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디도서4-감당하는 타인 1704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23. 08:00
2017-04-15 00:42:18조회 : 432         
감당하는 타인 17041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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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3.206)17-05-10 20:53 
서울 의존교회 170414a (감당하는 타인)-이 근호 목사 

오늘 해야 될 강의도 방금 질문한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어요. 여기 디도서 1장 15절에 보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사도바울이 디도한테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뭐기에 사람을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느냐 이 말이죠. 니나 잘하세요, 라고 하죠. 니는 깨끗하다, 니는 더럽다, 라는 말을  사도가 과연 할 입장이 되느냐 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돼요.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옛날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을 살아요. 그렇죠? 각자 자기 삶을 살잖아요? 

누구에 대해서 평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맘에 안 든다고 그 사람의 운명이 평한 대로 졸지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장희빈 같으면 또 몰라요. 집에다 짚으로 라이벌 왕후를 만들어 놓고 막 바늘 꽂아서 흑마술을 하죠. 내가 하는 행동이 너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거는 미신이고요. 실제로 우리가 누구를 욕한다고 해서 그 사람 운명이 갑자기 그날로부터 가슴 통증이 있고, 헉하고 죽고 그렇습니까? 그런 것 없죠. 

그러니까 인간이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소나기가 오게 되면 빗줄기가 다 따로 떨어지죠. 그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서로가 한 줄기의 빗줄기처럼 다 따로 떨어져요. 니는 니 빗줄기로 떨어지면 되고 나는 내 빗줄기로 떨어지면 되죠. 이쪽 빗줄기가 저쪽 빗줄기에 영향을 주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 이 말이죠. 거기서 나온 사상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닙니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특히 민주주의 공화국 할 때 민주주의 헌법에 보면 개인이 갖고 있는 자율권을 극대화시킨 겁니다. 나는 행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나는 누구한테 명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을 권한이 있다. 나는 사유재산 지킬 권한이 있다. 이런 자율권.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민주주의 헌법에 이게 보장이 되어 있어요. 민주주의 헌법에 보장이 되어 있다는 말은 옛날에는 안 그랬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옛날에는 안 그랬다는 말은, 백성이라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는 백성이라는 말은 없지만, 옛날에는 백성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 백성이라는 것은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도 그게 나오죠. 같은 빗줄기인데도 불구하고 왕 빗줄기는 굵습니까? 아니죠. 일반백성들은 숨을 작게 허억하고 쉬고, 왕은 하악하고 호들갑 떨면서 쉽니까? 아닙니다. 똑같아요. 

왜 똑같은 인간인데 왕한테는 초월적인 특권을 부여하는가? 이런 질문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합니다. “니가 뭔데?” 이러는데. 민주주의라는 것은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아니고, 인간이 처음 생길 때는 민주주의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아니고 왕국입니다. 왕국. 초반에는 역사적으로 잘 모르니까 어느 정도 역사가 형성되고 난 뒤에 생긴 국가 제도는 왕 제도에요. 그리고 역사적인 것을 문자로 어떤 스토리를 기록하는 것은 국가 왕 제도가 성립되고 난 뒤에 일어나는 현상이거든요. 

왕이 있다, 만약에 민주주의에서 살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한 30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임금님이 행차한다고 “물렀거라! 물렀거라!”하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니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면 되지, 니가 뭔데 내 갈 길을 물렀거라 하느냐? 니가 뭔데? 그 인간 참 건방지네.” 이래 되잖아요. “니가 뭐야?”라고 물으면 옛날 왕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그냥 인간이고 나는 신의 아들이야.” 신이 도입된다고요. 신이요. 

신이 도입되는 그 역사가 인류역사에 거의 99퍼센트에요. 왕이 우리보다 다르다는 것. 겨우 1퍼센트 정도가 인류역사 6000년을 보게 되면, 지금 민주주의가 된 것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이 1776년이니까 200년 밖에 안 됐어요. 200년 전에 아프리카 같은 데 가보면 추장이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특이한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가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왕 제도를 보고 “쟤들 왜 그런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게 정상적이냐 하면, 왕 제도가 정상인 이유가, 민주주의 정상이 아니고 왕 제도가 정상인 이유는 전통 때문에 그래요. 전통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전통과 관습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게 없어요. 여자들이 시집와서 그 시집의 전통과 관습을 하루아침에 박살낼 수 있습니까? 

시집을 갔는데 그 집에서 조상 제사 드리더라. 오늘 돌아가신 시할머니 제사다. 그럼 음식 할 때는 지가 전이며 뭐며 맛있는 거 다 주워 먹다가 제사를 딱 할 때,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치면, “자 갑니다!” 해가지고 상을 뒤로 엎어서 박살낼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 정도 하면 이거는 힘센 도봉순이 돼야지 보통 힘으로는 그렇게 안 되겠죠. 왜 그렇게 안 해요? 그냥 니는 교회 다니니까 빠져라 해가지고 소극적으로 대항할 뿐이지 왜 그렇게 못하는데요? 

이게 전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마음이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습득한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지식 말고, 그 지식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권위를 가지고 들어와요. 어떤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들어온다니까요. 그 정신적인 압박감이 뭐냐 하면 우리 집안의 내력이다, 전통이다, 이런 걸로 들어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의 전통이나 내력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이 세상에 우리 집안 밖에 없습니까? 옆집도 있잖아요? 그죠? 그럼 한 시대에서 우리 집안하고 옆집 집안하고 전통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같아요. 그럼 옆집의 그 옆집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요. 같으니까 같은 백성이고 같은 국민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집단적 표상이라고 합니다. 집단적 표상. 조상대대로 인간들은 처음부터 신을 찾았습니다. 사단이 어디서부터 났느냐 하면 신을 찾는 것부터 난 거예요. 신을 찾았고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땅에 살아요. 제가 지금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어디에 있고? 하늘에 있고 인간은 어디에 있고? 땅에 있고. 그럼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이 땅에서 안 만든 것이 있어요. 인간이 이 땅에서 재배하지 못한 거나 만들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늘의 달과 별과 해. 특히 해. 바람. 바다. 인간들 중에서 바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바다 만들었습니까? 지가 바다 만들고 지가 거기서 명량해전 했습니까? 아니죠. 그럼 지가 명량해전 전투를 어디서 했습니까? 바다에서 했잖아요. 

그럼 이순신 장군이 그 바다에서 왜구하고 전쟁하면서 그 바다는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을 합니까?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죠. 조물주. 왜? 그게 관행이고 관습이니까. 그럼 인간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뜻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이 들고 태풍이 오고하잖아요. 그럼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들부터 온 정보가 있어요.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제사를. 

우리가 역사를 고등학교 때 잠깐 배우고 끝나버렸는데, 우리가 역사에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 관심이 있어요. 관심 있기 때문에 7시 뉴스를 보는 겁니다. 7시 뉴스 9시 뉴스가 뭐예요? 이 시대의 역사에요. 지금 북한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트럼프는 이렇고 저렇고, 이게 역사거든요. 현재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서. 근데 그 역사가 요즘은 소식이 빠르게 온다 뿐이지. 옛날에는 소문, 소문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깊은 산골에 있으면 10년 전의 일도 모르고요. 필리핀에 있던 어떤 일본 할아버지는 전쟁 끝난 지 40년 지났는데 아직도 전쟁 중인지 알고 있어요. 혼자 피신해 있다 보니까 전쟁 중인지 알았어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오고 난 뒤에 철도가 놓이고 무선전자기기들이 이게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 속도를 높여버린 겁니다. 

근데 이걸 아셔야 해요. 속도를 높였다고 해서 역사가 빨리 가는 것이 아니에요. 빨리 가는 역사는 없어요. 빠른 역사는 없어요. 역사는 그냥 지금 일어난 일을 인간의 기억대로 모이는데, 그냥 혼자서 역사는 없고 뭐라고 했습니까? 집단적 표상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이상하게 마음이 하나로 같은 것. 

만약에 여기에 있는데 옆 동네에서 대통령 뽑지 말고 왕을 뽑자고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어긋납니까? 집단적 표상에 어긋나죠. “니 와 왕을 뽑아야 하는데?” “옛날부터 줄곧 전통으로 우리의 왕을 뽑았다.” “근데 지금 이미 우리는 별난 왕이 없는데 왜 왕을 뽑아야 하느냐?” “아니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지배할 때는 인간들 가운데서 영웅적이고, 한 사람을 유독 특별한 사람으로 삼아서 그에게 지혜를 줘가지고 이 땅을 섬기게 했다.” 

그러면 왜 여러 명을 하면 안 되는가? 그거는 가야 아시죠? 신라 밑에 가야. 가야가 그렇게 잘 살고 금이 많고 철기가 많은데 왜 망한지 알아요? 거기에는 왕이 없어요. 그래서 6가야에요. 협의해서 한다고요. 협의해서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왕이 있는 신라한테 고구려한테, 제일 먼저 고구려한테죠. 고구려한테 망했어요. 집단적 표상이 없는 거예요. 

니 고을은 니 고을, 내 고을은 내 고을 이래 하는 거예요. 협의 할 것이 있으면 같이 협의하고. 만약에 홍수가 났을 때 댐은 어디에 막느냐, 그런 것. 관계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필요하지만 나머지기는 각자 하는 거예요. 오야붕이 없는 거예요. 오야붕이 없으면 권세자, 권력자가 없죠. 권력자가 없으면 각자각자, 아까 빗줄기 떨어지는 것처럼 각자 떨어지는 거예요. 힘을 모을 수가 없어요. 힘을 모을 수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서서 힘을 모으려고 하면 누구 이름을 등에 업어야 하느냐 하면 신의 이름을 등에 업어야 해요. 신의 이름을. 신이라든지, 신화라든지, 영웅이라든지. 그러면 갑자기 집단적 표상이 등장하겠죠. 집단적 표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초월적 영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집단적 표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은근히 우리를 대표할 만한 초월적 인물을 기대했다? 기대하지 않았다? 전부다 기대한 거예요. 기대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을 누가 공격을 하면 대통령이나 왕이나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화가 나는 거예요. 임금을 욕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게 뭐가 됐다? 전통이 되었다. 다 임금님이 우리를 위해서 제사를 잘 드려서 이 한반도, 고려시대, 조선시대, 죽 이어왔다는 거예요. 그게 옳고 그르다는 그 평가를 왜 그 시대에는 못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옳고 그름은 농사가 잘 됐느냐, 농사가 못 됐느냐, 우리나라가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잘 버티고 있느냐, 아니면 잠식당하느냐, 얼마나 전염병이 창궐하느냐, 아니면 건강 하냐, 그걸로 따졌다고요. 

만약에 전염병이 찾아오고 우리나라가 뭐 일본한테 잡히고 이래 하게 되면 이 국민들이,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거 뭘 바꿔라? 왕을 바꿔라. 왕이 어질지를 못해서 하늘이 노해가지고 이 전라도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 임금 있고 그 밑에 양반 있고 양반 밑에 쌍놈이 있잖아요. 양반들이 중간에서, 일은 쌍놈들이 하고, 임금 밑에서 양반들이 하는 짓이 뭡니까? 임금으로 하여금 하늘이 보기에 어질고 뭔가 나쁜 짓 안 하기를 간청하고 탄원해서 하늘이 보기에 바른 임금으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오늘 성경하고 무관한 것이 아니고 다 관계가 있어요. 성경에 양심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 지가 뭔데, 니나 잘하세요. 니 인생 따로 있는데 왜 남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깨끗한 사람 따로 있고 더러운 사람 따로 있다고 했잖아요. 니가 무슨 권한으로 사람을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으로 둘로 나누느냐 말이죠.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다? 민주주의 시대거든요.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누구한테 평가 받을 그러한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민주주의가 정상이냐?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정상이냐? 왕이 있던 시대가 정상이라니까요. 옛날에는 왜 그렇게 다 같이 살면 되는데 바보같이 왕을 왜 뽑았느냐? 이게 신과 관련되어 있다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을 찾았지요? 지금은 신을 안 찾잖아요? 옛날에는 왜 신을 찾았느냐, 왜냐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해와 달, 별을 자기가 안 만들었잖아요. 자기가 안 만들었으면 다룰 수 있는 대상이다?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아니죠. 그러면 그 대자연의 흐름에 종속이 되겠죠. 그럼 그 대자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구든지 뭐든 하나 있어야 된다니까요. 집단적 표상으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이라고 합니다. 신을 만들고 우리한테 이익이 오려면 누구 마음을 달래야 돼요? 신의 마음을 달래야 돼요. 

그 신의 마음을 달래려면 어떻게 달래느냐, 그 방법은 인간이 인간을 달랠 때 어떻게 달래요? 선물 줘서 달래잖아요. 뇌물주고 선물 줘서 달래잖아요. 그처럼 신에게 선물을 줘서 달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처럼. 선물 주고 난 뒤에 갑자기 가뭄도 끊어지고 전염병도 좋게 됐다면, 이 정보는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아, 이렇게 했더니만 신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것은 전통을 통해서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서 전수를 해야 됩니다. 신을 다루는 방법. 

아니, 목사님 그런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아닙니까? 옛날이고 오늘날이고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니까요. 교회에서도. 여러분들의 자식이 고3이라 수능을 앞두고 있다면 해야 되는 방법? 새벽기도 나와야 되잖아요. 실제로 나와서 갑자기 성적이 높아졌다면, 그 교회에서 새벽기도 나와서 등급을 올린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의 영웅적 성과가 된다니까요. 그거는 그 교회에 회자가 되고, 소문이 터지면서 그 교회는 수능에 효과가 있는 교회가 되고. 수능이라든지 병 고침,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교회는 사법고시 합격자가 많이 나오는 비법을 전수하는 교회. 

그러니까 이걸 특화사회이라고 하는데, 교회마다 그런 것이 있어야 사람이 몰리거든요. 모이지만 교회마다 거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이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 보편적인 것을 디도서 1장 15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심. 

이제 슬슬 본문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이 양심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죠. “나는 성경은 몰라도 양심 하나는 바르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교회 가서 기도한다면 뭐대로 합니까? 양심대로 하겠죠. 그 양심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더러운 양심은 더러운 결과밖에 안 나온다. 이래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들은 뭘 최종적으로 의지하느냐 하면 내가 아무리 이 세상 살면서 험난하게 살았지만 뭐 하나는 지금 건재하다? 뭐 하나는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도 나는 양심 있다.” 양심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양심만큼은 그렇게 악에 물들지 않은 최후의 순수함이죠. 근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양심 더러우면 어떻게 할래?”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리 듣고 이 사람들이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니가 뭔데? 니 양심이나 잘 살피세요! 니가 뭔데 왜 니한테 내 양심을 평가받아야 되느냐?”라고 나오겠죠. “니가 뭔데?” 그래서 이제부터 성경이 어렵게 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양심은 누구 관리 하에 있습니까? 내 양심이니까 내가 관리해요. 내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관리대상이 안 됩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더러운 양심이 있고 깨끗한 양심이 있다고 그렇게 되니까, 정말 그게 있다면 그 다음에 뭐가 궁금합니까? 더러운 양심은 뭐고 깨끗한 양심은 뭐냐? 단박에 그런 도전이라든지 질문을 하게 되겠죠. 그거 하기 전에 아까 이야기했던 것을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정리가 좀 안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전통적으로 뭐가 있다? 인간에게는 신이 있다. 신이 있다는 말은 이게 민주주의 사회가 된다 할지라도 왕 제도에서, 왕 제도가 밑에 쌍놈이 있고 위에 양반이 있는 거예요. 그럼 양반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왕을 보필해서 왕이 착한 왕이 될 경우에는 누가 덕을 누가 본다? 나라 전체가 덕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양반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문자, 공부를 한 사람 아닙니까? 쌍놈의 특징은 뭡니까? 공부를 못한 사람이에요.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고 아예 양반들이 중간에 딱 버텨가지고 이 쌍놈들한테는 공부를 못하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쌍놈들 가운데 학문깨나 한다고 좀 설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경단을 만들어가지고 쌍놈들 중에서 좀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여 버려요. 홍길동을 잡아다 죽여 버립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때문에 안 돼요. 역적이라. 자경단을 만들어서. 

양반은 뭐냐 하면 귀족이거든요. 귀족. 법을 누가 만드느냐, 양반들이 만들어요. 그리고 왕도 양반들이 만든 법을 따라야 돼요. 그러면 조선시대 같은 경우에는 모든 생산물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땅에서 나오죠. 토지죠. 토지중심이죠. 이제 왜 민주주의가 뒤늦게 나왔는지, 200년 밖에 안 됐는지, 그 이유를 아셔야 돼요. 200년 전 까지는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하는 의식주가 땅 더하기 인간의 노동의 결합에 의해서 된 겁니다. 

뭐가 없어요? 대단한 기계가 없어요. 왜 기계가 없느냐 하면 기계를 하려면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때는 석탄과 석유 같은 것이 개발이 아직 안 됐어요. 에너지가 없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처럼 인류역사는 에너지역사에요. 그냥 나무쪼가리 이거 때가지고 포크 레인이 움직입니까? 포크 레인이 쇳덩어리 들지도 못하는데. 포크 레인에 나무 쑤셔 넣으면 그게 움직입니까? 안 되잖아요. 엔진이라는 것이 발명 돼야 되잖아요. 근데 엔진이라는 것이 엔진 만들고 석유 나왔습니까? 어디 석탄 나왔습니까? 아니죠.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게 필요하니까 기계가 나온 겁니다. 옛날에도 석유가 땅에 묻혀있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는 예수님 당시에도 석유가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데 왜 그렇게 못살았어요? 땅에서 인간의 힘대로 농사짓는 것이 주류였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씨 뿌리는 비유가 있잖아요. 씨 뿌리는 비유. 요새 같으면 기름 파는 비유라든지.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비유에 보면 어떤 농부가 땅을 갈다가 툭하고 소리가 나서 보물이 있는 줄 알고 하는 것 있잖아요. 

모든 환경 자체가 땅과 노동이 결합된 노동시장이었어요. 노동시장에서 왕을 살리려면 이 노동시장을 통치하는 어떤 문자를 아는, 문자를 고유 독점하는 귀족, 양반계급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귀족 계급에 변화가 생겼어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무 변화가 없어요. 귀족계급에 변화가 생긴 이유가 여기에 쌍놈 같은데 장사를 해가지고 돈을 번 부자가 들어오니까 이 귀족계급이 의회 제도를 만들어 여기에서 법을 만들어서, 귀족은 전통적으로 귀족이에요. 옛날에 귀족은 뭐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귀족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17세기 이태리부터 금융자본주의가 생기면서 돈 버는 사람이 큰소리치게 되어있어요. 왕이 전쟁하려고 하면 돈을 빌려와야 되지 않습니까? 용병들을 사고 월급주려면. 그걸 누구한테 빌려요? 그 당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어떻게 돈을 빌리는가? 외국에서 원료를 헐값에 사와서 자기나라에서 비싸게 팔면 그만큼 남는 장사라는 말이죠. 후추라든지, 면화라든지, 향신료, 그리고 뭐 여러 가지 총포류, 나침반, 종이, 옛날에 수많은 무역 있잖아요. 

심지어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에서 봐도 돈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돈 많이 벌었어요? 무역하는 사람들이 돈 많이 벌었어요. 무역하는 사람이. 그 무역하는 사람이 귀족계급에 들어가서 귀족계급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렸어요. 와해시켜버리니까, 힘이 더 세니까, 전에는 입헌군주제라고 해서 왕을 두되, 모든 행정은 총리가 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왕도 귀찮아서, 그 상징적인 왕, 아까 이야기 한 집단적 표상인 그 왕을 없애버리고, 그 집단적 표상을 사람들의 계약에 의해서 결정하자는 것이 바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 인들이 제일 먼저 그걸 한 거예요. 청교도 인들이. 

천부인권설, 우리 인간의 모든 인권은 왕이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줬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폭포수 같아요. 하나님이 주되 왕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질서가 전통적인 질서가 아니고 바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데 필요한 질서로 바뀝니다. 정치위주가 아니라 경제위주. 돈 가진 사람이 최고에요. 

그 돈 가진 사람이 누구에게 투자했는가? 과학자들에게 투자하죠. 그 과학자들이 기술이 발달하고, 거기에 무기기술이 발달하죠. 무기기술이 발달한 쪽에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으니까. 식민지로 만들면 흔한 원료를 무한히 공급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던 거예요. 거기다가 일하는 사람까지 필요했으니까 흑인 노예들을 영국에서 많이 뽑아갔죠. 나중에 미국까지 건너갔지만. 처음에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많이 가져갔어요. 2등급 시민들 정도는 그렇고 3등급, 4등급 시민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왕 중심에서, 정치 중심에서 뭐로 넘어왔어요? 경제 중심으로 넘어왔죠.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어느 중심입니까? 우리의 양심은 전통이 최고다, 라는 양심을 갖고 있다가 갑자기 양심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뭐가 최고다? 돈이 최고다, 하는 양심으로 바뀌겠지요. 뭐 양심은 순수하다고요? 양심이 순수한 게 아니에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살고보자’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살고보자에서 나와요. 뭐 인문학 강좌하고 뭐 어떻게 하는데, 그 인문학 강좌고 뭐고 간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죽 들어보면, 살고보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살고보자, 뭐 어떻게? 서로 의지하고 의존해서. 이미 자본화되어 있는 양심이 남과 서로 좋게 사귈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양심은 돈을 노리고 하는 거예요. 돈을 노리고. 그래서 인간이 “우리끼리는 말이 잘 통해.”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끼리 만나서 무엇이 손해나지는 않을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크게 손해나지 않겠다는 마지막 최후의 바닥에 그물 같은 겁니다. 

제가 그물이라고 한 것은 뭐냐 하면 서커스한 사람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묘기를 부릴 수가 있는 이유가 그 밑바닥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물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도 나오죠. 다는 안 그러지만 20대 재벌 3세들이 철딱서니 없이 마약하고 나쁜 짓 많이 하는 그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나쁜 짓해도 누가 빼줘요? 아버지가 검찰, 경찰, 기자들까지 뇌물 먹여서 그때그때마다 다 빼주기 때문에 그래요. 밑에 돈이라는 그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렵게 살아온 자녀들, 여러분들! 저와 여러분들.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흥청망청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집구석을 아니까. 내가 안 챙기면 아무도 챙길 사람이 없어요. 아버지 술 쳐 먹고 들어오지, 엄마는 아버지하고 싸우지, 내가 공부를 하던 뭘 하든 아무 관심도 없지, 학원 보내달라고 하면 돈 없다고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기나 하지,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겠다. 한 푼 두 푼 아껴서. 내가 살지 않으면 아무도 살려줄 사람이 없다. 

이 의식은 제가 수요일에 아비멜렉이라는 설교를 할 때 약간 언급을 했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새로운 낯선 세계에서는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해요. 

그게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보면 양심이라는 것은 혼자 독야청청해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양심 속에는 전통도 들어있고, 근데 그 전통이 어떤 괜찮은 왕 중심이 아니고 이게 벌써 돈 중심이죠. 그러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좋은 지도자가 뭡니까?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최고 좋은 지도자입니다. 독재를 하던 뭘 하던 상관없어요. 국민들을 잘 살게 해준다면 다음에 한 번 더 해먹어라 해가지고 언제든지 표 찍어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갱상도, 경상도가 아닙니다. 갱상도. 그 갱상도에서는 왜 자꾸 보수적으로 나오는가?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나라를 잘 살렸잖아요. 그때 덕을 봤던 그 사람들이 하나의, 아까 했던 전통적인 정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반대했던 자들이, 북한이 곧 쳐들어온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갱상도가 정권을 쥐고 있던 것을 이번에 바꿔보자! 하는 거예요. 이제는 북한 그만 써먹어라! 하는 쪽이 소외당한 쪽이에요. 

둘 다 지금 뭐가 문제에요? 대통령 갈아보자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의 양심에 호소하는데, 그 양심이 이미 어디에 물든 양심이에요? 돈에 물든 양심이에요. 돈에 물이 든 양심이에요.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양심에 돈 줄까? 하면 예! 하고 허벌나게 달라드는데. 국민을 위해서 봉사한다고요? 아니에요. 왜 정권을 잡고, 정권을 잡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운동권에서 밀어줬던 사람에게 고위직이나, 어떤 부스러기라도 권력을 잡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희생했던 대가를 뭐로 받기 위해서? 돈으로 돌려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를 쓰고 선거운동 하는 거예요. 기를 쓰고. 

그렇다면 옛날에 신이었던 그 집단적 표상이 지금은 뭡니까? 돈이에요. 돈. 돈이 집단적 표상입니다. 대통령? 아니야! 우리 경제를 잘 살리는 대통령. 그겁니다. 경제를 잘 살리는 대통령을 아주 온순하게 완화시켜서 이야기하면 복지사회에요. 복지사회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복지사회라고 한다고 복지사회 됩니까? 뭐가 있어야 돼요? 복지사회가 구체적으로 뭐예요? 나라가 잘 살아서 국민들에게 뭘 돌려 달라? 그 잘사는 것으로 돌려 달라 이 말이에요. 돈으로. 유치원 애들 키우는데 한 달에 100만원씩 주든지, 그걸 복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지. 그리고 젊은 애들한테 일자리 정해주고. 사람들의 그걸 집단적 표상이라고 합니다. 신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신의 라이벌이 재물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욕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돈을 좋아한다고 했죠. 누가복음 16장에서. 기다렸던 신이 뭐냐 하면 돈이에요.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돈 주는 신만 재림하길 기다려요. 다시 등장하기를 바라요. 돈 주는 신만. 교회 잘 다녔다는 증거는 우리 집 가정이 부유하게 되고 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교회 잘 선택하고, 하나님 잘 선택하고, 종교 잘 선택했다고, 스스로 위로 할 수 있는 건덕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갔는데 갑자기 생활이 더 어려워지고 한다면, 이건 신을 잘못 선택했는가? 교회를 잘못 골랐는가? 이래 생각해요. 그래서 강남에서 부자고 돈 잘 버는 권사나 집사들에게는 복음이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왜? 지금 이 교회 다녀도 잘 사는데 뭣 때문에 교회를 바꿀 필요가 뭐 있어요? 잘 먹고 잘 사는데? 

그래서 신앙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구원이나 신앙은 어려운 게 아니고 드물어요. 희귀해요. 신자가 나타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점검에 나서야 됩니다. “저거 분명히 가짜일거야.” 왜? 이미 우리 집단적 자체가 돈을 사랑하는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도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진짜로 성령이 왔을 경우와 하나는 뭐냐 하면 돈이 없는 경우. 돈이 없어 한이 맺혀서 이 판에 신을 바꿔 다른 예수를 믿어가지고, 뭔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생기는지 한 번 테스트해볼까? 라는 식으로. 그렇게 나오는 경우뿐이에요. 

지금까지 한 강의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양심에 부합될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된 신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양심에 하자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될 때 그게 참된 신이라는 겁니다. 자기 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더러운 양심이라는 거예요. 더러운 양심아! 양심이 더럽다는 거예요. 다른 뜻으로 더러운 마음아! 

1장 15절을 다시 보면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래 되어 있죠. 같은 말을 두 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어요. “양심이 더러우니까 그런 행동을 하지.”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 양심을 어떻게 알아? 모르지만 행동하는 것 보니까 양심이 더러운 티를 톡톡 내는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심이 착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체가 결과에요. 추구하는 것의 어떤 결과로 더럽다는 어떤 평가를 받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깔아놓고, 그러면 착한 양심은 뭐냐? 이제 이걸 알아야 되겠죠. 착한 양심이란 “타인과 한 몸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게 착한 마음이에요. 어디를 근거해서 그렇게 하느냐, 착한 마음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항상 성경해석 할 때는 예수님이 원조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기도, 기도 같으면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 헌금 같으면 예수님이 헌금을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이 어떻게 했느냐, 항상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양심은 뭐냐 하면 타인을 견딜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그 죄는 자기 죄입니까? 타인의 죄입니까? 타인의 죄잖아요.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를, 남의 죄를 본인의 몸으로 받아들여서 이걸 견뎌내는 겁니다. 누명, 또는 억울함입니다. 

자, 억울함의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이걸 견딜 수 있는지. 마태복음 2장 한 번 보겠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지금 세월호 물 빠진 정도가 아닙니다.  

헤롯이 누굴 잡겠다고 이렇게 합니까? 예수 잡겠다고 하는 그 행정적 조치에 의해서 누가 죽었어요? 세 살, 네 살도 아니에요. 두 살 아래 다 죽였어요. 외손녀 어디에 갔습니까? 두 살 안 됐잖아요? 두 살 안 됐죠. 한참 예쁠 때에요. 바∙나∙나⬏이렇게 따라하면서 말 막 배우려고 할 때죠. 말도 안 되는데 막 말 배울 시기 아닙니까? 

부모는 조금의 애로사항도 없이 기쁨과 거기에 온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모든 일이 애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항상 애가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데, 이걸 누가 죽였어요? 누가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안 태어났으면 이런 사단이 안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이 먹물로 차 있을 때 아무 문제없어요. 니도 먹물, 나도 먹물이니까. 주님께서 “어! 먹물이네?”하고 튕기는 순간, 그 먹물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저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먼저 튕겨서 그 사랑하는 두 살 밑에 애가 학살당하는 그런 아픔이 있죠. 

그래서 17절, “이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왜 운다고요? 자식을 위해서 애곡하죠. 자식을 위해서. 자, 여기서 더 나아가봅시다. 자식을 위해서 애곡하는 사람이 엄마에요? 아빠에요? 엄마죠. 라헬은 이스라엘의 사랑하는 본처죠. 

라헬이 운다는 것은 곧 새로운 이스라엘의 고통이 예수님 때문에 합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항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운다는 말은 여자는 남자와 결정적인 다른 점이 있어요. 여자는 임신을 할 수가 있지만 남자는 임신을 못해요. 남자는 자궁이 없으니까. 근데 여자에게 자기 안에 다른 어떤 텅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은 그거는 본인이 들어와요? 본인 말고 다른 어떤 타인이 들어오는 겁니까? 타인이 그 안에 들어오죠. 

그러면 10개월 동안 여자는 뭘 하느냐 하면 자기 몸 안에 자기 몸이 아닌 타인과 함께 공생하면서 10개월 동안 그걸 견뎌내야 하는 겁니다. 그것만 견딥니까? 애를 놓고 난 뒤에 애를 내팽개치지 않죠. 키울 때까지 계속 키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엄마가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아중심이에요. 

그런데 애기가 생기고 난 후부터는 그 좋아하는 술 담배도 끊고, 모든 것을 누구 중심으로? 내 안에 있는 타인중심으로 돌아간다고요. 그때 남자들은 뭐하냐? 당구치고 있는 거예요. 당구치고 있다니까요. 지는 지 안에 남이 없으니까. 근데 임신해서 당구 치겠습니까? “당구 치면 이거 안 되지. 다치면 애가 다치니까.”하죠.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있듯이 여성에게 있어서는 이미 타인 때문에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어디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아픔의 후손. 슬픔의 아들. 특히 그 라헬은 하나님의 아들을 놓고 죽어요. 베냐민이라는 뜻이 뭐냐 하면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그 애를 놓고 난 뒤에 엄마가 죽어버려요. 예수님 놓고 난 뒤에 마리아는 죽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죽은 여성이에요. 아들이 중요하지 엄마는 중요하지 않아요. 

근데 생각을 이래 해봅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보지 말고, 예수님이 마리아 몸을 이용했다고 보세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슬픈 운명과 저주받은 운명을 보여 줄 분이 이 땅에 자기와 똑같은 공감을 가져야 될 사람들을 규합하고 그걸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그 애곡과 고통을 미리 베들레헴 두 살 아래 애 엄마들한테 미리 그걸 예고편으로 줬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들의 통곡은 누구 때문에 우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미리 땡겨서 우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만큼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해줄 그 증명을 위해서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야 될 애들입니다. 죽은 아기 엄마들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이 아기들이 슬픔이라는 예수님의 증거물을 생산하는데 동원된 아줌마들이라고 이래 보자 이 말입니다. 

왜 슬픕니까? 자기로 인해 슬픈 것이 아니고, 임신을 했었으니까, 애가 죽는다고 엄마가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애가 죽었지 본인이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애라는 타인의 죽음이 곧 뭐다? 더 살 희망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그야말로 자동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여기 있어도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예수님이 지나간 모든 자국에 그런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타인과 한 몸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 이게 선한 마음, 착한 마음, 복음을 아는 마음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3.206)17-05-10 20:55 
서울 의존교회 170414b (감당하는 타인)-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다 속해져 있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 자본주의 사회에 속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왕을 쳐다보고 안 산다 이 말입니다. 왕을 쳐다보지 않고 산다는 말은 누굴 쳐다본다는 말입니까? 내 인생은 내가 쳐다보죠. 이게 민주주의에요. 

다른 사람이 표 두 장 안 가져가죠? 한 표 찍잖아요. 한 표 찍는다는 말은 임금님이 나를 책임지지 않아요. 정치 잘 할 뿐이지, 정치 잘 한다고 모든 것을 바치지 않습니다. 대통령 지 월급이 있으니까 그것만 받아가라 이 말이죠. 미움 사면 다른 사람이 나오면 되고. 우리가 투표해서, 집단적 표상에 의해서 나오면 되거든요.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을 하는데 토지를 위해서 일 안 하죠. 토지를 위해서 일 안 한다는 말은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분업화가 된다는 거예요. 자기 전문분야가 있어요. 전문분야. 전문분야는 경제에 있어서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효율성을. 한 분야를 수 십 년 해보세요. 장인(匠人, 기술자) 됩니다. 장인 되죠.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하는 것과, 한 사람이 전문분야에 매진하고 각자 분야에 매진할 때 나중에 생산량 개수를 한 번 비교해보세요. 이거는 비교도 안 되죠. 

그렇게 생산된 전문분야의 효율성은 어디서 평가를 받아야 돼요. 야, 효율 좋다, 안 좋다는 것을 어디서 평가를 받는가? 평가 받을 때에 어떤 사람은 전문분야에서 3시간 일했다. 그러면 3시간만큼의 월급을 줘야 해요. 어떤 사람은 4시간 일했다. 4시간만큼의 임금을 줘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공평해보이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시간을 더했다고 해서 양질의 똑같은 효율성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효율성은 어디서 측정이 되는가? 시장에서죠. 시장에서. 시장에서 만든 제품이 인기 있게 잘 팔리면 3시간 일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월급을 더 받고, 4시간 일했더라도 내가 만든 상품이 잘 안 팔리면 10분 일 한 것보다 단가가 더 떨어지고, 시장에서 결정해요. 이 자율적인 시장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번다, 이게 맞는 거예요? 이게 틀린 거예요. 옛날에는 성실하게 일한 사람은 말 그대로 성실한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물건을 성실하게 만든 사람은 바보에요. 이미 패션이, 스타일이 지난 거예요. 폐기처분해야 해요. 

어느 시장에서? 국내시장에서? 아니요. 전 세계 통합시장에서. 전 세계 통합시장에서 하기 때문에 이게 개인별 분업화정도가 아니고 국가별로 분업화되어 있어요. 따라서 국가별로 분업화된 것을 몰아주고, 특화된 산업에 몰아넣었는데, 그게 세계시장에서 인기가 없으면 한꺼번에 나라가 통째로 부도가 나요. 나라가 거지꼴을 못 면하죠. 통째로 나라가 못 살게 돼요. 집단으로. 

그런데 그 나라에 농땡이도 있고 열심히 한 사람도 있어요. 백날 소용없어요. 농땡이나 열심히 한 사람이나 다 같이 못 살아요. 이 말은 개인의 운명은 개인에게 달려있지 않는 세상. “하나님이여, 저 열심히 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돈 더 벌 수 없는 세상. 더 이상 기도한다고 해서 더 재산이 늘어나지 않는 세상. 기도한다고 해서 부자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도해야 될 이유조차 이미 상실해버린 세상이죠. 아까 인간의 양심은 이 시대에 뭐로 변했다? 돈으로 바뀌었잖아요. 옛날에는 뭐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임금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왜? 임금은 신의 아들이니까. 임금이 잘 되면 내가 잘되고, 임금이 못 되면 신에게 벌을 받아서 못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해와 달과 바람과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께서 이 농토에다가 비를 안 내린다든지 태풍이 불어버리면 끝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신이 좋든 싫든 간에 신의 그 전능하심에 예속된 상태가 옛날 임금제도였어요. 왕 제도였어요. 

그래서 그 임금 옆에는 제사장이 있어가지고 하나님을 다룰 수 있는 방법, 신을 다룰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사무엘상 같은 것을 보면 굉장히 쉬워요. 뭐냐 하면 우상을 버리고 사무엘이 금식하고 기도했더니만 응답을 누가 합니까? 하늘에서 응답을 했잖아요. 이런 현상이 그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을 때 금식하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응답이 안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수완에 놀아나시는 분이 아니에요. 홍해 갈라졌을 때에 갈라지고 건넜잖아요. 그럼 그 다음에 요단강입니다. 어떻게 건널까요? 엘리베이터 5층 눌러놓고 한참 있으면 물 갈라집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정상입니까? 안 갈라지는 것이 정상입니까? 안 갈라지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근데 과거에 한 번 갈라졌다는 것은 이게 정상이에요?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닌 거예요.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라는 말은 인간자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구분하는 방법도 정상이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인처럼. 정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정상인 인간이 정성만 드리면, 우리 양심은 착하니까, 우리 양심가지고, “하나님 은혭니다.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추수가 잘 됐습니다.”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그러니까 선한양심가지고 총동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이에요. 

아벨은, 아벨 제사의 제일 마지막은 뭐냐 하면 아벨 본인이 죽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가인은 나쁘고, 아벨은 착하고, 이런 게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벨도 착하지를 않아요. 다만 아벨의 배역, 역할이 뭐냐 하면 억울하게 죽어야 해요. 누구의 개입으로? 본인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안 죽을 죽음을, 하나님이 아벨의 손을 들어줬다는 식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가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되면 아벨의 죽음이 아니고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 바로 가인의 배후에 있던 악마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극을 이미 창세기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는 벌써부터 증거가 나온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자진해서 아벨 될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거는 없는 거예요. 베들레헴의 어떤 아주머니가 애 키우면서 ‘이쯤해서 우리 아기가 죽을 때가 됐는데..’이러면서 애를 키우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이렇게 키우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울지를 않죠.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여기 베들레헴 엄마들이 울었다는 말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혀 예상 못한 울음을 운 것처럼 오늘날 성도의 구원도, 성령의 찾아오심도 전혀 예상을 못한 거예요. 예상해서 온 성령 같으면 그거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난로 옆에서 뜨거운 기도하면서 “지금 새벽 2시 45분쯤이면 성령이 오실 때쯤 됐는데..왔다! 왔다!” 이거 백퍼센트 가짜에요. 랄랄랄랄~하는 것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은 우리가 할 말을 잊어버려요. “뭐야? 왜 내가 예상한대로 나를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면 안 돼요. 조금도 섞이면 안 돼요. 그래서 전도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도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그 전도의 내용을 습득을 하려고 해요. 습득하게 되면 거짓된 양심에다가 지식이 더 추가되어서 자꾸 뭐가 되느냐 하면 가짜 구원을, 그걸 계속 유지시키려고 행함으로 노력을 하게 돼요. 

근데 사도바울이 복음 전할 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노력을 했죠. 사도바울이 예상해서 ‘내가 이쯤 죽였으면 예수님이 찾아오실 텐데..’이런 생각 했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사도바울이 한 게 뭐였는가 하면 “나는 정당하다.” 율법에 흠이 없는 거예요. 나는 정당한 거예요. 

정당하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정당한 사도바울과 한 대화내용을 한 번 보세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하니까 “나는 누구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이 자기 정체를 밝히는데 엮어버리죠. “니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럼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 “내가 핍박하는 주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겠죠.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앞세우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저 멀리 뉴질랜드에 계신 분이에요.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죕니까?” 요새 기억력이 떨어져가지고 한 번 봐야 돼요. 강의 중에 또 카톡 보기는 처음이네요. 좀만 기다려보세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스가랴 12장 10절을 보면서 이것조차도 죄입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들이 통곡하는 것, 그게 죄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했습니다. 그게 죄가 되는 이유는 반드시 십자가와 연관성을 맺으려면 죄가 아니면 연관성이 맺어지질 않아요. 내가 이거는 죄라고 예상한 죄는 온전한 죄가 아니에요. 다윗처럼
진짜 죄는 십자가로 엮여져 있음을 통째로 받아들이면서
구조상 거기에 같이 엮어져 있는 죄. 


그 죄를 성도만이 아는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는 죄에요. 그러니 죄, 죄, 한다는 것은 곧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나는 그 구원의 구조에서 죄인으로 관여하게 되고 주님은 그 죄 때문에 희생으로 관여하는 것. 그래야 짝이 맞죠. 배역이 맞는 거예요. 그때 죄. 

다윗이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만 죄 지었다고 그때 나오는 그 죄.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죄가 나로 하여금 죄 짓게 한 거예요. 따라서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나는 죄인이냐, 아니냐, 라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죠.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독자적으로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질문 자체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에요. 

거기에 나는 독자적으로 나는 어때요? 하고 내가 끼어들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이미 엮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보고 “만약에 당신이 아버지라면 나는 어떻게 하면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라고 한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아들이 되는 것이지, “아버지십니까? 그럼 이제 나는 슬슬 아들 해야 되겠네요.” 라는 이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십자가가 나타날 때는 뭐도 동반해서 나타난다?
구원받는 자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서
십자가가 이미 완료가 된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걸 아는 자한테는 이게 어렵지 않아요. 그냥 쉬워요.
그런데 독자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구원되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걸 사적구원, 개인적구원이라고 하는데, 개인적 구원한테는
이러한 복음적인 구조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또 그래야 되고. 

요단강 앞에서 홍해처럼 백날 기다려봐야 안 열려요. 왜? 열리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내가 나중에 구원받고 난 뒤에, 죄인 되고 난 뒤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게 성립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우째 이런 일이?” 같은 말이에요. “어떻게 제가 구원됩니까? 어떻게 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 됩니까?” 같은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걸 안다면 “어떻게 살면 바르게 삽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아, 어떻게 살아도 막 사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 이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 받는가?” 라는 것은 성경에 없고 예수님의 자기 스토리입니다. 성경 전체는 내가 이런 식으로 일 해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역할이 있을 뿐이고.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베들레헴 두 살 아래로 다 죽은 애가 결국 무슨 역할을 한다 말입니까? 난데없는 울음을 울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애 키우고 잘 살아보겠다고, 애 키운다고 동사무소에서 돈 20만원 받고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 살만하네, 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애가 죽어보세요. 정나미가 떨어지죠. 

그런 이유가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성한테는 뭐가 있다? 타인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이미 신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타인과.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는 자기를 위해 살다가 자식을 놓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애 앞에서는 죄 짓는 일로 느껴지겠죠. 자연스럽게. 애 때문에 골치 아프고 잠도 못자지만 그것 때문에 부모가 짜증내지는 않습니다. 

이미 짜증낼 주체는 애 쪽으로 넘어가 있기 때문에. 지가 짜증나서 괴로운 것이 아니 
고, 그것보다 더욱더 우는 애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애 심정하고 하나가 되어서 그게 더 아파요. “울지 마라 내 아이야!”하고. 그게 더 아픈 거예요. 남자는 뭐하고 있는데? 남자는 애가 운다고 옆방에 가서 따로 자고 있고.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잠 못 잔다고 옆방에서 자고 있고. 밤새도록 엄마는 애를 달래고 있고. 아빠는 애 놓으면 도망치기 바쁩니다. 

“아이구 우리 애 똥 봐라. 얼마나 이쁜지.”하는 거예요. 똥도 이쁜 거예요. 나보다 더 사랑스러워요. 자기 똥은 안 이쁘거든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이쁜 것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 어린아이가 예수님 때문에 죽어나갔으니까, 헤롯을 원망하겠어요? 예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하죠. 전통적으로, 이 전통 속에 있기 때문에. 자아라는 것은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인데 당신이 괜히 설쳐가지고, 우리 착하신 임금님이 화를 내서 우리가 당했다. 임금님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는 일, 하늘의 일이에요. 

따라서 그 하늘의 일을 화내게 했던 누가 나쁜 사람이에요? 예수라는 사람이 나빠요. 예수라는 사람이. 북한에다가 뭔가 밀가루라든지 의약품이라든지 구호품을 주잖아요. 구호품 받으면서 우리 김정은 지도자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핵실험 때문에 구호를 잠시 중단하겠다고 이러면, 니가 우리 김정은 지도자를 모독하면 안 돼! 라고 이렇게 화를 낸다고요. 도와주면 도와주는 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모든 영광을 지도자 동지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게 전통이라니까요. 전통. 

왜 그러면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르느냐? 인간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보다도 어느 것이 편해요? 왕제도가 편해요. 왜? 민주주의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본인이 잘 사고 못 살고는 누구 책임이에요? 본인 탓으로 돌려야 되는데, 신적인 영웅이 있으면 잘 살아도 은혜고 못 살아도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신이에요. 종교라니까요. 종교. 

그래서 종교가 아편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가. 잘 살아도 주의 은혜, 못 살아도 주의 은혜, 이것보다 큰 종교, 그런 아편이 어디에 있어요? 종교가 도파민 팍팍 올라가죠. 북한에서나 중국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유가 신 때문에 그래요. 신은 집단적 표상으로 있는데, 그것에서 달리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에 다른 신을 믿는다고 해석하잖아요. 또 그 말이 맞고.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우리나라가 이래야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거는 어떻습니까? 그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죠. 복음 아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 말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복음도 모르니까. 복음 아는 사람에게 왕이 누굽니까? 주가 누구에요? 그리스도가 왕이잖아요. 이미 왕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왕의 백성이죠. 

그럼 인생을 누가 책임집니까?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잖아요. 그 책임지는 분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누가 되든 어차피 이 세상은 지옥인데. 그걸 뭐 하러 신경 씁니까? 또 이래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준 사람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거는 왕제도가 되죠. 그건 민주주의 아니죠. 왕 제도죠. 

그런데 그래도 대통령은 하나님이 뽑아주셨다고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왜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심이 그런 세속적인 왕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에 보면 세속적인 임금을 뭐로 봅니까? 짐승이죠. 이 짐승의 성격은 이미 하나로 확정이 되었어요. 왜? 우상은 하나니까. 금은동. 세상역사가 끝날 때까지 바벨론 제국의 왕 제도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날 것이요, 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날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임금의 절대적인 성격을, 나는 당신 덕분에 산다는 그런 것을 하지 말란 말이죠. 다만 그들은 로마서 13장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그런 사자, 심부름꾼에 불과한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예수님과 고난을 함께 한다고 했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럼 예수님의 양심은 어떤 양심이냐, 그것을 열왕기상 17장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에요. 

이번 여름수련회를 열왕기상을 합니다. 열왕기상에서 주목할 것은 뭐냐 하면 두 개의 노선을 주목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지상의 다윗의 혈통에 의한 왕들의 정치술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선지자들과 얼마나 생각이 다른가를 알아봐야 해요. 얼마나 생각이 다른가를.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의 세력 또는 권력, 이 세상의 권력은 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어요. 따라서 선지자에게 호응한다는 것은 기대하면 안 돼요. 이미 이들은 권력편이에요. 권력편이라는 말은 임금님의 여하에 따라서 이 토지가 흉년이 되고 풍년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유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풍년 주고 흉년 줬기 때문에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농경시대에 사람들이 이 풍년과 흉년은 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잘 활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이단, 이단, 하지만 이단은 하나님이 그렇게 일부러 조성한 거예요. 

이단이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안 돼요. 이단 없는 선지자가 있습니까? 모조리 다 이단이기 때문에 누구의 가치가 빛나요? 선지자의 가치가 빛나는 겁니다. 빛나면 뭐합니까? 죽는데. 고난 받죠. 고난 받거나 말거나 선지자만이 천상회의를 알고, 하늘을 알고, 그 외에는 땅밖에 몰라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땅의 일만 알고 나는 하늘의 일만 이야기를 하니 어떻게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겠느냐, 따라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저주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앞뒤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자동적으로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땅에서 태어난 자체가 저주에요. 하늘의 일을 모르니까. 그만큼 요한복음에서는 이 땅이 어두움 자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신앙생활 자체가, 성도가 된 자체가 이게 좀 특이해요. 힘들다가 아니라 드물다고 이야기했죠. 이게 정말 드문 일입니다. 참 드물어요. 드물기 때문에 외롭다는 것은 그건 당연한 거고요. 목사님, 말이 안 통해요? 말이 안 통하도록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개나 소나 다 알면 다 말이 통하게요. 말이 안 통하게끔 구원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가족끼리는? 가족이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찢고 구원해줘요. 가족을 찢고. 처나 자식이나 가족이 뭔데요? 찢어버리고. 가족보험 든다고 다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가족 자체도 다 해체해버립니다.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라고 했는데요? 한 사람 믿는다고 동생도 오고 시누이, 올케도 오고 다 오는 줄 압니까? 안 와요. 올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어쨌든 간에 특이성이라니까요. 특이성. 

이게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특이해요. 예수 믿는 것은 특이해요. 그 특이성이 또 나와요. 뭐냐,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갑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여호와께서 명령을 합니다. 파견합니다. 그 과부가 평소에 기도를 많이 했다든지 하나님을 섬겼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 과부는 그냥 나라가 통째로 하나님께 벌을 받아가지고 비가 안 와요. 참 골치 아프죠. 

옛날에 비가 안 올 때는 그 통치자가 살해당했어요. 왜 구라 쳤느냐 말이죠. 왜 신의 아들이라고 구라 쳤느냐?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은 신의 아들이라고 구라 치기 전에 먼저 백성들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임금이 “예.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좋은 것을 못할 것이 뭐 있어요.” 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했는데 가뭄이 들어서 기도했는데 비가 왜 안 왔느냐고, 그래서 죽였습니다. 멕시코에서. 마야문명. 아스텍문명. 임금이 무서워요. 임금 되는 자체가 무서워요. 지금 우리나라는 서로 하려고 해서 문젠데. 이게 임금 자체가, 지도자 자체가 무서운 거예요. 잘 살게 해달라고 뽑아놓았는데 못 살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다 짊어지웁니다. 참 국민들이 나쁘죠. 

그래서 사르밧 과부는 믿음 좋은 거, 이런 것이 없이 그냥 통째로 가난한데, 역시 과부였으니까 또 가난한 거예요. 가난한데 어느 정도 가난 하냐, 12절에 보니까 그들이 마지막 떡 조각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때 타이밍을 맞춰서 엘리야가 들어갑니다. 딱 들어가서 “떡 좀 도!” “떡 다오!” 이랬어요. 떡을 주면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죽을 수밖에 없죠. 그 떡이 마지막 떡이니까. 마지막 밀가루에다가 마지막 기름에 구웠으니까 그것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바탕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 바탕에는 하나님이 죽이는 겁니다.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대부분 서서히 죽여요. 그걸 늙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요. 점점 늙어가요. 우리의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하나님이 원합니다. 우리를 늙어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따라서 이걸 안다면 “왜 죽이십니까?” 라는 이 요소를 빠트리면 안 돼요. 근데 사람들은 늙어 죽어가면서 그 변화가 너무 미미하니까 아직 자기가 옛날의 한창 때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해가지고 천년만년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분명히 자기 주변에 나이 80, 90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하고 자기하고 다른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아이구, 나이도 많이 먹었다.” 나쁜 짓해서 나이 많이 먹은 것이 아니에요. “아이고, 머리가 하야시네.” 나쁜 짓해서 하얘지신 게 아닙니다. 염색을 안 했을 뿐이죠. 뭐.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 줄 몰라요.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줄을 모르고 지 아는 것만 알아요. 이게 분업화의 문제인데. 

그러니까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여기서 해석을 잘 해야 됩니다. 동정해서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리라 했기에 죽을 뿐이에요. 죽어가기에 불쌍해서 살려준다, 이런 선지자가 아니에요. 두 살 먹은 애가 베들레헴에서 죽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기로 되어 있어요. 이걸 앞당겼을 뿐이지. 두 살 먹은 애가 나중에 90되면 또 죽어요. 죽는다고요.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약간 일찍 사용해서 보냈죠. 

우리 인간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실질적인 진실은 뭐냐,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리고 더불어 진실은 뭐냐 죽으면서 죽는다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하나 더 보태면 죽는다는 것이 무섭다는 거예요. 죽어가는 것이 사실이면 받아들여야지, 무섭기는 왜 무서워요? 오랫동안 살 겁니까? 그렇지도 않으면서. 

자, “먹고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로되 두려워 말라 죽든 말든 모르겠고 우선 나를 위해서 작은 떡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애를 위해서 만들라”해서 그 떡을 먹었습니다. 먹고 난 뒤에 열왕기상 17장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엘리야가 하는 일에 대해서 사르밧 과부가 예상했습니까? 예상 안 했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죠.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쪽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기존에 한통속이에요. 그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양식 떨어지면 죽는다, 이거 맞는 말이 아닙니까? 양식 떨어지면 아마 선지자가 올 걸? 이랬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이 타이밍을 우리한테 그대로 집어넣는 거예요. 살다보니 구원됐다가 아니고 오늘 죽어도 마땅한데, 어? 주께서 구원 주셨네! 이래 된다 말이죠. 이 사르밧 과부처럼.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난 사람은 더 이상 그때부터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는 이 공식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안 찾아도 되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이 구원이라는 것이 특이하니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왔어요. 이것은 과부를 잘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 본인의 스토리, 더 나아가서는 엘리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기 스토리를 그렇게 구성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삽니까? 예수님 자기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우리를 참한 인생 만들려고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누구 것이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죠.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아, 이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죽어 마땅하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토해내야 합니다. “엄마! 또 백점 맞았어.” 아,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구나. 저게. “엄마! 나 이번 법대 들어갔어.”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에요. 저게. “여보! 나 오늘 보너스 탔어.” 저게 죽어 마땅할 짓이 되는 거예요. 저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것이 있잖아요. 애들 공부 잘하고, 남편 돈 잘 벌어오고, 평소에 아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주고,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죽을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내가 죽을 이유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이유들이 그게 되는 겁니다. 

프로야구를 응원하는데 삼성라이온스를 응원한다. 1승 10패. 꼴찌. 그런데 어제 이겼다 말이죠. 어제 한화한테 이겼다. 우와!! 그게 뭐냐 하면 죽을 이유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응원한 팀이 이겼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금 류현진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또 졌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그럼 어떻게 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류현진에게 힘을 보태줘서 1승을 하든지, 타자가 못 치든지 해가지고 내 소원대로 돼야 되는데, 안 들어줄 때 감사가 쑥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르밧 과부가 이거 먹고 나 우리아들하고 죽을란다, 라고 할 때 지금 기분 좋게 이야기합니까? 슬퍼서 이야기합니까? 슬퍼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 이 사르밧 과부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주께서 죽이신다고 하더니 정말 죽이시는구나. 이때를 기다렸나이다.”이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렇지. 내가 밀가루 남아 있을 때 얼마나 고민했다고. 언제 저거 다 먹고 죽나?”하고 있는데, 근데 마침 오늘이 그 D-day라. 

마지막 남은 것을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왜 당신이 뭔데 우리 죽는데 찾아옵니까?” 막 화내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니나 내나 팔자 더러운 팔자. 지지리도 복이 없는 이 집구석. 남편도 죽고 나는 과부되어 니하고 같이 살면서..우리 같이 죽자 고만.” 이게 뭐 기쁜 날이 아니잖아요? Happy birthday to you~♬ 뭐 지금 그런 날이 아니죠? 즐거운 시간이 아니죠? 

난데없이 와서 “비가 다시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언제까지입니까? 비가 다시 올 때까지. 다시 말해서 너희들처럼 비는 누구에게 속했다? 하늘의 노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맞다. 맞는데, 너희들은 하늘이 왜 노했는지 이유를 모른다. 이 사르밧 과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이유는 누가 아느냐, 이제 엘리야가 와서 알려줍니다. 어떻게 알려주느냐, 그 전에 오늘 강의와 관련해서 이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과 함께 있죠. 자, 그런데 엄마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사랑하겠죠. 키워볼라고 하는데 너무 가난해서 못 키웠죠. 

그런데 17절에,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무슨 시추에이션이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습니까? 밀가루하고 기름이 안 떨어지게 해서 살려줄 때는 언제고? 멀쩡하니 이제는 불행 끝 행복 시작하려고 하는데, 세상에! 그 당사자인 아들을 죽여 버렸어요.  

그럼 과부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아들아!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선지자 덕분에 살았다.”고 좋아하자마자 아들이 죽었어요. 이럴 것 같으면 그때 찾아오지를 말든지. 마지막 먹고 굶어죽을 때 놔두든지, 왜? 살려주고 죽이고. 이거는 인간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 두 번 죽이는 거. 그렇잖아요? 

이게 무슨 스토리입니까? 이거는 과부스토리도 아니고, 이게 누구 스토리에요? 하나님의 스토리가 되는 거예요. 살고 죽고 다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스토리를 만드는 하나의 장면, 장면들이에요. 죽었으니까, 그 엄마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뿔따구 났어요. 

18절에,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자는 아들이 죽은 것은 누구 때문에 죽었다? 내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회개하는 태도가 아니죠. 그래, 나 죄 지었다. 죄 많은 여자다. 그래. 그래서 죽이나 그래. 못 죽여가지고, 내가 알아서 죽일 때는 안 죽이고 기어이 기쁨 누릴 그때, 니가 이런 죄 지었잖아? 니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 이래서 죽이나?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르밧 과부의 사고방식은 뭡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착하면 살아있고, 죄 지으면 죽는다는 일방적인 그 양심. 자기는 문제 있다고 생각 안 하는 그런 양심을 유지하고 있죠. 그리고 애가 슬슬 아픈 게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끝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살아있는 사람하고 상대 안 해요. 죽여 놓고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자기가 죽었다고 알고, 죽은 자에게 주께서 십자가 피로 구원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 덕분에 살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죠. 

19절,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여인의 아들인데 그 품이 어디로 옮겨집니까? 엘리야 쪽으로 옮겨지죠. 그 다음에 21절,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게 뭡니까? 아까 했죠. 타인의 몸인데 엘리야는 같이 엎어졌죠. 한 몸이 되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자기에게 덮어씌우는 그 장면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을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이렇게 기도할 때 아이의 혼이 아이 몸으로 돌아왔다. 그럼 엄마가 아이를 살렸습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살린 거예요? 엘리야가 살렸죠. 하나님이 살렸잖아요. 그럼 아이의 그 원초적인 것은 엄마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 아들이죠. 

그래서 성경은 육의 아들을 뭐로 바꾼다?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개입돼요? 바로 선지자 같은, 엘리야 같은 예수님이 개입되어야 돼요. 우리가 믿는다는 그 양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죠. 예수님의 몸에 뭐가 있다? 타인의 몸, 그것도 죄 된 몸을 자기가 한 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능력이, 그러한 약속이 누구한테만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는 거예요. 

러니까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혼자 훌륭하십니다.” 그런 뜻은 아니잖아요. 내 죄를 가져가서 나로 하여금 이 죄를 없애고 예수님과 한 몸 되게, 한 지체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믿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는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없다? 못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 거예요. 

나의 어떤 행위도 나를 구원하는 데에 보탬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착한 양심이에요. 그러니까 이 마음은 성령 받은 마음이에요. 성령 받은 마음. 그게 바로 교인들이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왜? 서로가 용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머리죠. 우리는 몸의 지체죠. 그러면 우리가 따로 발이고 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어디를 경유합니까? 우리 마음속에 이미 성령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겁니다. 타인을.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누가 더 나쁜 짓 했는지, 이걸 묻는 것이 아니죠. 자기의 행위로 죄인 된 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 복음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이 디도서에서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편지를 하는 겁니까? 디도서 앞에 뭐라고 했어요? 4절에 한 번 보세요.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같은 뭘 따라? 같은 믿음을 따라. 선물로 받은 믿음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뜻이다 말이죠.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특이성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되는 거예요. 특이성을.
성경 천 독, 만 독을 해도 소용없어요.
성경책은 하나님이 쓴 겁니다. 하나님이 쓰신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게 해석이 돼야 되죠.
제가 지난 화요일에 부산강의에서 지젝을 했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책이고 해석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책이라고 했죠.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안에서 돌아다닌다. 주님의 해석 안에서.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해석하는 겁니다. 영의 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의 해석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미 결론지어졌어요.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확정된 상태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그 아들의 몸을 깔고 있으면서 기도했을 뿐이죠. 

예수님은 기도 정도가 아니죠. 겟세마네 기도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기도 내용대로 아이가 죽어야 될 이유마저 예수님 자기의 책임으로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같이 엎어졌던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묻지 않는 거예요. 그에게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주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사. 

이거는 교회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 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교회 다니든 안 다니든 이 사실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줘요. 다만 교회 가는 것은 혹시 나 같은 이런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가보죠. 물론 없지만. 사람들이 이런 사실도 모르고 교회 가는 이유는 교회 가서 복 받으려고 가는 거예요. 복 받으려고. 내가 안 죽으려고. 더 살라고. 더 여유 있게 살려고. 더 행복하게 살려고. 

그러니 그게 절이에요. 절간이고. 그게 무당집이고 그런 겁니다. 십자가 빼놓고 대나무 있잖아요. 플라스틱 대나무 꽂아야 돼요.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있잖아요. 노골적으로 예배당 옥상에다 대나무를 꽂아야 돼요. 대나무를. “훠이~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흔드는 대나무 말이죠. “뭣이 중헌디!” 하는 것 있잖아요. 굿 풀이 하는 것. 그거라니까요. 

굿 풀이를 그렇게 해요. 큰 무당 있고 새끼 무당이 있어가지고 찬송 인도 하면 거기서 주여! 하고 있고. 정성 다 내놓고. 성의 다 표하고. 이렇게 정성 다하는데 복을 안 주면 하나님 니가 나쁘다. 이런 식으로 깔고 들어가잖아요. 더 하다가는 차 시간 늦겠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한 양심은 아무도 없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양심이 들어와서 우리의 양심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늘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