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자랑
2017년 8월 6일 본문: 고린도후서 10:14-18
(10: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0: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다’로 여기게 됩니다. 눈 앞에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안목으로 사도를 평가하는게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너는 네 구역이 따로 없느냐?”라는 식으로 질타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의 구역론은 사도 개인의 자랑으로 비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사도라면 어떤 지역이든 상관없이 ‘복음의 깊이’를 위하여 누구에게라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람들은 펼쳐진 현실층에서 자기 만의 구역을 따로 챙기고 있지만 복음에는 그런 지리적 구역과 상관없는 자리, 곧 ‘예수 안’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예수 안’의 자리에서만 ‘예수님 자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인간들의 ‘자기 자랑’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자랑’은 ‘인간들의 자기 자랑’과 라이벌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예수님 자랑’을 빌미로 최종 ‘자기 자랑’으로 귀착되는 것을 인간은 스스로 말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다듬는 방식은 보통 세 가지 모양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책’,, 또 하나는 ‘반성’, 또 하나는 ‘회개’입니다. 자책이란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깜빡 딴 생각하다가 후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잘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 번 다시 그런 과오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겁니다.
‘반성’이란 미리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가 막상 그 일을 실제로 해보므로서 그 현장에서 새롭게 자신의 과오를 발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책’이든 ‘반성’이든 기반은 모두 자신의 ‘노동’에 입각해 있습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노동하고 내가 관리하지 아니하면 구성되지 않는다. 남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회개’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란, 현재 잘못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반드시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매를 들게 뻔하기에, 그렇게 되면 나의 미래가 힘들어지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서 미리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한 죄인, 그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굴복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자랑’라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자기 단도리’에 집착하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분주한 작업이 결실이 현실층에서 ‘자기 자랑’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를 자내는 이 현실층의 바닥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의 층’입니다. 이 욕망의 층은 자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분주한 조정작업이 이루어지는 층입니다.
인간이 현실에 나기 모습을 내밀기 전에 항상 ‘부끄러움’과 ‘자랑거리’의 양적인 내부 조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부끄러움’이 양적으로 ‘자랑거리’보다 많으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음껏 떠벌어도 모든 게 자랑이 된다면 그 자료 모으는데 게을리하지 않게 됩니다.
이게 ‘자기 자랑’이고 ‘예수님 자랑’을 모독하고 가리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지하 1층에서는 왜 자신이 자기만을 섬기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이 원인은 지하 2층에서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지하 2층에서는 ‘충동의 층’입니다. 이 ‘충동’은 내가 관리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하 2층에 거주자는 오직 ‘보편적 아담’과 악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간의 아직 분화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다 아담의 몸의 예비성 뿐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의미를 원하지만 존재는 충동만 출렁거립니다. 모든 인간들이 각자 개성이 있고 자아성을 따로 갖추고 있지만 충동적인 면에서 특별히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더 좋고가 없습니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저 아담의 뒤집어쓰고 있는 죄의 위세를 우발적으로 발산하고 있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지하 2층 충동이 밑바닥이 되어서 지하 1층 자아가 발생되고, 그 자아 중심으로 자기에게 의미가 되는 식으로 욕망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자아는 쉴새없이 자신의 욕망과 싸우게 됩니다. 각양 좋다는 보약은 다 동원해서 먹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비롯해서 세상에서 건전하다고 통하는 온갖 교훈들을 다 주워모아 자아를 ‘자랑스러운 자랑’로 새롭게 구성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랑’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랑’은 어떤 식으로 도출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하 2층에서 악마와 싸워 승리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마치 이빨 뿌리까지 뽑히듯이 자신의 근원이 ‘악마’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는 그 노골적인 면면까지 현실에서 노출하게 됩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욥기의 중반부까지 욥은, 왜 착한 자기를 하나님께서 힘들게 고난 주는지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소위 1층에서 형성되는 그 자아층이 그게 가장 바닥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 후반부에서 욥은 하나님만을 만나고 난 뒤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즉 ‘욥’이 따지기 전에 이미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악마와 내기를 했고 욥은 단지 그 게임에 말려들었던 겁니다. 여호수아 2장에 기생라합이 나옵니다. 그녀는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집안에서 가장입니다. 그녀가 그 멸망될 성에 그대로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의 자리를 본인이 변경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로 옆에 자신의 자리와는 다른 자리가 있다할지라도 인간의 자력으로 그쪽 자리로 옮겨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정해주신 자리입니다. 창세기 요셉은, 처음에 자기 중심으로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변경되는 자리’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리이동으로 미리 살게 됨을 압니다.
우리 성도는 늘 주님으로부터 무너질거리가 있어야 하기에 평생 내내 ‘자기 자랑’만 하다가 살아가는 죄인임을 유일하게 뿌리채 알게 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인생이 본인이 책임지거나 의무감을 갖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9강-고후 10장 14—18절(예수님 자랑)1708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0장 14절-18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0:14-18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상당히 어려운 말들이 몇 개 나오는데 충돌을 일으킵니다.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선교지구역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남의 구역에 함부로 뛰어들어서 이것은 내가 전도했다는 결과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탐을 내는 것도 아니고 남이 수고한 것을 내것으로 전환시키고자 전도라는 것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더할수록,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이 복음을 더 깊이있게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는 그냥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의 믿음의 깊이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주시는 복음의 깊이를 계속 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좀 이해해달라.” 그런식으로 편지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복음의 절정, 복음의 최종지점에 가게 되면 어떠한 사람으로서 남들에게 드러나느냐 하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서 주님만 자랑하는 레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할 때 ‘안’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지역, 지리적인 구역을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17절에서 사도바울은 ‘안’이라고 이야기해요. 어떤 특정한 분의 안, 그 특정분이라는 것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라.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밖에 나가게 되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남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네 교인 얼마야, 선교 몇 년 했어, 초짜가 어디서 나에게 기어붙어, 이런 거예요. 신학교 나온지 몇 년 됐어, 이런 거요. 남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저들을 의식해서 저들한테 기죽지 않기 위해서 자랑거리를 여기서 제조해야 돼요. 내가, 우리들이. “무시하지 마. 나 목회한지 2십년 됐어. 내가 구원시킨 사람이 한 5천명 될걸?” 이런 식으로.
지리적으로 그리스지역이나 터키지역이냐, 안그러면 팔레스타인지역이냐, 그거 자랑하는 식으로 서로 ‘사도가 과연 대단한 사도냐? 어느 정도 일했느냐?’ 평가하는 모양인데 나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랑하려면 그런 지리적인 결실가지고 자랑하지 말고 주 안에서 자랑하라.” 그 말이지요.
주 안에서 자랑하게 되면 내가 교회를 몇 군데 세웠고, 설교를 몇 년동안 했고, 강의를 얼마나 했고, 나에게 복음듣고 구원받은 사람이 몇 천명이고, 이것은 한꺼번에 다 날라 가버려요. 다 날라가서 뭐가 남는가 하면,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만 남는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사도가 편지를 통해서 언질을 해야 될 이유가 뭐냐? 예수님 자랑이, 우리가 그냥 살다가 예수님 자랑 하나 더 추가해서 보태는 식으로 자랑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랑에 반드시 라이벌이 있고 경쟁관계가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자랑이 나에게 여지가 있으려면 내 자랑을 포기를 해야 돼요.
내자랑 따로 있고 거기에 예수님 자랑이 겹치기가 안된다 그 말이지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노동할 때는 그냥 노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할 때는 보통 세가지가 등장해요. 자책과 반성과 회개, 세가지 나옵니다. 아쉽다 그 말이지요. 자책과 반성과 회개. 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일부러 구태여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책한다는 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만한 개선의 여지가 있는데 그걸 깜빡해서 놓친 것.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자책이란 뭐냐 하면, 내가 뻔히 ‘그것은 아니야’라고 알았는데 잠시 딴 생각 하다가 ‘아차, 그 요소를 놓쳐서 뒤돌아 보니 내가 실수했네.’ 자책내시는 실수.
자책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껏 하고 있는 것이 내 노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는 노동한다. 뭘 위하여? 내가 노동할 때는 어떤 노림수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것은 나의 노동으로만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평생 살아온 상식이다.
그거거든요. 누가 가만 있으면 내 인생 살아줍니까? 내가 나서지 않으면 내 인생 꾸려나갈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인생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반성이라는 것은 뭐냐? 방금 자책이란 뭐냐를 했지요. 자책이란 것은, 내가 뻔히 생각했는데 깜빡 했을 때 자책, 뒤돌아서 후회하는 것. 그것의 기본은 뭐냐?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할 자신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반성이라 하는 것의 자책과의 차이점은, 깜박 한 것은 자책인데 막상 일을 하다 보니 ‘아하,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이런 헛짓을 하고 있었네. 막상 일을 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일을 해보니 이것은 내가 수정을 해야 될 문제구나. 성질을 고쳐야 되고 조심해야 되고. 그 일을 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하고 보니까 이런 허점이 보이네.’ 이것은 반성입니다.
깜빡 한 것이 아니고 일단 해보니 나타난 것이 반성이에요. 평소에 설교를 잘 안해본 신학생과 목사의 차이점은 경찰대학 졸업생과 경찰대학생의 차이점입니다. 그 정도면 되지요. 주일이 되면 항상 신학생들은 자기 담임목사나 혹은 다른 목사에대해서 비평을 잘해요.
‘저건 흐름이 안좋고, 저건 통일성이 없고, 앞뒤가 안 맞고, 객소리가 길고, 본문하고 어긋났다. 저건 돈달라는 소리고, 저건 교회에서 자기 카리스마 꽉 쥐려고 하는 하나의 정치적 발언이고, 저것은 동아일보 논설에 나왔던 이야기고. 왜 세상적인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지.’
그런 평을 하게 되면 그 태도가 딱딱하잖아요. 그러면 그 신학생을 불러요. “이번주 오후설교는 네가 해봐라.” 시킵니다. 그러면 잔뜩 준비하지요. “어깨에 힘 주고. 주께서 맡겨주셨으니 이 설교를 통해서 회개케 하여 주옵소서.” 오순절이 어쩌고, 거론하면서 “듣는 사람들은 다 변화되게 하옵소서.” 잔뜩 기도빨을 잔뜩 집어넣고 딱 설교하고 난 뒤에 자기가 설교한 것은 나중에 집에 가서 들어보면 부끄러워서 못듣습니다.
그게 반성이에요. 안해봤으니까 남의 실수가 눈에 들어오는데 막상 해보니 자기 허점투성이라는 것은 해 봤기에 나오는 것, 그게 바로 반성입니다. 아까 자책이 뭔지는 다 잊었지요? 자책은 뻔히 아는데 두 번다시 실수 안하려고 했는데 또 깜빡한 것. 연세 많으면 다 그래요. 연세 많으면 다 깜빡깜빡 하거든요. 그게 자책이고요.
반성은, 뭘 해보고 나서 자기 부족함이 드러난 것은 반성. 세 번째가 회개라는 건데요. 회개라는 것은 벌 안 받기 위한 사전조치, 아부하기, ‘주님께서 나에게 손해를 입히면 나만 손해잖아.’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할 때 불확실하다는 말은 벌을 받을 가능성, 개연성이 있어요.
그럴 때는 미리 숙이고, 손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미리 꿇어앉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라요. 나는 내 잘못을 모르겠지만 주님께서는내 잘못을 뻔히 아니까 내가 건방떨면서 “나 잘못한 것 없다.” 이렇게 나오다가는 무슨 맴매를 할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 잘못은 뭔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분명히 잘못이 있으니까 사전에 자기를 꿇려서 내려앉히고 들어가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반성과 자책은 하나님이 없어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뭘 알겠습니까? 내가 뭘 한들 그게 무슨 영광이 되며 내가 한들 뭐가 의롭겠습니까? 주여, 부족하오니 잘 봐주세요. 제가 미천한자니이다.” 이렇게 붙여가면서 하는 것,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 자책, 반성은 세 개가 다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노동해서 내 인생 살겠습니다,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세 개 다 거짓된 거예요. 회개, 반성, 자책, 다 세 개다 죄에요. 왜 죄인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요령껏 살겠습니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왜? 내 인생이니까. 남의 인생이 아니니까.
내 인생 내가 잘 꾸리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그게 나쁘다는 겁니다. 내 인생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그게 나쁜 거예요. 그것은 뭐냐? 내 인생이니까 내 인생이 불행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불행한 결혼하고 싶지 않고 불행한 인생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주께서 불행하게 하면 불행해야지 네가 뭔데 거기서 버팁니까?
왜 불행하지 않겠다는 욕심이 늘어나느냐 하면,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과 경쟁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자랑은 누구와 라이벌이 된다고요? 내 자랑과 라이벌이 돼요. 그러니까 음흉한 자기자랑의 교묘한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있는 벌과 저주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고 그래서 남는 것은 뭐냐? 역시 나는 요령껏 살았다. 재주껏 살았다는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융합, 통합해서 말한다면 ‘나의 노동’이에요.
교회 오는 것도 나의 노동이고, 기도하는 것도 나의 노동이고, 헌금하는 것도 나의 노동이고, “내가 나에게 적절한 노동을 해서 나는 드디어 천국에 골인했다. 이 세상사람들아 보아라. 나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워냐?” 라고 자기자랑을 해대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악마와 직통거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게 악마의 얼굴입니다. 악마의 성격이에요. 달리 악마가 아닙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차를 빨리 몰기는 어렵고 천천히 가는 것은 제일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왜 차를 천천히 모는 것이 힘든가 하면, 경쟁하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이 세상에 자기 하나만 산다. 그런데 도로는 텅텅 비었다. 빨리 갈 이유가 없어요.
세월아, 내월아,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가 할 수가 있는데 이 세상에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옆에서 차들이 씽씽 달리니까 질까 보냐 해서 마구 달리는 거잖아요. 차 운전하다가 내 앞에서 파란불이 꺼지면서 빨간불에 막혀보세요. 은근히 부아가 난다니까요. 저 인간은 무슨 복을 받아서 파란불 받고 나는 무슨 저주를 받아서 빨간불을 받느냐.
모든 축복과 저주는 남하고 비교하는 겁니다. 남하고 비교할 때 남들처럼 될 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뭐냐 하면, 나도 너처럼 할래, 라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노동이에요. 나도 너처럼 할래. 교회에서 목사가 이야기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헌금해서 복받았고, 어떤 교인들은 목사섬겨서 복받았고, 어떤 사람은 기도 열심히 해서 가정이 폈다.”
그걸 듣는 사람이 뭘 느낍니까? ‘너처럼 나도 노동 못할줄 아냐? 헌금노동, 기도노동, 봉사, 목사섬김, 이런 노동 못할줄 알아?’ 철야기도노동 할 자세가 되어 있어요. 이걸 교회에서 경쟁을 시킨다니까요? 왜? 누굴 자랑하라고? 교인들이 자기자랑하려고 교회온 교인들이기에 고객을 만족시키는 겁니다.
교회가 “여러분이 여러분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했지요? 환장한 그것 채워드리겠습니다.” 교회가 그거 노닥거리는데가 아닙니까? 다른 것 뭐 있어요? 교회라는게 뭡니까? 자기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데잖아요. 그거 때문에 오지 뭐 때문에 교회와요? 이게 개인적 자랑이지요. 나중에 집단이 되면, 우리교회는 너네보다 더 크다고 교회별로 자랑해요.
교회별로, 또 교단별로. 감리교보다 장로교가 낫다. 나중에는 기독교가 불교보다 낫다. 이번 수련회때 우리가 합창으로 했지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게 악마에서 나온 겁니다. 성경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 이야기 들어서는 “왜 자꾸 내 마음에 악마 있다는 소리를 하느냐?”
악마에게 나온 것이 뭐냐? 층이 지하 1층이 있고 지하 2층이 있고 위에 지상 단층이 있어요. 지하 1층부터 먼저 설명하면, 지하 1층에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욕망은 나의 의미를 제공하는 층이에요. 욕망의 층에서 뭐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신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이 왜 신을 믿고 하나님을 믿느냐 하면, 신을 믿지 아니하면 자기의미가 없어요.
내가 어디서 나왔으며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그것은 신 앞에서 자기자신을 견주어봐야 되거든요. 그게 바로 욕망의 층입니다. 욕망의 층은 자기자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층이 욕망의 층이에요. 욕망의 층이 바깥으로 삐죽 나온다고요. 지하 1층, 2층, 이렇게 했는데 쉽게 하면 시루떡, 3층짜리 시루떡으로 보면 돼요.
그것도 이해 안되시면 햄버거라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일 밑에 빵이 있고 그 위에 채소 있고 고기다진 것 있고 제일 위에 덮개가 있잖아요. 햄버거보다는 시루떡이 낫겠다. 1층, 2층, 3층 시룩떡. 제일 위층이 뭐냐,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말합니다. 그 현실위에 나오려면 그냥은 못나와요. 자랑거리가 있어야 현실로 소복이 튀어나옵니다.
자기의 욕망은 자기의 의미거든요. 이 의미가 남들에게 얼마나 먹히는가를 삐죽이 자랑하고 싶을 때 그 때 자기의지가 같이 동원되어서 현실층에 뾰족하게 나오게 되면 거기에 누가 기다리는가 하면, 타인들이 기다려요. 씹어요, 우리를. 평들을 한다고요. “머리 잘 깎았네.” 이렇게 하잖아요.
‘나는 머리가 긴데 이번에 머리를 잘 깎아야 돼. 왜? 나니까. 내 머리는 잘 나와야 해.’ 이것은 아직 표면에 나오기전의 의미층이에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내가 봐도 뿌듯한 마음으로 살도록 밑의 욕망이 조정을 한다고요. 그렇게 조정을 해놓고 고개를 쏙 내밀어요. 내 밀 때 우리는 두가지와 경쟁합니다. 내가 이정도 나오면 부끄러울까, 아니면 자랑스러울까?
자랑스러운 것 한 70, 부끄러운 것이 한 30, 그러면 우리는 밖에 나옵니다. 왜? 70-30 하면 나머지 40은 남잖아요. 그런데 부끄러운 것 70, 자랑스러운 것이 30이 있으면 미국 이민 갑니다. 검찰청사 앞에서 고개 숙인 사람들, 돈 되는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가 있어요. 현실층에 나타나지를 않아요.
그런데 골프대회에서 1등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다. 그러면 자랑거리 90이고 부끄러운 것은 10이에요. 금메달리스트 하다가 15년 뒤에 누구하고 바람피웠다고 하면 부끄러운 것 80되고 금메달 20되면 뉴질랜드나 호주에 이민가 있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지금 자기가 계산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이 모습 가지고 부끄러울까, 자랑스러울까?
왜? 남들이 나에게 평가를 내리니까. 인생 사는 것 뭐 있어요? 인생은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 자랑하는 재미, 자기 자랑하는 재미 외에는 인생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들 교회가서 하나님 믿으니까 저도 믿는 거예요. 왜? 하나님 믿는 것이 자기자랑의 플러스 5점정도 쳐주니까.
그래서 기도했다고 목사님이 자랑하니까 거기서 플러스 7들어가고, 헌금했다고 주보에 “아무개 특별헌금 20만원”이라고 나오니까 그것은 플러스 한 15들어가고, 그 다음부터는 직장 때려치우고 교회에 출근하면서 교회에서 칭찬받는 그것으로 인생 다 망치는 거예요. 성경공부하고, 구역예배권찰하고, 목사가 시키는 것은 다하고.
그게 평소에 자기가 미흡했던 자랑거리를, 그걸 자아실현이라 하는데 자아실현, 자기구현을 교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목사나 다른 교인들의 자랑을 퇴비로, 에너지로 삼아서 마지막 여생을 장렬하게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누구 맘대로? 누가 신앙이래요? 평소에 교회놀이해놓고 누가 그걸 신앙인이라고 합니까? 신앙인 아니에요.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왜 교회 나오는가? 미리 욕망의 층에서 하나님이라는 자기존재의미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받아야 나중에 현실층에서, 취직을 한다든지, 사회에 나갔을 때 하나님이 받쳐줄거니까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자랑거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이 말하는 악마는 어디 있습니까?”
한층 더 내려가야 돼요. 지하 2층이에요. 지하2층과 지하1층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지하 1층, 욕망의 층은 자아라는 것이 형성돼요. 그런데 지하 2층에 가면 자아는 없어지고. 단 한 사람만 있어요. 아담. 로마서 5장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에 속했어요.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뒤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악마와 결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사라지고 보편성만 남아요. 모든 인간에게 공통성만 지하 2층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게 뭐냐? 충동이라는 겁니다. 욕망은 의미를 추구하지만 존재는 충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충동은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불쑥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충동은 내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유의지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지하 2층에는 내가 없어요.
악마가 나를 자기 맘대로 다뤄요. 지하 2층에서는 악마가 우리를 맘대로 다루고 지하 1층에서는 나라는 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욕망이나 욕심, 탐욕을 내가 어떻게 조절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안 돼, 안 돼. 이것은 너무 나쁜거야. 너무 막갔어. 그러면 안되지. 그러면 너는 남에게 욕을 얻어먹는다고. 그러면 안돼. 그래. 조심해야 돼.’ 이렇게 조정을 하는 것, 조정을 하는 것은 지하 1층이에요.
조정을 할 것이 등장한다는 것, 추잡스럽고 지저분한 것이 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겠어요? 그것은 지하 2층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울렁울렁 다 충동의 바다에 있다가 그것이 불쑥불쑥 융기되어서 구멍이 뚫리면서 나오는 것이 지하 1층의 욕망의 세계입니다.
그 욕망의 세계 위에 가면 현실세계에요. 나의 욕망을 배운 교육과 상식과 품위와 그리고 내가 안고 있는 도덕과 윤리로서 잘 포장해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거리가 될 만한 작품으로 뽑아내는 작업은 현실세계에서 하는 겁니다. 주일날 교회에 온다고 넥타이를 매고 오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는 “아이고 답답해라.” 하고 넥타이를 집어던져버리잖아요.
교회에 올 때는 단정하게 와야 된다는 것. 물론 우리교회는 해당이 안 되니까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요. 자 그렇다면, 이게 인간이라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간의 결론은 뭐냐? 인간은 자기자랑 외에 예수자랑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흔히 교회에서 예수 자랑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하 1층의 자아가 먼저 있고 성경말씀가지고 조작한 거예요.
“주님 자랑하면 뭐 해줄 건데요? 주님만 증거해서 영광 돌리면 보너스 마일리지 쌓여서 죽을 때 하늘나라 상급 받겠지요?” 지하 1층에서 나는 저들과 같이 아니하고 나의 이러한 종교라는 노동, 종교테크닉이죠, 종교테크닉을 발휘해서 내가 보기에도 그럴싸한 나로 현실세계에 뽑아내는 그 노력을 지하1층에서 꾸준히 해 왔던 겁니다.
백날 해봐야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고 목사는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랑은 어떻게 되는가? 젤리뽀라는 애들 과자가 있어요. 얇은 막을 뜯어내고 손가락을 가지고 뒤에서 바닥을 밀면 깔끔하게 뽀, 하고 통째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자랑은 우리보고 모든 노동의 의미가 없음을 규정하고 주님께서 엉덩이 쪽을 밀어요.
밀면 우리는 외부로 뭐가 나오는가 하면, 1층에서 조정하지 않은 순수한 더러운, 나가 아닌 아담의 일부로서 바깥에 나올 때 그게 바로 예수의 자랑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저는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어떤 죄인가? “남에게 자랑거리 되는 인생 만들려고 평생을 헛짓을 해온 그런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케 할 때 그게 바로 성령에 의해서 나온 유일한 예수님의 자랑거리입니다.
그거 나올 때 놀랍게도 마귀도 같이 나와요. 지하 1층을 그렇게 어수선하게 만들었던 지하 2층의 그 장악하는 세력, 힘, 파워, 그 악마마저 나오는 겁니다.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욥기에 나와요. 욥기 1장부터 중반 이후, 끝부분 될 때까지는 지하 1층의 이야기입니다. 욥이 하는 말이, 지하 2층의 악마는 모른 채 “주님이여!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제가 남들 앞에 얼마나 자랑스러운 의인이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고난을 주니 하나님이 주신 그 고난과 내가 1층에서 나를 조작해서 얼추 이정도 하면 괜찮은 신앙이지, 하는 그것과 결부가 안 되는 거예요. 자식들 생일파티 열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행여 자식들이 파티 할 때마다 젊은 기분에 죄지을까 싶어서 아빠가 되어서 “자식들로 하여금 영광 가리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이여, 제 의를 봐서라도 그들을 너무 탓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했던 그 자식들 하루아침에 열 명 다 죽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에요. 아예 없었는데 뭐가 있다는 그것은 아쉽지 않아요. 그런데 있다가 없어버리면 그것은 굉장히 아쉬워요. 소매치기가 지하철에서 남의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훔쳤다 합시다. 그 한건 한 쾌감이 보통쾌감이 아니거든요. 자기가 몰래 남의 뒷주머니의 두툼한 지갑을 훔쳐서 자기 뒷주머니에 넣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자기 청바지의 뒷주머니가 터져서 벌써 어디로 떨어지고 없어요.
남의 것을 가질 때의 쾌감보다도 분명히 있어야 될 뒷주머니가 터져서 없어졌을 때의 그 허전함, 그것은 어떤 기쁨으로도 보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 오실 때 “목사님, 뭘 더 알아야 됩니까?” 해서 오지 마시고 이렇게 해야 돼요. “목사님, 무엇이 더 깨져야 됩니까? 무엇을 더 잊어버려야 됩니까? 무엇이 박살나야 됩니까?” 그걸 알아야 돼요.
아직도 우리자랑거리가 있어요. 그 자랑거리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 십자가를 가리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깨어질 것이 내 잘못이 아니에요. 그걸 여러분의 자기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요. 어떤 일을 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세요. 어떤 책임에 얽매이지 마세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자랑 하겠다는 거예요. 결혼에 의미 없습니다. 결혼해놓고 결혼에 책임지지 마세요. 사업해놓고 자기사업에 책임지지 마세요. 지금 세종시에서 오신 분이 아주 잘 들으시는데요. 부부생활 수십년 하셨잖아요. 싫으면 갈라서는 것이지 뭐가 있겠어요. 결혼이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마세요.
세상에 얽매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현실층에서 “나 이 정도는 되는 사람입니다. 나를 개무시하지 마세요.”라는 남들의 시선을 강력하게 의식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현실층으로 나온 그것은 지하 2층에서 나온 거예요. 악마가 우리를 그렇게 유도한 겁니다. 멋있게 보이려고. 참 인내했고 잘 살았다고, 참을성 있다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사람은 그리움 없으면 못살거든요. 하루하루 그리움 때문에 살아요. 그리움이 나를 잡아당겨요. 내일은 잘 될 거야. 내일은 잘 될 거야. 한 달 뒤에는 잘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자기의 무거운 책임감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지하 1층에서 나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고 이왕 나로 사는 것 멋있게 살자고 할 때 이미 그것은 욕심이고 욕망이에요.
나만의 의미를 챙기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버리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이 되지 못하고 자기자랑이 되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서 제일 미운 인간이 누구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진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진짜 때려주고 싶어요.
내려놓자, 내려놓자. 뭘 내려놔? 내려놓기. 뭘 내려놔?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더 올리고 있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그 괜찮아진 자기를 두 번째 세 번째 자아의 우상으로 높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참았다고. 왜 참는데? 누가 참으라고 했어요? 미친것 아니에요? 그게 마귀얼굴이에요.
가장 고상하고 경건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그것, 그것은 누구하고 비교했어요. 옆 사람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집에 가면 홀라당 벗고 돌아다닐 인간이 밖에 나오니까 꾸미잖아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 오실 때 부끄러워했잖아요. 그 부끄러움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 부끄러운 본성, 그 원인은 지하 2층까지 내려와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봐야 내 자랑밖에 안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여리고성이 나옵니다. 여리고성 함락할 때에 놀라운 사실은 기생 라합이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 이 자리에서 옆의 자리까지 옮길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깊은 의미를 담아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 결정 바로 옆에 1미터도 안 떨어진 어떤 결정이 있다 할지라도 그 1미터는 불가능한 거리입니다. 나는 그래야만 한 것으로 몰아세워지게 되어 있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가게 되면 자기 자유의지로 옆의 것으로 변경이 안돼요.
그 말은, 본인의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자리가 자기가 의도했던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자리기 때문에 이 자리는 내 인생에서 함부로 변경이 되지를 않습니다. 기생라합은 아무소리 안하고 여리고성 그 자리에 그냥 있었어요. 무너질 도성에 그냥 있었습니다. 그냥 있으세요.
출애굽기 14장 14절에 보면 나오지요. 홍해가 가로놓여 있어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이거예요. “그냥 가만히 있어라. 살던 대로 살아라.” 어떻게? 네 자랑이나 하고, 남에게 “멋있지?”하고 위선 떨면서 그냥 사세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현실층, 지하 1층, 지하 2층까지 다 때려 부수러 오실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만나지 못한 분을 상대해서 이겼습니다. 그게 바로 지하 2층의 악마의 자리인데 그 악마의 자리는 예수님만 상대하지 다른 사람은 상대 못합니다.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기어이 우리는 승리했다는 것을 주께서 지하 2층에서 현실층으로 나오면서 자기백성을 골라서,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줄로 좍좍 잡아당겨서 끌어당기면서 지하 1층만 봤던 내 모습에서 지하 2층까지, 내가 없이 나라는 것을 구성하게 되는 그 아담의 죄의 잠재되어 있는 그 저장소, 그 저장소도 우리보고 보게 하는 거예요.
거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뭐냐? ‘내 인생 내 책임 아니었네.’ 내 잘못, 나를 질책하고 나를 꾸짖을 필요 없어요. 자책, 반성, 회개, 다 실없는 짓입니다. 그런다고 내 자리 변경되고 내 인생 달라지는 것 없어요. 내가 회개했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회개했다고 성령세례 오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주께서 하셨기에 소급해서, 너는 이런 경로를 밟아서 너는 이렇게 내 손에 잡혔느니라, 그것만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니까 그때 나오는 것이 뭐냐? 예수님만 자랑하고 그 장소를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싸대지 마세요. 왔다갔다 이렇게. 미국 갔다 한국 갔다 이렇게 왔다갔다.
뭐 좋은게 그리워서, 뭐가 그립다고요. 가 봐야 뭐. 또 북유럽 간다고, 노르웨이, 스웨덴, 이거 계획 잡힌 사람 있어요. 가봤자 거기 밥먹고 사는 데에요. 경제활동 하는 뎁니다. 거기 가는 사람은 거기서 경제활동 하는 사람들 돈 보태주로 가는 사람들이고. 인생사는 것이 뭐 있어요? 자기과시,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 다음문제가 뭐냐 하면, 무슨 수로 우리가 주께 지하 2층까지 오라고 요청할 수 있느냐? 우리요청대로 움직이지는 않지요. 여기서 마지막 문제가 뭐냐? 정말 지하 2층까지 와서 주님이 우리를 붙잡을 때 우리한테 어떤 특이성, 다른 사람과 다른 어떤 특별한 개성, 특이성이 보이는가?
그것은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에 요셉을 보세요. 요셉을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요셉은 인생이 자꾸 움직여요. 요셉이 움직이면서 뭘 아느냐 하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요.
물론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여, 내가 무엇이 잘못되어서 이런 수모를 주십니까?” 나중에 하나님 만나고서 입이 쑥 들어갔어요. 왜냐하면 욥기 1장에 보면 마귀가 나와요. 주님은 마귀하고 내기하면서 거기에 욥은 아무것도 모른 채 들러리로 끌려 당겨진 것이 욥이에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악마와 상대했는데 악마와 같이 있었던 것 중 하나가 우리인데 그 우리를 가지고 변변치 못한 우리를 주님의 그럴싸한 자랑거리로 만드시는 겁니다. 조건 없이 자랑거리로 만드는데 이것이 누가복음 2장에 나오지요.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들판에서 목자가 양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가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다음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수동태입니다. 피동적이에요.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한다고 찬양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기쁘게 한다고 헌금 목돈 드리고 하지 않아요.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한 것 아니에요. 선교한 것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그냥 이대로, 그냥 이대로 주님께서 기뻐하심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 어떠한 분란이 일어나든지 관계없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하 2층에 있는 악마가 지하2층까지 못내려가게 만들어가지고 지하 1층에서 출발하게 만들어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네 인생 그러면 망가지는데? 네 인생 제대로 하려면 제대로 종교노동 해야지. 이럴 때는 기도하는거야. 이럴 때는 금식하는 거야. 이럴 때는 철야하고 이럴 때는 회개하는 거야. 이럴 때는 헌금 하는 거야.” 계속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라는 그 마약에,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라는 마약을 마치 처방전처럼 먹으면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에 얽매이게 만들어버려요.
얽매이게 만드는데 거기에서 목사마귀 나오지요, 장로마귀, 집사마귀 다 따라다녀요. 돈이나 빼먹고 싶어서, 당신은 내가 보니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다고,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고, 이번에 선교헌금을 하는데 당신이 몇 푼 내지도 않아서 애가 성적이 내려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결국은 뭐냐? 나라는 것이 형성되면 자동적으로 두려움이 생겨요. 사람은 언제 두려움이 생기는가? 나라는 것이 형성되게 되면 두려움이 옵니다.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인간은 망하라고 있는 거예요. 여리고성이라는 그 자리 자체가 망하라고 있는 자리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와가지고 다 멸망시키고 오직 거기서 기생 라합만 건지잖아요. 구출이 답입니다. 이 땅에서 인생 변혁하려고 하지 마세요. 팔자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구원이 답이에요. 구원이 정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것 외에는 다른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이게 전부에요.
그러나 내가 그것을 희망해서는 그것이 실패로 끝나요. 희망하게 되면 또 구원받고자 뭘 어떻게 하고 ……, 그렇게 계산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께서 끄집어낼 때는 구원받은 것이 내 자랑이 아니고 결국 우리는 주님의 자랑이 되게 합시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제는 교회 다니면서 남들 못지않게, 남들에게 지지 않도록 열심히 자기 자랑합시다.
이것은 쉬워요. 기도 좀 하고 기도자랑하고, 우리 결혼해서 이렇게 잘 산다고 사진 막 찍고, 그런 노동은 아주 쉬워요. 그거 빠지지 말고 매일같이 합시다. 거기다가 약간 찝찝하다 싶으면 회개, 자책, 반성하고. 그런 쓸데없는 짓들을 하면서 그것으로 내 운명이 전혀 변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는 것은 오직 그 순간마다 주님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못난 놈!” 이 순재 하듯이 “못난 놈!”
늘 우리는 못난 놈으로, 끝까지 못난 자로 주님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속아 넘어갔는지. 사실은 마귀한테 우리가 속아 넘어가놓고 남 탓을 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북소리에 춤을 춰놓고 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우리, 한없이 자기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우리, 그런 인간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했사오니 예수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