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디도서3-불량픔 1703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23. 07:57
2017-03-11 00:22:30조회 : 474         
불량품 170310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이미아 (IP:122.♡.188.127)17-03-21 23:19 
서울 의존교회 170310a (불량품)-이 근호 목사 

신약성경 348페이지, 디도서 1장 10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죠. 

성경을 오늘날 사람들이 대하게 되면 잔소리가 참 많다, 라는 생각이 들죠. 남이야 어떻게 살든, 그렇게 자기한테 피해를 주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거기에 사도가 구태여 관여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 말씀이 그레데 교인이 아닌 사람한테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그레데 교회에 나오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레데교회에 나오는 사람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궁금증이 생겨요. 교회에 나오면 복종하는 것이 지당한 거고, 그거는 상식이죠. 당연한 건데, 복종 일부러 안 하려고 교회에 나옵니까? ‘나 교회에 가서 복종 안 할 자신 있어.’ 이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뭐 복종 안 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일부러 훼방 놓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거는 아예 교회 안 나오면 그만이고. 

근데 여기에 “복종치 아니하고”라는 말은 사도바울이 보기에 말씀에는, 복음에는 복종치 않으면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의도. 그 다른 의도가 주의 말씀에 복종치 않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해를 한다고 할 때에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해요. 특히 그 다른 의도가 어떤 의도인가를 알아야 되고, 그거 모르면 성경 보나 마나에요. 그걸 지적하면서 지적하는 사도바울의 기본핵심의 본 내용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냥 저 사람보고 “너는 복종치 아니 하는구나.”하면 저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나 잘하세요. 나는 나 나름대로의 복종을 하고 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사도바울 당신이 복종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나오면 각각 자기 주장을 나란히 펼쳐놓는 것 밖에 안 되죠.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이래 된다 말이죠. 그러면 사도가 “당신을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복종치 않는 것 맞습니다.”라고 뭔가 증빙서를, 증거를 대야 됩니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 나오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절에 나가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그레데교회에 나오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데, 그 나오는 사람보고 복종치 않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에, 그 지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 나쁘냐, 이 말이죠. 기분 나쁘죠. 

“니가 뭔데 나를 비판하느냐?” 이래 나올 것이 아닙니까? “니가 뭔데? 니나 잘하세요. 니가 뭔데 남의 신앙 생활하는 것까지 니가 관여하느냐?” 이래 된다 말이죠. “그렇게 관여하려거든 증명을 대라!” “당신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복종치 아니합니다.” 라는 증명을 대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자는 말이죠. 어떤 점에서 복종치 않는 상황이고 사태냐?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했길래 복종치 아니한 것이 되며, 그리고 어떻게 한 것이 복종한 것인가? 이 두 개를 알면 되죠. 딴 것 필요 없잖아요. 이 두 개 알면 되죠. 어째서 그들은 복종치 않는 사람이 되느냐,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10절에서 이런 용어를 써요. “할례당”이라는 겁니다. 

할례당. 더불어민주당도 있고 한국당도 있는데, 이 할례당은 탄핵 찬성이에요? 반대에요? 이 할례당은 왜 나오는 겁니까?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할례당이라고 딱 나왔을 때는, 거기에 복종치 아니함과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예수님이 말한 십자가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도, 십자가 죽게 된 원인이 그대로 이 세상에 살아서 반복이 된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우리 구원받은 입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십자가요? 예. 믿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계산이 깔끔하게 끝난 걸로 알고 있죠. 그러난 성경은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에요.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이 자기 보험금 타먹기 위해서 가입합니까? 보험회사가 걱정이 돼서 가입합니까? 보험금만 타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자기 회사가 걱정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 그 하늘나라를 우선시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기 미래, 팔자, 이런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겁니다. 질문 자체도 굉장히 하나님 질문하고 달라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원래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하는 그 질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저는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죠?”라는 것을 자기가 먼저 밑에다 깔아놓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니가 뭔데 구원받아야 되는데? 니가 구원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니가 어떻게 해명해봐라. 그걸 증명해봐라.”라고 한다면 뭐라고 증명해야 됩니까? “왜 니가 지옥 가서는 안 되고 니는 천국가야 하는지를, 그걸 증명해봐라.” 이 말이죠. 어떻게 증명해요? “나는 나니까.” 그렇게 증명하는 겁니까? 아담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먼저 찾아왔어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지 아니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올 때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기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일도 급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는 판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수가 없죠. 여기서부터 참, 우리는 상당히 여러 가지 다시 점검하고 점검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점검하기 위한 원칙으로써 제가 문장을 하나 쓸게요. 하도 사투리가 심하다고 하니까 글로 쓸게요. “타인이 아니면 나는 깨어나지 않는다.” 

흔히 총각들 철없다고 하죠. 상당히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 이 말이죠. 혼자 사는 것이 편하지, 혼자 사는 것이 진리는 아니죠. 혼자 살면 편하기는 편한데 진리는 까마득하게 몰라요.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인지를 모른다고요. 그런데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어떤 여인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러면 치고 박고, 치고 박고하겠죠. 타인이 아니면 나는 깨어나지 않는다. 

너무 심하게 싸우다 보면 “너 좀 내 곁을 떠나줬으면 좋겠다.” 이래 나오죠. 그럼 저쪽에서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만 헤어져. 그럴 것 같으면 그만 헤어져.” 결국은 결혼이라는 것도 평소에 자기 하던 것에 숟가락만 하나 얹는 식으로 남을 그렇게 생각했지, 자기 아성은 꿈쩍도 안 할 생각을 갖고 결혼을 한 거예요.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고. 둘이 똑같은 인간이 만나놓으니까, 둘의 아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겁니다. 정말 성벽이 허물어지는 결정적 포인트가 와요. 결정적 순간이 오는데 그게 뭐냐,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제 3의 인물이 출몰하는 순간입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자식입니다. 그 자식으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 산후우울증입니다. 산후우울증이 뭐냐 하면, 니가 뭔데 새벽 2시마다 나를 깨우느냐? 나는 새벽 2시에 자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더러운 것은 잘 안 만지는, 원래 성격상 안 만지는 성격인데 니가 뭔데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고, 니가 뭔데 새벽 2시 3시 시도 때도 없이 울어 제키고, 젖 달라고 하고, 맡겨놨나? 밥 달라고 하고, 맡겨놨나?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나한테 요구하느냐? 

이게 하나님, 당신이 뭔데 복종을 강요하느냐? 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 니가 뭔데 우리 인간 쪽으로 건너와가지고 왜 이것, 이것, 이것, 안 했다고 지시하고 명령하느냐? 니가 뭔데?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근데 이럴 것 같으면 헤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신,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그 자리에다가 갖다 놓죠. 내가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그걸 가지고 마음씨 고운 신이라고 합니다. 마음씨 고운 신. 말 잘 듣는 신을 해놓아요. 기도 빡세게 하면 그때그때 응답 재깍해주고, 헌금하게 되면 30배, 60배, 100배 갚아주고, 봉사하게 되면 남들의 칭찬이 늘어지고, 그걸 마음씨 고운 신이라고 해요. 외워놓으세요. 마음씨 고운 신. 

근데 외울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신을 마음씨 고운 신이라고 단정하고 기도해요. 교회가고. 심술쟁이 신이라고, 앵그리 갓(angry god)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아이구, 내 새끼 왔나?”하고 교회가면 마음껏 지금 품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아이구, 이쁜 내 새끼 왔나?”하고 품어 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그래서 지옥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고, 주님의 심판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고, 그리고 디도서 1장 10절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다 빼버리면 오늘 디도서 1장 10절부터 16절도 다 빼야 됩니다. 내 생전에 이런 것 없다. 이래 됩니다. 가위 있으면 가위 가지고 오려야 돼요. 이거는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 다음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좋아해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아까 무슨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마음씨 고운 하나님에게 찾아온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고, 그것이 강하게 밀려오게 되면 무슨 마음이 들겠어요? 이럴 것 같으면 우리 헤어져! 이렇게 나오겠죠. 사실은 이럴 것 같으면 헤어지지 않고, 이런 이야기가 없는 다른 옆에 교회 가겠죠. “여러분, 기도한 양만큼 부자 되세요.”라고 하는 교회가 있어요.  철야한 만큼 부자 되고, 헌신한 만큼 하나님이 백배 갚아준다는 교회가 있어요. 

교회 안 들어가 봐도 교회 간판만 봐도 다 나와요. “행복한 교회.”라는 이런 이름. 성경에 행복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거는 사람들이 원하는 거예요. 행복한 교회를 원하는 신은 착한 신이에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죠. 당연히 뭐 십자가, 고통이라는 그런 이야기는 나올 리가 없어요. 그런 부정적인 언사는 삼가야 될 그런 교회들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 디도서 1장 10절 같은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이런 것은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하겠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어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는 이야기도 이 강의시간에 하지, 이 저주라는 이야기도 기존교회 다니면 못 들어요. 거의 들을 기회가 없어요. 여러분, 주례할 때 저주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주례할 때 앞에 나가서 기도하게 되면 주례보다 더 길어요. 기도하면서 축복이야기를 헤아려보세요.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그 축복이라는 말이.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신랑신부가 결혼했다고 어디 복 받을 자격이 됩니까? 결혼이 어디 예수 믿는 사람만 결혼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결혼 안 해요? 왜 저 사람은 복을 안 받아야 돼요? 결혼했다고 신랑신부가 복 받아야 된다는 그런 건덕지가 어디에 있어요? 뭐 했다고? 뭐 했다고 복 받아야 됩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사람은 복 받을 자격이 없더라도 옆에 사람이 복 달라고 중보기도하게 되면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 해요. 니가 무슨 자격으로 복이 오는데? 

세상에! 남에게 복을 줄 자격자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붙어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지킬 경우에는 하나님의 복이 되고, 그것만 있어요? 만약에 단 하나라도, 하나라도 어기면 봐주는 것이 없어요. 그냥 저주가 내려요. 복을 이야기할 때는 뭐도 이야기해야 돼요? 저주도 이야기해야 돼요. 이걸 지키면 복 받는다는 말은 못 지킬 경우에는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걸 지키면 복 받는다는 그 이야기만 듣고, 오~~~귀를 막고 안 듣겠다는 겁니다. 그 뒤에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오~~~~안 듣겠다는 거예요. 어디 자기 맘대로 계시를 가리고 반 토막을 냅니까? 고전 16장 22절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여러분들 가까운 일가친척을 한 번 돌아보세요.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근데 자식이고 간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눈에 훤하다면, 1월1일 신정 때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이런 인사를 주고받아야 돼요. “저주를 받을 지어다” 왜? 다른 복음 전하면 안 되니까. 

성경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고 챙기라고 준 복이 아니고, 그동안 나를 위해서 복을 챙겼던 그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서 더 이상 살지 아니하고 사나죽으나 주를 위해서 사는 존재로 변화된 것, 그걸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소유한 것을 복이 아니고, 뭘 하나 더 챙기는 것이 복이 아니라, 그저 나라는 인간은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이게 저주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복이에요.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뭐냐? 그 내용을 이야기해주셔야죠? 라고 한다면, 평소에 여러분이 여러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 뭐냐를, 그것을 뒤집으면 됩니다. 패를 뒤집으면 돼요. 패를 뒤집는다는 것은 전에 있던 앞면이 뒷면 가고 뒷면이 앞면으로 나오는 거예요. 앞면 때문에 뒷면이 안 보였잖아요. 이걸 뒤집어야 뒷면이 보이는 거예요. 

그동안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사느라고 너무 바쁘다보니까, 이게 바로 밑에 있어도 이걸 뒤집지 않으니까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씨름판에 가서 강호동한테 뒤집힘을 한 번 당해야 돼요. 뒤집힘을 당해봐라 이 말이죠. 

자기가 뒤집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온갖 아부를 다하면서, “마음씨 착한 신이시여! 오늘도 내가 왔나이다. 복 받으러 왔나이다.” 어디 일수 찍어요? 맡겨놓은 것 있어요? 복에는 조건이 있는데, 주를 사랑해야 복이 오는데, 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면서 복 달라고 하니까, 이게 조건과 결과가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맞을 리가 있습니까? 안 맞는 거예요. 먼 데 있는 교회까지 오는데 기름 값 32,000원 들었다는 거예요. 성경에 “기름 값 32,000원 이상 나오면 복 줄게.”라는 것이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것이 있던가요? 

성경에서는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했잖아요. 먼 교회 가니까 지가 돈 사랑하는 것이 들통나버렸어요. 가까운 교회 걸어 다니니까, 바로 밑에서 올라오니까 별 게 아닌데, 10킬로미터에 있는 교회에 가보세요. 기름 값이 얼마나 비싼지, 왕복 얼마 나오는지, 그거 계산한다니까요. 설교 같지도 않는 설교 듣는다고 오늘 50,000원 나갔다고. 그거는 그 교회 탓하지 마세요. 본인이 지금 돈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돈을. 

헌금이라는 것은 자기 돈 내는 것이 헌금이 아닙니다. 주님 돈으로 바뀌어서 내는 것이 헌금입니다. 주님 돈으로 바뀌어서. 주님 돈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나도 내 돈이 아니고 뭐냐 하면 타인의 돈이잖아요. 타인이 누구를 깨운다? 타인이 나를 깨워요.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누가 건너오죠? 누가 찾아오죠? 죄지은 아담에게 누가 찾아옵니까? 하나님 쪽에서 찾아오죠. 찾아와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습니까? 뭘 제시했습니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라고 제시했죠. 

그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이 전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체를 글이라고 해요. 글. 이게 사실은 하나님의 음성인데, 이 전체를 창세기 3장에 적어놨잖아요. 적어놓으면 뭐가 돼요? 글이 되죠. 글이 되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이 글을 우리의 영원한 뭐로 보느냐 하면 절대적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아까 공식을 뭐라고 했습니까? 타인이 건너오지 아니하면 나는 깨어나지 않죠. 

근데 이 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글인데, 우리는 이 글을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읽어버리면 우리가 깨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로 깨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읽을 때는 지금껏 평생을 살면서 내가 아는 그 범위 안에서 글을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을 전부를 모르잖아요.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그걸 오독誤讀이라고 하는데, 오류가 있는 독해. 잘못 해석한다 이 말이죠. 잘못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잘못 해석한 것을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고 있었습니다. 왜? 잘못 해석하는 그것과 제대로 해석하는 그것과 하나님께서 같이 비교를 시키는 거예요. 비교를 시키면서 우리는 깨어나는 겁니다. 비교대상이 없다면 내 해석이 누가 뭐래도 맞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비교대상이 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와 다른 생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만약에 제시된다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둘 중의 누가 하나님께 인정받느냐가 그 다음에 나타나야 되겠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 사람들이 하는 업무가 뭐냐 하면 성경을 해석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는 말이 “예수여, 당신은 모세율법의 해석을 잘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의 견해가 나왔다고 생각하겠죠. 두 가지. 예수님은 예수님이 옳다고 주장하고 바리새인은 바리새인이 옳다고 주장했으니까. 제 3자인 우리 입장에서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난감한 거예요. 우리는 제 3자기 때문에. 그래서 주를 따르는 것에서 어느 쪽이 권력이 세냐를 따라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했죠.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그 당시에 목숨줄을 쥐고 있는 권력을 의식해서 한 겁니다. 그 당시에. 그 어린 소녀가 와서 베드로 당신도 예수님하고 한 패라고 할 때 극구 부인하죠. 극구. 개인적으로 이야기했으면 “그래 내가 한 편이다. 왜?” 이래 했을 텐데,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한 편이라는 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자칫 잘못해서 말했다가는 예수님처럼 체포당한다는 겁니다. 체포당한다는 말은 그 당시의 권력에 내가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죠. 인간이 지 스스로 손해될 것이 뭐 있습니까? 사서 고생할 것이 뭐 있어요? 거짓말 한 마디 딱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게 되면, 그러면 되는 거잖아요. 성경에 그런 예가 너무 많아요.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히브리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죠.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우리를 내보내려고 한다.” 그럴 때 히브리인들이 수긍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반대했죠. 

이 엄청난 권력이 있는데 만약에 이 권력에서 빠져나가다가 쿠데타 일으키면 누가 희생당하는가? 우리만 손해 당하는데, 당신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나님이여, 모세와 아론을 좀 벌해주세요. 기도를 그렇게 해요.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좀 벌해주소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좀 벌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믿는 하나님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넘어온 하나님하고 같지를 않는 거예요. 안 같아요. 

또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밑에 아론과 그 많은 백성들이 남아있죠. 모세만 달랑 올라갔으니까. 그때 그들이 뭘 만들었어요? 금송아지 가지고 여호와의 신상을 만들었죠. 자기들끼리 지금 바른 판단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게 여호와가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가 가져온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뭘 가져옵니까? 그 돌판에 글을 가져오죠. 그 글은 중간에 깨어집니다. 

아까 문제로 다시 가봅시다. 바리새인도 이렇게 해석했고 예수님도 이렇게 해석했는데, 우리가 그 당시에 살고 있다면 어느 해석이 맞는지 우리는 판정을 못 내리고 어느 쪽이 힘이 센지, 어느 것이 내가 사는 쪽인지, 내가 욕을 적게 얻어먹는 쪽인지, 그것부터 먼저 챙기겠죠. 그럼 정답 나왔죠.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나 살고보자입니다. 나 살고보자가 기본베이스로 깔려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쪽으로 다 표를 던졌습니다. 자, 그러면 해답은 있어요. 살아계신 하나님 쪽이 어느 쪽이냐를 판정하면 게임오버입니다. 게임 끝났습니다. 바리새인은 그냥 죽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죽인 예수님은 사흘 만에 살려냈습니다. 누구 말이 맞아요? 드디어 예수님 말이 맞죠. 왜? 한쪽은 죽었고, 어디 갔는지 몰라요. 한쪽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거 인정 못합니다. 못 믿겠습니다.”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해도 그건 가짜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바로 복음이에요. 사도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 편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달랑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럼 예수님 빼놓고 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원수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 5장 말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찢고 까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가담해가지고 자기가 옷을 지켜주고 할 정도로 적극 가담한 사람이에요. 

근데 강의 다시 해봅시다. 먼저 어느 쪽에서 넘어와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넘어와야 되죠. 사도바울이 그렇게 까분다고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찾아왔잖아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죠. 예수님이 뭐 덩치가 있어서 죽으라고 발로 차고 창으로 찌르고 안 했어요. 뭐 보여야 돌을 던지든지 말든지 하죠. 

사도바울이 핍박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 그걸 핍박했는데 예수님 핍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 말은 우리에게 뭘 의미합니까? 어린애가 전하든 누가 전하든 복음을 전하면 거기에 누가 관련되어 있다? 그 배후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관련된 존재가 되는 거예요. 누가 전하든. 그럼 누가 전한다는 것에서 그 누구를 다 빼버립시다. 

그럼 남는 것은 뭐가 됩니까? 문장. 글자. 이 글자에 대해서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 글자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오해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 글자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이 자기의 정답을 가지고 우리 쪽으로 넘어올 때는 우리의 오류와 우리의 잘못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 논리가 이제 풀리십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자기가 안다고 했죠. 근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안다고 했던 그 앎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은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바리새인 너희 애비는 악마다, 악마다, 라고 해도 안 믿었습니다. 왜? 판정이 안 났으니까. 예수님이 아직 죽기 전이니까. 부활되기 전이니까. 

그건 니 생각이고~ 예수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하고 우리 생각은 안 하나? 우리를 동등하게 봐야지 어떻게 일방적으로 니만 옳다고 하느냐? 하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정당화시키면서, 내 생각, 니 생각 다 같이 존중해줘야지. 이게 인간사는 사회잖아? 라고 할 수 있었는데, 한쪽은 죽고 난 뒤에 부활되고 나니까 어떻게 돼요? 그 소리가 전부 다 괴사가 돼요. 악마의 소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봤어요.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는 왜 인간은 보고도 못 믿었고 몰라봤느냐? 그 이유를 이제 본격화시키는 거예요. 본격적으로 주의 말씀가지고 확대시켜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패를 뒤집음으로써. 패를 뒤집는 거예요. 패를 뒤집는다고 하니까 청년들이 하는 게임이 있죠.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곰발바닥/소발바닥, 소발바닥/개발바닥 하는 거 있죠. 

강의 다시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디도서에 있는 이 말씀은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고 하는 겁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보고 하는 겁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죠. 자기 딴에 열심히 말씀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1장 10절에 보면 복종치 아니했다고 하죠. 이 말을 사도바울이 했으니까, 디도는 그냥 전하는 입장이니까, 디도는 사도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사도입니다. 디도서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그렇게 나오잖아요. 

그렇게 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이 “니가 뭔데 남이 신앙생활 하든지 말든지 니가 뭔데 지적질이냐?”라고 이렇게 나오겠죠. 우리들이 복종치 아니한 근거를 대라고 하니까 10절의 말씀에 뭐냐 하면 그들은 무슨 당이라고 했습니까? 할례당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례당, 할례당하니까 누구 이름이 생각이 나는데, 할례당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복종치 아니하는 교인들이 먼저 형성돼야 되는 겁니다. 복종치 아니하는 자를 구원할 목적이 아니에요. 제가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은 뭐하는 목적이 아니라고? 누구누구를 구원할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그 말씀에 본래의 취지와 내용이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음을,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성경 글을 통해서 이렇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할례당이 등장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새로운 비-복음, 또는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적인 정체를 할례당이라는 개념을 앞장세워서 이 시대에 디도서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 디도서가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죠. 성령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러면 무엇의 반복이 일어나야 돼요? 할례당이라는 그러한 요소가 지금도 2017년도에도 소위 교회라고 하는 데마다 이 할례당이라는 요소가 계속해서 발각되고 들추어지고 반복되어야 되겠죠. 

이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할례당이라는 것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뭘 주느냐 하면 복음의 진수, 복음의 본질이 할례당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들추어진다 이 말입니다. 들추어지는 거예요. “나는 복음을 믿습니다.” “할례당이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할례당이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그럼 할례당이 아닌 것이 뭐냐? 이렇게 질문이 나오겠죠.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의 진보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왔을 때, “어? 사도한테 욕 얻어먹네. 이건 나하고 상관없고.” 그냥 건너뛰어서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할례당이라고 할 때, 할례당이 왜 등장했으며, 할례당이 아닌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할례당의 규정 발생됐느냐, 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 말이죠. 근데 이것은 내가 구원되는 것하고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넘어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의 구원으로 시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것은 할례당의 당원입니다. 나의 구원을 시도한다는 자체가. 챙길 것만 챙기겠다는 거예요. 그럼 할례당은 그 사람한테 이렇게 해야 돼요 “니가 뭔데 구원받아야 되는데? 너가 남은 구원되지 않더라도 나만은 구원되어야 된다는 그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한 번 증명해봐라. 뭐 강남에 살아서? 뭐 인물이 잘 생겨서? 뭐 증거를 대봐라.” 

자, 그 다음에 진도 나갑시다. 할례당이냐, 아니냐 하는 그 근거가 있겠죠. 그 근거는 뭐냐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에 근거해서 저거는 할례당이고 저거는 할례당이 아니다. 이렇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 당시에 할례당이라고 지적을 받는 이런 사람들이 등장했으니까, 할례당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당이 생겼는지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뭐, 아주 쉽게 하겠습니다. 할례라는 말이 성경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지시를 했고, 그리고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하나님 아브라함 자손에게서 끊어지리라고 되어 있어요.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창세기 17장에. 그 말이 글로 되어 있죠. 아까 배운 것을 생각해봅시다. 괜히 한 것이 아닙니다. 다 필요해서 한 겁니다. 

글이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래 되죠. “할례를 행하면”이라는 글이 있어요. 이걸 누가 보느냐, 인간들이 보죠. 글은 하나님께서 글로 통해서 우리에게 넘어왔으니까. 이 글은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 기록된 계시라 합니다. 넘어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할례를 행하면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 당시의 백성이나 그 이후의 후손이나, 아브라함 이후의 모든 백성들은 이 글을 봤을 거 아니냐 하는 겁니다. 

보고 난 뒤에 가만히 있지를 않죠. 자기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멋진 찬스가 온 거예요. 뭐만 하면 돼요?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안 할 이유가 없어요. 했어요. 할례당 되었습니다. 적그리스도, 비-복음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작전에 걸려든 거예요. “하라며? 하라고 해서 했다. 뭐 어때서?” 교회에서 복음이야기 하면 “어이! 복음이야기 하지 마! 우리는 성경대로 한다고!” 

성경대로 하니까 적그리스도지요. 성경대로 하니까 그게 할례당이에요. 이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냥 이름만, 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대로 했어요. 전부 다 할례당이에요. 왜 그럴까요?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오독이라고 했죠. 

글을 잘못 읽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원인으로써 이게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두고 나름대로 지켰다고 하기 때문에 너희 아비는 마귀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그들은 말씀을 지키면 뭐가 온다고 해요? 복이 온다고 했죠. 그러나 주님은 왜 패를 앞면만 보고 뒷면은 안 보느냐고 했죠. 이해도 못하고 담긴 뜻을 모르면서 이렇게 지켜 버리면 이거는 오독한 것이 되기 때문에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뭐가 와요?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성경의 본뜻은 뭐냐, 이 본뜻은 누가 가져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키는 거예요. 글에 대해서 인간이 지키려고 덤벼들고, 또 누가 지키려고 덤벼드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키려고 덤벼드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율법에 대한 내용과 완성과 해석에 대해서 견해차가 몇 개 있다고 했습니까? 두 개있죠. 

아까 강의 다시 할까요? 둘 중에서 두 개 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인정받았죠. 죽었다가 부활했으니까.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 당신 견해도 맞고.” 이런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죽여 버렸잖아요. 인간들이 죽인 자를 누가 살렸다? 하나님이 살렸다는 말은 인간들은 처음부터 아니올시다 라는 겁니다. 아니올시다. 그 논리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에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왜냐하면 다른 민족들은 할 수 있는 이런 글을 안 줬는데 자기 민족에게만 줬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 민족은 신체적으로 문신이나 타투처럼 아예 피부에 각인되도록, 새기도록 하는 방법까지 줬잖아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할례. 그게 할례라 이 말이죠. 

길 가는 사람들 천 명보고 물어보세요. 할례가 좋습니까? 나쁩니까? 당연히 해야죠. 그 다음 사람에게 할례를 할까요? 말까요? 해야지. 그 다음 사람..천 명을 물어봐요. 만 명을 물어봐요. 모든 소비자에게 다 물어봐요.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할례를 행하면 그만한 효과와 보상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 보상이 뭐냐 하면, 율법대로 하게 되면 뭐가 온다? 복이 온다. 율법에 뭐하라? 할례해라. 할례를 행했다. 뭐마 기다리면 돼요? 복 받아 천당 가는 것, 구원받는 것만 기다리면 되죠.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옥 갔는데요? 지옥 갔는데? 

사도바울은 빌립보서나 다른데서 보게 되면 내가 바로 할례당이라. 내가 할례당이었고 율법에 흠이 없는 자였다. 율법에 흠이 없는 자고, 율법에 흠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모든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 율법에 맞춰서 행동하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말을 성경에는 율법이라고 했지만 요즘 식으로 번역합시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행동하고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랬었는데,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왜? 진짜 말씀을 지킨 분이 저쪽에서 내 쪽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건너오면서 하시는 말씀이, 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왜 핍박하느냐? 다시 말해서 너는 너의 근원적인 본성이 나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그동안 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켰다고 우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그래서 천국 갔습니다. “예. 제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래서 천국 간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이제는 정신 차려서 성령 따라 제대로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단지 저쪽에서 넘어왔을 뿐이에요. 그냥 빈손으로 넘어왔습니까? 십자가 피로 넘어왔습니까? 십자가 피로 넘어온 거예요. 사람의 의해서 그 피가 그렇게 자기를 죽였던 자들을 용서하는 피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내가 어떤 사람을 창으로 팍 찔렀는데 너무 심하게 찔러서 거기서 피가 팍 튀는 거예요. 피가 튀어서 내 면상을 때렸단 말이죠. 면상 찌른 피가 창을 찌른 그 행동을 영원히 용서받는 피라면 도대체 내가 한 것이 뭐가 있어요? 난리도 이런 무슨 난리가 다 있습니까? 

이걸 기쁜 소식이라고 해요. 기쁜 소식.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교회가 뭘 선포해야 된다? 말씀을 언급하면서 밑에 뭘 담아야 된다? 말씀이 배추잎사귀라면 거기다가 복음을 하나 더 얹이고, 또 하나 더 얹이고, 기봉이처럼. 이걸 얹어주는 거예요. 그럼 그 배추잎사귀가 어떻습니까? 죄인이죠. 말씀에 의해서 뭐가 된다? 죄인 되는 거예요. 디도서 1장 10절부터 보면서 저쪽만 복종한 안 한 것이 아니고 누구도 복종 안 했다? 우리도 복종 안 한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다 복종 못하니까. 예수님 빼놓고 율법을 다 못 지키니까. 십계명 다 못 지키니까. 탐내지 말라는 것을 누가 이길 수 있어요? 탐내지 말라는 것을. 

탐내지 말라. 백화점 한 번 데려가 봐요. 이태리 가방 한 번 흔들어 봐요. 이태리가방. 이태리 가방 흔들면서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마라. 신상 털어 봄 원피스 들고 한 번 해봐요. 남자들은 뭐 자동차 가게 한 번 가볼까요? 새로 나온 외제차. 차 고쳐가지고 경매해서 팔아먹는 그런 것이 있어요. 남자들이 환장했어요. 경매한다고. 지금 젊은이고 중년이고 환장 못해서 난리 났어요. 환장 못해서. 또 재미있는 것 없나? 대통령 탄핵 말고 또 재미있는 게임 없나? 그것 찾고 있어요. 

사람은 재미로 사는 거예요. 이 스트레스 받는 세상에서 새로운 자극적인 찾는 재미로 삽니다. 자극적인 것. 그걸 사람들은 행복이라 해요. 스쿠버다이빙에다가 수상스키에다가 그거 왜 합니까? 지나 개나 다 하면 안 해요. 남이 못하고 택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거 하는 겁니다. 그게 그 힘들게 일하고 노는 토요일만 기다려요. 수상스키 타고 스쿠버다이빙하는 노는 재미로. 저쪽에 그런 바닷가 이야기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일요일에 뭐합니까? 디비 자는 것이 희망이에요? 디비 자는 이라고 하면 또 경상도 말 한다고 하겠네. 편히 소파에서 주무시는 것, 소파에 앉아서 발로 리모컨 누르는 것이 희망입니까? 평소에 우리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면서 죽어서 지옥가기는 싫어가지고 교회 나옵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 찾고 삼위일체 배우고 온갖 좋다는 보약은 다 먹죠. 십자가 믿습니까?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하고. 

다 하는데, 그게 뭐냐 할례당이에요. 할례당. 왜 할례당이냐? 이만큼 했다는 겁니다. 할 만큼 했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를 묶어서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함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후손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였던 사두개인들의 후손들이 이렇게 핑계 댑니다. 한 번 따라 해봅시다. 따라 해보라고 하는 것이 처음인데, 한 번 따라 해봅시다. 

할 만큼 했다. 최선을 다했다. 이만큼 했다. 어쩌라고? 그걸 두자로 줄이면 행함입니다. 행함이에요. 더는 못한다. 뭐 이런 것. 나중에 여유 되면 더 할게. 형편상 지금 못 한다. 이런 것.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 행함이에요. 그걸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똥, 오줌 배설물이라고 해요. 

예수를 알고 나는 그러한 것들을, 할 만큼 했다, 최선을 다했다. 이만큼 했다. 어쩌라는 말이냐? 이걸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니까 밀려나오는 것. 뭔가 들어오니까 밀려나오는 이 더러운 배설물들이, 내 속에 있는 이것이 바로 나를 지옥가게 만들었구나. 이게 나오는 겁니다. 아무래도 10분 쉬어야 되겠습니다.

 이미아 (IP:122.♡.188.127)17-03-21 23:20 
서울 의존교회 170310b (불량품)-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을 이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게 되면 상대방은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 그렇게 나오겠죠.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씩씩). 씩씩 무슨 뜻인지 압니까? 열을 내면서 씩씩거리죠.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아까 세 가지가 뭐라고 했습니까? 행함이죠. 행함을 통해서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냥 행하지 않고 이렇게 행하거든요. 나는 말씀에 최선을 다했고 하라는 대로 한다. 글과 사물이 일치가 돼야 될 건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행동이 일치가 돼야 될 텐데, 일치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일치시키려고 애를 썼다. 이 말이거든요. 애를 썼다.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 모르겠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성의와 정성을 다 표하고 지금도 겸손하고 착실한 마음으로써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내 형편상에 맞게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고 하죠. 

나에게도 시간적 여유를 주고 그냥 말씀만 지켜도 생계가 유지된다면 말씀 지키지 말라고 해도 말씀에 매진할게. 지금 애 셋 키우고 있는데 성경 제대로 못 보고 기도할 시간 없다고 그렇게 몰아붙이면서 닦달 내느냐? 나름대로 다 한다. 그럼 제가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행함입니다. 근데 그 행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행함과 비교해볼 때, 그게 가짜고 오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제 이야기는 뭐냐 예수님을 집어넣었어요. 예수님을 집어넣었으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예수님의 완성된 모습은 뭡니까? 이렇게 말이 나오면 좋겠는데, 씩씩거리면서 그럼 하지 말라는 말이냐? 이렇게 나와요. 나는 제 3자인 타인을 집어넣었는데, 아까 타인이 와야 누가 깨어난다? 내가 깨어나거든요. 나 말고 타인. 내가 어떻게 처분할 수 없는 타인. 내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분이 와서 나를 깨울 때에 진짜 내가 발각되는데, 만약에 주님이 오지 않는 상태라면 씩씩거리면서 계속해서 뭐만 붙들어야 돼요? 

어디까지나 누구도 나를 깨울 수 없다면, 누구라도 나를 깨워야 돼요? 나라도 나를 깨워야 되잖아요. 내가 나를 깨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내가 아는 양심 따라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나름대로 다 하는 거예요. 나름대로의. 물론 니가 보기에는 미흡한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는 최고라니까요. 나름은. 두 번은 못한다는 거예요. 힘들어서. 헥헥거리면 여기서 더 어떻게 헌금을 하고, 여기서 더 어떻게 봉사를 하고, 여기서 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기도 시간을 늘리고, 성경을 어떻게 더 봐? 더는 바빠서 못한다는 겁니다. 내 배를 째라는 거죠.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있어요. 더 이상은 못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에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해요. 너는 지금 누구의 증인인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누구의 증인이 되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너의 훌륭함의 증인이 아니고, 너의 신앙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예수님의 증인되죠.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이 보낸 분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누가 택배를 보냈다 칩시다. 나한테 그런 친구는 없지만, 만약에 친구가 택배를 보냈다면, 보내고 난 뒤에 도착했다 싶을 때 친구한테 전화가 옵니다. 친구가 왜 전화했겠어요? “친구야 잘 있나?” “그래.” “끊자.” 이거 할라고 전화했습니까? 그 친구가 “애는 잘 걸어 다니고? 잘 크지? 엄청 예쁘겠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지?” 그거 전화하고 끊습니까? 

택배 보내고 왜 전화했겠어요? 택배 왔냐고 전화하잖아요. 주님이 성령 보내놓고 뭐라고 오겠습니까? “내가 디도서 1장을 통해서 너는 너의 증인 말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느냐?”라고 묻잖아요. 지금 성령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그럼 성령이 왔다는 것은, 내 인생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곧 타인이, 나 말고 다른 타인이 영원히 주도권을 가지고 내 인생의 미래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장악을 했다는 말은 내가 사라진다는 말입니까? 내가 명백하게 똑똑히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주님이 나를 장악했다는 말은 내가 그냥 없어진다는 말입니까? 명백하게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죽은 헛방보고 증인합니까? 또렷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또렷하게 살아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있는데, 성령이 온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또렷하게 살아가요. 또렷하게. 

변비에 걸리면 변비를 의식하게 되고, 감기에 걸리면 목소리가 안 나오고, 또렷하게 살아있으면서도 그 모든 일은 누가 장악했다? 우리 주님이 장악한 거예요. 사나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의 증인?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시는 거예요. 안 먹고 안 자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짓이 아니고, 예수님 증인 된다고 지리산에 들어가 앉아 자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 돈 벌 것 돈 벌고 식사할 것 식사하고, 그리고 외식할 것 외식하고 운동할 것 운동 다하고, 조깅할 것 조깅 다 하고.

다하는데, 조깅을 하던 다이어트를 하던,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셔서 하게 하신 일로 하시는 거예요. 성경을 보든지, 성경을 읽든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그것을 성령께서는 확인시키기 위해서 늘 연락이 오는 겁니다. “니 아직도 주의 증인하고 있지? 니 증인 말고?” 그럼 주의 증인이 된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수시로 뭐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겁니다. 누구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교회 꽃꽂이를 하는데, “아이고, 집사님은 믿음도 좋다. 어떻게 이 꽃꽂이를 잘하십니까?” “저는 이 꽃꽂이를 하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왜요?”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남한테 튀고 싶고, 내가 얼마나 나의 잘남을, 나의 행함이 얼마나 뛰어난 행함인 것을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그러한 나의 본성이 꽃꽂이 하는 가운데서 또 다시 내가 발각당하고 노출됩니다.” 내가 꽃꽂이 한 것을 애가 걸어 다니면서 꽃을 다 빼버리면, 다른 사람은 귀엽다, 귀엽다 하겠지만 꽃꽂이 한 나는 심장이 뽑혀져나갑니다. 저거 한다고 일곱 시간 걸렸는데, 애 엄마는 뭐하나? 애 간수도 안하고?” 이래 나온다는 말이죠. 

내가 행한 것을 누가 짓밟을 때, 남한테는 장난 같지만 나한테는 목숨과 같은 겁니다. 목숨과 같은 것. 우리 애가 못났어도 내가 나무라야지, 우리 애를 오지랖 넓은 옆집 아저씨가 우리 애에 대해서 관여하게 되면 “아저씨는 아저씨 자식이나 잘하세요! 왜 남의 새끼한테 간섭을 하는데?” “애야! 집에 가자. 집에. 저 아저씨가 나중에 또 뭐라고 하면 엄마한테 이야기해라.” 그러면서 그 아저씨 보란 듯이 “에잇, 재수 없어!”라고 작은 복수를 하죠. 그래야 속이 시원하니까. 

인간의 행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모든 인간의 행함들이 아주 많아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지만, 꽃꽂이 하는 것, 잠자는 것, 용변 보는 것, 축구하는 것, 투표하는 것, 영화구경 가는 것, 일하는 것, 야근하는 것, 온갖 것이 있더라도 그 마지막은 무엇으로 귀결되느냐 하면,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 둘로 딱 구분지어서 하게 돼요.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  

왜냐하면 이러한 축구를 해도, 축구 끝나고 난 뒤에 샤워를 하면서 ‘오늘 내가 축구를 잘했나? 못했나? 축구하면서 내가 상대방한테 예의에 너무 어긋난 짓을 하지 안 했는가? 어긋난 짓을 했으면 내가 사과해야지. 근데 공 잡았을 때 상대방의 태클이 들어와서 무릎이 안 좋네? 저거는 나쁜 인간이고 피해 본 나는 착한 인간이야.’ 모든 행함에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관, 또는 가치로, “선이냐? 악이냐?” “악이냐? 선이냐?”로 반드시 둘로 잠잘 때 정리정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기장이죠. 일기장. 그날의 일기장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이렇게 구분해요. 그럼 선과 악이 통합되지 않습니까? 선과 악은 통합이 안 돼요. 선이 설립하게 되면 그 현장에 악도 같이 병행해서 설립이 되는 겁니다. 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악이 아닌 것이라고 하고, 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이 아닌 것이 악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물어보나 마나에요. 그러면 그 선과 악은 인간의 모든 양심의 공통점이겠네요? 선과 악이라고 드러나는 것은 공통점이 맞아요. 

그런데 그 선의 내용이 뭐고 악의 내용이 뭐냐고 하는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집안의 식구가 다섯 명이 있으면 다섯 명의 선과 악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그 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유리하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면 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욕하거나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악이 되는 겁니다. 애들이 울 때 악에 받쳐서 울어요. 뭔가 불만이 많아요. 근데 애한테 젖 주거나 맛있는 것을 주면 재롱을 부립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 사람마다 이게 다 달라요. 선과 악이 다 달라요. 근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나의 나 됨을, 나를 신으로 사랑하고, 신으로 경배하고, 신으로 경배한다는 말은 남이 나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내가 나를 신으로 경배하는 이 절대적 존재에 대해서 동조하고 거기에 호응을 해주면 그게 무조건 선이고, 내가 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흠집을 내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 다툼이라는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부부싸움이나 부모자식 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항상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왜 이해 못해?” 이것의 싸움이에요. “당신은 왜 나를 이해 못해?” 그럼 여자도 안 지죠. “그러는 당신은 나를 먼저 이해를 해주면 안 되나?”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니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그러면 여자 쪽에서 “마음을 알아줘야지.” 그럼 남자 쪽에서 “니 마음이 뭔데?” “이야기한들 아나?” “그럼 어쩌란 말이고?” “대꾸하는 것도 꼴 보기 싫다. 자자!” 그러고 갈라서는 거죠. 그날은 둘이 각방 쓰는 거죠. 

“니 여자 마음 그렇게 모르나?” 하거든요. “뭐 이야기해야 알 게 아니냐?” 하죠. 그럼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야지.”하죠. “참, 미친다. 미쳐! 정말!” 진짜 미쳐요. 내 마음도 나를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이러면 “그게 부부가? 이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부부고? 남이지 부부가?” 이거는 근본적으로 각자가 어떤 존재인지인지를 몰라서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이 나옵니다. 제목. 오늘 제목을 미리 한 번 정해봤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세 글자입니다. “불량품”입니다. 불량품. 자기 자신이 불량품이에요. 불량품인 근거를 대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교회 가서 다른 집사, 다른 교인하고 비교해야하지 않아야 될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가 남하고 비교하게 되면 자기 증인으로 계속 머물러요. 저 사람보다 못하다. 음매~ 기죽어! 저 사람보다 낫다. 음매~기살어! 시커먼 테이프 붙여서 일자눈썹해가지고 야구방망이 하나 들고 하는 순 악질여사 개그가 있었죠. 

사도바울이 나처럼 되라고 했습니까? 나처럼 돼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이 자기의 증인을 전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도바울이 뭘 전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전했다고요. 보이지 않는 분을 전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나 따라 해봐라가 아니라 글을 전해요. 글. 복음. 편지를 전해요. 편지. 편지라고 하는 것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어떤 글을 줬는데 지킨 사람한테는 그 글을 매직으로 지울 수 있는 고난을 주는 셈이 돼요. “이거는 지켰고. 이 단계는 넘어섰고.”라고 하면서 매직으로 지워버려요. 그러면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은 성경이 시커멓게 됩니다. 다 지켰으니까. 저건 나보다 신앙이 못한 사람이 지킬 용도지, 나 같은 레벨 좀 되면 이거는 다 된다는 거예요. 진짜 도인 같으면 성경이 전부 다 하나도 남지 않았을 정도로 다 지켰을 거예요. 

성경은 지키라고 준책이 아니기 때문에 매직으로 지우면 안 돼요. 15년 동안 복종했다고 자부하더라도 16년 째 복종하지 못했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디도서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앞장세워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새겨주십니다. 살아있는 디도서 되라고. 디도서 다 지킨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디도서 앞에 못 지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사람이 되라고 디도서를 우리에게 계속 보내는 겁니다. 

아까 쌈 싸먹을 때 양배추에다가 고기 한 점 올리고 했죠? 그 양배추가 뭐냐 하면 이 말씀 앞에,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바로 죄인 됨을 아는 순간이에요. 그럼 죄인 됨을 안다는 말은 그 죄인 되는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근거가 뭐냐, 우리의 평소의 행함이 우리 자신을 겨냥한다면 모든 행함은 이거는 주님을 증거 한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냥 행했다 하면, 이건 자동적으로 나한테 이체가 돼요. 내 통장에. 이걸 잊을 수가 없어요. 항상 내가 선했다는 것, 내가 착하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don't forget! 그걸 우려먹고, 또 우려먹고, 완전히 사골곰탕이라. 

자식들이 잘 된 것은 내가 그동안 주님 앞에 복종해서 잘 됐다는 말은 안 해요. 왜? 말하면 또 교만할까 싶어서. 교만을 걸려내는 또 기계가 가동되거든요. 그래서 안 그런 척 하지만, 내 자식한테 “그것도 대학이야?” 그러면 갑자기 여기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 대학이 어떤데? 그 대학이 어떤 대학인데? 연세대학이 어떤데? 그래 서울대에 못 들어갔다고? 니는 잘났어? 지방대학 갈 것을 연세대에 들어가도록 내가 얼마나 기도했다고?” 그렇게 해놓고 속으로 ‘내가 이런 소리 할 게 아닌데?’ 평소에 숨어있는 소리가 툭 튀어나와버렸어요. 

남편과 아내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뭐 신앙과 관계없는 다른 가족이야기하다가도 교회 잘 다니는 아내가 남편한테 좀 밀린다 싶으면 “니, 나 건드리면 주님이 함께 안 있어.” 평소에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저 사람보다 나를 더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해준다는 그런 인식을 얼마나 갖고 있었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럴 때는 “You are  Hallyedang! 당신이 할례당이다!” 시킨 대로 했다는 거예요. 시킨 대로 했으니까 나는 잘났다는 거예요. 그게 평소의 자기 증인이에요. 디도서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여기에 대해서 초월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어떤 목사가 교회와가지고 “나는 복음만 전하고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니 감사합니다. 생활비까지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다 주의 은혜로 하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 한 십년 간 해서 교인 백 명을 모았다 칩시다. 그런데 유력한 장로가 와가지고 올해는 예상보다 교인이 늘지 않고 헌금이 예상에 못 미치니까 장로가 “교회 키우는 목사로 우리가 바꿀게요. 우리 당에서 결정했기에 이번 달 내로 나가주세요.” 이렇게 하면 “내가 이 교회 왔을 대 열 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백 명이 됐는데, 그 백 명 가운데 오십 명은 십일조를 하니까 두(頭머리) 당 십일조 계산해봐라. 내가 퇴직금 천만 원 받고 나갈 군번이야?” 

그렇게 평소에 복음전하는 대로 따라주면 감사하고, 이렇게 했던 사람이 막상 나가라고 하니까, “이러면 나는 못 나간다. 아파트 바꿔주고, 차 바꿔주고, 다음에 다른 개척교회 할 때 자금 2억 주고! 그러면 나간다. 장로 니들이 헌금 얼마 했다고? 나 때문에 온 교인들 십일조 계산해봐라! 내가 계산해보니 십일조 월 오백만원인데, 월 오백만원 줄 용의가 있나?” 그러면 장로회에서 정치적 협상에 들어가죠. “소원대로 2억 줄 테니까 그 대신 우리교인들 빼가지 마라. 이 교회에서 오백 미터 이상 떨어지고!” 그럼 목사가 “콜!”하고 난 뒤에 한 달도 안 돼서 교인들 다 꼬셔가지고 자기 교회로 데려가고. 왜냐하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복수니까. “어디 주의 종을 건드려?” 복수다. 

그러니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거는 교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만, 직장을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직장. 직장일 잘 못 한다고 “오늘부터 경리부 해산!” 김과장 따라 나가 가지고, 완전히 성추행 범으로 몰아가지고, 이사회 결의도 못하게 만들고, 이 내용은 몰라도 괜찮아요. 복수하죠. “어딜 나를 건드려? 내가 나한테 얼마나 귀한 존잰데? 니가 뭔데 나를 건드려?” 이게 육신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이걸 고이 모셔가고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협상입니다. “내가 귀한 것을 지켜주신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는 자기 쪽에서 내민 어떤 협상책입니다. 협상안이라고요. 협정.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에서 그 협정을 날마다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 본성, 그 본성이 어디서 나왔느냐, 선악과에서 나왔어요. 선악과.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육신에서 선과 악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 아니거든요. 이게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그러면 복음은 뭡니까? 라는 질문은 그 다음에 당연히 나와야죠. 이야기 오래 했다고 다 잊어버렸으니까, 아까 했는데, 수천 번 했던 이야기,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란 말인가?” 여러분들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죠.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한다고 하니까,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이상한 교회 아니야? 그거 이단 아니야? 뭐가 딸리는 것 아니야?” 

왜, 이런 것이 있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주님 쪽에서 넘어온 것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가상된 천국에다가 내 쪽에서 노력해서 접근해가려고 하는 거예요. 사다리를 놓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점점 높여가고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까? 자기 증인. 

자기 증인이 되니까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것 중에서 하라, 하지마라, 하면 그건 굉장히 납득이 되는 거예요. 저거 하면 신앙이 한 걸음 더 성장하겠죠. 내년보다 올해 더 신앙이 높아지겠죠. 교회에서 주차장 만들어야 되니까 여러분들 목돈 내라고 하면, 목돈 낸 만큼 내 신앙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니까, 이 행동한 것을 주께서 알고 계시니까, 그 한만큼 내신 성적이 향상되고, 좋은 점수를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죠. 

그러니까 죽자 사자 누구의 증인입니까? 자기 단도리 하는 거예요. 자기 단도리, 자기 관리, 자기 증인 되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이 누구라고요? 율법에 흠이 없던 사람이 누구라고요? 사도바울이죠. 그걸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누구라고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죠. 그냥 본인들은 본인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뭡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그냥 우리를 구원하시려 오신 분이 거기에 치여서 죽었잖아요. 

5톤 트럭에 치여 가지고 티코가, 요새는 티코 나오지도 않아요. 모닝이 튕겨나가서 죽어버렸어요. 주께서는 그 모닝을 사흘 만에 다시 살려냈잖아요. 그리고 우리를 모닝에 태워서 천국 보내잖아요. 십자가에 태워서, 복음에 태워서 천국 보낸다 이 말입니다. 우리 트럭 운전사를 모닝에 태워서 보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트럭을 잊어야죠. 트럭을 잊어야 돼요. 그 트럭을 잊을 수가 없지만, 주께서는 잊을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놓았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육은 죽기 전까지 그대로 남아있어요. 죽기 전까지. 

그럼 육이 발상하고, 육이 평소에 무심코 하는 모든 행동과 디도서와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참 웃기지도 않죠. 본인이 알아요. 내 속에 바리새인 귀신이 한 일곱 마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얼마나 체면위주고 자존심 위주인지를 본인이 알아요. 얼마나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더욱더 본인이 아는 것은 뭐냐 “신이여! 기다려주소서. 내가 절제하고 관리해서 주님 뵙겠습니다.”라고 하는 자기 철저함에 매진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못난 놈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잘난 놈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교회 가서 남보다 기도 더 오래하고, 더 헌금하고, 더 깨끗하게 행동하고, 더 봉사하고, 더 충성하고, 목사 말씀에 순종하고, 전도 많이 하고, 전도 못하면 선교를 위해서 기도나 하고, 그거 못하면 헌금에다 하면서, 스스로 평소에 착하게 행동한 이것이 하늘에 상달되기를, 그 눈으로 상달되는 그 뒷모습을 다 보고 있어요. “올라간다. 나를 위해서 올라가는 저 모습을 좀 봐!” 남의 것은 부숴버리고 “저리 비켜! 내 기도 올라가! 내 헌금 올라가!” 

여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한테 매료되고, 자기한테 경배하고, 자기한테 미쳐버렸어요. 인간은. 교회가 그걸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왜? 돈이 나오니까. 모든 교회의 마지막은 돈이에요. 돈이 나오니까. 그동안 얼마나 속아 넘어 갔습니까? 속아 넘어 가도 싸요. 왜? 성경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12절 봅시다. “그레데 인 중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들이라 하니” B.C.600년경에 에피메니데스 이 사람이, 사도바울이 지금 디도서를 쓴 게 A.D.50년이나 60년이 가까이 되거든요. A.D.50년으로 보게 되면, 그 전에 이 에피메니데스라는 이 철학자는 본인이 그레데 사람이에요. 그레데 바깥사람이 아니고 그레데 사람이에요. 그레데 사람이면서 본인 입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레데 사람은 항상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면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들이다. 

그들의 행복이라 것이 뭐냐 하면 배부른 것이 행복이에요. 배부른 것이 행복이라는 말을 지금 저는 안 좋은 뉘앙스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배부른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안 좋은 뉘앙스로 받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말이 맞잖아요. 사람이 일하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배부른 재미로 살죠.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 아니고 잘 쉬기 위해서 일을 해요. 잘 쉬기 위해서. 돈을 엄청 벌었는데 미쳤어요? 일을 하게? 쉬는 재미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인간의 육신은 모든 컨디션이나 모든 것이 일을 적게 하고 자기가 자극적인 것, 더 자극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왜? 창세기 3장에 나온 말씀처럼 인간에게 워낙 이 땅이 저주스럽고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소원이 딱 하나로 결정되었다는 말이에요.  

힘든데 소원이 뭡니까? 안 힘든 것, 편한 것. 아플 때 소원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픈데 대통령이 된다고 이래 안 합니다. 탄핵될 수가 있으니까. 아플 때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몸만 건강했으면, 두발로 걷기만 했으면 더는 소원 없다. 인기가 없다? 소원이 뭐예요? 좀 이렇게 오빠! 오빠! 팬들이 해줬으면. 항상 결핍을 통해서 소망과 소원은 새롭게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결핍을 통해서. 

그러면 결핍 없는 상태가 되면 되지 않느냐? 인간의 욕망은 일단 거기서 완료가 되면 그 자체에서 새로운 결핍이 생깁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거예요. 탐내지 말라는 말을 제대로 들으세요. 탐내지 말라는 것은 니가 탐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경우라도 너에게 해코지가 된다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항상 교회가면 오냐, 오냐 해주고 훌륭하다고 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고,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이나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 그 보람으로 우리는 교회 나가는 겁니다. 교회 가도 인사도 없고 가면 가고 오면 온다는 식으로 하면 삐져서 안 옵니다. 그 교회가 우리교회입니다. 가면 가고 오면 오고. ‘오면 복음도 모르는 게 오기는 왜 오나? 알아서 나가라.’ 물론 그런 사람은 없고 반갑지만. 반갑다고 내밀지는 않아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반갑다고 내밀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로 오해를 할까봐. 

교회는 누가 오기 전에 이미 목표가 있어요. 숫자가 불어나면 좋겠다,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오게 되면 그 사람이 깡패인지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숫자 하나를 채웠다는 것에서 일단은 감사해합니다. 일단은 고마워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밥 좀 주소!”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죠. 항상. 이 말이 모순되는 거예요. 본인이 그레데 사람이에요. 

“한국교회는 모두 이단이다.”이라고 했을 때 모순되는 것이 있죠. “그렇게 말하는 너는 이단이냐?” 했을 때 “그래. 이단이다.” 이래 되면 아무 문제없어요. “나만 이단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거는 지방교회가 되는 겁니다. 워치만 니가 되는 거예요. 워치만 니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가 하는 지방교회가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기대치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결과가 아니거든요. 교회의 머리는 누굽니까? 주님이죠. 그러면 교회가 생겨버리면 그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누구에요? 주님께서 만든 교회죠. 그럼 진짜 교회는 뭐냐 하면 교회 자신에게 교회 원인을 안 돌리겠죠. 교회가 교회됨의 머리라고 우기지는 않겠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런 교회가 된 것은 우리 노력 덕분이라고, 행함 덕분이라는 말을 진짜 교회라면 안 하겠죠. 그럼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주님 덕분이라고 하면 교회입니까? 그것도 교회가 아니에요.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교회되었잖아요. 

그럼 우리가 교회되었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뭐가 된다? 교회에 누굴 모아놓았다? 죄인들을 모아놓은 거예요. 뭐로 모아놓았다? 주의 말씀으로 죄인 되게 만들어서 모아놓은 거예요. 따라서 죄인이 교회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죄인은 죄만 짓지, 죄인을 모아놓았으니까 의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쓰레기 모아놓았는데 거기서 괜찮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듯이. 

그렇다면 진짜 교회는 뭐냐 하면, 뭘 쳐다봐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행함으로 지금의 교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겠죠. 이 논리에 하자가 없어요. 근데 어떤 교인이 교회에 두 명 왔는데, 어떤 목사가 이야기 하는 이야기 한 것처럼 “목사님. 또 네 명 나갔어요.” 하는 교회가 저기 어디 있어요. 교회에 왔다가 네 명이 나갔습니다. 그럼 네 명이 나갔으니까 그 네 명 빼고 나머지기 결과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 네 명 누가 나가게 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논리에 의하면 누가 나가게 했습니까? 주님이 나가게 했죠. 

그럼 네 명 나가게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슬퍼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되죠. 왜? 우리는 네 명이 나가기는커녕 네 명 더 있었으면 하는 죄를 발산했는데, 주님께서 플러스 네 명이 아니라 마이너스 네 명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걸 통해서 우리가 뭘 알 수 있어요? 이 교회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다? 다시금 주님 소관인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그 기쁨이 충만하겠죠. 내가 보니 이 교회는 늘 기쁨이 충만한 것 같아. 다 나가고 아무도 없으니까. 

근데 제가 이론상 제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틀릴 구석이 없어요. 맞아요. 맞는데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은 네 명 나갔잖아요. 꾹꾹 참아요. 왜? 싫어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여러분 네 명이 나가도 주의 은혜인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감사는 안 하고 ‘그래. 내가 이때 믿음이 있는 것을 티를 내야지. 참자.’ 여러분 참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참는 것이 또 행함이 돼요. ‘참자. 참으면 다음에 또 열 명 보내주겠지.’ 이런 또 계산을 해요. 목사가 교인수가 불어나는 것은 자기가 주의 종인 것을 증명해서 그 목사 자리에서 안 쫓겨나고 오래 있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거고, 교인들이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은 교회 운영비를 내는 것에 있어서 자기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래요. 

계하는데 계원들이 많아보세요. N분의 1하면 적어지잖아요. 이왕 온 거 돈 되는 사람들이 오게 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서 껌뻑껌뻑 다 넘어져요. 부담이 적으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기본이 아니에요. 자본이 무엇의 흐름이다? 모든 게 돈으로부터 시작해서 돈으로 말미암아 돈으로 가잖아요.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다? 돈으로 세워지는 거예요. 우리 의존교회가 한 60억 있다, 집에서 모이겠어요? 복수하듯이 상가 나와! 상가 월세 얼마야? 200만원? 얘걔 여기 있어. 현찰주고 바로 옮겼겠다. 우리한테 알 수 없는 복수가 있어요. 왜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느냐는 말이죠. 왜 나의 자존심을? 

그러면 교회가 할 것은 이 말씀이 남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해서, 이 말씀을 보게 하신 것은 이미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이미 성도기 때문에, 이미 구원됐기 때문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이 말씀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할례당이라는 고백을 마음껏 하는 거예요. 할례당인 우리를, 뭐 하나 지켰다고 뽐내고 하는 우리를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한 고백이 나오도록 오늘도 디도서를 가지고 성령께서 또 역사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넘어오는 성령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델을 찾아요. 누구를? 그럼 누구처럼 행하면 성도라고 이야기해주겠어요? 사람을 찾아요. 왜? 자기가 원하는 타인, 자기가 채택할 수 있는 타인을 또 골라요. 우리나라 가운데서 또 괜찮은 가운데서 또 찾아요. 아! 참....,,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는데, 뭐 이건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이러면 안 되고 그레데교인들이 이 말을 새겨들어야 돼요. “니만 잘났나?” 이렇게 하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항상 거짓말쟁이가 다 맞아요. 자, 그렇다면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예수님은 주시다. 이것도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서, 지금 열왕기상 21장 나왔어요. 방금 했어요. 속이지 않습니다. 21장 1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거 거짓말입니까? 거짓말 아닙니까? 방금 성경 아무데나 펼쳐서 읽었는데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왜? 그렇게 강의해도 응용문제 나오면 모른다니까. 

인간의 행함은 뭐로 이어진다고 했습니까? 선과 악으로 이어진다고 했죠. 이 성경 읽은 것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묻는 것 자체가, 나는 아무리 봐도 성경에 있는 글자로 그대로 읽었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속한다? 나는 선에 속한다는 것으로 잠시 십자가 은혜를 가려버리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천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도 죄냐? 이렇게 해요. 그것도 죄죠. 그것도 죄인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 천지를 여호와가 만들었다는 그것도 부정했습니까? 그들을 인정했잖아요. 그들을 인정해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어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뭘 인용했습니까? 시편 91편 11절을 인용했죠. “뛰어내리라 천사가 너를 받들어줄 것이다.” 

근데 왜 마귀에요? 선과 악 말고, 다른 시스템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시스템. 선과 악 말고 다른 시스템.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따먹지 못하고 아직 남아있는 과일이 있어요. 사과? 바나나? 아닙니다. 우리 외손녀 보고 바나나 하라고 하니까 바나나 했어요. 놀라고 신기해했어요. 드디어 말 텄다고. 갑자기 바나나 생각나네. 못 따먹은 것이 바나나입니까? 아니죠. 무슨 나무에요? 생명나무죠. 생명나무. 생명나무에요. 

생명나무는 어떤 인간도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 선악을 아는 자에게. 선악을 자는 따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럼 선악을 아는 자는 따먹을 수 없다는 말은 어떻게 된다? 선악을 알기에 죽어야 마땅하죠. 죽어 마땅하고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면 어떻습니까? 먹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그제야 먹을 수가 있는 겁니다. 선악과이기 때문에 죽이고, 죽은 인간에게 생명나무 주고, 그 과정을 앞서서, 압축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게 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돼요. 나는 죽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주님 쪽에서 넘어온 택배에요. 주님께서 전화하면서 “야야! 택배 잘 있나?” 이거 물어요. “저 오늘도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딴 것은 듣기 싫고 택배 잘 있나?” “오늘도 주님 말씀대로 순종했나이다.” “야야! 쓸데없는 소리 듣기 싫고, 그건 됐고, 택배 잘 있나? 택배?” 니 안에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우리에게 날마다 각인시키고 기억나게 만들고 회생하게 만들어요. 그 죽으심 앞에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거예요. 이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말로 설득이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함으로써 십자가를 전하고, 그 십자가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거예요. 어떤 강한 힘, 죽음보다 강한 힘이 우리 안에 들어있고, 날마다 전화하셔서 내가 보내 준 택배 잘 있냐고 전화하시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13절 봅시다.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증거는 참되도다.” 그레데인들이 항상 악하다고 하는 것이 뭐다? 나쁘다? 안 나쁘다? 참되다? 참 안 되다? 참되다 이 말이죠. 참, 사도바울도 굉장히 부정적이죠. 몇 명 있을 만도 한데, 완전히 싸그리 죄인 만들어요. 이어서 보면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말은, 그 내용을 온전케 하는 거예요. 그 믿음을 니 행함으로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에요. 자,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선물이에요. 은사죠. 성령이 와서 믿어지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누구 선물? 우리가 안겨서, 우리가 강요해서, 막 요청해서 뺏은 겁니까? 그것은 선물이 아니죠. 그건 사기 치는 거죠. 그냥 주신 선물이죠. 

선물 할 때,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온 겁니다.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의 선택 없이 들어온 거예요. 왜 선택 없이 들어왔느냐 하면, 항상 우리의 선택은 뭐냐 하면, 우리의 선택과 행함은 뭐가 된다? 선악과에 이게 귀결되고 갇혀버려요. 선과 악에. 이미 우리는 선악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우리보고 뭐 하라고 하면 “잘했죠?” 이래 돼요. 또는 “못했죠?” 이래요. “아휴! 나는 믿음 없으니까 지옥 갈 거야.” 이것도 선과 악에 갇혀있는 믿음이에요. 

믿음 없다고 지옥가고 믿음 있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선과 악의 시스템이 아니에요. 거저 준 것이 있는가? 아무리 봐도 없는데? 없으면 말고. 없으면 마는 거지. 뭐. 주님이 행하셔서 거저 준 것 같으면, “나의 구원은 주님의 행하심에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믿음의 선물을 줬다는 말은, 이 믿음은 누구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아버지와 더불어서 얻은 믿음이에요. 우리를 대신해서 가진 믿음이에요. 그럼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이 믿음이 어디로 유도하게 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예수님 가신 길로 유도합니다. 그걸 가지고 선이라고 해요. 그 뒤에 나오는 선한 행동, 선한 마음,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우리는 거대한 하나의 아바타, 로봇이라면, 로봇 안에서 실제로 운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운전하고 주님이 운전해요.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신앙이 되는 겁니다. 이 깨끗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따지는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고, 생명나무다우냐, 생명나무를 훼손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그 깨끗함, 그 선함을 가지고 주께서는, 머리되시는 주께서 그레데 교회를, 자기 택한 백성을 건져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저희들이 불량품인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우리 잘못이 아니고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을 따지고, 자기 잘남을 따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불량품인 것을 인정하고, 이런 죄인을 불량품이라고 노출시킨, 주님이 주신 그 믿음의 선물에 대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