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디도서9-죽음 저편에서 1709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1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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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1.188)17-09-14 21:59 
서울의존강의20170908a 디도서3장5절(죽음저편에서)-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꼭 구원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구원되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어요. 이 땅에서 잘 되기를 바랄뿐이죠. 잘 되기를. 잘 되기를 바라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것은,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겠죠. “나, 너 데려갈래.” “싫어요.” “가자!” “아뇨. 여기서 성공할래요.”라는 이런 속마음이 서로 상충되면서 다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되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기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메시아가 와서 일을 하되, 그 메시아가 하시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도 동조하거나 알아보지도 못하죠. 동조하지 않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그 메시아가 하는 일을 피해가죠. 피해가다 피해가다가 결국 못 피해가면 메시아를 떠밀어버리잖아요. 떠밀어도 말 안 들으면 채찍가지고 때려야 돼요. 

  

그럼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할 때에, 그 우리라는 것이 사전에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할 때, 그 우리라는 것은 구원받은 당사자들도 그 우리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몰라요. 의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각기 다 양 같아서, 다 개별자로 돌아서서 일하기 때문에. 개별자로. 개별자로 돌아서서 일한다는 말은 개인이 원해서 하는 겁니다. 개인이 원해서 하는 일들이에요. 개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에요.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기대와 상관없이 건지기 때문에, 모든 인간으로부터 구원은 기피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나름대로의 구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나름대로의.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계속해서 연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계속 이어져나가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구원의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본인이에요. 자기를 구원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줘야 하나님이 하나님답다는 생각을 본인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겁니까? 안 보이는 겁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알고 있는 거죠. 나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을 건져내라는 겁니다. 구원하려면. 그래야 우리가 동의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는 양말을 기워주려고 왔다고 할 때에, 멀쩡한 양말을 해가지고 이거 기워달라고 할 사람은 없죠. 빵꾸난 양말 기워달라고 한다 이 말이죠. 빵구난 양말. 근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가 미흡한지, 뭐가 빵꾸났는지, 뭐가 정상인지를 누가 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정해요. 본인이. 그래서 자기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자기가 자랑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건 구원되는데서 빼놓고, 자기가 미흡한 것은 구원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만족스럽게 완성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거죠. 기도. 애가 공부 잘 할 때는 주로 간절한 기도가 안 되죠. 쑥쑥 오를 때는. 근데 애가 갑자기 수능을 앞두고 당황한다고 할 때는, “걱정하지 마! 엄마가 기도해줄게.”라고 하면서, 애가 지금 당황하니까 평소 실력만 발휘하게 해달라고, 뭐 겸손한척 하면서 그런 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면 평소 실력이 뭐 150점이라면 만족하겠어요? 평소 실력대로 해달라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이거는 뭐냐 하면 평소에는 그렇게 간절하게 안 하고 건성으로 하다가 갑자기 간절하게 한다는 것은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 다급한 일, 그 아쉬운 일이 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그 구원의 상태에서 미흡하다는 겁니다. 근데 이 결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본인이 해요. 본인이 어떤 구원에 대해서 틀을 잡아놓고 하나님은 시다발이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 도와주시고 이것 보태주시면 아낌없이 순종하겠습니다. 충성하며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쉬울 것이 없으면 주님을 찾지 않겠죠. 교회에 나와도 그냥 오락삼아 나오겠죠. 오락삼아. 이 말은, “구원 필요 없습니다. 저한테는 그다지 구원이라는 게 중요하게 와 닿지 않습니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중에 구원이 다급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다급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몸이 아프다든지. 근데 병이 조금 나았다고 칩시다. 그럼 전에처럼 다급함이 유지가 되겠어요? 안 그러면 다급함이 사라지겠습니까? 이제 몸이 건강하니까 다급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사라졌잖아요. 그럼 주님은 그다지 중요한 분이 아니죠. 그럼 어디를 봐서 구원되는 겁니까? 도대체가? 그 사람은 구원이 된 거예요? 안 된 거예요? 안 된 거잖아요. 자기가 다급한 것은 해결했다 이 말이죠. 그럼 구원이 안 된 상태에요. 

  

주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요? 말은 잘 한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구원했는데? 주님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을 제공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는 것. 근데 인간은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 중요한 거거든요. 자기를 포함해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있는 것 건져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을 건져내는 겁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들은 다 거부합니다. 

  

왜? 있는 것들을 해놓으면 마치 자기 자신의 구원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합치됐다고 착각한다 이 말이죠. ‘내가 이렇게 아쉬운데 하나님께서 도와줬구나. 그렇지! 내가 아쉽다는 그 생각과 주님의 아쉬운 것과 합치가 됐어. 그렇지!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되었어.’ 이렇게 돼버려요. 

  

근데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 사울이었을 때에 그렇게 주님을 사모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 때, 예수님께 기도해서 잡아 죽였습니까? “주여, 오늘도 한 서너 마리 사냥하게 주옵소서.” 이렇게 해가지고 주님이 “오야, 인간 몇 명 필요하냐?” “예수님 열 명만 처리하게 해서 넘기게 하옵소서.” 뭐 이렇게 기도했습니까?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사울이라는 사람은 여호와께 기도했지, 주님 앞에 기도한 적 없죠. 

  

왜냐하면 있는 것을 구원해달라고, 있는 것을 협조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의 생각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된다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없는데, 그 사울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구원하잖아요. 사전에, 아마 이런 것이 구원될 거라는 모든 예상을 주께서는 비켜나가십니다. 빗나가게 해버려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죠. 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다수겠습니까? 의견이 일치된 거예요. 

  

그리고 좁은 길은 말이 좁은 길이지 거기는 찾는 이가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요. 없는데 있어요. 그러면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아이큐가 뛰어나고 영재기 때문에 그리로 간 겁니까? 좁은 길 자체가 없어요. 이 세상에 좁은 길 자체가. 길은 한 길 밖에 없어요. 멸망의 길 밖에는 없어요. 그러면 좁은 길이라고 주께서 언급하는 것은, 이거는 없는 길인데, 주께서 활동하시는 것에 따라서 이것이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거예요. 좁은 길이. 

  

그래서 거기에 가는 사람들은 본인 힘으로 덜렁덜렁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매 걸음마다 주께서 동행해서 가지 아니하면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도함이라고 합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 전체가 있는 것, 그리고 이미 가진 것, 눈에 보이는 것, 그것 구원해달라고 사울처럼 그렇게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죄”,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 죄가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 세상은 죄가 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죄 아래”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대는 죄 아래 있어요. 죄 아래 있으니까 죄 아닌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죄 아닌 게 없죠. 모조리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아래 있으니까. 이 세상이 죄 아래 있고 죄 아닌 게 없다는 것은, 유일하게 예수님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살해당해가지고 빠져나옴으로써,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악마이야기, 마귀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악마의 최종적인 목적이 뭐냐, 악마의 노림수가 뭐냐, 악마적인 모든 활동의 마지막 목표는 뭐냐, 이 땅에서 복음을 치워버리는 겁니다. 복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복음을 추방하는 겁니다. 복음을 내쫓는 거예요.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의 광채를 가려서 비취지 못하도록 이 세상 신이 지금 놉니까? 활동합니까? 활동하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을 보지 못하도록 활동하는 그 증거가 이 세상에 가득 차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수소폭탄 실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요? 그쪽에 가있죠. 성주 사람들은 사드배치 반대에 가 있죠. 지금 울산에 있는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소 더 짓느냐 마느냐에 가있죠. 지금 이게 복음이 아니잖아요. 복음에는 관심이 없죠.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수학참고서에 사탄이 나오느냐고 물었잖아요. 안 나오죠. 수학정석에 사탄이 안 나오죠. 뜨개질 교본서에 악마의 이야기 안 나오죠. 악마를 뜨개질하다, 뭐 그런 것이 안 나오잖아요. 

  

세상의 뉴스고, 방송이고, mbc파업이고 뭐고 전부 다 누가 배후에서 작용한 겁니까?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뭘 앞장세우기 위해서? 뭘 뒤로 빼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이 죄 속에 갇혀있다는 이것을, 복음이라는 이것을, 누가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는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이라는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고. 앞으로는 뭐냐 하면 11월 3-5일에 서울에서 나훈아 콘서트를 합니다. 대구는 12월 15-17일까지 하고. 부산에서는 11월 24-26일까지 하고. 

  

표는 12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나훈아가 아주 훌륭한 일을 합니다.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나훈아가 뭐 복음 간증집회 합니까? 아니잖아요. 복음 전하기 위해서 리사이틀 열지를 않죠. 이번 콘서트의 주제는 “복음이 무엇인가? 십자가가 무엇인가?”라고, 뭐 그런 것을 내걸었던가요? 아니죠.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게 아니고, 낙담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 신이, 악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해도 우리 관심사를 딴 데로, 복음 쪽으로 돌리기가 힘들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이 되죠. 만약에 직장에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이건 다급한 나의 문제잖아요. “직장에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마의 작전이라면? 순종해야죠. 뭐. 평소에 늘 순종한 것처럼 순종해야죠. 우리는 하루의 일상을 어디에 놀아나느냐 하면, 뭣에 울고 뭣에 웃느냐 하면은, 악마가 우리를 밀고 땡기고 하는 것에 우리는 웃었고 울었던 겁니다. 

  

이미 우리의 몸과 정신 자체가 악마의 하는 모든 일에 같이 파도를 타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익숙해졌으니까. 그게 우리에게 뭘 제공하느냐 하면, 이 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행복을 제공해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라고 찬송가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저는 살짝 그 찬송가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너무 초반에 결론부터 내려서 문제에요. 우리는 이런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 라고 되어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가장 궁극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의 행복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편해지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남자한테 인정받는 존재가 되느냐, 나와 그리고 내 가족이. 남한테 어떻게 하면 내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평소에 우리의 행복의 요건이 되었어요.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죄에서, 죄라는 말은 뭐라고요? 결국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죄거든요. 죄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나의 행복을 걷어차고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서 나의 행복도 아낌없이 걷어찼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들겠습니까? 안 들겠습니까? 

  

내가 없는 그러한 상태를 우리들이 원할까요? 원하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데서 피해라. 내가 원하는데서 피해야 돼요. 내가 설정해놓은 목적, 목표가 있잖아요. 거기에서 도망치세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내 목적과 목표는 그 틈 사이가 전부 다 나의 상상력으로 메워집니다. 그 상상력은 우리가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해요. 의지를 부여해요. 

  

근데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렇게 이야기했죠. 성도는 용기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해석으로 산다고 했잖아요. 해석으로. 제가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용기에 대해서는 구원과 상관없는, 내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해서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연속적이라고 했죠. 자기의 꿈이 계속해서 연속되죠.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상상과 이게 연속된다 이 말이죠. 연속돼요. 

  

이거는 누가 와서 건지는 것이 아니에요. 꾸준한 것이지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하다보면 무슨 일이 나겠지, 뭐가 되기는 되겠지, 구원이 되기는 되겠지, 이렇게 계속 연속, 연속이 되는 거예요. 천로역정처럼. 어떤 계단을 타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어질 때마다 누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해주겠어요? 내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힘내라! 힘!” 자꾸 용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하잖아요. 

  

그럼 누가 강화가 됩니까? 누구 의식이? 내 의식이 강화가 되죠. 더 굳어지겠죠. 따라서 나로부터의 구원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나로부터의 구원이. 그동안 구원받으려고 애썼는데 그걸 아까워서 어떻게 놓아요. 아까워서. 거기에 들어간 밑천이 얼마고 시간이 얼만데. 성경 백독한 그것이 아깝잖아요. 그런데 성경 백독을 해도 결과적으로 강화된 것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나” 헌금을 해도 “나” 전도 선교를 해도 “나” 

  

결국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완벽하게 거짓말이고,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에 나는 예수님을 원한다고 했죠. 그 나의 원함에서 우리는 피해버려야 해요.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것에서 피해야 될 이유가, 그 원함의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거는 구원이 될 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왜? 나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죄 아래에 속했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내 뒤에 악마가 나를 쫓아와가지고 악마가 천국에 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놔라 이거!”해도 안 놓습니다. 악마가 내 허리끈 쥐고 같이 쫓아 들어와요. 왜냐하면 나는 악마의 작품이기 때문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습관화했고, 나의 몸의 자연스러움은 다 내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되도록, 생각과 정신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요. 누가 나에게 그런 정신을 심어줬습니까? 누굽니까? 악마잖아요. 죄 아래.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 아래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 없다?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없잖아요. 그럼 예수님 빼놓고 없다면, 모조리 다 죄 아래 있다면, 죄 아래 있는 것들이 요구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죄 아래 있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죄가 무엇이냐? 라고 그렇게 물을 게 아니고요.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봐야 해요. 

  

제가 질문할게요. 모든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자,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 하나님 빼놓고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죠. 죄 아래 다 묶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죄 밖에, 주님 말고, 성부성자성령 말고, 죄 아래 있으면서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이거는 질문 자체가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죠. 답이 있습니다. 알려드려요? 죄 아래 있으면서 죄 아닌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파국”입니다. 모든 게 다 무너지고 깨지는 겁니다. 파국인데, 이 파국을 다른 말로 합시다. “죽음저편” 죽고 심판 이후의 저편. 이게 죄 아닌 겁니다. 캘거리 강의에서 제가 이것을 소개한 기억이 나요.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을 죽음으로 봤을 때 거기서 빠져나온 상태가 부활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이 땅에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이 땅에 성령을 보냈습니다. 

  

본문 디도서 3장 5절 끝에 보면,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죠. 성령의 새롭게 하심. 성령이 본격적으로 성도에게, 또는 사도들에게 온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본격적으로 오셨잖아요. 이방인에게로, 유대인에게로 왔죠. 

  

그런데 성령이 왜 오셔야 되죠? 성령이 왜 오셔야 되느냐? 성령이 오셔야 될 이유는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예요. 자기백성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 말이 맞는다면,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구원될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구원이 된 상황이라면 자기 의로운 행함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의 오심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의 오심으로 구원되죠. 그러면 자기의 의로운 행함은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이건 아무 쓸모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 죄 아래에서 빠져나오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죠. 

  

우리의 의로운 행함 더하기(+) 성령의 오심. 이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까? 아니죠.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성령의 오심 더하기(+) 의로운 행함. 이래서 구원되는 겁니까? 아니죠. 그럼 한국교회는 왜 그래요? 미쳤어요? 왜 성령의 오심으로 안 되고 의로운 행위를 거기다가 플러스(+)시키는 겁니까? 의로운 행함으로가 아니라는 이 말은, 의로운 행함과 성령이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 성질이다? 없는 성질이다? 없는 성질이죠. 없는 성질이라면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뭘 핍박하겠습니까? 의로운 행함이라는 의식을 핍박하고 그걸 인정치 않겠죠. 그렇잖아요? 

  

사도바울이 의로운 행함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까? 인간의 구원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라고 했죠.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 그렇죠. 그러면 우리가 뭘 분석해야 하느냐 하면, 의로운 행함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뭘 놓치면 안 돼요? 도대체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가 뭔지를 우리는 이걸 조사를 해봐야 돼요. 조사를.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 뭔지 이걸 조사를 해봐야 한다고요. 

  

그럼 조사를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의 성령이 오기 전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 상태로. 그럼 성령이 오시기 전이니까 성령이 안 왔습니다. 안 왔으면 거기에는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누가 지배하고 있어요? 악마가 지배하고 있겠죠. 그러면 의로운 행위라는 것은 결국은 누구의 작품이냐 하면 악마의 작품이죠.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니까. 악마가 의로운 행위를 왜 장려합니까? 윤리도덕을 왜 장려합니까? 제가 아까 했잖아요. 악마가 하는 일에 노림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라고 했죠? 어쨌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가리는 역할을 하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 행하심과 일하심을 가려버리면, 가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중요한 게?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죠. 그럼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것이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행함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시 여기겠죠. 자시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중요시 여기는데, 자기가 나쁜 짓 한 것을 중요시 여기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을 중요시 여기겠습니까? 의로운 행동 한 것을 중요시 여기겠죠.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 중요한 것이 결국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자기 자신을 천국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반드시 생각하겠죠. 난 이정도로 열심히 했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기 전에 안양에서 공부를 했는데, 안양 공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양量이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을 양으로 측정한다고 했습니다. 선한 행동을 한 양이 많은가, 악한 행동을 한 양이 많은가. 그게 인간의 존재가 수립되게 되면 반드시 존재 안에는 양적으로 선과 악을 양분하게 되고 배분하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이야기하고 같이 통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될 게 무슨 작업이냐 하면, 인간의 의로운 행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성령이 오기 전입니다. 악마와 죄의 통치아래에서 인간은 자기의 의로운 행동을 왜 만들고자 하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그것까지 알아야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를,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뜻이 어느 정도 윤곽으로 드러나겠죠. 인간은 왜 의롭게 살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왜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정치적 정의를 부르짖고, 심지어 깡패세계에서도 의리를 찾고, 의리! 의리! 의리를 찾는 이유가 도대체 뭐냔 말입니다. 

  

그게 누구의 마음을 닮아서 그런가 하냐면, 악마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악마의 마음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악마의 마음을. 자, 악마가 예수님하고 만났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예수님하고 만났다고 할 때, 뭐 추상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을 만난 것도 되지만, 악마의 앞잡이가 있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규정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참 자주 만났죠. 

  

자주 만났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9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당신이 병 고치는 것은 봐줄게. 병 고치는 것은 봐주는데, 죄 사함 받았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고 했어요. 중풍병자 고칠 때. 왜냐하면 죄 사함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죄를 사하는 그러한 권세. 이 권세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단정 짓는 것을 말하거든요. “니 죄 없어! 니는 죄가 없는 걸로 확정되었어!”라고 언도하는 것. 판정내리는 겁니다. 

  

죄 없다고 판정내리는 것은, 그건 누구의 몫이냐 하면 하나님 몫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그건 언제 판정내리는 것이냐 하면 이 시대가 끝났을 때, 마지막 심판할 때, 의인과 죄인을 심판할 때, 그때 판정을 받는다는 거예요. 마지막 끝났을 때. 그러면 그 판정 기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들고 나오죠. 그 율법이 뭐냐 하면 모세율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생각은 굉장히 간단해요. 

  

하나님과 독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세죠. 모세가 하나님께 뭘 받아왔습니까? 자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뭔가 모세에게 넘겨준 게 있죠. 십계명이죠. 십계명만 줬습니까? 막 여러 가지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누구한테 줬습니까? 육적인 아브라함 혈통한테 줬죠. 그걸 이스라엘이라고 하죠. 이스라엘한테 줬잖아요. 그러면 이제 갖출 것 다 갖춘 거예요. 위에 하나님 계시고, 중간에 모세 있고, 그 아래 우리 있고. 율법을 받았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데에 있어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이제 모든 조건은 다 구비된 거예요. 거기다가 신명기 28장에서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니까, 이건 복 아니면 저주잖아요. 복 아니면 저주죠. 뭐, 다른 요건이 없죠. 율법 지키면 천국가고, 율법 못 지키면 뭐 지옥 간다. 쉽게 풀이하면 이거잖아요. 

  

이러한 정리된 것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뭔가 하자가 있다고,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걸 필요조차가 없죠. 필요조차도. 근데 사도바울과 선지자는,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가 구약을 쭉 설교한 내용이 나와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거기에 보면 모세가 율법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율법 받았다. 그래서 이걸로 족하다. 이제는 다른 것이 더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스데반 집사는 이야기합니다. “너는 왜 모세 같은 선지자만 말하느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주셨다는 것을 왜 빼먹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7장 52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너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래 되어 있죠. 여기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구약을 쭉 언급하면서 주로 어느 대목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광야에서 모세하고 다투었던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해요. 쭉 모세이야기를 하면서, 그 모세가 뭐라고 예언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7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뭐하고 했느냐 하면, 나 같은 자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구약보기는 뭐냐 하면 선이 단선이 아니고 선이 이중선이에요. 율법은 뭐하라고 준 거다? 율법대로 살았다고 우기는 너희들은 항상 율법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종족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오실 분은, 율법을 지킨다는 너희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도, 민족도 아니라는 겁니다. 선지자 노선이 따로 존재해가지고, 그 선지자들이 오면 죽임을 당하고, 오면 죽임을 당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세운 선지자, 모세가 이야기한 선지자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거예요. 

  

근데 그 뒤에 41절을 쭉 보게 되면 광야에서 너희들이 우상을 섬겼다고 해놓고, 광야이야기가 길어요. 거의 태반이 광야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46절에 보면 다윗 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잖아요. 49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라고 해서 성전에 집착하고 있는 이것조차도 결국은 너희들이 구원되는 조건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인간이 지은 집에 나는 있지 않겠다고 하나님 쪽에서 선언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그냥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해요.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 모세, 율법 지키면 된다. 이걸로 끝이라고 하는데, 근데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다른 노선을 빼먹었다는 겁니다. 그 다른 노선이 뭐냐, 모세 예언에 의한 선지자 노선을 빼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 노선에 대해서 반기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데, 그러나 반길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율법을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위반한 자가 선지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어요? 못 알아보죠. 율법에 실패한 자가 선지자 앞에서는 성공한 자라는 그런 건 없어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을 앞장세워가지고, 그 뒤에 사도바울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이야기하면서 너희들은 오는 선지자들을 죽였으니까,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그것은 거짓이고 무효화 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16절에 보면,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쭉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쭉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바울의 초점이 뭐냐 하면 33절에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시편 2편을 인용합니다. 또 34절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라고 되어 있죠. 

  

다윗과 비교해서, 다윗은 죽어서 시체로 썩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절,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9절에,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라고 하면서 또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언급하죠. 

  

그 전에, 사도바울이 설교하기 전에 베드로가 설교한 것이 있어요. 거기에도 시편 2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스데반 집사이야기, 설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라는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죠. 결국 이 말은 율법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하면은, 오실 선지자를 살해해버렸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살해했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그 오만함이, 우리의 행함으로 의로운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그 오만함이 선지자를,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목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그 사실을 감추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인간들 그 배후에는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악마가 사주한 거예요. 그럼 인간들은 악마가 사주했다는 것을,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인정 하겠습니까? 인정 안 하겠습니까? 인정을 안 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마지막 의식은 본인이에요. 자아입니다. 자아, 자기 자신, 셀프self죠. 자기 자신이 마지막이에요. 나를 아무리 파 봐도, 파 내려간 그 현장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에요. 본인. 자기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악마의 모든 시도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놓습니다. 다시 합시다. 아비가 악마인 자들은 누굽니까?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누가 전달하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 겁니까? 악마가 전달하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내뱉는 거죠. 그 바리새인들이 추구한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죠. 누가? 자기 자신이. 그럴 때 뭐가 쌓인다? 자기 의로움이 구축이 되고, 그걸 자기 안이라는 깊숙한 창고에다 저장을 하겠죠. 저장하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의 존재가 먼저 되게 되면 퀄리티quality,질이 아니고, 퀀티티quantity,양으로, 양적으로, 옳은 일과 나쁜 일을 배분한다고 했죠. 

  

내가 잘한 의로운 일과 나쁜 일을 항상 배분을 해서, 잘한 게 많으면 자기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안정권이라 해서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고, 못한 게 많으면 벌벌 떠는 거예요. “경찰이다!”라고 하면 별 일이 없는 사람은 안 떠는데, 꼭 뭔가 켕기는 사람은 벌벌 떨죠. 피해버리고. 그 말은 뭐에요? 평소의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의 정신을 완전히 해부해보면 거기에는 뭐가 들어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고 결정한 그것이 그 사람의 서랍에 들어있어요. 마지막 금고에. 왼쪽으로36 오른쪽70 띠리릭 열면 그 안에 자기의가 들어있다니까요. 자기의가.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으라고 배후에서 부추긴 그 행위가, 악마는 악마의 일로 드러나는 것을 무서워해서 그걸 정당한 일로 간주하는 존재로서 악마가 인간을 자꾸 자기 앞에 내세우는 거예요. “이왕 따먹은 것 어쩌란 말인가?” 그거부터 정당화한다는 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너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고집하는 거예요. “선악을 알았다면, 이왕 안 것 할 수 없지. 착해라.” 그래서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다는 그 자체가 천국에 올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겁니다. 

  

왜? 처음에 인간을 그런 식으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 만들 때 선악을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어놨지, 알게 한 것은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마귀가 만든 인간을 구원한다면 마귀도 뒤따라서 나도 넣어달라고 따라 올 게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은 선과 악에 의해서, 양심에 받쳐서 자살한 거예요. 양심이 없었으면 자살 안 했습니다. 내가 나쁜 짓 했다고 자살 한 거예요. 나쁜 짓 했다고.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80을 살지 90을 살지 모르겠지만, 살 때까지 이 본성은 자기 삶의 용기에 딱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자진해서 이걸 철회할 마음이 없어요. 이걸 철회해버리면 내가 계속 살 이유가 없는데요? 제가 몇 주 전에 설교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발 정신줄 좀 놓으라고. 정신줄 놓으라고 했죠. 그게 사랑이라고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선과 악을 따지겠습니까? 사랑 안 하니까 내가 가방 사준 것 다 내놓으라고 하죠. 중국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겁니다. 여자가 삐딱해져 헤어지려고 하니까 남자가 “내가 사준 가방 내놓아! 내가 사준 그 입은 옷 다 다 돌려 도!” 그러니까 여자가 화가 나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홀딱 벗고 “자! 가져가서 다 묵으라!” 속옷까지 다 돌려주고 혼자서 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러니까 그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선물들은 하나의 미끼로 던진 거죠. 낚싯밥을 던진 것이지 사랑한 게 아닙니다. 저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걸은 거예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빙자해서.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로 그 정신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었어요. 예수를 사랑해도 날 사랑하도록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말씀은, 그거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우리의 행함과 의로움으로 말미암지 않고, 이 자체가 우리의 행함과 의를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이 낯선 이야기가 돼버려요. 그 뒤에 있는 말씀, 오직 그의 긍휼하심에 자꾸 눈독들이지 마세요. 의로운 행위로는 안 된다는 거기에 먼저 수용되지 아니하면 그 뒤에 것도 전부 다 빈말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불가능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는가는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 (IP:122.♡.181.188)17-09-14 22:00 
서울의존강의20170908b 디도서3장5절(죽음저편에서)-이 근호 목사 

의로운 행위를 했다면 반드시 그 행위를 한 주체가 있을 거죠. 자기가 의로운 행동을 해놓고 남한테 그걸 빌려주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만약에 빌려준다면 그것조차도 의로운 행동이 되기 때문에. “내 의가 이렇게 나한테 많이 남아있으니까 니가 좀 모자란데 내가 빌려줄게.”라고 하는 이것은 누가 누구한테 할 수 있는가 하면, 엄마가 평소에 열심히 교회 다녔는데 애들은 농땡이를 쳤다 이 말이죠. 

근데 심판 날이 왔다. 그러면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쌓아놓은 자기 공덕이 있겠죠. 공덕이. 뭐 교회든 불교든 똑같으니까. 공덕이 있으니까 그 공덕을 자식 셋한테 골고루 나누어주는 거예요. 그 자식들이 나쁜 짓 한 양보다 더 많은 의로운 짓을 해줘가지고 나중에 계산할 대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약간이라도 남으면 자기 자식들을 천국에서 다시 모아가지고 한 가족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계산이 되죠. 뭐든지 질적인 것이 아니고 양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의로운 행동은 결국 누구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바로 행동한 본인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죄 아닌 것이 뭐냐고 했죠. 죄 아닌 것은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크게 썼죠? 파국이죠. 심판이죠. 죽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가 주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었잖아요. 세리가. 세리를 한 번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일단 세리가 죽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까 천국 갔을 것이 아닙니까? 천국 갔습니다. 천국 갔는데 다시 와보는 거예요. 이미 천국 갔는데 가상으로 한 번 와봤다고 칩시다. 

왔을 때, 세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이미 죽었다가, 이미 합격되고 난 뒤에 왔을 때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까? 자, 재수생이 대성학원에서 공부해가지고 서울대학교에 합격 했어요. 합격하고 난 뒤에 몰래 재수생 신분으로 속여가지고 대성학원에 다시 등록했다고 칩시다. 뭐 바쁜데, 그것까지 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대성학원에서 친구들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합격된다고 하겠죠. 그게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이 구원되지 않더라도 이미 죽음 이후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아직 늙어 안 죽었는데 이미 죽었다고 판정을 내려버리는 거예요. 죽었다고 판정내리고, 이제 니가 사는 것이 아니고 니 안에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버리면 그 사람은 죽음 이후에서, 저편에서 파견근무 나온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만이 죄가 아닌 겁니다. 그걸 의인이라고 해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 돼버려요. 

의인 돼버리면 그 의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내느냐 하면, 마태복음 8장 21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제자 중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제자 중에서 막 갈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분이 있나 보죠.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 제자에 대해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제자는 죽은 자 부류에 속한다? 안 속한다? 이 제자, 따라가야 될 이 제자는 예수님이 규정한 죽은 부류에 해당이 되는 사람입니까? 안 되는 사람입니까? 죽은 자들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 너라고 지칭되는 그 제자는 죽은 자에 해당이 됩니까? 죽지 않은 자에 해당이 됩니까? 죽지 않은 자에 해당이 되죠. 그럴 경우에만 니가 예수의 제자의 의미를 안다는 거예요. 지금 안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들었던 모든 말씀의 해석을 다시 하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 해석을 다시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내가 아버지하고 나 사이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아버지는 얼마 전에 아버지였고 나는 자식이었다는, 아버지와 나라는 부자관계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개입되게 되면 그 관계가 무효화 돼요. 부부사이도. 부모자식사이도. 이 땅에서 구성된 모든 관계는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나라는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요. 

그러면 이쪽 땅의 세계에서 육적인 관계는 뭐냐, 죄 지으라고 만들어놓은 관계에요. 죄 지으라고. 부부사이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 된 자는 이러이러해야 되고. 아내 된 자는 이러이러해야 된다. 그 조항 아시죠?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 이것 못 지킬 것 같으면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다 결혼 안 할 사람들이에요. 결혼해서 지키겠습니다, 라고 할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거는 딱 보면 지킬 사항이 아닌 거예요. 우리의 의로운 행위의 행함을 초월한다는 것을 딱 보면 알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결혼시켜놓고, 결혼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아내는 이렇게 하고 남편은 이렇게 하라고 이 말씀을 밀어붙여버리면, 결혼 안 한 사람 말고 결혼 한 사람으로서 추가적인 법을 지킬 의무가 생겨버리죠. 추가적으로. 이미 기혼자라는 이유 때문에 아내에게 목숨을 바쳐버려야 돼요. 서로 사귄다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결혼하고 난 뒤에는 목숨을 바쳐야 된다 이 말이죠. 

어디 무서워서 결혼 하겠어요? 차라리 김국진하고 강수지처럼 그냥 서로 사귀기만 하고 좋아만 하고 결혼 안 하면 얼마나 편리합니까? 진미령이하고 전유성이처럼 혼인신고도 안 하고 살다가 헤어질 때 깔끔하게 헤어졌잖아요. 혼인신고를 해야 뭐 복잡하지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그게 뭐 하나의 대안인가? 그게 대안일 수 있어요. 

모든 성경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니가 왜 죄 아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준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도 율법적 기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따라서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할 때, 너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처음부터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올 때는 장차 죽었다가 다시 파견되는 그 모습을 염두 해두고 말씀을 내뱉은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 얽히고설킨 그 놈의 관계들 때문에. 관계와 관계의 범람. 얽히고설킴. 이거하면 이 사람이 걸리고 저거하고 저 사람이 걸리고. 큰 애한테 뭐 주면 둘째 애가 화내고, 둘째 애 주면 큰 애가 화내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애를 잘 키웠다고 할 수 있을지. 부모입장에서는 잘 키웠다고 했지만, 나중에 자식한테 물어보면 각자 부모한테 불만요소가 많고 그 불만요소를 들어보면 전부 다 자기위주라. “어머님. 나한테 너무 섭섭하게 했습니다. 왜 저한테는 찐빵을 따뜻한 거 안 주고 찬 거 줬습니까?” 그게 트라우마가 돼가지고 나중에 나이 50될 때까지도 계속 불만이 있어요. 

인간은 특이하지 않습니다. 왜 특이하지 않느냐 하면 인간의 그 관계라는 것 때문에 독단적인, 독자적인 인간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 아버지가 누구냐? 목수의 아들이다. 여기에도 관계가 있잖아요. 특이하지 않죠. 예수 그리스도는 특이하지 않아요. 왜? 자기 아버지가 목수 요셉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있다 이 말이죠. 특이한 사람은 멜기세덱이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예수님은 자기 동생들도 있고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는데, 그게 무슨 특이성, 특이한 존재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자꾸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고 이러니까, 목수 요셉이라는 아버지가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하늘에 있다고 하느냐 이 말이죠. 못 알아듣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모든 죄 아래 있는 것에서 벗어나고 난 뒤에, 다시 죄 아래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관계성을 눈치 채지 못하고 못 알아보는 겁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아무리 철학박사고 과학박사고, 아무리 연구해도 인간은 자기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안 죽어봤으니까. 저 사람 내 동생들이고 저 사람 내 모친이다. “예수님 저 바깥에 동생들과 엄마가 와 있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인데?” 괜히 칭찬받으려고 한 소리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어요. 누가 내 동생들이고 내 모친인데? 듣는 모친 정말 기분 나쁘겠어요. 아이고, 키워주니까 아무 소용도 없다고 이러지 않겠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기존의 모든 관계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에. 아버지아들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니 아버지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모든 육적인 관계가 우선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육적인 관계에 얽히고설키는 것은 죽음이후의 세상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파견근무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의 이유 말고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복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갈라서자고 하면 갈라서버려라. 성도는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럼 복음이라는 이유가 뭐냐, 바로 성령이 임했죠. 그럼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결국 뭘 주겠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 모든 관계로 인하여 주께서 너를 이미 심판했다는 거예요. 

그럼 이미 심판했다면 죄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는 두 번 다시 처벌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죽은 놈한테 무슨 저주를 해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이중처벌 없습니다. 하나의 범죄에 대해서 이중으로 처벌하지 않아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 그럼 내 맘대로 살면 되네요? 라고 하면 안 돼요. 

왜? “나”가 죽었다니까요. “나” 나 자체가 죽었는데 어떻게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겁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막 사는 것이 되지만, 내가 그걸 의도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나 이제 막살아보자!” “니 죽었어!” 죽은 놈이 뭐 막사는 것이 있어요? 죽은 놈이? 죽은 인간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계속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고 어떤 일을 조성하게 되면, 이거는 본인이 막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막사는 것이 되냐면 주님이 이 땅을 막사는 것이 돼요. 

그래서 나는 막살았다가 아니라 주께서 막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막살게 하셨어요. 막살게. 그러니까 책임은 나한테 묻지 말고 물으려거든 주님한테 책임을 물라 이 말이죠. 주님이 막살게 했기 때문에 이거는 뭐에서 벗어나느냐 하면 모든 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어떤 노인네가 엎어졌다, 엎어졌는데 일어날 힘이 없다, 그래서 내가 그 노인네를 일으켜 세워서 병원에 데려가 그 노인을 잘 치료해서 보냈다, 그럴 때 남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김집사님 착한일 했네요.” “에이, 너 지옥가거라. 이게 어떻게 내가 한 착한일이냐? 니 눈에는 내가 한 그것밖에 안 보이지?”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얼마나 착한일 했습니까? 근데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니들 눈에는 우리가 한 것으로 보이느냐? 하여튼 너희들 생긴 대로 논다고, 평소에 자기들 의로운 행위에 신경쓰다보니까 베드로와 요한에게 일어난 일도 평소에 내가 한 일과 같겠지, 라고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해서 말한 거예요.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 사람을 걷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주께서 주신 믿음이, 그 사람에게 주신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걷게 했느니라.” 근데 이 말을 듣는 그 사람이 이해했겠어요? 이해 못했겠어요? 이해 못하죠. 왜? 죽음 이후의 사람이 아니고, 지금 죽음 직전에 죽음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말들이, 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들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자, 이제 생각해봅시다. 성령이 뭐냐, 성령은 언제 오시느냐 하면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 와요. 다른 보혜사. 그럼 성령이 다른 보혜사라고 하면 2차적 보혜사인데, 그럼 1차적 보혜사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보혜사에요.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중보자로 오시고, 다음 두 번째 보혜사가 누구냐 하면 성령님이십니다. 

근데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다가 자기를 보태지 않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에 자기를 보태버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돼버려요. 일은 계속되면서도 다 이루었다는 것에 손상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어떤 나이트클럽에서 유명한 가수가 와서 공연을 한다. 유명한 가수가. 그럼 노래는 그 유명한 가수가 하겠죠. 그럼 관중들은 뭘 보러 옵니까? 그 유명한 가수를 보러 오잖아요. 그럼 거기에 있는 나이트클럽 직원들은 할 일이 뭐예요? 

그 유명한 가수가 노래 부르고 난 뒤에 자기들이 노래하나 더 부르고 이래야 됩니까? 아니죠. 그럼 노래 부르는데서 빠져야 되겠죠. 노래 부르는 것은 그 가수가 다 하고, 직원들은 앞장서서 그 가수가 오기 전에 홍보를 해야 되죠. 홍보할 때 자기 자랑합니까? 나 노래 잘한다고 자기 자랑합니까? 나도 노래 한 가닥 한다고 자기 자랑합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이 총각! 노래 잘해?” “나 노래 못해요.” “근데 왜 홍보해?” “내가 노래합니까? 저 분이 노래하죠.”하고 그 분 자랑한다 이 말이죠. 제가 예를 든 게 약간 천박하지만, 실감나잖아요? 

소위 말하는 그 보이들, 웨이터들이 할 일이 뭐예요? “이번에 정말 대박친 가수가 왔습니다.” 그 자랑하잖아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뭐냐, 누구의 증인이 돼요?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마치고 온 가수,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잖아요. 누가요? 성령 받은 사람이. 그럼 성령 받은 사람한테 당신은 왜 당신을 증거 하지 않느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나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는 죽을만해서 죽었다고요. 죽을 이유가 있어서 죽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의로운 행위를 주장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 다닌 자랑, 헌금한 자랑, 기도한 자랑,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한다는 자랑, 그 의로운 행위 때문에 죽은 거란 말이죠. 따라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바울에게 당신은 왜 당신을 증거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나의 의로운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증거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겠죠. 맨날 나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고, 그걸 과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를 집어넣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걸 집어넣지 않으면 주의 증인이 안 돼요.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이걸 집어넣어야 한다 이 말이죠. 아까 처음에 했던 강의 다시 해볼까요? 성령과 의로운 행위가 이게 같이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대립이 되지 연결이 안 되죠. 성령이 오기 전에 의로운 행위로 구원이 안 되죠. 

그럼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의로운 행위로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구원이 안 되죠. 성령 받았으니까 의로운 행위 하라는 말이 이게 성립이 돼요? 안 돼요? 이건 완전히 사기죠. 사기. 그럼 성령 받고 난 뒤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삽입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같이 들어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의로운 행위를 사람들이 왜 추구하느냐 하면, 누구 좋아라고 추구하느냐 하면,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의 주인공이 있을 거죠. 주인공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나. 나니까 내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 우리 기억의 창고에 더욱더 깊숙하게 저장해놓는 거예요. 사람이 착한 일하고 놀라운 일을 하게 되면 그걸 잊을 수가 있습니까? 이거 복 받을까 하고 계속해서 간증하고 자랑질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자랑거리가 뭐예요? 나쁜 것 자랑하는 것 봤습니까? 세상에 나쁜 짓 자랑하는 것 봤어요? 잘한 짓 자랑하잖아요. 잘한 짓. 나쁜 짓 했더라도 회개했다고 그거 자랑하잖아요. 회개했다는 그거 자랑하잖아요. 그렇죠. 그럼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라고 했을 때, 의로운 행위를 왜 했느냐 하면 이게 자기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자기의 라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악마가 예수님 만날 때 악마의 자기본색이 드러나죠. 뭐냐 하면 나는 내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는다, 라는 말을 바리새인을 앞장세워서 예수님 앞에서 마귀가 그런 말을 했죠. 기억이 안 나면 다시 합시다. “당신은 병만 고쳐. 죄 용서는 당신 소관이 아니야.”라고 마귀가 예수님을 떠밀어낸다니까요. “중풍 병이나 낫게 해라. 니가 죄 용서 했다는 말은 입에서 내지마라. 왜냐하면 당신이 죄 용서를 하게 되면 당신이 하나님이 되잖아.” 

원래 공식이 죄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당신이 죄 용서 해버리면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느냐, 율법대로 지켜서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받아칩니까? 그러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럼 죄인 되면 구원받습니까? 죄인 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이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이 되어서 주님이 용서한 자만 구원이 돼요. 그러면 의인이 돼도 구원 못 받고, 죄인 돼도 주께서 용서할 마음이 없으면 구원 못 받고.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용서 받을 길은 완전히 차단된 거죠. 주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죄 아래서 모든 것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니가 죽어도 마땅하고 지옥가도 마땅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의로운 행위가 소용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 의로운 행위를 생각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랑질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지옥 갈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지옥 갈 빌미가 된다는 겁니다. 지옥 가야 될 우리를, 저주받아야 될 우리를 주께서는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일방적인 선언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 중생의 씻음, 다시 거듭났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성령을 안 받고 누가 믿습니까? 인간은 한 고집들을 하는데? 찬찬히 한 번 따져봅시다. 인간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 의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럼 자기 의가 있으면 어떤 점이 유리하다고 보는 겁니까? 이 의라는 것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가 의인이 될 경우에는 복이 오겠어요? 저주가 오겠어요? 복이 오겠죠. 복이. 복이 온다고 생각하고 내 복은 나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직장생활 잘하고, 가정생활 잘하고, 이만큼 사는 것은 내가 그만큼 쌓아놓은 의로운 행동을 밑천으로 주께서 복 줬다고 해서 의로운 행동과 복을 이퀄(=)시키잖아요. 

이 복을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앞에 글자 하나 집어넣었죠. 뭡니까? 행복이죠. 행복.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그냥 복하면 재물이 늘어나는 것이 될 수 있는데, 재물이 늘어나도 행복하지 않잖아요. 궁극적으로 재물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죠. 그냥 이유 없이 편안하고 이유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 그걸 원하는 거예요. 인간이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무조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저주를 받았든 뭐든 그냥 행복 하고 싶어 해요. 심지어 지옥가도 약간 덜 뜨거운데, 시원한 바람이 부는데 거기에 가고 싶어요. 왜? 그게 행복하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동원시켰습니까? 그 상상력으로 현재 미흡한 행복을 마저 채우려고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뇌에 문제가 있어가지고 젊은 나이에 뇌종양에 걸려 뇌가 폭발할 지경이라 이 말이죠. 그럼 내 계산에 의하면, 이 정도로 의로우면 뭐 재벌은 안 되더라도 몸이나 좀 건강해져서 병이나 나았으면 좋겠는데 계속 더 악화가 되고 번지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누구한테?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라고 원망할 수밖에 없죠. 공식이 딱 나오잖아요. 공식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왜 원망합니까? 왜 비난합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왜 비난해요? 자기한테 뭐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있잖아요. 중국집 마일리지 모아놨는데 어느 날 보니까 중국집이 이사를 했어요. 그럼 쿠폰 들고 이사한데까지 찾아가서 탕수육 소小자라도 내놓으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지독한 인간이라고 하겠죠. 서울서 하다가 부산에 가서 개업했는데 부산까지 따라가면 기름 값도 안 나오겠어요. 탕수육 하나 먹으려다가. 

끝까지 자기 마일리지를 들고, 모아놓은 쿠폰 들고 온다 이 말이죠. 우리는 끝까지 자기 의를 포기를 못해요. 어디가도. 주시옵소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든지, 뭐 남편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든지, 반드시 사업하기 전에 철야를 하든지 해야 돼요. 철야하게 되면 쿠폰도장하나 찍어주는 줄 알고, 마일리지 쌓이는 줄 알고 하루도 안 빠지고 40일 연속으로 하고, 또 성경 쓰라고 하면 인쇄되어 있는데도 베껴 쓴다고 노인정에 가서 성경 세 번 쓰기 하고. 왜? 이 공덕이 쌓여야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극락에 갑니다. 불교신자라 천국에 못 가고 극락에 가요. 왜? 극락과 연결된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에. 

특이함은 그야말로 죽고 난 뒤에 다시 파견되어 나온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죠. 이미 죽었고, 죽은 상태에서 계속 사는 것, 이 특이함은 반드시 특이한 행위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관계를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모든 관계를. 이제는 불신자 가족보다 신자 가족이 가족 같고. 영원히 살 내 가족 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 소리 안 믿는 자식들이 들었으면 참 화나겠다. “엄마, 어디 가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엄마, 이제 자식으로 안 보이지?” 이럴 수가 있어요. “누가 믿지 말라고 했나?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성령이 왔는데 뭐.”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는 사람들. 성령이 가만두지 않는 사람들. 인간은 가만두면 자기 의를 쌓게 되어 있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탕수육 소小자달라고 쿠폰 내밀 거예요. 반드시 인간은 교회에 나올 때 떳떳함이 있어요. 떳떳함이 있다고요. 여러분 이혼하고 그 다음 주에 교회 가는 사람 봤습니까? 이혼하고? 교회에서 만나서 결혼했는데, 둘이 이혼했어요. 이혼하고 둘이 그 다음날 같이 교회 가겠어요? “오늘 왜 따로 앉아있습니까?” “이번 목요일에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했습니다.” “아이고, 참 안 됐네요.”라는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교회에 갑니까? 둘 다 그 교회에 안 나가요. 또 몰라 중직을 맡았으면 12월까지만 하겠지만. 12월이 무슨 달인지 그때까지 왜 계속 가는지는 몰라도. 

남편 죽고 교회 계속 나옵니까? 아내 죽고 교회에 나와요? 자기한테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얼마나 우리들이 모르는 저주받을 짓을 했으면 주께서 저렇게 그 인간을 나락으로 불행으로 처박겠는가? 우리 몰래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친히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 저렇게 정통으로 쳐서 망하게 했는가? 아휴 인간아! 쯧쯧~ 이런 게 뒤에서 막 들려오거든요. 막 들려온다고요. 

인간은 자랑거리가 없으면 교회에 안 나갑니다. 중립이든지 아니면 자랑거리가 있든지. 중립에서 약간만 삐끗해도 한 주 정도는 쉽니다. 숨고르기에 들어가요. 평가가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귀담아 듣고. “교회에서 아무 이야기 없어?” “아무 말 없다.” 그럼 다음 주에 몰래 뒷자리에 와서 예배드리고. 전에는 오후예배까지 했는데 이제는 오전예배만 드리고 점심도 안 먹고 그냥 가버리고. 우리교회에서 교인들이 왜 기도를 안 하려고 하는지를 이제 알겠죠. 기도는 저렇게 유창하게 하면서도 사는 꼬라지하고는~ 이런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그만큼 의를 쌓았으면 거기에 해당되는 균형 맞춘 행복이나 축복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승리를 주고, 자유를 주고, 기쁨을 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마움과 감사를 줍니다. 왜냐하면 긍휼이라는 것은, 긍휼의 특이성, 특징이 뭐냐 하면 긍휼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거든요. 사랑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감사함으로 나타나요. 감사함으로. 감사함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를 수동형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유발한 사건이 아니었는데 주께서 유발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삼성그룹 시험을 치는데, 562대 1이었습니다. 나는 스펙이 토익 986점이고 자격증 서너 개 갖고 있는데, 이번에 삼성전자에 합격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986점 아무것도 아니고 서울대학 나온 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긍휼히 여겨서 합격했습니다, 라고 할 때만 감사가 돼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합격이 돼버리면, 오늘 본문에 나오죠.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합격이 되니까 뭐가 죽습니까? 감사가 죽어버려요. 왜? 자기가 갑자기 능동적 주체로 바뀌기 때문에. 

그러면 교회 목사가 설교를 하던 목회를 하던 간에 교인들로 하여금 감사가 나오도록 해야 돼요? 아니면 능동적 주체가 되게 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감사가 되게 해야 되죠. 근데 목사의 설교는 뭘 노리느냐 하면, “여러분! 의로운 행동을 하세요. 옛날에 성령이 없을 때는 못했는데, 이제 성령 받았으니까 본격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하셔가지고 그걸 근거로 구원도 받고, 이 땅에서 기도의 응답도 받고, 중보기도 응답도 받고, 여러분, 축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사기를 치죠. 

“지금도 악마는 여러분이 축복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이걸 믿음으로 승리해서, 봐라! 신자는 이렇게 부자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감사하시고 십분의 일은 우리 순복음교회로!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현찰이 많이 들오면 불의한 돈과 막 바꿀 수가 있기 때문에. 현찰이 많기 때문에 다른 음성적인 돈과 맞바꿔주는데 잘 대처할 수 있어요. 10퍼센트 수수료 떼고. 몇 천까지는 5퍼센트고 몇 억은 10퍼센트에요. 그 수입을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들은 그 수입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한 돈벌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라고 하는 것은, 아프다고 감사하는 게 아니고 건강하다고 감사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수동형이 될 때, 아픈 것도 주께서 뜻이 있어서 아프게 했다고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전부 다 수동적인 거예요. 그러면 수동적인 것이 되려면,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수동적이 될까요? 안 그러면 능동적일까요? 인간은 돌아서면 능동적이에요. 능동이니까, 그 능동에 십자가를 내세우는, 성령은 오실 보혜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것만 갖고 나타난다 말이죠. 

그러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나타나면 주체의 능동을 주장하는 것과 마주치고 충돌하겠죠. 그게 회개인데, 충돌을 하게 되면 그 충돌의 결과가 감사입니다. 감사가 뭐냐 하면 육과 죄의 잔재에서 비로소 감사가 나와요. 감사하는 요건을 따로 만들지 마시고, 내가 무너질 때, 죄와 육으로 무너질 때 감사가 나오니까, 인간이 능동적으로 감사를 못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다고 해서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자기 육의 본성대로 사는데 성령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칠 때, 그 현장이 바로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감사가 여기에서 나온다니까요. 이걸 하나의 쉬운 예로 들게 되면 100층짜리 백화점이 있다고 해봅시다. 여기에 성도를 통과시킵니다. 1층부터 100층까지 다 보게 하는 거예요. 다 보게 하는데, 백화점하고 마트하고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들어가기 전에는 이것만 사고 나가야지, 라고 마음먹고 들어가거든요. 

근데 뭐 식품 코너부터 시작해서 몇 바퀴 쭉 돌면 갑자기 생각지 않는 살 것들이 자꾸 생겨요. 현찰을 갖고 갔다면 현찰 떨어지면 억지로라도 안 사는데, 카드를 갖고 가게 되면 무제한으로 계속 긁으면서 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100층 백화점이라면 성도로 하여금 온갖 유혹과 온갖 갖고 싶은 것을 다 보게 해요. 1층부터 100층까지 한 바퀴 다 돌게 만듭니다. 돌게 만들면, 처음에는 나는 십자가만 소중하고 주님께 감사하다고 하다가 벌써 1층 식품코너 냄새부터 시작해가지고 ‘저거 먹고 싶은데..’ 갑자기 주님은 어디로 가버리고 저걸 꼭 먹어야 되겠다는 욕망이 내부적으로 생겨납니다.  

1층은 여자 화장품 가게, 2층은 여자 옷 가게, 3층은 여자 구두 가게, 4층은 여자 원피스 가게, 5층은 남자 옷 가게, 6층은 남자 벨트, 7층은 가구, 8층은 골프용품, 9층은 헬스용품, 10층에는 음식 가게. 11층에는 어린애들 정글북... 어디 백화점 한 번 들어오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죠. 그렇다면 떠나지 말고 저런 것을 내 바구니에 담아야 비로소 내가 얼추 행복하다는 수준에, 레벨에 올라서게 돼요. 

그런데 돈은 없지, 저건 사고 싶지, 그럼 그 틈을 뭐로 메우겠습니까? 상상이 동원되겠죠. ‘월급 타서 적금 깨고 저거 사야지.’라는 상상이 동원되면 그 상상이 우리의 삶에 힘이 돼요. 의욕이 된다고요. 사람은 꿈이 없으면 못 살아요. 반드시 어려운 가운데서 희망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희망이 답이라고요.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희망만 있으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일어설 수 있다. 기존의 마귀에 속한 인간하고 똑같잖아요. 

그럼 교회는 뭐냐, 백화점 다 보고 왔잖아요. 근데 그 옆에가 교회라. 다 보고 교회에 왔다. 기도가 뭐가 나오겠습니까? 뻔하죠. 여자들은 옷, 남자들은 차. “이번에 차 바꿔주세요.” 여자들은 옷이나 가방, 남자들은 자동차, 애들은 장난감, 세 식구가 교회에 가서 기도한 내용이 다 다르잖아요. 기도하는 게 동상이몽이죠. “주여, 자동차 한대 바꾸기 위해서 성가대를 몇 년 더 봉사해야 됩니까?” 전부 다 차가 목적이라. 이미 자기의 마음은 차로 변신되어 있어요. 나는 없어요. 차를 타고 있는 그 “나”가 “나”에요. 지금의 나는 꼴 보기도 싫어요. 

그리고 가을신상, 시폰(chiffon,얇게 비치는 가벼운 직물)원피스를 입은 상상을 하게 되면, 그게 나지 그 외에는 내가 아니에요. 그것이 없는 나는 꼴 보기도 싫어요. 그걸 얻기 위해서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의로운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걸 알고 목사가 때맞춰서 설교를 해주네요. “여러분, 회개한지 너무 오래됐죠. 이번 특별기도 기간에 회개합시다.”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 저 회개하는 기도가 나의 의로운 행동으로 누적이 되는구나.’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하죠. 또 마귀가 어떻게 도와주느냐 하면 기도 끝나고 난 뒤에 누가 원피스 사라고 돈을 줘요. 그럼 거기서 감사헌금 내고. 하여튼 죽이 맞아요. 마귀하고 교회하고 얼마나 죽이 맞는지. 

긍휼하심이라고 할 때는 수동형이 될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깨어진 사람, 나는 더 이상 내 주장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 앞에 가장 복음에 적합한, 최적화된 상태로, 나에게 꼭 필요한 것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이 상태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강도라면, 강도라도 감사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강도라도. 우리가 창녀라면 창녀라도 감사할 수 있고, 니가 세리라면 세리라도 감사할 수 있느냐? 세금 걷는 세무서 직원이면 감사할 수 있죠. 보통 공기업이니까, 공무원이니까 감사하죠. 세리라도 감사할 수 있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불가능하죠. 

그렇습니다. 불가능이에요. 감사가 뭐냐, 감사는 불가능에서 나오는데, 그 불가능의 실체가 뭐냐 바로 사랑이고 긍휼이에요. 사랑은 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있다? 없다? 내가 사랑한 적이 없음의 잔재 속에서 사랑이 나와야죠. 그리고 성도가 백화점 구경 다 하고 난 뒤에 욕심이 가득해서 “주님 뭐하시노?”하고 있는데, 그 봤던 100층이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와락 무너졌습니다. 파국이죠. 이 파국을 보고 내가 무너질 저 동네를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그걸 제2의, 제3의 자아라고 나는 그걸 신봉하고 내가 나를 우상화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시 한 번 쓰레기통으로 돌아갈 때, 이게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돌아가라고. 

이미 무너질 수밖에 없고 불 탈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니가 뭘 증거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라. 혹시 아나? 지진더미에서 여기 있어요! 라고 손들면서 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또 해석이 불가능한 복음을 보고 저게 진리입니다, 라고 손들고 기어 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선교, 전도에는 실수가 없고 오류가 없습니다. 빠트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미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 관계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는 그런 관계 말고, 죽고 난 뒤에 사람들끼리 모인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가. 그럼 그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주님이 주신 긍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계겠죠.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마지막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것이 마지막 준 계명이에요. 사랑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 받은 긍휼을 내놓아라 이 말이죠. 받은 긍휼을. 

“나 이렇게 못났는데, 지옥가야 되는데, 이렇게 용서해주셨습니다.”라는 것을 내놓을 때, 그것이 뭘 내놓는 것입니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타나겠죠. 예수님의 피 이야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노라. 결국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죽음을 자랑하는 거예요. 죽음을.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잘 살았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성도는 특이한 죽음, 일반적인 죽음 말고,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특이한 죽음을 자랑하는 거예요. 내세울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어요. 

근데 어떤 분들은 이 말을 듣고 십자가만 자꾸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앞에 뭔가 빠진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이래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이게 들어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나와야 되는데,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그냥 십자가를.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나도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나보고 자꾸 딴죽 걸지 말라고 하는 이것밖에 더 있겠어요. 십자가 아는 것이 어느새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누적이 돼버린 거예요. “나 건드리자 마라 십자가 알아.” 이래 된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관계가, 못남의 관계가 이어져야 하는데, 혼자 잘난 관계로 이어져버려요. 혼자 잘난 관계로. 죽었다가 살게 하신 것이 우리 잘나라고 사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령은 바로 뭘 부수느냐, 개인을 부숴버립니다. 성령은 개인구원을 부숴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긍휼을 입어버리면, 긍휼이 나온 출처가 “피”입니다. 이 세상에 피 흘리신 분이 누구밖에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주의 이름밖에 없죠. 사도바울은 주의 이름이 아니니까. 예수님만 머리가 돼요. 예수님만 머리가 된다면 긍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단체가 돼버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체가 돼버리면 반드시 뭘 증거 한다? 예수님만 증거 하죠. 머리 되신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라는 개인을 증거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나, 개인을 증거하고 싶지 않다. 예를 들어서 저는 아침에 이렇게 하고, 운동은 식사는 이렇게 하고, 가방은 이런 것 들고 다니고, 이런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도 목사님처럼 그렇게 해야지.”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거는 개인이 돼버려요. 나는 이렇게 산책하는 것이 맞아요. 맞는데, 이것이 죄라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여러분 나름대로 산책하면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겠죠. 

왜냐하면 모든 것이 파국이고,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는 그 위에서 비로소 긍휼과 사랑이 꽃피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 산책하는 죄, 건강식품 먹는 죄, 이런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언급할 수밖에 없다고요. “나, 이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죕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것도 죄고, 나, 이렇게 헌금하는데 헌금하는 것도 죕니다.”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남의 인생을 모델로 삼아서 흉내를 내어가지고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결합이 돼버리면, 이거는 교회가 아니죠. 죽고 난 뒤의 새로운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이런 짓거리를 합니다, 이런 짓거리가 나쁜 짓이라고 하면서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라고 이래 나와야죠. 

그러면 “이런 짓거리, 산책하는 것이 죕니다. 예수 믿습니다.” 이러면 돼요? 산책하는 것이 왜 나쁜지 이유를 설명해야 돼요. 산책하는 것이 누구 좋아라고? 내가 산책하는데 다른 사람이 몸매 좋아지라고 합니까?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하잖아요. 결국 나는, 나의 매일의 일상은 나 좋아라고 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어쩔 수 없었다, 주께서 시킨 것이다,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수동적으로 할 때, 수동적인 그 모든 것이 우리로 죄인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시킨 대로 했으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그런 자기 정당성을 챙기라고 아까 수동형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이 육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살고자 하는 행동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고자. 그러니까 이건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살긴 사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그거는 마귀 생각이고.  

주께서는 살고자 하는 우리를 뭐로 바꾸겠어요? 죽는 것이 목표가 되도록 성령께서 바꾸게 하십니다. 왜? 빨리 죽어야 빨리 만나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지 말고 죽으려고 해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아직 데려가지 않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증거 하라고 하신 줄 알고, 우리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