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3 12:34:15 | 조회 : 24 |
중매 170813 |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
|
|
|
이근호 | 17-08-13 13:46 |
중매
2017년 8월 1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1-4
(11: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찬양한다는 것’은 사실은 모든 상태가 마무리되고 난 뒤에 실시해야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임시적인 상황에 감사해서 찬양하게 되면, 곧 얼마 안가서 다른 상황에서 ‘원망’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감사’(살전 5:18)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연을 다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 성급하게 감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너의 순종을 통해서 지금 너의 형편을 개선하라는 말도 아니요 무조건적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네가 이해하고 있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 하나의 존재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그 마음자세가 잘못이라는 겁니다.
즉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그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매쟁이’의 등장은 곧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사항입니다. 인간은 누구와 엮기는 것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본인 결정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늘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쉴새없이 ‘도달되지 못할 목표’를 추구하도록 누구로부터 쫓기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완성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그 무지한 목표가 주는 결핍에 목말라 합니다. 하지만 중매쟁이가 등장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분과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이를 통해서 제대로된 찬양과 ‘범사에 감사’가 성립됩니다.
왜냐하면 종결적이고 최종적인 선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 세상 모든 사연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야 하기에 일어나게 하신 그 출처는 골로새서 1:16에 나와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본문에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들은 당황하게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기에 현대인들에게 논의할 가치도 없도 ‘현실’로 처주지를 않습니다. 거저 미신일 뿐입니다. 오늘날은 과학, 혹은 과학적이라는 말이 진리의 대체개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형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인간형이며 악마의 앞잡이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하셨고, 창세기 3장에 넘어가면, 아담 부부는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는 벌써 인간인 변형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만큼 자기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똑똑함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정신줄을 놓게 하는 겁니다’ 자기 명민함을 따로 챙기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똑똑함으로 무장해서 신과 직접 상대하려고 덤벼듭니다.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진 일이 곧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게도 ‘예수님 죽여놓고’ 하나님을 찾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인물임이 확연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구미 드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놓고 종교생활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종 찬양, 최종 감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사연만 챙기는 식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인간’으로 벌써 시작하기에 이 세상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넘쳐납니다. 이런 현상은 이 세상 움직임이 분명 예수님 중심으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순되게 자기 중심으로 제발 돌아가게 해달라는 식으로 엉뚱한 의식으로 무장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상호 모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들이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순’을 ‘대립’으로 여겨서 그 이질적인 것들을 자꾸만 하나도 통일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대립’의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상호 이질적인 것을 두고서, 통합되어서 그 둘이 그대로 존속해야 될 가치를 갖고 있으면 ‘모순관계’입니다. 반대로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 통합을 시도하면서 둘 중에 하나만 최종 남기는 것이 ‘대립 관계’입니다.
예를 들면, 여름 휴가를 결정 하면서 “홍콩 갈래, 일본 갈래?”는 대립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결정되고 난 뒤에, 어느 한쪽은 포기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음식집에 가서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라는 것도 대립관계입니다. 반면에 “T.V 살까 냉장고 살까?”라는 것은 모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두 다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믿을래, 부활 믿을래?”는 대립관계가 아니고 모순관계입니다. ‘육과 영’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과 정(情)의 관계도 대립관게가 아니고 모순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대립관계로 여기고 자기를 위해서 오직 하나만 남기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딸이 있고 연로하신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딸에 소원이 있다면 그녀의 어머니가 죽기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딸은 곧 숨이 거둬가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엄마, 이 땅에 죄밖에 없거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죄많은 세상에 오셨어. 왜 오셨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했어.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엄마는 죄 용서받고 오늘 밤이라도 낙원에 갈 수 있어. 엄마, 이 딸의 마지막 소원이니 이 말을 믿는다고 말해주고 이 사실을 수용해. 응?”
그런데 이 딸의 문제점은 바로 ‘혈육의 정(情)’ 바탕 위에 복음을 ‘법’으로 두고 있다는 겁니다. 즉 법과 정은 모순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대립관계로 설정했다는 겁니다. 대립관계는 최종 하나만 남기도록 조치가 가능한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복음을 설명해도 결국 ‘구원받은 당사자’은 본인들의 가족일 될 뿐입니다.
마태복음 10:36-38에 위반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주의 일이 아니라 이 딸은 자신의 일의 연장으로 복음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수긍해서 받아들이는 그런 복음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눈에 떠야 합니다.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늙어서 기다리기만 하는 죽음과 먼저 하나님 쪽에서 들이미는 죽음이 있습니다.
늙어 기다리기만 하는 죽음은 죽어가면서도 왜 죽는 지를 모릅니다. 죄값으로 죽는 사실이 끝까지 모르게 됩니다. 하지만 미리 하나님쪽에서 마중 나오시는 죽음은, 우리가 죽어 마땅한 그 죄라는 사실을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명백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서, 평생 죄를 지어서 그 값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식으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사연들은 전부 십자가 사건만이 최종적으로 ‘사소한 일’이 아님을 드러내는 마당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궁창 안에서 진행되는 겁니다. 궁창이란 ‘가설무대’입니다. 그 설치 목적이 종결되면 철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마중나오는 십자가란, 자기 백성의 죄 문제는 자기 안의 문제로 옮겨놓은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이 십자가 앞에서 그 어떤 인간의 의로움도 인정받기 못합니다. 사랑관계란 이미 내막을 속속들이 알기에 사랑해주시는 분 앞에서 더 이상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0:14에서는, 베드로는 이 사실을 몰라서 극구 하나님의 조치에 다음과 같이 반발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베드로는 개별구원에 빠져 있습니다. 전체 사연을 생각하지 않기에 온전한 감사와 온전한 찬양을 하지 못합니다. 먼저 자신이 폭발해야 합니다. 그것도 죄됨으로 인한 속성을 담겨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박카스 병뚜껑을 따면서 손수건을 먼저 깔아두고 그 뒤에 힘주어 뚜껑을 돌려서 땁니다. 이 경우 결코 손수건이 뚜껑을 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죄대로 여전하고 의는 죄를 벌써 이긴 양상으로 나타나므로서, 인간들이 행하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모순관계를 주님으로 인해 통합된 겁니다.
소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권세의 작용이 이러한 겁니다. 이 사랑 앞에서 자신의 똑똑함을 철회하고 ‘수치없는 복음의 소식’을 사도 바울 말씀과 늘 동반하면서 주님과 관계가 지속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죄’니 ‘의’는 인간 구원용도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 자체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최종 알려지기 위한 조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혼이 나갈 정도로 사랑에 빠져서 세상 모든 것이 사소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250강-고후 11장 1—4절(중매)1708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1장 1절-4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 사실상 거짓말 일 수밖에 없는 이유, 감사하고 난 뒤에 그 감사를 취소하는 경우가 뒤따라오면 안돼요. 감사가 되려면 줄곧 감사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감사해놓고 뒤에 불평이 온다는 말은 처음에 감사할 때 너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했다는 것이 티가 나고 말아요.
“내 몸을 건강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아플 때는 어떻게 할래요? 또 딴 소리를 해요. “전에 감사했는데 왜 아프게 합니까?” 주님하고 지금 거래하는 거예요? 흥정하는 거예요? 전체를, 전부를 다 알아야 되고, 전부를 다 안다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사연을 다 아는 겁니다.
찬양한다, 또는 모든 일에 감사한다, 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어요. 내뱉을 수가 없기에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느냐 하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겁니다. “네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럴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모든 세상사연을 다 알아야 되거든요.
길가는 저 사람의 머리가 허옇게 된 그 사연까지 내가 알아야 돼요. 모든 일을 다 알아야 돼요. 이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는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을 말씀으로 박아넣은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 내 실력과 능력과 지혜로 지킬 수 없지요.
그러면 내 선에서 다가가다가 중도에 누굴 만나야 돼요. 그 만나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중매쟁이입니다. 그 중매쟁이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모든 사연을 익히 다 아시고 되어지는 모든 일이 완결된, 종결된 사연으로부터 뽑아내는 역할로서 이 지상에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그분을 중간에 만나게 되면 앞으로 1년이든 2년이든 더 살든 살지 않든지 관계없이 지금 미리 당겨서 찬양하고 미리 당겨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혼자 나대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누구를 소개하겠다는 겁니다. 세례요한 같아요. “너 뭐야?” “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나는 나를 밀어주신 분이 계셔.”라고 그리스도의 스피커로서, 그저 소리로서만 작용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를 중매쟁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사람이 날 때부터 혼자 살고 싶어 하거든요. 이게 어려운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각자 혼자 사는 세상으로만 집합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죽은 사람은 어디에 가 있느냐? 죽은 사람은 다 무덤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 무덤이라는 의미가 뭐냐?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하는 뜻이에요.
‘우리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기’ 그게 무덤이거든요. 죽은 사람을 무덤에 집어넣었다는 것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끼리만 살아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너희를 누구에게 소개하느냐 하면, 이미 죽어서 무덤 속에 있다고 결정 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터무니없는 이야기거든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산 사람과 산 사람의 대화와 거래를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이 우리네상식입니다. 죽은 사람, 이 순신장군 불러내는 것은 무당밖에 없어요. 죽은 귀신들, 연개소문 불러내는 것은 박수무당들 외에는 없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무당이 되어서 너희에게 찾아가겠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라면 네가 저쪽 사람 또 저쪽 사람의 사연을 다 모르기 때문에 온전하게 찬양하고 온전하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이 종결되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골로새서……, 저 혼자 잘 아는 것 같아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빠트리지 않아야 될 것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과학적사고방식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무당. 보이지 않는 것을 이 세상에 포함시키는 의식을 과학적 입장에서는 두 자로 ‘미신’이라고 해요. 과학은 보이는 것을 관찰해서 나한테 유익되도록 변경시키는 테크닉을 뽑아내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우리 눈을 의심해야 돼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없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고민되는 것이 있어요. “사도바울님! 보이는 것이 주가 됩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이 주가 됩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것이 갑이고 어느 것이 을입니까? 보이는 내가 갑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일, 내 사어브, 내 가정 꾸려나가는 것을 혹시 망치거나 훼손시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잘 관리하려면 점을 치든지, 무당 찾아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불안입니다. 불안은 뭐가 나오지 않는가? 감사, 온전히 완결된, 도착지점에 도달했기에 휴~, 하고 안심하는 그 찬양이 나오지를 않아요. 찬양이라는 것은 전부를 알아야 찬양이 나오는 겁니다. 어떠한 변화가 온다할지라도 어떤 변동되는 것도 없다는 최종적 내용을 가지고만 찬양이 돼요.
노래 자랑하는 것이 찬양이 아닙니다. 최종적 라인을 넘어설 그 때 찬양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안 되지요.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이 사도바울이 달리 중매쟁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 소개할게.”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또 우리가 오해하면 안돼요.
‘아, 사도바울님은 중매쟁이니까 소개하고 빠지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예수님하고 상대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오해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선보는 자리에 중매쟁이가 반드시 있어야 돼요. 사도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 빼고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면 안돼요. 사도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파견한 거예요.
따라서 그 중매쟁이가 있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면 그 다음부터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 그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바울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어떻게 중매쟁이를 만나는가의 그 문제가 되겠지요. 이 중매쟁이를 어떻게 만나는가?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거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가? 사람에게 두 가지 죽음이 있는데 하나는 늙을 때까지 주어지는 죽음이 있어요. 살다 보면 죽는 죽음. 자살이 아니고 그냥 늙어가서 죽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낯선 죽음이 있어요. 내가 살고 싶은데 나에게 찾아드는 죽음, 먼저 나에게 마중 나오는 죽음이 있어요.
그냥 기다리는 죽음은 살다보면 늙어죽는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내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너는 죄 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죽는 이유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지요. 십자가는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구원될 사람에게만 성령세례라는 이름으로 미리 다가와요. “너 진즉에 죽어야 했었어.” “왜요?” “죄 때문에.” 그렇다면 그 다음문제는 간단한 문제에요. 내가 지을 수 있는 죄와 내가 어쩔 수 없는 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오늘 ‘두 종류’가 많이 나오는데 잘 들으세요.
‘내가 죄 때문에 죽는다면 천국과 지옥을 내가 결정내리면 될 것이 아닌가? 죄 지어서 지옥이라면 이제부터 바르게 살면 되지. 내가 바르게 살면 천국이다.’ 이렇게 되는데 죽음이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죄를 선택해서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던 사실을 이미 포함해서 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무엇이 밝혀지느냐 하면, 내가 태어난 자리가 태어나서 만든 자리가 아니고 태어나기 전부터 조상 아담에 의해서 구축된 자리, 거기서 우리가 제2, 제3의 아담으로서 발현된 거예요. 융털돌기라 하지요. 창자벽에 튀어나온 것, 창자가 있으면 거기서 돋아나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는 아담의 알러지, 아담의 표피, 아담의 연장된 피부조직의 일환이에요. 아담의 하나의 세포지요. 그게 다윗이 발견한 거예요. 죄인이기에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왜 그 죄를 발견 못했는가 하면, 내가 죄를 짓고 안 짓고를 내가 판정하는 이 자체가 죄인데 ‘나는 죄를 지으려면 죄짓고 착한 일을 하려면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이야.’ 이 자체가 스스로 파악이 안 되고 있었던 자신의 근원적인 카오스, 혼돈이었거든요.
그런데 다윗에게 나단선지자가 왔을 때 “네가 그 사람이다.” 할 때에 아차, 내가 내 죄에 대해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두 개의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오직 죄만 짓는 위치, 그 터 위에서 지금껏 4, 50년, 60년 70년, 80 후반까지 사신 거예요.
임아, 그 강을 건너든 말든 관계없어요.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와도 이런 판단을 하고 이런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목사님, 복음 들려주세요. 내가 판단하는 복음, 내가 결정하는 복음, 내가 찾아가는 복음, 내가 단정 지은 복음을 내가 소유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바로 엉터리입니다. 이거 사기입니다.
복음은 내가 판단하고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하나의 수작이고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판단한다고 내 자리가 변경되지 않습니다. 이 자리는 나보다 더 선언적이고 경험 이전의 문제기 때문에 이미 그 토대 위에서 태어난 내가 뒤로 돌아가서 내 자리를 거두어갈 수는 없어요.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내가 태어나게 한, 나를 나 되게 했던 그 자리를 내가 거두어서 없앨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내 자리가 뭐냐? 혈육의 정이라는 거예요. 이 혈육은 어떻게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그놈의 정, 누가 그 정을 이깁니까? 제가 한 예를 들면,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데 따님이 있어요. 따님이 늘 마음에 걱정이 있지요.
아까 설교 처음 부분 다시 봅시다. 모든 감사와 모든 찬양은 완료가 되어야 할 텐데, 자기는 복음을 알아서 구원받았는데 연로하신 어머니 때문에 걱정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감사, 이미 부분적이고 그 찬양은 해봐야 노래 자랑하는 것이고 해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 연로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걸 사자성어로 중보기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서 시시때때로 찾아가지요. “어머니, 이제 때가 다 되었는데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따님이 뭐가 문제인가? 제가 뭐가 문제냐고 문제를 던졌습니다만 시간관계상 제가 해답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창세기 2장부터 시작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들어놓았는데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어요. 그 이야기가 2장이고 그 다음 3장에, 따먹고 난 뒤에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니 부끄럽다고 가리는 일을 했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징조, 징후가 뭐냐 하면, 정신을 차렸다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정신 줄을 놔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정신 줄을 놔야 되는 거예요. 정신 차리면 부끄러움이 생겨버려요. 부끄러움이 생겨버리면 휴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이 바라기는 안식, 휴식, 영원히 편히 쉬는 것, 저 바다에 누워~, 이런 것이 있잖아요.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도 막상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정신 차려 이 바보야!” 맨 날 자기를 쥐어박으면서 정신 차리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면 그리스도를 위해 마련된 이 세상 속에서 정신 차린 내 중심으로 모든 사연과 모든 상황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대립이 생기고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은 괴로운 거예요. 자처해서 마음고생을 누적시키고 축적을 시키는 겁니다. 술로 달래고 담배 피워도 안돼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노래 가사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나는 하이에나가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바람같이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이게 지금 정신 차리는 거예요.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 양인자씨가 작곡하고 조용필이 불렀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남자들이 술 한 잔 먹고 넋두리 하는 것인데요. 이러니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정신 줄 놔야 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모순되는데 대립이 되어버렸어요. 대립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 거래하는 것을 대립이라 합니다. “하나님이여, 말씀 주옵소서. 내가 말씀 순종해서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대립관계에요. 모순관계는 뭐냐 하면, 그런 입바른 소리 하는, 쉽게 말해서 창세기 2장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다음에 악마가 들어와서 창세기 3장의 인간을 만들어놓았는데 창세기 3장이 뭐냐 하면, “정신 차려, 이 인간아!” 그거예요.
정신 차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줬는데 말씀의 목적도 몰라요. 정신 차린 내가 더욱더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 말씀 줘서 정신 차린 상태에서 주께 영광 돌린다고 혼자 종교를 만들어버렸어요.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친 겁니다.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이라고요? 교회 와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대립과 모순이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만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대립이란 것은 뭐냐? 서로 충돌되는 두 가지 명제 중에서 결국은 종합이 되면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는 남는 관계를 대립관계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번 여름에 홍콩에 놀러갈까, 일본에 놀러갈까, 하는 이것이 대립관계에요.
왜? 홍콩에 놀러가기로 결정되면 일본에는 안가기 때문입니다.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이거 대립관계입니다. 짜장면을 곱빼기 시켜놓고 거기에 또 짬뽕 곱빼기 못 먹어요. 그거 다 먹는 사람은 먹방 돼지밖에 없어요. 하나가 되면 하나는 취소하는 겁니다. 인생사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선택을 둘로 갈라놓아요. 세 가지가 네 가지가 있더라도 자기가 알아서 정리해서 최종 후보 두 가지로 만듭니다.
그렇게 해놓고 하나 제키고 이걸로 선택했다고 나오는 겁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나를 위한 대립관계로만 줄을 세워요. 그런데 모순관계는 뭐냐? 냉장고 살까, TV살까? 이것은 둘 다 필요해요. 모순관계는 융합이 안 됩니다.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 어려운 모순관계를 철없는 아이한테 묻다니.
정말 똑똑한 아이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엄마 같으면 어느 것을 선택할래? 엄마 같으면 살아계신 할아버지 선택할래, 할머니 선택할래?” 이렇게 엄마에게 질문을 돌려버리지요. 그 정도 되면 영재발굴단 나와야 돼요. 애들은 머뭇거리면서 속으로는 용돈 주는 쪽이 좋다, 이 정도 하겠지요.
모순관계중의 하나가 육과 영, 이게 모순관계에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육을 떨쳐버리자고 하거든요. 그것은 성경에 있는 육과 영을 대립관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영이 있으면 육은 떨어져 나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에요. 십자가와 부활, 모순관계에요. 둘 다 살아 있어야 돼요.
법과 정, 둘 다 살아 있어야 돼요. 그게 융합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딸이, 엄마가 연로해서 예수고 뭐고 다 싫어하는데 중보기도해서 예수 믿게 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딸이 이야기합니다.
“엄마, 잠간만 내 말 들어봐. 내가 평소에 엄마한테 용돈도 많이 주곤 했는데 마지막 내 소원이니 들어봐. 엄마가 평생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이 우리 죄 용서하려고 이 땅에 왔거든? 엄마 지금 듣고 있지? 엄마가 죽는 이 마지막 마당에 딱 한마디만 하면 돼. 예수님이 흘린 피가 내 죄 때문에 흘린 피라고 엄마가 믿기만 하면 엄마는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는 거야. 이거 수용할래, 안할래? 이게 마지막 딸의 소원이라니까! 엄마는 딴 거 필요 없이 그냥 ‘예수 믿습니다.’라고 하면 오늘 밤이라도 구원받는 거야. 이게 내 평생 최고의 효도를 한 것이 되고 그러면 내 맘 편히 살 거니까 엄마가 내 소원 좀 들어줘.”
이렇게 하는데 그 엄마가 그렇게 해서 구원받겠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딸은 모순관계를 대립관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혈육의 정은 그대로 남은 채 그 위에다 예수 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법을 얹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엄마가 딸이 와서 부탁할 그 때 한 5분동안 믿었다 칩시다. 딸이 저희 집으로 가버린 뒤에 뭐가 남겠어요?
여러분 어릴 때 엄마가 자식들 영양공급 한다고 밥에다 콩이나 팥 얹지요. 먹을 때 애가 어떻게 먹습니까? 하여튼 도사라. 콩은 있는 대로 다 건져내잖아요. 내 이야기입니다. 콩 먹기 싫어서 다 가려내지요. 그 다음에 반찬 중에서 파 같은 것 다 가려내지요. 김치도 싫어하는 애도 있어요. 계란후라이도 안 먹는 애도 있고요.
그 딸이 엄마에게 한 것은 카레 소스 같이 밥에다 얹어놓은 거예요. 딸 가고나면 남는 것이 뭡니까? 혈육의 정이에요. 이 욕망, 혈육의 정, 이걸 누가 이깁니까? 이미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서 악마가 “너는 무쏘의 뿔로 가라. 네가 믿을 것은 이 육신덩어리, 이 혈육, 그리고 가족, 이게 전부야.”라고 하는 그 마당에서 예수 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법이 와봤자 항상 주도권은 뭐가 쥐고 있는가 하면, 혈육이 쥐고 있어요.
목사들이 말하기를, “죄지으면 벌 받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말은, 당신이 죄 짓게 되면 그렇게 당신의 소중한, 당신의 뿌리가 되는 이 혈육이 사는데 약간 불편하고 지장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그래요? 그러면 죄 안 지을게요.” 결국 소환되고 돌아오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혈육에서 못 벗어나고 혈육을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엄마는 자기가 선택한 복음이에요. 자기가 결정한 복음이고. 그래서 자기 몸 불편하다 하면 언제든지 취소되고 날려 보내고 포기할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한 거예요.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진리를 혈육의 정 안에서 통합시키려고 한 겁니다. 인간은 그런 재주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어요.
전부 다 가상적이고 위선적인 겁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에요. 고난이란 곧 교만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교만했으면 고난을 언급하겠어요? 내 혈육이 불편하다는 거예요. 지금 몸이 아프다는 거예요. 어쩌라고? 내 몸 아플 때 하나님이 5분대기조가 되어서 쪼르르 와서 기도한대로 응답해 달라는 거예요.
결국은 통합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전부 도로 끌어온 겁니다. 성경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내 것은 티끌이라도 건드리면 왈칵 저주와 분노와 욕설이 거침없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목사님이 설교한다고 “오직 우리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합시다. 예수님 중심!”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그동안 우리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용서 하소서, 용서하소서.” “이제부터 여러분은 성령 받아서 예수님 중심입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면서 손을 들다가 옆 사람 팔을 좀 건드렸어요. “이런 씨!”
예수 중심이라고 실컷 해놓고는 팔 좀 건드리니까 “에이 씨”가 된다고요. “좀 저리 떨어지소. 더워죽겠는데 참!” 인간이 구원이 가능해요? 불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몸뚱이를 소거하고 제거한다고요? 안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면 되겠네요.” 이러거든요.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내가 알아서 죽으면 되잖아요. ‘죽어서라도 주를 따라 가겠습니다.’ 한 것처럼 자살하면 되겠네요.”
여러분, 지옥에 가도 입만 살았어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 지옥에 가도 입만 살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은 멸망해도 욕망은 유지하라.” 이게 악마가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이십니다. “오늘도 가르침이 있겠습니다. 세상은 멸망해도 나는 나라는 욕망은 유지하세요.” “아멘!”
모든 설교를 변형하면 결국은 그렇게 나와요. “다 여러분 잘되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멘!” 그게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욕망을 키우세요.” “아멘!” 우리는 그것으로 주님하고 수십 년 동안 교회 와서 묵언의 소통을 한 겁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다.” 윤리에서는 그것을 ‘자살적 영웅윤리’라고 합니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 자진해서 희생하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극한, 악마의 모습의 극단의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 교회는 그걸 유도합니다. 쉽게 해서 시간 바치고 돈 바치라는 딱 두 가지에요. 자살적 영웅윤리를 강조합니다.
실례로 IS의 자살폭탄이에요. IS가 정도가 노골적이라는 것뿐이지 모든 종교의 밑바닥에는 교인들에게 자발적 또는 자살적 영웅심리를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여러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여러분의 본성에 부합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최고의 절대자가 되고 싶습니까?” “예!”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말씀에 모든 것을 던져 넣으세요.” “아멘!”
드럼치고 기타치고 난리 납니다. 복음학교. 만날 기도시키고 만날 성경 공부시키고. 그런 교회놀이, 종교놀이 해왔던 겁니다. 그것을 진리게임이라 하는데 혼자서 주인공 되는 진리게임이에요. 눈 따갑고 아프면 컴퓨터 게임도 못해요. 40대쯤 되면 교회 와서 종교놀이 하는 것도 괜찮아요. 컴퓨터 게임 못지않게 쾌감을 줍니다.
교회라는 것이 예배당을 지어서 그런 놀이터를 제공하는 거예요. 노인들도 와서 놀고. 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대로 구원불가능. 복음에 우리가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 복음에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복음이 있더라도 우리는 구원될 수 없지요. 내가 방해가 되니까.
“그러면 목사님, 우리에게 이만큼 설교했으면 절망만 주지 말고 뭔가 희망을 주셔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그런 희망은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결과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된다는 그런 것을 제시할 권한은 주님이 갖고 있지 우리한테 있지 않아요. 그러면 뭘 하느냐?
박카스 병을 딸 때 저같이 피부가 약한 사람은 그것도 잘 못 열어요. 손수건으로 감싸서 따야 됩니다. 그러면 날카로운 금속에 손 안 베고 뚜껑을 잘 열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할 때 병뚜껑을 감싼 그 손수건이 여는 것이 아니에요. 손수건보다 더 위층에 있는 힘으로 박카스 뚜껑을 따듯이 죄와 하나님의 의, 그 모순은 그대로 둘 다 살아있어야 돼요.
우리는 죄인 된 그대로 살아 있어야 되고 의가 와서 우리의 죄 된 손수건을 덮어서 박카스 병을 따야 된다는 말이에요. 따고 나면 그 현장에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있어요. 그럴 때 자기 죄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 구원됐네. 천국에 이미 도달됐네. 온전한 찬양과 온전한 감사가 되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났어요.
주님의 의가 내 죄보다 더 센 거예요. 그래서 닫힌 뚜껑이 열린 겁니다. 이 모순과 대립이 되려면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해요. 세상 바깥에서 투입이 되어야 됩니다. 그 세상 밖에서 투입이 되기 위해서 경계선을 이야기한 것이 성경 욥기에서는 궁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궁창을 그대로 하면 하늘이라는 뜻인데 제가 그걸 쉽게 풀이하게 되면 ‘가설무대’ 세상전체가 가설무대로 다 꾸며놓은 거예요. 꾸며놓고 주님께서 우리를 뭘 로 이끄는가? 이 땅의 모든 것을 허무하게 이끕니다. 허무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소함’ 이게 복음이에요.
“목사님, 저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흐흑!” “사소한 거네. 사소한 것 가지고 신경 쓰는 것 보니 마귀 들렸어.” “아, 이게 사소한 거구나.” “세상에나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제 인생 끝났지요.” “끝난 소리 하고 있네. 그거 사소한 거야.” 왜 그게 사소한 것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맞아죽으려고 왔어요.
예수님이 맞아죽으려고 오셨기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 그 자체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게 사소함이에요. “내가 사람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 사람아’ 천사 같은 나에게서 이런 엄청난 욕설이 나오다니! 그것도 아주 센 강도로 ‘이 싸람아’라고 하다니.”
그런 권사님들 우리교회 많잖아요. 한 천사 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아이고, 내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런데 운전하면서 졸다가 신혼부부를 다 죽여 놓았다. 이거는 보통문제가 아니지요. 그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부도나요.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안 된다고요.
“주여, 이제 자살로 끝내겠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소한 일인데.” “그게 어떻게 사소합니까?” 너는 모순을 네 중심으로 해결하려고 했단 말이지요. 주님 죽음이 네 죽음보다 중요하고 너 자체가 사소한데 자꾸 너는 창세기 3장의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불행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화를 키웠어요. 스트레스를 자기가 만들었어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거예요. ‘나는 왕이니까 바르게 해야지.’ 이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거예요.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다 사소한 거예요. 여러분, 성도입니까? 제발 궁상떨지 말고 구시렁거리지 말고 주저 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은 정신 줄 놓으세요. “우리부부가 싸웠어요.” 그런 되도 않는 소리, 그런 사소한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러다가 이혼하게 생겼어요.” 이혼해! 이혼해! 그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그게 뭐가 중요해요? 최종적인 완료는 주님이 이 땅에 사람한테 얻어맞으려고 왔다는 것, 얻어맞는 주님의 그 상처와 십자가 피, 그 앞에서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었구나.’ 그 모든 것이 다 들통 나고 노골적으로 되어버린 거예요.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고……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왜 이슬이 되면 안 되는데요? 골로새서 1장 말씀처럼 이 세상은 주님이 만든 가설무대에요. 임시무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소함으로 처리하는 이유는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밖에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자기차원에서 선을 행하고 말씀 지키려고 하는 것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에요. 다시 ‘옛날처럼’이 안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기껏 하는 것이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요.
지금현장의 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새로운 해석체계를 그 때 그 때 만들어요. 만드는데 그것은 곧 내일 되면 깨질 거예요. ‘지금 내가 찬양하고 감사해야지.’ 내일 되면 그 찬양과 감사가 불평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들이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십자가에 대해서 오해를 한 거예요.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자체가 죄와 의 가운데서 죄를 없애버리고 의만 남겨두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에요. 그리되면 이것은 모순관계가 아니고 대립관계가 되는 겁니다.
오늘 모순관계, 대립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여러분이 알아먹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러나 일단 그 정도로 아시고요. 대립관계는 통합되면 둘 중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만 달랑 남는 것을 대립관계라 하고 모순관계는 두 개 다 있으면서 내가 다 처리 못하고 두 개 다 남아 있으니까 처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처리를 외부에서, 이 가설무대 외부에서 침투해서 처리하니까 나는 완료가 안 되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완료되었다고 선언해버리는 그 선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모순관계입니다. 정말 쉽게 말씀드릴게요. 사도행전 10장 14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율법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어제 들었던 이야기인데 처갓집의 조카가 있어요. 농땡이, 말썽꾸러기, 하여튼 엄마말도 안 듣고 할머니 말도 안 듣고 자기 맘대로 사는 애가 있어요. 대구동부교회의 부목사가 원목사보다 낫답니다. 그 부목사가 청년회 담당인데, 이 말 했다고 또 그 목사 잘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만.
그 조카가 수련회를 다녀왔는데 다녀오고 난 뒤에 그 말썽꾸러기 애가 할머니가 보고 하는 말이 “할머니!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 잘못 했어요.” 했대요. “왜?” 하니까 “그동안 율법으로 살았어요.” 그 소리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율법으로 살았다고? 율법을 지킨 것이 있어야 율법으로 살았다고 하지요. “율법으로 살았다고, 율법주의라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침투해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먹어라.” 하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나 신자입니다, 신자! 나 더러운 짓 안합니다. 율법으로 살고 율법 안에서 헤엄치는 사람이에요. 그동안 쌓아온 마일리지를 무시하지 마세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주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제가 어떻게 먹을 수가 있습니까?” “먹으라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알아?” 그런 뜻이에요. 주님은 그 사람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죄 해결 장소를 주님의 자기장소로 전이시키는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네가 해결하지 말고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너는 정신 줄 놓으라는 겁니다. 네가 옳고 그르니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 인생 네가 책임지지 마. 내가 책임지잖아. 내가!”
더 쉬운 말로, 금강석을 쪼개는데 폭발력이 있어야 되겠지요. 금강석을 쪼갤 때는 광산 안에서 쪼개야 다른 피해를 안주는데 중국집 안에서 쪼개버리니까 금강석은 쪼개지면서 중국집도 날라 가버리고. 그런데 우리가 날라 가니까 어떤 것이 날라 가느냐 하면, 혈육의 정이 날라 가버려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그 말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폭파되어 버린다니까요. 폭파되는 그것은 매 순간 십자가 올 때마다 폭파가 반복되는 거예요. 대립관계가 아니라 모순관계입니다. 폭파되어 봐야 돌아서면 또 다시 뭉쳐지니까.
여러분, 더러운 바퀴벌레 될래요, 깨끗한 바퀴벌레 될래요? 절에 갔던 더러운 바퀴벌레가 교회 와서 말씀 순종하는 깨끗한 바퀴벌레 될래요? 둘 다 바퀴벌레에요. 형상이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땅의 형상 다르고 하늘의 형상이 달라요. 땅이 재주넘고 변동해봐야 맨 흙이 흙 되는 거예요.
진흙 묻혔다가 석탄 묻혔다가 이것저것 묻히는 것뿐이지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인간이 혈육이라는 그 아쉬움, 애착은 얼마나 지독한지. 지금 이렇게 복음 들었잖아요. 자꾸 터는 거예요. 그동안 5년 동안 안 묻었다, 또 10년 동안 안 묻었다, 이렇게 자꾸 터는 거예요. 그리되면 다시 자기 육으로의 소환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날라 가버렸어요. 보이는 것으로 소박한 나만의 세계를 따로 구성하니까 이것은 감사도 거짓말이고, 찬양도 전부 다 노래자랑일 뿐이고, 하나님 앞에 미리 기죽고 들어가는 것, “내가 이 정도 찬양하니 저 힘들게 하면 안됩니다.” 이런 일종의 거래 같은 것.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자발적으로 하는 그 영웅심리의 극단이 악마의 극단이에요. 악마가 마지막 시킬 때 “목숨 다하여, 목숨 바쳐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섬겨라.” 악마는 주의 말씀 사용 안하는 줄 알아요? 주의 말씀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못 보게 합니다. 주님을 못 보게 하는 거예요.
주님 보고 정신 차리라는 그 인간이 정말 복음 만나고 난 뒤에는 정신줄 놔버려요. 정신 줄 놓는 것을 두 자로 ‘사랑’이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부끄러워했지요. 정신줄 안 놔서 부끄러운 거예요. 만약에 사랑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복음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들어요. 세상에 자기 속마음 터놓고 논할 수 있는 사람 만나면요, 정말 최고의 사랑을 만난 겁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제가 수련회 마지막 날에 했잖아요. 천개의 오야봉이라고. 전부 다 자기가 오야봉인데 누가 자기 속을 털어놓겠습니까? 전부 다 위장해서 그 사람 돈이나 빼먹으려고 하지 아무 다른 것이 없잖아요. 죄를 죄 되게 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와 의를 대립관계로 봐서 죄 버리면 의 되는 줄 알고.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는 “죄 자체를 드러내고 의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너를 피조물로 마음대로 주물렀다. 네가 죄고 내가 의다. 너는 내 앞에서 계속 살아 있으면서 같이 증거하자.”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거 말고 다른 소리 하게 되면 이것은 오늘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 돼요.
왜?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예수의 특징은 중매쟁이가 필요 없어요. 한번 중매하고 “됐어요! 내가 알아서 예수 믿을 테니까.”하고 빼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 받아서 십자가만 들이댑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중매쟁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 안에서 내가 처리 못한 죄가 처리되는, 혈육이 완전히 깨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완료된 상태에서 찬양하시고 내 죄지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다녀보고 성당도 다녀보고 자기 잘난척 해보려고, 과시해보려고 몸부림 쳐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혈육, 욕망, 나, 이것밖에 없음을 기쁨으로 이렇게 최종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 하신 것을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