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70310b (불량품)-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을 이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게 되면 상대방은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 그렇게 나오겠죠.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씩씩). 씩씩 무슨 뜻인지 압니까? 열을 내면서 씩씩거리죠.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아까 세 가지가 뭐라고 했습니까? 행함이죠. 행함을 통해서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냥 행하지 않고 이렇게 행하거든요. 나는 말씀에 최선을 다했고 하라는 대로 한다. 글과 사물이 일치가 돼야 될 건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행동이 일치가 돼야 될 텐데, 일치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치시키려고 애를 썼다. 이 말이거든요. 애를 썼다.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 모르겠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성의와 정성을 다 표하고 지금도 겸손하고 착실한 마음으로써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내 형편상에 맞게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고 하죠.
나에게도 시간적 여유를 주고 그냥 말씀만 지켜도 생계가 유지된다면 말씀 지키지 말라고 해도 말씀에 매진할게. 지금 애 셋 키우고 있는데 성경 제대로 못 보고 기도할 시간 없다고 그렇게 몰아붙이면서 닦달 내느냐? 나름대로 다 한다. 그럼 제가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행함입니다. 근데 그 행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행함과 비교해볼 때, 그게 가짜고 오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제 이야기는 뭐냐 예수님을 집어넣었어요. 예수님을 집어넣었으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예수님의 완성된 모습은 뭡니까? 이렇게 말이 나오면 좋겠는데, 씩씩거리면서 그럼 하지 말라는 말이냐? 이렇게 나와요. 나는 제 3자인 타인을 집어넣었는데, 아까 타인이 와야 누가 깨어난다? 내가 깨어나거든요. 나 말고 타인. 내가 어떻게 처분할 수 없는 타인. 내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분이 와서 나를 깨울 때에 진짜 내가 발각되는데, 만약에 주님이 오지 않는 상태라면 씩씩거리면서 계속해서 뭐만 붙들어야 돼요?
어디까지나 누구도 나를 깨울 수 없다면, 누구라도 나를 깨워야 돼요? 나라도 나를 깨워야 되잖아요. 내가 나를 깨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내가 아는 양심 따라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나름대로 다 하는 거예요. 나름대로의. 물론 니가 보기에는 미흡한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는 최고라니까요. 나름은. 두 번은 못한다는 거예요. 힘들어서. 헥헥거리면 여기서 더 어떻게 헌금을 하고, 여기서 더 어떻게 봉사를 하고, 여기서 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기도 시간을 늘리고, 성경을 어떻게 더 봐? 더는 바빠서 못한다는 겁니다. 내 배를 째라는 거죠.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있어요. 더 이상은 못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에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해요. 너는 지금 누구의 증인인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누구의 증인이 되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너의 훌륭함의 증인이 아니고, 너의 신앙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예수님의 증인되죠.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이 보낸 분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누가 택배를 보냈다 칩시다. 나한테 그런 친구는 없지만, 만약에 친구가 택배를 보냈다면, 보내고 난 뒤에 도착했다 싶을 때 친구한테 전화가 옵니다. 친구가 왜 전화했겠어요? “친구야 잘 있나?” “그래.” “끊자.” 이거 할라고 전화했습니까? 그 친구가 “애는 잘 걸어 다니고? 잘 크지? 엄청 예쁘겠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지?” 그거 전화하고 끊습니까?
택배 보내고 왜 전화했겠어요? 택배 왔냐고 전화하잖아요. 주님이 성령 보내놓고 뭐라고 오겠습니까? “내가 디도서 1장을 통해서 너는 너의 증인 말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느냐?”라고 묻잖아요. 지금 성령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그럼 성령이 왔다는 것은, 내 인생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곧 타인이, 나 말고 다른 타인이 영원히 주도권을 가지고 내 인생의 미래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장악을 했다는 말은 내가 사라진다는 말입니까? 내가 명백하게 똑똑히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주님이 나를 장악했다는 말은 내가 그냥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명백하게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죽은 헛방보고 증인합니까? 또렷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또렷하게 살아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있는데, 성령이 온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또렷하게 살아가요. 또렷하게.
변비에 걸리면 변비를 의식하게 되고, 감기에 걸리면 목소리가 안 나오고, 또렷하게 살아있으면서도 그 모든 일은 누가 장악했다? 우리 주님이 장악한 거예요. 사나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의 증인?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시는 거예요. 안 먹고 안 자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짓이 아니고, 예수님 증인 된다고 지리산에 들어가 앉아 자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 돈 벌 것 돈 벌고 식사할 것 식사하고, 그리고 외식할 것 외식하고 운동할 것 운동 다하고, 조깅할 것 조깅 다 하고.
다하는데, 조깅을 하던 다이어트를 하던,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셔서 하게 하신 일로 하시는 거예요. 성경을 보든지, 성경을 읽든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그것을 성령께서는 확인시키기 위해서 늘 연락이 오는 겁니다. “니 아직도 주의 증인하고 있지? 니 증인 말고?” 그럼 주의 증인이 된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수시로 뭐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겁니다. 누구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교회 꽃꽂이를 하는데, “아이고, 집사님은 믿음도 좋다. 어떻게 이 꽃꽂이를 잘하십니까?” “저는 이 꽃꽂이를 하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왜요?”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남한테 튀고 싶고, 내가 얼마나 나의 잘남을, 나의 행함이 얼마나 뛰어난 행함인 것을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그러한 나의 본성이 꽃꽂이 하는 가운데서 또 다시 내가 발각당하고 노출됩니다.” 내가 꽃꽂이 한 것을 애가 걸어 다니면서 꽃을 다 빼버리면, 다른 사람은 귀엽다, 귀엽다 하겠지만 꽃꽂이 한 나는 심장이 뽑혀져나갑니다. 저거 한다고 일곱 시간 걸렸는데, 애 엄마는 뭐하나? 애 간수도 안하고?” 이래 나온다는 말이죠.
내가 행한 것을 누가 짓밟을 때, 남한테는 장난 같지만 나한테는 목숨과 같은 겁니다. 목숨과 같은 것. 우리 애가 못났어도 내가 나무라야지, 우리 애를 오지랖 넓은 옆집 아저씨가 우리 애에 대해서 관여하게 되면 “아저씨는 아저씨 자식이나 잘하세요! 왜 남의 새끼한테 간섭을 하는데?” “애야! 집에 가자. 집에. 저 아저씨가 나중에 또 뭐라고 하면 엄마한테 이야기해라.” 그러면서 그 아저씨 보란 듯이 “에잇, 재수 없어!”라고 작은 복수를 하죠. 그래야 속이 시원하니까.
인간의 행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모든 인간의 행함들이 아주 많아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지만, 꽃꽂이 하는 것, 잠자는 것, 용변 보는 것, 축구하는 것, 투표하는 것, 영화구경 가는 것, 일하는 것, 야근하는 것, 온갖 것이 있더라도 그 마지막은 무엇으로 귀결되느냐 하면,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 둘로 딱 구분지어서 하게 돼요.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
왜냐하면 이러한 축구를 해도, 축구 끝나고 난 뒤에 샤워를 하면서 ‘오늘 내가 축구를 잘했나? 못했나? 축구하면서 내가 상대방한테 예의에 너무 어긋난 짓을 하지 안 했는가? 어긋난 짓을 했으면 내가 사과해야지. 근데 공 잡았을 때 상대방의 태클이 들어와서 무릎이 안 좋네? 저거는 나쁜 인간이고 피해 본 나는 착한 인간이야.’ 모든 행함에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관, 또는 가치로, “선이냐? 악이냐?” “악이냐? 선이냐?”로 반드시 둘로 잠잘 때 정리정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기장이죠. 일기장. 그날의 일기장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이렇게 구분해요. 그럼 선과 악이 통합되지 않습니까? 선과 악은 통합이 안 돼요. 선이 설립하게 되면 그 현장에 악도 같이 병행해서 설립이 되는 겁니다. 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악이 아닌 것이라고 하고, 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이 아닌 것이 악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물어보나 마나에요. 그러면 그 선과 악은 인간의 모든 양심의 공통점이겠네요? 선과 악이라고 드러나는 것은 공통점이 맞아요.
그런데 그 선의 내용이 뭐고 악의 내용이 뭐냐고 하는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집안의 식구가 다섯 명이 있으면 다섯 명의 선과 악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그 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유리하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면 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욕하거나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악이 되는 겁니다. 애들이 울 때 악에 받쳐서 울어요. 뭔가 불만이 많아요. 근데 애한테 젖 주거나 맛있는 것을 주면 재롱을 부립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 사람마다 이게 다 달라요. 선과 악이 다 달라요. 근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나의 나 됨을, 나를 신으로 사랑하고, 신으로 경배하고, 신으로 경배한다는 말은 남이 나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내가 나를 신으로 경배하는 이 절대적 존재에 대해서 동조하고 거기에 호응을 해주면 그게 무조건 선이고, 내가 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흠집을 내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 다툼이라는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부부싸움이나 부모자식 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항상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왜 이해 못해?” 이것의 싸움이에요. “당신은 왜 나를 이해 못해?” 그럼 여자도 안 지죠. “그러는 당신은 나를 먼저 이해를 해주면 안 되나?”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니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그러면 여자 쪽에서 “마음을 알아줘야지.” 그럼 남자 쪽에서 “니 마음이 뭔데?” “이야기한들 아나?” “그럼 어쩌란 말이고?” “대꾸하는 것도 꼴 보기 싫다. 자자!” 그러고 갈라서는 거죠. 그날은 둘이 각방 쓰는 거죠.
“니 여자 마음 그렇게 모르나?” 하거든요. “뭐 이야기해야 알 게 아니냐?” 하죠. 그럼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야지.”하죠. “참, 미친다. 미쳐! 정말!” 진짜 미쳐요. 내 마음도 나를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이러면 “그게 부부가? 이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부부고? 남이지 부부가?” 이거는 근본적으로 각자가 어떤 존재인지인지를 몰라서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이 나옵니다. 제목. 오늘 제목을 미리 한 번 정해봤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세 글자입니다. “불량품”입니다. 불량품. 자기 자신이 불량품이에요. 불량품인 근거를 대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교회 가서 다른 집사, 다른 교인하고 비교해야하지 않아야 될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가 남하고 비교하게 되면 자기 증인으로 계속 머물러요. 저 사람보다 못하다. 음매~ 기죽어! 저 사람보다 낫다. 음매~기살어! 시커먼 테이프 붙여서 일자눈썹해가지고 야구방망이 하나 들고 하는 순 악질여사 개그가 있었죠.
사도바울이 나처럼 되라고 했습니까? 나처럼 돼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이 자기의 증인을 전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도바울이 뭘 전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전했다고요. 보이지 않는 분을 전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나 따라 해봐라가 아니라 글을 전해요. 글. 복음. 편지를 전해요. 편지. 편지라고 하는 것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어떤 글을 줬는데 지킨 사람한테는 그 글을 매직으로 지울 수 있는 고난을 주는 셈이 돼요. “이거는 지켰고. 이 단계는 넘어섰고.”라고 하면서 매직으로 지워버려요. 그러면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은 성경이 시커멓게 됩니다. 다 지켰으니까. 저건 나보다 신앙이 못한 사람이 지킬 용도지, 나 같은 레벨 좀 되면 이거는 다 된다는 거예요. 진짜 도인 같으면 성경이 전부 다 하나도 남지 않았을 정도로 다 지켰을 거예요.
성경은 지키라고 준책이 아니기 때문에 매직으로 지우면 안 돼요. 15년 동안 복종했다고 자부하더라도 16년 째 복종하지 못했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디도서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앞장세워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새겨주십니다. 살아있는 디도서 되라고. 디도서 다 지킨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디도서 앞에 못 지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사람이 되라고 디도서를 우리에게 계속 보내는 겁니다.
아까 쌈 싸먹을 때 양배추에다가 고기 한 점 올리고 했죠? 그 양배추가 뭐냐 하면 이 말씀 앞에,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바로 죄인 됨을 아는 순간이에요. 그럼 죄인 됨을 안다는 말은 그 죄인 되는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근거가 뭐냐, 우리의 평소의 행함이 우리 자신을 겨냥한다면 모든 행함은 이거는 주님을 증거 한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냥 행했다 하면, 이건 자동적으로 나한테 이체가 돼요. 내 통장에. 이걸 잊을 수가 없어요. 항상 내가 선했다는 것, 내가 착하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don't forget! 그걸 우려먹고, 또 우려먹고, 완전히 사골곰탕이라.
자식들이 잘 된 것은 내가 그동안 주님 앞에 복종해서 잘 됐다는 말은 안 해요. 왜? 말하면 또 교만할까 싶어서. 교만을 걸려내는 또 기계가 가동되거든요. 그래서 안 그런 척 하지만, 내 자식한테 “그것도 대학이야?”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 대학이 어떤데? 그 대학이 어떤 대학인데? 연세대학이 어떤데? 그래 서울대에 못 들어갔다고? 니는 잘났어? 지방대학 갈 것을 연세대에 들어가도록 내가 얼마나 기도했다고?” 그렇게 해놓고 속으로 ‘내가 이런 소리 할 게 아닌데?’ 평소에 숨어있는 소리가 툭 튀어나와버렸어요.
남편과 아내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뭐 신앙과 관계없는 다른 가족이야기하다가도 교회 잘 다니는 아내가 남편한테 좀 밀린다 싶으면 “니, 나 건드리면 주님이 함께 안 있어.” 평소에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저 사람보다 나를 더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해준다는 그런 인식을 얼마나 갖고 있었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럴 때는 “You are Hallyedang! 당신이 할례당이다!” 시킨 대로 했다는 거예요. 시킨 대로 했으니까 나는 잘났다는 거예요. 그게 평소의 자기 증인이에요. 디도서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여기에 대해서 초월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어떤 목사가 교회와가지고 “나는 복음만 전하고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니 감사합니다. 생활비까지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다 주의 은혜로 하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 한 십년 간 해서 교인 백 명을 모았다 칩시다. 그런데 유력한 장로가 와가지고 올해는 예상보다 교인이 늘지 않고 헌금이 예상에 못 미치니까 장로가 “교회 키우는 목사로 우리가 바꿀게요. 우리 당에서 결정했기에 이번 달 내로 나가주세요.” 이렇게 하면 “내가 이 교회 왔을 대 열 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백 명이 됐는데, 그 백 명 가운데 오십 명은 십일조를 하니까 두(頭머리) 당 십일조 계산해봐라. 내가 퇴직금 천만 원 받고 나갈 군번이야?”
그렇게 평소에 복음전하는 대로 따라주면 감사하고, 이렇게 했던 사람이 막상 나가라고 하니까, “이러면 나는 못 나간다. 아파트 바꿔주고, 차 바꿔주고, 다음에 다른 개척교회 할 때 자금 2억 주고! 그러면 나간다. 장로 니들이 헌금 얼마 했다고? 나 때문에 온 교인들 십일조 계산해봐라! 내가 계산해보니 십일조 월 오백만원인데, 월 오백만원 줄 용의가 있나?” 그러면 장로회에서 정치적 협상에 들어가죠. “소원대로 2억 줄 테니까 그 대신 우리교인들 빼가지 마라. 이 교회에서 오백 미터 이상 떨어지고!” 그럼 목사가 “콜!”하고 난 뒤에 한 달도 안 돼서 교인들 다 꼬셔가지고 자기 교회로 데려가고. 왜냐하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복수니까. “어디 주의 종을 건드려?” 복수다.
그러니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거는 교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직장을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직장. 직장일 잘 못 한다고 “오늘부터 경리부 해산!” 김과장 따라 나가 가지고, 완전히 성추행 범으로 몰아가지고, 이사회 결의도 못하게 만들고, 이 내용은 몰라도 괜찮아요. 복수하죠. “어딜 나를 건드려? 내가 나한테 얼마나 귀한 존잰데? 니가 뭔데 나를 건드려?” 이게 육신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이걸 고이 모셔가고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협상입니다. “내가 귀한 것을 지켜주신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는 자기 쪽에서 내민 어떤 협상책입니다. 협상안이라고요. 협정.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에서 그 협정을 날마다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 본성, 그 본성이 어디서 나왔느냐, 선악과에서 나왔어요. 선악과.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육신에서 선과 악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 아니거든요. 이게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그러면 복음은 뭡니까? 라는 질문은 그 다음에 당연히 나와야죠. 이야기 오래 했다고 다 잊어버렸으니까, 아까 했는데, 수천 번 했던 이야기,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란 말인가?” 여러분들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죠.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한다고 하니까,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이상한 교회 아니야? 그거 이단 아니야? 뭐가 딸리는 것 아니야?”
왜, 이런 것이 있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주님 쪽에서 넘어온 것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가상된 천국에다가 내 쪽에서 노력해서 접근해가려고 하는 거예요. 사다리를 놓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점점 높여가고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까? 자기 증인.
자기 증인이 되니까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것 중에서 하라, 하지마라, 하면 그건 굉장히 납득이 되는 거예요. 저거 하면 신앙이 한 걸음 더 성장하겠죠. 내년보다 올해 더 신앙이 높아지겠죠. 교회에서 주차장 만들어야 되니까 여러분들 목돈 내라고 하면, 목돈 낸 만큼 내 신앙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니까, 이 행동한 것을 주께서 알고 계시니까, 그 한만큼 내신 성적이 향상되고, 좋은 점수를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죠.
그러니까 죽자 사자 누구의 증인입니까? 자기 단도리 하는 거예요. 자기 단도리, 자기 관리, 자기 증인 되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이 누구라고요? 율법에 흠이 없던 사람이 누구라고요? 사도바울이죠. 그걸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누구라고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죠. 그냥 본인들은 본인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뭡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그냥 우리를 구원하시려 오신 분이 거기에 치여서 죽었잖아요.
5톤 트럭에 치여 가지고 티코가, 요새는 티코 나오지도 않아요. 모닝이 튕겨나가서 죽어버렸어요. 주께서는 그 모닝을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냈잖아요. 그리고 우리를 모닝에 태워서 천국 보내잖아요. 십자가에 태워서, 복음에 태워서 천국 보낸다 이 말입니다. 우리 트럭 운전사를 모닝에 태워서 보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트럭을 잊어야죠. 트럭을 잊어야 돼요. 그 트럭을 잊을 수가 없지만, 주께서는 잊을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놓았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육은 죽기 전까지 그대로 남아있어요. 죽기 전까지.
그럼 육이 발상하고, 육이 평소에 무심코 하는 모든 행동과 디도서와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참 웃기지도 않죠. 본인이 알아요. 내 속에 바리새인 귀신이 한 일곱 마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얼마나 체면위주고 자존심 위주인지를 본인이 알아요. 얼마나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더욱더 본인이 아는 것은 뭐냐 “신이여! 기다려주소서. 내가 절제하고 관리해서 주님 뵙겠습니다.”라고 하는 자기 철저함에 매진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못난 놈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잘난 놈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교회 가서 남보다 기도 더 오래하고, 더 헌금하고, 더 깨끗하게 행동하고, 더 봉사하고, 더 충성하고, 목사 말씀에 순종하고, 전도 많이 하고, 전도 못하면 선교를 위해서 기도나 하고, 그거 못하면 헌금에다 하면서, 스스로 평소에 착하게 행동한 이것이 하늘에 상달되기를, 그 눈으로 상달되는 그 뒷모습을 다 보고 있어요. “올라간다. 나를 위해서 올라가는 저 모습을 좀 봐!” 남의 것은 부숴버리고 “저리 비켜! 내 기도 올라가! 내 헌금 올라가!”
여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한테 매료되고, 자기한테 경배하고, 자기한테 미쳐버렸어요. 인간은. 교회가 그걸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왜? 돈이 나오니까. 모든 교회의 마지막은 돈이에요. 돈이 나오니까. 그동안 얼마나 속아 넘어 갔습니까? 속아 넘어 가도 싸요. 왜? 성경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12절 봅시다. “그레데 인 중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들이라 하니” B.C.600년경에 에피메니데스 이 사람이, 사도바울이 지금 디도서를 쓴 게 A.D.50년이나 60년이 가까이 되거든요. A.D.50년으로 보게 되면, 그 전에 이 에피메니데스라는 이 철학자는 본인이 그레데 사람이에요. 그레데 바깥사람이 아니고 그레데 사람이에요. 그레데 사람이면서 본인 입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레데 사람은 항상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면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들이다.
그들의 행복이라 것이 뭐냐 하면 배부른 것이 행복이에요. 배부른 것이 행복이라는 말을 지금 저는 안 좋은 뉘앙스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배부른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안 좋은 뉘앙스로 받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말이 맞잖아요. 사람이 일하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배부른 재미로 살죠.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 아니고 잘 쉬기 위해서 일을 해요. 잘 쉬기 위해서. 돈을 엄청 벌었는데 미쳤어요? 일을 하게? 쉬는 재미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인간의 육신은 모든 컨디션이나 모든 것이 일을 적게 하고 자기가 자극적인 것, 더 자극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왜? 창세기 3장에 나온 말씀처럼 인간에게 워낙 이 땅이 저주스럽고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소원이 딱 하나로 결정되었다는 말이에요.
힘든데 소원이 뭡니까? 안 힘든 것, 편한 것. 아플 때 소원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픈데 대통령이 된다고 이래 안 합니다. 탄핵될 수가 있으니까. 아플 때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몸만 건강했으면, 두발로 걷기만 했으면 더는 소원 없다. 인기가 없다? 소원이 뭐예요? 좀 이렇게 오빠! 오빠! 팬들이 해줬으면. 항상 결핍을 통해서 소망과 소원은 새롭게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결핍을 통해서.
그러면 결핍 없는 상태가 되면 되지 않느냐? 인간의 욕망은 일단 거기서 완료가 되면 그 자체에서 새로운 결핍이 생깁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거예요. 탐내지 말라는 말을 제대로 들으세요. 탐내지 말라는 것은 니가 탐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경우라도 너에게 해코지가 된다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항상 교회가면 오냐, 오냐 해주고 훌륭하다고 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고,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이나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 그 보람으로 우리는 교회 나가는 겁니다. 교회 가도 인사도 없고 가면 가고 오면 온다는 식으로 하면 삐져서 안 옵니다. 그 교회가 우리교회입니다. 가면 가고 오면 오고. ‘오면 복음도 모르는 게 오기는 왜 오나? 알아서 나가라.’ 물론 그런 사람은 없고 반갑지만. 반갑다고 내밀지는 않아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반갑다고 내밀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로 오해를 할까봐.
교회는 누가 오기 전에 이미 목표가 있어요. 숫자가 불어나면 좋겠다,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오게 되면 그 사람이 깡패인지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숫자 하나를 채웠다는 것에서 일단은 감사해합니다. 일단은 고마워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밥 좀 주소!”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죠. 항상. 이 말이 모순되는 거예요. 본인이 그레데 사람이에요.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이다.”이라고 했을 때 모순되는 것이 있죠. “그렇게 말하는 너는 이단이냐?” 했을 때 “그래. 이단이다.” 이래 되면 아무 문제없어요. “나만 이단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거는 지방교회가 되는 겁니다. 워치만 니가 되는 거예요. 워치만 니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가 하는 지방교회가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기대치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결과가 아니거든요. 교회의 머리는 누굽니까? 주님이죠. 그러면 교회가 생겨버리면 그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누구에요? 주님께서 만든 교회죠. 그럼 진짜 교회는 뭐냐 하면 교회 자신에게 교회 원인을 안 돌리겠죠. 교회가 교회됨의 머리라고 우기지는 않겠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런 교회가 된 것은 우리 노력 덕분이라고, 행함 덕분이라는 말을 진짜 교회라면 안 하겠죠. 그럼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주님 덕분이라고 하면 교회입니까? 그것도 교회가 아니에요.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교회되었잖아요.
그럼 우리가 교회되었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뭐가 된다? 교회에 누굴 모아놓았다? 죄인들을 모아놓은 거예요. 뭐로 모아놓았다? 주의 말씀으로 죄인 되게 만들어서 모아놓은 거예요. 따라서 죄인이 교회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죄인은 죄만 짓지, 죄인을 모아놓았으니까 의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쓰레기 모아놓았는데 거기서 괜찮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듯이.
그렇다면 진짜 교회는 뭐냐 하면, 뭘 쳐다봐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행함으로 지금의 교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겠죠. 이 논리에 하자가 없어요. 근데 어떤 교인이 교회에 두 명 왔는데, 어떤 목사가 이야기 하는 이야기 한 것처럼 “목사님. 또 네 명 나갔어요.” 하는 교회가 저기 어디 있어요. 교회에 왔다가 네 명이 나갔습니다. 그럼 네 명이 나갔으니까 그 네 명 빼고 나머지기 결과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 네 명 누가 나가게 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논리에 의하면 누가 나가게 했습니까? 주님이 나가게 했죠.
그럼 네 명 나가게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슬퍼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되죠. 왜? 우리는 네 명이 나가기는커녕 네 명 더 있었으면 하는 죄를 발산했는데, 주님께서 플러스 네 명이 아니라 마이너스 네 명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걸 통해서 우리가 뭘 알 수 있어요? 이 교회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다? 다시금 주님 소관인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그 기쁨이 충만하겠죠. 내가 보니 이 교회는 늘 기쁨이 충만한 것 같아. 다 나가고 아무도 없으니까.
근데 제가 이론상 제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틀릴 구석이 없어요. 맞아요. 맞는데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은 네 명 나갔잖아요. 꾹꾹 참아요. 왜? 싫어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여러분 네 명이 나가도 주의 은혜인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감사는 안 하고 ‘그래. 내가 이때 믿음이 있는 것을 티를 내야지. 참자.’ 여러분 참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참는 것이 또 행함이 돼요. ‘참자. 참으면 다음에 또 열 명 보내주겠지.’ 이런 또 계산을 해요. 목사가 교인수가 불어나는 것은 자기가 주의 종인 것을 증명해서 그 목사 자리에서 안 쫓겨나고 오래 있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거고, 교인들이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은 교회 운영비를 내는 것에 있어서 자기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래요.
계하는데 계원들이 많아보세요. N분의 1하면 적어지잖아요. 이왕 온 거 돈 되는 사람들이 오게 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서 껌뻑껌뻑 다 넘어져요. 부담이 적으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기본이 아니에요. 자본이 무엇의 흐름이다? 모든 게 돈으로부터 시작해서 돈으로 말미암아 돈으로 가잖아요.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다? 돈으로 세워지는 거예요. 우리 의존교회가 한 60억 있다, 집에서 모이겠어요? 복수하듯이 상가 나와! 상가 월세 얼마야? 200만원? 얘걔 여기 있어. 현찰주고 바로 옮겼겠다. 우리한테 알 수 없는 복수가 있어요. 왜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느냐는 말이죠. 왜 나의 자존심을?
그러면 교회가 할 것은 이 말씀이 남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해서, 이 말씀을 보게 하신 것은 이미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이미 성도기 때문에, 이미 구원됐기 때문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이 말씀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할례당이라는 고백을 마음껏 하는 거예요. 할례당인 우리를, 뭐 하나 지켰다고 뽐내고 하는 우리를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한 고백이 나오도록 오늘도 디도서를 가지고 성령께서 또 역사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넘어오는 성령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델을 찾아요. 누구를? 그럼 누구처럼 행하면 성도라고 이야기해주겠어요? 사람을 찾아요. 왜? 자기가 원하는 타인, 자기가 채택할 수 있는 타인을 또 골라요. 우리나라 가운데서 또 괜찮은 가운데서 또 찾아요. 아! 참....,,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는데, 뭐 이건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이러면 안 되고 그레데교인들이 이 말을 새겨들어야 돼요. “니만 잘났나?” 이렇게 하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항상 거짓말쟁이가 다 맞아요. 자, 그렇다면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예수님은 주시다. 이것도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서, 지금 열왕기상 21장 나왔어요. 방금 했어요. 속이지 않습니다. 21장 1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거 거짓말입니까? 거짓말 아닙니까? 방금 성경 아무데나 펼쳐서 읽었는데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왜? 그렇게 강의해도 응용문제 나오면 모른다니까.
인간의 행함은 뭐로 이어진다고 했습니까? 선과 악으로 이어진다고 했죠. 이 성경 읽은 것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묻는 것 자체가, 나는 아무리 봐도 성경에 있는 글자로 그대로 읽었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속한다? 나는 선에 속한다는 것으로 잠시 십자가 은혜를 가려버리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천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도 죄냐? 이렇게 해요. 그것도 죄죠. 그것도 죄인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 천지를 여호와가 만들었다는 그것도 부정했습니까? 그들을 인정했잖아요. 그들을 인정해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어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뭘 인용했습니까? 시편 91편 11절을 인용했죠. “뛰어내리라 천사가 너를 받들어줄 것이다.”
근데 왜 마귀에요? 선과 악 말고, 다른 시스템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시스템. 선과 악 말고 다른 시스템.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따먹지 못하고 아직 남아있는 과일이 있어요. 사과? 바나나? 아닙니다. 우리 외손녀 보고 바나나 하라고 하니까 바나나 했어요. 놀라고 신기해했어요. 드디어 말 텄다고. 갑자기 바나나 생각나네. 못 따먹은 것이 바나나입니까? 아니죠. 무슨 나무에요? 생명나무죠. 생명나무. 생명나무에요.
생명나무는 어떤 인간도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 선악을 아는 자에게. 선악을 자는 따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럼 선악을 아는 자는 따먹을 수 없다는 말은 어떻게 된다? 선악을 알기에 죽어야 마땅하죠. 죽어 마땅하고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면 어떻습니까? 먹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그제야 먹을 수가 있는 겁니다. 선악과이기 때문에 죽이고, 죽은 인간에게 생명나무 주고, 그 과정을 앞서서, 압축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게 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돼요. 나는 죽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주님 쪽에서 넘어온 택배에요. 주님께서 전화하면서 “야야! 택배 잘 있나?” 이거 물어요. “저 오늘도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딴 것은 듣기 싫고 택배 잘 있나?” “오늘도 주님 말씀대로 순종했나이다.” “야야! 쓸데없는 소리 듣기 싫고, 그건 됐고, 택배 잘 있나? 택배?” 니 안에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우리에게 날마다 각인시키고 기억나게 만들고 회생하게 만들어요. 그 죽으심 앞에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거예요. 이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말로 설득이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함으로써 십자가를 전하고, 그 십자가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거예요. 어떤 강한 힘, 죽음보다 강한 힘이 우리 안에 들어있고, 날마다 전화하셔서 내가 보내 준 택배 잘 있냐고 전화하시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13절 봅시다.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증거는 참되도다.” 그레데인들이 항상 악하다고 하는 것이 뭐다? 나쁘다? 안 나쁘다? 참되다? 참 안 되다? 참되다 이 말이죠. 참, 사도바울도 굉장히 부정적이죠. 몇 명 있을 만도 한데, 완전히 싸그리 죄인 만들어요. 이어서 보면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말은, 그 내용을 온전케 하는 거예요. 그 믿음을 니 행함으로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에요. 자,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선물이에요. 은사죠. 성령이 와서 믿어지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누구 선물? 우리가 안겨서, 우리가 강요해서, 막 요청해서 뺏은 겁니까? 그것은 선물이 아니죠. 그건 사기 치는 거죠. 그냥 주신 선물이죠.
선물 할 때,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온 겁니다.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의 선택 없이 들어온 거예요. 왜 선택 없이 들어왔느냐 하면, 항상 우리의 선택은 뭐냐 하면, 우리의 선택과 행함은 뭐가 된다? 선악과에 이게 귀결되고 갇혀버려요. 선과 악에. 이미 우리는 선악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우리보고 뭐 하라고 하면 “잘했죠?” 이래 돼요. 또는 “못했죠?” 이래요. “아휴! 나는 믿음 없으니까 지옥 갈 거야.” 이것도 선과 악에 갇혀있는 믿음이에요.
믿음 없다고 지옥가고 믿음 있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선과 악의 시스템이 아니에요. 거저 준 것이 있는가? 아무리 봐도 없는데? 없으면 말고. 없으면 마는 거지. 뭐. 주님이 행하셔서 거저 준 것 같으면, “나의 구원은 주님의 행하심에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믿음의 선물을 줬다는 말은, 이 믿음은 누구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아버지와 더불어서 얻은 믿음이에요. 우리를 대신해서 가진 믿음이에요. 그럼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이 믿음이 어디로 유도하게 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예수님 가신 길로 유도합니다. 그걸 가지고 선이라고 해요. 그 뒤에 나오는 선한 행동, 선한 마음,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우리는 거대한 하나의 아바타, 로봇이라면, 로봇 안에서 실제로 운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운전하고 주님이 운전해요.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신앙이 되는 겁니다. 이 깨끗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따지는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고, 생명나무다우냐, 생명나무를 훼손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그 깨끗함, 그 선함을 가지고 주께서는, 머리되시는 주께서 그레데 교회를, 자기 택한 백성을 건져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저희들이 불량품인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우리 잘못이 아니고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을 따지고, 자기 잘남을 따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불량품인 것을 인정하고, 이런 죄인을 불량품이라고 노출시킨, 주님이 주신 그 믿음의 선물에 대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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