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0714a 디도서2장13절(억지)-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13-15절입니다.
13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그대는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신도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와야 되겠죠. 예를 들어서, 아침에 설거지를 내가 한다, 청소를 내가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근데 여기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 이걸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제시했을 때는, 그만큼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내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현실이라고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나만의 소박한 현실로 자꾸 경계선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가 그만큼 한 것이다, 이거는 어디까지나 내가 주인공이다, 라는 그런 쪽으로 나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또는 내 생활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안 중요한 게 돼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럼 이게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일에 대한 훼방, 훼방꾼이 되는 거예요. 방해꾼.
복음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는데, 열심히 장사하면서 자기 자식들 잘 키우는 그런 착실한 아주머니가 계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문제점이 뭡니까? 복음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지만 착실하게 일해서 자기애들 공부시키고 집안 잘 건사한다면, 그럼 그 사람의 문제점이 뭐예요? 문제점이?
진짜 주의 현실은 외면해버리고 그 안에서 독자적인 나름대로의 자기 현실을 만들려고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억지입니다. 이게 억지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소박한 현실을 꾸리려고 합니다. 뭐 그 아주머니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남북핵문제를 위해서 설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내가 낳은 자식들 잘 키우고, 우리 가정 잘 가꾸고, 유지하는 것, 그것뿐이죠.
그런데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서 꾸미는 그 아주머니의 이 현실이 거대한 현실을 원(◯)이라고 하면, 그 안에서 따로 만들죠. 따로. 원 안에 있는 점처럼(●).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이만큼 일구어냈다, 아파트 한 채라도 얻었다, 애들 한 세 명 키웠다, 이걸 자기 것이라고 여기죠. 그러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이 현실(●,원 안에 있는 점)은 전체 하나님의 현실(◯,원) 바깥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안에 있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현실은 사도바울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디도서에서 전달하고 있죠. 그럼 이 현실의 성질(◯)과 이 아주머니의 현실(●)의 성질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안 맞죠. 안 맞는다는 말은 방해꾼이 된다는 겁니다. 방해꾼. 예를 들면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밭도 있고 집도 있는데, 택지조성을 위해서 다 갈아버렸어요. 보상금 주고 다 했어요. 했는데, 유독 한 집만 보상금 더 달라고 안 나가는 거예요.
사진에 보니까 불도저가 다 밀어내는 것을 봤는데, 근데 30미터 높이 위에 오직 이 집만 달랑 있는 거예요. 이 집만 보상 안 받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가요? 계단 없습니다. 못 내려옵니다. 포클레인 가지고 집 옆에 터를 다 깎아버린 거예요. 점점 더 깎여질 거예요. 왜? 이 집은 손을 안 댔으니까. 허허 벌판에 이 집만 달랑 남은 거예요. 이 집의 존재는 시에서 하는 택지조성에 결국 뭐가 됩니까? 방해가 되죠. 훼방꾼이죠.
이 훼방꾼을 시에서 그냥 놔두겠어요? 처벌하겠어요? 처벌하죠. 그럼 오늘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주께서 가만두겠어요? 처벌하겠어요? 처벌하죠. 그럼 시에서 처벌할 때는 뭘 보내겠습니까? 계고장(일정 기간 안에 행정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 강제 집행을 한다는 뜻을 알리는 문서나 글)을 보내겠죠. “당신은 시에서 하는 일에 방해가 됨으로 처벌대상입니다.”라고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디도서 2장 13, 14, 15절 말씀은, 결국 이 세상에 대해서 뭘 보내는가 하면은, “당신은 처벌대상입니다.”하고, 지금 처벌통고장을 보내는 겁니다. 어떤 스무 살 먹은 젊은 애가 집에 있는데 뭐가 날아왔느냐 하면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세요.”라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합시다. 그 애가 그걸 찢어버리면 군에 안 갑니까?
그걸 찢어버리면? 또 날아오겠죠. 성경 이거 덮고, 안 보고, 찢어버리면, 주께서 심판 안 합니까? 심판하죠. “에이, 나 할 일 많은데 군에 안가.”하고 입영통지서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군에 안 갑니까? “아이고, 종이 찢었어요? 그럼 군에 안 와도 돼요.”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종이 찢었다고 해서 군에 간다는 현실이 변경될 수가 없듯이, 이 성경을 덮고 안 보고, 복음도 안 듣고, 이 성경책 불태운다고 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현실에 방해꾼이 안 되는 겁니까? 여전히 방해꾼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한 계고장, 통보, 통보한 내용이 성경 안에 꽉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되고 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자신의 운명에 관한 내용이 이 성경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자신의 운명에 관한 내용이. 무협소설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무협소설은. 드라마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드라마는. 그러나 성경은 안 본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현실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면 되지.”라고 하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억지’, 인생을 억지로 사는 거예요. 억지로. 인생을 억지로 사는 겁니다. 만약에 그 사람의 나이가 95살이 되었다면, 95살이 되어서 취직을 할 겁니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할 겁니까? 잘 걷지도 못하는데,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 이러고 있는데, 그래가지고 이력서 내겠어요? “실례지만 연세가?” “95살인데 숨을 잘 못 쉽니다. 뭐, 딴 건 잘하는데 숨을 잘 못 쉽니다.” 이래 가지고 취직이 되겠어요? 안 되죠.
그리고 그렇게 숨을 못 쉬다가는 그 날 밤에 어떻게 됩니까? 죽잖아요. 본인은 평생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누가 현실에 맞게 살았습니까? 누가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 알아요? 본인이 알아요? 본인은 모르죠. 근데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유도 몰라요. 그냥 맹목적으로 사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는 거예요.
유명한 거지나사로 나오죠. 부자하고.
부자와 거지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같이 붙여놓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세상에서 남들이 평가하는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 자체가 비현실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뜻대로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뭔가 인생을 잘못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잘못 살았다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방해꾼으로서 심판받게 되어 있어요.
심판에 대한 계고장이 뭡니까? 이 성경이 바로 계고장이에요. “너 죽는다.” 성경에서는 너 죽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조건이 붙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이 없으면 너 죽는다.” 그냥 죽는다고 하면 그 정도야 교회 안 나가도 늙어 죽는다는 것을 다 알죠. 성경에서는 죽는데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죽는 것은 죽고 난 뒤의 저주스러움입니다. 그게 죽는 건데, 그 저주스러움은 이유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자회견 할 용의가 있는가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다 저주받습니다.”라고 할 용의가 있습니까? 그걸 공개적으로 말을 못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억지로 사는 거고, 그 다음에 인생에 대해서 방해꾼으로 사는 겁니다. 주님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제가 이 정도 협박을 해놨다고 친다면, “그렇다면 주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방해하지 않으려면 책을 다 외워야 됩니까? 읽어야 됩니까? 뭐 믿어야 됩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주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여러분의 대해서 염려부터 하겠죠. 근데 그 생각이 또 방해가 돼요. 그 생각이. 왜냐하면 “네가 뭔데 살고자 하느냐?”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기차가 한 300킬로미터로 달립니다.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그 기차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내가 여기서 노래를 부르면 시속 300킬로에서 150킬로가 되겠나? 내가 여기서 춤을 추면 시속 한 50으로 줄어들겠나?”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는 하나님의 하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죠. 기차가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은 기차 자체 내에서 생각할 문제지, 내가 기차 안에서 손뼉치고 춤을 추고 빨간 양말 신고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속도가 줄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될지어다.”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동의하면 되는 거예요. 공감하고 동의하고. 그러면 주께서 인도하는 그 속도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오늘도 나는 일어났고, 주의 뜻대로 치카치카 양치질 하고, 주의 뜻대로 세수하고, 주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간다는 것. 내가 움직이면서 하는 모든 활동도 주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걸 느끼는 거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라는 그 통지서를 받는 동시에, “입대할 때는 어떻게 머리를 깎을까?”라는 그런 생각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순간 받자마자, “자, 지금부터 머리를 어느 정도로 많이 기르면 되겠어?”라는 그런 생각은 안 하잖아요. 곧 입대할 사람이 머리 기를 생각은 안 하잖아요. 그러면 “머리를 군대 앞에 이발소에서 깎을까? 동네 이발소에서 깎을까?”라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뭘 전제로 하는 겁니까? 입대하라는 명령을 의식하면서 나오는 행위들이겠죠.
그게 바로 명령에 따라 행하는 순종적인 행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는 주님의 이 계고장, 명령서가 딱 등장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도는 이 명령이 최우선적인 행동지침이 되는 겁니다. 이 명령이. 그러면 그 명령에 대한 최우선지침이 되게 되면 나의 존재기반, 토대가 주의 명령 위에서 모든 것이 움직이겠죠. 그렇죠.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는 걱정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독자적인 자기 계획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걱정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계획은 왜 걱정이 없느냐 하면 미래까지 보장한 거예요. 미래까지 우리에게 계획을 소개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이 없이 독자적으로 내 인생 계획을 내가 설계해버리면, 과거는 우리가 기억이 나지만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잖아요. 그 불확실한 그만큼 우리에게 뭐가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미완료니까,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길에 가시든지, 누굴 만나든지, 그 사람이 걱정근심을 하거든, 그 사람은 지금 논산훈련소에서 나온 입영통지서를 아직 안 받은 거예요. 주의 명령하고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인, 독보적인 자기만의 인생을 자기가 계획 짜고 가는 겁니다. “우리 애 성적이 중간쯤인데 어떻게 하면 일등으로 올라갈 수 있는가?”라는 걱정이 되죠. “너희 애 성적은 일등이 되어야 하느니라.” 예레미야 15장 35절. 뭐 이런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 없어요.
그거는 독보적인 자기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집, 중국에서 택지조성 하는데 보상 더 받으려고 안 나간 그 집이에요. 불도저가 그 주위 터를 다 깎아내고 달랑 남은 그 집이에요. 완전히 모래사장에서 게임하는 것 같아요. 깎아내고 깎아내면 언젠가는 넘어지긴 넘어질 거예요. 집으로 올라갈 사다리도 없어요. 사다리 치워버립니다. 독보적인 자기세계에서 꿈꾸는 거예요.
여러분 꿈이라는 것은 특징이 있어요. 꿈의 특징이 뭐냐, 주인공이 자기가 되는 거예요. 주인공이 자기에요. 모든 꿈의 공통점은 자기가 꿈의 주인공입니다. 안 그런 꿈 봤습니까? 남의 꿈을 내가 왜 꿉니까? 그렇죠. 자기가 주인공이죠. 느부갓네살을 보세요. 꿈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잖아요. 왜 꿈의 주인공이 자신이냐, 낮에, 평소에 무심코 했던 모든 행동들이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잠을 자니까, 잠을 자도 계속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아침에 잠을 깨도 마찬가지고.
근데 이 성경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맞을 리가 있습니까? 평소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성경은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 구태여 성경말씀을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을 보거나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데 보탬이 안 될 게 뻔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 성경말씀을 기피하느냐를 제가 설명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복스러운 소망”, 소망도 그냥 소망이 아니고 복스러운 소망, 행복한 소망이란 말이죠. 요 앞에 보니까 행복나눔교회가 있던데. 행복한 소망을 준다 이 말이죠. 그럼 이 편지를 썼던 사도바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행복합니까? 행복 안 합니까? 행복하죠.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행복하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행복한, 복스러운 소망의 말을 건넨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이 말이 궁극적인 행복과 궁극적인 기쁨으로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아니죠. 성도 아닌 거예요. “아, 나 되게 행복한데, 이 소식 듣고 너무 행복한데, 아저씨도 행복하죠?”라고 이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아주머니도 행복하죠?”라고 보내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뭐? 뭔데? 이거 뭐야?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행복 하라는 이야기야? 어느 대목에서?”라고 이래 돼버리면 복음의 훼방꾼입니다. 인생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춰서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디도서의 편지는 “이렇게 지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대로 순종하시면 구원받습니다.”라는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보는 저는 너무 다행스러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저처럼 다행스럽게 느껴지죠? 그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나중 문제고. “이런 소식이 있다는 그 자체로 불행 끝 행복시작 아닙니까?” 이래 묻는 거예요. “너무 다행스럽죠, 그죠?”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그지요?”라고. “너무 다행스럽죠? 그렇죠? 물가도 비싸고 경제도 어려운 이 험한 세상에서 이런 복된 소망이 있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이 소식이 너무 반갑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정도로 행복해도 돼요? 정말? 우리가 과연 그런 잽이 되고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인가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너무 좋아요.”라는 그런 식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보낸 거예요. 이 편지가.
지키고 안 지키고, 지킨다는 것도 억지고, 억지를 부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성령 받아야, 성령으로 쓴 이 책이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썼기 때문에, 성령으로 썼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이게 유효한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효과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책의 특징이 그래요.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성경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보니까, 이 성경 해석을 해석한다는 그 자체보다도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앞서야 되죠. 반가운 마음부터. “고맙습니다. 아, 난 살았군요. 이렇게 죽어야 될 인간을 이렇게 살려주셨군요.”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같이 공감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 다음부터 사도바울 쪽에서 설명에 들어갑니다. 성령께서 또 설명해주세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 점을 처음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주님의 현실(◯)이 이렇게 주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데, 인간은 어느 자리에, 어느 지역에서 응애~ (●) 하고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자꾸 자기 세계에 대한 확장, 폐쇄적인 자기 세계의 확장(◉)을 도모합니다. 누가 어기에 시집을 오게 되면 시집까지 보태서 확장되고. 누가 장가가면 장가간 것까지 보태서 또 확장되고. 아들 장가가면 아들 뺏기고, 딸이 시집가면 사위까지 받아 챙기고. 어쨌든 간에, 하는 것이 전부 연결이 되는 거예요.
이 큰 것(◯)을 가지고 거대담론이라고 합니다. 대화하는 내용이 거대하다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뭐냐, 원 안에 있는 점(●)은 너무나 개인적이죠. 사적담론이라고 합니다. 담론이라는 것은 디스커션discussion,대화의 장, 의견의 장이라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거대담론, 거대한 디스커션discussion,대화의 장이 이게 어디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창조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원천과. 창조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럼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성도라면 창조의 원천(◯)과 늘 수시로 교류가 일어나야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디도서에 나오는 2장 13절 그 한절, 14절 그 한절, 15절 그 한절 속에, 그 밑에 뭐가 받쳐있는가 하면 창조의 원리가 받쳐져 있다는 겁니다. 창조의 원리가. 거대한 솥이 있는데, 솥에다가 팥죽을 끓였습니다. 설에 팥죽을 끓일 때 새알이라고 그런 것 넣죠. 새알 맞죠? 어릴 때는 그것만 골라먹었는데. 자, 동짓날에 팥죽을 솥에다가 끓였는데, 그 안에 새알이 막 있습니다. 그럼 그 솥 안에 있는 새알을 솥 위쪽에서 건져내나, 남쪽에서 건져내나 전부 다 한 솥에서 건져내는 거죠.
건져낼 때는 새알이 하얗지만 팥이 묻어 있잖아요. 디도서 2장 13절이든, 14절이든, 15절이든, 그게 하나하나의 새알이라면 뭘 끄집어내도 전체의 거대담론이 다 같이 묻혀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묻어있기에 해석이 다 이해가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칫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디도가 그레데라는 섬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편지를 한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들은, 여러분들은 지금 서울에 살잖아요? 그럼 그레데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게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나는 넘어갈란다고 해요. 왜? 나는 서울사람이지, 그레데사람이 아니니까. 새알을 그레데 사람한테 준 것이지, 서울 사람한테 준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지리적으로. 근데 지리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지리적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나는 그때하고 다르니까, 지금 21세기니까 나 성경 안 볼래, 라고 이래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창조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도넛처럼, 그런 도넛은 없겠지만 도넛 원 둘레가 42,500킬로미터 라면요? 도넛이 42,500킬로미터라면 그 위에 개미나 인간들이 있다면, 우리는 둥글다고 느끼겠습니까? 아니면 평평하다고 느끼겠습니까? 평평하겠죠. 지평선이 보이니까. 어딜 봐서 둥글어요? 그래서 옛날에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봤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창조의 원리는 모든 것이 주로부터 둥글게 연결되어 있단 말이죠. 둥글게.
그리고 우리 인생은 짧게 태어나서, 길어봐야 90이 아닙니까? 짧게 태어나서 죽으니까,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고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시작과 끝의 일부로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고, 니가 경험했던 시대는 모든 게 하나로 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중의 일부라는 거예요. 일부. 일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바로 새알 같은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밑에서 창조원리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지역별로도, “나는 그레데 사람이 아니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시대별로도, “나는 지금 21세기 사람이니까 관계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이것은 오늘날 주어진 현실 전부가 디도서 2장 13절, 14절, 15절의 말씀대로 진행 중 입니다. 말씀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요.
근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적용을 하는데, 적용이 계고장, 또는 심판통보죠. 하나님이 너는 내 일에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니가 방해했어. 니가. 그것도 모르고 사적인 니 것 밖에 모르는 니가.” “나는 몰랐습니다.”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방해를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하면 “아이고, 행복해라.”라고 하면 돼요. 사도바울처럼 동일한 각오를 가지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연출을 할까요? 연기를 할까요? 그것도 억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나 주님께서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려고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말씀을 보는 순간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믿는 자로 확정지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성경말씀에 가슴이 뜨겁지 아니 하냐, 라는 말씀이 있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줄 때에 뜨겁지 아니 하더냐, 라는 말씀이 있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하신 그런 말씀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이 성경 말씀이 뜨거울 때에 그 사람은 그 순간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사적인 자기 영역을 잊어버려요. 사적인 것. 그렇게 자기 게 소중해요. 인간에게는 자기 것 밖에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근데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게 되면, 그 사람은 창조의 원리 속에 침잠, 창조의 원리 속에 잠기면서, “뭣이 중헌디? 뭣이 중혀? 뭣이?” 라는 곡성에 나오는 대사처럼. 아버지가 귀신 들린 딸에게 물어보니까 딸이 하는 말이 “뭣이 중헌디?”라고 해요. 전라도 말로. 뭣이 중헌지 모른다는 거예요. “아버지 귀신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라는 식으로.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걱정근심이에요. 그 걱정근심이 나에게만 부질없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방해하고 훼방질하는 걱정근심이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것을 쥐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하니까, 감사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사적인 것을 따로 챙기면서 감사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억지로 생각하기를, “그래. 뭐 이거, 이거 부도나서 집 날아가고, 집에 불이 나서 이불 다 탔지만, 그래도 베개는 남아 있잖아. 그 베개 남은 것을 감사해야지.”라고 이런 식으로 억지로 감사를 하는데, 그거는요 이순신 장군이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고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소유하고 있음을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지금 주님 앞에 꼼수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통하지도 않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내 게 없다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질문하신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리고, 내 게 없다는 것. 내 이름으로 내 게 없으니까 자연적으로 내가 주인공을 하고 싶어도 뭐 있어야 주인공을 하죠. 없는데요. “그럼 목사님 거지는 은혜 받겠네요?” 거지는요, 남의 것을 탐내기 때문에 은혜가 안 돼요. 내 것이고 싶다는 이상, 그거는 여전히 자기 것이 있는 것이 돼요. “이렇게 감사드리면 저 것이 내 게 되겠지.”라는 이런 노림수, 이런 반칙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더라도 주의 것으로 등록된 가운데 있는 거예요. 주의 것으로. 누구마저? 나마저 주의 것으로 있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요. 본문에 나와 있는 13절에 보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죠. 이게 상당히 중요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게 실제 인물이라는 거예요. 실존인물. 실제로 이 땅에 왔다는 인물입니다.
그냥 “하늘에서 온 중보자다.” 이게 아니고, “하늘에서 온 메시아다.” 이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이 땅을 밟았던, 이 땅에서 수모를 받았던 그 분이라는 거죠. 그 분이 영광스럽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수모를 당했죠. 아주 무시를 당하고 모멸을 당하고 무가치하게 취급을 받았잖아요. 왜요? 왜 우리는 그 분을 그렇게 처리했습니까? 또 이렇게 물으면 “저는 보지도 못했어요.”라고 발뺌을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시간이든, 어떤 지역이든 관계없이 다 우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적인 것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인 것.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내 것의 주인공이다. 그럼 내가 내 것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면 되겠죠. 거울 앞에 자기 몸이 있잖아요. 거울 앞에 자기 몸의 주인공은 누구다? 나다. 거울 앞에 나타나는 모습, 이미지, 만져지는 내 몸, 신체. 이것을 개체라고 하고, 나를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이 개체가, 자기 몸이 잘 안 보이니까 큰 거울 앞에서 보면 자기 몸이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만지는 모습이 다 드러나죠. 그러면 거울 앞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이게 실체죠. 다시 말해서 물건이죠. 만져지니까. 만져지는 것을 실체라고 해요. 귀신을 실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하잖아요. 근데 만져지는 것은 무조건 실체잖아요. 실체.
과학은 뭘 대상으로 합니까? 실체로 하죠. 달이 환상입니까? 아니면 실체로 있어요? 실체로 있으니까 달에 가서 착륙을 했잖아요. 목성도 마찬가지고. 태양이 실체로 있으니까 낮에 더웠죠. 낮에 왜 더웠습니까? 갑자기 누가 보일러 땠기 때문에 더운 거예요? 실체로 있으니까 그렇잖아요. 그럼 내 몸은 실체로 있죠? 내 몸이 실체로 있으니까. 실체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그냥 물건이라고 합시다. 물체. 물건이라고 봅시다.
그 물건에 나는 어디에 있어요? 이 물건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거울 앞에 있는 물건의 어깨, 무릎, 발, 어디든지 점을 한 번 찍어보세요.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물건만 있죠. 그럼 그 물건을 바라보면서 나라고 하잖아요. 나. 이 나라는 위치, 관찰의 지점, 이 관찰의 지점이 물건 가운데서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팔에 있어요? 발에 있어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이걸 실체로 보는, 만지면 만져진다는 물건으로 보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를 점유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아요. 물건에 나라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나라는 게 없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지금 말장난에 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꼭 귀신같아요. 나는 어느 자리에도 없어요. 어느 자리를 점유하지 않으면 없는 겁니다. 반드시 있다고 할 때는 어느 지정된 자리에 가 있어줘야 해요.
그런데 나라고 있는 자리는 없어요. 나는 없고, 신체라는, 육체라는 실체, 물체만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을 못합니다. 관찰하는, 내가 응시하는 대상으로서 나라는 게 있고, 다시 말하면 응시 하는 자리, 그걸 바라보는 응시의 자리가 따로 있는데, 그 자리가 나라는 거예요. 이게 말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게 살아가요. 전부 다. 모든 사람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유가 있어요.
없는 주체와 개체를 이렇게 연합해서 바로 나라고 하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이게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환상. 이 주체라는 것,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주체는 날마다 변덕이 심해요. 날마다. 어느 정도 심하냐 하면 내가 있는데, 내가 있다는 말은 지금 내 육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습니다.
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입을 벌려서, 발성을 해서, 소리에너지를 파장으로, 1초에 340미터의 파장으로 내 귀에 진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소리죠. 근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욕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욕하는 소리하고 칭찬하는 소리하고 그게 물리적으로 차이가 납니까? 물리적으로? 아이, 착해라. 아이, 더러워라. 똑같은 톤으로 이야기하면 물리적으로 차이가 나요? 안 나요? 물리적으로 차이가 안 나죠.
지금 인간이 얼마나 망상적인지 한 번 보세요. 그러면 칭찬할 때는 귀가 나풀나풀하다가, 욕을 할 때는 귀가 흔들흔들 이렇습니까? 아무 변화 없이 똑같죠. 똑같은데, 갑자기 내 신체가 일어나서 “너 이리와!”하고 흉기 들고 덤벼든다면, 도대체 그 신체를 누가 움직였습니까? 뭐가 움직였겠어요? 주체는 변덕스러워요. 주체는. 음파로 따져가지고 욕을 하나 칭찬을 하나 그 톤으로 하게 되면 아무 변동될 이유가 없어요. “아이고, 착해라.”하면 가만히 있어요. “아이고, 나쁘다.”하면 성냅니다.
근데 이걸 조합하면, ㅇㅏㅇㅣㄱㅗㅊㅏㄱㅎㅐㄹㅏ...이거거든요. 이거. 기역ㄱ, 니은ㄴ..이런 것들이 막 날아와서 되거든요. 음성이. 이거 듣고 자기가 발작을 일으키고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소리에 불과한데? 왜 욕한다고 기분 나빠야 하냐 이 말입니다. 욕 한다고 왜 기분 나빠야 되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내 신체를 보고 이야기했지, 내 주체를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내 신체보고 이야기했어요.
자, 내가 어떤 의자에 앉아있으면 어떤 물건이 의자에 앉아있는 거예요. 물건이. “아이고, 그 물건 더럽다.” 하고 가요. 하고 간 거예요. 물건이에요. 물건. 물건이라는 말을 그렇게 낯설게 듣지 마세요. 사람은 자기 빼놓고 다 물건이에요. “에이, 더운데 물건 좀 치워라! 엉덩이 좀 치워라!” 좀 떨어지라고 하는 이 말이거든요.
따라서 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와 관련이 없이 다른 곳에서 온 거예요. 다른 곳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영적이라고 합니다. 영적. 그래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봐서는 영적이 아니에요.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게 되면, CT촬영하게 되면 절대로 영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평소의 모든 행동은 객관적인, 물리적인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있어서, 울고불고 좋고 화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난리가 나는 거예요. 걱정하고 근심하고 스트레스 받고. 그 다른 요소는 나라는 주체 말고 다른 주체에서 관련된 내 몸일 경우에만 이게 해명이 되고 설명이 돼요.
그 다른 주체를 성경에서 창조의 원리로 보는 겁니다. 그 다른 주체가 뭐냐,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의 몸. 모든 인간은 누구의 몸을 인수받았어요? 아담의 몸의 확장입니다. 아담의 몸을 받았어요. 아담의 몸을 받았으면, 아담의 몸이 영적이라면 우리도 영적이 되죠. 그럼 영적이라는 것은 관계성을 이야기하거든요. 아담의 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죠.
따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주어진 벌칙이 뭐였습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이 죽으리라”에 대해서 인간의 환상, 망상에 의하면 내 신체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으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체의 죽음을 생각 안 하고, 개체의 죽음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주체라는 것은 영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했죠.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담이 처음 하나님과 관계 했던 것이 영적이에요. 그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은 그 당시에 육신이 늙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필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타당성이 우리에게 오늘날 주체로서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그냥 방해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방해하게 되면 거기에 합당한 징벌이 영적으로 적용된다 이 말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라는 말을 해버리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불교에요. 그렇잖아요. 육이 흩어지면 흙이 되고, 흙이 모아지면 육이 되고. 끝. 더는 없는 거예요. 더는 없어요. 그런 불교신자에게 “그걸 하나의 개체로 보고 물건으로 본다면 당신은 뭐야?”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나도 나중에 신체가 흩어지면 나도 없어지니까, 결국은 나도 공중에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진다는 거예요. 없어졌다가 뭔가 다시 선행이 있으면 착한 소로 바뀌었다가 개로 바뀌었다가 바뀐대요. 그 사람은 거대한 도넛에서 그냥 자기가 느꼈던 것밖에는 몰라요.
거대한 도넛이, 우주가 나사렛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 거대한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태어나가지고 곁눈질해가면서, 자기와 똑같이 바보 같은 자들에게 물어가지고 지혜를 짜낸 것이, 그게 바로 불교입니다.
걸핏하면 이래요. 세상 살기 힘들면 내가 그냥 꽉 죽어버린다고. 하여튼 가족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내가 꽉 죽을게. 나 집 나갈게. 엄마 혼자 살아.” 사춘기 자식처럼. “여보! 또 술 먹었어요?”라고 하면 “그래, 나갈게. 내가 나갈게. 니 혼자 잘 살아.” 술김에 또 그런 소리하고. 도대체 죽는 게 뭔지 몰라요. 죽는 게. 자기 물건만 치우면 죽는 겁니까? 그게? 자기 신체만 자살하면 그게 죽는 거예요? 자기 손으로 넥타이 매거나 번개탄 피워서, 넥타이로 안 되면 넥타이 매고 번개탄 피우고, 이중삼중으로 완벽을 기해서 그렇게 죽으면, 그러면 이제는 안 죽는 겁니까?
인간 자체가 창조의 원천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지금 홀몸이 아닙니다. 자기가 독자적으로 자기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아니에요. 그건 억지에요. 억지. 계고장 날아왔습니다. 경고장 날아왔어요. 이렇게 성경에 그리스도만 믿으면 복된 소망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안 믿는 사람에게는 무시무시한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왜? 주체는 주님이 독점하고 있어요. 우리가 주체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에요. 기존의 아담은 두 번째 아담을 위해서 그는 죄 지어야 하고, 죄 짓고 거기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아담이 해야 할 피조물로서의 역할이에요. 자기배역이고 자기담당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발 이 세상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머리 허해가지고 그 염색이 잘 됐다고 그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최순실을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유치장에 있으나 바깥에 활보하고 다니나, 자기물건, 자기밖에 모르는, 살면 살수록 저주받는 짓거리만 증가시키는, 그런 사람을 왜 부러워합니까? 삼성이 어떠니, 현대가 어떠니.....,
세상 모든 움직임이 뭐냐, 본인만 살라고, 본인이 꿈의 주인공이니까. 본인 살라고 그 짓하는 거예요. 정규직 되게 해 달라! 나 같으면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어요. 왜? 왜 하는데? 살아야지! 니가 복음을 알아? 우리에게 복음을! 이건 데모 안 하죠.
자기 사는 게 복음입니까? 자기 사는 게? 왜 그런 데모를 하느냐 하면 정규직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래요. 부러워 할 게 있다는 말은 앞으로 걱정근심을 한 트럭 싣고 다니겠다는 겁니다. 해답도 모르고, 소중한 것이 뭔지도 모르고,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르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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