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0811b 디도서3장1절(사고와 운명)-이 근호 목사
성경을 보면서, 아까 첫째 시간 끝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이 나오면,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나 보호해 달라는 의식이 먼저 딱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되는데, 내가 나를 지키는데 역량이 모자라니까, 정사와 권세까지 이용을 해서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이 정당화돼버려요. 정당화가. 그걸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세금 내니까 지켜달라는 거예요. 세금 내잖아!
자, 어느 나라에 이슬람이 한 10퍼센트 된다. “세금 내니까 지켜 줘!” 그럼 이슬람이 구원받습니까?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에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고요.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는 책이 아니에요. “나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대통령에게 잘하고 있고, 4대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이시여, 나를 지옥 보내지 말고 천당 보내주소서.”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정사와 권세자가 등장한다는 자체는, 결국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써 필수적으로 이런 자들이 등장해야 돼요. 그럼 복음의 배경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복음에서 나오는 정사와 권세하고, 그리고 복음이 아닌, 복음을 대적하고, 반-복음적이고, 비-복음적인 정사와 권세의, 그 내용상의 차이가 뭔가를 알아야 해요. 그 차이가 뭔지를. 하나는 짐승이고, 하나는 인자의 나라죠. 뭐, 어떤 결론적인 용어를 띤다면 그런 거죠.
다니엘에 보면 네 마리의 짐승이 나오죠. 아주 흉측하죠. 바다에서 기어 올라옵니다. 땅의 한계가 끝났다는 겁니다. 원래 바닷물은 땅으로 넘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노아언약에 의해서. 여기까지만 파도치고 그 다음부터는 파도치지 말라는 겁니다. 근데 바다의 내용물이, 바다의 내용물이라고 하는 것은 은밀한 내용물 또는 시원적인 내용물, 원초적인 내용물, 원초적인 것은 바로 묵시적인 괴물이 숨어서 살았던 그것. 그게 바다에요.
그러면 땅이 제대로 가동되면,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못하고 그냥 으르렁대기만 하면 돼요. 으르렁~으르렁~ 아이돌 가수들 엑소EXO처럼. 으르렁 대면서 참고 있는데, 땅이 개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물어! 물어! 해가지고, 바다의 그 괴물이 땅을 침범하게 되면 완전히 땅은 멸망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기존의 땅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그렇게 다룰 대상이 안 돼요. 그걸 쳐부술 무기는, 그동안 바다를 대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길 무기가 없어요. 이 짐승도 하여튼, 이건 뭐 사자면 사자고 곰이면 곰이든지 해야 하는데, 하이브리드hybrid,복합체가 되어가지고, 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었는데 곰이 되고, 그럼 곰한테 맞춰 만들었는데 독수리가 되어서 날아가 버리고. 도대체 땅의 존재가 바다를 이겨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왜 마귀로 하여금 땅을 통치하게 했느냐? 패망하라고, 지옥 되라고 일부러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 땅의 정사와 권세는 뭐냐,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하나님의 사자에요. 까불거든 줘 패라 이 말이죠. 패버리란 말이죠. 패면, 아야! 하죠. 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때 맞아도 싼 거예요. 왜?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죠. 미련을.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한 그 의미를, 그냥은 몰랐는데 줘 패니까, “에이, 살 곳이 못 되네. 날씨도 덥고 살 곳이 못 돼. 아 이고, 주여! 어서 내 영혼 받아주시옵소서.” 그런 고백을 하라 이 말이죠.
좀 무책임하지만, 자식이 엄마한테 밥 달라고 하는데, “엄마 밥 줘요.” “나 떠난다. 니가 알아서 밥 챙겨먹어라. 라면 끓여먹든지, 진라면을 끓여먹든지, 나는 간다.” 상당히 무책임하긴 한데, 자식도 그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 나는 엄마한테 밥도 못 얻어먹는 저주의 땅에 태어났구나. 나도 주님만 믿어야지.”라고 이래 나오면 얼마나 좋아요.
꾸준히 하나님은 정사와 권세를, 계속 매로 때리는 그 권력의 힘을 발휘하도록 부추깁니다. 패야 됩니다. 이 땅에 미련두지 않도록. 심지어 그 정사와 권세의 내막이 드디어 밝혀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그것이 바로 원형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했던 그 정사와 권세가, 모든 정사와 권세의 원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소매치기를 했는데, 그 나라의 법에 의해서 그 소매치기를 잡았다면, 그게 나쁜 일일까요? 좋은 일일까요? 이거는 정당한 일이죠. 좋은 일이죠. 근데 그 나라가 예수님 죽인 유대나라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죽인 악마의 나라한테는 나는 이제부터 말 안 듣는다.” 말 안 들으면 누가 손핸데요? 자기가 남한테 도둑맞았는데 신고 할 데도 없으면 누가 손핸데요? 그게 아니죠.
그러니까 존재로 보지 말고 기능으로 봐야 해요. 기능으로.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인 기능을 했더라도, 그들은 꾸준히 정상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아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건방지게 내가 경찰의 힘을 믿는다, 안 믿는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럴 잽이나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잘못했으면 맞아야죠. 왜? 주님께서 그거 하라고 우리에게 권세자를 줬기 때문에.
그럼 어떤 때 맞아야 됩니까? 그건 그 뒤에 나와요. 2절,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라고 나오죠.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만 이런 일을 하겠어요? 아니면 세상에 나와서도 이런 일을 하겠어요? 그 성질이 어디에 갑니까? 똑같이 일어나죠. 그러면 교회 와서는 은혜로 봐주자고 이렇게 되지만, 밖에 나가서는 은혜로 봐주면 큰일 나죠. 잡아 가두든지 해야 되겠죠.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장로가 나서서 합니까? 집사가 합니까? 목사가 합니까? 누가 합니까? 그때는 장로, 목사, 집사 다 필요 없어요. 하나님의 관료로서 권세 받은 사람이 이 일을 다 해야 하지 않습니까? 본문이 어렵지 않죠.
자, 이렇게 하면 더 쉬워요.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 이 죄는 잠복되어 있어요. 잠복. 불쑥 튀어나오죠.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죄가 했으니까 나는 책임 없다.”라고 하게 되면, 책임 없는 것은 맞아요. 근데 맞는 책임은 있어야 돼요. 맞는 책임은. 배고픈데 빵이 있다. “배고프게 한 것은 주님이 배고프게 했고, 내 눈에 빵을 목격되게 했기 때문에, 내가 그 빵을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그 말이 맞아요.
맞는데, 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때리는 책임자는, 그 책임을 부여해준 분이 예수님이에요. 배고프다고 돈 안 내고 빵 먹으면 빵집 장사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보자~아이고, 빵집이 있네!” 장발장도 아니고 빵 그냥 먹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배고픈 것도 본인 의사가 아니었고, 배고팠기에 빵을 그냥 먹은 것도, 이놈 잡았다고 하는 그 책임자도, 그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거예요.
왜냐? 우리의 어떤 행동도 그것이 처벌대상이 됨을 우리에게 통보하기 위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처벌 안 받는다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맞지만, 맞을 매는 맞아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맞잖아요. 죄 짓고 안 맞겠다고 하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죄 졌나? 그럼 맞아도 싸네.” “그렇습니다.” “그래. 때려줄게.”
그러니까 사람들의 생각이 이래요. “니 죄 졌지?” “예. 죄졌습니다.” “맞아야 되겠네?” “예. 맞아도 쌉니다.”라고 하면서 뒤에 무슨 뉘앙스가 붙느냐 하면, “주여, 이 정도로 내 죄를 자복했으니까, 죄가 면제가 되게 해주시고, 저 경찰이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옆자리에 앉은 친구인데, 친구인 걸 알아봐서 그냥 4만 원짜리 끊어주게 해주세요.” 뭐, 이런 것 까지 계산을 다 하는 거예요. 4만 원짜리 끊어주면 그거는 주님한테 얻어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제대로 권세자의 기능을 안 했기 때문에.
결국 이거는 믿느냐, 안 믿느냐와 관계없이 국가라는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멋진 구조적인 틀이 되는 거예요. 멋진 구조적인 틀이. 목사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개과천선이 됩니까? 라고 한다면, 개과천선하라고 있는 권세자들이 아니에요. 자꾸 오해를 하지 마세요. 권세자들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 안 돼요.
맞은데 또 맞을 뿐이지, 그게 인간 안 된다니까요. 그게 율법적 기능이에요. 율법적 기능. 율법이 있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지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율법의 행함으로 의가 안 나와요. 율법의 행함으로 죄가 나온다니까요. 율법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저주가 있다.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입장도 모르고, 법을 지키려고, “나 지켰다. 십계명 지켰다.”라고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죠.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세리하고 비교해서,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고 하죠.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라고 이걸 수련회에서 세 번 제창했잖아요.
제가 이렇게 하면, “저는 안 들키고 매도 안 맞는데요?” 그거는 아직 경찰력이 못 미쳐서 그래요. “어제 길거리에 오줌 쌌는데도 안 맞았는데요?” 그거는 니가 알아서 처리해서 그래요. 경찰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자생적으로 나를 치안하는, 나를 정죄하는 율법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정사와 권세가 변질되면 어떻게 하느냐? 변질되면서 오늘 강의의 핵심부분에 들어갑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율법대로 해야 돼요. 그리고 그렇게 행한 그 사람도, 자기가 지도자이면서, 자기가 가르치면서 가르친 자가 그렇게 하면 안 되겠죠. 마찬가지로 권세 행한다고 해서 법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그 법에 대해서 똑같이 하나님께 책임추궁을 당합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느부갓네살이에요. 자기가 왕으로서 행정적 처리를 하면서 왕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서 통보해주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그 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 저주스럽고 매 맞게 하는 그 법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어요. 다 그렇게 얻어터져야 되고, 얻어맞아야 돼요. 그래서 죄 값은 사망이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국가가 변질이 되었어요. 운명적으로, 우리는 저주받아야 될 운명을 담당해야 할 그 법이, 사고 뒤처리로 바뀌어버렸어요. 현대국가가. 왜 사고 뒤처리로 바뀌어졌느냐 하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법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내 안에 있는 짐승이, 마귀가 그걸 요청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시작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권이 시작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시작이 돼버려요. “나를 행복하게 지켜주면 나는 세금내고, 너를 지도자로, 대통령으로 표 찍어줄게.”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누가요?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과학이 그들에게 용기를 줬기 때문에 그래요. 과학이. 이제는 미신시대는 지나갔다. 미신시대는 지나가고 과학의 시대가 오리니! 연구해라! 기술발전이 우리를 풍족하게 할 것이다. 진보가 아니고 진화로. 진화라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뜻이에요. 과학에 매진하자! 아는 것이 힘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뭘 줄이면 되겠어요? 사건, 사고를 줄이면 되겠죠. 그럼 경찰 월급 많이 주고 과속단속하면 되겠죠. 그게 바로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살기 좋은 나라에요.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한테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되니까요.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 가서 기도 열심히 한다. “저, 아주머니! 왜 이렇게 새벽기도를 길게 하십니까?” “글쎄 우리 애가 사고를 당했어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사고를 당해서 울어요.
플라톤 국가론에서는 철인, 철학자는 뭘 한다? 통치는 지혜롭게 하되, 뭐는 없다? 사유재산과 결혼은 못하게 했어요. 죽으면 다른 사람과 바꾸면 되니까. 나머지기 사람은 자기 역할을 맡아야 돼요. 자기 역할을. 이걸 칼빈주의 소명론으로 보면 돼요. 사람은 백정이든지, 빵장사를 하든지, 이발사든지, 경찰이든지 관계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다. 이게 칼빈주의입니다. 소명, 부르심을 받았다. 너는 어부로서 부르심을 입었고, 너는 농사짓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으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그냥 살아라. 이거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고, 칼빈주의가 그 당시에 부상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고방식을 편드는 거예요.
칼빈주의가 제일 발달한 나라가 네덜란드고,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생긴 나라가 네덜란드잖아요. 주식거래소라는 것이 뭘까요? 장래의 신용을 지금 돈 주고 사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앞으로 인류사는 내리막길이 많이 없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성장할거니까. 성장한 미래를 지금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주식거래소입니다. 상장하는 것.
그러니까 주식을 한다는 말은, 내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주식투자해야 돼요. “뭐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살지.” 이러면 주식투자할 거 없어요. 아니, 목사님, 주식투자한다고 부자 됩니까? 라고 반박하겠죠. 부자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 될 것이라는 그 희망이 지금의 어려움을 완화시킨다니까요. 지금의 고통을 부드럽게 만들어요. 사람이 희망이 있으면 어려워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달려라 하니! 달려라 하니는 엄마 잃고 외롭지만 육상 하나로 성공하는 거예요. 라면 먹고 금메달 따는 것. 하긴 그게 낭설이라던데, 하여튼 그게 유명해졌어요.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는 게.
그럼 어느 희망 말입니까? 문제는 희망이 끝이 없다는 거예요. 왜?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희망이 끝나면 그 다음 희망이 거기서 또 시작됩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은 저 뒤쪽 산이 안 보이게 되어 있는데, 이쪽 산을 넘는 그 순간 안 보이는 그 뒤쪽 산이 나오잖아요. 나는 3억만 있으면 더는 욕심이 없다고 도달하는 그 순간, 7억이 보이는 거예요. 다시 3억을 밑천으로 해서 7억을 내다보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부자가 안 되도 나로 하여금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아까 스데반 집사가 빨리 죽었다고 했죠. 세상의 모든 권세는 매 때리는 권세죠. 그럼 때리는 권세를 제대로 했다면, 율법이 없고 다시는 정죄가 없는 어느 나라를 사모하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겠죠. 그러나 요새는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 없어요. 유럽에서는 교회 가는 사람이 없고 전부 다 세상나라를 사모해요. 주식이 환원되니까. 점점 미래가, 과학의 발달은 곧 돈의 발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 가서 기도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교회는 누가 갑니까? 곧 내일모레 하는 사람들. 호스 꽂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와서 “주여, 죄 용서해주옵소서. 저를 천국에 넣어주옵소서.” 어디 그래가지고 천국에 들어갑니까? 죄를 알아야 용서가 되는데, 자기가 죄도 모르면서 용서가 됩니까?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죄인 줄을 꿈에도 생각 못해요.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죄에요.
왜? 용서해달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본인한테 집중해 있어요. 본인한테 집중해있으면 본인의 나라에 가야지, 주님의 나라에 못가요. 주님의 나라는 주님한테만 관심 있는 사람만 가지, 본인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못 간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반박해요. 목사님처럼 해가지고는 우리나라에 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왜? 두 명이 되면 왜 안 되는데요? 에이, 확률적으로는 두 명이 더 되겠죠. 그거는 과학이고요. 두 명이 되면 왜 안 되는데요? 주께서 두 명만 건지면 건지는 거지, 세 명이 돼야 된다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몇 명이냐가 아니고 원칙이 뭐냐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갑니까? 예수의 나라에 가요. 나의 나라에 가지 않아요. 나의 나라에서 예수님 나라에 가려면 내가 죽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삶을 대신해야 갈 수가 있어요. 왜? 주님이 최종권세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권세자가 변질되었습니다. 뭘 위해서? 죽이라고 준 율법과 법집행이 나를 위로해달라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다니까요. 이번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수련회뿐만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원래 국가는 행복추구권만 줬어요.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을 할 때에, 국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허락할 의무가 있어요. 국가는. 공직은 사직의 행복추구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충족은 시키지 않아요. 추구와 충족이 달라요.
나는 남자지만 남자하고 연애 할래. 해! 해! 그건 국가가 안 말려요. 그런데 우리 부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이것은 안 돼요. 이건 안 된다고요. 그거는 무리한 요구에요. 부부로서 모든 권리를 요구하는 것, 그거는 안 돼요. 그거는 충족이 되니까 안 돼요. 나의 성향이 남자지만 남자를 좋아한다. 해! 누가 말려? 지가 좋다는데 어떡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보상금 주세요. 이건 안 된다니까요. 나는 이상하게 소매치기가 재밌어요. 해! 그런데 잡지마세요. 이건 안 돼요.
추구는 할 수 있어요. 병이니까 할 수는 있어요. 누가 말려요? 그런데 그걸 허락해 달라? 미쳤어요? 안 되죠. 추구는 하는데 허락은 안 돼요. 나는 여호와 증인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믿습니다. 믿어! 누가 뭐래? 군에 안 가겠습니다. 미쳤어! 3년형 때려버려야 해요. 왜? 국가는 충족해주는 것이 아니고 추구만 보장해주기 때문에. 무슨 차이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국가가 말입니다. 변질된 국가라니까요. 왜? 이제는 개인이 우상화된 거예요. 원래 국가의 최종배후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근데 예수 없어요. 없고, 개인이 예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내 행복을 누가 보장할까? 나는 내 행복을 보장 안 하면 이민 갈 거야. 가! 이민 가!
젊은 베트남 여자가 “이 나라는 희망이 없어. 백날 해봐야 농사만 짓고...” 근데 TV에 한국의 드라마나 가수들이 나오죠. 한국의 드라마처럼 전부 다 재벌인줄 알고, 가수들처럼 전부 다 노래 잘하는 줄 알고 있다면, 그럼 뭐가 희망이겠어요? 주재원 만나서 꼬셔가지고 결혼하든지, 안 그러면 한국에 여행비자로 와서 시골 노총각 만나서 살든지, 그렇게 하면 베트남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는 낫잖아요.
라오스라는 나라가 있어요. 공산주의나라에요. 투자 제로에요. 투자가 안 되면, 설비투자가 안 되면 공장이 안 세워지죠. 취직이 안 되죠. 놀고먹는 나라에요. 공산주의니까. 있는 것 그냥 먹고 살자. 되게 평화로워요. 되게 평화로운데 취직은 안 돼요. 하는 일은 태어났다가 때가 되면 죽으면 돼요. 의료보험도 안 되어 있으니까. 의사할 필요가 없어요. 의사되려고 공부해도 나라가 보장을 안 해줘요. 의사하나 놀고 있으나 수입이 똑같으니까. 이게 공산주의 사회니까.
공산주의 사회는 뭡니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얻는 거잖아요. 엥겔스나 레닌이 그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공부 잘 한 놈이라고 해서, 공부 잘한 것은 알겠는데, 니는 왜 월급을 더 받아야 돼? 라고 하는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이게 공산주의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공부가 제일 쉬워서 백점 받고, 나는 공부가 어려워서 백날해도 빵점인데, 어떻게 같은 인간이면서도 나는 백점 맞았으니까 월급을 백만 원 주시고, 쟤는 빵점이니까 십만 원 주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니는 니가 잘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니도 오십만 원, 나도 오십만 원. 이게 공산주의 사회에요.
어째 좋은 사회 같습니까? 놀고먹는 사람한테는 최고죠. 노동자들이 하루 일을 얼마 합니까? 8시간. 그럼 자본가들은 일을 얼마 합니까? 20시간. 돈을 누가 더 가져가야 돼요? 자본가가 가져가야 되죠. 집에서도 회사걱정 하니까. 근데 노동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돈을 똑같이 나누자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 공산주의지, 그럴 것 같으면 누가 사업을 하겠어요? 아르바이트 한 시간에 만원. 8시간 했습니다. 그럼 8만원. 한 달 일했어요. 240만원. 주인은 50만원 가져가는데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그래놓고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다고 해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는 것은 스마트 폰 사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최선의 먹을 것을 주라는 거예요. 복지부에서 최선의 먹을 것은 줘요. 밥맛이 없어서 그렇지. 먹을 것 준다고요. 심지어 교도소에 가도 콩밥이 안 나와요. 쌀밥이 나온다고요. 교도소가 북한의 인민군보다 나아요. 한국의 거지는 추리닝 입어요. 아프리카 중산층이 추리닝 입어요. 도대체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 가야 됩니까?
플라톤은 역할을 하라고 말해요. 역할을. 자기 역할을 한만큼 수입을 가져가란 말이죠. 요만큼 일해 놓고 남의 것 탐내지 말고. 역할로 하는 거예요. 역할로. 그렇게 하는 목적이 뭐냐, 국가가 국가답게 운영이 된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정의라고 합니다. 정의. 정의로움. 정의는 보통 네 가지의 이론들이 있어요. 네 가지 다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능력대로 일하자. 이게 정의다.” 그러면 능력자가, 땅 만평 가진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 받고, 땅 천 평 가진 사람이 한 달에 십만 원 받으면 정의롭죠. 열배 일했으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신약에 가게 되면, 만 평 일한 사람이 백만 원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에요. 백오십만 원을 가져가게 됩니다. 왜? 많이 생산해서 덤핑처리를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많이 생산한 체제에서 단가가 낮아가지고, 천 평 일한 사람은 십만 원 가질 것을 오만 원 가지게 만들어버리는, 사회구조적으로 시장에 모순이 있다고요. 시장에서는 같은 제품이면 싼 걸로 사잖아요.
아이고, 세상에! 천 평에서 일했어요? 만 평 가게에서 일했어요? 그러면 똑같이 해야죠. 그런 것을 계산할 사연 같은 것을 몰라요. 왜? 내 맘도 모르는데 남까지 우에 알아요? 인간은 그런 남들의 사연을 모른다고요. 코앞에 있는 자기 사연밖에 몰라요. 그러면 능력자끼리 일하면 안 되겠죠. 시장에 맡기면 안 되겠죠. 왜? 독과점이 돼버리니까, 이건 자기 노동력까지 가진 자에게 탈취를 당하니까.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그러면 지도자가, 똑똑한 지도자가 나와서 이걸 조정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게 계약법에 의한 정의론이에요. 문제는 그 지도자가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기 가족만 챙긴다면 그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는데요? 그러면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라는 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근데 법은 누가 만듭니까? 지도자가 만들어요. 자기 편리를 위해서. 통치를 하려면, 그냥 통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통치에 합당한, 대통령 법이라는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거기에다가 넘겨준다니까요. 잘해볼라고 하다가 말을 사줬다고 하는 거예요. 잘해볼라고 하다가. 나라에서 젊은 애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려고 최순실한테 말을 사줬다고 이렇게 나와요.
이거는 누구의 권한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기 때문에 이거는 법이 판단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또 촛불 들래요? 지도자가 괜찮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했는데, 지도자가 인간이잖아요. 죄가 잠복되어 있다고요. 죄가. 괜찮은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요. 한 3년, 4년,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1년도 안 됐잖아요. 근데 만약에 5년 되고, 또 해서 6년 되고, 10년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현재 터키, 아프리카 북부나라, 아랍, 보통 몇 년씩 해요? 심지어 50년 한 사람도 있어요. 50년. 지도자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보다 뛰어난 지도자는 다 죽였어요. 그걸 금지할 법이 없어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존 롤스의 이론인데, 사회가 복지를 하되 어떤 순위로 하느냐 하면 어려운 사람들 순위로 피자를 자르자는 거예요. 어려운 사람들 순위로. 그러니까 강자가 처음 순위가 돼버리면 약자는 자기가 한 노동마저 강자의 횡포에 눌려서 다 빼앗기니까, 약자 순으로 피자를 3등분 할 때,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한테 그걸 자르게 하자는 말입니다. 전에 이건 한 건데, 마지막 먹는 사람이 3등분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나는 크게, 또 하나는 중간으로, 또 하나는 작게, 요렇게 자르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왜? 자기가 제일 마지막에 먹기 때문에, 제일 작은 것이 자기 몫이 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가장 똑같이 3등분을 나누는 거예요. 이렇게 하자고 하는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기게스 반지Gyges ring라는 것이 있어요. 옛날 신화에 반지를 돌려버리면 모습이 투명하게 되어서 안 보였다가, 다시 돌려버리면 원래 모습대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몰래 나쁜 짓 해놓고 안 한 것처럼, 정상인 행세 하는 사람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요. 우리 집에 있는 정원사 세 명도 가난하죠, 어제는 집에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나버렸어요.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식모가 일곱 명이 있는데, 일곱 명 다 가난해요. 선생님, 그래서 우리 집은 다 가난해요.” 순진한 초등학교 애가 가정환경을 밝히는데, 자기 집에 에스컬레이터 있고, 2층 이상 있다 이 말이죠. 정원사 3명이 있고, 식모가 7명이 있다고 다 알려줘요.
그래놓고 그 사람들이 다 가난하니까 나도 가난한 측에 속하는 게 맞다 이 말이죠. 부잔데 세금 안 내요. 낼 돈이 없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할래요? 그럴 때는 또 찾아내야 되겠죠. 찾아내려면, 그 찾아내는 과정에서 정말 가난한 사람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치안의 대상이 돼버려요.
왜 죄 짓습니까? 소소한 죄를 왜 짓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상식적인 것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어요. 이게 나쁜 짓인지, 좋은 짓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말하잖아요. 역시 인간도 잘 사는 집안의 인간이 인간성이 좋아요. 왜? 가졌으니까 배려심이 있어요. 아쉬운 게 없잖아요.
그러나 못 사는 애들은 이것 뺏기면 굶어죽으니까 눈에 핏발이 서요.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요.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가진 자들의 애들은 신발 하나 버려도, 줘도, 자기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돼도, 자기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요. 누가 성품이 좋습니까? 역시 부잣집 애가 성품이 좋아요. 강북보다 강남 애가 성품이 좋아요. 인간성도 좋아요. 여유가 있으니까. 사람에게 여유가 있다는 말은, 융통성이 많다는 것이고 용납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그게 안 되잖아요. 인간성도 날카로워요. 돈이 인간성을 만드는 세상이에요. 돈이. 따라서 좋은 집안에서 계속 좋은 사람이 나오죠. 좋다는 것은 그만큼 면접을 볼 때 유리하죠. 그러면 많은 자손을 가진 그 위에 계층은 점점 더 높아지겠죠. 뽑을 때 분명 착하고 능력이 있어서 뽑았는데, 뽑고 나서 보니까 이미 그 집안이 그 집안이라. 계급차가 확연하게 드러나죠.
그러면 이걸 완전히 혁명으로 뒤바꾸자고 하는데, 뒤바꾸면 나라 발전이 안 되는데요? 라오스 돼요. 라오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혁명을 일으켰죠. 배운 사람을 다 죽였잖아요. 200만 명이나 죽였잖아요. 나라꼴이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엉망진창 됐어요. 지옥 됐어요. 어디 아골 골짜기인가? 해골이 엄청나게 쌓여있죠. 얼마나 많은지.
네 번째가 바로 마이클 센델 교수가 주장한 거예요. 공동체 주의가 있습니다. 공동체 주의. 협의해서 하자는 거예요. 협의해서.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추구하는 거예요. 협의해서. 원자력 그만 두냐, 마냐를 협의해서 하자. 지금 이게 성경 말씀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인간의 모든 아이디어가 바로 적그리스도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자들을 거부하고 있는 악마적인 지혜라 이 말입니다.
공동체 주의가 뭐냐 하면, 협의를 하게 되면 최소한의 불평불만이 줄어들게 아니냐 이 말이죠. 협의했기 때문에. 이거는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미 주장한 거예요. 뭐든지 공론화하자. 이게 뭐냐, 대화중심이에요. 소통중심이에요. 소통을 어느 광장에서 하는데요? 그럼 그 대화할 때 순서를 누가 정하는데요? 그리고 모든 의제의 발제를 다 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니까 넣지 말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데요? 이거는 넣을만한 발제고, 저거는 빼야할 시답지 않는 발제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데요?
그거는 기존에 세력을 가진 자에게 있는 거예요. 공동체라고 해놓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또 하나의 특수 상위계층이 돼버리는 겁니다. 숫자 한 서너 명으로 공동체를 합니까? 서너 명이 해도 안 맞아요. 짬뽕 먹자, 간짜장 시키자, 탕수육 소자로 하자, 중자는 시켜야 된다, 대자로 하면 안 된다, 뭐 서너 명이 해도 안 돼요. 중국의 어느 목사님은 교인이 여덟 명인데, 여덟 명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리는 다 경험을 했답니다. 달랑 여덟 명이. 십일조니 당회장이니... 뭐,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나왔어요.
자, 그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액시던트accident,사고죠. 사고와 운명. 우리는 운명에 속했습니까? 아니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러한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러한 권한이 없어요. 왜? 모든 사고는 운명에서 주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면 권세는 뭘 위한 권세입니까? 내 사적인 사고를 방비하기 위한 권세자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손 떼라는 겁니다. “저, 경찰한테 맞았어요.” “잘 맞았어. 그러니까 떠나! 미련 갖지 말고.” “그거 제가 한 게 아닌데요?” 니가 했던 안 했던 간에 그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때리는 자도 주의 종이니까. 니도 때리면 맞아야 돼요.
자,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공경하고, 형제우애 있고, 어려운 사람들 잘 돌봐주고, 휴지도 줍고, 병자도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고, 자기 재주를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그 마을에서 너무나 사랑받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25년 노동형을 받았다. 죄목이 뭐냐 하면, 노동신문에 찍힌 김정은 사진이 바람에 날려 그 사람 구두를 덮은 거예요. 그걸 본 자들이 신고를 했어요. “더러운 신발에 사진을 덮다니! 25년형!”하고, 25년 형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억울합니까? 억울 안 합니까? 억울하다고요? 억울할 게 없어요. 태어나기가 속인주의에요. 속인주의가 뭐냐 하면 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그 나라 운명에 어쩔 수 없이 받도록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억울한 게 없어요. 왜? 우리는 날 때부터 죽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시지...아니, 니가 그런 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엄마, 아빠가 북한 사람이면 북한에서 태어나서, 바람이 잘못 불어서, 구두를 덮어 25년형을 받아야 돼요. 김정은 사진으로 신발을 덮었다고 그렇게 받아야 돼요. 아무리 착해도 소용이 없어요. 착하면 복 받는다고요? 아니에요.
인간은 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이라고 하지, 우리는 복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통령을 욕해도 잘 살잖아요? 욕해도 잘 사는데 이게 복이 아니고 뭡니까? 근데 지금 대한민국에 있으니까, 우리끼리니까 잘 살죠.
만약에 미국에 이민가게 되면, 더 잘 사는 나라에 가게 되면, 지금이 2017년도죠. 우리나라 2017년도 국민소득이 29,000불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년에 문재인이 죽어버리고, 갑자기 강호동이라는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때부터 국민소득이 140,000불이 됐습니다. 140,000불이 됐는데, 29.000불을 받으라고 하면 받겠습니까? 140,000불이 돼서 다 공짠데, 자기는 29,000불이었을 때, 그때가 좋았다고 해서 돈 안 내도되는 의료비, 50,000원을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당신은 왜 감기 걸려도, 암 걸려도 공짜로 받습니까? 그거는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운명. 내가 대통령을 잘 뽑은 게 아니에요. 우리한테 어떤 선택권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 우리는 운명을 크게 봅시다. 운명을 액시던트accident,사건으로, 그걸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 이 말이죠. 십자가사건으로 보자 이 말이죠. 십자가사건을 믿는 사람이 땅을 샀는데 백배나 올랐어요. 사건이죠.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사자성어로 ‘대박사건’입니다. 대박사건이죠.
대박사건으로 인해서 갑자기 땅값이 200억이 됐는데, 200억 돈 가지고 오다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대박사건이죠. 200억 돈 들고 오다가 차사고 나서 죽어버렸다 이 말이죠. 이것도 사건이죠. 200억 오를 때는 감사하다고 했다가, 그렇게 죽었다고 하필이면 나에게...하고. 이렇게 자기 맘대로 분리해서 괜찮은 고백을 할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냥 주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운명입니다. 왜? 어차피 이 땅은 떠나야 할 곳이에요. 어차피. 어떤 수모를 당하고, 어떤 사건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걸 사건이라고 보지 말고 말을 바꿉시다. 이건 운명이라고 보자 이 말입니다. 운명.
옛날에 군에 있었을 때 갈치국이 나왔어요. 취사병이 눈 감고 딴 짓하다가 상사한테 가야 될 갈치 큰 토막이 이등병한테 올 수가 있어요. 한 눈 팔아가지고. 그거는 운명이에요. 십자가는 아무도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한테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보호하는 그 권세자, 그리고 그 배후의 하나님, 나를 보호해주고 사고를 줄여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요.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게 이방종교, 이방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것은, 그거는 아무도 안 믿어요. 안 믿는데, 믿게 되었어요. 운명입니다. 그걸 창세전에 예정된 뜻이라고 해요. 따라서 그게 운명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입니까? 아닙니까? 아담의 자손이죠. 이것이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아직은 안 튀어나왔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장담 못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같은 아담이니까, 아담의 속성을 같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나오는데 나는 안 나온다는 이 말이 성립이 안 돼요.
그러나 그 나오는 타이밍은 운명적으로 튀어나와요. 운명적으로. 크레용팝이에요. 니 한 번 올라가면 나 한 번 내려가고...서로 다르게 점핑을 하죠. 운명적이에요. 그러니까 남 잘 된다고 부러워 할 필요가 없고, 남 못된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어요. 니는 니 역할을 하면 되고 나는 내 역할을 하면 돼요.
내 역할은 한 달 수입이 2,500이다. 그거 가지고 골프치고 여행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할에 제발 충실하세요. “주여! 오늘도 제 역할에 충실하게 해주시옵소서. 나이스 샷!” 왜? 그게 자기 운명이니까. 그것 가지고 자기 자랑하면 안 돼요. 그거는 교만이에요. 어떻게 그런 죄인에게 돈을 줄 수가 있어요? 이거는 죄인이지만 주시는 하나의 운명이니까.
그래서 부자가 어디에 가기 힘들다? 천국가기 힘들어요. 왜? 주제파악이 안 되니까. 돈에 눌려서 주제파악이 안 돼요. 그런데 그 부자도 천국 간 사람이 있습니다. ‘삭’씨 집안이에요. 삭개오. 같은 부잔데, 하나는 천국가고 하나는 지옥 갔잖아요. 부자청년은.
이제 주님께서 권세를 다루시는 이유를 알겠죠. 권세는 패는 겁니다. 니는 처음부터 죄인이라서 죄인을 패는데, 팸으로 말미암아 맞아도 합당하니이다, 라고 살면서 한 달 수입 700건지고, 골프 치면 돼요. 부자 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요. 부자 되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역시 부자가 인간성이 좋아요. 가난한 사람은 인간성이 날카로워요.
여기 3절에 보면 항목이 너무 잘 되어 있어요.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가난하다고,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오면서 술 한 잔 했어요. 이게 정욕이잖아요. 행락이고, 어리석은 거고.
그래놓고 나도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돈만 있으면 이렇게 안 한다고 해요. 이렇게 핑계를 대는데, 핑계대지 마세요. 그게 운명이라니까요. 내가 태어날 가정을 내가 골랐습니까? 운명이에요. 이걸 운명이라고 하니까 너무 이방종교인 용어가, 색채가 강하죠. 그러면 이렇게 하죠. 그게 예수님의 뜻입니다. 주의 뜻이에요. 범사에 감사하세요. 진작 죽어야 되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스데반 집사처럼 합류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이 주셨기 때문에, 성령은 뭔가 뒤에 로봇 팔이 있어가지고, 성령을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요. 환란, 고통이 와도 괜찮아요. 왜? 환란이나 고통이 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더욱더 확인되기 때문에, 환란, 고통이 당연히 일어나야 될 운명이고, 절차 같은 거예요. 환란이 인내를.....,
그래서 5절에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죠. 오직 그의 긍휼하심입니다. 긍휼하심. 긍휼하심이 원래 하나님의 의무에요. 은혜 줄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겨 준다고요. 출애굽기 33장에 나와 있단 말이죠.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란 말이죠. 자, 그 하나님보고 달라지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시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손 털어버립니다. 자꾸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세요.
긍휼을 받고 용서를 받았잖아요? 다 받았어요. 다 받은 거예요. 니 맘대로 사세요. 타고난 본성 가지고. 받을 것 다 챙겼다니까요. 용서 받았으면 죄가 없죠? 그거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받고도 용서를 못 받으면, 그 온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왜 사람이 엉터리 같은 짓을 하느냐 하면 소중한 것을 몰라서 그러고, 감사할 게 따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감사할 게. 감사할 게 없기 때문에 자기 쾌락을 감사하려고, 쾌락을 얻기 위해서, 쾌락 쪽으로 나가버린 거예요. 감사할 게 있는데, 그건 시시하다는 거예요. 내 즐거움이 나한테 자랑거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은 주 예수의 긍휼하심은 별로 돈도 안 되고, 시답지 않고, 주면 주고 말면 말라는 식이고, 나는 그게 행복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맴매해야죠. 누가요?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이웃들이 욕하고. 그럴 때 우리는 항의하지 말고 나의 팔자요, 운명이다. 감사하게도 주께서 그렇게 해주셨구나! 이게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입니까? 신앙생활이. 막사시되, 매로 때리면 맞으시고. 제가 막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꾸 뒤에 딴 걸 생각해요.
막살았는데 탈 없다. 자꾸 탈 없다는 걸로 연결시키지 말고요. 막사시고, 브레이크 고장 나서 차 박으시고, 편하게 다 망가지시고. 막사시는 것은 니 할 일이고, 때리는 것은 주께서 할 일이시고. 그래도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가지고 싱글벙글하시고. 그렇게 살면 될 것을,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자, 끝으로 이게 왜 이렇게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성경 볼 때에 이미 우리 속에 “나만 행복하면 되지.”라는 악마적인 부추김이, 악마가 그렇게 나에게 자꾸 설득시키고 몰아넣었어요. “다른 사람 좀 봐! 니는 별 거 아니야. 니도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지.”라고.
남들처럼 살고 싶은 그 욕망이,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죠. 자꾸 마귀가,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게 어쩔 수는 없으니까, 떠나요! 제주도로 떠나는 것은 아니고. 떠나요! 내가 손 댄 나라가 아닌 나라로 갑시다. 내가 환영받지 않는 나라로 갑시다. 나는 쪼다가 되어서 가는 나라!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되어서 가는 나라! 오늘 밤에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강도가 되어도 싱글벙글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예수님의 피 용서를 영원히 감사할 수 있고 고마워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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