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43강-하늘나라 농부(고후9;10-15) 1707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10. 18:12
2017-07-09 12:33:40조회 : 79         
   하늘나라 농부 17070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하늘나라 농부(고린도후서 9:10-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4Js6Ot_Aj00, Hit:4
 이근호17-07-09 13:28 

하늘나라 농부 

2017년 7월 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9:10-15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9: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9: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9: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사도의 배후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복음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보면서, 우리는 이상(理想)적인 교회상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교회가 되는 능력의 출처가 인간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복음’이 나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가로막고 나올 자는 없습니다. 복음의 권세가 사도 바울이 보기에 ‘많은 연보’와 ‘감사’가 넘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이 우선이 아니라 ‘돈’이 우선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심적 압박감을 가질까요? 

이 세상이 돈이 우선된 풍토가 된 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고장 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모든 인류는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버린 심성을 분배받으면서 차례차례로 세상을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인간들 끼리 아무리 의논하고 의견을 나누어도 결국 결론은 ‘돈’입니다. 

돈은 인간의 불안과 공포의 표상입니다. 돈은 얻고자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돈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결핍에서 오는 불안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돈을 가진 것과 현물을 가진 것이 다릅니다. 돈을 가졌다는 것은 모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가질 수 있는 반면에, 현물은 사용처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결핍감이 생기면 현재 가지고 있는 현물로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달랠 수가 없습니다. 돈은 모든 난관을 열 수 있는 마스터 카드이기에 계속 해서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됩니다.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이 ‘자기 동질성’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늘 내가 아는 나가 되고’ 싶어합니다. 천국가는 자가 남이 아니라 꼭 나여야 한다는 마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이런 증세가 바로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끼리 살면서 이런 심성이 하등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간은 비교 대상이 생겨버린 겁니다. 참으로 숨어계시는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고장나지 않는 참된 인간은 누구냐라는 겁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정상인지 여부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 때, 고린도교회 및 여러 교회들은 사도 바울의 삶에서 ‘성령받은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사는 모습을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돈이 우선이 아니고 복음의 우선입니다. 즉 공포와 두려움의 표상에 질질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복음이 하시는 일의 열매로서 살아갑니다. 

복음의 작용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농사’로 보시는 겁니다. 농사란 장사와 달라서 대상자하고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물론 혼잣말로 꽃과 나무와 대화를 나룰 수 있지만 그것이 대화의 결과를 농사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농사일은 이처럼 일방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농사’는 ‘사람의 농사’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도 자기 농사를 짓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 농산물이 회수되기를 고대하고 농사짓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자기를 위한 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자기를 위한 투자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농사’가 결국 예수님 앞에서 망하는 길이라는 사실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자신이 뭘 또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조언을 듣기 위해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이 부자가 집착하는 것은 ‘나’라는 동일성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이 그 자아가 나중에 천국까지 입성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부자청년은 모든 인간이 ‘고장 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무엇 때문에 고장 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생긴 그대로 유지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같이 여깁니다. 동일한 자아가 율법을 지키게 되면 그 동일한 자아가 건재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동질성을 유지하는 내용물이 거덜나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를 따라야 합니다. 자유인이란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자라면, 노예란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자입니다. 이 부자청년은 지금껏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을 구현했다면 이제는 그 내용물이 주님으로 인해 다 강탈당하고 빈 지갑 가지고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이 부자 청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단지 부자 청년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세를 대변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농사에 열중합니다. 자기 잘되기 위한 농사를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이 일방적인 자기 미래상을 농사라는 방식으로 달성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열매 맺는 참된 밭’을 소개하셨습니다. 길 가에 떨어진 밭, 돌이 내부에 버티고 있는 밭, 가시덤불로 싹의 기운을 막는 밭,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는 밭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이 밭은,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없는 밭입니다.
이 밭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만이 지을 수 있는 밭입니다.
이 밭은, 모든 이가 떠난 밭입니다.
예수님께로 왔다가 각자 자기 농사 지으려고 가버린 그런 밭입니다.
예수님 홀로 사람과의 대화나 의논없이 일방적으로 지어놓으신 밭입니다. 

이 밭에 성령받은 자를 다시 세우시게 됩니다.
거기서 인간의 농사는 모두 비-정상적이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아버지는 농부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십니다.
이 포도나무의 가지가 몸체와 연결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농사의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돈보다 복음의 능력이 우선입니다. 

이런 교회 흉내 내지 마세요.
참된 교회는 ‘이상적으로 서로 나누어주는 이상적인 초대 교회’를 흉내 내는 교회(행 2:44-46)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복음에서만 능력이 나옴을 알리는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노예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7-10 16:39 

244강-고후 9장 10-15절(하늘나라 농부)1707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9장 10-15절입니다. 신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9:10-15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긴 이 문장에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그 원천이 있어요. 이렇게 감사하고 은혜가 넘친다는 그 은사가 폭발해서 나오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이 여기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12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디어 개시가 되면, 표면에 넘치게 흐르게 되면 그 때부터 여기 나오는 의의 열매로 풍성하게 되고, 연보도 풍성하게 되고, 봉사의 직무도 풍성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하나님께 감사도 되고, 은사가 사람들에게 차고 넘치게 되고, 그 모든 출처가 있는데 그 출처가 복음이라는 겁니다. 

  

복음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현상이 일어난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복음을 알아?” 그런 취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 연보를 많이 하고 교회가 서로 아름답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복음의 힘으로 이게 나와야지, 성경대로 이렇게 해나가면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 되겠다는 식으로 어설프게, 어쭙잖게 흉내 내지 말라는 거예요. 복음도 없으면서 얼마든지 이런 이상적인 교회를 따라잡을 수 있고 또 따라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복음을 안다는 거예요.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연보를 풍성하게 했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내가 보기에 너희는 돈으로 연보를 내서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에서 나오는 하나의 선물, 그것을 은사라 해요, 은사로 너희가 그렇게 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부담이 돼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돈을 아낌없이 헌금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복음이 중요하기에 돈은 복음 앞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복음을 모르게 되면 그 복음의 자리에 누가 턱 앉아 있느냐 하면, 돈이 앉아 있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교회 나왔다든지, 돈이 더 있어야 내가 사람구실 한다는 그걸 노리고 교회 온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 이야기가 심적인 심한 압박감으로 작용할 거예요. 

  

사도바울은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이 없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고, 한번 시합해보자는 거예요. 네가 돈 가지고 내가 말하는 복음의 기쁨을 네가 따라올 수 있느냐, 시비를 걸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이 세상에서 돈이라 하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의 표상입니다. 

  

돈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돈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서 벌벌 떨게 되어 있어요. 내안에 갖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이 돈에 실리는 겁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돈이 그냥 종잇조각으로 보이십니까? 그렇게 보이는 분은 아무도 없지만, 제가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돈에는 종잇조각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어요. 

  

그 돈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돈이 나를 살린다면 우리는 돈에 종속된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만약 돈이 없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그 돈이 내가 하는 일에 방해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심지어 돈이 많다 할지라도 내 욕망은 내가 가진 돈보다 더 새롭게 구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사는 목적이라 하는 것은 수시로 변경하고 수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 라고 목적을 정해놓고 ‘거기에 필요한 돈은 얼마 있으면 되겠다.’ 라고 했더라도 일단 그것이 얼추 완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목적을 구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에 있던 목적은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 수단으로 전환되어 버리고 거기에 필요한 돈을 또 추가로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새로운 돈이 추가되면 여기서 또다시 본인은 벌벌 떨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돈이든, 누구 앞에서 벌벌 떤다는 것은 그 사람이 노예로 살아가는 거예요. 

  

노예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하기 싫은데 해야 되는 것이 노예고, 주인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그 때 마다 채워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이에요.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 싫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를 누리고 싶은데 그 자유를 누리려면 돈이 있어야 되거든요. 결국은 돈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돈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말 뿐이 아닙니다. 이것은 체험이에요. 우리가 체험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체험이 이것뿐입니다. 

  

나는 남에게 꿇리기 싫고, 주눅 들기 싫고, 그러려면 돈을 가지면 되는데 돈이 없으니 남에게 기죽고 사니까, 돈이 되려면 그 방법으로 나름대로 뭔가 열심히 하겠지요. 자기 뜻대로 자기 목적을 위하는 그 수단이 되는 돈이 잘 안 들어오니까 그것을 빌수 있는 장소가 어디냐? 빌러 교회에 오지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별명이 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전능하시니까, 못하는 것이 없으시니까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못하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에게 요구를 하면 되지요. 기도도 모자라서 거기에 중보기도까지. 중보기도를 동원해서 “돈 없는데 돈 주세요.” 그거 하려고 교회 왔는데, 오늘 성경 폈는데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복음이 우선이다.”라고 해버린 거예요. 

  

너희는 돈이 우선이라고 왔는데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서 15절에서, 나 사도바울은 돈이 우선이 아니고 복음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설교 들을 것 없습니다. 집에 가야 돼요. 복음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돈이 부럽지. 나는 복음이 부러워.”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설교 들을 것 뭐가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데. 이것을 해석의 경쟁, 또는 해석의간격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뭔가 처음부터 어긋났어요. 태어날 때부터 뭔가 인간은 잘못돼 있습니다. 
성경씀은 우리가 따라하라고 성경말씀 준 것이 아니고요, 성경말씀은 우리와 경쟁합니다.  
  

그 잘못돼 있는 것은 같은 잘못되어 있는 사람과 아무리 대화해야 봐야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성경을 펼쳐보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그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고장 난 채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그 고장 난 인간은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가려면 순서가 이렇게 돼요. 내가 고장 났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돼요. 둘째, 내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내가 그 고장 난 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고장 난 것은 우리지만 그 고장 난 것을 수리하고 새사람 되는 그 전문가는 따로 있어요. 그 전문가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보내진 거예요. 

  

그러면 제 말은 간단히 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 쳐다보지 말고 진짜 인간, 하나님께서 “내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는 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하고 네가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그것하고 말씀을 통해서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굉장히 쉬운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보고 땡깡 부리지 말고, 기도할 테니 돈 달라고 땡깡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분이 있잖아요. 그분을 왜 놓칩니까? 그분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눈에 보여야지.” 하거든요.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지요. 

  

눈에 안 보이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나와요. 그 당시 교회에 사도바울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남겼지만 그 당시에는 사도바울이 있었어요. 사도바울은 평소에 똑같은 인간인데,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사도바울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말이지요.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대조하고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했거든요. 성령이 임한 사람은, 내가 성령이 임했는데 너도 임했어, 라는 사람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찾는 방법은 뭐냐? “나 이렇게 살아가거든. 너도 나처럼 이렇게 살아가?”라고 묻는 방식으로 자기와 똑같이 이 땅에서 천국 갈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오늘 본문을 주신 겁니다. 고장 난 내가 고장 난 그것을 감추면서, 이것주세요, 저것주세요, 손 벌리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비교하고, 예수님과 비교가 안 되면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인 사도바울과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미 성령 받았다면 더 이상 사도바울과 비교할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라고 나오겠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기존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지점에 있다가 어떤 지점에서 성령받고 난 뒤에 이 지점으로 옮겨지고 난 뒤에, 내가 기존 지점에서 탈피한 그 지점을 늘 되새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성령께서 활동해요. 

  

내가 전에는 저렇게 성령 없이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산다. 그렇다면 없는데서 있게 된 그 지나간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를 보는 거예요. 그 사건이 우리 안에 매일같이 장착되어서 힘겨루기를 하는데 내가 예수 믿기 전의 더러운 속성, 성질과 주께서 주신 새로운 예수님의 성질과 어떤 격차가 있고, 어떤 해석이 차이가 있고, 세상 보는 눈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날마다 우리 속에서 반복해서 일깨워나가는 거예요. 

  

일깨워나가게 되면 거기서 무엇을 느끼느냐? 성령받기 전에 내가 가야될 어떤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을 어렵게 표현하면 자기 동질성이라고 하는데 이걸 쉽게 풀이하면 마태복음 19장 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나옵니다. 부자청년이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이제 영생 얻는데 무엇이 또 필요합니까?”라는 식으로 조언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거든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거예요. 누가? 본인이 다 지켰다는 겁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뭐가 더 필요하냐고 주님을 찾아온 거예요. 

  

이 부자청년은 계속해서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천국 갈 때 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하다. 이 똑같은 인간을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집어넣어야지.’ 이것만 계속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나니까.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것을 동질성, 또 다른 말로 하면 동일성이라 하는 거예요. 

  

부자는 전력투구해서 자기의 동일성을 붙잡고 계속해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십계명 지킨 것도 나, 영생 얻기 위해서 조언 받고자 찾아온 것도 나,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이것을 계속 고집하고 고수하는 겁니다. 누가요? 부자청년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제가 방금 자기가 자기 것을 고집한다고 언급했잖아요. 

  

부자청년은 천국에 못간 것을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천국 못간 부자청년이 자기 것 고집하다가 천국 못 갔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 앞에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부자청년이라고 계속 언급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안 그런가요? 

  

우리가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이유가 뭡니까? 여기 있는 나, 똑같은 나를 계속해서 똑같은 나로 만들어서, 지금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교회 오시는 것 맞잖아요. 그러면 부자청년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부자청년이 지독하게 자기 사랑하는 것을 아시고, 네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서 뭐로 바꾸는가 하면, 나는 나, 내가 나에게 주인이라는 그것에서 뭘 로 바뀌는가? 누굴 따른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나 됨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세요, 라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너만 사랑하는 입장에서 “나 이제 나 미워해. 나 증오해. 사랑 안해. 나는 예수님만 사랑할거야.”라고 바뀔 수 있는 능력이 너에게서 나오는지 보자는 겁니다. 

  

그게 나올 수가 있겠어요? 못나오지요. 천국 가는데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하지 “천국가든 지옥가든 주님 맘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인간성이 바뀔 리가 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바뀔 수 있어요? 인간이라면! 이미 고장 난 인간이라면! 그게 된다면 아직 고장 안 난 거예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고장난 인간이 자기를 미워하기 위해서 교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재 나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 나왔지 나를 미워하고 나를 개차반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나옵니까? 사람의 목적이라는 것이 뭐예요? 지금의 나를 향상된 나로 바꾸는 거예요. 지금의 나를 개선된 나로 바꾸는 거예요. 지금이 보잘 것 없는 나를 대단한 나로 바꾸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바뀌고, 헌금하면서 바뀌고, 주님께 봉사하고 충성하면 지금보다 월등히 질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걸 마다해요? 그걸 포기해요? 인생 왜 삽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예요. 부자청년이 우리의 대표자에요. 부자청년이 우리의 대변인입니다. 

  

우리 평소의 하던 행세 그대로를 부자청년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어림도 없어요.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고장 난 인간이 어딜 가. 고장난 게 어디를 넘봐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씀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이렇게 돼요. 주님이 짓는 농사. 

  

주님이 경작하는 농사는 결과가 뭐냐 하면, 밭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농사에서 밭,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이 나오지요. 흔히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것이 나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어려워요. 모든 주석, 해석은 그냥 엉터리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농사짓는 사람은 밭과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하고 대화를 하잖아요. 농사는 밭과 대화를 안 해요. 심심해서 “장미야, 예쁘구나. 고추야, 잘 열었구나.”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것이지 진짜 뭘 듣는 식으로 대화하지는 않아요. 일방적이에요. 

  

농사하면서 “잡초야, 너는 빠져줘.” 잡초에게 사전에 상의를 해서 양해를 구하고 잡초를 뽑지 않습니다. 농사짓는다는 것은 그냥 일방적으로 조치를 내리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는데 씨가 돌짝 밭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고, 혹은 옥토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뭐냐? 

  

주님이 농사는 밭 자체를 생산하는 거예요. 그런데 밭의 특징이 뭐냐? 입을 다물어요. 좀 상스럽게 해서 주둥이를 다물어, 그런 뜻이에요. 오늘 본문에 주님의 농사가 뭐냐? “주님이여, 저 이런 것을 원하고 기도합니다.” “그 입 다물라. 그것은 네가 하는 농사다.” 

  

강도가 지갑 뺏어서 돈만 챙기고 지갑은 다시 돌려주잖아요. 경상도 말로 “아나!”(여기 있어요, 라는 뜻) 하고 툭!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온 이유가 농사짓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농사를 짓는데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썩어빠진, 뭔가 잘못되고 고장 난 내용물이 들어 있어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강도가 지갑속의 돈만 챙기듯이 지갑은 돌려주듯이 알맹이는 빼내고 껍데기만 우리에게 던져주는 겁니다. 알맹이 없는 껍질이에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이기 때문에 내 나름의 목적이나 의도, 기대감, 희망, 이거 다 주님 앞에 강탈당하는 겁니다. 

  

그게 부자청년에게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주고 껍데기가 되어서, 빈털터리가 되어서, 빈지갑 되어서 나를 따를 용의가 되어 있나?”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부자청년에 있어서의 관심은 자기 동질성입니다. 안에 내용물이 꽉 차 있어요. 그 내용물이 사실은 오물이지요. 더러운 배설물 그것을 몽땅 드러내고 빈 껍질채로 나를 따를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네가 네 주인노릇을 그만하고 “나는 노예가 되어야 마땅하고 내 주인은 주님입니다.” 할 수 있는 용의가 되어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있는 이 잘못된 내용물은 하나님을 밀어내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강도만난 사람이고 우리가 강도 같아요. 예수님한테 와서 예수님에게서 필요한 것만 빼먹고, “이번 사업에 복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곱빼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빼먹고 아쉬울 때만 찾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을 빈 지갑으로 생각해서 안중에도 없이 만들어버려요. 

  

우리 평소의 행동은 어디에 바쁘냐 하면, 자기농사 짓는데 굉장히 바빠요. 자기농사를 요즘 말로 하면, 투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뭐하는가? 자기투자 한다고 세월 가는지 몰라요. 심지어 60, 70이 되어도 투자를 멈추지 않습니다. 펀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모든 몸짓과 모든 사고방식이 자기를 위한 투자입니다. 

  

슬슬 퇴직할 때가 되었고, 퇴직하고 난 뒤에 그 전과 수입이 얼추 비슷하게 가려면 그 다음에 어디에 투자해서 내가 날 살려낼 수 있느냐는 거기에 몰두를 하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두려움과 공포의 표상입니다.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돈에 울고 돈에 웃는다니까요. 

  

옛날에는 순진해서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하지만 지금은 사랑도 필요 없어요. 그저 돈이에요.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농사를 짓습니다.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그 돈 속에서 내 두려움을 해소시킨 그 내용증명을 돈이라는 방식으로 회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과장수가 사과를 파는데 “작은 사과 12개와 큰 사과 17개하고 합치면 얼마입니까?” 손님이 그렇게 물었다 칩시다. 주인은 속으로만 그렇게 하지요. ‘10개면 10개, 20개면 20개지 12개, 17개, 계산 복잡하게 뭐야?’ 하면서 “보자, 작은 것은 1개에 1500원, 큰 것은 1800원이니까……” 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거예요. 

  

처음부터 손님이 작은 것 10개, 큰 것 10개, 이렇게 20개 달라고 해서 값이 2만 5천 5백 원이었다면 5백 원은 떼 줍니다. 그런데 17개, 12개, 이렇게 달라고 하니까 무엇이 그 안에 포함되느냐 하면, 사과 값을 계산하는 그 소비되는 에너지를 값으로 집어넣어서 2만 5천 5백 원을 다 받습니다. 

  

인간이 돌려받는 그 값 속에는 내가 투자해서 손해보고 장사하는 법은 없다는 원리가 있어요. 손해를 보게 되면 내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자기투자에요. 자기농사라고요.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할 때 농부가 씨를 뿌릴쌔, 라는 말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들이 모두 각자 자기 나름대로 농사를 짓고 있고 자기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투자를 하고 있을 때, 인간들이 자기 농사를 지을 때 어떤 공을 들이고,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에너지를 집중시키면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이 고장 난 인간이에요. 

  

내가 노력하고 공들인 만큼 어떤 결과가 반드시 비례해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원인이 많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과정속에서 본인이 본인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된다는 말이지요. 창세기 3장에서 뱀에서 속아서 인간이 받은 심성이 뭐냐?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거예요. 

  

네가 네 주인이 되리라, 그 거예요. 주인이 되리라, 한 그 아담에서 새끼 쳐서 오늘날 우리가 나왔잖아요. 그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 오늘날 우리잖아요. 오늘날 우리는 아담을 닮은 거예요. 아담이 갖고 있는 그 심성을 빼다 박았어요. 똑같아요. 똑같은 dna를 갖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어떤 일을 행사해도 내가 주인 됨을 격상시키고 주인됨을 행사할 수 있고 남에게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질 하고 싶은 그것이 생의 목표고 목적이에요. 그리 되려면 인생농사 잘 지어야 되잖아요. 공들인 만큼 누수 없이 결과물을 얻어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때려버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예수님말씀대로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가지? 옳지. 마귀가 와서 씨앗을 채가지 않도록 설교시간에 졸지 않고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된다. 왜? 설교시간은 목사님이 말씀을 뿌리는 시간이고 그 시간에 졸음마귀가 와서 뿌리는 말씀을 가져가면 앞뒤 논리가 어떻게 되는지 놓쳐서 말씀이 날라가 버리면 나는 주님 앞에 원하는 열매를 드릴 수가 없으니 정신 바짝 차려서 말씀을 들어야 된다.” 

  

그게 다 인줄 알았더니 그 다음에, 씨앗을 뿌렸더니 처음에는 복음이 좋다고 기쁘게 찬미하다가 갑자기 가정에 우환이 오면서 하던 일이 꼬이게 되면, “교회 다녀도 별 이득이 없네. 이번에는 절로 바꿔볼까?” 하고 절로 가버린다는 거예요. 아니면 천주교로 바꿔볼까. 

  

열매가 없잖아, 라고 농부가 추궁할 때 열매 맺으라고 우리에게 미리 단단히 하라고 이렇게 하는구나, 해서 ‘그래, 환난이 왔을 때는 참아야 하느니라.’ 어려움이 오고 우환이 있더라도 감사헌금봉투에 “어제 제 아내가 암 진단이 나왔어요. 감사합니다.” 올리면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이정도로 괜찮은 믿음이니까 빨리 낫게 해달라고 우회적으로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거예요. 

  

1년간 못낸 십일조 미납된 것 다 한꺼번에 세금 내듯이 바치고. 그렇게 해서 “내가 이제 두 번째 허들, 단계도 통과했습니다.” 또 세 번째가 남아 있어요. 고난도 이겼는데 가시덤불이 와요. 그게 세상의 즐거움이에요. 

  

세상의 즐거움은 갑자기 졸부 되는 것, 갑자기 애가 성적이 오르고 만사가 형통할 때 ‘이제는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도 되겠다.’ 싶어서 전에는 주일 오전 오후예배 다 참석하고, 예배도 10시 50분까지는 꼬박꼬박 나왔는데 이젠 배가 부르니까 11시 15분에도 나오고 오후 예배도 떼먹고, “예, 예! 곧 갑니다. 가게문 막 열겁니다.” 예배시간에 뛰쳐나가서 가게문 열고, 수요예배도 집에서 인터넷으로 듣더니 어느새 ‘오늘 수요일인가?’ 다 잊어버리고 내 농사 잘 되니까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 없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자꾸 가봐야, 돈 내, 돈 내, 돈 내라는 소리밖에 안 들리니까 이제는 헌금이 아까워서도 교회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열매가 없어요. ‘아, 이때를 조심하라고 했구나.’ 그래서 잘될수록 더욱더 조심해서 잘 되게 해주셨으니까 봉사 더 열심히 하고, 그렇게 하면 그게 좋은 밭입니까? 

  

그게 자기 농사지 주님의 농사입니까? 주님의 농사는 반드시 그 농사의 열매마저, 하나님께서 거두고자 하는 그 곡물마저 모든 인간을 다 배제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께서는 발견하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요. “나는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하나님이 농부가 되어서 이루어진 그 농사는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농사도 안 받습니다. 어떤 인간의 기도를 안 받고, 헌금도 안 받고, 전도, 봉사, 일체 안 받습니다. 인간의 충성, 어떤 열심도 안 받아요. 왜? 인간은 애초에 상종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면 인간은 자꾸 말이 많아. “이거 해주시고, 또 지난번에 이거 했으면 이제는 30배는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자꾸 말이 많아요. “철야까지 했으니까 이번 일은 좀 이뤄줘야 내가 하나님 믿는 티가, 신앙 좋다는 티가 날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많은지. 

  

씨뿌리는 비유에서 제일 어려운 해석이 뭐냐? 밭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인간이 떠나간 자리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주님에게 왔다가 떠나버린 자리, 부자청년의 자리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그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남자고 여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고 안됐네.” 하고 멀찍이서 세 명의 마리아가 봤을 뿐, 사도요한도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근처에 십자가에 동참한 사람은 놀랍게도 살인강도나 그날 밤에 동참해서 낙원에 갔습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연극이 끝났어요. 연극이 끝난 후에 모든 관객들은 다 물에 휩쓸리듯 다 가버렸어요. 

  

모두 왔다가 예수님에게 실망한 자리, 그 자리가 주께서 농사하는 밭입니다. 그 밭에 자력으로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아무도 갈 수 없는, 그런 밭이 있었나 싶은 듣도 보도 못한 밭에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와서 드디어 그 밭에 섰습니다. 

  

왜 인간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밀어내고, 예수님을 밀쳐서 죽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제는 그 밭에 서서 고백을 합니다. 복음보다 돈을 더 좋아한 거예요. 돈을 좋아하는 것이 단지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 무섭고, 무섭고, 무서워서 돈을 좋아한 거예요. 인간은 뭔가 쫓기고 있습니다. 

  

그 쫓기는 것이 뭐냐? 귀신한테, 마귀한테 쫓긴 거예요. “너 그렇게 살면 굶어죽는다. 너 그렇게 살면 욕 얻어먹어 죽는다.” 이 세상에 죽음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굶어죽는 것, 신체가 늙어죽는 그 죽음이에요. 또 하나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인데 어려운 말로 상징적 죽음이라 합니다.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것.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면 자진해서 죽어요. 그들이 사는 세상에 내가 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을 보는 자기해석이 망가졌다는 것을 모르고 ‘저 세상에 내가 참여해야 되는데. 저 세상에서 내가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데.’ 이게 자기농사의 목적이 되니까, 그쪽에서 돈 없다고, 빚졌다고 밀어내니까, 그래서 그 사람과 안 놀아주니까. 

  

교회에 왔다가 가는 사람은 왜 그런지 알아요? 안 놀아주니까 알아서 간 거예요. 더러워서 안 온다, 하고 가버린 거예요. 안 놀아주니까. 그게 그 사회의 상징적 죽음이 되는 겁니다. 개그맨 하면서 반갑네요, 할 때는 좋았지요. 인기 없어지니 그만 나이 54살에 죽어버려요. 

  

내가 이 사회에,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안 받아주면 나는 죽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쫓기고 있는 입장이에요. 쫓기고 있는 입장이면서 나도 주인노릇 한다고 하니까 이게 내부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나도 한 다리 걸쳐야 되는데 돈은 없고, 돈 없이 쫓기니까 공포와 두려움이 있고, 그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겠지.’ 빡세게 기도하려고 교회 오는 거예요. 

  

똑같이 돈 밝히면서 오는 교회, 그 교회의 모든 특징은 뭐냐? 절대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묵계에요. 절대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은 돈 없이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돼요.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은 복음으로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은 돈 없으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를 대조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 이래서 천당 가는지. 흉내는 잘 내요. 흉내 내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44절에서 46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에 성령 받은 티를 이렇게 내니까 성령 받지도 못하고 돈 좋아하는 인간들이 자기가 괜찮은 천국 가는 교회 왔다는 티를 내려고 헌금 모은 것을 가지고 “우리 교회는 80퍼센트가 선교비로 나갑니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교회는 70퍼센트를 구제비로 합니다. 우리는 달마다 바자회 열어서 주변에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참된 교회입니다.” 이런 선전을 해서 헌금을 더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돈을 갹출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 6절을 우리는 평생 놓치면 안돼요. 사도행전 3장 6절은 “네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입니다. 이거 액자로 해야 돼요. 은과 금을 하나님이 안 주십니다. 나에게는 은과 금이 없으나 그 뒤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 복음이에요. 

  

망가진 이름을, 망가진 사람을, 그리고 돈 좋아하는 그 죄를, 자력으로 고칠 능력도 없고 마음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우리를 주께서 십자가 앞에 내세워서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밟아 죽이는 짓거리였습니다.” 하는 고백을 내뱉게 해서 이제는 그것을 끄집어내면 지갑속의 돈 끄집어낸 거예요. 

  

그동안 나의 동질성, 나의 성공, 나의 실패 없음, 나는 사람답다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그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잘남을 다 강탈해서 빈껍데기로 우리에게 던져버리는 거예요. 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너의 농사가 아니고, 너의 투자가 아니고 내 농사, 30배, 60배, 천국에서 원하는 열매, 온유와 화평이 든 지갑으로 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지은 농사가 아니고 주께서 버림받아야 될, 말씀 안 들어서 마귀에게 잡혀야 되고, 고난 받는다고 삐져서 교회 안 나와야 되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열매는커녕 세상과 같이 합세되어도 상관없는 우리를, 강도 같은 우리를, 세리 같은 우리를 주께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주셔서 그 주님의 농사의 작품이 뭐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열매 뭐 있어요? 우리 속에 주님의 열매밖에 없는데.

따라서 우리는 교회 와서 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①주무셔서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가도록 해야 되고,
②내가 조금만 수틀리면 교회 안 나오는 수가 있어, 라고 우리에게 돌멩이 잔뜩 있어서
 열매에는 근처도 안간, 조금만 건드려도 교회 안 나오고 하나님도 안 믿는다고 나올 그런 성질부리기,
③그 다음에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 없어도 나 돈 많다.”
 돈 많은 재미로 살아가는 속성을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음흉하게 감춘 리의 목적을 골적으로 장터에 퍼질러놓고 바자회를 여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살아온 욕심밖에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걸 내놓을 때 나의 두려움도 함께 우리 앞에 전시하는 거예요. 

나 이것 때문에 두렵고, 자식 공부 못할까 두렵고, 사업 실패할까 두렵고, 일찍 객사하거나 고독사 할까봐 두렵고, 

자식들이 날 안 찾아올까봐 두렵고, 사람들이 날 개무시 할까봐 두렵고, 

그 두려움을 내놓을 때 그것이 바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참된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은 다 내놨어요.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강도다. 내가 살인자요 포행자다.” 왜 우리는 그런 말을 못합니까? 두렵게 하는 요인을 꿍치고 있지 마시고 내놓으세요. 욕심 많은 기도하시고, 헌금해놓고 30배 얻기를 은근히 노리시고, 그것이 완전히 파괴될 때 오히려 감사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부자청년 욕할 때 우리가 부자청년이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열두제자가 우리라는 사실을 십자가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인간,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상대로 해서 주님의 자기농사에 성공하셨구나, 주님만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엉터리 인간가지고 천국 간다고 껍죽대던 우리, 뭐가 달라져야 되고, 뭐가 바뀌어야 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쫓기면서, 압박감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도 해답도 없고, 사는 목적도 모르는 우리,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 이런 허접스러운 우리를 주의 귀한 보혈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그 용서만 감사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지갑에 주님의 피만 고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