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단의 조직원(고후11;13-15) 1709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4. 08:20
2017-09-03 12:46:45조회 : 68         
   사단의 조직원 170903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사단의 조직원(고린도후서 11:13-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YqmWk_uIs5I, Hit:3

 이근호17-09-03 13:37 
사단의 조직원  

2017년 9월 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13-15 

(11: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1: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오늘 본문을 보는 현대인의 마음가짐은 이러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짜고짜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단, 곧 악마라는 용어 사용은 화날 때 나온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는 지금 자기 싸움을 하고자 시비 거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사람들이 빠트리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존재’입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악마는 배후에서 ‘육의 차원’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즉 오로지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보자는 겁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 대로 보상받은 이 세상은 대체로 하자없는 정상적인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인정하는 모든 문화적 산물에는 모두 ‘악마의 존재나 활동사항’이 빠져 있습니다. [수학의 정석], [성문 종합 영어] [삽살개 보존하기 ] [두근두근 손 뜨개 시리즈] 등등의 책들에게 악마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의 구원은 용기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과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신을 좋게 보기에,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세상도 좋게 봅니다. 특별히 세례요한 당시 유대사회는, 간곡한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즉 “찬양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분위기를 고대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즉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천국이 온답니다. 왜 세례요한이 소개하는 천국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요한이 외치는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즉 “악마의 식구들아”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을 구원될 것같으면 이 돌멩이가 구원받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귀신들을 쫓아내면서도 막상 ‘악마의 자식’이라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도리어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귀신과 악마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즉 잔챙이를 건드려보면 그 머리되는 오야봉가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이미 ‘이 세상의 신’이기에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가 이런 사정에 놓여 있습니다. 즉 “이 교회를 사도 바울이라는 작자로부터 지켜나자”는 식으로 교회들을 회유했고, 교인들은 거기에 동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것’이니까요. 이런 식의 삶이 ‘정상적’이라고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메시야가 오니, ‘자기 것 지키기’가 사기로 드러나버린 겁니다. 

유대사회가 구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유대나라 지키기에 나선 겁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이런 분위기를 깹니다. 즉 인간의 피부층을 벗겨내고 그 내부를 소개합니다. "너희들 속에 악마 들어있고 이 세상은 그 악마와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등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단순히 의미들을 각자 따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대상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탈출시킬 때, 사람하고 상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 얼마나 많은 식구가 있던 상관없이 ‘양을 가지고 그 피를 내어놓아라“고 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는 ‘절대적 단독자’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양’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악마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매혹적인 장난감 가게에 들어선 아이로 봅시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장난감에 끌려서 사 달라고 엄마한테 조릅니다. 

이 때, 엄마는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자기 자신이 천사로부터 얻어맞는다는 사실을 아이는알아야 합니다. 아이로 인하여 엄마는 엉망이 됩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그 엄마는 아이를 껴안고 맹렬한 저주 안에 죽습니다. 이로서 아이는 더 이상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요청할 주체가 날아가버립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오직 예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어떤 인간도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존재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가고, 부자는 지옥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죽었던 그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어서 아직 지옥에 오지 않는 동생 다섯 명에서, 죽고 난 뒤의 사정을 알려주어서 회개할 기회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왜냐하면 존재 구원은 인간 앞에 그 어떤 식으로 증거를 제시해봤자, 자신의 평소의 끊을 수 없는 소망과 연계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존재가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서 다시 자기 존재를 단단히 하는 재료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십자가 사건을 반복해서 제시할 수 있는 몸으로의 부활입니다. 즉 존재에서 기능으로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인하여 성도의 존재는, 이제 ‘피의 기능자’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새가 새조롱 속에서 살듯이, 성도는 피 안에서 삽니다. 피의 기능을 발산하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악마가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단이 활동해야 ‘구원의 문’이 생겨나고 그리고 즉시로 사라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가 자신의 지성으로 구원을 달성못하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함께 죽고 늘 함께 사는 기능이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9-04 16:07 

253강-고후 11장 13—15절(사단의 조직원)1709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13절-15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도가 느닷없이, 다짜고짜,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할 때처럼 하지 않고 악마를 거론해버려요. 사탄을 거론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사도가 세상을 볼 때 보통 인간들이 보고 있는 안목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그냥 이 땅에서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잘 살면 그것으로 잘 사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용기가 아니라 해석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막무가내로 열심히 산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저녁 늦게 재래시장 가보세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촌에 가면 농사짓는 사람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얼굴 새까맣게 호미질하면서 사는 분들 많습니다. 그 사람들 구원됩니까? 열심히 살았는데요. 

“왜 열심히 사십니까?” 하고 물으면 그 사람들 답변은 한결같아요. “자식을 위해서. 내 몸 부서지더라도 자식을 위해서 뭔들 못하리.” 뭔들 해보세요. 평생토록 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보상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은 딱 하나에요. 열심히 일하고 거기에 대한 합당한 보상받고. 

그러한 해석에 고린도교회가 다 넘어갔어요. “하나님에게 열심히 순종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합시다.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겁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큰 보상이 있을 것이고 ……” 그 흔해빠진 달란트 해석 있지요. 열심히 하면 나중에 성과급 받는다고. 그렇게 가르쳤던 자들이 악마의 조직원들이었어요. 

지금 사도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악마를, 사탄을 거론해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육에서 영을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나처럼 성령 받았으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대자연속에서 영의 활동을 뽑아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자기를 뒤로 숨겨버리고 이 세상을 몽땅 육에서 육으로 처리해버렸어요. 

아예 악마라는 자체가 없는 것으로. 물론 하나님도 없는 것으로. 하여튼 세상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냥 흘러간다. 계속해서 그러한 세계관을 과학적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초등학교부터 가르칩니다. 어떤 가정의 애는 영재인데요, 요즘 책값만 해도 한 달에 2백만 원 들어간답니다. 8살 먹은 애인데 지금까지 만권을 봤답니다. 

얼마나 영재에요. 영재들이 무슨 책을 보는가? 천문학, 혜성, 이런 것 봐요. 거기에 마귀 나옵니까? 거기에 악마 나와요? 우리 고등학교 동기가운데 하지홍이라고 있는데요. 현재 경대 교수인데 그 애가 책 새로 냈다고 온군데 단체메시지를 보내는데 나에게 문자 메시가 왔어요. 무슨 책인가 보니까 <삽살개의 보존법> 우리나라 삽살개보존협회 회장입니다. 

댓글에 이런 것도 있어요. “이 사기꾼 하지홍아! 세상에 2십만 원짜리 삽살개를 1억에 팔다니.” 삽살개의 보존에 악마가 나옵니까? 수학정석에 악마가 나와요? 성문종합영어에 악마가 나옵니까? 어떤 책은 <두근두근 손뜨개질 시리즈> 거기에 악마가 나옵니까? 왜 우리는 악마가 나오지도 않고 사탄이 누군지 소개하지도 않는 그런 책에 관심을 둡니까?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정상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래요. 아주 정상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남는 것은 단 하나뿐이에요. 열심히 살고 보상받고. 끝. 그런데 성경은 악마를 끄집어냅니다. 악마를 끄집어내서 이 세상에 일부 악마가 있고 일부는 아니다, 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악마의 통제하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편지에서 이렇게 했어요. “이 세상의 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이 있는데 그 오야붕이 악마라는 거지요. 이제는 말한다, 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그걸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 같으면 거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를 보내면서 귀신을 잘 쫓아내는데 막상 사탄의 대장이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귀신은 안 쫓아내지요? 

그런 의문점이 안 들던가요? 저는 들었는데요, 옛날에.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어요. 원래 구약 유대사회는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들은 얼마나 고생들을 했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메시아가 와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문자대로 감람산에 어벤저스가 설 때……,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메시아가 거대한 모습으로 감람산에 설 그 때는 세상나라는 작살나고 유대나라가 이긴다고 생각해서 구약에 있는 모든 해석들은 현재 유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본 겁니다. 한번 이스라엘은 영원한 이스라엘이 되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버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 53장의 해석을 이렇게 한 겁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할 때 그가 누구냐, 하는 해석에서 그를 집단적 이스라엘로 본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방민족에게 학대와 핍박을 받지만 언제나 이 학대와 핍박이 거름이 되어서 우리나라 이스라엘 나라만큼은 다시 다윗의 나라로 우뚝 설 것이라는 희망을 이사야 53장을 보면서 뽑아내는 거예요. 

아직도 그런 해석을 하고 있고 지금도 기독교라고 이름 하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3년반 환란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어요. 거기 말려서 돈 모아서 핵폭탄에 대비해서 지하벙커 만들고요. 생수준비하고. 바보도 아니고 말이지요.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가 아니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너희들이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다, 엉터리로 세상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외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왔거든요. 왔을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느닷없이, 다짜고짜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어이구, 니들도 구원받으려고. 아이고, 니들이 구원을 받아? 니들이! 참 웃길일이네. 니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한 취지 여러분 모르지요? 세례요한은 인간의 피부층을 벗겨버립니다. 껍데기를 벗겨버려요. 국회의원, 대통령, 머리 허연 외무장관, 다 필요 없어요. 전부 껍데기를 벗겨버려요. 나는 바리새인이니 나는 사두개인이니, 그런 것 다 필요 없어요. 껍데기를 홀라당 다 벗겨버리면 남는 것은 그 안에 마귀 들었어요. 마귀가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귀신은 군대 귀신이 되어서 여러 명에게 들어가는 것을 아는데 마귀는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여러 마귀가 되느냐, 이렇게 생각하실 것인데요. 그래서 김기동인가 그쪽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혼에 들어가서 난리가 난다고 점쟁이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북한선교회를 만들어서 탈북자는 그 교회 다 가게 만들어놓고. 하여튼 장사수완도 희한해요.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돼요. 중요한 건데요. 왜 귀신은 쫒아내면서 그 오야붕이 되는 사탄은 쫓아내지 않는가?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했습니다. 이 뱀 새끼들아. 너희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는 말이지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권력관계를 보는 겁니다. 

그 잔챙이 귀신, 쉽게 이야기합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있는 거예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인간이라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보기에 악마가 있고 악마의 조직원이 이 세상에 있어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하면,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가 부자 집 앞에 살고 있었거든요. 거지 나사로가 먼저 죽고 난 뒤에 부자도 따라 죽었습니다.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 지옥에 간 부자와 대화하는 가운데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미 낙원에 가 있는 나사로를 다시 끄집어내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는 내 동생 다섯에게 보내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너도 내 꼴 난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이 나사로를 보면서, 후반전이 있구나. 전반전이 우리를 속였구나. 그래!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지.” 그렇게 되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지옥 갔던 형님이 부탁하는 거지요. 얼마나 장합니까? 죽고 난 뒤에 그렇게 동생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존재를 기능으로 분해시켜라 그 말입니다. 존재를 기능으로 분해시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체로 왔을 때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도 도망간 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몸이냐 하면, 그냥 옛날 십자가 졌던 그 몸이 아니고 기능의 반복화가 가능한 몸으로 바뀐 거예요. 부활이라 하는 것은 부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었다는 그 사건을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가능케 할 수 있는 몸, 그런 몸이에요. 그래서 문 닫힌 곳을 왔다갔다 했지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반복해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성령세례가 계속 주어지잖아요. 

그 말은, 이 세상의 자기 백성들은 나를 잃어서 다시 나를 얻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잃을 때는 존재로 잃었다가 얻을 때는 주님의 기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아, 안 믿는 투다, 안 믿는 투,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애들 데리고 장난감가게에 갔어요. 애가 장난감(세상)의 유혹을 받은 거예요. 

사실 유혹이라 하는 것은 욕심을 끊었다는 것이 없어요. 욕심이라 하는 것은 유혹거리가 새롭게 생기면 없던 욕심이 마중 나와서 새로 만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정도면 나는 더 이상 세상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 하는 그런 큰소리는 치지 마세요. 아직도 유혹을 덜 받아서 그래요. 인간은 항상 그렇거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성도에게 악마를 끊어내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악마를 끊는 방법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악마를 끊는 방법으로 구원해버리면 우리가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존재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되어서 자기가 우상화된다니까요. 나를 버리고 나를 찾는 것은 불교지 기독교, 복음이 아닙니다. 요새는 기독교도 그렇게 되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 자기를 잃었다. 잃어놓으면 헤헤거리면서 한 번 주고 됐지요, 해서 다시 되찾고, 그런 식은 없어요. 

복음에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애들 장난감가게에 데려갈 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합니다. 그러면 이때까지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이 장난감이 얼마나 위험한 장난감인지 아나? 저 장난감은 마귀가 다 만든 거야. 거기에 빠지면 안 돼. 때 치! 말 안 들어?” 막 패잖아요. “정신 차리라니까! 네가 징계도 몰라?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 징계 받아라.” 

이렇게 때려서 ‘내가 잘못했구나. 두 번 다시 그런 짓 안해야지.’ 하고 또 하게 되면 도 매 맞고 회개하고, 매 맞고 회개하고, 이걸 개혁주의신학이라고 합니다. 매 맞고 회개하고, 매 맞고 회개하고. 그 다음에 이제는 죄 안 짓기 때문에 매 맞을 일이 없다는 이것이 구원파입니다. 하여튼 구색대로 다 있어요. 한국교회는 원하는 대로 상품이 다 있어요. 

전부 다 개인구원을 목적으로 구원론입장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데 온 수완을 다 해서 사람만 꾀면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돈만 빼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마귀를 끊어서 두 번 다시 유혹을 안 받도록 조치를 해달라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자기절대화지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애가 쓸데없이 유혹받아서 장난감 사달라고 하면 애를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엄마 자기를 때리고 주의 천사가 와서 엄마를 때려버려요. 애는 그것도 모르고 보이는대로 장난감 다 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점점 더 엄마는 퍼렇게 멍이 들어서 엄마 육체가 완전히 폭발해버립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엄마가 맞는다니까요, 엄마가. 우리가 맞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맞아요. 그러면 엄마의 존재는 해체되어 버립니다. 찢어져버리지요. 

그리고 엄마는 찢어진 자기 육체 속에 자기 철딱서니 없는 애를 안고 같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폭발해버립니다. 죽어버리지요.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하는 그 애가 다시 내 것으로 되찾을 것이 없어요. 내 존재로 되찾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한 천국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미 창세전부터 죽었다가 살리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기 전부터 이미,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아셨어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에요. 예수님에게만 국한 된 문제입니다. 

그렇게 창세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에 저촉을 받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출애굽기 33장의 여호와 본래의 속성을 집어넣어버립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하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이것은 원래 하나님의 소관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전가시켜버렸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원하는 자를 임의로 구원하는데 그것은 누구소관인가? 

주님이 은혜 주고 싶은 자에게 은혜를 주고, 같은 말이에요,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구원욕심은 닭 좆던 개꼴이 되는 거지요. 구원받으려고 교회 다니면서 온갖 요구사항 다 들어주고 재산까지 교회에 선교한다고 다 갖다 바쳤는데 속은 겁니다. 바보 병신도 아니고, 속은 거예요 그거! 

하나님이 우리하고 거래 안합니다. 줄 것 주고받을 것 받고 그런 것 없어요. 구원하는 것은 우리 주님 소관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끝까지 기다렸는데 주님이 긍휼 안주고 은혜 안주면 저는 어떻게 돼요?” 그냥 해체되세요. 그냥 해체될 수밖에 없어요.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나는 주의 일의 기능인,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피의 얼굴,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은, “나는 내가 기대한 구원조차도 찢어졌다. 그것조차 전부다 소용없더라. 구원받으려고 애쓰고 온갖 짓 하는 것도 소용없더라. 내가 죽으면 천당 가야지, 하는 그러한 기대감도 주님 앞에 이면지 째듯이 다 째버리고 내 존재와 함께 날라 가버렸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주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가 조롱박 속에 살듯이 성도는 피 안에서 삽니다.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짓거리도 피 증거하기 위해서 필히 일어날 짓거리가 되는 거예요. 교도소 가든 말든 사기를 치든 말든 관계없어요. 피만 있다면 괜찮아요. 피만 있다면! 

이걸 누가 아는가? 이걸 악마가 알아요. 악마가 알고 자기 권력관계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전부 다 힘으로 자기 안에 강력하게, 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악마를 끊어버리고 없애버리면 참 좋겠다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존재에서 악마를 끊어버리면 존재만 남기에 기능이 안돼요. 

그냥 존재만 남으면 안돼요. 악마가 예수님을 추적해서 기어이 잡아 죽이듯이 악마가 우리의 존재를 겨냥해서 계속 추적해서 우리를 압박을 해줘야 돼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이 이야기했어요. “네 아버지를 내가 알아. 네 아버지는 목수고 너는 목수의 아들이고 너는 나사렛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메시아일수 없어.” 영의 이야기를 육의 이야기로 자꾸 환원해서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해석의 문제지요. 자꾸 해석을 슬쩍 같은 육으로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악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뭘 모르는가? 예수님의 존재의 내면은 모르고, 예수님의 존재안에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의 기능이 나오는 것을 모르고 그냥 목수의 아들로 보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의 일가친척도 그렇게 봤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아버지를 몰라. 하나님도 몰라. 너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은 악마야. 너희 애비는 악마고 너희는 그 자식들이야.” 자꾸 하나님 믿는 그들을 두고 악마를 섬기고 있다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 믿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를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를 수밖에. 그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유가, 인간이, 자기존재가 기본적으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존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악마의 성향이 포함된 기능이 나와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자기방어하고 자기변명하고 자꾸 자기수호, 자신을 지키는 쪽으로, 그것이 자기정당성인데 자기의라 합니다, 자기를 지키고 변명하는 쪽으로 나오면 백 프로 악마에 속합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나도 40년 전에 신학교 나오고 나도 목사인데 그 정도 복음은 압니다.” 벌써 수세에 들어갔어요. 자기방어에 나섭니다. 자기방어에 나선다는 말은 평소에 나 잘났다는 자기를 위한 기능만 나왔다는 말이에요. 

나를 박살내고 죄인 만든 주님의 피기능이 아니고 자기기능, ‘나 예수 믿고, 피 믿고, 좋은 것은 다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은혜를 갖고 있다.’ 하는 그거 믿어놓고 전부 다 나 자신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에 해당되는 기능들이 마구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악마에 속한 기능들이 나올 때 그 기능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평소에는 안 나와요. 지난 금요일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만약에 내가 여자라면, 그리고 결혼했다면 나의 소망은 뭐냐? 

신사임당같이 훌륭한 여성, 자식 잘 키우고, 어질고, 거기에 더해서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랄 수 없고, 자식들뿐만 아니고 누가 보더라도 우러러볼 수 있는, 정말 엄마다운 엄마,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엄마, 그래서 누구부터라도 칭송받는 엄마, ‘참 착하고 훌륭하다. 인생 참 깨끗하게 산다.’ 라는 순수한 엄마, 그런 말 들어가면서 살고 싶지요. 

그런데 그게 마귀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마귀의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세례요한이 그런 아줌마를 통해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네가 구원을 받아? 네가 구원받는다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인간이 내놓는 것은요, 이렇게 순수하고 어질고 경건하고 거룩함, 이것이 무슨 기능이냐 하면, 그것은 내부에 “나는 나를 지킨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해당되는 기능들입니다. 정말 눈물 나는데, 여러분, 출애굽해서 나올 때 하나님이 관계했던 것이 뭡니까?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하고 상대한 것이 아니에요. 절대적개인의 죽음이었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이었어요.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죽음이었어요! 이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어질고 순수한 인간은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동안 악마가 세뇌를 주고 최면을 걸었는지 순수한, 남들이게 칭송받는, 사람답게 인정받는, 그게 인간의 삶의 모델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 와서 기도해도 그것 때문에 기도하는 거예요. “이제 챙피 당하지 않고, 우세당하지 않고, 망신당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 되게 하옵소서. 악마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욕심을 이기는 훌륭한 성도되게 하옵소서.” 

커피 석 잔씩 마셔가면서 밤새도록 기도하는 내용이 그겁니다. 그래서 내놓는 것이 뭐냐? “나 이렇게 살았노라.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구원의 문은 악마가 만들어요. 구원의 문은 악마가 만듭니다. 악마가 주님을 줘 팰 때, 그렇게 패서 완전히 망가지고 뚫려버린 그 창이 구원의 창이에요. 내 욕심 때문에 마귀는 예수님을 치지요. 

“거 봐. 착하게 살아가는데 네가 왜 바람 넣어? 십자가 앞에서 네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그런 부정적인 바람을 넣지 말란 말이야. 그래가지고 장사 되겠어? ‘하면 된다. 소망의 끈을 놓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교회가 되지.” 김상용이라는 일제 강점기 때의 시인이 있어요. 그 사람의 시 제목이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거예요. 

마지막 구절이 이렇습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전원생활 하면서 세상터치 안할 테니 나 터치하지 마, 이런 식으로 초연한 것. 동양화속에 있는 삿갓, 동양화의 인물은 왜 얼굴이 안 보이는지 몰라. 깊숙이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세상에 초연한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피신인데 피하면 구원됩니까? 혼자 지리산에서 기도원차려서 도 닦고 기도하면 그게 구원이에요? 

순수함이요? 그게 순수하다고요? 순수한 것이 뭔지 알려드려요? 순수한 것은 죽음이 가장 순수해요. 내 존재는 없어지는 것, 그렇게 나를 평생 괴롭히고 걱정거리를 쌓게 했던 내 존재가 갈기갈기 흙이 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질 때 그보다 더 순수한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지금 우리가 아직 안 순수한 이유가 아직 먼지가 안돼서 그래요. 먼지가 되어야 되는데 먼지가 안 되어서 그래요. 

모였다 하면 욕심덩어리인거예요. 천주교신자들은 차 뒤에 “내 탓이오”라고 붙여놓는데 여러분, 여러분 탓 아닙니다. 갑자기 기쁜 소식이 막 들려오는데 인생 여러분 탓 아닙니다. 본드 탓이에요. 악마가 본드로 여러분 발목에 칠해 놓으니까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빠지면 남들이 욕할 건데. 그것은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인데. 

“저건 개지 인간 아니야.” 그 소리가 막 뒤에서 들려오는데, 뒷 담화로 막 들려오는데 그걸 참을 수 있습니까? 자살하지. 돈 없어서 자살하는지 압니까? 망신당할까봐 자살하는데요. 그것도 못 이기고 무슨 구원을 언급합니까? 전부 다 거짓말쟁이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잡아라.” 

그러면 그 어린양 속에 뭐가 있느냐? 그 집안 식구가 넷이든 다섯이든 관계없어요. 열 식구도 괜찮아요. 딸 일곱에 아들 하나 있고, 택시 운전해도 괜찮아요. 전부 다 들어 있어요. 다 들어 있는데 애 여덟에 부모까지 하면 열 식구입니다. 열 식구가 열 명이라는 숫자 붙이지 말라는 거예요. 열 명이라는 숫자는 1이 성립될 때 10이 돼요. 

1+1+1+…… 10이 되거든요. 나는 1+1+1+……=10, 그런 식으로 인간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대표개인이 결정할 문제지 나라는 내구원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오후 설교제목이 이겁니다. “개인저주와 집단저주”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개인구원이 있기 때문에 개인구원을 노리고 장사하는 마귀, 사탄의 조직원들이 한국교회교단 2백 몇 개, 장로교회 교단만 2백 몇 개라는데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우리교회 와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솔직하게 딱 깨놓고 말해봐라. 너는 천당 가는데 관심 있지? 딴 데 관심 없지? 도와줄게.” 그래서 장사가 된 거예요. 교회 장사가 된 겁니다. 절도 마찬가지에요. 맨날 부처 세워놓고 사실은 사주팔자 보고 있어요. 긴소리 하지 말고 단적으로 마귀가 뭡니까, 라고 묻는다면 자기수세, 자기방어하면 마귀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한테 아직 지킬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신에게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마귀라는 말이지요. 서기 1592년 임진왜란 때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고 한 거예요.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용기를 냈던가요? ‘그래. 어려워도 금 팔아서 다시 나라를 살리자.’ 

그 살릴 나라는 무슨 나라입니까? 아, 대한민국이지요, 하늘나라 아닙니다. 내가 소속된 내 자리, 내 포지션이에요. 그것은 자기나라입니다. 이런 인간 천국가게 되면 천국에 누가 같이 딸려오는지 압니까? 악마도 같이 천국에 딸려가요. 천국 꼬라지 좋~겠다! 

월드컵 9회 연속 본선에 나가려고 축구대표팀이 예선전 하고 있는데 신태용 감독이 뭐 잔디가 안 좋아서 어쩌고. 우즈베키스탄하고 해서 지면 탈락이 되는 거예요. 강원도 할머니는 빼고요, 모든 국민들은 월드컵 본선에 못 나갈까봐 벌벌 떨어요. 염원이라. 아마 기도하는 사람 한 둘이 아닐 겁니다. “주여, 신태용감독 대표팀이 이번에 반드시 이겨서 월드컵 9회 연속 본선에 나가게 하옵소서.” 

이건 뭐냐 하면, 세상은 “우리는 세상이 주는 보상으로 기뻐하는 재미로 이 세상에 살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고 나는 거기에 맞춰서 살 뿐입니다. 복음, 십자가, 그 이야기는 나에게 하지 마세요. 이런 나는 정상입니다.” 아주 강력하게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이미 마귀에 의해서 계속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이 악마와 하늘나라 정체가 출애굽하면서 그 절대적개인, 모든 개인을 통합한 절대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피를 흘렸어요. 이게 순수함이에요. 이 피 말고 다른 순수함은 없습니다. 피는 믿는데 졸음운전해서 사람 몇 죽였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거. 피만이 순수하기 때문에 졸음운전하다 몇 명 죽은 것 괜찮습니다. 

이러면 나보고 잔인하다 하니까 반대로 합시다. 피 믿는데 피 믿는 우리 삼촌 졸음운전 하다가 사고나서 죽었어요. 괜찮아요. 피 믿었으면 괜찮아요. 그동안 피 기능했으면 됐습니다. 피 기능, 존재가 아니고 피기능. 왜 피기능이 그만큼 중요한가?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뭐냐? 자기방어, 자기수세하기 때문에. 그걸 자기의라고 합니다. 

“이러니까 아직까지 나는 내 존재를 지킬 만 하다.” 이렇게 더 단순화시키면 이겁니다. 악마는 뭐냐? 나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것, 자기를 위해서 자기희생하는 겁니다. “열심히 바이올린 켜고 열심히 피아노 쳐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이게 자기를 위한 자기희생이에요. 이거 악마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왜? 다 나 좋으라고. 

주님께서는 사람 보지 않습니다. 우리 애 일곱 명이고 어쩌고. “사람은 꼴 보기 싫어. 가라. 다 가고 너희 집에서 키우던 어린양 가져와라. 다른 사람 나오지 마. 너는 양고기나 뜯어먹고 있고 나는 양하고 이야기할 거야.” 요한복음 1장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주님하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베드로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개인구원, 자기입장에 있습니다. 자기입장이니까 자기 권력을 조성하게 되어 있거든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이 대화가 안돼요.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 하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자기수세, 자기 것 방어하는 거예요. 자기 것 지키는 겁니다. 베드로가 평소에 하던 편한 마음으로 했어요. “스승님은 우리하고 같은 패입니다. 우리와 한패 먹었잖아요. 주님은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왜? 우리가 잘 돼야 하늘나라 확장되니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람의 일을 대표로 베드로가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악마가 있다는 말이고 악마가 있다는 말은 곧 사람이 있다는 말인데 사람이 있을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만을 위해서, 우리들만 위해서,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노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 있는 방법은 뭐냐? 이미 노동해서 얻은 것 다 같이 힘 합쳐서 지키세. 

우리교회 우리 힘으로 지키자는 거예요. 십자가마을을 우리 힘으로 지키자는 겁니다. 내 가정, 내 새끼는 내가 지키는 거예요. 내 남편 내가 지키고, 내 아내 내가 지키고. 그 놈의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이게 존재고, 존재고, 존재고, 존재고.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환원되어서 내 것이 얼마나 단단해지고, 확실해지고, 내 것이 꿈적도 안하도록 안정된 인생이 되느냐, 거기에 몰두하는 겁니다. 

알랭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현대진리의 네 가지 형태를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종교에요. 또 하나는 정치고 또 하나는 예술, 또 하나는 과학, 네 가지로 구분했어요. 


정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균등한 분배문제에요. 

경제, 노동의 결과에 대한 에너지뭉치를 어떻게 균등하게 분배하느냐 하는 것은 정치가 나서야 된다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에게는 몫이 좀 더 가도록,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약간 적게 가도록. 

귀족은 귀족다운 명예를 펼쳐야 된다는 논리에 의해서. 이게 정치인들이 해야 될 일이고 그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예술은 뭐냐?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입을 닫아버리고 감성에 호소하고 감수성에 호소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운 것이 안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술은 새로운 창조,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해서 새로운 창조가 나오면 예술하는 사람과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이성적인 굴레에서부터 해탈, 구원이 되는 진리체제라는 겁니다. 


세 번째 과학, 요새 과학은 난리도 아니지요. 과학이 모든 진리의 전부를 독차지했어요. 과학은 종교거든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를 수식으로 표현해요. 수식으로 표현해서 모든 변화를 다 기록하는 겁니다. 

아까 예술에서 하나 빠졌는데 예술에서 드라마나 영화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갈등구조를 단순화시켜요. 

마치 그 일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호도해서 드라마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겁니다. 

<아버지가 이상해> 하다가 가정이 잘되잖아요.그러나 세상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원인도 모르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되면 영화가 안 되니까 단순화시켜서 

“…… 그래서 이 사람은 성공했다.” 규정하는 거예요. 

과학은 뭐냐? 판사입니다. 과학에 안 맞으면 미신이 되고 과학이 맞으면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귀신같은 소리하고 있네. 요새 귀신이 어디 있어? 마귀는 없어.” 어릴 때부터 과학이 꽉 쥐고 있는 겁니다. 

창조론 주장한다고 지금 장관도 못되고 있는 형편이에요. 

원자에서 원자 하나 떼는데 백만 일렉트로닉볼트의 에너지가 있다는 거예요. 

과학이 주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동위원소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노아홍수가 백번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라서 동위원소로 세상을 측정하는 이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구는 56억년 되었고 우주는 137억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게 애들, 특히 영재들이 책에서 다 보고 있는 내용입니다. 

스티븐 호킹이 쓴 <호두껍질 속의 우주>라는 책이 있어요. 아무리 봐도 거기에 악마, 마귀 안 나와요. 
마귀 안 나오고, 악마 안 나오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악마의 조직원이 되어서 살고 있다는 거예요. 

악마는 뒤로 숨기고 우리의 지혜와 노동의 가치를 북돋워서 너한테 지킬만한 의가 있으니까 너는 살만해, 

라고 계속 우리가 고집하는 절대자아, 절대개인으로 굳히면서 살기를 지금도 악마는 독촉하고 있습니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지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거예요. 


세 가지 했으니 하나 빠진 것이 있지요. 종교에요. 종교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뭐냐? 이웃사랑, 

다른 진리체계, 과학이나 정치에서 못하는 것을 희생적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종교의 상품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해왔어요. 그 사랑, 악마가 제시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순수한 것은 죽음밖에 없고 주님은 그 죽음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뭐냐 하면, 두 사람을 하나의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결혼해서 사랑하지요. 결혼해서 사랑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결혼했으면 너나 없기. 네 주장 내주장 하지 않기. 둘 다 죽었다 치고 가정을 위해서 살자. 이것 때문에 결혼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주님은 우리를 자기 죽음으로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네가 맞을 저주를 내가 다 맞을게, 이게 사랑이거든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신명기 4장 24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란, 저 사람을 내가 만들었다 할 경우에만 질투가 생깁니다. 남편이 바람피울 때 아내가 왜 질투하는지 알아요? 저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만들었는데 왜 너 같은 여자가 건드려, 이것 때문에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가 없으면 사랑도 없어요. 주님은 자기백성을 주님 쪽에서 만들어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쪽에서 만들어요. 

어떻게? 나의 존재를 내가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서. 존재와 기능을 모르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다고 난리치는 대목이 히브리서 6장 4절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대목을 가지고 존재로부터 출발을 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성령 받고 새사람 되었는데 또 타락하면 지옥 가잖아요.” 맨 날 이런 식이고. 이게 뭐냐 하면, 기능적으로 예수님이 죽었던 십자가 피에 대해서 기능을 내뿜는 사람은 자기에게 벌어진 어떠한 일이라 할지라도 주께서 하락하신 일이에요. 누굴 통해서? 

마귀를 우리에게서 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구원의 문이에요. 없는데 창을 내요. 내고 우리를 집어넣고 창 닫아버려요. 인간은 구원받으려고 해도 구원받는 장소를 몰라요. 그 장소에 가면 없어요. 기도원에 가면 은혜 받은 장소 또 가 봐도 안돼요. 옛날 했던 그 자리에 가보세요. 추억만 있을 뿐이지 은혜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시공간을 떠나서 문을 열어주고 그 다음에 문을 닫아버려요. 성지순례는 이 땅에 없습니다. 있었는데 닫아버렸어요. 그걸 열기 위해서는 마귀가 꼭 필요해요. 마귀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이유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내가 지켜야 할 그 책임감 때문에 옴짝도 못하고 염려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혹은 ‘그 때 내가 손목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또 화투에 손을 대서 집안 날렸구나.’ 주께서 화투 치게 하신 겁니다. 재산 다 날리게 하신 거예요. 그 사기꾼이 사기도박 하는 그것 주의 은혜 아니면 사기를 못 치게 되어 있어요. 졸음운전 하는 것 지금도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서 조는 사람 많습니다. 

하필 그 사람이 사고 난 것은 주께서 그 때 아다리 되게 한 거예요. 아다리, 딱 때가 들어맞은 거예요. 우리 같으면 졸음운전 하다가 천 번이라도 이미 죽었어요. 천 번은 너무 많고 한 백 열 번은 죽었어요. 한 걸음 한걸음이 주님의 개입 없이는 없고 머리카락 발걸음도 전부 다 주께서 조정하십니다. 

피의 얼굴, 너는 내 기능만 하면 돼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못할 것이 없다. 사도바울이 재벌 되었습니까? 필요 없어요. 고린도후서 12장 보면서 마치겠습니다. 오늘 마귀가 중요하기 때문에 좀 길어졌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단의 가시. 사도바울이 사단을 끊었다고요? 주께서 사도에게 사단을 넣을 정도로 사단은, 악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악마가 있어줘야 우리가 교만하고 교만해야 우리가 정신 차리지요.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서 당했습니까? 복수할 기회 드릴까요? 복수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천국 가세요. 피안에서 천국 가는 것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복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지킬 것이 있고 아직도 자기를 위해서 희생할 것이 있다면 정말 이것은 마귀가 와서 정신 못 차리게 했던 하나의 현상인 것을 우리가 왜 몰랐습니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이 움직이기에 피만 증거 한다면 이미 성도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