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다른 예수(고후11;4-6) 1708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20. 17:49
2017-08-20 12:41:39조회 : 29         
   다른 예수 17082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다른 예수(고린도후서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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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8-20 13:38 

다른 예수 

2017년 8월 20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4-6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1: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11:6)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다른 예수’라는 말을 사도가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목회 성공에 대해서 일말이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가 많아져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의식을 사도는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 예수님’이 지금도 엄연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살아 있음’, 곧 존재를 놓고서 인간들은 예수님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다른 예수를 거론하므로서 이 편지를 듣거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의 구별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예수’라는 것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종교적 집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사도는 분명히 합니다. 참된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들의 나라’인지 인간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들 자기네들 나라가 아닙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이라고 부르짖는다고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노력은 바탕은 항상 ‘혈육’을 깔고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노력하고 애쓰는 목적은 다 자기가족의 생존과 번영과 관련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이미 손에 잡히는 자기 존재를 부정할 하등의 이유를 모릅니다. 이미 태어난 것, 이미 살고 있는 것, 갈데까지 가보는 식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가족 단위로 움직이고 싶어합니다. 이런데서 온갖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나옵니다. ‘사랑, 인품, 예의, 희생, 감사, 복, 성공, 승리, 행복’ 같은 단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들이 모두 자신의 존재함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심각함과 예수님의 심각함이 상호 대치가 됩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심각함은 인간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냐 다른 예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예수 아니면 다 다른 예수다’고 단언합니다. 사도쪽에서 이렇게 결정적으로 나올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사도는 하나님의 지정해놓으신 자기 백성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중매장이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보기에, 인간들이 ‘다른 예수’하는 이유는 바로 이 ‘중매쟁이’의 존재 역할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예수가 옳은 예수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그 앞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은 단지 하나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내게 와서 내게 의미가 그 대상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참 예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들의 존재함을 주님께서는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쪽에서 제시하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잠시 창세기 8:20-21을 보겠습니다. “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노아 홍수 이전의 세계와 홍수가 걷힌 후의 세계의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죽은 희생 제물’로 인해 이 세상이 인격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단순히 그냥 존재+존재+존재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인격을 드러내는 사건들로 충만합니다. 마치 방송국을 견학하면서 온갖 것을 찬찬히 살펴봐도 드라마를 쓰는 작가 정신은 거기서 발견할 수 은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 대자연은 ‘그 누구’를 보여주고 있으면 그 ‘그 누구’의 흔적은 이 지상에 ‘피흘림’이라는 흔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곧 ‘낯선 분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우주를 움직이는 핵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이 죽음에 두 발을 딛지 않는 한 절대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생존에 익숙해져 있는 ‘육’이기에 ‘죽음’을 기피합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32:27-29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같은 식구가 같은 식구를 죽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내부의 핵을 ‘존재’에서 ‘죽음’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천국을 가동시키는 힘이 아니라 ‘죽어야 하기에 죽어 마땅함’이 천국을 가동시키는 힘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은, “왜 돌아왔느냐?”는 투입니다. 이런 기쁨의 핀잔을 받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구원된 사람입니다. 

“어떻게 내가 집어 돌아가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집에 도착해놓은 상태에서 축복의 핀잔을 받는 겁니다. 마태복음 12:32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함을 당연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으로 지옥행이 최종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지 못한 자가 최종 지옥가는 자입니다. 

그 이끄심이 곧 예수님이 영,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신 것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그 어마어마한 저주를 온 몸으로 친히 먼저 맞이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철모르고 자기 존재만 밝히는 하나님의 백성 앞에, 최후의 심판이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 저주스러움에 끼어드신 겁니다. 

거기서 생겨난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의 모든 존재성향을 산산조각냅니다. 인간들이 걱정하는 모든 성공/실패, 승리/패배, 행복/불행의 저울질은 아직도 자신이 지키고 기대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의’입니다. 악마는 “이 너희 의를 끝까지 사수하라”고 인간들을 격려하고 부추겨 왔습니다. 

이는 곧 “배설물을 손을 움켜쥐고 살면 너는 천국간다”는 사기극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철저하게 망해서 더이상, 자신이 지킬 만한 것을 끝까지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08-20 21:49:47조회 : 10         
251강-고후 11장 4—6절(다른 예수)170820-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49.39.140)
251강-고후 11장 4—6절(다른 예수)1708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4절-6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4-6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사도바울이 교회 이야기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나온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후원을 해주고 호응을 해줘야 교회가 돼요. 잘 오셨습니다, 훌륭합니다. 좋은 결실 맺습니다, 천국 가겠네요, 이런 긍정적인 소망을 줄 때 희망을 갖고 오는 법인데, 오늘날 교회 같으면 ‘다른 예수’라는 말을 구태여 할 이유가 없어 보이지요. 

한 사람이 아쉬운데 한 명이라도 더 끌어 모아야할 판에 ‘다른 예수’ 이야기해서 판 깨려고 합니까? 다른 성령, 다른 복음 이야기해버리면, 얼추 교회 모습 비슷하게 되어간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판에 다 나가버린다면 장사 헛장사 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이라는 말을 끄집어낸 것은, 사도바울이 가슴이 찢어집니다.

신자도 아닌 것이 왜 자꾸 신자 행세하느냐 그 말이에요. 사람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요. 어차피 사도바울은 아쉬울 것이 없어요. 망해도 완전히 망한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은 중매쟁이입니다. 자기일이 아니에요. 가게라면 점원에 지나지 않고 종에 불과하거든요. 자기 일이 아니니까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습니다.

지금 목회성공 이런 것은 아예 사도바울에게는 없어요. “가짜는 좀 가주라!” 그 말입니다. “왜……? 믿지 않는 것 뻔히 다 알고 있는데, 너희 예수 안 믿는 것 다 알아.” 그런데 왜 예수 믿는 척해서 얼쩡거리느냐는 말이지요. 내 눈 앞에. 천국에 어차피 합격 못할 사람, 애초부터 합격되었다고 혼선을 야기하게 되면 힘들어요. 사도에게, 중매쟁이한테는 힘듭니다. 모집책한테는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나 글은, “내가 아닌 것을 확실하게 알려줄게.”라고 그렇게 쓰는 겁니다. ‘다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오냐, 오냐!”가 아니에요. “잘 하셨어요. 잘 오셨습니다. 대충 예수로 끼워 맞춰서 함께 교회 번성시켜보고 목회 한 번 해 봅시다.” 이런 것이 아니라니까요. 

‘다른’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내가 끝까지 너희를 신자로 인정 안 해줄거야, 그런 뜻이에요. 각오가 보통 각오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왜 욕을 얻어먹느냐 하면, 딱 이겁니다. 복잡한 것 없어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없다.” 그겁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을 해 달라는 겁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이 안 되거든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성령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어요. “성경공부하시고, 예배참석하시고, 헌금하시고, 전도하세요, 그러면 구원 됩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이런 것은 인간들이 장사하려고 지어낸 거예요. 이런 것은 아예 없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남한테 그걸 전파하게 돼요. 나 처음에 예수 안 믿었는데 이렇게이렇게, 술 끊고, 담배 끊고, 목사님 말씀 듣고서 믿습니다, 하고 기도 한 천번 하니 믿어지더라, 이런 식으로 어떤 방법을 끄집어내 버리면 그 방법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놓고 자기는 전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전도는 사람이 못해요.
선교나 전도를 사람한테 맡긴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장사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교회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도하지 말라.”에요.
왜?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함께 있기 때문에.

아웃소싱, 하청준 것이 아닙니다
.

교회한테 전도나 선교 하청준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교회가 돈 뽑아내기 위해서, 마이닝(mining)이라 했지요, 돈을 채굴하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다른 예수를 언급할 때는 노력해서 온 사람들 접기 게임이에요. 노력해서 온 사람들 나가기.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접기. 접기라고 하니 젊은 애들 지금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목사 섬겨서 복 받은 사람들 접기. 교회 봉사하고 충성해서 복 받은 사람 접기. 다른 예수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야기하는 것은 이게 끊임없이 인간 속에서 분출되기 때문에 그래요. 계속해서 가라고 해도 안가고, 당신 신자 아니라고 해도 기어이 신자 되려고 애쓰고, “칼빈의 선택론이 있잖아요. 창세전에 예정 받으면 구원 받잖아요.” 이러면서 기어이 들이밀면서 구원받으려고 애를 써요. 

사도바울 보기에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집념과 집착이 이렇게 지독했던가, 너무나 지독해서 악마적이에요. 인간이 왜 교회 와서 구원받으려고 하는가? 본인이 심각해서 그래요.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심각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것은 누가 정하는가? 예수님이 정하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교회 와서 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본인 나름대로의 심각한 것이 있어서 그래요. 결혼을 앞두고 어쩌고저쩌고, 결혼을 했는데 부부가 싸우고 어쩌고저쩌고, 전부다 본인 문제에요. 본인이 너무 중요하다는 거예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이거 안 해주면 화나고, 저거 안 해주면 화나고, 건드리면 화나고, 내 자식 취직 안 되면 화나고, 내 앞길 캄캄하면 화나고, 내 사랑하는 여인 떠나면 화나고, 내 사랑하는 남편이 딴 데 눈 돌리면 화나고.

화를 왜 그리 냅니까? “왜 화내십니까?” 하면 “이게 화 낼만하지요.” “왜요?” “나한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본인 문제이거든 그 사람속에 다른 예수 들어 있는 겁니다. 그거 다른 예수에요. 지금 다른 예수를 사도바울은 유도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직도 지킬만한 것이 남아 있어요? 교인 여러분, 아직도 본인이 지킬 만한 것이 남아 있어요? 그런 것이 아직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천국가지 말라고 얼마나 복음으로 말렸습니까?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 어딜 넘봐요? 천국 갈 수가 없어요. 천국은 내 나라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지 내 나라 아니에요. 왜 거기 끼어들어갑니까? 자기집착 가지고 가 봐야 하늘나라 다 버려놓습니다. 거기가서 또 촛불집회할걸.

4절에 보면,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이 아주 독단적이고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너만 예수냐, 대번 이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예수는 다 다른 예수에요. 그러면 사도바울과 붙어 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다 옳은 예수입니까?

참 이게……, 우리가 예수 믿으니까, 우리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 잘 듣고 납득이 되니까, 그래서 우리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교회에요? 이게 교회입니까? 교회 기본도 안 된 거예요. 눈에 보이는 특수교회가 복음 받아들였다고 그걸 교회라고 본다면 그런 것 잘하는 데는 저기 북한에 있어요. 김정은이 그거 잘해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저희끼리 굉장히 착해요.

그 사고방식에 똑같이 교회까지 다 멈추는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단체로 모여서 어떤 고백을 했다고 그게 교회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그 사건 추후에 붙이는 이름이 교회입니다. 제가 말 해놓고 보니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했는데요. 

사건이라는 것이 뭐냐? 사건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앞에 대조해서 동원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존재라 하는 것인데 인간은 존재덩어리에요. 존재덩어리라는 말이 어렵거든 그냥 마네킹이라고 보면 돼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봐요. 내가 소속된 교회는 괜찮은 교회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이게 존재더미, 존재덩어리, 존재라고 해요.

내가 복음을 알아듣고 같이 모였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라고 했으니 교회겠지. 벌써 그렇게 돼버리면 나를 포함해서 내가 판단을 해서 저 사람은 나처럼 복음 안다고 판단을 해서 억지로 밧줄로 묶어버리면 그것은 괜찮은 교회가 돼버려요. 그러면 이미 벌써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사건은 어느새 날라 가버리고 존재덩어리로 되어서 마네킹덩어리가 돼버려요. 

주님은 살아계시거든요. 세상 끝 날까지 살아계신 주님께서 또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사건을 유발시키면서 모든 마네킹을 깨버려요. 깨버리고 순 우리말로 그 트임, 줄인 말로 틈, 존재와 존재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새로운 낯선 사건, 신선한 사건으로서 새롭게 주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네가 예수 믿는다고 우겨놓고 이제는 네가 다니는 교회를 나를 대체해서 우상시하는구나.” 하고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네가 다니는 교회는 남보다 괜찮은 교회니까 성공한 교회라고 우겼던 그 주동인물 나와. 너네! 너 다른 예수야. 네 손에 붙잡힌 예수는 이 땅에 없어.” 인간 손에 붙잡힌 예수는 없어요. 인간 손에 소유당하는 예수 없고 소유당하는 복음 없고, 인간 손에 소유당하는 성령 없습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데요. 부르면 쪼르르 쫒아가서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될 줄 알아요? 제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예수는 다 다른 예수에요. 왜? 진짜 예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는다.”를 깨버리고 그 다음 15분 후에 “내가 예수 믿는다.”를 깨버리는 사건으로 찾아오시는 주님.

그래서 나는 늘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늘 살아 있는 분은 나 말고 주님이 늘 살아 있어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날마다 생산해내는 겁니다. 이런 소리 했다고 또 꼼수를 쓰는데 어떤 꼼수를 쓰는가? 여러분의 지능이 높으니까 뻔해요. “주여,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닙니다.” 이런 소리 했다고 또 진짜 예수라고 인정해주는 그런 꼼수 쓰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습관이니 종교적인 테크닉 가지고 구원 못 받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지 못하면 그분께서 그냥 찾아오시는 거예요. 찾아오신다면, 한 번 찾아오시면 그 다음에도 찾아오도록 그냥 기다리세요. 한번 찾아왔으니 내 꺼다, 하고 매미채로 잡지 마시고 그 다음에도 또 찾아오실 거예요.

“목사님,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안 찾아오면 그것은 주님 맘 대로지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 나오는데 그 탕자비유에서 주의할 것이 있어요. “목사님, 저는 탕자인데 저는 어떻게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방법론 목사에게 묻지 마세요. 방법론 이야기해주면 전부 다 가짜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심정은 이거예요. “왜 돌아왔니? 왜 돌아왔어?” 왜 돌아왔느냐는 투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 돌아왔느냐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돌아왔어, 이 자슥아!” 눈물 흘리면서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 돼지먹이로 그냥 살지. 그렇게 기생이 좋더냐? 그렇게 돈이 좋더냐? 거기서 그냥 살지 왜? 왜 돌아왔어?”

그 인간에게는 더 이상 심각한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일체 없습니다. 이미 돌아와 버렸거든요. 이미 돌아온 이상은 존재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덩어리로 다뤄지기 때문에 내가 관리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믿음 없으면 안 되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관리 잘 해야지 안 그러면……’ 토한 것을 도로 먹고, 그런 성경구절 동원하고, 한 번 비췸을 얻고……, 이런 히브리서 6장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래, 조심해야지. 조심 안하면 도로 취소될 수 있어.’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돌아온 적 없어요.

그런 사람은 돌아왔다고 착각하는 자기 자신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돌아온 적 없어요. 정말 돌아온 사람 같으면 주님한테 책망성 복음을 듣게 돼요. “이놈의 자식! 왜 돌아왔나, 그냥 너 혼자 살지. 세상이 그렇게 좋더냐? 김 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 좋더냐? 세상에서 그냥 살지. 너를 과시하고 자랑질하고. 남한테 믿음 좋다고 칭찬 받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지 왜? 기도해서 응답받고, 그렇게 살지 왜? 방언 터져서 기도 세 시간 네 시간씩 하고 그렇게 살지. 얼마나 좋아, 그렇게 살지 왜?” 우리의 답변은 간단해요. “주께서 불렀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어떤 아이디어와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도를 해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구원받는 자기 자신을 미리 예상하고 그것을 기대해서 그런 존재가 되기를 은근히 고대하면서 자기 연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다음 세 가지가 항상 평생토록 짐이 돼요. 첫 번째, 나는 승리했을까, 패배했을까? 두 번째, 나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세 번째, 나는 불행할까, 행복할까? 예배마치고 문만 열고 나가보세요. 이 세 가지가 뒤에 따라붙습니다. 나는 승리했을까, 패배했을까? 나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나는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이걸 줄이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다. 그 속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예수가 계속 기어 나옵니다. 분출해서 터져 나옵니다. ‘다른 예수’를 언급하면서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일체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지금 천국 가는 사람은 뭐냐 그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뭐고, 엘리야는 뭐고, 열 두 제자 그 사람들은 왜 거기 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중매쟁이잖아. 중매한다는 것, 중매쟁이가 등장했다는 것. 중매쟁이가 등장했다는 것은 사람하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중매쟁이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진짜 예수가 따로 있을 것인데 그 진짜 예수를 알고 있는 우리, 사도바울과 함께 하는 그 사람들, 사도바울이 진짜 예수를 알고 딱 보니까 전부 다 다른 예수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성령이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한테 궁금한 것은, “그러면 네 패를 한 번 까봐라. 다른 사람보고 그렇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라고 지적질 하는데 네 패를 한 번 까봐. 너는 통뼈야 뭐야? 네 패 까고서 우리하고 다른 점을 이야기해.” 분명히 이렇게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 다른 패를 제가 까겠습니다. 창세기 6장부터 8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부터 8장까지의 이야기는 노아홍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노아홍수 이야기 다 아신다 치고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생략하고요. 옛날의 죄 때문에 홍수가 일어났는데 홍수가 거두어지고 새 땅을 줬다. 여러분이 이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노아가 두 발 딛고 살던 그 땅, 그 땅이 물이 덮였는데 물이 거두어지고 창세기 8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졌거든요. 그러면 전에도 사는데 지장 없었듯이 홍수 뒤에도 사는데 지장 없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면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달라진 것이 있어요.

뭐가 달라졌는가 하면, 창세기 8장 20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이 새로운 땅에 전의 땅에는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기입, 삽입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죽음의 요소입니다. 

죽음이 이 모든 존재하는 자연세계를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대자연을 알려면 반드시 어느 자리에 두 발을 딛어야 하느냐 하면, 그 죽음, 그 낯선 죽음에 두 발을 딛은 자만이 이 세상이, 이 자연세계가 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려운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인격적으로. 

인격적으로, 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인격적으로 움직인다. 특히 오늘날 어릴 때부터 과학공부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말입니다. 과학에는 인격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의 대상이 돼요. 대상이 된다는 말은 뭐냐? 내가 저쪽대상과 관계로 맺어지게 되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는 뭐냐? 나에게 하나의 대상이 돼버려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믿어주지 뭐. 믿어주면 되잖아.’ 십자가에 피 흘렸다. ‘피 흘린 것을 믿어주겠습니다.’ 그게 문제가 돼요. 그게 잘못이에요. 그게 다른 예수에요. 예수님을 믿어주는 그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벌써 그 자체가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라는 말이지요.

왜? 나의 대상이니까.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계속 살지, 영원토록 살지?’ 그러면 날 살리기 위해서 어떤 분이 오셨다면 그 분을 살아 있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을 해서 ‘부처 믿는 것 보다는 예수 믿을래.’ 해서 예수를 믿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 안 다치는가 하면 살아 있는 내가 안 다쳐요.

참 대견하고 착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까지 믿으니 얼마나 착해요.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하고 완전히 다른 동네에요. 완전히 달라요. 살아 있는 내가 죽음의 자리에서 서지 않고 살아 있는 내 자리를 확보한 가운데서 “예수여, 오라! 믿어줄게.” 이렇게 돼요. 

대학교선교단체들이 다 그런 내용 아닙니까? “예수 믿으세요. 여러분은 천국 갑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그 노력으로도 구원 못 받아요. 절대로 갈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되면요, 한 두 시간 믿었잖아요. 정신 차리고 또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는 강박증에 걸려서 정신병자 됩니다.

60까지 예수 믿었습니다. 70줄 접어들어서 치매 걸렸습니다. 요양사가 옆에서 “할머니가 권사님인데 혹시 권사님이 예수님을 아십니까? 지금 연세가 88세인데 혹시 예수 아십니까?” 나훈아는 알지요. 나훈아는 아는데 치매 걸린 노인은 예수고 뭐고 몰라요. 사도신경 외우라면 잘 외우지요. 그거 외워서 뭐하는데? 그거 외워서 뭐할 건데요? 교회 오라고 하면 오지요. 교회 이벤트 그 쇼 구경해서 구원받습니까?

예수를 내가 믿게 되면 그 예수는 내가 관리해야 돼요. 화초에 물 주듯이. 때로는 십일조해야 되고, 때로는 헌금해야 되고, 예배도 참석해야 되고, 그거 안하면 마귀한테 벌 받을까 싶어서 조마조마하고요. ‘결석한지 두 달이나 되었구나. 얼굴 내비쳐야지.’ 그 얼굴 내비쳐서 뭐하는데요? 그 늙어가는 얼굴.

왜 예수를 내가 관리합니까? 화초입니까? 선인장이에요? 꽃 키웁니까? 교회가 화훼단지에요? 예수사람이 되면 관리는 예수님이 합니다. 이 말은 내가 내 인생 관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춘천의 유명한 국수 있지요. 막국수. 막 사세요. 정말 이럴 자신 없거든요, 다른 예수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 그것만 최종 남거든 그 사람한테는 예수는 하나의 물체요, 이미 죽은 옛날의 과거 귀신입니다. 나보다 더 살아계신 분이에요. 여러분이 살아 있지요? 인간은 혈육중심입니다. 제가 수천 번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육 중심입니다, 가족중심입니다, 라고. 정말 제가 지쳤어요. 

그렇게, “인간은 육 중심입니다. 육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해도 여러분들은 그저 뒤숭숭한데……. 어젯밤에 <품위……> 끝났어요. <품위 있는 여자> 그 드라마 끝났거든요. 그거 뭐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 아닙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 욕하면서 죽 보게 되면……, 본래 드라마는 욕하면서 보는 거예요.

드라마는 전부 다 혈육중심이에요. 가족 앞에서는 사족을 못 써요. <도둑놈 도둑님>인가 그것도 마찬가지고……, 제가 드라마 다 보는 것 아닙니다. 드라마나 다 보고 있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지나가다 보면 다 알아요. 드라마나 모든 것이 새끼 중심, 자기자식중심이고요, 자기가족중심이에요. 끝이에요. 

교회 기도하는 것, 새벽기도 왜 그리 오래합니까? 구원해야 될 가족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 중보기도 하느라고 바빠요. 전부 다 자기 육 중심입니다. 이거예요. 살아있는 것 더 살게 만들고 변치 않게 살게 만들자. 그거 아니면 교회 장사 됩니까? 절하고 교회하고 공통점이 그거잖아요. 자기 혈육중심이라는 것. 

아직도 지킬 것이 남아 있어요. 아직도 기대할 것이 남아 있고. 그거 다른 예수입니다. 관리는 누가 하느냐? 주님이 관리해요. 주님께서 노아가 죽였던 그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그 죽음의 자리에 우리를, 자기 백성을 데려갑니다. 데려가는 그 방법, 궁금해요? 안 데려가면 육 그대로 남아 있어요. 

육을 데려가서 죽여 버립니다.
죽여 버리면 온 세상이, 이 모든 우주가 그냥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모든 세미한 일들, 꽃이 피고 새들이 짹짹거리는 것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증거 하라고 다 짹짹거리는 겁니다.
모든 것이 살아 있어요. 인격적으로 살아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인격이 되려면 우리자신의 존재, 이 마네킹을 주님만 살아 있다는 존재에서 나온 사건에 의해서 단무지 썰 듯이 산산조각 다 썰어버려야 돼요. 우리 자신을 완전히 기억의 조각들로 다 세분화해서 없애버려야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노력해서는 구원이 안 된다면, 그러면 우리쪽에서 할 것도 없는데, 주님과 관리한다면 주님께서 어떤 관리를 하느냐? 그 관리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보는데 12장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을 하기 전에 구약 한 곳을 먼저 점프해서 마태복음 12장으로 가겠습니다.

구약의 점프, 도약하는 그곳이 출애굽기 32장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7절, 수요일에도 잠간 언급을 했습니다만,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여기서 누가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하는 자는 누구인가? 같은 식구들이에요. 같은 가족들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육이기 때문에 기대한 것이 있어요. 우리 집안 잘되기. 우리 집안 번성하기. 그래서 우리 집안의 숫자가 늘어나면 보통 복 받았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출애굽기 32장 27절에 보니까 같은 가족이에요. 이방민족 아닙니다. 같은 가족인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칼 들고 무려 3천명이나 자기의 가족들, 형제들, 이웃들을 도륙해버렸습니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 살을 깎는 거예요. 왜? 다른 여호와라고. 다른 말씀이라고. 

자기가 자기 팔을 잘라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까 성공/실패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요. 성공/실패, 승리/패배, 불행/행복,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혈육을 잘라 내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꼴좋다. 저희끼리 싸우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래, 네가 애굽버리고 나가서 잘 되는가 봤는데 역시 안 되기는 마찬가지네. 저희끼리 내분을 일으켰네.”라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패배감을 느끼고, 실패감을 느끼고, 불행을 느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뭘 넘어서는가 하면, 성공/실패, 승리/패배, 불행/행복, 그 보(洑), 사대강의 그 보, 알지요? 가두어진 그 보, 그 보를 건너뛰어서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고 주께서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군요.” 

어떤 식으로? 나 살아서 잘된다는 이 마네킹 박살내고 너는 나와 함께 죽어야 산다는 것, 네 죽음 말고, 네 목숨 끊어지는 그 죽음 말고, 너보다도 귀한 목숨, 너보다 귀한 생명에 함께 죽는 일이 없으면 너는 인격적인 예수의 나라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뜀틀이 됩니다. 여기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뜀틀이에요. 사람이 자기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육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이라는 것, 사실은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먼저 돌아가신 분 참 축하드립니다. 너무나 힘들어요. <피라니아>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게 공포영화입니다.

남미의 식인물고기, 육식물고기가 있는데 과학자가 실험하다가 잘못해서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피라니아라는 식인물고기가 몸집이 커져서 사람을 마구 뜯어먹어서 온 강물이 피바다가 되는 그런 영화가 있어요. <피라니아>가 옛날영화, 한 20년 전 영화에요. 그걸 보면서 저 <피라니아>가 오늘날 인간세계라고 봤어요.

하여튼 눈에 띄기만 하면 이빨 박아서, 빨대 꽂고 피 빨아먹어 버립니다. 20대는 나이트클럽이 그렇고, 40대, 50대는 증권시장이 그렇고, 60대 퇴직하고 나서는 화장 떡칠한 마담이 퇴직연금 뜯어먹으려고 하고, 온 천지가 피라니아, 사람 만났다 하면 전부다 서로 이용해먹겠다고 빨아 먹는. 그 이 빨 갈아가지고.

그리고 피라니아에 물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무는 피라니아가 돼요. 그걸 가지고 좀비라 합니다. 온통 좀비 세계에요. 세상은 딱 그런 세상이에요. 교회도 예외 아니에요. 딱 마찬가지입니다. ‘돈 좀 있는 장로인가?’ 혹은 ‘어디 총각 없나?’ 이런 것. ‘소망교회처럼 청와대에 관련된 사람이 없나?’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고요? 제발 누구 불쌍히 여긴다고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예수 믿는 너나 잘 하세요. 사도바울은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어요. 뭘 불쌍히 여겨요. 사도바울은 그런 것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해요. 천국 가는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본인이 모집한 대로 숫자 늘어나는 것 아닙니다.

자, 문제는 그거예요. 도대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노력 해봐도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에요. 마태복음 12장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2천년동안 교회 주석가들이 백날 주석을 해도 못 푸는 문장이 나와요. 백날 연구해도 다른 예수를 믿는 사고방식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신학이라는 것은 교회 목회 성공하기 위해서 신학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자들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본문을 주께서 발설하셨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절, 중요합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이 대목입니다. 

말로서 인자를 거역하면. “나 예수 안 믿을래. 예수 지가 뭔데? 내가 왜 믿어야 되는데? 예수는 지옥이나 가라.” 그러면 그 사람 지옥 갑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말로 인자를, 예수님을 거역한다고 해서 지옥 갈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으로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믿을 인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역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인간을 대표해서 아버지 앞에서 본인이 거역당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실 일이 뭐냐 하면, 자기백성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기 이전에, 어떤 사람에게 차가 와서 박기 이전에 그 보호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데 트럭이 돌진해 온다 이 말이에요.

그 중간에 아서라말아라, 예수님 본인이 끼어들어서 그 애가 곧장 벌어질 그 저주의 사건, 지옥 갈 그 사태를 주님이 앞장서서, “나를 쳐라. 나를 박아버려라.” 아버지 앞에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히 박살나 버린 거예요. 이것은 열 두 제자 가운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오해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나는 모른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어요. 부인할 수밖에 없어요. 왜? 예수님은 하나의 대상이니까 나는 살아야 되겠고 ‘뭘 믿어서 살아야 되지? 옳지 예수님이 오셨구나. 예수 믿어주면 나는 살겠지.’ 그저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계속 살리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가는 겁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성화하라면 성화하고, 거룩 하라면 거룩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관리에 나선 겁니다. 중간에 끼익! 하고 누가 끼어들었어요. 끼어든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사건입니다. ‘이상하다. 왜 끼어들지? 지금 잘 되고 있는데. 주의 말씀 잘 듣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 때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율법에 흠이 없으면 뭐가 됩니까? 이것은 주님 앞에 의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이 인정을 해줬어요. 그 사회가 인정해 준 거예요. “너는 의인이다.” 인정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똥이에요. 자기가 너무 고상했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너무 중요했어요. 너무 소중했어요. 자기문제가 너무 심각했어요.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은데. 십자가가 딱 끼어들고 난 뒤에 십자가 말고는 다른 심각한 것이 없는데 자기는 자기한테 심각해서 “하나님이여, 내가 성공적인 인생 살겠습니까? 내가 행복한 인생 살겠습니까? 내 미래는 승리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바라기는, 제가 돈 많은, 재산이 수십억 되는 목사라면 여러분 데리고 꼭 보여줄 영화들이 있어요. 공포영화를 보여주고 싶어요. <컨저링> 이런 것 있잖아요. 요새 인형 나오는 공포영화도 있고요. 그런 공포영화를 단체로 보여주고 싶어요. 공포영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네가 재수 없게 굴면 네 신세 조진다는 그 내용이거든요.

그 영화를 보고 벌벌 떠는 사람은 아직 조질 신세가 남아 있어요. “안 돼, 안 돼! 내 자식 지옥가면 안 돼.” 아직도 뭔가 벌벌 떨 요소가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악마가 계속해서 그 인격적인, 자연의 인격을 도외시하고 “미래는 너 하기 나름이야, 이 바보야! 똑똑해야 돼.” 

여러분, 지능을 버려야 돼요. 똑똑하면 안돼요. 지난주에 했지요. 정신 줄 놓으라고. 똑똑하게 자꾸 자기관리를 하게 되면 화날 일도 자꾸 생기고. 계속해서 마귀는 “헐값으로 그런 축축한 집에 가면 안 되지. 목 따는 귀신들 다 집합되어 있는데 그런데를 가지 말아야지.”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의 마귀는 자기의와 관련되어 있어요. 사람하고 대화해 봅니다. 아직 남아 있는 자기의가 있는가를 봐요. 이게 나쁜 취미인데. 자기의가 있는지, 지킬만한 것이 있는지. 나 인간 똥 됐는데 아직 저 인간 똥 안됐어. 나는 똥 됐는데. 나는 망하기로 작심했는데 저건 아직까지 안 망하려고 버티고 있는 요소가 있어요.

이것만은, 마지막 이것만은 제발 손 안 댔으면 좋겠다는 것이 뭐가 있어요. 그게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공포영화를 보여줘 가지고 정말 여러분들이 그렇게 벌벌 떤다면 공포영화 보기 전에 평소에 일상생활에서 벌벌 떠는 그것이 공포영화를 통해서 노골적으로 부각된 거예요. 

‘아, 내 밑바닥에서 이런 것을 당도리 한다고 벌벌 떨고 있구나.’ 진짜 십자가에서 준 것은 내 의가 아니에요. 내 의를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바꿔치기 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내 모든 잘남을 바꾼 거예요. 십자가 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 성령이 임하면 죽은 너희 몸도 살리신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를 배역해도 괜찮은데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님은 일단 너희들 때문에 끼익, 하고 죽고 난 뒤에 그 죽으심을 성령이 앞장세워서 “자, 너 때문에 죽었다.” 하고 다가오십니다. 

그게 바로 유일하게 성령 다가오심이에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머리 긁적긁적 하게 만들어요. ‘그랬구나. 성공/실패의 문제가 아니고 승리/패배의 문제가 아니구나.’ 그것은 옛날에 나를 가둬놓았던 악마의 보에서는 그렇지만 보를 넘어버리면 성도는 예수님이 관리하지 내가 관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 이게 한 묶음 되어서 중매쟁이로 전한 거예요. “나는 중매쟁이다. 이런 것은 못 들어봤지? 먼저 예수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예수부터 알자. 이게 다른 예수다.”하고 지적할 때 성령 받은 사람은 “옳소이다. 다른 예수한테 내가 푹 빠졌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예수의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예를 들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커피를 옷에 흘렸을 때 탄산수를 가지고 빼면 얼룩이 잘 빠져요. 그 다음에 과일 씻을 때도 탄산수로 하면 잘 씻깁니다. 밥 지을 때 탄산수 조금 넣으면 밥이 맛있어요. 튀김할 때 탄산수 조금 넣으면 바삭하게 맛있습니다.

이거 다른 예수입니다. 다른 예수는 들어도들어도 아무 부담이 되지 않아요. “그게 생활에 좋은 아이템이다.” 여러분이 아플 때는 공칠공-어쩌고 하는 이순재보험 있잖아요. 그게 여러분한테 심적인 부담 주던가요? 아무 부담을 주지 않지요. ‘그래, 저 보험 들고 내가 성공적인 삶을 이뤄야지.’ 

이 세상 전부 다 다른 예수 안에, 그 풀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못빠져 나옵니다. 교회도 복음이 관심사가 아니고 정치에 관심두고 생활정보가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다른 예수가 너무나 몸에 익어서 우리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요. “ 발 그놈의 복음만큼은, 십자가만큼은 입을 다물어줘.”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길들여 왔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길들여왔어요. “이번에 여전도회 독도 놀러갑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대구공부 마치고 게먹으러 갑니다.” 이런 것. 다른 예수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 부담이 없고 우리에게 행복의 나래를 펴는지.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도바울은 분통이 터지는 거예요. 이것들이 친목단체를, 교회가 아니고 클럽을 만들었어요. 노는 장소에요. 방송국에 견학 갔다 칩시다. 방송국에 갔다 왔다고 드라마작가의 정신을 알겠습니까? 방송국을 아무리 세무조사 하듯이 샅샅이 살펴도 드라마의 작가정신은 안 나타나듯이 과학적으로 이 세상을 분석하고 의학, 생물학, 물리학, 백날 공부하고 인문학, 언어학, 인류학 공부해도 이 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십자가 그 의미만이 이미 우리를 살렸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렇게 알고 있어요. “왜 돌아왔냐? 너 잘나서 돌아왔나?” “아닙니다.” “왜 죄 더 짓지? 세상 좋지?” “좋았습니다.” “왜 돌아왔어?” “불러줬잖아요. 끄집어냈잖아요, 거기서.” “어떻게?” “십자가 피 흘린 능력이 그 능력 아닙니까? 저는 십자가외에는 이제부터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는 말이 참 얼마나 가증스럽고 위선덩어리인지, 차라리 말을 안했으면 좋을 것을. 주여, 지금 믿습니다, 복음 믿습니다, 하지만 내일되면 이것마저 또 깨뜨려주시는 사건화 된 저희들 남은 인생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사건만 드러나는 그런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