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70414a (감당하는 타인)-이 근호 목사
오늘 해야 될 강의도 방금 질문한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어요. 여기 디도서 1장 15절에 보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사도바울이 디도한테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뭐기에 사람을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느냐 이 말이죠. 니나 잘하세요, 라고 하죠. 니는 깨끗하다, 니는 더럽다, 라는 말을 사도가 과연 할 입장이 되느냐 하는 것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돼요.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옛날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을 살아요. 그렇죠? 각자 자기 삶을 살잖아요?
누구에 대해서 평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맘에 안 든다고 그 사람의 운명이 평한 대로 졸지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장희빈 같으면 또 몰라요. 집에다 짚으로 라이벌 왕후를 만들어 놓고 막 바늘 꽂아서 흑마술을 하죠. 내가 하는 행동이 너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거는 미신이고요. 실제로 우리가 누구를 욕한다고 해서 그 사람 운명이 갑자기 그날로부터 가슴 통증이 있고, 헉하고 죽고 그렇습니까? 그런 것 없죠.
그러니까 인간이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소나기가 오게 되면 빗줄기가 다 따로 떨어지죠. 그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서로가 한 줄기의 빗줄기처럼 다 따로 떨어져요. 니는 니 빗줄기로 떨어지면 되고 나는 내 빗줄기로 떨어지면 되죠. 이쪽 빗줄기가 저쪽 빗줄기에 영향을 주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 이 말이죠. 거기서 나온 사상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닙니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특히 민주주의 공화국 할 때 민주주의 헌법에 보면 개인이 갖고 있는 자율권을 극대화시킨 겁니다. 나는 행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나는 누구한테 명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을 권한이 있다. 나는 사유재산 지킬 권한이 있다. 이런 자율권.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민주주의 헌법에 이게 보장이 되어 있어요. 민주주의 헌법에 보장이 되어 있다는 말은 옛날에는 안 그랬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옛날에는 안 그랬다는 말은, 백성이라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는 백성이라는 말은 없지만, 옛날에는 백성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 백성이라는 것은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도 그게 나오죠. 같은 빗줄기인데도 불구하고 왕 빗줄기는 굵습니까? 아니죠. 일반백성들은 숨을 작게 허억하고 쉬고, 왕은 하악하고 호들갑 떨면서 쉽니까? 아닙니다. 똑같아요.
왜 똑같은 인간인데 왕한테는 초월적인 특권을 부여하는가? 이런 질문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합니다. “니가 뭔데?” 이러는데. 민주주의라는 것은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아니고, 인간이 처음 생길 때는 민주주의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아니고 왕국입니다. 왕국. 초반에는 역사적으로 잘 모르니까 어느 정도 역사가 형성되고 난 뒤에 생긴 국가 제도는 왕 제도에요. 그리고 역사적인 것을 문자로 어떤 스토리를 기록하는 것은 국가 왕 제도가 성립되고 난 뒤에 일어나는 현상이거든요.
왕이 있다, 만약에 민주주의에서 살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한 30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임금님이 행차한다고 “물렀거라! 물렀거라!”하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니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면 되지, 니가 뭔데 내 갈 길을 물렀거라 하느냐? 니가 뭔데? 그 인간 참 건방지네.” 이래 되잖아요. “니가 뭐야?”라고 물으면 옛날 왕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그냥 인간이고 나는 신의 아들이야.” 신이 도입된다고요. 신이요.
신이 도입되는 그 역사가 인류역사에 거의 99퍼센트에요. 왕이 우리보다 다르다는 것. 겨우 1퍼센트 정도가 인류역사 6000년을 보게 되면, 지금 민주주의가 된 것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이 1776년이니까 200년 밖에 안 됐어요. 200년 전에 아프리카 같은 데 가보면 추장이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특이한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가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왕 제도를 보고 “쟤들 왜 그런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게 정상적이냐 하면, 왕 제도가 정상인 이유가, 민주주의 정상이 아니고 왕 제도가 정상인 이유는 전통 때문에 그래요. 전통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전통과 관습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게 없어요. 여자들이 시집와서 그 시집의 전통과 관습을 하루아침에 박살낼 수 있습니까?
시집을 갔는데 그 집에서 조상 제사 드리더라. 오늘 돌아가신 시할머니 제사다. 그럼 음식 할 때는 지가 전이며 뭐며 맛있는 거 다 주워 먹다가 제사를 딱 할 때,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치면, “자 갑니다!” 해가지고 상을 뒤로 엎어서 박살낼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 정도 하면 이거는 힘센 도봉순이 돼야지 보통 힘으로는 그렇게 안 되겠죠. 왜 그렇게 안 해요? 그냥 니는 교회 다니니까 빠져라 해가지고 소극적으로 대항할 뿐이지 왜 그렇게 못하는데요?
이게 전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마음이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습득한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습득한 지식 말고, 그 지식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권위를 가지고 들어와요. 어떤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들어온다니까요. 그 정신적인 압박감이 뭐냐 하면 우리 집안의 내력이다, 전통이다, 이런 걸로 들어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의 전통이나 내력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이 세상에 우리 집안 밖에 없습니까? 옆집도 있잖아요? 그죠? 그럼 한 시대에서 우리 집안하고 옆집 집안하고 전통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같아요. 그럼 옆집의 그 옆집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요. 같으니까 같은 백성이고 같은 국민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집단적 표상이라고 합니다. 집단적 표상. 조상대대로 인간들은 처음부터 신을 찾았습니다. 사단이 어디서부터 났느냐 하면 신을 찾는 것부터 난 거예요. 신을 찾았고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땅에 살아요. 제가 지금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어디에 있고? 하늘에 있고 인간은 어디에 있고? 땅에 있고. 그럼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이 땅에서 안 만든 것이 있어요. 인간이 이 땅에서 재배하지 못한 거나 만들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늘의 달과 별과 해. 특히 해. 바람. 바다. 인간들 중에서 바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바다 만들었습니까? 지가 바다 만들고 지가 거기서 명량해전 했습니까? 아니죠. 그럼 지가 명량해전 전투를 어디서 했습니까? 바다에서 했잖아요.
그럼 이순신 장군이 그 바다에서 왜구하고 전쟁하면서 그 바다는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을 합니까?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죠. 조물주. 왜? 그게 관행이고 관습이니까. 그럼 인간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뜻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이 들고 태풍이 오고하잖아요. 그럼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들부터 온 정보가 있어요.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제사를.
우리가 역사를 고등학교 때 잠깐 배우고 끝나버렸는데, 우리가 역사에 관심이 없다가 아니라 관심이 있어요. 관심 있기 때문에 7시 뉴스를 보는 겁니다. 7시 뉴스 9시 뉴스가 뭐예요? 이 시대의 역사에요. 지금 북한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트럼프는 이렇고 저렇고, 이게 역사거든요. 현재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서. 근데 그 역사가 요즘은 소식이 빠르게 온다 뿐이지. 옛날에는 소문, 소문을 통해서 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깊은 산골에 있으면 10년 전의 일도 모르고요. 필리핀에 있던 어떤 일본 할아버지는 전쟁 끝난 지 40년 지났는데 아직도 전쟁 중인지 알고 있어요. 혼자 피신해 있다 보니까 전쟁 중인지 알았어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들어오고 난 뒤에 철도가 놓이고 무선전자기기들이 이게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 속도를 높여버린 겁니다.
근데 이걸 아셔야 해요. 속도를 높였다고 해서 역사가 빨리 가는 것이 아니에요. 빨리 가는 역사는 없어요. 빠른 역사는 없어요. 역사는 그냥 지금 일어난 일을 인간의 기억대로 모이는데, 그냥 혼자서 역사는 없고 뭐라고 했습니까? 집단적 표상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이상하게 마음이 하나로 같은 것.
만약에 여기에 있는데 옆 동네에서 대통령 뽑지 말고 왕을 뽑자고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어긋납니까? 집단적 표상에 어긋나죠. “니 와 왕을 뽑아야 하는데?” “옛날부터 줄곧 전통으로 우리의 왕을 뽑았다.” “근데 지금 이미 우리는 별난 왕이 없는데 왜 왕을 뽑아야 하느냐?” “아니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지배할 때는 인간들 가운데서 영웅적이고, 한 사람을 유독 특별한 사람으로 삼아서 그에게 지혜를 줘가지고 이 땅을 섬기게 했다.”
그러면 왜 여러 명을 하면 안 되는가? 그거는 가야 아시죠? 신라 밑에 가야. 가야가 그렇게 잘 살고 금이 많고 철기가 많은데 왜 망한지 알아요? 거기에는 왕이 없어요. 그래서 6가야에요. 협의해서 한다고요. 협의해서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왕이 있는 신라한테 고구려한테, 제일 먼저 고구려한테죠. 고구려한테 망했어요. 집단적 표상이 없는 거예요.
니 고을은 니 고을, 내 고을은 내 고을 이래 하는 거예요. 협의 할 것이 있으면 같이 협의하고. 만약에 홍수가 났을 때 댐은 어디에 막느냐, 그런 것. 관계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필요하지만 나머지기는 각자 하는 거예요. 오야붕이 없는 거예요. 오야붕이 없으면 권세자, 권력자가 없죠. 권력자가 없으면 각자각자, 아까 빗줄기 떨어지는 것처럼 각자 떨어지는 거예요. 힘을 모을 수가 없어요. 힘을 모을 수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서서 힘을 모으려고 하면 누구 이름을 등에 업어야 하느냐 하면 신의 이름을 등에 업어야 해요. 신의 이름을. 신이라든지, 신화라든지, 영웅이라든지. 그러면 갑자기 집단적 표상이 등장하겠죠. 집단적 표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초월적 영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집단적 표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은근히 우리를 대표할 만한 초월적 인물을 기대했다? 기대하지 않았다? 전부다 기대한 거예요. 기대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을 누가 공격을 하면 대통령이나 왕이나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화가 나는 거예요. 임금을 욕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게 뭐가 됐다? 전통이 되었다. 다 임금님이 우리를 위해서 제사를 잘 드려서 이 한반도, 고려시대, 조선시대, 죽 이어왔다는 거예요. 그게 옳고 그르다는 그 평가를 왜 그 시대에는 못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옳고 그름은 농사가 잘 됐느냐, 농사가 못 됐느냐, 우리나라가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잘 버티고 있느냐, 아니면 잠식당하느냐, 얼마나 전염병이 창궐하느냐, 아니면 건강 하냐, 그걸로 따졌다고요.
만약에 전염병이 찾아오고 우리나라가 뭐 일본한테 잡히고 이래 하게 되면 이 국민들이,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거 뭘 바꿔라? 왕을 바꿔라. 왕이 어질지를 못해서 하늘이 노해가지고 이 전라도 지방에 가뭄이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 임금 있고 그 밑에 양반 있고 양반 밑에 쌍놈이 있잖아요. 양반들이 중간에서, 일은 쌍놈들이 하고, 임금 밑에서 양반들이 하는 짓이 뭡니까? 임금으로 하여금 하늘이 보기에 어질고 뭔가 나쁜 짓 안 하기를 간청하고 탄원해서 하늘이 보기에 바른 임금으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오늘 성경하고 무관한 것이 아니고 다 관계가 있어요. 성경에 양심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 지가 뭔데, 니나 잘하세요. 니 인생 따로 있는데 왜 남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깨끗한 사람 따로 있고 더러운 사람 따로 있다고 했잖아요. 니가 무슨 권한으로 사람을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으로 둘로 나누느냐 말이죠.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다? 민주주의 시대거든요.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누구한테 평가 받을 그러한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민주주의가 정상이냐?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정상이냐? 왕이 있던 시대가 정상이라니까요. 옛날에는 왜 그렇게 다 같이 살면 되는데 바보같이 왕을 왜 뽑았느냐? 이게 신과 관련되어 있다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을 찾았지요? 지금은 신을 안 찾잖아요? 옛날에는 왜 신을 찾았느냐, 왜냐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해와 달, 별을 자기가 안 만들었잖아요. 자기가 안 만들었으면 다룰 수 있는 대상이다?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아니죠. 그러면 그 대자연의 흐름에 종속이 되겠죠. 그럼 그 대자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구든지 뭐든 하나 있어야 된다니까요. 집단적 표상으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이라고 합니다. 신을 만들고 우리한테 이익이 오려면 누구 마음을 달래야 돼요? 신의 마음을 달래야 돼요.
그 신의 마음을 달래려면 어떻게 달래느냐, 그 방법은 인간이 인간을 달랠 때 어떻게 달래요? 선물 줘서 달래잖아요. 뇌물주고 선물 줘서 달래잖아요. 그처럼 신에게 선물을 줘서 달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처럼. 선물 주고 난 뒤에 갑자기 가뭄도 끊어지고 전염병도 좋게 됐다면, 이 정보는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아, 이렇게 했더니만 신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것은 전통을 통해서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서 전수를 해야 됩니다. 신을 다루는 방법.
아니, 목사님 그런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아닙니까? 옛날이고 오늘날이고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니까요. 교회에서도. 여러분들의 자식이 고3이라 수능을 앞두고 있다면 해야 되는 방법? 새벽기도 나와야 되잖아요. 실제로 나와서 갑자기 성적이 높아졌다면, 그 교회에서 새벽기도 나와서 등급을 올린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의 영웅적 성과가 된다니까요. 그거는 그 교회에 회자가 되고, 소문이 터지면서 그 교회는 수능에 효과가 있는 교회가 되고. 수능이라든지 병 고침,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교회는 사법고시 합격자가 많이 나오는 비법을 전수하는 교회.
그러니까 이걸 특화사회이라고 하는데, 교회마다 그런 것이 있어야 사람이 몰리거든요. 모이지만 교회마다 거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이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 보편적인 것을 디도서 1장 15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심.
이제 슬슬 본문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이 양심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죠. “나는 성경은 몰라도 양심 하나는 바르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교회 가서 기도한다면 뭐대로 합니까? 양심대로 하겠죠. 그 양심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더러운 양심은 더러운 결과밖에 안 나온다. 이래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들은 뭘 최종적으로 의지하느냐 하면 내가 아무리 이 세상 살면서 험난하게 살았지만 뭐 하나는 지금 건재하다? 뭐 하나는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게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도 나는 양심 있다.” 양심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양심만큼은 그렇게 악에 물들지 않은 최후의 순수함이죠. 근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양심 더러우면 어떻게 할래?”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리 듣고 이 사람들이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니가 뭔데? 니 양심이나 잘 살피세요! 니가 뭔데 왜 니한테 내 양심을 평가받아야 되느냐?”라고 나오겠죠. “니가 뭔데?” 그래서 이제부터 성경이 어렵게 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양심은 누구 관리 하에 있습니까? 내 양심이니까 내가 관리해요. 내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관리대상이 안 됩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더러운 양심이 있고 깨끗한 양심이 있다고 그렇게 되니까, 정말 그게 있다면 그 다음에 뭐가 궁금합니까? 더러운 양심은 뭐고 깨끗한 양심은 뭐냐? 단박에 그런 도전이라든지 질문을 하게 되겠죠. 그거 하기 전에 아까 이야기했던 것을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정리가 좀 안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전통적으로 뭐가 있다? 인간에게는 신이 있다. 신이 있다는 말은 이게 민주주의 사회가 된다 할지라도 왕 제도에서, 왕 제도가 밑에 쌍놈이 있고 위에 양반이 있는 거예요. 그럼 양반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왕을 보필해서 왕이 착한 왕이 될 경우에는 누가 덕을 누가 본다? 나라 전체가 덕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양반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문자, 공부를 한 사람 아닙니까? 쌍놈의 특징은 뭡니까? 공부를 못한 사람이에요.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고 아예 양반들이 중간에 딱 버텨가지고 이 쌍놈들한테는 공부를 못하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쌍놈들 가운데 학문깨나 한다고 좀 설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경단을 만들어가지고 쌍놈들 중에서 좀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여 버려요. 홍길동을 잡아다 죽여 버립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때문에 안 돼요. 역적이라. 자경단을 만들어서.
양반은 뭐냐 하면 귀족이거든요. 귀족. 법을 누가 만드느냐, 양반들이 만들어요. 그리고 왕도 양반들이 만든 법을 따라야 돼요. 그러면 조선시대 같은 경우에는 모든 생산물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땅에서 나오죠. 토지죠. 토지중심이죠. 이제 왜 민주주의가 뒤늦게 나왔는지, 200년 밖에 안 됐는지, 그 이유를 아셔야 돼요. 200년 전 까지는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하는 의식주가 땅 더하기 인간의 노동의 결합에 의해서 된 겁니다.
뭐가 없어요? 대단한 기계가 없어요. 왜 기계가 없느냐 하면 기계를 하려면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때는 석탄과 석유 같은 것이 개발이 아직 안 됐어요. 에너지가 없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처럼 인류역사는 에너지역사에요. 그냥 나무쪼가리 이거 때가지고 포크 레인이 움직입니까? 포크 레인이 쇳덩어리 들지도 못하는데. 포크 레인에 나무 쑤셔 넣으면 그게 움직입니까? 안 되잖아요. 엔진이라는 것이 발명 돼야 되잖아요. 근데 엔진이라는 것이 엔진 만들고 석유 나왔습니까? 어디 석탄 나왔습니까? 아니죠.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게 필요하니까 기계가 나온 겁니다. 옛날에도 석유가 땅에 묻혀있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는 예수님 당시에도 석유가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데 왜 그렇게 못살았어요? 땅에서 인간의 힘대로 농사짓는 것이 주류였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씨 뿌리는 비유가 있잖아요. 씨 뿌리는 비유. 요새 같으면 기름 파는 비유라든지.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비유에 보면 어떤 농부가 땅을 갈다가 툭하고 소리가 나서 보물이 있는 줄 알고 하는 것 있잖아요.
모든 환경 자체가 땅과 노동이 결합된 노동시장이었어요. 노동시장에서 왕을 살리려면 이 노동시장을 통치하는 어떤 문자를 아는, 문자를 고유 독점하는 귀족, 양반계급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귀족 계급에 변화가 생겼어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무 변화가 없어요. 귀족계급에 변화가 생긴 이유가 여기에 쌍놈 같은데 장사를 해가지고 돈을 번 부자가 들어오니까 이 귀족계급이 의회 제도를 만들어 여기에서 법을 만들어서, 귀족은 전통적으로 귀족이에요. 옛날에 귀족은 뭐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귀족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17세기 이태리부터 금융자본주의가 생기면서 돈 버는 사람이 큰소리치게 되어있어요. 왕이 전쟁하려고 하면 돈을 빌려와야 되지 않습니까? 용병들을 사고 월급주려면. 그걸 누구한테 빌려요? 그 당시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어떻게 돈을 빌리는가? 외국에서 원료를 헐값에 사와서 자기나라에서 비싸게 팔면 그만큼 남는 장사라는 말이죠. 후추라든지, 면화라든지, 향신료, 그리고 뭐 여러 가지 총포류, 나침반, 종이, 옛날에 수많은 무역 있잖아요.
심지어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에서 봐도 돈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돈 많이 벌었어요? 무역하는 사람들이 돈 많이 벌었어요. 무역하는 사람이. 그 무역하는 사람이 귀족계급에 들어가서 귀족계급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렸어요. 와해시켜버리니까, 힘이 더 세니까, 전에는 입헌군주제라고 해서 왕을 두되, 모든 행정은 총리가 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왕도 귀찮아서, 그 상징적인 왕, 아까 이야기 한 집단적 표상인 그 왕을 없애버리고, 그 집단적 표상을 사람들의 계약에 의해서 결정하자는 것이 바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 인들이 제일 먼저 그걸 한 거예요. 청교도 인들이.
천부인권설, 우리 인간의 모든 인권은 왕이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줬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폭포수 같아요. 하나님이 주되 왕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질서가 전통적인 질서가 아니고 바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데 필요한 질서로 바뀝니다. 정치위주가 아니라 경제위주. 돈 가진 사람이 최고에요.
그 돈 가진 사람이 누구에게 투자했는가? 과학자들에게 투자하죠. 그 과학자들이 기술이 발달하고, 거기에 무기기술이 발달하죠. 무기기술이 발달한 쪽에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으니까. 식민지로 만들면 흔한 원료를 무한히 공급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던 거예요. 거기다가 일하는 사람까지 필요했으니까 흑인 노예들을 영국에서 많이 뽑아갔죠. 나중에 미국까지 건너갔지만. 처음에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많이 가져갔어요. 2등급 시민들 정도는 그렇고 3등급, 4등급 시민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왕 중심에서, 정치 중심에서 뭐로 넘어왔어요? 경제 중심으로 넘어왔죠.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어느 중심입니까? 우리의 양심은 전통이 최고다, 라는 양심을 갖고 있다가 갑자기 양심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뭐가 최고다? 돈이 최고다, 하는 양심으로 바뀌겠지요. 뭐 양심은 순수하다고요? 양심이 순수한 게 아니에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살고보자’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살고보자에서 나와요. 뭐 인문학 강좌하고 뭐 어떻게 하는데, 그 인문학 강좌고 뭐고 간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죽 들어보면, 살고보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살고보자, 뭐 어떻게? 서로 의지하고 의존해서. 이미 자본화되어 있는 양심이 남과 서로 좋게 사귈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양심은 돈을 노리고 하는 거예요. 돈을 노리고. 그래서 인간이 “우리끼리는 말이 잘 통해.”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끼리 만나서 무엇이 손해나지는 않을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크게 손해나지 않겠다는 마지막 최후의 바닥에 그물 같은 겁니다.
제가 그물이라고 한 것은 뭐냐 하면 서커스한 사람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묘기를 부릴 수가 있는 이유가 그 밑바닥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물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도 나오죠. 다는 안 그러지만 20대 재벌 3세들이 철딱서니 없이 마약하고 나쁜 짓 많이 하는 그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나쁜 짓해도 누가 빼줘요? 아버지가 검찰, 경찰, 기자들까지 뇌물 먹여서 그때그때마다 다 빼주기 때문에 그래요. 밑에 돈이라는 그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렵게 살아온 자녀들, 여러분들! 저와 여러분들.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흥청망청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집구석을 아니까. 내가 안 챙기면 아무도 챙길 사람이 없어요. 아버지 술 쳐 먹고 들어오지, 엄마는 아버지하고 싸우지, 내가 공부를 하던 뭘 하든 아무 관심도 없지, 학원 보내달라고 하면 돈 없다고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기나 하지,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겠다. 한 푼 두 푼 아껴서. 내가 살지 않으면 아무도 살려줄 사람이 없다.
이 의식은 제가 수요일에 아비멜렉이라는 설교를 할 때 약간 언급을 했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새로운 낯선 세계에서는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해요.
그게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보면 양심이라는 것은 혼자 독야청청해서 깨끗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양심 속에는 전통도 들어있고, 근데 그 전통이 어떤 괜찮은 왕 중심이 아니고 이게 벌써 돈 중심이죠. 그러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좋은 지도자가 뭡니까?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최고 좋은 지도자입니다. 독재를 하던 뭘 하던 상관없어요. 국민들을 잘 살게 해준다면 다음에 한 번 더 해먹어라 해가지고 언제든지 표 찍어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갱상도, 경상도가 아닙니다. 갱상도. 그 갱상도에서는 왜 자꾸 보수적으로 나오는가?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나라를 잘 살렸잖아요. 그때 덕을 봤던 그 사람들이 하나의, 아까 했던 전통적인 정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반대했던 자들이, 북한이 곧 쳐들어온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갱상도가 정권을 쥐고 있던 것을 이번에 바꿔보자! 하는 거예요. 이제는 북한 그만 써먹어라! 하는 쪽이 소외당한 쪽이에요.
둘 다 지금 뭐가 문제에요? 대통령 갈아보자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의 양심에 호소하는데, 그 양심이 이미 어디에 물든 양심이에요? 돈에 물든 양심이에요. 돈에 물이 든 양심이에요.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양심에 돈 줄까? 하면 예! 하고 허벌나게 달라드는데. 국민을 위해서 봉사한다고요? 아니에요. 왜 정권을 잡고, 정권을 잡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운동권에서 밀어줬던 사람에게 고위직이나, 어떤 부스러기라도 권력을 잡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희생했던 대가를 뭐로 받기 위해서? 돈으로 돌려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를 쓰고 선거운동 하는 거예요. 기를 쓰고.
그렇다면 옛날에 신이었던 그 집단적 표상이 지금은 뭡니까? 돈이에요. 돈. 돈이 집단적 표상입니다. 대통령? 아니야! 우리 경제를 잘 살리는 대통령. 그겁니다. 경제를 잘 살리는 대통령을 아주 온순하게 완화시켜서 이야기하면 복지사회에요. 복지사회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복지사회라고 한다고 복지사회 됩니까? 뭐가 있어야 돼요? 복지사회가 구체적으로 뭐예요? 나라가 잘 살아서 국민들에게 뭘 돌려 달라? 그 잘사는 것으로 돌려 달라 이 말이에요. 돈으로. 유치원 애들 키우는데 한 달에 100만원씩 주든지, 그걸 복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지. 그리고 젊은 애들한테 일자리 정해주고. 사람들의 그걸 집단적 표상이라고 합니다. 신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신의 라이벌이 재물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욕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돈을 좋아한다고 했죠. 누가복음 16장에서. 기다렸던 신이 뭐냐 하면 돈이에요.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돈 주는 신만 재림하길 기다려요. 다시 등장하기를 바라요. 돈 주는 신만. 교회 잘 다녔다는 증거는 우리 집 가정이 부유하게 되고 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교회 잘 선택하고, 하나님 잘 선택하고, 종교 잘 선택했다고, 스스로 위로 할 수 있는 건덕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갔는데 갑자기 생활이 더 어려워지고 한다면, 이건 신을 잘못 선택했는가? 교회를 잘못 골랐는가? 이래 생각해요. 그래서 강남에서 부자고 돈 잘 버는 권사나 집사들에게는 복음이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왜? 지금 이 교회 다녀도 잘 사는데 뭣 때문에 교회를 바꿀 필요가 뭐 있어요? 잘 먹고 잘 사는데?
그래서 신앙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구원이나 신앙은 어려운 게 아니고 드물어요. 희귀해요. 신자가 나타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점검에 나서야 됩니다. “저거 분명히 가짜일거야.” 왜? 이미 우리 집단적 자체가 돈을 사랑하는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도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진짜로 성령이 왔을 경우와 하나는 뭐냐 하면 돈이 없는 경우. 돈이 없어 한이 맺혀서 이 판에 신을 바꿔 다른 예수를 믿어가지고, 뭔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생기는지 한 번 테스트해볼까? 라는 식으로. 그렇게 나오는 경우뿐이에요.
지금까지 한 강의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양심에 부합될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된 신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양심에 하자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될 때 그게 참된 신이라는 겁니다. 자기 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더러운 양심이라는 거예요. 더러운 양심아! 양심이 더럽다는 거예요. 다른 뜻으로 더러운 마음아!
1장 15절을 다시 보면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래 되어 있죠. 같은 말을 두 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어요. “양심이 더러우니까 그런 행동을 하지.”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 양심을 어떻게 알아? 모르지만 행동하는 것 보니까 양심이 더러운 티를 톡톡 내는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심이 착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체가 결과에요. 추구하는 것의 어떤 결과로 더럽다는 어떤 평가를 받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깔아놓고, 그러면 착한 양심은 뭐냐? 이제 이걸 알아야 되겠죠. 착한 양심이란 “타인과 한 몸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게 착한 마음이에요. 어디를 근거해서 그렇게 하느냐, 착한 마음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항상 성경해석 할 때는 예수님이 원조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기도, 기도 같으면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 헌금 같으면 예수님이 헌금을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이 어떻게 했느냐, 항상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양심은 뭐냐 하면 타인을 견딜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그 죄는 자기 죄입니까? 타인의 죄입니까? 타인의 죄잖아요.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를, 남의 죄를 본인의 몸으로 받아들여서 이걸 견뎌내는 겁니다. 누명, 또는 억울함입니다.
자, 억울함의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이걸 견딜 수 있는지. 마태복음 2장 한 번 보겠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지금 세월호 물 빠진 정도가 아닙니다.
헤롯이 누굴 잡겠다고 이렇게 합니까? 예수 잡겠다고 하는 그 행정적 조치에 의해서 누가 죽었어요? 세 살, 네 살도 아니에요. 두 살 아래 다 죽였어요. 외손녀 어디에 갔습니까? 두 살 안 됐잖아요? 두 살 안 됐죠. 한참 예쁠 때에요. 바∙나∙나⬏이렇게 따라하면서 말 막 배우려고 할 때죠. 말도 안 되는데 막 말 배울 시기 아닙니까?
부모는 조금의 애로사항도 없이 기쁨과 거기에 온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모든 일이 애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항상 애가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데, 이걸 누가 죽였어요? 누가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안 태어났으면 이런 사단이 안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이 먹물로 차 있을 때 아무 문제없어요. 니도 먹물, 나도 먹물이니까. 주님께서 “어! 먹물이네?”하고 튕기는 순간, 그 먹물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저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먼저 튕겨서 그 사랑하는 두 살 밑에 애가 학살당하는 그런 아픔이 있죠.
그래서 17절, “이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왜 운다고요? 자식을 위해서 애곡하죠. 자식을 위해서. 자, 여기서 더 나아가봅시다. 자식을 위해서 애곡하는 사람이 엄마에요? 아빠에요? 엄마죠. 라헬은 이스라엘의 사랑하는 본처죠.
라헬이 운다는 것은 곧 새로운 이스라엘의 고통이 예수님 때문에 합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항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운다는 말은 여자는 남자와 결정적인 다른 점이 있어요. 여자는 임신을 할 수가 있지만 남자는 임신을 못해요. 남자는 자궁이 없으니까. 근데 여자에게 자기 안에 다른 어떤 텅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은 그거는 본인이 들어와요? 본인 말고 다른 어떤 타인이 들어오는 겁니까? 타인이 그 안에 들어오죠.
그러면 10개월 동안 여자는 뭘 하느냐 하면 자기 몸 안에 자기 몸이 아닌 타인과 함께 공생하면서 10개월 동안 그걸 견뎌내야 하는 겁니다. 그것만 견딥니까? 애를 놓고 난 뒤에 애를 내팽개치지 않죠. 키울 때까지 계속 키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엄마가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아중심이에요.
그런데 애기가 생기고 난 후부터는 그 좋아하는 술 담배도 끊고, 모든 것을 누구 중심으로? 내 안에 있는 타인중심으로 돌아간다고요. 그때 남자들은 뭐하냐? 당구치고 있는 거예요. 당구치고 있다니까요. 지는 지 안에 남이 없으니까. 근데 임신해서 당구 치겠습니까? “당구 치면 이거 안 되지. 다치면 애가 다치니까.”하죠.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있듯이 여성에게 있어서는 이미 타인 때문에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어디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아픔의 후손. 슬픔의 아들. 특히 그 라헬은 하나님의 아들을 놓고 죽어요. 베냐민이라는 뜻이 뭐냐 하면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그 애를 놓고 난 뒤에 엄마가 죽어버려요. 예수님 놓고 난 뒤에 마리아는 죽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죽은 여성이에요. 아들이 중요하지 엄마는 중요하지 않아요.
근데 생각을 이래 해봅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보지 말고, 예수님이 마리아 몸을 이용했다고 보세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슬픈 운명과 저주받은 운명을 보여 줄 분이 이 땅에 자기와 똑같은 공감을 가져야 될 사람들을 규합하고 그걸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그 애곡과 고통을 미리 베들레헴 두 살 아래 애 엄마들한테 미리 그걸 예고편으로 줬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들의 통곡은 누구 때문에 우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미리 땡겨서 우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만큼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해줄 그 증명을 위해서 이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야 될 애들입니다. 죽은 아기 엄마들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베들레헴에 태어났던 이 아기들이 슬픔이라는 예수님의 증거물을 생산하는데 동원된 아줌마들이라고 이래 보자 이 말입니다.
왜 슬픕니까? 자기로 인해 슬픈 것이 아니고, 임신을 했었으니까, 애가 죽는다고 엄마가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애가 죽었지 본인이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애라는 타인의 죽음이 곧 뭐다? 더 살 희망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그야말로 자동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여기 있어도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예수님이 지나간 모든 자국에 그런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타인과 한 몸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마음. 이게 선한 마음, 착한 마음, 복음을 아는 마음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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