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제자와 사도(고후11;10-12) 1708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27. 17:51
2017-08-27 12:32:49조회 : 40         
   제자와 사도 17082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제자와 사도(고린도후서 11:10-12)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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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8-27 13:41 
제자와 사도 

2017년 8월 27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10-12 

(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11)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1: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일하는 소에 멍에를 씌우지 말라’는 원칙에 따라(고전 9;9) 예수와 복음과 성령을 거론하는 것으로 수입을 당당하게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여기 저기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의도적으로 강경하게 ‘사도와 함께’ 있는 자들을 ‘우리’라고 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너희’라고 해서 악마쪽에 속했다고 단정내립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보라는 겁니다. 사도의 권위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십자가 지신 이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발휘하게 합니다. 즉 인간은 결코 중립적인 지역에 머물러서 예수님과 관계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끝까지 예수님과 같은 편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줄곧 살아온 삶의 습성과 본능에 의해서 ‘주님이 필요치 않는 인물’이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인물’인 예수님에 대해서 애틋한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체포를 지켜보면서, 그동안 애써 억눌러왔던 자기 솔직함을 노골적으로 터뜨립니다. 

“나는 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사실 진작에 내놓은 고백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땅에 오신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벌받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그 누가 태어나던, 누가 방문하던 간에 모두 저주받아 합당한 처지를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이 사실을 주님과 아시고 악마는 알지만 인간들만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신이 존재를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이 혹독한 이 세상 생활을 끝내고 소망이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사도 방식의 뿌리는, 악마에 닿아있기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상대하려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확정적 의미’를 던집니다. 그게 ‘쓴 잔’입니다. 결코 제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아닙니다. 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한계가 바로 ‘사도’입니다. ‘사도’란 필히 예수님에 대한 배반사건이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배반사실이 없으면 사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현재 세상을 살만한 이유나 자격이 자신에게 엄연히 있음을 알리는 방식으로 각종 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소위 자기를 지키기 위한 ‘안전망 구축’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이 방식이 악마에게는 자기를 감추고 지켜주는 방어선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형사들이 범인의 집을 방문해서 검거하려고 할 때에, 범인 엄마가 나서서, 자기 아들이 도망칠 기회를 위해 “형사 나으리 저하고 이야기해요.”하면서 술상 들고 있는 식입니다. “주님, 저는 기도 너무 잘해요, 주님 저는 헌금도 많이 하고 이웃도 내몸같이 사랑해요”하는 식으로 주님보다 자기하고 상대하자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을 근원적으로 속이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입니다. 인간들은 악마와 닿아있는 근원을 알지 못하고, 욕망과 충동 속에서 행동합니다.

자신을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하면서 선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은 욕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희생하므로서 궁극적이고 절대적 선을 이루겠다는 본성은 충동에서 나온 겁니다.

둘 다 악마가 시킨 겁니다. 마태복음 5:41-42에 보면,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인간쪽에 필요한 심리적 태도는 어떤 겁니까? 비참한 자보다 더 비참해서 될까요? 피곤한 자보다 더 피곤해야 할까요? 사람이 누구를 약자로 취급해서 도와주면 자동적으로 강자가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52-53에 보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배정은 참으로 일방적입니다. 비천한 자되어서 구원되려고 하려는 그런 꼼수를 쓰지 마세요. 우리 주님은 도둑을 영광이 자리에 앉히신 분이십니다. 이게 말이 되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산상설교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이 평소에 얼마나 소위 법이라는 것을 동원해서 자신의 존재를 안전하게 지키는데 주력하고 있느냐를 까밝혀주시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벌어졌던 방식 말고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이 시대에서 다른 방식의 폐단들이 나타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소위 예수의 사도라고 자처하면서 돈을 밝히고, 교인들을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바로 그들에 있어 사도 바울 자체를 모델로 삼아 핑계대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을 사도가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순간적으로 그들과 같은 사도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 알려버리는 겁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겁니다. 즉 자신은 이 고린도교회에서는 일체 그 어떤 급료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가짜들이 다음과 같은 핑계를 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급료를 받지 않기에 가짜 사도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사도는 배후의 악마의 사주함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즉 사도의 사도됨은 결코 다른 인간들이 모방하거나 흉내낼 성질이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도의 자아는 실은 사건의 다발입니다. 이미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입장에서 사도는, 결코 자기 위주와 편리나 이익을 위해서 도모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 악마의 교회는 인간의 구원욕구 위에 지붕을 세워 교회를 만들어놓은 겁니다. 마치 몽골의 파오(게르)라는 유목가옥처럼 말입니다. 하나하나 해체하고 뜯어보세요. 남은 것은 인간의 구원욕망 뿐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간들을 앞장 세우 악마의 분주한 전도에 의해서 가로막히게 하려고 한 겁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쓴 잔의 확정된 의미만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법이란 폭포 뒤에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준비하고 기다리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과 누구인지를 십자가를 관람만 하지말고 그 폭포수 안으로 뛰어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08-28 16:15:28조회 : 7         
252강-고후 11장 10—12절(제자와 사도)170827-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49.39.140)
252강-고후 11장 10—12절(제자와 사도)1708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10절-12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10-12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10절에서 12절까지 끊어서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하고 저희를 의도적으로 날카롭게 구분 짓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라고 해서 ‘우리’라고 하는 부류와 우리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부류를 인정사정없이 확실하게 대치시키고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 가지 나타나는 반응이 있어요. 제일 먼저 “네가 뭔데?”입니다. “네가 하나님이야? 네가 예수야? 사도 네가 뭔데 건방지게 자기에게 속한 자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자를 날카롭게 가려내느냐? 그러한 네가 권리나 자격이 돼?”라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네가 그만큼 대단한 존재냐고 시비 걸 수가 있는데요.

사도바울이 우리, 그리고 너희라고 언급한 그 이유가 있어요. 뭔가 공격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무엇을 공격하고 싶으냐 하면 악마를 숨겨주는 집단이 있어요. 마귀를 숨겨주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 있느냐고 하지 마세요. 모든 처소에 다 있어요. 사도바울이 사도거든요. 사도가 어느 정도 대단한 사람들이냐 하면, 제자를 넘어선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제자의 대표자가 베드로거든요. 결국은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해서 진정성 있는 자기 속이 다 들통 났지요.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렇게 했지요. 그게 제자의 한계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돼요. “예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뭐 했다고 나한테 경배 받아야 돼?” 반드시 이런 절차를 필히 거쳐야 돼요.

제자가 거기서 스톱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제자로서 끝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뭘 넘어서느냐 하면,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 없고 나는 주님을 욕할 수밖에 없고 결국 나는 주님을 저주합니다.”라는 것을 품어야 돼요. 그것을 놓치면 안돼요. 그것을 꼬옥 품고 ‘아, 그래서 사도가 되는구나.’ 사도라 하는 것은

예수를 저주할 자로 품고
그것을 내면화시키면서
그걸 넘어선 사람들이 사도

에요. 

그걸 버린 사람이 사도가 아니고 그걸 필히 품어야 돼요. 성도도 마찬가지고.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 그 당시에 있었다면 나도 예수 죽여 버렸을 거야. 예수 죽이고 싶은 속성을 태생적으로 갖고 나왔어.”라는 고백이 있어줘야 그것이 성도지 그 고백 없으면 성도 아닙니다. 관람객입니까? 8박 9일로 십자가 둘러보는 거예요? 여긴 십자가에 죽은 곳이고, 여기는 루터가 어쩌고, 그런 식으로 둘러보면 그것이 성도에요? 교회 둘러보면 그것이 성도입니까? 

내면화되어야 되거든요. 사도바울은 제자가 아니에요. 사도에요. 사도라서 자기 안에 뭐가 있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그것을 품고 있고 그것을 항상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주를 잘 믿으려고 모든 것을 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것이 다 헛방이고 헛수고고 소용없는 짓이다.”라는 고백을 노골적으로 하신다면 희망 있는 사람이에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 사람은 이제 거의 다 온 사람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본래 그 사도가 예수님의 사도거든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 자를 이 세상에 심어놓은 겁니다. 하나님께 벌 받아야 될 분을, 그것도 대표적으로 벌 받아야 될 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심어놓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안전망구축이 우선이거든요. 자기개인구원이 우선이에요. 

왜 개인구원 받아야 되느냐 하면, 개인구원 받을만한 자격과 입장에 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왜 그런데? 그것은 물으면 안돼요. 그것은 본인도 몰라요. 내가 왜 예수 믿고 천당 갈 자격이 있는지, 그런 것은 본인도 몰라요. 그냥 있어요. 그냥 있기에, 무조건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구원자 보내기만 해봐라. 내가 믿어줄게.’ 왜?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 자세가 뭐냐 하면, 나는 절대로 지옥 가서는 안 되고 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세상의 안전망구축으로 쫙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냄으로 말미암아 의도적으로 자발적으로 저주받는 사람을 보내버린 거예요. 이게 소통되겠습니까? 안되지요. 교회가 뭐예요? “혹시 여기 구원받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예!” 해서 모인 단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구원이 좋다고 하니까 손 다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들은 “이런 식으로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예수 피 믿으시고 회개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성령세례가 올 것이고 그러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친 거예요. 까짓 거 나한테 이익 되는데 뭔들 못하겠어요, 뭔들!

제가 전에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십일조 안 해서 저주받을 용기도 없으면서 왜 교회 나옵니까? 십일조 안하면 저주받는다. 그러면 좋다. 저주받을 용기를 가지고 교회 와야 되지 않습니까? 비겁한 인간들이에요, 비겁한 인간들. 교회가 문제가 된 것은 전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원래 이 세상은 갇혀 있기 때문에 전도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했어요. “너희는 사람 하나 건지기 위해서 땅 끝까지 가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배나 지옥백성 만들었다.” 원래 지옥백성인데 마치 여호와 앞에 나옴으로서 지옥백성 아닌 것처럼 교회가 집단적으로 최면을 걸어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준은 이 땅에서 저주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먹히지를 않았어요.

제자들은 자기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전도함으로서 예수님과 한패 먹은 줄로 알았어요. 광주강의에서 이걸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나와함께 저주받지 않으면 전도 자체가 전도가 아닌 거예요. 전도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이 악마가 만든 전도로 완전히 망했다는 겁니다.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 전도를 하게 함으로써 전도를 막는 일을 악마가 해요.

계속해서 눈만 뜨면 전도한다고 돈 내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교회 모든 하는 일이 돈 긁어내는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 전도라는 것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제시한 겁니다. 어떤 교회는 57억을 모아놓았는데 도둑놈이 와서 그 57억 다 날린 교회도 있어요. 신천동에 있는 교회인데 교회 이름을 이야기할까 말까 입이 근질근질 합니다.

왜 교회가 그런가? 교회에 악마가 침투한 것이 아닙니다. 제발 그런 착각을 하지 마세요. 교회에 악마가 침투한 것이 아니고 원래 교회는 우리가 품은 악마가 세운 교회에요. 악마가 와서 돈을 긁어내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돈 가지고 교회를 세운 거예요. 하늘나라 확장, 전도를 목표로 해서 세운 거예요.

몽골에 가면 파오라는 것이 있는데 요새는 게르라는 말을 쓰는데 초원의 전통가옥입니다. 직접 가본 것은 아닙니다만 그걸 보면서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어릴 때의 추억이 생각났어요. 경산에서 초등학교 때 거기에 경산극장이 있었어요. 경산극장 주인 아들하고 우리 고모하고 혼담이 오갔거든요. 그쪽은 그쪽 유지고 이쪽은 이쪽 유지니까 그런 게 오갔다는 말이지요. 우리 고모가 싫다고 해서 안했는데.

어릴 때 극장의 영화가 그렇게도 재미있고 또 그리웠었어요. 그런데 어린 마음에 뭘 몰랐느냐? 극장 하나 짓기 위해서 대지, 땅을 사야 되고, 콘크리트 건물 올려야 되고, 지붕 얹어야 되고, 관리도 해야 되는데 다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 전혀 모르고 거기에 재미있는 일만 있다는 생각만 든 거예요. 지금은 경산극장이 철거되었어요.

그러면 그 극장을 하나하나 해체시켜 봅시다. 해체시켜 보면 극장이란 재미있는 영화를 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건물이잖아요. 교회라는 것도 하나하나 해체를 시켜보자는 말이지요. 해체를 시켜보면 교회가 무엇 때문에 있느냐 하면, 나 구원해 달라고 돈으로 환산된 정성을 모은 것이 교회에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 속에 들어있는 기본적인 것, “나 구원해주세요.”라는 욕망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욕망에 대해서 문제 삼아야 돼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왜 꼭 천국을 가야 돼? 분명히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을 추방시켰는데 추방시킨 그 취지를 완전히 개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인간을 왜 추방시켰겠어요? 추방시킨 이유가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생명나무에요. 인간을 위해서 생명나무 과일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 좋으라고, 사람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만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종이 어디 겁 없이 주인이 상에 함께 밥을 먹어요? “나가! 너는 저기서 밥 먹어.” “종은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종은 자기 할 도리를 할 뿐이지 종이 자기위신이나 자기권리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자기욕망을 건물로 덮다 보니까 결국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을 덮는 하나의 게르, 하나의 파오, 몽골의 둥그런 가옥이 된 거예요. 인간의 자존심을 덮어주는 건물이 교회라 그 말입니다. 사실은 교회가 그게 아닌데. 세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 연속적인 복수를 위해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신 그 예수님을 그려야 되고, 드러내야 될 기념물이 인간의 개인욕구를 드러내는 기념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전도 자체가 애초에 성립이 안돼요. 전도를 해봐야 자기 수고하고 희생한 것만 계속해서 전파되기에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의 취지를 교묘하게 악마가 자기 사람들을 보내서 땅 끝까지 전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용어야 고상한 용어들 다 튀어나와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네가 제자를 삼으라, 온갖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기어이 전도라는 그 드라이브, 전도라는 추진력을 빌미로 해서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다단계 같은 단체, 그게 교회 아닙니까?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입도 못 떼요. 이것 안하다가는 탈락할까봐서. 처음부터 탈락인데 소망을 줘버려요. 구원될 수 있다, 가능성이 있어, 이렇게 소망을 줘 놓고 그 소망을 대가로 돈을 뜯어먹는 단체에요. 성경 보세요. 성경은 인간을 울립니다.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와 있어요. 그것도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갈며 울어요. 

실컷 웃으라 하세요. 실컷 웃고, 하하하, 하고 치어스(건배), 다 하세요. 결국은 이를 갈며 욺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이 세상을 울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왜? 주님 본인이 이 땅에 있으면서 울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울었잖아요. 주님을 울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울리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한패 먹었다고 물위 걷고, 오병이어 기적 베풀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하니까 아주 신바람이 났어요. 그래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이정도 하면 주님과 한 패 먹었지, 라고 생각해서 제자들이 하는 말이 “예수님, 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앉게 해주시고 저 사람은 주의 왼편에 앉게 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예수님께서는 확정적인 선언을 해버립니다.

“네가 나의 쓴잔을 마실 수가 있느냐?” 나의 쓴잔, 너의 쓴잔 말고, 네가 고생한 것 말고, 나의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이미 진리라는 것은 쓴잔으로 확정나 버렸어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한 이야기는 이거예요. “네가 너 보기에 인간으로 보이느냐?” 존재 확인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소유확인 합니다. “주여, 제가 이만큼 끌어모았습니다. 이만큼 부자 되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경과해서 자기존재를 거기에 맞추어서 내 존재라고 남에게 과시하고 싶고 허세를 떨고 싶은 거예요.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지금껏 남들 부러워하는 것이 이만큼 있다는 그것 모아서 남에게 ‘나 이 정도야’ 하고 내세우고 싶은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적이 없으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사도는 지금 세상에서 적을 발굴합니다. 적을 찾아가요. 적이 반드시 있어요. 적이 있기에 예수님은 쓴잔으로, 십자가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게 한 그 당사자, 이 세상 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듯이 세상의 신, 복음의 광채를 가리게 하는 세상의 신, 인간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신이 있는데 그걸 누가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있느냐?

인간들이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형사가 와서 범인을 잡으려고 하니까 그 범인 엄마가 술상을 받아놓고는 “형사 나리!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아들 보고는 “빨리 뒷문으로 빠져.” 자꾸 악마를 계속 숨겨주는 거예요. 악마를 숨겨주고 그 형사보고 자기하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형사나리!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이걸 오늘날 우리 식으로 번역하게 되면, “예수님, 저하고 이야기해요. 십일조 하고, 선교비 다 내고, 봉사하고, 성경공부 다 하고, 하여튼 시키는 대로 다 열심히 할 테니 주님이 저하고 이야기합시다.” 하는 거예요. “비켜라.” “주님, 저하고 이야기해요. 저 기도하면 두 시간 반입니다. 저하고 이야기합시다.” “안 비키나!” “주님, 저하고 이야기해요.” 

주님은 우리하고 이야기 안 합니다. 이야기할 잽이 돼야 하지요. 이야기할 잽도 안 되는데. 우리는 주님하고 이야기해서 이만큼 사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은혜로 살게 해줬습니다.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 때문에 살았지 주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해서, 중보기도해서, 응답받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에요. 

제가 어제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결혼식 마치고 장로님과 성도님들과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서 장로님 이야기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어요. 제 아내가 디저트로 포도를 담아왔어요. “장로님, 이게 품종이 뭡니까?” 캠벨이라는 거예요. 오늘 저 뒤에 캠벨이 아닌 거봉이 와 있지만. 제 아내가 먹으려고 하니까 장로님이 이렇게 해요. 

“저 같으면 안 먹습니다.” 왜? “덜 익었잖아요.” 이게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점이거든요. 아마추어는 뷔페에서 내 놓으니까 그것이 먹을 수 있어서 내놓는다고 보는 거예요. 제가 멍게를 좋아해서 멍게를 많이 가져왔거든요. 장로님이 그걸 보시고 “저 같으면 안 먹습니다.” 왜? “중국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전문가는 주님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우리는 아예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덜 익었다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수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게 되면 인간 아닌 것이 인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같은 아마추어끼리의 견해에요. 그것은 악마가 그렇게 속여 온 거예요. 어차피 인간 안 될 것 자기 감추는 방어막으로 얼마나 쓸데가 많은지.

“목사님, 본문 이야기는 안하고……” 지금 본문이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본문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소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기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자기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를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마태복음 10장 9절, 10절에 나오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하는 그 말씀과는 너무나 확연하게 차이나는 말씀이에요.

성경 흐름에서 일관성이 떨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지요. 왜? 예수님의 사도면서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두 벌 옷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 전했다는 그것으로 돈을 받는 그것을 왜 정당화하는가. “받아도 괜찮아요.”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거든요. 고린도전서에서.

그런데 그것은 미끼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위쪽을 마케도니아라고 하고 그 아래쪽을 아가야라고 합니다. 그리스를 남북으로 쪼개면 위는 마케도니아 남은 아가야에요. 오늘 본문 9절에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지명이 나오지요.

이걸 제가 설명 드린 겁니다. 사도가 그렇게 하니까 사도바울이 인기가 있음과 동시에 “바울! 바울!” 해가지고 금전적으로 아낌없이 보탬을 주거든요. ‘아, 저게 생계수단이 되는구나. 이 목사라는 것이. 목회가 이것이 소셜포지션, 전문직이 되는구나.’ 이제 곧 세금도 내면 되니까. 목사라는 것이 전문직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고 노후까지 대책이 가능하고 교단법에 의하면 70세에 은퇴합니다. 계속 버티면 70세까지 할 수 있어요.

수능성적 안 좋고, 공부는 하기 싫고 그럴 때 “신학교나 가라. 어릴 때 내가 한나가 되어서 너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이렇게 돼버리면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면 밥벌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아직까지 숙성되지 않는 죄들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예수 이름으로 숙성된 악마의 화신들, 악마의 활동들이 세상을 접수를 했어요.

그게 뭐냐? 목사 해서 월급 받는 것은 사도바울에 의하면 정당하다 하더라. 그러니까 월급 받으면서 카리스마 언급을 하면서 오야붕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는 구름 위에 사는 거예요. 그 밑에 있는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해서 교회질서와 권력을 쥐게 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 돈을 받지 말라고 해버린 거예요. 돈을 안 받아버렸어요. 사도바울이 이랬다저랬다 한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에 속하는 넓은 지역인 아가야 지역에서 졸지에 같이 섞여 있다가 갑자기 사도바울이 확 빠져버리니까, 돈 받아도 된다고 하다가 나는 돈 안 받는다고 빠져버리니까 남아 있는 모든 돈 받는 인간들은 갑자기 악마의 화신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게 아까 말한 소유확인인 겁니다. 소유확인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내가 가진 수입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 땅에 살만한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그것을 가지고 소유확인이라 하는 거예요. 나는 이 정도 오랫동안 사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살만한 가치가 넉넉해, 라는 그런 증거로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아까 이야기한 자기안전망 구축이에요. 누구도 날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항상 사건을 유발해요. 자기존재를 안전망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 하나 확보해서 쥐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번갯불같이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계속해서 그 존재 자체를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말씀을 던지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지난 시간에 ‘사건’ 또는 ‘사건의 다발’이라고 한 거예요. 여러분, 설에 강정 만들 때 네모난 강정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어요. 핸드볼 공처럼 생겨서 쌀 알갱이로 주먹밥처럼 둘둘 뭉쳐서 만든 강정도 있잖아요. 그 때 참 맛있었는데. 그 강정을 유심히 보세요. 그 강정에 자아가 있습니까? 

그 강정의 어느 쌀 알갱이를 떼어서 대표자아로 등장시킬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것은 쌀 알갱이의 다발입니다. 쌀 알갱이를 엿으로 뭉친 거예요. 우리는 주어진 모든 사건을, 주어진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취지에 따라서 그냥 뭉쳐진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약간만 시간이 지나버리면 이게 자아가 돼버려요. 이게 존재로 변해버려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나는, 나는, 이렇게 해요. 여러분이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산상설교는 무지무지 어려워요.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게 마태복음 5장 41, 4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미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자아가 형성되고 난 뒤에 이 자아를 가지고 어디에 골인하려고 하느냐 하면, 저 하나님 계시는 천국에 이 자아를 질질 끌고 가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조언을 해요. 산에 갔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그래서 길을 잃었다. 그 때는 반드시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집에 가는 길이 나올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개울로 갔다. 그런데 개울이 지하수로 빠져버리고 다 증발해서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게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입니다. 교회 나와서 구원받기 위해서 30년, 40년 신앙생활 했는데 가보니 개울이 날라 가고 없어요. 돈 천지밖에 없습니다. 경산극장이에요. 해체를 해보니 각자의 욕망만 남았어요. 교회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님이 오신 것은 교회 해체하러 왔는데 그들은 전도라는 명목으로 돈으로 전도센터를 만든 겁니다. 교회가 문제가 아니에요. 나 자체가, 길을 찾고자 하는 내가 과연 길을 찾아서 천국 갈만한 존재인지를 한 번도 사전에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그걸 물어보라고 한 그런 사람도 옆에 없어요. “잘났다, 너. 천당까지 가야지.” 그러한 칭찬만 늘어놓은 거예요.

복음을 아는 우리 교인들, 태도를 한 번 보세요. 이게 복음의 진수인지 아니면 복음의 후유증인지, 부작용인지 모르겠는데 시크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나 시크한지 전부 다 시커매요. 냉혈한. 남들의 칭찬에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정과 성의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지 않아요. 십자가마을하고 우리 교인들 특징이.

복음의 부작용인가요? 보통 칭찬을 하게 되면 정 주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것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합니다. ‘냉혈한’ 냉혈한 킬러. 우리교회 와서 “오셨습니까?”라는 말도 안 해요. 얼마 안 있다가 갈 사람이기 때문에. 꾀이고 그런 것도 없어요. ‘와서 점심이나 축 안내나 몰라.’ 이러지요. 산상설교를 해석하는 모든 주석들 보세요. 

이렇게 주석합니다. 용서받은 자만이 이 말씀을 읽을 수 있다고. 아, 세상에!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여러분, 비참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가 더욱더 비참해져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남의 피곤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그 사람보다 더 피곤해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 이유가 뭐냐? 약자를 도와주면 어느새 본인이 강자가 되어 있다는 이 사실, 이 모순적인 사실에 눈을 뜬 적이 없어요.

누가복음 1장에 예수님 오신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자리를 바꿔주는 거예요. 권세 있는 자를 내쳐서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게 하는 겁니다. 비천한 자를 높여서 권세 있는 자 만들어줍니다. 이거 누가 하는가? 사람은 못해요. 이걸 의도적으로 노리면 얍삽한 꼼수 쓰는 인간입니다. 도둑놈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우리 도둑 될까요? 안 그래도 다 도둑이지만. 제가 어제 주례를 하는데 조건이 있었어요. 일체 하나님이라는 용어 쓰지 말기. 교회 분위기 일체 내지 말기. 그 조건하에 주례하기로 해서 했습니다. 혹시 잘못해서 하나님 나올까봐, 예수 나올까봐 얼마나 신경 썼는지요. 

사랑해서 결혼한다고요? 사랑자체는 평소에 하던 거짓말에 하나 더 보탠 거예요.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사랑이란 것은 사랑이 아니고 열정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이지요.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했어요. 열정이 빠지면 상대방이 짐과 부담만 될 뿐이다. ‘저거 어떻게 처치하지?’ 

서로 뜨겁게 사랑했어요. 그 다음에는 대책이 없어요. ‘저거 처치하나 마나?’ 꼭 성경에 나오는 다말 같아. 사랑한다 해놓고는 배나 미워하는 것. 사랑이 적으로 바뀌는 것. 그래서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으로 하는 거예요. 존경은 뭐냐? 내게 없는 것을 발굴해가는 그것. 그 존경단계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사랑단계인데 그래서 사랑은 나중에 온다고 했거든요.

제가 이 주례를 다시 설명하는 것은 녹음된 것이 하도 잡음이 많아서 잘 안들릴까 싶어 다시 설명하는 겁니다. 사랑은 나중에 와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자발적으로 패배자 되는 거예요. 그대 앞에 내가 자발적으로 작아지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미쳤어요?’ 할 거예요. 죽을 때가지 삼식이나 하겠다는 사람한테.

그게 뭐냐 하면,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애초에 구원받을 자격 같은 이것은 마귀가 계속해서 나에게 심어준 거예요. “너는 산상설교 보지도 못했나? 너는 누가 너보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줘야 돼. 그래야 네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너도 그 덕에 구원받는 거야. 너의 잘남을 왜 썩히나? 네가 성령 받았잖아. 옛날에는 성령 못 받아서 말씀 못 지켰지만 이제 성령 받았으니까 본격적으로 성화해야지. 경건해야지. 거룩해야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그렇게 되면 ‘쓴잔’이라는 확정된 모든 최종의미가 날라 가버립니다. 주님께서 못나서 죽었습니까? 우리는 못나서 죽어요. 죄지어서 죽습니다. 말씀대로 죄 지었기에 당연히 저주받아야 되지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어떤 간통한 아줌마가 들통 나서 개망신 당하고 질질 끌려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원받았어요.

간통하다 공개적으로 걸려서 천당 가고 몰래 간통하다 안 들켜서 지옥가고. 도발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봐야 됩니다.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와 상대 안 해.” 너는 그냥 앞잡이에요. 우리는 악마를 숨겨주고 있습니다. 왜? 악마는 항상 나에게 긍정적 사고방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에게 희망을 줬거든요. 구원될 수 있는 희망. 바리새인하고 똑같아요.

계속해서 우리의 원천, 우리의 본심을 가르쳐주지 않고 남보다 더 앞서가면 앞선 만큼 상급 주고, 하나님께 복 받고 죽어도 천당 간다는, 내가 정말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줘요. 산에서 내려오는 그 길로 곧 집에 갈 것 같아요. ‘집으로’라고 누가 이야기했다만. 곧 집에 갈 것 같아요. 도중에 어떤 사람이 앞서 가다가 날라 가버렸는데? 앞서가던 사람이 그만 자살로 날라 가버렸어요.

없어요. 앞서 가던 사람 어디 있어요? 왜 죽었겠어요? 분노해서 죽었어요. 분노하지 않으면 안 죽기 마련이에요. 왜 분노합니까? 모든 인간은 복음에 대해서 분노하는 괴물이 배후에서 인간을 조종질 했어요. 인간들이 교회 나와서 열심내고 설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그 분노를 억지로 프레스, 억눌러서 “나는 분노마저 이렇게 착하게 예쁘게 억누르면서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주여, 저 어때요? 참 착하지요?” 그 짓 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다가 계속해서 복음 전해버리면 나중에 완전히 뒤집어져버립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이렇게 했어요. 사도는 제자의 한계라고요. 제자의 끝은 어디냐?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 제자의 끝입니다. 그게 제자에요. 제자 불러서 예수님 나를 부정하라는 거예요.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떡도 안돼요. 떡을 주는 것은 마귀가 주는 거예요. 인기는 마귀가 주는 거예요. 세상부귀영화는 마귀가 주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싶은 것 다 마귀가 주는 거예요. 왜? 그게 우리의 욕망이니까. 어떤 문둥병 들린 자가 진물 질질 흘리면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요. 유럽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올 때 있었던 일입니다. 신부하고 수녀가 문둥병 환자 옆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하여튼 성경은 본 게 있어가지고.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있잖아요. 

드디어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를 보일 찬스가 왔다 싶어 남들은 그냥 지나가도 자신은 세 번째 자비를 베푼 사람이 되겠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 해서 그 문둥병자를 돌봐줬어요. 졸지에 신부는 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권세 있는 자가 되었어요. 선한 자가 되고 말았어요. 흐뭇해서 “주여,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이것이 주와 나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착하니까 이것은 제 능력이 아니고 주의 성령의 능력인줄 알고 그 정도로 내가 주와 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고 가겠습니다.” 하고 가려고 했지요.

신부가 그 문둥병자 환자의 발을 씻겼거든요. 그 뒤에 수녀가 그것을 보고 그 발 씻은 물을 마셨어요. 신부는 지금껏 자기가 한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에 허탈에 빠졌습니다. ‘뭐야?’ 이것을 어떤 철학자가 인용을 했어요. 신부가 한 것을 욕망이라 하고 수녀가 한 것을 충동이라고 하면서 둘 다 인간의 무의식, 내면에서 나온 악마의 짓입니다.

그러면 악마의 짓이 아닌 것은 뭡니까? 없어요. 베드로가 “내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충동이에요. 충동과 욕망의 차이점. 욕망은 해주되 그다지 자기 것이 다치지 않는 것. 왜? 인간은 소유확인이니까. 내 소유가 있을 때 나는 인간이 되거든요. 소유가 없을 때 인간이 안 됩니다. 뭔가 가져야 남에게 과시하고 허세를 부리는데 그게 없으면 그냥 하나님께 욕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안 해요.

그 때 그때 소유가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데 소유가 다치지 않는 한 자기 동질성은 여전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욕망이에요. 신부는 신부라는 이 라이센스, 자격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자기는 착한 일을 한 거예요. 이것은 욕망이에요. 그런데 수녀는 자기가 같이 문둥병 걸릴 수 있지만 도저히 욕망 선에서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욕망선에서 멈춰버리면 본인의 충동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왜? 충동은 지하 2층이고 욕망은 지하 1층이기 때문에. 1층 2층 잘 모르는 분은 3주전의 설교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하 2층에서는 인간자아는 없어요. 자아 만들기 전의 카오스시대에요. 아담과 악마가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지하 1층으로 오게 되면 자아가 만들어지면서, 악마가 자아라고 이름을 주면서 그 때부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위신, 자기 명예를 위해서 자기 몸을 다 바칩니다.

그것은 지하 2층에서 충동질하는 악마의 힘이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네 이름 말고 내 이름, 주의 이름으로 오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숨어 있던 관계, 다시 말해서 너는 죽고 죽은 너를 살린다는 그 관계를 실천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인간은 십자가의 관람객으로 머물지만 주님은 실제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은 욕망도 아니고 충동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아이전의 문제에요. 악마의 전투에서의 승리란 부활이 승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승리에요. 부활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모두 탐을 내는 거예요. 새생명이라는 것은 탐을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는 아무도 탐을 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자긴 딴에 제자의 한계를 보여줬지요.

주님께서는 “사탄이 너로 하여금 나를 부인하게 할 것이고 사탄이 네 영혼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지만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너의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결심도 아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다만 너에게 내 승리의 결과만 선물로 줄 뿐이다.” 그 악마를 주께서 승리함으로서 배신했던 그 베드로가 배신했다는 그 과거가 얼마나 자기에게 중요한지, 사도가 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그 과거를 안고 베드로는 사도에 나서게 됩니다. 

이제 어떤 소리를 해도 사도는 군말이 필요 없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은혜입니다. 지금 내가 집이 세 채 있고 ……, 실제 세 채가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를 드는 겁니다. 그리고 땅이 십만 평 있는 것, 남 주지 마세요.

그거 교회에 기부하지 마세요. 교회는 해체하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그것을 내가 지키려고, 내가 소속되었기에 내 자존심으로 교회지붕을 올려버려요. 그러면 내 자존심이 계속 살아있게 돼요. 돈 많거든 전도서 말씀처럼 실컷 쓰시고, 크루즈를 가든 노르웨이를 가든 실컷 하세요. 딴 거 하지 마시고. 가난한 사람 주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그래서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그것을 동양적인 버전으로 한다면 “노세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 세상은 법으로 자기정당화, 존재의 정당함의 안전망을 구축합니다. 

병풍 보면 동양화에 폭포가 그려져 있지요. 폭포 뒤를 뚫어놓아야 돼요. 법이라는 폭포, 경건이라는 그 폭포 뒤로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 보면 거기에 십자가가 있어요. 왜? 주님께서는 죄를 뚫고, 법을 뚫고, 법의 저주를 옴팍 다 맞아가면서 십자가로 승리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자, 우리를 불러요. “이리와, 이리와! 이리 들어와, 이리와! 들어와, 들어와, 이리 들어와.” 내가 잘났다는 것을, 내가 이만큼 정당함을 커버하는 그 법을, 그 폭포수를 뚫는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기 바랍니다. 그럴 때 아, 그동안 우리가 마귀의 앞잡이 노릇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망치는 것이 마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망쳤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평생 과시욕에 빠져서 잘난체 하는 식으로 살아갔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흠이 되고 소유되지 아니하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주님 편에 서서 내가 지나온 그 과거를 다시 회상하고 찾아가는, 체험하는 그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