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강-고후 10장 9-13절(절대 기준)1707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0장 9-13절입니다. 신약성경 296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0:9-13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너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 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이 성경을 보면서 “아멘”하기가 참 거북스러워요. 얼른 한 번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두 번 세 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편지 내용이 서로 좋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자, 서로 위로하자, 서로 사랑하자, 라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협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협박하는 내용으로.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놀라게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런 걸 예상했다면 내가 그 예상한 것을 작살낼게.”라는 이런 식의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너희들이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협박적으로 들리고, 놀라운 일,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소리로 들리는 이유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네가 잘되기 위해서 네가 임의로 복음이라는 것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 복음을 그런 식으로 재구성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든, 예수든, 성령이든, 어떤 개념이라도 다 나를 잘되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은 계실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나 사도바울이 예수님께 받은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너희들한테 협박이나 놀랄 수밖에 없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들을 내가 너희들에게 편지로 제시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서 너희들이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거든, 그것은 너희들 존재 자체가 유죄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을 상대할 때는요,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너 죄인 맞잖아.”라는 그런 선입감으로 복음을 전해요. 죄인이라고, 죄라고 제시하고 그 위에 복음을 얹어서, 하나님의 의를 얹어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달랑 가져가면 안 되고, 그 밑에 깔려있는, 쟁반처럼 깔려있는 그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네가 이렇게 죄인이기에 주께서는 이렇게 복음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죄인은, 왜 죄인이냐 하면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뭐든 간에 나 좋아라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바로 죄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내가, 믿는다는 이 행위로 말미암아 나중에 이득이 올 것이고 구원이 올 것이라는, 그 선입견 자체가 그게 바로 죄 아니고 뭐냐 이 말입니다. 그게. 그게 바로 죄니까 내가 아는 복음에 대해서 협박처럼 그렇게 들려진다는 거예요.
존재 자체가 유죄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자체가 유죄라는 것은, 이 안에 창세기 2장, 3장의 복음이 이미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조상은 한 사람인데,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우리에게 들어왔다는 거죠.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떤 사고방식이 깨지느냐 하면, “나는 혼자다.”라는 것이 깨져버려요. 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럼 혼자가 아니라면 누구와 함께 있느냐, 죄와 함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죄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걸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처리하게 되면, 악마와 함께 있어요. 악마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 알고 혼자 돼서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하는데, 친구들도 다 떨어졌다는데, 그것은 평소에 같이 살던 그 죄와 더불어 있다가 주님께서 그 죄와 떨어지게 하니까, 옛날 놀던 가락이 제 솜씨를 발휘 못하니까 심심한 거예요. 짜증을 부리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고, 죄가 부리는 대로 죄를 부릴 수밖에 없어요.
이런 모습을, 이런 사실을 오늘날 로봇산업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로봇산업은 그 뒤에 소켓socket(전기 배선용 기구의 하나)이 하나 꽂혀있어요. 미국의 어떤 미군부대에서 실험을 했는데, 우울증 걸린 사람에게 칩을 하나 심어줬습니다. 머리에 칩을 심어줘서 우울증을 낫게 했어요. 그런데 나은지 한 6개월쯤 됐을 때 우울증이 다시 재발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기도원에서 기도한다든지 해서, 목사님께 안수 받는다든지, 용한 권사한테 안수 받는다든지, 뭐 이렇게 스스로 도를 닦는다든지 했습니다만.....,
그래서 다시 병원에 갔죠.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해보니까, 이건 실제이야기입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에요. 가보니까 그 심어진 칩에 배터리가 다 됐어요. 배터리를 갈아주니까 우울증이 나았어요. 공황장애나 이런 것들이 다 나아버린 거예요. 그거는 뭐냐 하면 외부의 힘에 의해서 점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돌아온 겁니다. 뭐 교회 와서, 부흥회에 와서 박수치면서 은혜 받을 생각 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는 은혜 받고 싶으면 병원에 가서 약간의 수술만 해주면, 이건 365일 늘 은혜 받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예수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요? 그 믿음 병원에 가면, 허Her병원에 가면 수술해줍니다. 자기 고객이 원하는 대로 믿음, 소망, 사랑이 다 나오는 그런 시대가 올 겁니다. 조종만 하게 되면. 어차피 모든 게 두뇌문제기 때문에. 근데 이것은 결국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 뒤에 소켓이 꽂혀 있고 거기에 전원이 있다고 보면 돼요. 근데 그것이 나에게만 꽂혀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꽂혀있는데, 만약에 거기에다가 농약을 살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죽죠.
인공지능산업이라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그걸 염원해서 그쪽으로 온 에너지를 거기다가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미 아담 때부터 성경 속에 나와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배후에 있는 악마가 뒤에 소켓 꽂아서 전부 다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면 이성이 동원되고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충동은 인간의 이성으로 관리가 안 됩니다. 욱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공부를 했느냐, 어느 대학 나왔느냐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자기 딴에 스승을 모신다고 그렇게 모셨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나니까, 갑자기 욱하는 성질이 나왔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립니까? 이걸 사전에 어떻게 자제를 해요? 그 제자들 속에 가룟 유다가 있는데, 그 가룟 유다는 심사숙고해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 가룟 유다가 예수 팔아먹은 그 심사숙고를 우리가 개무시 하지 마세요. 얼마나 생각을 했겠어요? 그 사람이 그냥 욱해서 팔아먹은 것이 아니에요. 그걸 해놓고 얼마나 양심에 가책이 됐으면 자살까지 했겠어요? “내가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 말은 악마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메시아도 필요 없고요, 하나님도 필요 없어요. 다만 스승만 필요한 거예요. 스승. 내가 내 스승을 내 손으로 팔아먹었다고 해서 자살한 거예요. 나를 도와줄 스승만 필요한 거예요. 랍비만. “랍비여! 랍비요!”라고 하잖아요. 랍비만 필요한 거예요. 랍비만 필요해서, 더 이상 자기한테 그 랍비가 필요하지 않아서 팔아먹은 거예요. 그게 진짜인줄 알고 따라다니다가 너무나 낙담이 되니까 그 보상을 받기 위해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럼 신은 뭐냐, 본인이 신이에요. 모든 인간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원하는 게. 애와 함께 시장에 갔는데, 이것 사줘도 싫다, 저것 사줘도 싫다고 할 때, 그때 엄마가 묻는 것이 있어요. 도대체 뭘 원하느냐? 애들이 “나 저 장난감 갖고 싶어”라고 하는 것은, 그건 일종의 핑계입니다. 장난감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시시하다고 또 갖다가 버릴 것이니까. 그럼 애는 뭘 원해서 앙탈을 부리느냐 하면, 내가 지금 뭘 원하는지를 몰라서 앙탈을 부리는 거예요.
이게 애 뿐만이 아니고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꽃꽂이 했다가, 또 난蘭쳐봤다가, 뭐 온갖 취미란 취미는 다 하다가, 뭐 보석 만들기도 해봤다가, 교회 봉사도 해봤다가, 구역권찰도 맡아봤다가, 온갖 것을 교회에서 사회에서 다 해보지만, 그게 성이 안차고 마음에 안 차는 것이 뭐냐 하면,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리지 못한 그 정상만 계속 누적이 될 뿐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니가 원하는 것은 다 해봤잖아? 니가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봤잖아?”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옆에 사람이 볼 때 참 답답하죠.
애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줬는데,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제가 20여년을 옆에서 보면서 참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애가 하나밖에 없는데, 아빠엄마는 애한테 확 빠졌어요. 애가 아들인데, 아들이 사달라고 하는 것을 다 해줘요. 고등학생이 돼서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면 오토바이 사줘, 자전거는 기본이고, 아직 운전면허도 안 나왔는데 차사고 싶다는 거예요. 하여튼 인터넷 유튜브에 나온 것 하고 싶다는 것 다 해줘요. 부모가 엎어지듯이 다 했습니다. 아이고! 결국 그 애는 군에도 안 갔어요. 군에를 왜 안 갔느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근원의 해답을 알려드려요. 궁금해요? 오백원가지고요? 인간이 원하는 것은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소켓 뒤에 악마가 그걸 집어넣은 거예요. 악마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니가 이걸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되리라. 절대자가 되리라.” 오늘 본문의 비교는 뭐냐 하면 절대 기준의 비교입니다.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절대 기준과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 니가 협박하냐고 이런 식으로 툭툭거리는 그 고린도교회에 절대 기준을 딱 내놓고 비교하는 거예요. 절대 기준의 내용이 다르다는 거예요. 내용이.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데요? 인간의 욕망은 본인의 의도에서 나와요. 하지만 인간은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고 충동도 있다니까요. 욱하는 게 있어요. 욕망은 조절이 되지만, 충동은 조절이 안 됩니다. 이거는 신이 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 것이 나와요. 욕망이 뭐냐 하면 신이 돼야 하는데, ‘이게 아마 나의 최고의 행복일거야.’라고 욕망으로 딱 해보니까, 이것도 며칠 안 가서 시시해져요. 또 이것 하다가 시시해지고.
그걸 대리보충이라고 합니다. 자꾸 충동이 나오는 구멍을, 맨홀 뚜껑을 덮는 거예요. 뭐로? 내가 하고 싶은 욕망을 적당히 비윤리적인 것은 떼 내고 윤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덮는 거예요. 남이 죽든 말든, 옆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관계없어요. 내가 즐거워야 해요. 내가 신이 돼야 돼요.
이 고린도교회가 이미 충동이 있어 자기가 신처럼 된다고 했는데, 자기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 예수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나오니까,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 마트에서 물건 사듯이, 예수도 좋고 성령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지옥은 안 가려고 하고, 좋은 것은 한 바구니에 다 담아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에 처음에 올 때는 참 재미나요. 교회 처음 올 때는 재미있죠. 복음 알았다, 쟤는 지옥 가는데 나는 천당 간다, 재미나죠. 6개월, 1년 하다보면 교회놀이도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의 모든 스트레스는 뭐냐, 교인들에게 새로운, 참신한 교회놀이를 만들어줘서, 그 사람의 발목을 꽉 잡아 가지고 자기 교회에서 못 나가도록 이 붙드는 작업을, 두 자로 목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재미나게 해줄 테니까 같이 놉시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신이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사람 사는 재미는, 내가 뭘 재미있어하느냐,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뭘 원하느냐,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뒤에 소켓에 배선을 통해서 전해오는 악마가 정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군함도’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제 아내의 특징은 뭐냐, 천만이상 넘어간 영화는 절대로 안 본답니다. 고집이 있어요. 나라도 봐야 되니까. 봤는데, 한 4분의 1정도를 보다가 뛰어나갈 뻔 했어요. 너무 참혹해서, 너무 비참해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너무 비참해서. 조센징이라고 그냥 패버립니다. 이유도 없이. 남녀 갈라놓기 위해서 그냥 막 때려요.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났느냐 하면 군에 가는 것이 생각이 납니다. 남자가 왜 두 번 다시 군에 가고 싶지 않는지를 알겠습니까? 이유도 없이 패요. 이유도 없이. 군대 식사가 좋고 안 좋고 하는 그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인간이 고귀하게 여겼던 인간의 자기라는 존엄성을 아주 학대를 해버려요. 이유도 없이 때려버립니다. 군에서는. 이 소리 듣고 군에 안가고 빠질 사람이 많을 텐데....., 동지애라는, 전우애라는 그 하나를 빌미로 해서 개인을 말살해버려요. 그게 군대입니다. 군대가 뭐 훈련이 힘들어서요? 아니에요. 이유도 없이 팹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저들이 왜 이유 없이 맞는가? 이유는 딱 하나에요. 자기를 보호해줄 나라가 없어서 그래요. 국가가 없어서. 조국이 없어서. 뭐 지금은 청와대라고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만. 조국이 없어서 그래요.
성당, 교회, 기독교, 예수, 하나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든든한 조국이 우리를 지켜주지 누가 지켜줍니까? 예수가 우리를 지켜줘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줍니까? 자기 신체를? 일본인한테 조센징이라고 얻어맞는 것을 누가 지켜줍니까? 든든한 나라가 있어야, 유엔연합군이 있어서 우리가 해방이 된 게 아닙니까? 이 땅에 어떤 세력화, 민족의 세력화, 권력, 그거 없이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고 성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당이 우리를 지켜줘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줘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우리를 지켜주고, 사회질서가 지켜주고, 경찰행정이 우리를 지켜주고,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잘살게 해주었고.
따라서 2000년 교회 역사는 신앙을 없애는 역사입니다. 2000년 교회 역사에 신앙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세력화 된 교회뿐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끼리 어떤 정치적인 힘을 모으자! 그걸 가지고 교단이라고 합니다. 교단. 그게 교회고 교단이에요. 그 사람들 정치세력들입니다. 정치집단이에요.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한 대리 보충물이에요. 추상적인 예수를 나에게 보탬이 되고 힘이 되는 예수가 된 거예요.
박태선이라고 아십니까? 기장(기독교장로회)에 있어요. 그 박태선이가 그렇게 젊은 애들 뽑아 모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회사 차려서 취직시켜줄게.” 그거 한 거예요. 유병언이 구원파도 그렇고. 통일교도 역시 취직이에요. 취직입니다. 취직. 누가 취직시켜줘요? 교회가 취직시켜줘요? 통일교가 취직시켜주고, 구원파가 취직시켜주고. 신천지가 취직시켜주고. 결혼도 마찬가지고. 신이 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되고, 외로워서 신이 못되니까 짝지어주고 월급 채워주고 하는 그런 신 같은 대리집단, 대리회사, 그게 바로 교회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누가? 믿음 하나도 없는 일반대중들이. 따라서 고객만족이라고 교회는 거기에 맞춰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게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지키는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복음의 내용이고 기준이라는 겁니다. 그게 복음의 기준이에요. 그게. 그 복음의 기준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딱 나섭니다. “너희들이 혼자 있지 않는 것처럼 나도 혼자 있지 않다.” 나에게 잘해줘야 하나님 믿을 마음도 들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룟 유다가 예수 팔아먹기 위해 했던 그 심사숙고한 결정을, 결단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돼요.
결국은 모든 인간이, 가룟 유다하고 우리하고 차이점이 없잖아요. 뒤에 악마의 소켓이 꽂아있기는 마찬가지라고요. 가룟 유다만 욕하지 마세요. 열 두 제자 다 도망갔고,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듣는데서 저주했습니다. “나 저 사람 모릅니다.” 정말 이거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같이 합창하고 싶어요.
에브리바디 리핏 애프터 미everybody repeat after me, 다 같이 따라해 보세요. 부흥회에서 하듯이. “예수를 믿읍시다! 믿읍시다!” 그런 것 따라하듯이. 우리교회에서는 이걸 따라해 봅시다. “나 저 사람 모릅니다! 나 저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걸 삼창해야 돼요. 주여! 삼창하지 말고. “나 저 사람 모릅니다. 나한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저 사람 믿지 않습니다!” 이걸 삼창해야 된다고요. 이것을요.
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것을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망상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시키는 거예요. 힘들게 기도 왜 하는데요? 교회에 왜 왔습니까? 어디 노리는 것이 없다고 왔다고요?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뭔가 노리는 것이 있어요. 노리는 것이.
입시 앞두고 바짝 새벽기도 땡기고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노리는 것이 없이 무슨 교회를 옵니까? 내가 지금보다 더 신으로 접근해 가는데 어떤 영향력을 주께서 행사해달라고 빌기 위해서 온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상처는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못 다 누리는 데서 나오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우리 안에 늘 생산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럼 사도바울은? 복음을 안다는 자기는? 사도바울이 아는 절대 기준은 뭐냐, 절대기준은 바로 ‘이중처벌은 없다’입니다. 이중처벌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예를 들어야하는데요. 어떤 소설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남편이 있었는데 그 남편이 어느 날 경찰에 잡혔어요. 아내를 살해해놓고 실종신고하고 사체를 치워버렸다는 거예요. 모든 정황들이 다 남편이 범인이라고 몰아세우는 겁니다.
남편은 내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맞지만,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했지만, 실제로 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검찰에서는 다른 모든 정황들이, 남편의 혈액형, 피 묻은 것, 뭐 이런 저런 것들을 조사해보니까 남편이 죽인 것이 확실하다고 해서, 그것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포함해 18년 형을 내립니다. 징역살이를 하고 출소를 했습니다. 늙었죠. 그런데 죽은 아내가 20년 후에 살아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아내가 딴 데 가서 살림살이하고 잘 살고 있었어요.
자, 그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지금 살아있는 아내를 억울하게 옥살이 한 남편이 칼로 죽이면 그게 살인죄에 해당이 되냐, 안 되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를 살해했다는 죄 값을 18년 동안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특정한 사건에 대해 일단 판결이 내려지고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재판하지 않는다)의 원칙에 의해서, 이제는 마음 놓고 아내를 찌르고 또 찌르고, 찌르고 또 찔러도 처벌을 받지 않는 자유인 상태가 돼버려요. 이게 이중처벌금지법(같은 죄로 두 번 기소당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 바로 이중처벌금지법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평생 동안, 90살, 요새는 90이라고 하면 실례에요. 99세까지 지을 모든 죄에 대해서 이미 우리는 처벌받은 자로 확정짓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매를 걷는 거예요. 소매를 걷고 하고 싶은 대로 죄를 짓는 겁니다.
근데 어떤 것이 죄냐 하면, 산상설교라는 주님의 설교에 모범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알게 한 게 죄고, 기도할 때 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죄고, 금식할 때 찡그리는 것이 바로 죄고, 구제할 때 알게 하는 것이 죄가 되고, 어떤 여자 그냥 예쁘다고 했는데도 그게 음란죄가 되고, 누구보고 기분 나쁘다고 하는 것도 살인죄가 되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도 그게 죄고,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를 365일 동안 단 하루라도, 아침 7시 46분에서 47분까지 1분 동안 그걸 생각했더라도 그게 죽을죄에 해당돼요. 죽을죄가 아닌 게 없어요.
우리는 이것을 즐겁게 맞이해야 합니다. 왜? 이중처벌법이 없기 때문에. 이중처벌법이. 마음 놓고 하는 거예요.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이런 소리를 고린도교회 편지에 담아서 했기에, 그 고린도교회가 자기 이득을 위해서 예수님을 한 번 이용해보자고 했는데, 이건 뭐 생뚱맞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도대체 우리를 지금 놀리느냐,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소리를 하느냐는 오해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너희들이 보는 절대 기준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중처벌금지법에 의해서 우리가 앞으로 뭘 해도 죄가 없다는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근거가 구약에서 넘어와요. 구약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9절,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절,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기 19절을 보게 되면,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결정에 의해서 되는 것이고요. 20절은, 그렇게 결정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은 다 죽은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인데 여기에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가 만나게 되는, 그걸 앞장세워서 일하시는 분이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자기소개를 이미 해놓은 거예요.
여기서 얼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얼굴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모든 외부의 감각이 얼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코, 눈.. 후각, 시각, 미각, 청각, 촉각, 하나의 얼굴에 다 담아서 이게 표정으로 나타나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갖고 있는 얼굴은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왜곡되게 만드는 출처가 된다는 거예요. 출처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얼굴을 보고 마주했음에도 살아있을 때 그게 바로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근데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 얼굴이 수상한 얼굴이에요. 이게 다른 세력을 표현해주는 배후에 어떤 숨겨진 괴물의 속성과 괴물의 본질을 보여주는 그런 표정들이 튀어나오는 얼굴들을 각자 소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얼굴에서 뭐가 나오느냐, 최종판단이 나와요.
누구에 대한 판단? 예수 당신이 메시아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모든 자료와 근거가 되는, 그러한 누적된 경험담. 지성, 이성, 감성, 그것들이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가 표출하고 있는 겁니다. 과학이죠. 근데 과학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합니까? 창조과학회, 라는 것이 있어요. 창조과학회 내용을 보면 ‘아, 이런 식으로도 복음을 가로막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했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생각이에요. 성경에서는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창조했어요. 지금 그 차이에요. 그 차이. 예수님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창조과학회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과학적인 산물가지고 연구를 해보면 신에게 얼추 연결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창조했다고 보면 아무리 유물이나 어떤 화석을 조사해 봐도 거기서 나사렛 예수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대리보충이에요.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유신론으로 가로막아버린 거예요. 그래놓고서 신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은혜만 던져주고 팔짱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은혜에 따라서 활동한다는 거예요. 활동하는데, 어떤 활동을 하느냐 하면 어떤 인간의 얼굴도 나의 얼굴을 볼 자가 없다는 것으로 다 부숴놓는 거예요. 어떤 인간의 판단과 이성적인 결정도 내가 내린 본 뜻하고는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 악마가 좋아하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이라는 것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 얼굴을 뭉개버려야죠. 얼굴을 뭉개버립니다. 성도의 특징은 얼굴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그 얼굴 뭉갠다는 것이 어디에 나왔느냐, 우리가 얼마 전에 했어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했습니다. 모세가 저쪽 얼굴을 뭉개버려야 하는데 자기 얼굴을 뭉개버립니다. 수건을 써버린 거예요. “나 얼굴 없다~”
얼굴 없는 자가, 얼굴 없는 자 쪽이 뭐냐, 하나님 쪽이에요. 하나님 편에 선 쪽이고. 얼굴 있다고 껍죽대고 시건방지게 구는 것은, “자, 당신이 모세냐? 한 번 판단해볼까? 내 시각으로, 청각으로, 후각으로, 촉각으로, 당신이 메시아 기능을 하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 판단할 거야! 심사할 거야! 측정할 거야! 판정내릴 거야! 과학적 인식으로! 합리적인 인식으로!” 그게 마귀의 얼굴이에요.
주님 쪽에서 온 얼굴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 얼굴을 누가 대신하느냐,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얼굴 없는 우리를 대신할 거예요. 없는 얼굴을 대신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갑자기 우리가 동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동작 그만하라는 금지를 당한 사람이 돼요.
동작 그만하라고 금지를 당한 사람. 동작 그만! 동작금지가 뭐냐,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본심을 보려면, 인간들이 너무 바빠서 본심을 볼 수가 없어요. 인간들에게 얼음! 해야 해요. 모든 것을 동작 금지시켜야 해요. 동작 스톱시키는 거예요.
한 예를 들어봅시다. 빗방울 떨어지는 거리에 나가서 깨끗한 붓을 감추어 놓고 거기다가 그림을 한 번 그려보는 겁니다.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릿색 물감으로 색칠을 하고. 그럼 빗방울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 아랜 무슨 색깔로 하면 좋을까요? 보랏빛 색깔로 하면 좋겠죠. 왜? 권인하가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노래에 나오죠.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그 당시에 작사가상을 받았는데, 그 노래 가사에 보게 되면, 후두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비 오는 날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걸 수채화로, 하나의 그림으로 딱 그려버리면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 보이느냐는 그런 가사내용이에요.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지금 노래 부리고 싶은데 참고 있어요. 그림 속에 있는 동작이 정지된 사람, 얼마나 행복할까?
그걸 묵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묵시. 동작이 정지된 사람. 동작이 정지되게 되면, 모든 사람의 동작이 정지가 되면 누가 활동을 하느냐, 그 사이사이에 주님의 은혜가 활동을 하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가. 우리가 너무 분주하기 때문에 주의 은혜를, 우리의 여망과 우리의 기대치와 우리의 욕심이, 주신 은혜를 다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동작 그만!”하면 글을 쓰고 있다가 스톱하는 거예요. 동작을 그만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 참새가 짹짹거리고, 들풀이 피고, 해가 움직이고, 이 모든 움직임, 그리고 내 속에 심장이 뛰는 그 모든 소리에, 그리고 잠자면서 꿈에 나타나는 그 모든 것은 누구의 솜씨고 누구의 활동이냐면, 그것은 오직 아무도 없이 홀로 계시는 분, 예수님의 자기세계에서 자기 활동입니다. 예수님의 혼자만의 활동. 우리는 거기에서 등짝에 소켓이 꽂혀가지고 주님의 활동으로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가사에 보면,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다른 말로 하면 바빠서 행복 못해요. 우리가 너무 바빠서. 지금에 만족 못하고 너무 기대치가 많고, 내일은 뭐해야 되고, 모레는 뭐해야 되고, 너무 바빠요. 잠시 멈추지를 못해요. 잠시도 멈추지를 못해요. 왜? 얼굴이 있어가지고. 내 판단이 있어가지고.
모세는 수건으로 덮고,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늘나라 수건을 덮었습니다. 덮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너희들이 예상도 못한 하늘의 영광이 이 수건에 담겨있다. 하나님이 이 수건을 벗어버리게 하면 너희들은 다 죽어. 왜? 이 영광, 이 주의 영광을 너희들은 감당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도 나와 있어요.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니라” 18절에 보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
우리 자신들이 수건 쓴 모세이기를 원합니다. 바로 성령께서,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왔다면 우리만이라도 스톱이 될 수 있어야 해요. 스톱이 되는 근거가 뭐냐, 이미 우리는 살인자기 때문에 그래요. 이중처벌금지법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리스도가 복역을 하면서 “이리와! 니는 나와 같이 복역을 해야 돼.”
주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값을 아버지 앞에 저주받아서, 이미 우리는 주님과 같이 죄 값을 받았습니다. 죄 값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 살면서 더 설쳐봐야 주님께서 죄 값 치른 것 외에는 더 이상 나올 게 없습니다.
“목사님, 교회 가는 것이 왜 죈데요?”라고 이래 삐지는데, 교회 오면서 그냥 맨숭맨숭 옵니까? 노리고 오잖아요? 그게 바로 맹세하지 말라는 그 죄에 해당된다 이 말입니다. 성경 전체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합니다. 방금 회사에서 잘리고 온 사람한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듭니까?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에 대해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당신 복음에는 들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얻을 게 없다고요. 얻을 게 없다, 들을 게 없다, 교회 다녀도 무슨 이익이 있나, 내가 왜 교회 가는 짓을 계속 해야 되느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죄인아!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동작 그만하라고 하는 것이다. 니 등짝에 소켓 꽂아서 주님 증거 하라고 교회 오게 하는 것이다.” 그 인생을 그 따위 식으로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 인생을. 주님 증거 하라고. 남의 인생 부러워 하지마세요. 그쪽은 그쪽대로 죄 짓게 만들고, 나는 내 식으로 죄 짓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10장 13절에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자기가 각자 맡은 분량대로 이중처벌법에서 제외시킨 자의 자유함.
이걸 자유함이라고 하는데,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거든요.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이제는 뭘 해도 처벌을 다 받았기 때문에, 남은 것은 마음껏 죄 짓는 것 밖에는 안 남아요. 아니, 죄 짓는 것도 못합니까? 죄 짓는 것도 못해요? 죄인이 죄 짓는 것 밖에 없는데, 나오는 게 죄 짓는 것인데 그걸 왜 못해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슈만이라는 작곡자가 지은 작곡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반주만 딱 작곡해놓고 멜로디는 니가 알아서 캐치하라는 작품이 있답니다. 반주만 딱 해놓고. 반주는 나오는데 무대에서 가수가 가사를 까먹었을 때, 반주만 쿵짝~♬쿵짝~♬나오죠. 그때 본 멜로디를 찾아낼 수가 있을까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도는 보이지 않는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는 일은 하나의 반주입니다. 반주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갔잖아요. 홍해를 건너갔을 때, 그들은 건너가면서 자신들이 건너가는 것이 아님을 그들만은 알아야 했습니다. “이거는 내가 건너가는 게 건너가는 게 아니다. 이거는 뭐냐, 동행자가 건너가는데 나는 그냥 딸려서 건너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무사히 천국 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가운데 홍해처럼 길이 쫙 나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가고 있는데, 문제는 그 길을 가고 있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주인공이 내가 아닌 것으로 본인도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 성도입니다. 이 길이 내가 원치 않는 길이에요. 내가 기대했던 그 길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랑하고 싶고, 내가 신이 못돼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남하고 비교해서 지기 싫어 환장한 사람입니다. 그게 내 본성에 맞아요.
지금껏 내 본성에 맞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혼자가 아니고 뭔가 보여줄 분이 따로 있다는 것.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지옥인데, 못 가게 만드는 겁니다. 지옥도 주의 뜻이 아니면 못 가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원칙에 맞혀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는 그 자체가 원칙이에요. 돌아가는 그 자체가.
그래서 어떤 것이 옳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죄인에게는 옳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안 돼요. 옳다고 여기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핑계 댄 거예요.
우리가 진리를 가질 필요가 없어요. 진리가 우리 앞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얼굴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미래에 대해서 확정짓고, 꾸미고, 신경 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노림수였고, 나만 절대적인 신이 되고자 하는 악마의 본성인 것을 날마다 깨우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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