우리는 털이니. 이 말은 뭐냐 하면, 털이 길고 짧은 것 가지고 자랑질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터래기가 왜 자랑합니까? 터래기 길다고 딴 다리입니까? 같은 다리에서 난 털은 전부 다 같은 다리의 생명을 얻잖아요.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왜 남과 비교대상이 안되느냐 하면, 나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내가 살아온 모든 의미와 체험과 경험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교회 잘해봅시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벌써 잘해봅시다 하는 교회는 이미 이단입니다. 50명 왔다가 다 가고 2명 남아도 잘된 교회에요. 그것은 터래기 50개가 다 빠져버리고 달랑 2개 남았어도 꽂힌 것이 그 다리기에 그 다리에 있는 한 강경화처럼 하얗게 되어도 괜찮아요. 

사도바울이 이 대목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이유지 사도됨 그 자체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가 우리한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사도행전 26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참 사도바울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요.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냥 건성으로 봤는가, 대충 봤는가,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예수님이 사도를 보내서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사도가 하는 일이 농사짓는 일이나 장사하는 일, 빵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눈을 뜨게 하여”라고 시작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찬찬히 봅시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눈이 감겨 있다는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설교 처음에 본문 보면서 점잖은 체 하지 말라고 했지요. 

“사도님, 믿어서 구원받겠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조로 하지 말라고 했지요. 시비 걸라고 했지요. “내가 뭐가 잘났는데?” 하고 우리는 분노하면 달려들어야 돼요. 그게 우리 출발점이에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우리가 화를 내는 거냐 하면, 눈 뜨라는 겁니다. 

세상에 시력이 1.5, 1.5, 이게 다초점이거든요. 볼만한 것은 안경만 끼면 얼추 보인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눈 뜨라는 겁니다. 무슨 이런 모독이 다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 눈 뜨세요!” 이거 잡혀갑니다. 노무현 대통령 자살한 것은 눈 못 떠서 자살한 거예요. 부엉이 바위에서. 눈을 못 떠서 자살한 거예요. 

눈을 못 뜨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눈을 못 뜨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을 시간상으로 따집니다. ‘나이 많으면 죽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공간이에요. 이게 무척 어려운 말인데 무슨 말이냐? 지금 이 땅에서는 천국은 없어요. 하늘나라가 대단한 것이 아니고 아예 없는 나라에요. 

왜? 눈을 감고 있으면서 떴다고 착각하니까 없는 거예요. 눈 감겨 있으니까 꿈속의 세상에서는 천국은 없는 거예요. 천국, 그 공간은 빈공간인데요. 왜 빈공간이냐? 인간의 행함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의 행함만 주어지기에 인간입장에서는 빈공간이에요. 

아버지의 서재 같은 겁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서재. 아버지가 무슨 짓을 거기서 하는지, 야동 보는지 뭘 하는지, 문은 잠궈 놓고 가족들 아무도 못 들어가는 그 빈공간. 어릴 때 아버지의 그 빈서재를 언제 한번 들어갈 볼까 늘 엿보잖아요. 그것도 아버지가 공부 좀 하는 분이라야지 TV나 같이 보는 사람 같으면 서재도 없고요. 

학자풍 나는 아버지의 서재는 항상 비밀의 방이에요. 일체 아버지의 것만 있고 자신의 것은 없는 곳. 왜? 반대가 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공간이에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빈 공간으로 넘겼어요.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빈공간에 간 겁니다.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요. 

사람들은 죽었다고 봤는데 예수님은 다른 공간에 들어가 있다고 본 거예요. 사람들이 못 믿으니까 나흘 만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했어요. “나사로야!” 부르니까 이미 제대해서 예비군이 되었는데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 될 판이에요. 눈이 감긴 세계에 또 들어오는 거예요. 본인은 미치는 거예요. 이제는 좀 편히 쉬려고 했는데. 

광주에 계신 집사님이 이제 퇴직을 하셨답니다. 평생 처음 쉰다는 거예요. 그동안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이제 처음 쉰다는 거예요. 적절한 표현을 했어요. 이제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나왔다. 제가 초를 쳤지요. <박하사탕>이군요. “나 돌아갈래~!” 터널 앞에서 그렇게 외치는 장면이 나와요. 

어두운 데서 빠져나온 거예요. 사도바울은 어두운데서 빠져나왔습니다. 갇혀 있는 세상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 이런 예수님이 빈 서재가 있을 줄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유대인들은 “이런 자는 죽여야 된다.” 그게 반대의 가치에요. 적들이 자꾸 성도를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죽여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죽이면, 스데반 집사 죽이면 어디 갑니까? 천국 보내잖아요. 같이 있는 빈 공간에. 그러면 그 빈 공간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죽음인데 뭐가 죽음인가? 하나님 앞에 자율적으로 고마워하지 못하도록 구금되어 있고 감금되어 있는 것. 죽음은 뭐냐? 내 마음껏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이 쪼그라드는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것이 정립, 규정되지 않아요. 늙어 죽는다고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늙어 죽어봐야 맨 이 세상이에요. 사람은 딴 데 안갑니다. 딴 데 가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나중에 죽은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게 되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 전부 다 육체의 심판받기 위해서, 물론 믿는 사람은 심판에서 면제되지만, 심판받기 위해서 다 부활되는 거예요. 

이게 눈이 안 뜨였으니까 이게 진짜 심각하고 중요한 복음이라는 것을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교회를 놀러 다니는 겁니다.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가설도 있지. 어차피 취미니까 하나 걸어놓으면 괜찮겠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지금 아침에 햇빛을 봐도 그게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어두움 속의 해요, 어두움 속의 달이요, 어두움 속의 별이 되는 겁니다. 어두움 속의 추석지내기고요. 어두움 속의 해외 놀러가기에요. 모든 것이 어두움 아닌 것이 없어요. 헌금해도 어두움, 찬송해도 어두움이고, 교회 다녀도 어두움이고, 성경공부도 어두움이고, 예배도 어두움이고, 전부 다 어두움이에요. 

그게 어두움이라는 증거를 대라. 증거를 댈게요. 나는 예배 드렸습니다, 나는 십일조 했습니다, 나는 선교했습니다, 전부 다 ‘나’가 다 들어 있어요. “나는 자식 잘 키웠습니다, 하나님.” 심지어 천주교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나는 참회했습니다. 하나님!” 

여러분, 참회 했다고 해서, 성주참외 말고 참회, 참다운 회개, 나는 참다운 회개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까? 안줍니다. 참다운 회개가 죄에요. 어두움입니다. 어떤 토대, 어떤 근거로 인해서도 주께서는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면 나는 둘이 되지 못하고 우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나에서 둘로 바뀝니다. 나에서 둘로 바뀌게 되면 나는 나라고 한 그 나가 하나님 면전에서는 예수님만이 붙일 수 있는 자기호칭인 것을 눈이 안 뜨였으니까 몰랐던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생명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라고 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왜? 그 예수님 나가 온 천지를 다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물은 나에 모두 다 응집이 되어야 되고 수렴되어야 돼요. 주님의 그 나에 어프로치 될 때, 연결구조와 그러한 진리의 망을 형성할 수가 있는 겁니다. 거미줄 구조에 빠져야 되는 겁니다. 터래기가 어딜 ‘나’를 붙여요. 다리만 나에요. 우리는 그 다리에 난 털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털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라고 했어요. 그러면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있을 때도 우리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혼자 있을 때도 우리에요. 우리는 다 같은 신세입니다. 주님 때문에 구원받은 다 같은 신세에요. 

나를 박탈당한 겁니다. 나를 박탈당했어요. 더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둘이 사랑했는데 나중에 보니 남매간이라. 막장 드라마에 나오지요. 우리는 서로 남남인줄 알았는데 주님 안에서 한 형제고 한 자매가 되었어요. 막장 드라마라니까요. 내 사랑 그대에 빠진다고요? 빠지지 마세요. 

두잉 인 러브. 펼치세요. 내 사랑 말고 네사랑 말고 주님이 한 몸 되게 한 그 사랑 펼치는 겁니다. 지금 그 형제 찾으라고 사도바울이 이 말씀 주신 거예요. 좀 더 나가봅시다. 어두움에서 빛으로라고 했지요. 아직 어려운 것 더 남아 있어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야, 사도바울 맞아죽어도 싸지요. 공학박사, 철학박사, 대학교수 앞에서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라.” 이런 소리 한다고요. 그러면 박사들, 대학교수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너는 종교에 해당되는 네 업종에나 충실해라. 교회 목회나 하라고.” 이렇게 되지요. 

보세요. 세상에서는 복음을 하나의 기독교업종으로 분류하고, 너는 목사니까 그거 하고, 나는 수학박사니까 수학해서 밥 빌어먹고 살고, 저 사람은 농사짓고 살고, 전부 다 분류가 되어버렸어요. 분류가 되니까 각자각자 ‘나’에요. “그리고 사도바울 당신이 교회에서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농사짓지만 당신 교회에 와서 믿어줄게. 왜? 나는 점잖으니까.”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실정입니다. 장로님들 다 점잖아요. 각자 자기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자기의 서사구조,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구조가 자기평생 동안 자기 소설책으로 쥐고 있으니까. 이것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부여한 이 의미를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믿어줄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여튼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반대의 가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사단의 권세, 어두움, 눈을 떠라,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네가 평소에 너 지킨다고 급급하다 보니까 주님의 복음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나 지키는 것이 뭐냐?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왜 나쁘냐 하면, 거기서 일관성 있는 자기의 법칙과 방법을 본인이 만들어내는 이것이 문제가 돼요. 내가 나를 지킨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서사, 서사라는 것은 이야기를 말하는데, 내가 주인공 되는 이야기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는, 이걸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필히 윤리 도덕으로 계속 점철, 누적시키고 또 누적을 시켜야 돼요. 

인생을 살면서 만났던 그 모든 사건에 대해서 내가 괜찮은 의미를 부여해서 부여된 그것을 가지고 나 옛날에 이런 체험했다, 경험했다, 이걸 경험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그리고 쌓아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수호하고, 사수하고, 지키고자 하는 겁니다. 이거 지킨다고 주님은 완전히 뒷전이에요. 

우리를 박살내는 주님의, “너는 나를 핍박했다.” 하는 그 가치는 왜 안 지킵니까? 왜 안 지키는가 하면, “저 점잖은데요? 저 착한데요. 저 바르게 살고 있는데요?” 이런 것 때문에 주님이 모독 받는 거예요. 지키려고 하다 보니 점점 더 나라는 것에 집착을 하게 되고, 우리도 없고 나밖에 없어요. 

우리라는 것은 같이 친하게 지내는 그 사이를 우리라고 하고 그런 우리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우리기에 그것은 우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어쨌든 간에 우리는 다 날라 가고 달랑 나만 남거든요. 이렇게 되면 노선이 달라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깨어진 노선, 그것이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사도바울과 전혀 딴 소리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천국과 연결되었다고 우기니 사도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고린도교회에 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는 가만있지 않고 거기에 반발한 거예요. 사도는 엉터리라고. 

이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걸 욕을 하냐는 겁니다.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우리 당회장목사님을 왜 욕합니까, 하는 수백 번 들은 이야기에요. 당회장목사 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바보 같다는 그 말입니다. 복음도 아닌데 그걸 듣고 있다는 말이지요. 

어제 광주에서 차타고 오면서 울산의 황전도사님이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떤 분이 와서 교회 상담 아닌 상담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저지레(잘못)를 했지요. 교회 저지레가 딴 것 있습니까? 돈이지요 뭐. 돈 보고 오는 사람에게 돈 저지레 했지요.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돈 나가니까 싫어하는 거예요. 나가라고 했는데 안 나간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거예요. 

목사가 저지레해서 나가라고 하면 안 되고 조목조목 “이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못 듣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교인들은 돈 가지고 교회 세워놓고 돈을 빼먹으니까 도둑놈이라 해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는데 보나마나 퇴직금이나 올려달라는 이야기나 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잖아요. 우리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을 감사하라고요. 우리 자신을 향해서 “저거 죽여 버릴까?” 하는 사람이 나오거든 감사하세요. 왜냐하면 적이 없으면 내가 자꾸 괜찮은 존재인줄 착각한다니까요. 사단의 권세, 어두움, 눈 떠라, 그런 이야기,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죄사함을 받으라는 거예요. 눈이 감긴 채 이것이 어두움인줄 모르고 빛이라고 알 고 있는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죄와 의를 구분해봐야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참 어려운데요. 지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윤곽을 드러내요. 

우리는 복음적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면 내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사건이 터져서 우리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이 되면

①우리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평소에 했던 행세,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그 모양새가 나옵니다
.
예수님을 핍박하는 모양새가 어떤 모양새로 나오는가 하면,
나는 건전하다, 나는 괜찮다, 나는 지금껏 나름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존재라 하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나오거든요.

②주님의 사건은 그 존재에 금이 가게 합니다. 금이 가게 되면 경계선이 생겨요.
삐그덕거립니다.존재가 찍찍 금이 가면서 붕괴되고 무너집니다.
내 존재에 대해서 내가 허겁지겁 수습이 안돼요.
“너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하니까 ‘내가 그것까지는 안했는데.’
“자기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내게 합당치 않다.” ‘그것까지는 내가 못했는데.’ 

자기 존재에 자꾸 금이 가니까 수습을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수습이 안 되는 거예요. 수습은 하고 싶어요. 다시 옛날처럼 건전한 나로 만들려고 하니까 수습이 안 되는 거예요. 한쪽이 자꾸 무너집니다. 지진이 일어났어요. 7.2 지진이 일어나서 자꾸 무너지는 겁니다. 
괜찮게 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차가 끼어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물론 예를 드는 겁니다. 저는 그런 일이 없어요. 나는 욕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죽여 버릴까, 지난 시간에 그런 소리는 했지만. 이게, 하고 갑자기 욕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 순간 나는 내 건전함에 금이 가요. 내 쌓아놓은 의미, 자기 선, 자기 의에 금이 가요. 

③금이 가게 되면 그 짧은 순간에 그 금이 간 경계선에서 주의 속성이 나옵니다.
그게 주님의 속성의 생중계에요.
죽음에서 이미 생명으로, 죽음의 경험과 생명의 경험을 다 품고 있는 분이
말씀을 가지고,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쑤시게 되면
우리는 그냥 사건인줄 알았는데 그 사건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하나의 말씀사건이지요. 

④얼음을 송곳으로 깨면 다 깨져서 가루가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하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⑤기능이 되면서 다시 조립되는데
예수님 중심으로, 복음 중심, 말씀 중심으로 조립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책이에요, 책. 우리는 주님의 책이 되는 겁니다.

책이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10장에서 제자들이 자랑질을 해요. 17절에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런데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 말입니다. 

네가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고 너희라는 우리가 쫓아낸 것이 아니고 너희는 그냥 책이라는 거예요, 책. 무슨 책? 걸어 다니는 책. 누구의 책? 주님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으로서 너는 DOING IN LOVE. 이 세상에 주님이 사랑을 펼치라는 말이지요. 성도 사는 것 간단하지요. 그냥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하면 돼요. 

백과사전 아니면 전화번호책 하든지. 그냥 걸어 다니는 책이에요. 주님의 이미 구원되었음이 발산되는 겁니다. 제가 어제 주례할 때 했거든요. 부부사이라 하는 것은 지혜가 유통되는 것이고 발산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완료가 아니고 하나의 디딤돌이라는 말이지요. 

결혼을 함으로서 담 너머 보게 되면 거기에 이 세상은 어두움이고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살면서 보자, 보자, 보자 하는 식으로 저 담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있고……, 빈공간입니다. 없는 세계에요.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존재 부숴버리고 주님의 기능책으로,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속성, 죄사함으로 생명주신 그 속성이 우리를 가지고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생중계로 하는 거예요. 

요새 방송국 파업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모습으로 생중계 하면서 누가 기뻐하는가? 주님이 기뻐하는 거예요. 우리를 앞장세워서. 야, 주님은 정말 비겁해. 주님은 뒤에 있고 우리를 앞장세워가지고 이 세상이 왜 눈이 감겼으면 어두움이며 왜 악마의 권세아래 있는가를 마음껏 우리를 통해서……우리는 카메라에요. 

몰래카메라 해가지고 우리를 통로로 해서 세상을 비춰보게 하는 겁니다. 사도는 생중계 당했어요.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무슨 뜻입니까? 

적들은 어두움의 권세에 속했다는 것을 그 적들과 나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움이고 악마에 속했다는 것 주께 영광돌리지 못하도록 감금시켰다는 것을 생중계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느긋하게 그냥 생중계용 카메라로서 이 땅에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아무 염려할 것이 없고 수시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고맙고 감사하다가 또 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되게 되면 또 주님께서 생중계에 지장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적을 보내서 내 존재에 금이 가게 해요. 

어쨌든 내 뜻대로 안되면서. “왜 내뜻대로 안됩니까?” 하는 그 나를 금가게 해서 주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우리를 가지고 주님을 보여주는 용도로서 그 현장에서 “네 것은 따로 필요 없다. 내 것만, 주님이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 억울하다는 것을 너의 억울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것”만 하면, 그 통로로 사용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족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저 예수 믿고 내가 새사람 되었다고 우기지만 우리 자신이 객관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되어서 하나의 카메라로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