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디도서10-잃어버린 자 1710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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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1.188)17-10-18 22:28 
서울의존강의20171013a 디도서3장5절(잃어버린 자)-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렇게 되어 있죠. 성경 하나하나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대응하면서 이 지침을,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또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고 주시면 되는데, 구약 말고 특히 신약 같은 경우에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어떤 지침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행함으로 묶어버려요. 행함. 

  

이것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내가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장사를 하던 농사를 짓든 간에, 뭐 집에서 잠을 자든 간에 그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것을 관찰하는 기준이 있는 거예요. 그 기준은 우리가 행동을 할 때에 자신의 의도가 거기에 묻힌다는 겁니다. 

  

그것을 여기 5절에서, 인간이 행동을 하면서 앞에 어떤 단서를 붙이느냐 하면, “이것은 의로운 행동이다.”라고 단서를 붙여요.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보면 배선들이 많잖아요. 복잡한 배선들이 있어요. 그 선들이 같은 선이 없어요. 그 필요한 선들이 그만큼 많은 겁니다. 옛날 구식 라디오에 선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모든 전자기기 부품이나 배선이. 

  

그런 배선들이 굉장히 복잡한데, 그 배선들이 얽히고설켜서 텔레비전 앞 브라운관에 화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배선들이 그냥 깔려있는 배선들이 아니고 목적과 의미가 있다 이 말이죠.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화면이 나오도록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배선 하나가 끊어져버리면 화면이 안 나오잖아요. 소리도 안 들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의 하나하나의 행동을 배선으로 보는 겁니다. 배선.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텔레비전 뒤에 보면 선들을 구분하기위해서 색깔이 아주 예쁘죠. 빨간색으로 해놓고, 노란색으로 해놓고, 초록색으로 해놓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으로 해놓았는데, 만약에 그 배선들 사이에서 노란색 배선이 빨간색 배선을 보고 내가 더 예쁘다고 한다면, 배선과 배선 사이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우면, 그거는 배선을 설치한 원래 자기목적에 위배되죠. 

  

색깔 자랑하라고, 배선 자랑하라고, 배선끼리 서로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인간끼리 서로 붙여놓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있을 이유가 안 되죠. 인간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데, 텔레비전 배선이 화면을 나오게 하는 것처럼 결국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의롭게 되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의도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기를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행동이 의롭게 되기를 추구한다 이 말이죠.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대추나무를 심어도, 그게 그냥 심는 것이 아니에요. 대추나무를 심자가 아니라, 이것을 심는 행위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배선을 따라 쭉 가보게 되면, ‘역시 나는 더 오래 살아야 돼. 왜? 나는 의로우니까.’라는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봐요. 성경에서는. 

  

모든 성경은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다양하고 서로 복잡하고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질, 동일한 성질로 딱 규정을 해버립니다. 니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의롭게 되기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되, 라고 할 때는, 이 말을 그대로 보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뭘 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의롭게 되기죠. 근데 여기서 구원이니까, 구원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출, 또는 탈출이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질 때에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목적은 뭐로부터의 구출입니까? 내가 의롭게 되지 않기 쪽으로의 구출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의롭게 되기에 있는데, 거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내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 쪽으로 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로운 행동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복잡한 배선처럼, 전자제품의 뒤쪽처럼 모든 행동이 하나로 의롭게 되기로 모아지잖아요. 

  

그러면 여기서부터 구출이니까,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기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과 구원의 관계는 뭐냐 하면 바로 ‘파괴’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인간파괴에요. 자기 의, 자기 파괴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찾아올 때에 일을 어떻게 하는가, 자기 의를 파괴하는 거예요. 우리자신을 파괴시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죠. 살아계신다면 그냥 살아계시는 겁니까?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계십니까? 일하시면서 살아계시죠. 그러면 그 일이 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살아계신데 어떻게 살아계십니까?” “그건 몰라요.” 이러면 안 되죠. 아니, 살아계신 분이 활동 안 하고 가만히 살아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없죠. 어떤 분이 살아계신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건 시체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분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분주하게 지금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잖아요. 그럼 무슨 활동을 하느냐는 말이죠. “주님은 살아있다.” “그래서?” “활동하십니다.” “그래 뭘 하는데?”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야죠. 그래, 주님은 뭘 하는데?” “우리를 파괴하십니다.” “그렇지!” 이게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를 파괴하는 거예요. 

  

우리가 행동할 때, 내가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의도적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행동은 의도가 아니에요. 그냥 행동하게 되면 그게 모아져서 자기가 의로운 쪽으로 이게 묶어진다 이 말입니다. 한 묶음, 두 묶음, 배추 묶듯이 묶어지는 거예요. “나는 이런 행동을 했으니까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돼요. 더 살아남아야 되고, 나는 남보란 듯이 내 자아를 드러내야 됩니다. 그러니 나를 붙잡고 교도소에 넣으면 안 돼요. 나를 구속시키면 안 됩니다.” 

  

“박근혜 당신을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있어서 구속하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을 한 의도가 있는데, 그 의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 모든 행동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행동하기 위해서 구속에서 풀어달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기 위해서 구속에서 풀어달라고 하겠어요? 죄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시킨 판사는 자기의 행동을 뭐로 봅니까? “이 판사는 이렇게 죄가 많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구속 결정을 내렸습니까? 아니면 “내 판단은 내가 보기에 이거는 의로운 판단이라고 여겨서 당신을 구속수감합니다.”라고 합니까? 후자죠. 

  

그러니 인간의 모든 복잡한, 75억의 모든 인간이 만나고 흩어지고 만나고 대화하고, 오늘도 술집에서 가서 술 먹고 어떤 대화와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만남을 유지하더라도, 그 행동 하나하나에는 뭣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살아야 될 정도로 아직도 나는 의로운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설치고 있는 거예요. 아주머니들은 설거지 하고, 교사는 학생들 가르치고. 

  

흔히 말하죠. “당신은 교사로 왜 일하십니까?” “내가 뭐, 아이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겸손하게 내 죄를 압니다. 나는 월급 받아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다른 것 하면 월급이 이만큼 안 나오니까 뭐 이만한 직업이 없습니다.”라고 해요. 근데 “왜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살아야 됩니다.” “그 가치가 뭔데요?” “나는 의롭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파괴대상이죠.” 

  

자, 이 이야기를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이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자, 사람들이 교회에 왜 옵니까? 못난 놈! 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옵니까? 잘났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왔죠. 예배 참석하는 행위, 조용히 앉아있는 행위, 주차요원으로 봉사 활동하는 행위, 끝나고 난 뒤에 점심 먹고 가주는 행위, 오후예배까지 참석해주는 그런 열성. 

  

그 행위 하나하나가 꽃다발처럼 모아져서 이퀄(=)나오는 행위, a+b+c+d...=? 뭐가 나오겠어요? 오늘도 나는 보람 있게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저 잡아가면 안 돼요. 저 죽이면 안 돼요. 이래 나오겠죠. 저 죽이면 안 돼요. 저 잡아가면 안 돼요. 저 때리면 안 돼요. 다른 말로 하면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주면 안 돼요. 이래 나오겠죠. 

  

요즘 우리교회에서 고린도후서 설교를 하거든요. 몰랐죠? 사십 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어떤 사람이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 그럼 지금 이 사람은 천국가고 있는 중이에요? 아니면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어떤 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어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들에게 다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매를 맞고, 이 사람이 어딜 가도 위험이 그를 공격하고 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자, 이 사람은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둘 중의 하나 객관식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사람은 지옥 간다고 했죠. 근데 그런 사람이 지옥 간다고 했을 때 사도바울은 그 지옥 가는 기준을 자기가 가지고, 이게 바로 천국 가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고린도교회 지도자들, 당회장들은 뭡니까? 악마의 전당, 악마의 저주에요. 악마는 이렇게 싸우는 겁니다. 

  

그들이 기피하는 것, 자, 인간들이 기피하는 것이 뭘까요? “나는 의가 없습니다. 지금 잡아가도 나는 할 말 없습니다. 지금 때려죽여도 나는 고소하지 않겠습니다.” 이걸까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죠. 반대를 원하죠. 나는 안 맞아야 되고, 나는 울지 않아야 되고, 나는 안 아파야 되고, 나는 행복해야 되고, 우리 집안만큼은 아무 문제없이 무탈해야 되고, 범사가 잘 돼야 되고, 내 뜻대로 잘 돼야 되고. 

  

이걸 뭐로 표준삼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으매 표준으로 잡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행동할 때, 본인이 의식도 안 했는데 행동해서, 방금 제가 나열한 것 있잖아요. 재수 좋고 행복한 것을, 사람들은 행동하면서 은연중에 그걸 보상으로 지금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교회 나온 보람이 뭡니까? 교회 한 주 나오니까 집에 도둑이 들어서 냉장고 가져가고, 두 주째 나오니까 가스레인지 없어지고, 세 주째 나오니까 신발 없어지고, 네 주째 나오니까 애가 아프고.. 지금 천국 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옥 가고 있는 중이에요? 누가 봐도 지옥가고 있죠.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당한 사람이 스데반집사고, 사도 중에 한 사람이고, 성령 받은 성도가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람 앞에서 우리의 기준과 판단에 뭔가 크나큰 실수가 있다는 것을 알죠.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점검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노선이 어딘지, 도대체 지금 나의 정신머리가 어디에 팔려있는지... 

  

인간의 평소의 행동이 얼마나 지 잘난 체하고 있는 행동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이 세상의 어떤 모임이 자기를 박살내는 모임보다 더 소중한 모임이 있을까요? 자기를 지근지근 밟아서 니는 개보다 못해! 니는 쓰레기야! 라고 노골적으로 지적질 하는 모임보다 더 소중한 모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문제는 그런 모임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 더 붙잡아두기 위해서 긍정적 사고를 집어넣는 모임들밖에 없어요. 교회가. “니 같은 인간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가!” 이런 모임 없어요. “오늘도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다음에 오면 메달 드릴까요?” 평생 표창장 하나 못 받았는데 교회 가서 메달 얻고 이러죠. 

  

세례요한처럼 이런 소리를 못해요. “여기가 어딘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독사의 새끼들이 여기를 와? 여기는 너희들이 올 자리가 아니야. 잘난 너희들이 올 자리가 아니야. 여기는 돌만도 못한 인간들, 돌 같은 인간들이 오는 거야. 아이고, 돌보다 훌륭하신 분은 빠지세요. 안 빠지면 내가 도끼가지고 찍어버릴 테니까.” 

  

오늘날 교회가 더럽게 되는데 있어서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거기에 기여하고 정신적으로 보탬이 됐는지 몰라요. 얼마나 복 받았으면 교회가 저렇게 크겠느냐? 이번에 서울강의 광고를 보니까 주차장 없으면 옆에 이웃 교회에 주차하라고 광고해놨죠? 목사님이 광고하셨어요? 자기 교회 안 크니까 남의 교회 크다고 주차장만 이용하고... 

  

사람은 자기를 파괴하는 말씀을 늘 안 들으면요, 자기가 지금 살만해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숨 좀 쉬고 주일날 교회 가야지, 라고 이렇게 하는데, 숨 쉬지 마세요. 숨 쉴 권한 없어요. 권리 없어요. 미세먼지 걱정한다고요? 미세먼지를 한 다라이로 우리 입에 집어넣어도, 아예 몽골 사막의 모래를 한 가득 입 안에 집어넣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동안 살려준 거나 감사해야 돼요. 

  

그렇게 잘난 체하는 인간들, 주님이 십자가 진다고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뭐고 전부다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래놓고 누굴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고요? 진짜 믿는 꼴 하고는? 그렇게 도망치려고 예수를 따라다녔습니까? 베드로가 왜 예수님하고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하고 함께 있으면 누가 파괴됩니까? 예수님 파괴되는 것이 걱정됩니까? 자기 파괴되는 것이 걱정이 돼요? 자기가 잡혀서 완전히 사형되는 그게 걱정이 되잖아요. 

  

그러면 평소에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에는 그 마음이 그 마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베드로가 왜 따라다녔어요? 자기 안 죽으려고, 자기 파괴 안 당하려고, 한 번 덕을 보겠다는 거예요. 뭐 메시아고 물위를 걷고 병고치고 하니까, 아주 신이 났어요. 신이 났어. 게다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굉장히 많다 이 말이죠. 어디가도 오빠! 오빠! 주님! 주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어요? 

  

게다가 자기가 주님 근처에 앉았으니까 자기가 굉장히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착각을 해가지고, 임원진급, 이사진급인 줄 알고 착각을 해가지고, 주님 명에 따라서 귀신 좇아내고 복음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니까 뭐 막 자랑질 하는 거예요. “주님, 주님 말씀대로 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나이다.” 아주 신이 났어. 착각을 아주 단단히 한 거예요. 

  

진짜 예수님이 원하는 예수교, 또는 교회, 전혀 몰라요. 뭐 사람들이 운집하면 그게 교회되는 줄 알고. 어떤 인간도 스스로 파괴당하려고 하는 행동은 없습니다. 성령 받으면 몰라도. 어떤 인간도. 스데반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짱돌 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할 소리 다했잖아요. “니 죽인다!” “죽여!”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오늘 성령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55절에 스데반이 뭣에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봤습니까? 성령에 충만했잖아요. 이 본문을 제가 좀 더 설명을 하고 싶네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했다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다 이래 보면 돼요.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해준다? 구원, 구출, 탈출이죠. 어디서부터 탈출입니까? 어디서부터 탈출이라고 했어요? 자기 의로부터. 자기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공격한다?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는 무엇이 같이 동반된다? 자기의 되잖아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나의 의로 마일리지 쌓이잖아요. 나의 의로. 그 의가 추구하는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의가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망하면 안 돼! 나는 울면 안 돼! 웃어야 돼! 나는 행복해야 돼! 왜? 이만한 의가 쌓이고 쌓였으니까. 이거는 뭐 배선처럼 깔려있는 우리의 평소의 행동이니까. 이거는 뭐 여러분이 이 말 들으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죠?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보상심리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스데반 집사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설교라는 행동을 하죠. 설교라는 행동을 하는데, 만약에 성령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성령이 없이 설교를 하면, 제가 아까 이론대로 한다면 뭐가 만들어진다? 자기의가 만들어지죠. 자기의가 만들어지면 자기 의는 나를 죽인다? 안 그러면 나를 더 살도록 부추긴다? 자기를 더 살도록 부추기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죽으면 아깝잖아요. 이게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에게 성령이 임해버렸거든요. 충만하니까 마지막 결국에는 뭐라고 합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제 영혼을 받으소서. 마치 평소에 고대하고 고대했던 최고의 기쁨, 최고의 행복, 최고의 희열이 드디어 저한테 찾아와주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이래 한 거예요. 이 순간이 오기를!! 

  

지지난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악귀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잖아요. 그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개무시 당했지만, 사실은 마귀는 누구를 알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어느 편에 속한 것을 압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편에 속한 것을 누가 알아요? 악귀가 완전히 고백을 했죠. 이제 우리가 신자냐, 아니냐를 누구한테 물을 입장이냐면 마귀한테 물어볼 입장이에요. 마귀한테. 

  

사람은 속아 넘어가도 마귀는 우리 자신의 술수를 알아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요. 성령이 임한 사람과 임하지 않은 사람을 마귀가 모를까요? 마귀가 모르겠습니까? 지금 자꾸 성령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 내용이 그래요. 오늘 본문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에요. 

  

이참에 우리가 영을 분별합시다. 단정 지읍시다. 성령은 이렇다. 성령은 이런 분이다. 어떤 분인데? 나의 의를 파괴하시는 분이다. 나의 의를 파괴하시는 분이에요. 나의 의를 파괴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내가 나의 행함에 대해서 나의 의미를 부여할 때죠. 그렇죠? 나의 행함, 예배, 헌금, 뭐 전도...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의미를 부여해서 주어지는 그 행함에 대해서 성령은 가만두지 않고 지근지근 밟아버리죠. 

  

그렇다면 이미 행했다는 사건은 남고,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지근지근 밟힌 죄인이라면, 그러면 그 사건, 내가 어떤 행동, 물을 마시는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그것을 누가 유발하신 거예요? 누가 그렇게 일으킨 겁니까? 누가 일으킨 거예요? 성령이 일으켰잖아요. 성령이 일으켜서 하시는 사건 속에는 두 개의 작업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의 하는 모든 행함과 자기 의를 파괴시키는 작업.
그리고 그 작업이 곧 주님께서 너를 구원, 구출, 탈출시키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그들에게 새겨서
, 성도로 하여금 “주여, 어떻게 나에게 이런 좋은 때가 이렇게 찾아올 줄을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감사가 나와요. 

  

자, 성령의 일을 정리해봅시다. 성령은 파괴를 통해서 뭘 유도한다? 감사를 유발한다. 감사고, 찬양이고, 뭐 그렇게 되죠. 감사가 나오도록 그렇게 작용할 때 성령의 일입니다. 파괴 없는 감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그 감사는 조작된 감사죠.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성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는 조작된 거죠. 

  

내가 성도된 것이 기쁜 게 아니고, 주께서 자신의 구원의 일을 아무것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나에게 그 일을 벌이셨다는 것, 그게 감사다 이 말이죠. 아까 것을 다시 해봅시다. 뭐 늦게 오신 분도 계시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죠. 아까 한 것 그대로입니다.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시는데 가만히 있으면서 살아계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뭐 일을 하시죠. 그럼 묻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지금 제가 왜 묻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우리는 누가 살아있다고 의식을 하느냐 하면, 우리 인식 속에, 우리 의식 속에, 인식이라는 말은 안다는 뜻이에요. 우리 인식 속에 누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돼버리면, 누가 죽습니까? 누가 이렇게 희미해져버려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이 희미해지죠. 

  

그럼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희미해졌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이것만 강하게 느껴지니까, 내가 살아있는 이상 내가 행동을 하게 되면, 나만 바빠요. 우리는 하루하루일이 되게 많아요. 많아도 너무 많아요. 일을 너무 많이 해요. 일을 너무 많이 하는데 기대한 결과가 안 나올 때는 그걸 누구한테 원망을 합니까? 따지기를 누구한테 따져요? 뭐 동사무소 직원보고 따집니까? 안 그러면 쇼핑센터 안내 창구에 있는 여직원한테 따집니까? 시비 걸어가지고 자기 울분을 거기에다가 푸는 겁니까? 

  

어쨌든 간에 울분을 누구한테 풀잖아요? 울분을. 내 인생 올해 이렇게 망할 줄 몰랐다든지,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살 줄 몰랐다든지,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못 삽니까? 라고 하는데, 여러분 평범하게 사는 이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평범한 것을 자기가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진보로 나아가야지 자기 평범한 것을 자기가 용서하지 않아요. 애걔 이 정도야? 이래가지고 평범한 자기를 자기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 속에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어쨌든 간에 왜 남들처럼 그렇게 하하! 호호! 웃지 못하고, 일해도 힘들고 집에 와도 꾸벅꾸벅 졸고 힘들고, 진짜 김종환의 노래가사처럼, 나 왜 이리 살아야 되지? 당신의 사진을 보면서 나 언제 만나는데, 나 언제까지 살아야 되는데, 제목도 뭐라고 되어 있어요? 존재의 이유죠.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당신 때문에 산다는 겁니다. 당신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어디 주님 만나고 싶어서, 주님 보고 싶어서 그런 노래를 합니까?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꼭 노래를 불러야 되겠어요? 남자들이 술 먹고 눈물 흘리면서 그 노래를 부르잖아요. 취직되나 안 되나 관계없이. 

  

인간 속에 복잡한 일상생활이 배선처럼 깔려있습니다. 여러분, 야구공을 뜯어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잡한 실이 뭉쳐져 있어요. 표면은 매끈한데 야구공이 뜯어져서 보게 되면 실 뭉탱이(묶음을 의미하는 강원도 사투리)가 복잡한 인간의 내장처럼, 곱창처럼 얽히고설킨 거예요. 인간의 모든 생활이 온갖 것으로 얽히고설켰습니다. 그 얽히고설킨 것이 하나의 목적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살아야 돼! 살아야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암 더 살아야 되고말고. 왜 살아야 되는데? 나는 살만하니까. 나는 지금 죽기 싫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자기만 생각할 때, 결론은 버킹검(1980년대 tv남성 옷 브랜드 광고. 고민하지 말고 그 브랜드 옷을 입어라. 답은 하나라는 뜻)이죠. 결국은 이거에요. 나는 살아야하니까 나는 살아야 돼. 남이 죽든 말든. 오늘도 힘들지만, 아니꼽고 더럽지만, 메스껍지만 살기 위해서 나는 참아야 하느니라. 옛날 가부장 집안의 남자들이 시집간 딸이 울면서 친정에 오니까, 말해주는 그 내용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에 나와 있어요. 참아야 하느니라. 그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거예요. 요새는 바뀌어서 반대가 되어 남자가 찔찔 울고 오니까, 참아야 하느니라. 그게 남자의 일생이니라.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남자가 울어도 너~무 길게 울어요. 슬퍼도 너~무 슬퍼요. 남자의 운명이. 옛날 여자가 그랬거든요.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래 불러요. 

  

참는 그것은 여전히 자기 의를 계속 사수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의는 인간이 의를 생산해내는 그것만이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자기 의를, 나한테 이런 의가 있다는 그것을 이중삼중으로 자물쇠 채워서 보물처럼 고이고이, 비밀번호까지 만들어서 잠가놓고 안 가르쳐주면서 그걸 견디는 거예요. 그걸 이겨내는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그게 인생이에요. 

  

뭐 남 도와준다고요? 도와주기?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남한테 배려를 하고 양보하기? 그런 것 전부 다 자기 의로 보상되는데. 아내사랑하기?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사랑이에요? 지금 자기 사랑이 확고한데 남 줄 사랑이 어디에 있어요. 자기 사랑이 전부인데. 인심 쓴다고 그게 뭐 사랑입니까? 나중에 해준 만큼 내놓아야 돼. 이거죠.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행함의 의로움을 못 벗어나요. 

  

그래서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구원이 안 돼요. 열두 제자가 구원이 안 된 이유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스데반 집사님 보세요. 성령이 왔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 길게 하면 지루하니까 빨리 갑시다. 성령이 오니까 스데반 집사가 하는 고백이 뭡니까? “주여 왜 죽이십니까?”라고 이래 나왔어요? “와우!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주여, 어서 이 고물, 쓰레기 같은 이 영혼을 받아주세요. 받아주시고, 저들의 영혼을 너무 벌하지 마소서. 용서해주소서.” 왜? 자기나 그들이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내가 맞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고, 사실은 똑같은데 일방적으로 나를 빼내 준 거예요. 나의 어떤 행위도 보지 않고. 어떤 행함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빼낼 때, 빼낸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근거에 준한 성령이 임했거든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뭘 보느냐 하면 자기 십자가에 예수님의 피를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피가 유일한 근원이고 다른 근원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더 보탤 필요도 없어요. 오직 피 뿐이에요. 피 뿐. 이게 결론이고 이게 정답이고 이게 답입니다. 오직 피 입니다. 

  

근데 피를 믿어버리면 안 돼요. 피를 믿어버리면 피 믿는 것이 나의 의에 누적이 되고 마일리지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피는 우리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피 앞에서 나의 모든 의가 날마다 이게 다 파괴되는 용도로써 능력이 임하는 겁니다. 나의 의가. 나의 잘난 의가. 주님께서 “오늘도 니 무슨 잘한 일 했노?”라고 하면, “주여, 죄만 지었습니다.” “니 복음 전파 했잖아?” “주여, 그것도 죕니다.”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하면 행여나 피만 정답인데 거기다가 초칠까봐. 피 앞에 뭔가 얼쩡거릴까봐. “그러면 니 의가 있나?” “제 의가 있을 수가 없죠.” “주께서 다 깨셨잖아요.” “뭐, 의로운 것이 없으면 더 안 살아도 되지?” “그럼요. 안 살아도 되죠.” “내일 모레 딸 결혼식인데?” “아이고, 뭐 지가 알아서 하겠죠. 아버지가 뭐 꼭 손잡고 들어가야 됩니까?” 

  

“일주일 뒤에 니가 여행 가려고 모은 곗돈 타는 날인데?” “아이고, 여행 가봤자 죄만 짓는데 안 가도 됩니다.” “그럼, 오늘 밤에 니 영혼 데려갈까?” “아이고, 뭐 그때 데려가지 마시고 지금 데려가시면 안 됩니까? 지금요?” “니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주께서 그런 마음 넣어주셨잖아요. 내가 환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요.” 내가 환장한 것이 되면 내 의가 돼버려요. 

  

주께서 그런 마음 줘놓고, 다시 말하면 베드로이야기죠. “주께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님이 사랑을 집어넣었잖아요. 왜 저한테 묻습니까?” 집어넣으신 분이 예수님이면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이 집어넣은 것이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사랑의 전자 팔찌라고 합니다. 사랑의 전자 팔찌. 

  

제가 그걸 가지고 지난 오후 설교에 예수님의 만년필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만년필이라고 한 것이 기억납니까? 만년필이 기억이 안 나면 볼펜은 기억납니까? 우리는 주님의 볼펜이에요. 쓰는 대로 색깔이 나오는 펜인 겁니다. 뭐 줄줄 나오죠. 쭈쭈바처럼 까고 하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나를 파괴하는 그 능력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 전하면서 남은 그 복음 듣고 구원 받고 복음 전한 나는 파괴당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예요. 

  

복음 전하고 복음 전한 내가 살아있으면 나만 지옥 가죠. 안 되잖아요. 복음 전하면서 나도 깨지고. “아이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여! 앉은뱅이를 낫게 하다니요!” “무슨 소리입니까? 누굴 망치려고 하는 소리입니까? 나의 경건으로 한 게 아닙니다. 나의 열심이 한 게 아니에요. 왜 멀쩡한 사람 지옥 보내려고 그런 소리합니까? 이거는 주님의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했지, 내가 그래서 내가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주의 믿음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잖아요. 지금 주님이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것만 보이지만 이거는 오해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요. 우리가 살아있어도 그건 신경 쓰지 마시고 주님이 살아있어서 일으키신 겁니다.” 

  

베드로 요한이 전도를 하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어서, 있으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진짜 믿는다면 교체를 해야 돼요. 베드로 요한이 뭐, 뭐, 뭐 작업을 걸었는데, 그럼 저 사람들이 작업을 걸어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구나! 라는 이걸 바로 뜯어고쳐야 돼요. 베드로와 요한의 설명을 듣고. “아, 내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저 사람이 병 나은 것과 거기에 참여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행함을 내가 연결시킨 이 연결이 잘못된 연결이었구나. 이렇게 연결시켜서는 안 되는구나. 나는 사람이 나서서 걷게 한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잘못 오해했구나.”라는 기회를 베드로와 요한이 전파할 때, 그게 바로 베드로와 요한의 전도순간입니다.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이 전도의 순간이 아니고, 낫게 하는 그 행위, 모든 것을 규합해서 오직 그리스도만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아이고, 전도하기가 하여튼 참 복잡해. 되게 복잡해요. 

  

다시, 본문 디도서 3장 5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 다음에 뭡니까? 오직 그의 긍휼하심이죠. 자, 긍휼하심인데 긍휼하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강의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이 강의가 어려워서. 자, 아까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의 행동은 다 다르다고 했죠. 마치 전자제품의 배선처럼 복잡하잖아요. 

  

근데 아무리 인간의 행동이 복잡해도 성경에서는 그걸 한 묶음으로 묶는다고 했죠. 그 묶은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여러 번 했는데 답변 해보세요. 그걸 묶으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의가 되죠. 자기 의가. 자,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아무리 니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행동들을 하더라도 그걸 묶어버리면 결국 자기 의라고, 이렇게 뭉쳐지는 거예요. 

  

자,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파괴하실 때, 파괴해야 구원이 되니까, 구원을 할 때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저쪽에는 자기 의로 뭉쳐지잖아요. 근데 주님의 성령은 뭉쳐진 자기 의에다가 뭘 덮어버리게 되느냐 하면 긍휼이라는 통합개념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주께서 구원하는 것은, 그 짓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복잡한 일을 해서, 또는 나는 자기 의입니다, 나는 못됐습니다, 라고 회개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뭐로 구원받아요? 

  

회개하는 것도 자기 의니까. 회개하는 것도 안 돼요. 그럼 뭡니까? 하나님의 긍휼로, 불쌍히 여김으로 구원해주는 겁니다. 그럼 불쌍히 여겨 줄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쌍히 여김이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불쌍히 여김이 근거가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증거가 아니고, 인간구원론이 돼버려요. 

  

이게 또 무슨 어려운 말이냐 하는데, 이렇습니다. 지금 하나하나가 진짜 어려워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설교 할 때 거의 백퍼센트, 전부 다 인간구원론으로 빠져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론으로 빠진다고요. 인간의 의로운 행함이 아니고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죠.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이 “아, 나는 의로운 행동 없습니다. 나는 죄밖에 없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하고 무엇을 내세우는가 하면 긍휼을 내세워요. 그럼 이 사람의 관심사가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자기 살고 싶은 것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자기 살고 싶은 거죠. 그럼 자기 살고 싶은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닙니까? 자기 사랑이 맞죠. 그거는 구원론이다 이 말이죠. 그거는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정말 긍휼이 오게 되면, 나 긍휼로 구원받았다는 결과가 나오면 안 돼요. 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 일을 시켰잖아요.” 너무 중요해서 적어보겠습니다. 긍휼, 긍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일을 시켰잖아요.” 예를 들면 아까 이야기한 무슨 집사? 스데반집사.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자기가 맞아 죽는 것은 이게 자기가 거룩한 행동을 추가해서 한 것이다? 아니면 주께서 하신 일이다? 주께서 하신 일이죠. 왜냐하면 성령이 주의 일이거든요. 

  

성령은 자기 맘대로 못해요. 주께서 시켜서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와서 자기를 파괴시킬 때 뭘 봐야 돼요? 성령 보내신 누굴 봅니까? 또 우리는 주님을 바라봐야 돼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어요? 주님께서 살아있기에 그 다음에 누가 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기에 내가 살아있는 겁니다. 순서가 그렇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기에 주님이 살아있게 돼버리면 주님은 나의 시다바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뭘 도와드릴까요? 라고 하는 하나의 웨이터가 되는 거예요. 종이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내 구원이 목적이 돼버려요. 나는 주님의 은혜로, 긍휼로 오늘도 살았다, 이러면 내가 살아있는 것을 자랑질 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주께서 오늘 나를 살게 하셨잖아요? 그때 갈비 뜯으라고 해서 뜯었잖아요? 오늘 오후에. 진짜 오늘 오후가 아니에요. 점심 때 뭐 먹었느냐 하면 주꾸미볶음 먹었어요. 주께서 주꾸미볶음 먹도록 인도하셨잖아요? 저는 뭐 감사히 먹었을 뿐입니다. 이 감사가 나와야 돼요. 

  

내가 주꾸미볶음 먹을 때 하나도 안 흘렸어요. 나 참 착하죠? 이러면 안 되고. 주께서 하게 하셨잖아요. 주꾸미볶음 먹으라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서 배탈 나서 화장실에 가서 다 쏟아내게 주께서 하셨어요. 예를 든 겁니다. 제 배는 멀쩡해요. 주께서 하게 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모델, 스데반집사입니다. 그리고 그게 귀신도 알아주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그 귀신이 알아주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인생이 그거에요. 주께서 때렸잖아요. 강도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여행의 위험과... 심지어 광주리에서 탈출할 정도로. 

  

주께서 그런 모든 무대장치를, 세트를 다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딱 돌아서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주여 보란 듯이 저 살아야 되겠습니다. 갑자기 주님 살아있는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내 남편이 살고, 내 아내가 살고, 내가 내일 아침까지 무탈하게, 탈 없이, 옥색원피스 입고 비는 것. 버스 앞에 붙어 있는 두 손 모아 비는 소녀의 기도가 있죠. 위에서 광선이 쫙 비치고 옥색원피스 입고 무릎 굻고 비는 소녀의 기도처럼. 오늘도 무사히! 라는 글씨가 쓰여 있죠. 

  

옛날 버스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 어릴 때. 성구사에 가면 그런 그림이 있어요. 옥색원피스 입은 소녀 보면 알아요. 인물도 얼마나 이쁜지. 빛을 보면서 오늘도 무사히! 라는 이런 게 있어요. 오늘도 무사히, 라는 이게 주의 뜻입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죽이라고 했죠. 오늘도 무사히! 그게 아니죠. 주께서는 어디서 그런 더러운 버릇을 배워가지고 그런 것을 가지고 기도 하냐고 하실 겁니다. 

  

왜 살아야 하는데? 애가 어려서요. 아이고, 애가 니 애냐? 그동안 니가 살렸어? 애 핑계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자신이 이유도 모르는 채, 우리는 내가 나를 절대화시키는 이 자기 의가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내 안에 버티고 있는 겁니다. 생생하게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버티면서 온갖 성경구절을 가지고 자기한테 다 뒤집어씌우죠. 왜냐하면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장래의 낙을 보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누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그거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내가 잘 되는 거? 그게 예수님의 나라일까요? 내 나라일까요? 그거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잖아요. 분명히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된 것이지, 나를 위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 흔하고 하도 많이들은 이야기를 또 하려고 하니까, 제가 민망하고 제가 미안해서 이 말을 자주 못 하겠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중생의 씻음과,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의 뭐 하심으로?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는 것은, 새롭다는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를 우리가 눈치를 챘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알고 있습니까? 주님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을 주께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죠.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닥다리니까.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세상에서 그 모델을 찾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10분 쉬어야죠.

 이미아 (IP:122.♡.181.188)17-10-18 22:29 
서울의존강의20171013b 디도서3장5절(잃어버린 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 말 좀 들어주세요. 하여튼 말도 안 들어요.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마귀도 안다고요. 스데반 집사는 성령을 받은 정도가 아니고 충만했죠.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갖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그만큼 나름대로의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잃어버리지 않기’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끝까지 지켜서, 자기가 상실한다든지, 자기에 대해서 내가 뭐지? 라는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제일 무서워합니다. 제가 그 수요설교를 하면서 에서가 왜 야곱한테 화를 냈는가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에서가 야곱한테 화를 낸 이유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가인이 아벨에게 화를 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제사를 안 받아줘서 죽인 게 아닙니다. 자기 제사를 안 받아줬어도 가만히 있었어요. 괜찮았어요. 하나님께서 제사 안 받아줄 수도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뭐 이랬어요. 문제는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차등적인 대우를 받았고, 안 좋은 쪽으로 대우를 받았고, 그렇게 돼버리면 가인의 존재, 또는 에서의 존재가 아벨이나 야곱의 대해서 시다바리가 되는 거예요. 보조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나라 톱(TOP)배우가 있다고 하면, 뭐 어떤 배우가 있겠죠. 톱 배우가 어떤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자기는 주연 급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근데 어떤 생판 모르는 젊은 애를 뒷받침해주는 보조역할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당히 화가 나겠죠. 분노하겠죠. 만약에 우리 인생이 내가 중심이라고 어릴 때부터 철떡 같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중심에 있지 않고 다른 분을 이렇게 보조해야 되고, 다른 분의 존재를 알리는 존재로 엮어져있다면, 쉽게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 의욕이 없겠죠. 

  

그래서 맨날 노래에 보면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누가 뭐 가져가는지, 뺏어 가는지 모르겠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정신 바짝 차리자.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 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렸다, 또는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라고 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기분 나쁘죠. 줬다 뺏기는 기분. 처음부터 안 줬으면, 처음부터 휴대폰이 없었으면, 그렇게 애타지 않을 건데, 줬다 뺏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운전하고 오는데 길에 오만 원짜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오만 원짜리를 줍는다고 차를 급히 세우고 오만 원을 주워가지고 기분 좋게 오는데, 급정거해가지고 뒤에 차를 박아서 십만 원을 물어줬다. 기분 되게 나쁘죠. 공짜로 얻은 것은 그렇게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 공짜로 준다고 하니까. 

  

그런데 내가 공들여서, 내가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내가 더러운 짓거리를 해가면서 수십 년 찜해놓은 그 모든 성과를 잃어버렸을 때, 한 마디로 분노합니다. 데이트폭력이 거기서 일어나는 거예요.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가방사달라고 해서 가방 사줬어, 여행 경비 다 대줬어, 심지어 동생 학비 다 대줘,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이러려면 헤어져.” 딱 그 한 마디 하고 다른 남자 생겼다고 가버리면, 총이 있으면 쏴 죽여 버리고 싶은 거예요. 쏴 죽이고 싶어요. 

  

빼먹을 것 다 빼먹고,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이 뭐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이러려면 헤어지자해서 헤어져가지고 다른 오빠로 갈아타기. 그런 오빠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갈아타기 할 때에 그 남자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데이트 한 장소가 전부 다 추억이고, 왜 아련한 추억이 되느냐 하면, ‘올 가을에는 결혼하겠지. 저 여자를 내 것 만들 수 있겠지.’ 이것 때문에 진짜 공들이고 공들인 거예요. 그걸 잃어버렸을 때에, 그리고 그 여자를 뺏어간 것이 하필이면 자기의 친구라고 할 때에, 자기 친구가 한방에 반해가지고 뺏어갈 때에 니 죽고 나 죽자죠. 죽이려고 덤벼들죠. 격분이고 분노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렇게 격분했습니까? 예수님이 뭐 나쁜 짓 안 했잖아요? 왜 죽입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과 모든 정신과 모든 순수한 마음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래요. 경건함, 거룩함, 공들였던 그 모든 정성과 그 헌신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져버렸어요. 

  

너희들이 하는 그 모든 것이 너희들이 보는 이 소경보다도 못해. 차라리 이 소경이 구원 받아. 너희들이 그렇게 지적질 하는 그 창녀, 그리고 바람피우다 현장에서 걸린 그 창기, 바람피운 아줌마, 그들보다 너희들이 더 못해. 내가 이런 여자 일방적으로 긍휼로 용서해버린다. 자, 이것이 너희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액션, 유일한 행위다. 믿을래? 말래? 죽여 버립니다. 믿을래, 말래가 아닙니다. 그런 인간 아주 없애죠. 없앨 때 주님께서 없애줬다 이 말이죠. 

  

뭐 지갑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에요. 휴대폰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에요. 선물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공들였던 자식이 세월호 물에 빠진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뭘 잃어버렸어요?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의 목숨과 생명을 우리가 같이 사는 세상,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이 세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대처방법은 “그래, 잃을게.” 이게 대처방법이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했습니다. 

  

그 주님이 받은 성령하고 우리가 받은 성령하고 같은 성령일까요? 다른 성령일까요? 똑같은 성령이죠. 그 성령이 우리한테 임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뭘 확인해야 됩니까? 나는 날마다 잃어버림 된 자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야 되죠. 자, 뭘 잃어버렸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늙어죽어 가는 이것은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고. 아까 이야기했죠. 뭘 잃어버린다? 자기 의를, 자기 공로, 자기 헌신, 자기 위신과 체면과 명예를, 자기 의의 3종 세트입니다. 그게. 위신과 명예와 체면. 

  

이걸 개망신 당하면서 잃어버릴 때에, “주여, 옳소이다. 제가 바로 개입니다.” 오늘 제목은 “개.” “제가 개입니다.” 여러분, 12년 동안 병들었다, 하나님한테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원망하는 것이 당연해요. 남들은 다 저런데, 왜 나는 허리 꼬부라지는 병, 귀신들린 병이 들었습니까? 왜 내 턱에서는 종양이 이빨을 뚫고 나옵니까? 이런 것처럼. 왜 내 딸도 나처럼 똑같이 유전이 됐습니까? 그렇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하나님 앞에 원망을 했습니까? 원망했어요? “니 개잖아?”라고 하니까, 그럴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오늘 제목입니다. 이 제목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적어놔야 해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크게 쓸게요. “옳소이다.” 

  

고린도후서 1장 18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니 왜 죄 졌어?” “주께서 니 죄인이니까 죄 지으라고 그렇게 하셨잖아요.” “니 왜 귀신들렸어?” “주께서 귀신들리게 하셨잖아요.” “니 왜 개야?” “주께서 개라는 규정을 하셨잖아요.” 옳소이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잘난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 죄인이라는 개념에 합치되는 그 개념을 그 수로보니게 여자는 그걸 자기 안에 품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 이만한 덩어리가 들어있는 믿음은 이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없다.” 세상에!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 제목은 옳소이다. 내 인생이 어떻게 꼬였든 간에 옳소이다. 잘하셨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내가 했으면 잘 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사건, 그 사건에 휘말리도록 창세전부터 조치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한테 그런 아이디어가 어떻게 생깁니까? 라고 또 묻고 싶죠. 그 아이디어 만들어서 뭐 할 건데요? 그 아이디어 또 써먹게요? 그런 아이디어는 주께서 주셔야 되는 것이지, 멋지고 근사하다고 우리가 그걸 내 속에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옳소이다, 라는 것은 결과성이거든요. 내가 옳소이다, 하면 구원 받겠지, 그게 아니라 주의 구원의 여파가 그렇게 된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요새 손녀랑 논다고 동요도 부르는데, 업무가 더 늘어났습니다. 숲속에 연못이 있어요. 연못이 있는데, 옥색원피스를 입은 사람, 투피스는 안 돼요. 원피스이어야 해요. 그래야 스타일이사니까. 원피스를 입은, 그야말로 여신 같이 생긴 여자가, “아! 곱다. 연못.”하면서 신발을 벗고 연못에 한쪽 발을 담갔어요. 숲속에는 아무도 없어요. 새소리만 짹짹 들릴 뿐 아주 고요한데, 발을 하나 연못에 담갔어요. 그런데 발을 담그는 순간, 뭔가 파장이, 자기 발은 작으니까 작은 파장이 있겠죠. 근데 뭔가 큰 파장이 이미 자기한테 도달된 것을 물에 들어가니까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물속에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뭐냐,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고, 중심에서 파급된 파장을 자기가 연못에 발을 넣는 순간 그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발을 담근 그 연못의 작은 파장을 보고 옳소이다, 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주님이 유발한 그 파장을 보고 옳소이다, 라고 하겠어요? 주님이 유발한 파장을 보고 아, 이 세상은 주님이 먼저 접수하고 점령했구나! 나는 뭘 보려고 했는데요? 내가 원피스 입고 발을 담근 것은 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내가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근데 그 모습이 뭐냐, 나도 모르게 마귀가 유포해놓은, 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은 내 하는 행동여하에 따라서 즐거움으로 나한테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 사고방식으로 꽉 차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미 주님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여파를 일으켰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세상만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벌이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아까 말한 “옳소이다.”에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병든 사람 많고 장애자들이 많아요. 그래서 많이 도와주고, 자기는 도와준 것으로 외제차 타고 돌아다니고 했다 이 말이죠. 제가 사전에 도와주지 말라고 설교시간에 많이 했죠. 도와주지 마세요. 미안해하지도 말고. 인간은 도와준 만큼 마치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느냐, 뺏겨버리세요. 뺏기면 돼요. 

  

산상설교에서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한 이게 뺏기는 것이지 그냥 주는 겁니까?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한 이게 협박당한 것이지 이게 가는 거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힘 있는 자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어두운 세상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덩달아서 거기에 나도 작으나마 내 힘 가지고 버티려고 하지 마시고,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힘없어.” 그냥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거예요. 이게 주일 낮 설교에 그게 나와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주여 이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기도할 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됐네. 이 사람아!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지금 사도야! 니가 니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니가 지금 건의할 입장이 아니야.” 

  

다시 말해서 연못에 발을 넣을 때, 지금 원피스 젖지 않게 해달라고 신경 쓰면 안 돼요. 이미 연못은 누가 점령했어요? 예수님이 점령했는데, 자기는 거기에 지금 합류된 것뿐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하고, 이걸 세례라 하고,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행함을 믿지 않는 겁니다. 주께서 벌여놓은 일 속에 내가 일부라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이래 제가 설명하니까, 그럼 목사님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데, 찾지 마세요. 만약에 이 세상에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있지만, 그 사람 붙들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 그 말이 하나의 유혹이 되어서 자기 잘난 체하고 다녀요. 내가 또 사람에게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서, 칭찬을 해가지고 그 사람을 물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그런 소리를 제가 많이 들어요. 십자가마을에서 제가 믿음을 칭찬하잖아요. 그럼 벌써 광주에서 전화 옵니다. “목사님, 누구하나 또 칭찬해서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 물에 빠트리는군요.” 서울에 누구누구 글도 잘 쓰고 하면, 띠리리릭 전화 와가지고, “그러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금 글 잘 쓴 것 자랑하고 있는데 자꾸 목사님까지 부추기면 시험 듭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은 안 하겠어요.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주께서 하신 일만. 근데 처음부터 그렇게 안 돼요. 우리는 꼭 옥색원피스 입고 발을 담그고 싶어요. 그래서 나의 아름다운 발을 내가 감상하고 싶어요. 내 인생에 내가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참 나는 예쁘게 살고 착하게 살았다는 그런 보람을 주여 허락하옵소서. 내가 나에 대해 감상에 빠져서 행복해하는 이런 보람정도는 주께서 좀 누리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게, 참 우리의 연약함이죠. 

  

소박하나마 그거마저 허락이 안 됩니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는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자가 돼버린다. 주님은 잃어버린 자의 길로 가는데 너는 유지하는 길로 가려고 한다면 주님이 가는 그 노선이 아니라 전라선호남선경부선, 지금 엉뚱하게 버스 잘못 탄 거예요. 운전사가 주님인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뒤돌아봤는데 이건 완전히 뭐 애나벨인지 인형이 히히히~ 하고 있어요. 악마가 “차 잘못 탔다. 가자 우리 집으로!” “어! 안 되는데??” “허허허~” 

  

자기 의를 왜 갖고 있어요? 왜 그래요? 자기 의를 자꾸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 ‘내가 나쁜 짓 안 해야지. 착한 인간을 유지해야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예수님의 피를 모독해도 그렇게 크게 모독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나쁜 짓해도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은 없습니다. 제가 마음먹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마음 다지고 아예 단언하듯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장 나쁜 사람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악마와 가장 근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보고 니그(너희의 전남방언) 애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간음했습니까? 살인했어요? 안 했죠. 모범보인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모범보인다고. 스스로 자기들은 채찍질하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모델 삼았어요. 나도 언제 말씀연구해서 저렇게 경건하게 사느냐? 자기 아들 죽인 자를 용서해서 양자로 삼고. 아이고, 나도 언제 저렇게... 

  

참, 아예 마귀를 닮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마귀추종자가 되세요. 아이고, 어떻게 문둥병자가 씻은 물을 마실 수가 있느냐? 세상에! 낮아져도 저렇게 낮아질 수가 있는가?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고... 뭐 몽골에 가서 낮추고 한국에 가서 낮추고 난리도 아니에요. 세월호로 애들 죽고 나서 보상 나온 것을 교회에다가 감사헌금내고...언제 저런 믿음을 본받나? 아예 놀고 있어요. 놀고. 나라에서 준 돈 가지고 맛있는 거 사먹지, 그거 왜 내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의를 못 키워서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한 거예요. 그렇게 환장하면 소는 누가 키워요? 도대체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누군지를. 어느 정도 개판인지를 몰라요. 존재자체가 십자가 피를 가립니다. 존재자체가. 태어난 어린 외손녀부터 시작해서 태어나서부터 모든 집안중심은 자기중심으로 다 돌아가 버려요. 제가 설교준비하고 있으면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겨요. 자기 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온 식구들 다 앉힙니다. 식구라고 해봤자 네 식구 밖에는 안 되지만. 내가 노는 것을 보라 이 말입니다. 이기주의. 못난 놈. 

  

왜 내가 유명해야 됩니까? 근거 있어요? 세상에! 이 쓰레기까지 유명해지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자꾸 있음을 상정하고, 이런 장치를 자꾸 설정하니까 이왕 있는 것 유명해지고, 이왕 있는 것 재벌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여튼 상견례 보면 가관이라 가관. 상견례 마치고 나면 우황청심환 하나씩 먹어야 돼요. 아이고, 경우도 왜 그렇게 경우가 바른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족속으로서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악마의 일이 궁금하거든 자기가 스스로 설정해놓은 금지의 법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한번 보세요. 제가 설교할 때 살인죄에 대해서 예를 들었죠. 사람을 내가 미워는 하지만 욕은 안 했다. 욱해서 욕을 했지만 죽이지는 안 했다. 때리지는 안 했다. 때리기는 했지만 내가 얼마나 착한지 죽이기까지는 목을 안 졸랐다. 목을 졸랐는데 두 손으로는 안 조르고 한 손으로 졸랐다. 계속해서 끝까지 그 선은 안 넘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양심이 살아있는, 일말의 의로운, 막 가는 인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여, 저는 죽이면 안 됩니다. 저를 죄인이라고 너무 내치시면 안 됩니다. 

  

몇 주 전에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경계선, 라인ilne싸움이 벌어진다고 했죠. 악마는 선과 악 사이에 라인을 그었어요. 선/악 주님은 선악과와 없음 사이에 줄을 그어버려요. 선악과/없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잘난 체를 하죠. 그래도 이왕 아는 선, 악은 버리고 선은 행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래 나와요. 모든 율법과 성경을 악마가 세운 그 기준에 준해서 지키니까, 그 지키라고 부추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누구의 앞잡이에요? 누구의 아들입니까? 악마의 아들이잖아요. 

  

악마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악마의 아들들은 이건 뭐 많다 정도가 아니죠. 다죠. 다. 거의 다죠. 교회가 전부 다 악마의 아들들이에요. 자기 깨지려고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를 밟아주세요.” 이것 때문에 교회 가는 것이 아니죠. “내 죄를 노출시켜주세요.” 이것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죠.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그게 내가 유명할까봐 두려운 게 아닙니다. 내가 안 유명하고 사람들한테 욕 얻어먹을까봐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외제차 타고 다니는 거예요. 외제차. 뭐 있어보일라고. 그래서 추석 지나고 백화점에는 아줌마들로 인해서 호황입니다. 고생한 자기에 대한 자기보상. ‘에이, 성질나서 오늘 옷 하나 확 사 입어버린다. 겨울 외투 확 사 입어버릴 거야.’ 자기에 대한 자기보상. 고생한 나여! 떠나라! 바닷가로. 제주도 푸른 밤. 이제는 떠나요~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으로 가죠. 가가지고 효리네 민박집에 민폐나 끼치고. 하여튼... 

  

인간 돌아가는 모든 배선들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키우기 위해서, 광내고 빛내기 위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모양새를 모델로 삼아서 이것 베끼고 저것 베끼고, 4차 산업이고 뭐고 관계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데 일가견이 있어요. 아예 타고 났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데에 있어서. 

  

주님은 이 땅에서 “나는 잃어버렸다. 콜!” 이러시는데, 우리는 “으응~ 혼자 잃어버리세요. 나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나는 살리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살리니까 콩고물에 달라붙듯이 일곱 마귀가, 귀신이, 아니 칠십 귀신이, 모든 귀신이 다 달려듭니다. “겁나지? 무섭지? 이런 짓 했으니까?” “아니야. 나는 복음 안다.”라고 해도,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다고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주께서 하라고 했잖아요. 이런 짓 한 게 주의 사랑이잖아요. 주께서 사랑한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그 말을 할 때 자기를 봅니까? 주님을 봅니까? 주님을 보죠. 왜? 자기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할 때, 본인이 보기에도 자기는 인간도 아니고 버려졌으니까. 

  

가룟 유다가 자살했습니다. 왜 자살했습니까?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살이라는 장렬한 방식으로 인생을 끝내버렸어요. 더러운 소리 들어가면서, 배신자라는 소리 들어가면서, 나는 더는 살 용기가 없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본인 입장에서 구원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에 절망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구원에 절망해서 자살하면 구원해줍니까? 그런 것 없죠. 

  

근데 우리가 그 절망까지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한테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였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느 선에서 다시 출발해야 돼요? 가룟 유다의 절망에서 다시 봐야 해요.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욕하겠습니까? 욕 안 하겠습니까? 자기도 만만치 않거든요. 팔아먹은 인간이나 나는 모른다고 면전에서 깐 인간이나 똑같거든요. 베드로나 열 두 제자는 자기가 놓인 자리가 예수님에게 근접했던 그 자리가 아니고, 배신했던 그 자리가 처음부터 주께서 택한 본래의 자리라는 것을, 배신했을 때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때. 

  

자,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중간지점에서 인도하겠어요? 처음자리에서 인도하겠어요? 처음자리에서 인도하겠죠.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임할 때에 처음자리가 어디냐 하면 요단강에서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한 자리가 아닙니다. 아예 요단강 물속에 들어간 자리에요. 요단강 물속은 땟물이 흐른 자리, 인간의 죄가 흐르는 자리에요. 죄의 자리입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잖아요. “아니, 왜 이러십니까? 오히려 제가 세례 받아야죠. 주님이 왜 세례를 받습니까?” “아니야. 이로써 우리가 아버지의 의를 이루어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에 합류했어요. 죄인에 합류했죠. 그 결과가 뭡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이라도 죄인의 자리에 합류해버리면, 우리에게 주어진 합당한 조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잘나서 저주 안 받으려고 합니까? 뭐가 잘나서 안 잃어버리려고 합니까? 

  

안 잃어버려야 된다는 근거가 있어요? 뭐, 생전에 조심했다고요? 살인 안 하기 위해서, 간음 안 하기 위해서요? 욕 안 하기 위해서요? 음란 안 하기 위해서요? 돈 욕심 안 내기 위해서요? 뭐 조심했다고요? 뭐 조심~? 참, 교회에서 사기 치는 사기 중에서 제일 나쁜 사기는 영혼가지고 장난치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조심히 살라고요? 참 이게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자기가 예수가 누군지 몰라요. 지금 인간의 윤리적인 그거 작업하고 있습니다. 

  

가락강의에서 유튜브 동영상에서 했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1장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지금 사도바울이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기발한 상품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뭡니까? 반대로 가죠. 사람에게 난 것이라야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어요. 사람이 예상한 것을 줘야 사람에게 먹힐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근데 사도바울은 뭐예요? 사도바울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설교한다고 합시다. 그럼 뭘 생각하겠습니까? 저 인간들이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제공하겠어요? 제공 안 하겠어요? 제공 안 하죠. 근데 인간이 뭘 원한다는 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복습 들어가 봅시다. 인간이 뭘 원하고 있습니까? 자기 의죠. 그럼 자기 의가 왜 필요하죠? 그래야 자기가 살만한 구실이 있으니까. 아직 죽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잘 났는데 왜 죽어야 돼? 안 되죠. 잘났으니까 더 살아야 되잖아요. 그 잘산다는 것은 자기 의가 그만큼 자기가 보기에 건전하죠.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목사가 교회 키우려고 하면 무슨 설교를 합니까? 그 의에 대해서 장려를 하는 설교를 하면 되겠죠.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근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사람을 기뻐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여러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나라가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 시청 앞 광장에 모입시다.”라고 새문안 교회 목사가 그런 소리 했다고 합시다. 했다 칩시다. 제가 많이 봐주는 거예요. 

  

“성도가 선지자 역할을 해야 됩니다. 이 어두운 세대에 우리가 앞장서서 예수님이 가신 희생적인 길로 가서 우리가 민주화를 외칩시다.” 이거 사람들이 기대한 거예요? 기대 안 한 거예요? 기대했죠. 만약에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건 마귀의 교회입니다. 쓸데없는 데 돈 많이 냈어. 돈 내지도 않겠지만. 제가 만약에 자칭 유명하다는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이 설교합니다. 이 설교해요. 안 불러줘서 문제지. 컴퓨터 조사해서 이단이라는 소리 듣고 있는 목산데 누가 불러줘요. 초청도 취소될 걸요. 

  

복음 전파의 책임자는 제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책임지라는 말을 할 잽도 못 되는 게, 날마다 죄만 짓고 있어요. 제가 죄인보고 책임지라는 소리를 안 합니다. 니나 똑바로 해! 이렇게 해요. 그래서 구원될 자가 구원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기여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그냥 사세요. 주의 일은 실패하거나 하자나는 법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자, 아까 한 것을 다시 들어가 봅시다. 주께서 살아있다. 그 다음 질문이 뭐였습니까? “주님은 살아있다.” “믿습니다.” 이러면 안 되죠. 그 다음에 뭐라고 질문했던가요? “살아있는데 어떻게 활동하며 살아 있느냐?” 이 문제를 딱 물으면 사람들이 답변을 못해요. “저는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심을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면서요?” “글쎄요?” “살아있다며?” 왜 글쎄요,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살아있다고 하늘로 올려 보내고, 평소의 모든 행함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본인이 살아있는, 본인의 일을 하다보니까 지금 주의 일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조차 없어요. 자기 일에 바빠 가지고.

  

그럼 주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히브리서 1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성령이 나와요.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의 법, 십계명 잘 알잖아요. 모세의 법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물어봅니다. 모세의 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위해서 준 겁니까? 죄를 더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준 겁니까? 죄를 더욱 죄 되게 해서, 인간 중에서 몇 명 저주받게 하는 겁니까? 모든 인간을 다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겁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저주아래 있게 하죠. 저주아래 있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어요. 저주에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예수님께 저주했는데, 아버지로 인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살아나게 했잖아요. 일단은 어디로 간다? 아버지께 저주받은 자리가 우리의 자리에요. 잃어버려야 합니다. 스마트 폰 그 잃어버린 것 한탄하지 말고,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 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그 스마트 폰을 쥐고 있는 나 자체의 목숨을 강도한테 잃어버려도 우리는 한탄할 그런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어요. 

  

졸음운전해서 차 박아서 멀쩡한 내 아내가 죽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잃어버릴 자가 아내였어요. 제 이야기가 참 비정하죠. 자기는 자기 아내가 안 죽어봐서 그렇다고 하는데, 안 죽어 보고 죽어보고 간에 그 문제가 아니고, 어떤 표준적 사건은 내가 한 어떤 경험이 표준적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든”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모든 행함의 모델은 뭐냐, 십자가에 죽으심,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 하는 그게 모델이 아니에요.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어떻게 유혹을 이기고 하는 그것은 모델이 아니라니까요.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도는 그 십자가 증거 하라고 모든 일들을 주께서는 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게 하셨다는 것이 의로운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하시게 하는 행동을 하게 하신 거예요. 그게 모세법이에요. 

  

근데 그게 모세법인데, 모세법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죠. 율법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죠. 그 율법의 완성은 저주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 저주가 그냥 말로만 저주가 아니고, 이게 역사 속에 실제로 사건화 되었어요. 모세법의 저주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어딥니까? 바로 십자가의 저주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오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오해했는데, 신약에 보니까 그게 인간보고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향하여 그 모든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인간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이 세상 모든 죄 때문에 죽으신 거잖아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살아도 몽땅 다 저주받은 자 맞다는 이 사실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지가 어떻게 살든, 어떻게 시험과 유혹을 이기든 관계없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모든 사람은 저주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인간은 늙어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근심걱정이 늘 수시로 들죠. 그 근심걱정을 해결할 때 어떤 걸 사용하십니까? 내가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된다, 무슨 일 하나 사고를 쳤는데 들키면 나는 경찰서에 간다, 이럴 때 두려움이죠. 걱정근심이죠. 이럴 때 보통 이럽니다.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거다. 하나님께서 무마시켜주실 거다.’ 이런 식으로. 그러면 뭐 한결 기분이 나아지십니까? 방법을 알려드려요? 

  

벌써 열 번이나 했는데 또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그 일을 누가 하게 했느냐? 누가? 내가 하게 했습니까?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죠. 사람이 발로 걷는데도 수 십 가지의 근육이 동원되듯이 어떤 일을 하는데도 주의 뜻이 다 동원됩니다. 이 땅은 숲속의 연못이에요. 내가 무슨 파장을 일으켜도, 무슨 말썽을 일으켜도 이미 그 파장에 더 큰 파도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나와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뭐였다? 이 세상은 저주받아도 합당하다는 그 물결이 나한테 덮친 거예요.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 왜 마치 저주 안 받아야 되는 것처럼, 자기 분수도 모르고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을 하느냐 말이죠. ‘나같이 깨끗한 사람이 죄졌구나.’ 왜 자기를 깨끗하게 생각을 합니까? ‘이런 일만 없으면 나는 훌륭한데...’ 이런 일만 없었으면 훌륭하다는 것을 전제로 왜 깔아요? 그것 깔아놓고 복음 전하면 그거 사기꾼이에요.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좋은 것 골라가지고 지금보다 더 괜찮은, 향상된 자아로 바꾸려고 하는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 좀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뭐한다고 했습니까? 파괴죠. 파괴하시는 성령. 반응을 보니까 제목을 바꿔야겠어요. 우리를 파괴하시는 겁니다. 파괴하시면 걱정근심도 파괴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파괴되죠. 그 파괴된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옳소이다. 제목 또 바꿔야 되겠어요. 

  

아예 12년 동안 병들었는데 “옳소이다.” 하는 거예요. 남들은 멀쩡하고 자기 혼자 귀신들렸는데 잘했다는 거예요. “니 개 아니가?” “옳소이다. 개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렇게 시인할까요? 그 12년 동안 병든 그 여인이 근심이 있겠어요? 걱정이 있겠어요? 망가져도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는데?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아지기까지 낮아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죽했으면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았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길을 가도 성공 못한다는 두 가지 사실이 그 말씀 속에 담겨있습니다.

모든 인간도 “주여! 봐주세요.”라고 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걸 한다고 해도 그걸 이겨낼 사람은 예수님 본인 말고는 없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인간 중에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하루에 몇 번 외우십니까? 외우고 뭐고 간에, “목사님 그 말씀 오랜만에 듣네요. 아, 그런 구절이 있었구나.”라고 하겠죠. 평소에 뭐냐, 근심걱정뿐이에요. 주여, 봐주세요. 그저 봐주세요. 옛날에 헌금 많이 했잖아요. 봐주세요. 옛날에 봉사 많이 했잖아요. 봐주세요. 걱정근심 훅 지나가게 하옵소서. 저 더 살아야 돼요. 제 위신이 깎이기만 하면 저 자살할거예요. 한강에 예약해놨습니다. 이번 일만 들통 나면 저 물에 뛰어내릴 거예요. 이거 뭐 무슨 객기도 이런 객기가 다 있습니까? 그게 누구라고요? 가룟 유다에요. 그게 바로 자살한 김성수 목사에요. 

  

복음입니까? 복음이에요? 그 사람이 전한 게 복음 맞아요? 반박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보이죠.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구원욕구가 있었던 거예요. 주님처럼 우리가 잃어버린다는 자기 입장을 사람들은 강력하게 거부하게 돼요. 아예 안 되거든 가슴에 쓰세요. 잃어버린 자. 잃어버린 사람. 세 글자로 나 상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에요. 나 상실. 한예슬이 나오는 환상의 커플이라는. MBC에서 머리에 꽃 꽂고 나오는 거 있어요. 나 상실. 등신이다 이 말이에요. 12년도 아니고 50년, 60년 동안 귀신들렸다 이 말입니다. 귀신들렸는데, 근데 주님의 조치가 어떻다? “옳소이다!”에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어요. 이런 기적이. “나 등신인데 등신 잘 만들어놨습니다.” 이 말입니다. 옳소이다! 

  

여기 히브리서 10장에서 모세의 법의 완성이 피에요. 언약의 피. 옛날에는 성경보고 죄인인줄 알지만 지금은 뭘 봐요? 그거 가지고는 안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어요.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근데 그 피가 무슨 피냐, 우리를 저주되게 하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걸 인식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저주받는 것이 나한테 옳은 조치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언약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언약이 그 사람 속에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구원된 거예요. 

  

언약을 믿어주면, 십자가 믿어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김성수 그쪽에서 그런 이야기하고. 그게 아니고 언약이 그냥 흘러들어온 거예요. 언약이 흘러 들어온 거예요. 모르겠어요. 주께서 시켜서 자살했으면 저는 가룟 유다라고 봐요. 가룟 유다가 사탄에 의해서 했잖아요. 사탄은 누가 보냈습니까? 가룟 유다보고 니 할 일 하라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벌써 모든 숲속의 무브move는,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마귀조차도 누구 명령 듣는다? 예수님 말씀 듣는다고요. 

  

근데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했잖아요.”라고 하고,
예수의 피를 거부한 마귀들은 “마귀야 물러가라!” 이러고 있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교회에 와서 “사탄아 물러가라!” 무슨 뜻입니까?

“니가 바로 사탄이다.”

“예수님의 피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데,
사탄아 물러가라고 한다면 뭘 얻겠다는 것입니까?
옛날 전에처럼 빨리 회복해달라는 이 말 아닙니까?
괴기영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
회 안에서 찍으면 괴기영화가 돼요.
“주여, 왜 저에게 이런 일을? 하필이면 나에게?” 뭐 이래 나와요. 

  

피 입니다. 성령은 오직 피 이야기만 해요. 왜?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피만 이야기하겠다는 말은 피 앞에서 우리는 옳소이다, 라는 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아까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가 안 된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는 잃어버린 자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요. 행함 책에서 명단이 빠져있다면, 축하합니다! 행함 책에서 명단이 빠져있다는 것은 니가 어떤 일을 행해도 니 운명과 상관이 없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어떤 일을 행해도 니 이름은 생명책에 있다. 그럴 경우에 확실한 증거가 뭡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 주님의 언약의 피. 그럴 경우에 우리는 뭐냐 하면 “언약의 피를 인하여, 피를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의 성령께서 십자가를 알게 했습니다.”라는 고백. 그게 전부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것을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나의 잣대로 이것은 감사하지 않을 일, 이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구분하지 않게 하옵시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일으킨 일인 것을,
어떤 수모를 당해도 그것이 합당한 것인 것을,
합당한 조치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이기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