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44강-영의 싸음(고후10;1-4) 1707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16. 18:32
2017-07-16 12:47:07조회 : 38         
   영의 싸움 17071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영의 싸움(고린도후서 10: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6hgY0c3kjo, Hit:0

 이근호17-07-16 13:36 

영의 싸움 

2017년 7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0:1-4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0: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나서서 새삼스럽게 일을 벌린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소개한 복음을 통해서 볼 때, 애시당초 이 세상은 ‘저주의 마당’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실의 공개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이듯이 사도를 적대시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의 윤리/도덕적 관점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거꾸로 지적질합니다. 이는 곧 이들이 전혀 복음을 이해 못하고 있는 증거합니다. 사도는 강경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자기처럼 성령받은 자가 있다면 당연히 온화된 관계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도를 적대시하는 이 방식을 통해서 이 세상의 진실과 본질은 도리어 노골화됩니다. 즉 이 세상이 왜 원천적으로 저주받아 합당한가 라는 점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대하는 반응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보다 절망적인 것은 이 운명을 세상이 나서서 개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저주에서 벗어날 묘책과 방안들을 고려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거나 나름대로 반듯하게 살아서 그 알 수 없는 초월자로부터 지적을 받더라도 어느 정도 할 말을 하겠다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의하면, 바로 그런 아이디어나 시도가 곧 저주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8에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이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마당에서 이 세상에 그 어느 인간도 저주받지 않을 자격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소급 적용시켜보면 근방 드러날 사항입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름대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간다 할지라도 그 단란함을 유지한 채 단체로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저주성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 사건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사건을 끌고 들어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란 의외로 이 육의 세계에서 생생한 ‘육의 모습’으로 중계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창세기 3장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대지(大地)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이 이 대지로 내려가는 가족을 따로 이 지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의 이름이 ‘생명’입니다. 반면 아담의 이름은 ‘흙’입니다. ‘흙’이라는 죽음의 물질성과 ‘생명의 물질성’이 부부가 되어 이 지상에서 움직입니다. 이게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성격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을 이 실제적인 인간 세계에서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인간들이 우기는 ‘영의 세계’란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환상은, 본인을 잃지 않겠다는 집념의 소산입니다. 즉 본인 속에서 욕망이 춤추고 있고, 현 세상은 자신의 욕구에 충족되지 않으니 못내 아쉽고 슬프고 괴롭고 속상하고 우울하고, 불만스러고 서럽습니다. 

이러한 실제 환경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도 순화시켜 견딜만 한 것으로 전환해서 소유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인간을 통해 환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꿈의 공통점은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평소에, 꿈꾸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인양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만을 위한 역사와 스토리와 드라마를 형성해서 환상의 내용으로 채우게 됩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이 문제가 있다는 점은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나라의 존재가 우선시되는 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구성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주변 환경과 지나온 과거사를 통일하는 의식으로 미래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그 역사의 영속성을 끊고 쪼개버리고 그 안에 작용하고 있었던 저주성을 발췌해내십니다. 즉 이스라엘 내부를 장악하고 작용하는 그 괴물이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애초부터 ‘저주의 세계’임을 증명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망해버린 그 이스라엘의 속성이 오늘날 현대에서도 멈추지 않고 반복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기획하고 구상하는 것은 바로 ‘지옥 구상’입니다. 저주를 유발한 자기만의 세계를 설립하는 겁니다. 치과에서 임플란트가 할 수 있는 조건은 잇몸이 튼튼해야 하는 겁니다. 

이 튼튼한 잇몸에다 인공치아를 박아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잇몸이 이미 저주받은 상태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세상이 애초에 저주받은 세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매사가 이 땅을 잇몸으로 생각해서 자꾸만 뿌리를 깊숙이 내리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그 어떤 시도를 한다할지라도 이 세상이 뿜어내는 저주성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는 창조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멈추지 않는 관통하는 노선이 깔려 있습니다. 일종에 역사를 관통하는 짚라인입니다. 짚라인Zipline은 양 편의 나무 또는 지주대 사이로 튼튼한 와이어를 설치하고 탑승자와 연결된 트롤리(trolley, 일종의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어 빠른 속도로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이동하여 스릴과 함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야외레포츠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 역사의 방향에서 우리 인간은 라디오 진공관처럼 소리를 증폭시키는 앰프 역할하는 전극관과 같은 위상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자리에서 끊임없이 이 세상에 담고 있는 저주성을 소리쳐 바깥으로 발산하고 있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라인이 죽음을 짊어지고, 저주를 짊어지고 생생하고 세상에 나타난 저주의 짚라인입니다. 따라서 자기 위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나중에’ 죽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과(科)에 속한 자들입니다. 

교회란 머리의 존재와 더불어 같이 동반해서 등장되어 있습니다. 어물전에 문어에 머리만 사지는 않을 겁니다. 머리 있는 곳에 몸도 같이 있게 마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특정 장소나 시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5강-고후 10장 1-4절(영의 싸움)1707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0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95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0:1-4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사도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와 영생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일을 이 땅에서 하십니다.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결정한 것을 확인하는 일을 하지요. 사도바울이 전도를 한다는 것은 지옥 갈 사람까지 포용한다는 뜻은 아니고 본인이 누구를 대리하거든요. 

  

자기 배후에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계시고 주님이 부활했기에 사도가 사도가 된 겁니다. 본인이 사도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사도 만들어서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남들에게 눈에 보이는 형체로 되어 있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장에 있죠. 

  

사도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보기에 내가 눈에 보이는 똑같은 인간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나도 육체에 속하고 너희도 육체에 속해서 다 같이 눈에 보이는 육체로 형성된 사이기에 그런 현상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가 되지만 자기에게는 배후에 주님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영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영적인 세계로부터 사도바울이 똑같은 육체의 모습으로 나옴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그것을 분간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영의 사람이고 이 사람은 육의 사람이다, 할 재주는 없는데 성령이 임한 사람 같으면 우리 깐에, 당신은 우리하고 같은 과네, 라고 통하는 것이 있어요. 

  

그 통하는 것을 끄집어 낼 때 사도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사도 쪽에서 같은 과인지 아닌지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그 이야기를 뭐라고 하느냐, 두자로 복음이라고 해요. 복음 들어봤습니까? 사도가 복음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다른 편지, 갈라디아서 같은 편지를 보면, 이렇게 단단하게 조치를 해요. 

  

나라도, 우리라고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 네모 안이 뭐냐 하면, 저주, 그렇게 돼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이 세상은 본인들이 태어나서 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는 한 절대로 자기가 저주받을 자라는 인식을 절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진해서 저주받을 위인이 없거든요. 그저 행복이지요. 자기 몸 하나 편하면 되는 거예요. 몸 건강하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남 누리는 것 누리고, 그게 전부잖아요. 저주니 이런 분류 자체가 통하지 않지요. 인간끼리 평화롭게 질서잡고 잘 살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에 사도바울이 등장해버렸습니다. 뭘 몰고 왔느냐? □□다, 를 몰고 온 거예요. 이것은, 이렇게 하면 저주받는다, 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은 저주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이 벌어진 거예요. 뭔가 새롭게 시도해도 소용이 없어요. 포도농사 치우고 사과 심어볼까, 이래도 저주에요. 

  

무슨 시도, 나 이제 치킨집 거두고 정육점이나 해볼까, 이래도 저주에요. 애 낳았으니 직장 치우고 애나 키워야지, 그래도 저주입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어느 가정 네 식구가 단란하게 하하,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하게 단란하게 살면서 단란한 채로 다 같이 지옥 갑니다. 

  

너무 단란해요. 숟가락 서로 떠먹여 주면서 너무 단란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하하하, 웃고 그래요. 지금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은 말할 수도 없어요. 깨질 대로 다 깨졌어요. 천국가고 있습니다. 이미 저주에요. 대통령 바뀌어서 될 문제도 아니고 북한 핵문제 해결한다고 이 저주가 복으로 바뀔 문제가 아니에요. 

  

서울에서 어제 동성애축제 하는데 목사들이 동성애를 축복하는 기도를 해줬어요. 저쪽에서 어떤 목사는 동성애 반대하는 데모를 했거든요. 데모하나 반대하나 축제 벌리나 다 같이 저주입니다. 사도바울이 새삼스럽게 저주를 몰고 온 것이 아니고 이왕, 이미, 벌써 이 세상은 저주라는 박스 안에서 그냥 그 자체로 저주에요. 

  

교회 나와도 저주고 안 나와도 저주에요. 예수 믿어도 저주고 안 믿어도 그냥 저주에요.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저주받는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예수를 믿든지 어떤 행동을 해서 나 자신이 축복으로 전환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생각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저주받을 이 세상에서 나온 종교 아이디어에 불과합니다. 

  

내가 나에게 어떤 시도를 하게 되면 그 시도가 나에게 구원이라는 효과를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딱 저주에요. 그게 바로 복음이 아닌 겁니다. 보통 사도바울이 교회를 설립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설립자가 사도가 되는 법인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그렇게 하지 않아요.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전도여행 1, 2차, 3차를 통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설립자가 아니에요. 교회는 설립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되시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그 주님은 머리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머리가 있다는 말은 꼬리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시장에서 문어 머리, 혹은 오징어머리만 사지 않지요. 다리까지 온전한 완전체를 사잖아요. 머리가 있다는 말은 곧 다리가 있고 꼬리가 있고 몸체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사도는 그걸 확인했을 뿐입니다. 자기가 대한예수교 간판 세운 것이 아니에요. 설립자가 아니에요. 

  

세상을 눈으로 보니까 눈으로 확인되는 쪽으로 자꾸 조립을 하는 겁니다. 사도입장에서는 이런 겁니다. 인간들이 하루하루 자기 일에 열중하고 열심히 사는 것은 일종의 지옥에 대한 구상, 지옥에 대한 기획,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주변에 지옥을 더욱 더 지옥 되게 하고 저주를 더욱더 저주되게 하기 위한 구상을 벌리고 있는 겁니다. 

  

신학교를 나온 어떤 목사가 교회를 개척 하겠다 하면 그 자체가 지옥을 새롭게 구상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개차반같이 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모르게 되면 정말 설교 듣기 힘들어요.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멀쩡한데 지옥가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이게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 그 당시에 자기가 세웠다고 소문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자기가 세운 교회인데, 자기가 분명히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했는데 그렇게 세운 교회가 복음이 아니고 복음에 반대되는 기준을 가지고 도리어 사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공격의 내용이 오늘 본문 10장 1, 2, 3, 4절,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고린도후서 이 본문이 복음인줄 인정하지요. 그러면 이 복음 안이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봅시다. 복음 안에는 사도가 고난 받는 것이 필히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또 전하고 난 뒤나 전하기 전부터 수상한 이 세상으로부터 수상한 핍박을 이미 받을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도에게만 머물지 않고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같은 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동일하게 그 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주변의 친한 사람으로부터, 아는 일가친척, 식구로부터 수상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성경은, 그럴 줄 알고 주님께서는 로마서 8장에서, “하늘나라 가기 전에 많은 핍박을 받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장차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게임이 안 된다. 너무너무 월등하니 지금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 

  

복음 때문에 자동적으로 환난과 인내가 와야 아, 우리가 이곳에 살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 매일같이 우리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사도행전도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하늘나라 가기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받아야 된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뭘 달랑해서 천국 간다고 보지 않고 세트로 짜요. 

  

내가 복음을 아는 것과 주변의 어두운 세력과 하나의 세팅이 되어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어떤 수모를 당했는가를 그대로 상기시키고 재현해내는 환경으로 조성해 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글자로 번역하면 굉장히 어렵고 원래 원어로 봐도 어려운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교회가 흔히 그들이 말하는 설립자 사도바울에게 하는 말이, 사도바울은 우리한테 복음 전해놓고 왜 세속적으로 살아가느냐, 이렇게 비난한 거예요. 2절에 나옵니다. “또한 우리를”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사도바울과 함께 있는 같은 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굉장히 어렵지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받았는데 

복음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윤리도덕으로 받은 거예요. 

윤리와 도덕으로 받아놓으면 왜 이것이 복음에 위반되고 적그리스도로 되느냐? 

복음은 모든 운명의 결정이 예수님의 행함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런데 윤리도덕은 뭐냐?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그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 

어떻게 처신하냐에 따라서 지금보다 내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은 윤리도덕인 겁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고유 가치에 대해서 흠집이 안 나고 윤기가 나도록, 빛이 나도록 

나를 제 2의 나로 만드는데 사도가 전한 복음과 교훈이 퍽이나 도움 된다고 짐작하고 받아들인 겁니다

이것은 취미생활입니다. 

취미생활해서 모인 그 커뮤니티를 가지고 사교집단이라고 하는데 그걸 두자로 줄이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교집단이고 자기를 개선하고 취미생활하려고 모인 거예요. 그 취미생활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놓는 겁니다. ‘싫으면 안다니면 되고.’ 

  

교회 뒤에 “다닌다.” 혹은 “안 다닌다.”하는 서술어가 붙어요.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교회로 보는 겁니다. 집에 있다가 거기 다녀오면 교회를 다녀온 것이고 바빠서 못가면 그것은 교회를 안 다녀온 것, 그런 개념의 끄트머리에 교회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일종의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과 테크닉을 배우는 학원같이 보는 거예요. 

  

거기서 나를 개선시키는 기술을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배우고 그것을 나에게 장착해서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앞에 들이대는 일종의 보습학원, 그러면 서울대학 합격할 수 있듯이 나중에 천국에 합격할 수 있는 예상문제를 미리 알아놓고 풀면 나중에 합격해서, 이 땅에서도 잘살았지만 거기 가서도 영원히 잘 산다는 겁니다. 

  

그게 전형적인 악마의 소리에요. 악마의 주장이고 저주스러운 발상이 그런 거예요. 왜?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노라고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거부당한 분이기 때문에. 윤리와 복음의 그 틈에 십자가가 있어요.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겁니다. 

  

산상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함,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너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차원에서 해석해야 되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차원에서, 그 연장선에서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그 연장선과 같은 레벨에 있는 거예요. 

  

야, 이 말씀대로 하면 내가 빛과 소금이 되고 그러면 나를 보고 사람들이 ‘착하다.’ 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나는 성도 맞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말씀들이 아니라니까요. 산상설교의 그 박스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말씀이요. 모든 것을 뒤집어야 돼요. 

  

흔히 교회 목사들이 설교할 때 이렇게 하지요. 전에는 성도 아니었다가 이제 교회 와서 등록하고 성도가 되었다면 세례 받고 성만찬 참석하고 떡과 포도주를 먹었으면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 된다. 어떤 인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회적으로 지탄을 안 받는다고요? 사회가 어떤 사회인데요? 예수님을 죽여 버린 사회에요. 예수님을 죽여 버린 사회로부터 지탄을 안 받는다? 그게 늘 이 땅에 잠복되어 있다가 간만에 듣는 악마가 우리 발목 잡는 이야기입니다. 충남 서산시 어디에 가면 거기에 있는 전설의 고향. 옛날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새사람 되었으니까 남에게 지탄받지 않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전설이……. 

  

그게 바로 악마에서 나온 이야기고 거기에 대해서 수긍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 자신이 육체로 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자신을 정상인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호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를 알아?”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관원은 백성의 대표자니까 백성도 마찬가지에요. 백성이나 관원이나 아무도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해석하지 못한 결과가 뭐냐?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는 일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논리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서 시작이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어떤 인간도 예수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복음은 □□다. 저주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을 죽이기 때문에 저주가 아니라 죽이기 전부터 이미 저주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그 저주성이 저주성으로 확인되고 발현된 것뿐이에요. 

  

따라서 십자가는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2017년도, 이 7월에도 매일같이 십자가는 우리 삶속에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가 아파 치과에 가서 어금니를 뽑았어요. 전에 그래서 제가 발치이야기를 했잖아요. 의사가 두 가지를 제안하는데 하나는 틀니를 하세요. 벌써 틀니 할 나이가 된 모양이에요. 

  

나머지 한쪽마저 고장나거든 틀니를 하라는 것. 그 다음에 임플란트를 해야 되는데 저는 임플란트가 안된답니다. 왜냐하면 잇몸이 약해서 임플란트의 나사를 붙잡아 맬 수가 없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알게 된 것은, 잇몸이 튼튼할 때라야 임플란트의 뿌리를 심을 수가 있는데 지금 이 세상이 저주잖아요. 

  

저주니까 결국 저주에 뿌리박고 살겠다는 20대의 백수청년들, 삶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스펙 쌓는 그 인간들, 20대뿐만 아니고 30대, 40대도 마찬가지죠, 뭔가 뿌리를 깊이 박으면 자기의 평생이 피고 행복이 보장된다는 그것, 그 근간이 되는 뿌리, 임플란트 몽땅 다 이게 □□다, 저주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뭐냐? 뿌리박기에요. 든든한 나의 존재의 자리를 견고히 하고 그것을 증강시키는데 보탬이 되는 행동만 인간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날마다 저주스러운 일을 막 뿜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이 교회 왔다. 교회에서 목사가 빛과 소금이 되라고 자기도 못 지키는 것을 막 남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다 성경을 적용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뿌리를 더 박기 위함이에요. 저주의 뿌리를 박기 위해서, 더욱더 저주스러운 존재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돈좀 벌다 보니 실수를 했는데 그게 교회에 소문이 나고 지탄을 받았다. 그러면 그 커뮤니티, 그 공동체에서, 딴 교회 가지 뭐. 

  

내 뿌리박는데 보탬이 안 된다면 언제든지 다른 교회, 아니 다른 학원, 클럽에 가는 거예요. 골프클럽처럼 다른 친목단체로 옮기면 되는 거예요. 나이 많으면 힘없다고 교회 안 나오고, 그러면 돼요. 복음은 우리를 해부하고 깨는 겁니다. 네 안에 마귀 있다. 이게 복음입니다. 너는 어떤 경우에도 발목 잡혀서 너 자신의 행복으로부터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 믿고, 성경공부하고 백날 해도 발목이 잡혀있으니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교회 한 번 가려고 하면, “엄마, 어디 가는데? 오늘 숙제 있는데 함께 해줘.” “그래?” 뭔가 내 뿌리가 나를 붙잡고 있다고요. 그쪽에서 안 놔주면 내가 빠져나올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면 천당 가는 사람 아무도 없겠네요. 복음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겠네요. 왜 꼭 있어야 됩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본인이 꼭 구원받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닌데 왜 본인만이 구원받아야 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이게 바로 저주스러운 세상에서 평생을 살다보니 그곳의 사고방식에 푹 물들었어요. 

  

윤리도덕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버릇, 그 못된 관행적인 습관을 교회 와서 그대로 합니다. “목사님,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공부하고, 십일조 하게 되면 복 받습니까? 내 쪽에서 어떤 행동을 새롭게 개시하게 되면 그 결과 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라고 한다면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본인이 개시하는 것은 말짱 소용없습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어요.” 

  

이미 일은 벌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걸 틀 수 없어요.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행동으로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육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 마세요. 자기육신의 욕심을 그렇게 우습게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이성을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깨우침이 뭐냐? 칸트라는 사람은 그걸 연구했어요. 

  

인간의 이성이 뭘 알 수 있느냐? 그걸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무리 해도 다룰 수 없는 것이 욕망이에요. 욕망이 뭐냐? 어떻게 하면 욕망을 자제해서 선하게 살 수 있느냐?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걸 해도 정작 인간의 진짜 깊은 본심은 따져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뭔가 끌리듯이 사는데 그 끌리는 것이 뭐냐? 

  

아름다움에 끌리더라. 맹목적으로 산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것으로 <판단력비판>이라는 세 번째 책을 냈습니다. 아름다움은 맹목적인데 아름다움은 어떤 형상, 어떤 실체와 결부지어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미학, 그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아름다움에 뿅 가는 겁니다. 

  

소위 남자나 여자나 인물값 한다 안합니까? 복음 아는 사람하고 결혼할래, 인물 좋은 사람과 결론할래? 인물. 물어보나마나 묻는 내가 잘못이지요. 그런데 칸트가 마지막에 뭘 발견했는가? 아름다움 뒤편에 불쾌함이 있었어요. 불쾌함이 나에게 말 못할 희열을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숭고의 미라고 해서 나와요. 

  

모든 철학은 칸트에서 나왔다 할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인간이 연구하면 할수록 당최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모를 수밖에요. 칸트는 이스라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 예수님은 말씀에 따라서 말씀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이지요. 

  

그 말씀,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구약이 있었습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가 있어요. 현재 살아있는 내가 지나온 모든 과거의 체험들을 재편집해서 역사라는 것을 구성합니다. 역사는 재구성되는 것이고 주인공의 의미를 위해서 재구성되는 것이 역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역사와 다른 역사의 차이점은 

이스라엘 자신이 마땅히 이 땅에 뿌리박고 살만하다고 

우기기 위해서 자신의 조상대에 있었던 하나님과 결부를 시켰는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사건을 가지고 쪼개버려요. 

쪼개버리면 쪼개고 쪼개서 숨기고 싶은 죄악들을 움켜 내는 그것이 새로운 사건으로 그 시대에 복음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런 쪼갬이 있어요. 그 쪼개진 물컹한 내장을 끄집어내보니까 겉의 번지르르함, 이런 것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이 땅에 뿌리 깊게 놓이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연출을 벌인 환상이지요. 환상이라는 것은 이 끓어오르는 삶의 괴로움을 순화시키고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낮의 환상이 밤에 잠 잘 때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을 한글자로 꿈이라고 합니다. 꿈의 특징은 공통점이 있어요. 모든 꿈의 특징은 본인이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주인공으로 여겼는데 거기에 선지자가 등장해서 그 역사를 쪼개버립니다. 이것은 7월 30일부터 하는 수련회를 미리 앞당겨서 하는 셈인데 지금 제가 홍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를 쪼개버리면 역사라는 이름에 묻혀 있었던 진짜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이 세상이 저주받아야 되는 합당한 내용물이 물컹하게 동반해서 이동했던 겁니다. 어디로 이동하는가? 장차오실 마지막 때까지 이동하는 겁니다. 

  

에디슨이 전구 만든 것을 여러분이 상식으로 아시지요. 거기에 나타난 물리적 이론이 에디슨효과라는 겁니다. 두 극 사이에 필라멘트가 있는데 필라멘트보다 전이가 높게 되면 전기는 한쪽방향으로 흐른다는 거예요. 전기는 한쪽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 에디슨효과입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전기가 한쪽방향으로 흐른다는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의 그 진리가 하는 것은 오직 한쪽 방향으로, 창조로부터 마지막까지 한쪽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그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됨을 포기하시고 저 낮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여름에 휴가지에서 집 라인 타는 것 있잖아요. 그거 타고 아, 하고 내려가잖아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중력에 의해서 그냥 내려오듯이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인들은 토사물에 쓸리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 저주받는 곳으로. 

  

그래서 일은 벌어진 거예요. 어차피 저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는 꼴아 박아야 돼요. 우리의 모든 것은 처박아야 되는 겁니다. 집 라인 타고 내려올 때 그 라인이 뭐냐?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 언약의 완성을 새 언약이라 하고 다른 말로는 십자가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내부에 물컹한 내장으로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고난의 이름으로 들어 있는 이유가 그 내려오는 언약을 둘러치는 바깥 환경은 이미 악마가 쥐고 있었어요. 악마는 인간을 가지고 “너는 행복할 수 있다. 너만은 안정될 수가 있어. 너의 미래는 펼 수 있어. 너의 미래는 잘 될 거야. 지금 살아 있듯이 더 계속해서 살 수 있어.” 이걸 계속해서 세뇌시킨 거예요. 

  

교회든 절이든 성당이든 관계없어요. 다 그렇게 했고 거기에 납득이 되기에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될 수 있습니까? 착해야 돼요. 착하려면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겁니다. 가정이 잘 되고 저주 안 받고. ‘아, 내가 성도인 것을 어떻게 알지? 사회적으로 지탄 안 받으면서 불신자보다 더 못하다는 소리 안 듣는 것이 신자 됨이라, 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전혀 그 자리에 임플란트 해서 꽉 박고 있는 겁니다. 

  

전혀 성도 아닙니다. 마귀의 앞잡이에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거꾸로 되어야 돼요.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이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로 뭉치면 이겁니다.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겁니다. 누가? 내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모든 악마가 보낸 구더기는 나에게 다 달려옵니다. 

  

“이거 먹고 네가 더 살아야지. 들깨 넣고 미역국 끓여먹으면 더 살 수 있어.” 온갖 요령을 다 부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이미 일이 벌어졌어요. 이미 판은 깔아놨습니다. 그 판 깔아놓으면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어릴 때 라디오 뒤를 뜯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진공관이 꽂혀 있어요. 그걸 전극관이라 합니다. 에디슨 효과에서 전류가 흐르게 되면 전류가 진공 속에서 흐릅니다. 그런데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다가 그의 제자가 뭘 발견했어요. 전류가 필라멘트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고 금속으로도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금속은 직류가 돼요. 교류에서 직류가 되면 전류가 소리가 돼요. 그래서 라디오가 만들어진 겁니다. 라디오가 만들어지려면 소리를 증폭해야 돼요. 그게 진공관이에요. 제가 지금 라디오 구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박아놓고 거기에 마귀를 보태서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소리를 앰프로 증폭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평범한 삶이 되는 거예요. 교회오기도 그렇고. 우리 몸에서 발산되는 악마의 소리를 계속해서 증폭시키는 겁니다. 부산의 이상봉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 취미가 두 가지에요. 하나는 클래식 음악 듣고 클래식 기타 치는 것, 또 하나는 오디오시스템 모으는 것이 취미였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 음이나 그 음이나 다 같은 음 아닌가 하고. 음이 다 다르다는 거예요. 아주 세밀한 낮은 음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앰프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대변하는 앰프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어줄 때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아, 우리 이스라엘만큼은 택하신 민족이니 우리만큼은 천국 간다.’ 앰프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망하게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는 이 땅에 살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영이라 하면, 교회 오면 영이고 그 바깥을 육이라 생각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영이라 하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에요. 영이라 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실제적입니다. 

  

랄라라, 이것이 영이 아니에요. 그냥 평범하게 사는 그것보다 더 생생한 영이 없어요. 영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이, 죄짓고 난 뒤에 남자는 이름이 흙이고 여자의 이름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당하고 남자에게 구박당하고 지배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벌을 주었습니다. 영이라 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서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는 그것이 영이에요. 생명이라는 것이 여자의 운명처럼 주어졌으니까요. 원래 그들이 쫓겨날 때는 생명나무 못 따먹고 쫓겨났는데 못 따먹은 생명나무를 지상에서 따먹게 해주겠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개입인 겁니다. 

  

영을 하늘에서 찾지 마세요. 지상에서, 하나님이 저주가운데서 어떻게 영생을 주는가, 그 방식과 그 과정을 봐야 돼요. 그 프로세스에서 두 실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남자고 하나는 여자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자로 하여금 남자에게 구박을 받고 서러움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짝을 맞춰줬어요. 

  

맞춰주니까 남자가 돛대같이 총 대장인지 알고 거들먹거리고 허풍을 떠는 거지요. 남자가 술 먹는 이유가 허풍떨기 위한 거예요. 얼마나 못났으면 기 안 죽으려고 다른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 술을 먹느냐는 말이지요. 술을 먹는 것이 아니고 처먹는 것이지요. 가장이라고 큰 소리치고 말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여자는 그렇게 약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이름이 생명인가? 이 땅의 생명은 원래 그런 거예요. 한쪽은 죽음에, 한쪽은 삶에 그 경계선 상에 여자가 존재하는 겁니다. 여자는 약하기에 똑똑하고 남자는 강하기 때문에 어리버리 병신이에요. 바보병신!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영입니다. 영을 기도원에서 찾지 마세요. 본인에서 찾아보세요. 내가 남자처럼 되려고 합니까? 아니면 구박받는 여자 되려고 합니까? 서러움 받는 여자 되려고 합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하는 식으로 허풍과 허세가 여러분의 인생의 모범답안 이십니까? 

  

저주에는 모법답안 없습니다. 등이 서늘해야 돼요. 저주의 바람으로 서늘해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어요. 꼭 여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그 모습을 통해서 죽어서 나중에 죽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음이 우리 한가운데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사회지탄 안 받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주님한테 지탄받아 마땅함을 나의 남은 삶을 통해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주님으로부터 지탄받을 만한 짓거리가 나오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살면 되는 겁니다. 쓸데없이 남에게 비난 받을 필요 없어요. 비난 하든 말든 관계없어요.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주님 앞에서 섰을 때 내 모습이 어떤가를 미리 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겁니다. 말씀 앞에 서 보세요. 뭔가 다 지켰다 했지만 나중에 보면 여분이 것이 남아 있어요. 아직도 모자라요. 

  

내가 다 지키고자 하는 그 의도가 나와요. 이것을 다 지킴으로서 내가 이정도 되었으니 저도 괜찮은 성도라고 쳐주세요, 라고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고 괜찮은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는 이것이 악마적인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겁니다. 

  

정작 우리가 겁내야 할 것은 사회적인 지탄이 아닙니다. 주님의 지탄을 받았으면 진짜 겁낼 것 다 받았으면 이제는 매 맞아도 웃으면서 맞는 거지요. 이 땅에 사는 것이 형벌입니다. 조금 더 괜찮은 형벌 없어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쓰레기 중에서 깨끗한 쓰레기는 없습니다. 

  

쓰레기장에서 그중 하나의 쓰레기지 괜찮은 쓰레기, 쓸만한 쓰레기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몰고 왔습니다. 복음은 □□다.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따라서 네 눈에 우리가 세속화로 보이는가. 주님도 그런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네가 그래가지고 인간 안 된다.” 우리 인간 안 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인간 되는 것이 더 위험해요. 그게 더 수상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런 사도바울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주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강경하게 나옵니다. 이걸 담대히 대하려 함이라. 좋게 이야기한다고 그 사람이 개과천선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게 이야기하나 강경하게 이야기하나 구원될 사람,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은 사도바울과 같은 과로 느껴요. 딱 내 과네. 자기 자신이 항상 이스라엘의 연장선에 있다면 이스라엘처럼 주님께서 내부를 쪼개고 깨주기를 원해야 되지요. 

  

옛날에 도배할 때 밀가루 풀을 끓입니다.
풀을 끓여서 놔두면 위에 두꺼운 층이 생깁니다. 그걸 막대기로 저어 보세요.
그러면 북극의 빙판처럼 그 층이 갈라지겠지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매순간 갈라지게 합니다.
갈라지게 되면 매 순간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가 그 순간 쪼그라져서 없어져요. 


순간순간 내가 없어지고 주님의 휘젓는 막대기를 증거 하는 용도로 막대기에 붙어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머리되시는 주님이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면서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교회 되라, 가 아니라 교회 되라는 그 몫은 주님이 매일같이 여러분을 교회되게 할 거예요. 


조금 믿음 좋다, 은혜 받았다 하면 다시 밀가루 풀 되어서 딱딱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오후 되어서 막대기 가지고 휘휘 저어버리면 나라는 자체가 다 끊어질 겁니다.
그러면 내 자랑, 내 계획, 내가 잘되기 위한 어떤 공모, 이런 것들이 다 물에 없어지지요.
그러면 그것과 함께 뭐도 없어지느냐? 


내 걱정과 염려라는 것도 다 쓸데없는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환상이란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견디려고 이것저것 쓰레기를 모아서,
“하나님, 저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고 뭔가 구성을 하는데 그 구성은 지옥구성에 불과합니다. 

그 지옥구성을 주께서 “네가 따로 계획하지 마.” 하고 휘저어버리지요. 

그럴 때 “수고하고 무서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다 휘저어 주리라. 다 조각조각 내주리라.” 

우리는 이미 주의 것으로 살아갑니까, 라고 본문에서 사도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은 이미 벌어졌고 주의 일은 지속되고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는 확인이 되고 같은 과에 속하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고 그 가운데 주님께서 홀로 죽으신 십자가가 놓여 있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그 효과,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집라인 타고 내달리는 그 스릴을 맛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