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강-고후 10장 5-8절(모든 이론)1707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0장 5-8절입니다. 신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0:5-8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찐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사도바울의 이 한마디 한마디가 인간으로 하여금 화를 유발하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6절에 보면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라고 되어 있거든요. 모든 인간은 스스로 멀쩡한데 멀쩡한 사람보고 “당신은 벌 받아야 됩니다. 당신은 맞아야 해. 당신 이제 죽었어.”라고 하면 화 안날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네가 뭔데? 네가 인생을 알아? 네가 전부를 알아? 네 생각 따로 있고 내 생각 따로 있는데 왜 너는 일방적으로 네 생각에 안 따르면 벌 받는다는 이야기를 감히 남에게 하는가?”라고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일단 우리가 이 설교를 듣고 이 성경을 볼 때는 화를 내고부터 시작합시다.
화를 냅시다. 나한테 아무 문제없는데 문제없는 나에게 벌을 준다고 하니까, 그것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피해버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쪽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어요. 사람이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나는 너보다 잘났고 너는 나보다 못났다고 여기기 때문에 밀쳐내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나와 생각이 같은지를 확인해서 가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하는데 사랑은 동질성을 갖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네가 나와 한 마음이지? 네가 한 마음이니까 이런 생각을 같이 하는거야.” 이걸 흔히들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인간은 절대로 그대와 나,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초반부터 큰 오해를 하고 있어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마음도 하나가 안 되는데 무슨 남과 하나가 돼요. 사람을 억지로 자기 마음에 맞추고자 하는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걸 집착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하나님이 우리하고 마음을 합칠 거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마음이 한 마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증거가 뭐냐? 우리 안에 벌을 집어넣는 겁니다. “너는 맞아야 되겠어.”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엉터리인줄 모르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나는 그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할 때 이것은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현재 내 마음처럼 하나님도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시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내가 한 덩어리 된 것이 맞지요, 라는 그런 너는 많이 맞아야 되겠어.” 그런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도바울이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이야기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부르짖는데 어떻게? 집단적으로 부르짖는다. 개인적으로 부르짖는 정도가 아니고 집단적으로 부르짖는 거예요. 집단적이라 하는 것은, 그 집단이 평소에 너하고 생각이 하나라고 자부했던 그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교인들은 다 천국 가는 것 맞지요, 목사님? 그렇지요?”라고 집단화시킨 거예요.
집단적으로 생각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집단적으로 벌 받고 지옥 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옥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왜 일방적으로 우리가 뺍니까? 빼면 안돼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저주라는 것을 집어넣었으면 집어넣은 그 취지를 우리가 이해해야 돼요.
저주 없는 복음, 무슨 그런 복음이 다 있어요? 지옥 빼고 이야기하기. 벌 받는 이야기 안하고 설교하기. 어디서 교회를 절간으로 만듭니까? 무슨 그런 성경 내용이 있어요? 좋은 게 좋다고요? 우리가 사랑하면 주님이 사랑한다고요? 사도바울한테나 예수님한테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장사하려고 일부러 만든 거예요.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가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서 나온 모든 생각을 파한다는 말은, 작살내고 박살내며, 그런 뜻이에요. 인간에서, 이것은 맞을 것이다, 라고 내놓은 모든 이론이 있잖아요.
그리스 신화에 ‘토르’라는 신이 있어요. 큰 오함마, 망치를 들고 있거든요. 그 망치를 들고 인간에서 나온 모든 이론을 다 깻잎 부수듯이 으깨버리는 거예요. 다 깨는 그 엄청난 해머,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은 그냥 이거 하나 더 추가해서 소유하고 있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깨는 겁니다.
뭘 깨는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족족 다 깨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뭐가 나오는지?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복음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이론을 다 깨는 것이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지 마시고 도대체 너와 나,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이론이 어떤 것들이 있기에 이것이 예수님 입장, 하나님입장에서 다 박살나야 될 요소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도대체 인간에서 어떤 생각들이 나오는지를 아셔야 돼요.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간이 뭐냐? 대체 인간에게서 뭐가 나오는가?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것들이 나오는지를 우리가 다 뽑아내야 되는겁니다. 흔히 말들 하지요.
인간에게는 삼위일체 신학이 나오고,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론, 종말론, 성령론, 성경을 종합해서 구원받기 합당한 이론들을 내세웠다. 교회에서는 그렇게들 이야기해요. 심지어 목회론, 찬양론까지 나와요. 구원론은 기본적으로 나오고 종말론 나오고요. 그거 복음 앞에서 다 박살나야 됩니다.
신학 빼놓고 나머지 이론은 깬다는 그런 것은 없어요. 신학이고 뭐고 다 깨야 됩니다. 신학박사학위 받기 위해서 유학 갔다 온 사람들 보면 내가 화가 나는 이유가, 믿음도 없으면서 유학 갔다 와놓고 믿음 있는 척 하는 그것이 같잖아서 말을 못할 정도에요. 신학하면 없는 믿음이 생깁니까? 없잖아요.
믿음 있으면 개척교회 하지 뭐 때문에 신학을 하겠어요? 믿음 없음을 감추기 위해서 신학을 한 거예요. 신학을 해서 뭘 배웠는가? 신학이론이 있겠지요. 정말로 유학갔다 와서 믿음이 생겼으면, 내가 한 이 신학전체가 악마의 아이디어입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돼요.
“그동안 악마가 이런 짓거리로 인간하고 노닥거렸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이론입니다. 삼위일체 이론, 이게 악마의 이론입니다.” 그런 것 고백하라고 신학공부 했다면 모를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혀 구원에 보탬이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을 해줘야 그것이 정말 제대로 믿음이 있는 신학자가 되는데 그게 아니고 자기가 신학 한 그것을 가지고 밥벌이 하려고, 신학 한 그것으로 취직하려고 하니까 같잖지도 않은 겁니다.
신학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이론이 다 그래요. 도대체 인간에게서 어떤 이론들이 나오는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원래 가족중심이에요. 내가 어디서 나왔는가, 부모가 있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인간은 항상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면, 걸핏하면 자기가족으로 돌아옵니다.
추석날, 설날, 주로 어디 가느냐 하면,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귀소 하는 귀소본능을 갖고 있어요. 패밀리죠. 가족중심, 혈통중심, 혈육중심이에요.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소위 전통, 도덕적인 전통을 가족중심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말이 어려워지니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집안은 근본이 있는 집안이라서 우리 집안에서는 이런 행동 용납 안한다. 네가 남에게 욕 안 얻어먹으려면, ‘뉘 집안인가?’ 하려면 적어도 이정도는 기본 예의와 자세가 되어야 된다.” 그게 가족중심이에요. 교회에 나와도 얼른 가족으로 돌아가요. 여러분 교회에 살려고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예배 마치고 어디로 갑니까? 집이 아니고 집구석으로 가지요.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복이나 따내서 더 붙이려고. 그 가족중심이 모여서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관습화된, 전통화된 도덕이 나와요. 이 도덕을 실체화시키기 위해서 거대가족, 가족형국가 발생합니다.
가족형국가를 두자로 민족이라 합니다. 우리는 한겨레, 한민족이라 하잖아요. 독도는 우리 땅! 항상 내 마음의 고향은 가족이에요. 가족에게 가야 우리가 마음의 안정성을 얻습니다. 시집간 새댁이 어디 가서 애 맡겨놓고 퍼질러 잡니까? 집에 가서, 친정에 가서 그렇게 하지요. 시집에서는 벌벌 떨다가.
명절에 용돈 드리고 눈치껏 집에 가자, 하면 남편은 바로 처갓집으로 가야 돼요. 처갓집에 갔다 하면 딸은 퍼질러 자는 거예요. “엄마, 고돼 죽겠어.” 그게 가족이에요. 가족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곳이고 없는데서 생긴 자기의 출생지입니다. 그 뿌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가족에 통용되는 그 법이라는 것은 대대로 부모로부터 받은 전통적인 도덕법이에요. “네가 비록 교회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집안에서는 1년 4차례 제사는 드려야 돼. 그런 조건 지키려면 시집와도 좋다.” 그러면 당장 결혼이 급하지 그런 것이 급합니까? 그러니까 “예!” 하고 들어가지요.
시집에 들어가서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관계없이 처음 1년은 기본 4차례 제사를 드리지요. 그걸 계약직이라 합니다. 정규직 되기 전에. 그 다음부터는 보이콧해서, 취직했다는 핑계로 바쁘다고 하겠지요. 다만 처음 1년은 눈치를 봐야 되지요. 왜냐하면 그게 그 집안의 법이고 관습이고 전통이기 때문에.
이미 가족중심, 혈통중심으로서 국가가 되면 그 국가는 마치 가족 같은 느낌의 가족친화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 국가의 지도자는 한 아버지 같아야 돼요. 아버지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겁니다. 어려울 때마다 기댈 수 있고, 모든 것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리고 경제가 어려울 때는 살릴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
어버이 같은 분. 박정희 시대는 끝났지만 북한은 아직 박정희시대가 안 끝났어요. 어버이 김일성이에요. 그냥 김일성이 아니고 앞에 어버이가 붙어요.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당회장은 교인들에게 어버이 같아야 되고 그 어버이 같은 교단이 통일교. 자기의 정자를 분양받아야 돼요. 통일교, 신천지.
가족분위기, 그게 다 이단의 분위기에요. 소위 이단 아니라는 기존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통하는 법은 뭐냐? 성경? 복음?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구성원을 더욱 더 돈독하게 만드는 도덕적인 법이에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목사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그리워지는가 하면, 제발 도덕과 윤리의 선에서 넘어선 사람이 혹시나 계십니까, 오늘도 그런 사람 보기를 원하면서 설교하고 있어요.
혹시나 도덕과 윤리의 선을 벗어난 사람. 그 선을 넘어선 사람이 혹시나 계십니까? 인간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왜? 내 가족과 친척과 같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지탄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요. 따라서 그 선을 안 넘으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 그게 신자입니까? 그게 하나님께 벌 받는 거예요, 안 그러면 지금 하나님과 사귀자는 겁니까, 뭡니까? 그것은 신자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신자 아니에요. 교회를 자기 가족같이 만들어낸 사람들이지 신자는 아니에요. 교인이에요 교인. 교회라는 것은 가족같이 품어주니까 교회가 된 겁니다.
그런데 1900년 이후에 무려 2천년 동안이나 교회를 운영해 온 유럽에서 교회가 나이트클럽이니 뭐니 일반에게 분양이 되어서 다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은 되게 큰 데 관광객만 다녀가고 입장료나 받을 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노인들 몇만 있을 뿐이에요. 주일날에도 교회 나오지도 않습니다. 유럽이 지금 그렇고 앞으로 한국도 그렇게 돼요.
왜 그런가? 전에는 가족중심이 되어서 가족이 나의 정체성, 아이덴티티, 내가 누구냐를 알려줬는데 이제는 시간상 가족과 있는 시간보다 돈벌이에 더 팔린 거예요. 노동을 하지 않으면 못사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에서, 너는 어떤 경우라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너는 우리 집안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고 이런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라, 할 때 “예, 아버지.” 이렇게 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자기에게 필요한 휴대폰, 컴퓨터, 이런 것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돈이 없어서 제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돈을 어디서 얻는가? 가정 말고 외부에서 노동해서 얻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돈이 나오는 곳의 말을 들어야지 돈이 나오지 않는 늙으신 부모님 말을 들어서 돈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저쪽의 눈치, 세상의 눈치를 봐야 되고 직장의 눈치를 봐야 돼요. 청년들이 취직 안하고 있을 때는 다 사회비판적이고 굉장히 다 착해요. 하지만 막상 취직해 보세요. 착한 게 어디 있어요. 착한 것 다 날라 갔습니다.
취직 안하고 있을 때, 할 일 없을 때는 온갖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다가 막상 취직하게 되면 윤리도덕을 거론할 시간도차 아깝습니다. 그런 시간이 허용될 수 없어요. 야근하는데 무슨 윤리도덕이 있습니까? 빨리 물건 만들어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사느냐, 그것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정은 버리고 명절 되어도 직장에 매여서 집에 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인간이 어릴 때는 가정에서 만들어냈는데 요새는 가정에서도 못 만들어내요. 부모는 밥벌이에 바쁘고 애는 인터넷 세계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있어요. 어떤 6세 된 애가 곤충을 좋아하는데 그 애가 나름대로의 세계관, 종말관을 구성합니다.
어느 날 번데기가 죽었어요. 사과와 포도를 차려놓고 번데기장례를 치릅니다. 번데기야, 번데기야, 우리는 좋은 날만 기억하자, 이런 식으로. 벌써 부모의 윤리도덕과 괴리되어 있습니다. 9살만 되어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따로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부모는 밥 먹으러 나오라는 그 이야기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저쪽 세계, 젊은 애들의 세계에 어떤 이론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오늘 본문 내용이,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이론을 다 원천적으로 뿌리 채 끄집어내 보자는 말이지요. 그걸 뿌리 채 뽑아서 나열해야, 예수님의 복음이 어떤 것을 깨는지를 알 것 아닙니까?
그냥 복음이 인간에서 나온 모든 이론을 파한다고 하면 인간에서 나온 이론이 뭔지도 모르면서 ‘십자가가 깨는구나, 끝!’ 이러면 십자가복음을 이해 못하잖아요. 다 부숴야 돼요. 인간에서 나오는 이론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옛날 인류가 처음 생길 때, 호모사피엔스가 나올 때부터 인간사회가 구성되면서 계급화 되었다는 겁니다. 노동하는 계급과 노동 안하고 날로 먹는 계급, 두 개의 계급이 싸웠다는 거예요. 그 노동하는 계급을 노예라고 하는 겁니다. 노예는 성경에 나옵니다. 노동하는 계급이 노동을 하게 되면 날로 먹는 계급이 착취를 하게 됩니다.
수렵시대에서 농경정착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옛날에는 하루 먹고 하루 살다가 분업화 되면서 농업생산물이 남아돌아요. 그걸 잉여생산물이라 합니다. 그 남아도는 것에서 문화가 나오고 그 문화를 이루는 에너지는 놀고먹는 계급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 놀고 먹는 계급이 왕, 제사장, 관료, 관리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양반이고 열심히 노예처럼 일하는 것은 상놈이 되는 거예요. 계급이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계급이 그렇게 나눠지다가 오늘날에서는 돈을 가진 계급이 돈이 없는 계급으로 나눠지는데 돈이 없는 계급을 프로레타리아, 노동자라고 하고 돈을 가진 계급을 자본가라고 하는 거예요.
자본가, 부자가 돈 버는 이유는 밥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나는 너보다 이만큼 가졌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열심히 돈 버는 거예요. 돈 모아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와 달라, 계급이 달라, 그 본능이 있기 때문에 계속 돈을 버는 겁니다.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고 방사능이 나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모든 일본사람들이 방사능 앞에서 평등하다는 거예요. 가진 자 못가진자, 모든 인간은 방사능 앞에서 평등해요. 거지라도, 노숙자라도, 부자라도 방사능 쐬면 다 죽습니다.
그게 자연입니다. 자연에서 질서를 부과해서 문화를 일으켜봐야 자연이 화를 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해가 어두워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에요. 대자연이 화를 낸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의 그 분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벌 받게 되어 있고 그 점에서 모두 다 평등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것을 애써 감추고 자연에서부터 인간 독자적인 자기들만의 세계를 따로 구성하는 거예요. 인간의 지혜와 노력, 노동으로. 그래서 문화가 생기고 그 문화라 하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의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거기서 자연을 자기 손으로 다루는 거예요. 1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증기기관을 만드는 것이고, 2차는 전기와 기차, 3차는 인터넷, 4차는 정보사회. 이것들이 계속해서 모여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조건적으로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인간은 자연과 괴리되어서 인간끼리 따로 살겠다는 겁니다.
인간에서 나온 모든 이론이 잘못된 점은 뭐냐? 인간이 인간 나름대로 일부라도 따로 다룰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겠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나를 변모시킬 수 있는 여지를 따로 내가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다른 나로 변모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거예요.
안 그러고 싶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왜 사는데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하기 위해서 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의 십자가복음 앞에서는 벌 받을 짓이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새로운 십자가이론에 완전하게 복종하지 않았기에 때문에 벌 받아도 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의 말은 사람을 화나게 한다고요. “스스로 되고 싶은 자아상이 있는데 왜 그걸 용납하지 않고 허용하지 않느냐? 에이 씨, 기분 나쁘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복음 앞에서 화나야 됩니다. 화가 안 난다는 것은 지금 복음을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어느 정도로 엉터리냐? 십자가 이야기 하게 되면, 현재 있는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를 몰랐는데 십자가를 알아서 그걸 더 보태면 지금의 나가 보다 더 진보된, 질이 더 나아진, 우수한, 괜찮은 나로 달라질 것을 희망하고 교회 온 거예요.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면 자기를 더 낫게 하는 이론에 꼼수 쓰지 말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이여, 총으로 날 쏴서 죽여 버리세요.” 날 총으로 주님이 쏴 죽이라 그 말이지요.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나를 죽이는 곳이에요. “너 같은 인간은 더 살 가치가 없고 이유 없어.” “아멘!” 그래야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헌금 몇 푼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뭔가 이득을 얻겠다고요?
이득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왜 나는 불행 안해야 됩니까? 평생에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어요? ‘왜 나는 불행하면 안 되지? 나는 왜 행복해야만 되지? 내가 불행하면 어떤데? 왜 나만은 불행 안해야 돼? 그런 똥고집이 왜 나한테 박혀 있는 거야?’
이런 것을 끄집어내 봐야 돼요. 우리가 불행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귀가 왱왱거리고, 관절이 안 좋아도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불평할 권리나 어떤 자격도 애초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시건방진지요. 기도를 두 손 모으고 하는데 제목이 뭐냐 하면, “주여, 행복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언제 봤다고?” “만약에 내가 행복하게 되지 않으면 이 교회 안 나옵니다.” “오지 마라. 누가 오라고 했어? 이게 어디서 교회와 절도 분간도 못하고.”
누가 교회 오라고 했어요? 누가 천국 오라고 했습니까? 일본의 모든 사람은 방사능 앞에 평등합니다. 전부 방사능 쬐면 죽어야 돼요. 마찬가지로 모든 아담에 속한 인류는 십자가 앞에서 다 벌 받아야 됩니다. 그 벌을 지금 집어넣고 이야기합니다. 그 벌에 네가 복종하라는 겁니다.
2천년 신학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2천년동안 신학자들이,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죽음가운데서 새생명이 탄생했다. 그 새생명을 믿으면 당신도 새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그런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 가운데서 새생명이 나온 것이 아니고 죽음이 탄생한 거예요. 우리가 몰랐던 죽음이 탄생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살겠다고, 살겠다고. 그것은 근거도 없어요. 막 사는 거지요.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돼. 살겠다고 하는 모든 인류에게 너는 진즉에 죽어야 해, 라는 죽음 자체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지고 튀어나와서 결국 십자가로 중간에 꽂아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이런 이야기하지요. 제발 자기를 미워해 달라. 모든 원인은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인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마저 이용하고 예수님마저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고 여러분이 교회 나오신 거예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뭔가 경계선 넘어선 것이 아니고 아직도 경계선을 못 넘었어요.
이 저주를 탈피를 못했어요. 살아 있으니 살아 있겠다는 거예요. 사람이 살고자 한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쫓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죽으면 네가 살고 주님이 살아 있으면 너는 반복해서 죽는 거예요. 주님이 내 안에 계속 살아 있으면 반복해서 나를 죽이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와서 어줍지 않게 들었던 예수가 가짜예수기 때문에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고, 그런 부처 같은 예수를 자기가 맘대로 조작해서 믿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이론이 인간의 노동의 대가를 얻어서 그 집약체로서 미래를 개선해보자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노동이란 게 힘에서 나왔거든요. 1차 산업혁명에서는 힘을 대신할 기계를 만들었어요. 노동자들보다 힘이 센 기계를 만드니까 그 당시 노동자들이 자기들은 퇴출당한다 싶어서 기계를 다 부쉈습니다. 1811년 영국의 러다이트운동이라는 것이 그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은 기계가 못 당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머리를 쓰는 것이다. 지식산업시대로 바뀝니다. 머리를 쓰는 거예요. 농사를 지어도 머리를 써야 되고, 고기를 잡아도 머리를 써야 되고. 머리를 쓰는 것은 기계가 못 따라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2차 산업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머리 쓰는 그것도 실패로 끝났어요. 제 4차 산업혁명이 되게 되면 머리 쓰는 것에 대해서는 컴퓨터가 도사가 되는 겁니다. 설마 인간끼리 두는 바둑에서 기계가 이길 수 있을까? 알파고가 이겼는데요? 기계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인간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학습을 해버립니다.
스스로 학습을 해서 인간보다 앞질러 가요. 옛날에는 인간이 못하는 것을 기계가 보충했는데 지금은 기계가 농담도 할 줄 알아요. 인간보다 더 인간같이 인간을 앞질러 갔어요. 옛날에는 인간끼리 계급이 있었는데 지금은 로봇이 인간보다 더 높은 계급에 있고 인간은 거기에 종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주식투자 어디에 하면 되나?” “현대 자동차에 50조 하세요. 주인님!” 주식투자도 인공지능이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기억력이 없어져요. 크라우드라 해서 모든 정보를 빅데이터로 다 모아버립니다. 인간들은 거기에 본의 아니게 전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최후로 등장한 인간의 이론입니다.
전적복종.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나눌 수 있다는 발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나눌 수 있다는 말은 뭐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기계로 보충이 가능하다. 이게 분할이거든요. 나누다 보니 어디까지 나눴냐 하면, 두뇌까지 다 나눠버렸어요.
이제는 두뇌까지 심어버립니다. 인공지능을 심어서 내 두뇌를 인공지능이 지배를 하게 되면 내가 본의 아니게 기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담은 지금까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분할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상상도 못했지요.
인격은 인격끼리, 비인격, 기계, 물체는 물체끼리라고 생각했는데 비인격이 인격과 통합이 되면서 나중에는 어느 것이 더 사람인지 분간도 안 되는 겁니다. 개를 꼭 닮았는데 개보다 더 좋은 반려견, 아내보다 더 아내 같은 여인, 남편보다 더 멋있는 남편, 나를 대행하는 대행자.
<써로게이트>라 하는 영화가 그 내용이에요. 늙잖아요. 젊은 마네킹에 나의 모든 것을 집어넣으면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죽어도 그 애가 살아 있으면 나는 영원히 사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은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계가 자신을 대신해서 가는 거예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라는 그 작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젊은 여자가 늙은 남자에게 시집왔는데 남자가 늙었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젊은 기병대장과 바람이 났습니다. 둘이 열정을 쏟고 있다가 그만 그 기병대장이 더 젊은 여자와 연애를 하니까 주인공 안 나는 버림을 받은 거지요.
버림받고 나중에 자기 몸도 늙고 매력도 없어지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서 기차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여기서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기차의 용도가 뭐지요? 원거리의 인적, 물적수송의 용도가 아니고 자살의 용도가 되어버리지요. 이것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가 해준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기에 복종당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기계를 다룬다 할지라도 내가 못하는 것이 있는 이상은 나는 자진해서 종이 되는 거예요. 그것 없이는 못사는 겁니다. 로봇청소기 사용하다가 그것 고장나면 못사는 거예요. 컴퓨터 쓰다가 컴퓨터 없으면 못살고, 24시간 스마트폰 붙들고 있다가 고장나버리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더운 날 에어컨 없으면 못사는 것처럼, 이미 상호교환 되어서 나는 그쪽에 의존적이에요. 상호의존적이 되어서 저쪽 없으면 나는 못사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만든 것에 내가 소유당한 정체성이 되어버렸어요. 그게 현대인들의 모든 이론의 특징입니다. 주님께서 뭘 부수는가? “삼위일체 알면 구원받습니까? 기독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목회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성령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종말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종말론 알면 구원받습니까, 이것이 신천지에요. “요한계시록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게 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666을 피해야 되고. 그 정보들을 다 피해버리면, 그런 짓을 안 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습니다. 마지막 때 마귀가 여러분들의 몸에다 바코드를 심어서 인 맞게 하는데 이거 맞게 되면 경제활동은 되지만 여러분은 이거 맞지 말고 어려운 고난을 견뎌야 됩니다.”
이런 소리 하는 그 밑바닥에,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벌 받으면 안 돼. 나만은 살아야 돼.” 그 가족친화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거든요.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는 어떤 정보를 얻겠다는 거예요. 교회 와서 “목사님,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기가차고 코가 찰 이야기에요. 당신이 뭔데 구원을 받아야 해요, 당신이 뭔데?
모든 아담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담이라 하는 것은 벌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벌, 저주가 무엇이냐를 계속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간을 지속시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 뜻, 그 취지를 모르고 살려고 하니까 교회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 왜 살아야 되는데요? 처음에 가족중심의 전통적 윤리도덕에 뭐가 있는가 하면, 자기의가 있어요. “네가 밖에 나가서 행동 똑바로 해라. 안 그러면 부모가 너 싫어할 거야.” 내 안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뭐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기대, 나에 대한 포부, 은근히 노리는 명예, 이런 것을 가득 짊어지고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한발자국 떼는 거예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자친구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이렇게 행동하면 아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내 자식은 어떻게 보겠는가, 그래서 행동을 조심해야 돼, 이게 윤리도덕이에요. 이게 세상에서 통하는 윤리도덕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윤리도덕이 결국은 돈 앞에서는 갈아타기가 되는 거예요. 결국 나에게 그렇게 기대를 하는 사람이 어느 날 돈 줄이 끊어졌다. 그러면 새로운 돈줄을 향하여 “그까짓 거 평판이 뭐가 중요한데? 지금 현찰이 중요하지.” 돈 벌면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사회에서도 인정받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가정교육 잘해도 역시 돈 있는 집안 애들이 착해요. 제가 죽 훑어보니까 역시 돈 있는 집안이 예의바르고요, 돈 있는 집안이 착하고 마음씀씀이도 착해요. 없는 동네에서 맨날 배운 것은 담배피우는 것 밖에 없어요. 여름에 창문 열어놓고 담배 피워서 아래위집으로 다 들어오고.
우리동네 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런 동네 사는 애들은 배울 것이 없어요. 그래서 돈 생기면 부자동네에 합류해야 돼요. 허름한 동네 돌지 말고. 맹모삼천지교가 왜 생겼는데요? 수성구의 아파트값이 높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윤리 도덕이 천당 가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자기의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기의를 쏙 빼놔야 돼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장차 만날 주님 앞에서,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주님이 여기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살려내고 또 살려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 안에서 전화통화를 시끄럽게 오래 한다. 그런 사람 “조용히 하세요.” 해봐야 싸움만 되고요. “네가 뭔데? 버스 네가 전세 냈어?” 이런 대꾸가 들어오죠.
한두 번 듣는 것이 아니니까. 그럴 때는 옆 사람과 자리를 옮겨서 더 크게 전화를 하는 거예요. “예~예! 아~예!” 그러면 저쪽에서 “좀 조용히 합시다.” “너부터 시작했잖아요.” “예, 예, 예!” 더 큰 소리로 하면 저쪽에서 전화 끊을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차피 교회가 이단입니다. 교회는 사람 좋으라고 있는 것이지 주님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전하라고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가족친화성, 가족끼리 잘해보자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엉터리교회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뭐냐?
이 교회를 긍정하는 거예요. “예, 훌륭하십니다. 부흥되셨네요. 선교 많이 하세요. 예배당 크게 지으세요.” 어차피 가짜, “목사도 많이 섬기시고……” 그렇게 하는 방법. “예~예~예!” 그 방법을 누가 사용했느냐 하면, 미가야선지자가 사용했어요.
“지금 다른 선지자는 다 승리한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보는가?” “예~예~예! 승리하십니다.” 태도 보니 꼬는 것을 알거든요. “너는 하여튼 바른 말 하는 순간이 없어.” “천상회의 참석했더니 당신 왕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보냈습니다. 한통속이 되셔서 같이 잘 먹고 잘 사세요.” 이게 그 당시 미가야 선지자가 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기대갖지 마세요. 여러분은 십자가 앞에서 이미 그 윤리도덕을 넘어서야 돼요.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그게 중요하지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매일같이 십자가로 모든 이론, 살아야 되겠다는 모든 이론을 다 부수시는 십자가의 능력 안에 있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기 위해서 와야 될 교회가 나를 살려주는 곳이라면 얼마나 잘못된 교회인지 저희들 깨닫게 해 주옵소서. 세상에 살면서 남한테 밑지지 않고, 꿇리지 않고, 기죽지 않으려는 악한 본성 가지고 왔다가 십자가 앞에서 방사능에 쏘여서 우리가 시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