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013a 디도서3장5절(잃어버린 자)-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렇게 되어 있죠. 성경 하나하나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대응하면서 이 지침을,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또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고 주시면 되는데, 구약 말고 특히 신약 같은 경우에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어떤 지침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행함으로 묶어버려요. 행함.
이것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내가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장사를 하던 농사를 짓든 간에, 뭐 집에서 잠을 자든 간에 그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것을 관찰하는 기준이 있는 거예요. 그 기준은 우리가 행동을 할 때에 자신의 의도가 거기에 묻힌다는 겁니다.
그것을 여기 5절에서, 인간이 행동을 하면서 앞에 어떤 단서를 붙이느냐 하면, “이것은 의로운 행동이다.”라고 단서를 붙여요.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보면 배선들이 많잖아요. 복잡한 배선들이 있어요. 그 선들이 같은 선이 없어요. 그 필요한 선들이 그만큼 많은 겁니다. 옛날 구식 라디오에 선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모든 전자기기 부품이나 배선이.
그런 배선들이 굉장히 복잡한데, 그 배선들이 얽히고설켜서 텔레비전 앞 브라운관에 화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배선들이 그냥 깔려있는 배선들이 아니고 목적과 의미가 있다 이 말이죠.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화면이 나오도록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배선 하나가 끊어져버리면 화면이 안 나오잖아요. 소리도 안 들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의 하나하나의 행동을 배선으로 보는 겁니다. 배선.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텔레비전 뒤에 보면 선들을 구분하기위해서 색깔이 아주 예쁘죠. 빨간색으로 해놓고, 노란색으로 해놓고, 초록색으로 해놓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으로 해놓았는데, 만약에 그 배선들 사이에서 노란색 배선이 빨간색 배선을 보고 내가 더 예쁘다고 한다면, 배선과 배선 사이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우면, 그거는 배선을 설치한 원래 자기목적에 위배되죠.
색깔 자랑하라고, 배선 자랑하라고, 배선끼리 서로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인간끼리 서로 붙여놓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있을 이유가 안 되죠. 인간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데, 텔레비전 배선이 화면을 나오게 하는 것처럼 결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의롭게 되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의도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기를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행동이 의롭게 되기를 추구한다 이 말이죠.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대추나무를 심어도, 그게 그냥 심는 것이 아니에요. 대추나무를 심자가 아니라, 이것을 심는 행위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배선을 따라 쭉 가보게 되면, ‘역시 나는 더 오래 살아야 돼. 왜? 나는 의로우니까.’라는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봐요. 성경에서는.
모든 성경은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다양하고 서로 복잡하고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질, 동일한 성질로 딱 규정을 해버립니다. 니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의롭게 되기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되, 라고 할 때는, 이 말을 그대로 보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뭘 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의롭게 되기죠. 근데 여기서 구원이니까, 구원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출, 또는 탈출이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질 때에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목적은 뭐로부터의 구출입니까? 내가 의롭게 되지 않기 쪽으로의 구출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의롭게 되기에 있는데, 거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내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 쪽으로 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로운 행동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복잡한 배선처럼, 전자제품의 뒤쪽처럼 모든 행동이 하나로 의롭게 되기로 모아지잖아요.
그러면 여기서부터 구출이니까,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기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과 구원의 관계는 뭐냐 하면 바로 ‘파괴’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인간파괴에요. 자기 의, 자기 파괴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찾아올 때에 일을 어떻게 하는가, 자기 의를 파괴하는 거예요. 우리자신을 파괴시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죠. 살아계신다면 그냥 살아계시는 겁니까?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계십니까? 일하시면서 살아계시죠. 그러면 그 일이 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살아계신데 어떻게 살아계십니까?” “그건 몰라요.” 이러면 안 되죠. 아니, 살아계신 분이 활동 안 하고 가만히 살아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없죠. 어떤 분이 살아계신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건 시체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분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분주하게 지금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잖아요. 그럼 무슨 활동을 하느냐는 말이죠. “주님은 살아있다.” “그래서?” “활동하십니다.” “그래 뭘 하는데?”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야죠. 그래, 주님은 뭘 하는데?” “우리를 파괴하십니다.” “그렇지!” 이게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를 파괴하는 거예요.
우리가 행동할 때, 내가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의도적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행동은 의도가 아니에요. 그냥 행동하게 되면 그게 모아져서 자기가 의로운 쪽으로 이게 묶어진다 이 말입니다. 한 묶음, 두 묶음, 배추 묶듯이 묶어지는 거예요. “나는 이런 행동을 했으니까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돼요. 더 살아남아야 되고, 나는 남보란 듯이 내 자아를 드러내야 됩니다. 그러니 나를 붙잡고 교도소에 넣으면 안 돼요. 나를 구속시키면 안 됩니다.”
“박근혜 당신을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있어서 구속하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을 한 의도가 있는데, 그 의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 모든 행동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행동하기 위해서 구속에서 풀어달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기 위해서 구속에서 풀어달라고 하겠어요? 죄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시킨 판사는 자기의 행동을 뭐로 봅니까? “이 판사는 이렇게 죄가 많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구속 결정을 내렸습니까? 아니면 “내 판단은 내가 보기에 이거는 의로운 판단이라고 여겨서 당신을 구속수감합니다.”라고 합니까? 후자죠.
그러니 인간의 모든 복잡한, 75억의 모든 인간이 만나고 흩어지고 만나고 대화하고, 오늘도 술집에서 가서 술 먹고 어떤 대화와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만남을 유지하더라도, 그 행동 하나하나에는 뭣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살아야 될 정도로 아직도 나는 의로운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설치고 있는 거예요. 아주머니들은 설거지 하고, 교사는 학생들 가르치고.
흔히 말하죠. “당신은 교사로 왜 일하십니까?” “내가 뭐, 아이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겸손하게 내 죄를 압니다. 나는 월급 받아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다른 것 하면 월급이 이만큼 안 나오니까 뭐 이만한 직업이 없습니다.”라고 해요. 근데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살아야 됩니다.” “그 가치가 뭔데요?” “나는 의롭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파괴대상이죠.”
자, 이 이야기를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이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자, 사람들이 교회에 왜 옵니까? 못난 놈! 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옵니까? 잘났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왔죠. 예배 참석하는 행위, 조용히 앉아있는 행위, 주차요원으로 봉사 활동하는 행위, 끝나고 난 뒤에 점심 먹고 가주는 행위, 오후예배까지 참석해주는 그런 열성.
그 행위 하나하나가 꽃다발처럼 모아져서 이퀄(=)나오는 행위, a+b+c+d...=? 뭐가 나오겠어요? 오늘도 나는 보람 있게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저 잡아가면 안 돼요. 저 죽이면 안 돼요. 이래 나오겠죠. 저 죽이면 안 돼요. 저 잡아가면 안 돼요. 저 때리면 안 돼요. 다른 말로 하면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주면 안 돼요. 이래 나오겠죠.
요즘 우리교회에서 고린도후서 설교를 하거든요. 몰랐죠? 사십 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어떤 사람이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 그럼 지금 이 사람은 천국가고 있는 중이에요? 아니면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어떤 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어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들에게 다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매를 맞고, 이 사람이 어딜 가도 위험이 그를 공격하고 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자, 이 사람은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둘 중의 하나 객관식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사람은 지옥 간다고 했죠. 근데 그런 사람이 지옥 간다고 했을 때 사도바울은 그 지옥 가는 기준을 자기가 가지고, 이게 바로 천국 가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고린도교회 지도자들, 당회장들은 뭡니까? 악마의 전당, 악마의 저주에요. 악마는 이렇게 싸우는 겁니다.
그들이 기피하는 것, 자, 인간들이 기피하는 것이 뭘까요? “나는 의가 없습니다. 지금 잡아가도 나는 할 말 없습니다. 지금 때려죽여도 나는 고소하지 않겠습니다.” 이걸까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죠. 반대를 원하죠. 나는 안 맞아야 되고, 나는 울지 않아야 되고, 나는 안 아파야 되고, 나는 행복해야 되고, 우리 집안만큼은 아무 문제없이 무탈해야 되고, 범사가 잘 돼야 되고, 내 뜻대로 잘 돼야 되고.
이걸 뭐로 표준삼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으매 표준으로 잡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행동할 때, 본인이 의식도 안 했는데 행동해서, 방금 제가 나열한 것 있잖아요. 재수 좋고 행복한 것을, 사람들은 행동하면서 은연중에 그걸 보상으로 지금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교회 나온 보람이 뭡니까? 교회 한 주 나오니까 집에 도둑이 들어서 냉장고 가져가고, 두 주째 나오니까 가스레인지 없어지고, 세 주째 나오니까 신발 없어지고, 네 주째 나오니까 애가 아프고.. 지금 천국 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옥 가고 있는 중이에요? 누가 봐도 지옥가고 있죠.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당한 사람이 스데반집사고, 사도 중에 한 사람이고, 성령 받은 성도가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람 앞에서 우리의 기준과 판단에 뭔가 크나큰 실수가 있다는 것을 알죠.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점검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노선이 어딘지, 도대체 지금 나의 정신머리가 어디에 팔려있는지...
인간의 평소의 행동이 얼마나 지 잘난 체하고 있는 행동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이 세상의 어떤 모임이 자기를 박살내는 모임보다 더 소중한 모임이 있을까요? 자기를 지근지근 밟아서 니는 개보다 못해! 니는 쓰레기야! 라고 노골적으로 지적질 하는 모임보다 더 소중한 모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문제는 그런 모임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 더 붙잡아두기 위해서 긍정적 사고를 집어넣는 모임들밖에 없어요. 교회가. “니 같은 인간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가!” 이런 모임 없어요. “오늘도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다음에 오면 메달 드릴까요?” 평생 표창장 하나 못 받았는데 교회 가서 메달 얻고 이러죠.
세례요한처럼 이런 소리를 못해요. “여기가 어딘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독사의 새끼들이 여기를 와? 여기는 너희들이 올 자리가 아니야. 잘난 너희들이 올 자리가 아니야. 여기는 돌만도 못한 인간들, 돌 같은 인간들이 오는 거야. 아이고, 돌보다 훌륭하신 분은 빠지세요. 안 빠지면 내가 도끼가지고 찍어버릴 테니까.”
오늘날 교회가 더럽게 되는데 있어서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거기에 기여하고 정신적으로 보탬이 됐는지 몰라요. 얼마나 복 받았으면 교회가 저렇게 크겠느냐? 이번에 서울강의 광고를 보니까 주차장 없으면 옆에 이웃 교회에 주차하라고 광고해놨죠? 목사님이 광고하셨어요? 자기 교회 안 크니까 남의 교회 크다고 주차장만 이용하고...
사람은 자기를 파괴하는 말씀을 늘 안 들으면요, 자기가 지금 살만해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숨 좀 쉬고 주일날 교회 가야지, 라고 이렇게 하는데, 숨 쉬지 마세요. 숨 쉴 권한 없어요. 권리 없어요. 미세먼지 걱정한다고요? 미세먼지를 한 다라이로 우리 입에 집어넣어도, 아예 몽골 사막의 모래를 한 가득 입 안에 집어넣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동안 살려준 거나 감사해야 돼요.
그렇게 잘난 체하는 인간들, 주님이 십자가 진다고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뭐고 전부다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래놓고 누굴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고요? 진짜 믿는 꼴 하고는? 그렇게 도망치려고 예수를 따라다녔습니까? 베드로가 왜 예수님하고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하고 함께 있으면 누가 파괴됩니까? 예수님 파괴되는 것이 걱정됩니까? 자기 파괴되는 것이 걱정이 돼요? 자기가 잡혀서 완전히 사형되는 그게 걱정이 되잖아요.
그러면 평소에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에는 그 마음이 그 마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베드로가 왜 따라다녔어요? 자기 안 죽으려고, 자기 파괴 안 당하려고, 한 번 덕을 보겠다는 거예요. 뭐 메시아고 물위를 걷고 병고치고 하니까, 아주 신이 났어요. 신이 났어. 게다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굉장히 많다 이 말이죠. 어디가도 오빠! 오빠! 주님! 주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어요?
게다가 자기가 주님 근처에 앉았으니까 자기가 굉장히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착각을 해가지고, 임원진급, 이사진급인 줄 알고 착각을 해가지고, 주님 명에 따라서 귀신 좇아내고 복음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니까 뭐 막 자랑질 하는 거예요. “주님, 주님 말씀대로 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나이다.” 아주 신이 났어. 착각을 아주 단단히 한 거예요.
진짜 예수님이 원하는 예수교, 또는 교회, 전혀 몰라요. 뭐 사람들이 운집하면 그게 교회되는 줄 알고. 어떤 인간도 스스로 파괴당하려고 하는 행동은 없습니다. 성령 받으면 몰라도. 어떤 인간도. 스데반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짱돌 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할 소리 다했잖아요. “니 죽인다!” “죽여!”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오늘 성령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55절에 스데반이 뭣에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봤습니까? 성령에 충만했잖아요. 이 본문을 제가 좀 더 설명을 하고 싶네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했다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다 이래 보면 돼요.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해준다? 구원, 구출, 탈출이죠. 어디서부터 탈출입니까? 어디서부터 탈출이라고 했어요? 자기 의로부터. 자기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공격한다?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는 무엇이 같이 동반된다? 자기의 되잖아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나의 의로 마일리지 쌓이잖아요. 나의 의로. 그 의가 추구하는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의가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망하면 안 돼! 나는 울면 안 돼! 웃어야 돼! 나는 행복해야 돼! 왜? 이만한 의가 쌓이고 쌓였으니까. 이거는 뭐 배선처럼 깔려있는 우리의 평소의 행동이니까. 이거는 뭐 여러분이 이 말 들으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죠?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보상심리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스데반 집사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설교라는 행동을 하죠. 설교라는 행동을 하는데, 만약에 성령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성령이 없이 설교를 하면, 제가 아까 이론대로 한다면 뭐가 만들어진다? 자기의가 만들어지죠. 자기의가 만들어지면 자기 의는 나를 죽인다? 안 그러면 나를 더 살도록 부추긴다? 자기를 더 살도록 부추기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죽으면 아깝잖아요. 이게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에게 성령이 임해버렸거든요. 충만하니까 마지막 결국에는 뭐라고 합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제 영혼을 받으소서. 마치 평소에 고대하고 고대했던 최고의 기쁨, 최고의 행복, 최고의 희열이 드디어 저한테 찾아와주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이래 한 거예요. 이 순간이 오기를!!
지지난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악귀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잖아요. 그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개무시 당했지만, 사실은 마귀는 누구를 알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어느 편에 속한 것을 압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편에 속한 것을 누가 알아요? 악귀가 완전히 고백을 했죠. 이제 우리가 신자냐, 아니냐를 누구한테 물을 입장이냐면 마귀한테 물어볼 입장이에요. 마귀한테.
사람은 속아 넘어가도 마귀는 우리 자신의 술수를 알아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요. 성령이 임한 사람과 임하지 않은 사람을 마귀가 모를까요? 마귀가 모르겠습니까? 지금 자꾸 성령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 내용이 그래요. 오늘 본문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에요.
이참에 우리가 영을 분별합시다. 단정 지읍시다. 성령은 이렇다. 성령은 이런 분이다. 어떤 분인데? 나의 의를 파괴하시는 분이다. 나의 의를 파괴하시는 분이에요. 나의 의를 파괴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내가 나의 행함에 대해서 나의 의미를 부여할 때죠. 그렇죠? 나의 행함, 예배, 헌금, 뭐 전도...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의미를 부여해서 주어지는 그 행함에 대해서 성령은 가만두지 않고 지근지근 밟아버리죠.
그렇다면 이미 행했다는 사건은 남고,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지근지근 밟힌 죄인이라면, 그러면 그 사건, 내가 어떤 행동, 물을 마시는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그것을 누가 유발하신 거예요? 누가 그렇게 일으킨 겁니까? 누가 일으킨 거예요? 성령이 일으켰잖아요. 성령이 일으켜서 하시는 사건 속에는 두 개의 작업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의 하는 모든 행함과 자기 의를 파괴시키는 작업. 그리고 그 작업이 곧 주님께서 너를 구원, 구출, 탈출시키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그들에게 새겨서, 성도로 하여금 “주여, 어떻게 나에게 이런 좋은 때가 이렇게 찾아올 줄을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감사가 나와요.
자, 성령의 일을 정리해봅시다. 성령은 파괴를 통해서 뭘 유도한다? 감사를 유발한다. 감사고, 찬양이고, 뭐 그렇게 되죠. 감사가 나오도록 그렇게 작용할 때 성령의 일입니다. 파괴 없는 감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그 감사는 조작된 감사죠.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성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는 조작된 거죠.
내가 성도된 것이 기쁜 게 아니고, 주께서 자신의 구원의 일을 아무것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나에게 그 일을 벌이셨다는 것, 그게 감사다 이 말이죠. 아까 것을 다시 해봅시다. 뭐 늦게 오신 분도 계시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죠. 아까 한 것 그대로입니다.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시는데 가만히 있으면서 살아계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뭐 일을 하시죠. 그럼 묻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지금 제가 왜 묻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우리는 누가 살아있다고 의식을 하느냐 하면, 우리 인식 속에, 우리 의식 속에, 인식이라는 말은 안다는 뜻이에요. 우리 인식 속에 누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돼버리면, 누가 죽습니까? 누가 이렇게 희미해져버려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이 희미해지죠.
그럼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희미해졌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이것만 강하게 느껴지니까, 내가 살아있는 이상 내가 행동을 하게 되면, 나만 바빠요. 우리는 하루하루일이 되게 많아요. 많아도 너무 많아요. 일을 너무 많이 해요. 일을 너무 많이 하는데 기대한 결과가 안 나올 때는 그걸 누구한테 원망을 합니까? 따지기를 누구한테 따져요? 뭐 동사무소 직원보고 따집니까? 안 그러면 쇼핑센터 안내 창구에 있는 여직원한테 따집니까? 시비 걸어가지고 자기 울분을 거기에다가 푸는 겁니까?
어쨌든 간에 울분을 누구한테 풀잖아요? 울분을. 내 인생 올해 이렇게 망할 줄 몰랐다든지,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살 줄 몰랐다든지,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못 삽니까? 라고 하는데, 여러분 평범하게 사는 이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평범한 것을 자기가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진보로 나아가야지 자기 평범한 것을 자기가 용서하지 않아요. 애걔 이 정도야? 이래가지고 평범한 자기를 자기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 속에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어쨌든 간에 왜 남들처럼 그렇게 하하! 호호! 웃지 못하고, 일해도 힘들고 집에 와도 꾸벅꾸벅 졸고 힘들고, 진짜 김종환의 노래가사처럼, 나 왜 이리 살아야 되지? 당신의 사진을 보면서 나 언제 만나는데, 나 언제까지 살아야 되는데, 제목도 뭐라고 되어 있어요? 존재의 이유죠.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당신 때문에 산다는 겁니다. 당신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어디 주님 만나고 싶어서, 주님 보고 싶어서 그런 노래를 합니까?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꼭 노래를 불러야 되겠어요? 남자들이 술 먹고 눈물 흘리면서 그 노래를 부르잖아요. 취직되나 안 되나 관계없이.
인간 속에 복잡한 일상생활이 배선처럼 깔려있습니다. 여러분, 야구공을 뜯어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잡한 실이 뭉쳐져 있어요. 표면은 매끈한데 야구공이 뜯어져서 보게 되면 실 뭉탱이(묶음을 의미하는 강원도 사투리)가 복잡한 인간의 내장처럼, 곱창처럼 얽히고설킨 거예요. 인간의 모든 생활이 온갖 것으로 얽히고설켰습니다. 그 얽히고설킨 것이 하나의 목적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살아야 돼! 살아야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암 더 살아야 되고말고. 왜 살아야 되는데? 나는 살만하니까. 나는 지금 죽기 싫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자기만 생각할 때, 결론은 버킹검(1980년대 tv남성 옷 브랜드 광고. 고민하지 말고 그 브랜드 옷을 입어라. 답은 하나라는 뜻)이죠. 결국은 이거에요. 나는 살아야하니까 나는 살아야 돼. 남이 죽든 말든. 오늘도 힘들지만, 아니꼽고 더럽지만, 메스껍지만 살기 위해서 나는 참아야 하느니라. 옛날 가부장 집안의 남자들이 시집간 딸이 울면서 친정에 오니까, 말해주는 그 내용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에 나와 있어요. 참아야 하느니라. 그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거예요. 요새는 바뀌어서 반대가 되어 남자가 찔찔 울고 오니까, 참아야 하느니라. 그게 남자의 일생이니라.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남자가 울어도 너~무 길게 울어요. 슬퍼도 너~무 슬퍼요. 남자의 운명이. 옛날 여자가 그랬거든요.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래 불러요.
참는 그것은 여전히 자기 의를 계속 사수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의는 인간이 의를 생산해내는 그것만이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자기 의를, 나한테 이런 의가 있다는 그것을 이중삼중으로 자물쇠 채워서 보물처럼 고이고이, 비밀번호까지 만들어서 잠가놓고 안 가르쳐주면서 그걸 견디는 거예요. 그걸 이겨내는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그게 인생이에요.
뭐 남 도와준다고요? 도와주기?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남한테 배려를 하고 양보하기? 그런 것 전부 다 자기 의로 보상되는데. 아내사랑하기?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사랑이에요? 지금 자기 사랑이 확고한데 남 줄 사랑이 어디에 있어요. 자기 사랑이 전부인데. 인심 쓴다고 그게 뭐 사랑입니까? 나중에 해준 만큼 내놓아야 돼. 이거죠.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행함의 의로움을 못 벗어나요.
그래서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구원이 안 돼요. 열두 제자가 구원이 안 된 이유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스데반 집사님 보세요. 성령이 왔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 길게 하면 지루하니까 빨리 갑시다. 성령이 오니까 스데반 집사가 하는 고백이 뭡니까? “주여 왜 죽이십니까?”라고 이래 나왔어요? “와우!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주여, 어서 이 고물, 쓰레기 같은 이 영혼을 받아주세요. 받아주시고, 저들의 영혼을 너무 벌하지 마소서. 용서해주소서.” 왜? 자기나 그들이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내가 맞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고, 사실은 똑같은데 일방적으로 나를 빼내 준 거예요. 나의 어떤 행위도 보지 않고. 어떤 행함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빼낼 때, 빼낸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근거에 준한 성령이 임했거든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뭘 보느냐 하면 자기 십자가에 예수님의 피를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피가 유일한 근원이고 다른 근원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더 보탤 필요도 없어요. 오직 피 뿐이에요. 피 뿐. 이게 결론이고 이게 정답이고 이게 답입니다. 오직 피 입니다.
근데 피를 믿어버리면 안 돼요. 피를 믿어버리면 피 믿는 것이 나의 의에 누적이 되고 마일리지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피는 우리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피 앞에서 나의 모든 의가 날마다 이게 다 파괴되는 용도로써 능력이 임하는 겁니다. 나의 의가. 나의 잘난 의가. 주님께서 “오늘도 니 무슨 잘한 일 했노?”라고 하면, “주여, 죄만 지었습니다.” “니 복음 전파 했잖아?” “주여, 그것도 죕니다.”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하면 행여나 피만 정답인데 거기다가 초칠까봐. 피 앞에 뭔가 얼쩡거릴까봐. “그러면 니 의가 있나?” “제 의가 있을 수가 없죠.” “주께서 다 깨셨잖아요.” “뭐, 의로운 것이 없으면 더 안 살아도 되지?” “그럼요. 안 살아도 되죠.” “내일 모레 딸 결혼식인데?” “아이고, 뭐 지가 알아서 하겠죠. 아버지가 뭐 꼭 손잡고 들어가야 됩니까?”
“일주일 뒤에 니가 여행 가려고 모은 곗돈 타는 날인데?” “아이고, 여행 가봤자 죄만 짓는데 안 가도 됩니다.” “그럼, 오늘 밤에 니 영혼 데려갈까?” “아이고, 뭐 그때 데려가지 마시고 지금 데려가시면 안 됩니까? 지금요?” “니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주께서 그런 마음 넣어주셨잖아요. 내가 환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요.” 내가 환장한 것이 되면 내 의가 돼버려요.
주께서 그런 마음 줘놓고, 다시 말하면 베드로이야기죠. “주께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님이 사랑을 집어넣었잖아요. 왜 저한테 묻습니까?” 집어넣으신 분이 예수님이면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이 집어넣은 것이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사랑의 전자 팔찌라고 합니다. 사랑의 전자 팔찌.
제가 그걸 가지고 지난 오후 설교에 예수님의 만년필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만년필이라고 한 것이 기억납니까? 만년필이 기억이 안 나면 볼펜은 기억납니까? 우리는 주님의 볼펜이에요. 쓰는 대로 색깔이 나오는 펜인 겁니다. 뭐 줄줄 나오죠. 쭈쭈바처럼 까고 하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나를 파괴하는 그 능력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 전하면서 남은 그 복음 듣고 구원 받고 복음 전한 나는 파괴당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예요.
복음 전하고 복음 전한 내가 살아있으면 나만 지옥 가죠. 안 되잖아요. 복음 전하면서 나도 깨지고. “아이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여! 앉은뱅이를 낫게 하다니요!” “무슨 소리입니까? 누굴 망치려고 하는 소리입니까? 나의 경건으로 한 게 아닙니다. 나의 열심이 한 게 아니에요. 왜 멀쩡한 사람 지옥 보내려고 그런 소리합니까? 이거는 주님의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했지, 내가 그래서 내가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주의 믿음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잖아요. 지금 주님이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것만 보이지만 이거는 오해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요. 우리가 살아있어도 그건 신경 쓰지 마시고 주님이 살아있어서 일으키신 겁니다.”
베드로 요한이 전도를 하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어서, 있으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진짜 믿는다면 교체를 해야 돼요. 베드로 요한이 뭐, 뭐, 뭐 작업을 걸었는데, 그럼 저 사람들이 작업을 걸어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구나! 라는 이걸 바로 뜯어고쳐야 돼요. 베드로와 요한의 설명을 듣고. “아, 내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저 사람이 병 나은 것과 거기에 참여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행함을 내가 연결시킨 이 연결이 잘못된 연결이었구나. 이렇게 연결시켜서는 안 되는구나. 나는 사람이 나서서 걷게 한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잘못 오해했구나.”라는 기회를 베드로와 요한이 전파할 때, 그게 바로 베드로와 요한의 전도순간입니다.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이 전도의 순간이 아니고, 낫게 하는 그 행위, 모든 것을 규합해서 오직 그리스도만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아이고, 전도하기가 하여튼 참 복잡해. 되게 복잡해요.
다시, 본문 디도서 3장 5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 다음에 뭡니까? 오직 그의 긍휼하심이죠. 자, 긍휼하심인데 긍휼하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강의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이 강의가 어려워서. 자, 아까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의 행동은 다 다르다고 했죠. 마치 전자제품의 배선처럼 복잡하잖아요.
근데 아무리 인간의 행동이 복잡해도 성경에서는 그걸 한 묶음으로 묶는다고 했죠. 그 묶은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여러 번 했는데 답변 해보세요. 그걸 묶으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의가 되죠. 자기 의가. 자,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아무리 니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행동들을 하더라도 그걸 묶어버리면 결국 자기 의라고, 이렇게 뭉쳐지는 거예요.
자,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파괴하실 때, 파괴해야 구원이 되니까, 구원을 할 때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저쪽에는 자기 의로 뭉쳐지잖아요. 근데 주님의 성령은 뭉쳐진 자기 의에다가 뭘 덮어버리게 되느냐 하면 긍휼이라는 통합개념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주께서 구원하는 것은, 그 짓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복잡한 일을 해서, 또는 나는 자기 의입니다, 나는 못됐습니다, 라고 회개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뭐로 구원받아요?
회개하는 것도 자기 의니까. 회개하는 것도 안 돼요. 그럼 뭡니까? 하나님의 긍휼로, 불쌍히 여김으로 구원해주는 겁니다. 그럼 불쌍히 여겨 줄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쌍히 여김이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불쌍히 여김이 근거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증거가 아니고, 인간구원론이 돼버려요.
이게 또 무슨 어려운 말이냐 하는데, 이렇습니다. 지금 하나하나가 진짜 어려워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설교 할 때 거의 백퍼센트, 전부 다 인간구원론으로 빠져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론으로 빠진다고요. 인간의 의로운 행함이 아니고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죠.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이 “아, 나는 의로운 행동 없습니다. 나는 죄밖에 없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하고 무엇을 내세우는가 하면 긍휼을 내세워요. 그럼 이 사람의 관심사가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자기 살고 싶은 것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자기 살고 싶은 거죠. 그럼 자기 살고 싶은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닙니까? 자기 사랑이 맞죠. 그거는 구원론이다 이 말이죠. 그거는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정말 긍휼이 오게 되면, 나 긍휼로 구원받았다는 결과가 나오면 안 돼요. 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 일을 시켰잖아요.” 너무 중요해서 적어보겠습니다. 긍휼, 긍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일을 시켰잖아요.” 예를 들면 아까 이야기한 무슨 집사? 스데반집사.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자기가 맞아 죽는 것은 이게 자기가 거룩한 행동을 추가해서 한 것이다? 아니면 주께서 하신 일이다? 주께서 하신 일이죠. 왜냐하면 성령이 주의 일이거든요.
성령은 자기 맘대로 못해요. 주께서 시켜서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와서 자기를 파괴시킬 때 뭘 봐야 돼요? 성령 보내신 누굴 봅니까? 또 우리는 주님을 바라봐야 돼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어요? 주님께서 살아있기에 그 다음에 누가 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기에 내가 살아있는 겁니다. 순서가 그렇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기에 주님이 살아있게 돼버리면 주님은 나의 시다바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뭘 도와드릴까요? 라고 하는 하나의 웨이터가 되는 거예요. 종이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내 구원이 목적이 돼버려요. 나는 주님의 은혜로, 긍휼로 오늘도 살았다, 이러면 내가 살아있는 것을 자랑질 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주께서 오늘 나를 살게 하셨잖아요? 그때 갈비 뜯으라고 해서 뜯었잖아요? 오늘 오후에. 진짜 오늘 오후가 아니에요. 점심 때 뭐 먹었느냐 하면 주꾸미볶음 먹었어요. 주께서 주꾸미볶음 먹도록 인도하셨잖아요? 저는 뭐 감사히 먹었을 뿐입니다. 이 감사가 나와야 돼요.
내가 주꾸미볶음 먹을 때 하나도 안 흘렸어요. 나 참 착하죠? 이러면 안 되고. 주께서 하게 하셨잖아요. 주꾸미볶음 먹으라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서 배탈 나서 화장실에 가서 다 쏟아내게 주께서 하셨어요. 예를 든 겁니다. 제 배는 멀쩡해요. 주께서 하게 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모델, 스데반집사입니다. 그리고 그게 귀신도 알아주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그 귀신이 알아주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인생이 그거에요. 주께서 때렸잖아요.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여행의 위험과... 심지어 광주리에서 탈출할 정도로.
주께서 그런 모든 무대장치를, 세트를 다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딱 돌아서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주여 보란 듯이 저 살아야 되겠습니다. 갑자기 주님 살아있는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내 남편이 살고, 내 아내가 살고, 내가 내일 아침까지 무탈하게, 탈 없이, 옥색원피스 입고 비는 것. 버스 앞에 붙어 있는 두 손 모아 비는 소녀의 기도가 있죠. 위에서 광선이 쫙 비치고 옥색원피스 입고 무릎 굻고 비는 소녀의 기도처럼. 오늘도 무사히! 라는 글씨가 쓰여 있죠.
옛날 버스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 어릴 때. 성구사에 가면 그런 그림이 있어요. 옥색원피스 입은 소녀 보면 알아요. 인물도 얼마나 이쁜지. 빛을 보면서 오늘도 무사히! 라는 이런 게 있어요. 오늘도 무사히, 라는 이게 주의 뜻입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라고 했죠. 오늘도 무사히! 그게 아니죠. 주께서는 어디서 그런 더러운 버릇을 배워가지고 그런 것을 가지고 기도 하냐고 하실 겁니다.
왜 살아야 하는데? 애가 어려서요. 아이고, 애가 니 애냐? 그동안 니가 살렸어? 애 핑계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자신이 이유도 모르는 채, 우리는 내가 나를 절대화시키는 이 자기 의가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내 안에 버티고 있는 겁니다. 생생하게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버티면서 온갖 성경구절을 가지고 자기한테 다 뒤집어씌우죠. 왜냐하면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장래의 낙을 보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누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그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내가 잘 되는 거? 그게 예수님의 나라일까요? 내 나라일까요? 그거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잖아요. 분명히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된 것이지, 나를 위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 흔하고 하도 많이들은 이야기를 또 하려고 하니까, 제가 민망하고 제가 미안해서 이 말을 자주 못 하겠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중생의 씻음과,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의 뭐 하심으로?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는 것은, 새롭다는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를 우리가 눈치를 챘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알고 있습니까? 주님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을 주께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죠.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닥다리니까.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세상에서 그 모델을 찾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10분 쉬어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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